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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문화연구 총요 본문
문화연구는 인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 중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연구란 문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문화를 인문학적 잣대를 가지고 품평하는 연구활동들을 말한다. 문화연구에는 문학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무수한 철학 이론들도 영향을 끼쳐왔고 역사학적 탐구도 문화연구에 일정부분 기여해왔다. 과학전쟁으로 충돌을 빚은 세력이나 신좌파의 옹호자로서 대중에게 새로운 억압을 제공하는 이들도 바로 문화연구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인문학자들이 문화를 어떻게 연구했고 무엇을 낳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대 인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서는 문화를 정치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특히 대개가 신좌파인 문화연구자들은 문화가 사회의 권력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사람들의 표상과 정체성이 의미화 실천(signifying practice)되는 장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문화를 조작하여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는 이들의 시도(문화정치, cultural politics)로 이어진다. 문화정치를 통해 문화연구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주체적'인 태도로 문화를 향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태도란 실상 신좌파 사상에 부합하는 문화활동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자주적인 태도도 이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온갖 권력에 조종당하는 수동적인 태도로 매도당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많은 연구들은 주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객관적 근거는 부족하다. 때문에 독자들은 이 분야의 지식들을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분야의 주요 서적은 <대중문화의 이해(김창남,2판,한울,2018)>가 있다.
주요 이론들
https://tsi18708.tistory.com/235
인문학에는 문화를 분석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알튀세르까지 다양한 문화 이론이 존재하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과 매우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문화 이론들은 모두 철학 이론인 동시에 문학 이론이며, 인문학의 가장 주된 관점들 중 하나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
https://tsi18708.tistory.com/236
한국은 옛날부터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가꾸어 왔지만, 현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화는 광복과 함께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에 노출되었고, 6-70년대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국내의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한국의 대중문화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1.문화의 정의
문화는 가장 중요한 인문학적 테마 중 하나이다. 김창남은 많은 문화가 자연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자연화(naturalization)란 실제로는 자연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현상으로 여겨지는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가령 남성다움이 무엇인지는 시대와 지역마다 다양한 정의가 있었지만, 현대인들은 마치 분홍색을 멀리하고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남성다움의 증표라고 믿는다. 김창남은 이러한 자연화를 경계하고 문화적 사고를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문화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다. 그 뜻은 사용하는 맥락과 사용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같은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그것이 문화인류학에서 통하는 의미와 고전학에서 통하는 의미는 다르다. 인문학에서 문화를 정의하는 관점은 대표적으로 4가지가 있다.
뛰어남으로서의 문화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매슈 아놀드는 문화를 위대하고 심오한 것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모은게 문화라는게 그의 입장이었다. 이처럼 문화를 고등한 정신적 완성으로 보는 시각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발견되고 현재까지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문화는 물질적인 것에 대비되는 정신적인 개념이고, 문학이나 미술, 음악과 같은 분과를 통해 정신적 완성을 추구한다는 열망이 담겨있다. 이 관점에서 볼때 뛰어난 예술작품, 수준 높은 교양 등이 대표적인 문화이고, 가장 뛰어난 것을 판별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문화의 주된 기반이다.
근대화가 진행되고 대중문화와 물질주의가 득세하자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근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문화의 개념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문화를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정신적 광채로 묘사하며, 현대문명과 약간 분리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의 관점은 현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데, 고전에 대한 옹호, 신성시나 대중문화에 대한 순수예술계의 거부가 이러한 관점의 영향이다. 비판자들은 뛰어난 교양과 정신적 완성으로서의 문화 개념이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양분하고 전자가 후자를 이끄는 것을 합리화하여 엘리트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매슈 아놀드(Mathew Arnold)
매슈 아놀드(1822-1888)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비평가이다. 아놀드는 그의 저서를 통해 문화를 '위대하고 심오한 문학,미술,음악 등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정신적 완성의 추구'로 정의하였다. 즉 아놀드는 문화가 문학이나 미술,음악 등을 매개로 하여 정신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앎과 실천이 같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으며 그의 교양론은 영국 문화비평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그를 인문주의 전통의 대표자로 인식한다.
사회진화론적 관점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회학 이론으로, 사회진화론의 지지자들은 문화가 일직선적으로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측면은 역시 단일한 이상적 상태를 정의하고 문화를 그곳에 도달하는 것으로 정의한 위의 뛰어남으로서의 문화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사회진화론적인 문화 개념은 제국주의 활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그 흔적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문화연구자들은 문명에 야만을 대치시키는 것이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사회진화론의 관점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예술 및 정신적 산물로서의 문화
이 관점은 가장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문화 개념이자, 역사학에서도 사용되는 문화 개념이다. 이 관점에서 문화란 특정 사회의 예술, 종교, 교육, 언론에서 행해지는 활동들을 말한다. 이는 정치경제와 같은 물질적인 것과는 구별되며, 문화는 '순수'한 것으로 여겨져서 물질문명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관념은 역시 매슈 아놀드에서 이어진 뛰어남으로서의 문화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김창남은 이것이 문화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아래의 문화관을 옹호한다.
상징체계/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이 관점은 학술적으로 가장 통용되는 문화 개념으로, 사회학이나 인류학, 문화심리학에서 사용하는 문화 개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문화란 사람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사용하는 상징체계로, 해당 개인들이 속한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반영한다. 가령 한국어의 존댓말 문화는, 한국사회에 뿌리깊은 권위주의적 문화 전통을 반영한다. 상징체계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연구자로 하여금 문화상대주의를 가정하게 만들며, 또한 연구자들이 윤리 영역에서도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게 만드는 불상사를 초래한다.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문화
언어와 상징은 상호작용을 돕는 매개체이고 커뮤니케이션학자들은 이것들을 통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고자 한다. 언어나 상징처럼 사람과 사람 중간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를 미디어(media)라 하고,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문화는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어느 사회에서나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만 그 모습은 다르다. 프랑스 농촌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통해 구두로 커뮤니케이션하지만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은 인터넷 공간 상에서 한글을 통해 한국어로 커뮤니케이션한다. 이렇듯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모습은 해당 지역이나 역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모습의 틀을 짓고 윤곽을 설정하는게 문화의 역할이다.
문화 담론의 역사
인류가 발생한 초창기에 문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초보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문화의 여러 요소가 모두 어떤 신성한 기원을 가진다고 믿었으며, 다른 부족의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원시부족에 대한 엘리아데의 연구에서도 그러한 신성한 기원에 기초한 설명을 자주 볼 수 있다. 비슷하게 다른 부족도 어떤 신성한 기원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으며, 대개 신의 사자나 괴물(주로 이쪽이었다)로 여겨졌고, 대부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신성한 기원에서 온 외부 부족은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냥 외부인이 된다. 그리고 외부인에 대한 시선도 경멸로 바뀌었다. 타민족을 오랑캐로 치부하는 중화 사상은 은나라때부터 싹이 보였으며 이때도 몇몇 부족을 오랑캐 취급하는 서술이 보인다. 이러한 논리는 노예제와 노예사회 구축의 기반이 되었지만 문명이 커지고 국가간 교역이 증대되면서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때 사람들이 받아들인 논리는 '다윈발생론'으로, 외부인이 우리와 다른 태생의 사람이라는 관점이다. 과거 유대인은 자신을 신에게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나머지를 저주받은 후손으로 묘사하여 외부인과 자신들의 뿌리를 차별화하였다. 그러나 유대교가 기독교에게 밀려났듯이 다윈발생론도 '타락설'에 밀려나는데, 타락설은 외부인이 모종의 이유로 타락하여 자신들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어떤 민족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장유유서가 없다는 이유로 오랑캐로 치부했던 중국, 조선이 타락설을 잘 보여준다.
서양은 좀 더 합리적이었는데, 이들은 타락한 다른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선교사를 보냈으며, 선교사 파송은 타락한 다른 민족의 개화라는 명분으로 보내진 군인과 잘 어우러졌다. 서양의 타락설은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사회진화론이라는 다른 주장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사회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가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개조하여 만든 가설로 정작 다윈은 매우 싫어했다. 사회진화론은 모든 문화가 진화하고 있는데, 우월한 문화는 살아남고 열등한 문화는 멸종한다고 주장했다.(이 이상한 이분법이 다윈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주장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했고 유럽중심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엘리트주의적 문화비평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의 발전이 사회진화론에도 기여했지만 과학은 직접적으로 문화상대주의의 탄생을 야기했다. 문화상대주의는 문화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가 연구방법론으로 주장한 것으로, 보아스는 각 문화가 고유한 역사가 축적된 결과라는 역사적 특수주의를 주장하며 모든 문화를 고유한 전통을 지닌 동등한 존재로 보자고 주장했다. 문화인류학이 성공을 거두면서 문화상대주의도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 속도는 반문화 운동때 가속화되었다. 비록 문화상대주의는 그 특유의 모순으로 인해 윤리학에서는 배제되고 있지만, 문화상대주의는 현재 인문학의 주요 문화담론이 되었다. 2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대중, 즉 다수의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를 말한다. 과거에는 mass culture(대량문화)라 불렀으나, 이것이 비하적이라는 인문학자들의 비판이 있고 나서 보다 중립적인 popular cultur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mass culture는 생산의 관점에 치중하고 근대적인 현상으로 간주되는 반면, popular culture는 대중의 수용에 보다 초점을 맞추면서 전근대 시대의 민중문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느 인문학에서나 그렇듯이, 대중문화를 정의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특히 정의하는 작업 자체를 붙잡고 딴지를 늘어놓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사용하는 학자에 따라 고급문화, 민속문화, 대량문화, 지배문화, 노동계급 문화 등 다양한 문화의 상대적 개념으로 여겨져 왔으며, 고급문화의 대비로서의 대중문화는 일반인들이 주로 받아들이고 80년대 운동권에서는 주로 민속/민중문화의 반대로서 대중문화를 정의했다.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대중문화는 대체로 부정적인 느낌을 가져왔다.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를 3가지 층위로 나누어서 연구한다. 이는 이들이 텍스트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과정이기도 한데,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만들어진 텍스트, 텍스트가 수용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자본과 정치권력, 대중의 취향 등이 여기에 영향을 끼치며, 어떠한 대중문화 컨텐츠의 성공/실패와 윤리적 논란 등은 모두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문화연구자들은 주장한다. 최근까지는 주로 텍스트의 생산과정과 텍스트 자체에 주로 관심이 기울여졌지만, 최근에는 텍스트를 대중이 수용하는 방식에도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는 매스미디어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영화나 방송이 주로 이러한 매스미디어에 속한다. 물론 대중문화는 매스미디어 그 이상이긴 하지만, 20세기에 영화와 방송이 가져왔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현대 대중문화에서 매스미디어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다. 매스미디어는 몇가지 주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매스미디어는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일군의 조직에서 대량생산된다. 조직은 분업화된 관료 조직이고, 생산된 컨텐츠들은 상품으로 유통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소비된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매스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르며, 문화연구자들은 매스미디어가 근대화로 인해 고립된 개인들을 더욱더 원자화하여 그들을 고립시키고 기득권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세기의 많은 가족들이 TV 앞에서 모였는데, 과연 이것이 고립인지는 의문이다.
한편 대중문화는 일상생활과도 동일시된다. 대중문화적 실천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며, 일상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상성은 대중문화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며, 사회적 영향에 의해 변하기 쉬우나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든다. 서양에서는 대중문화의 이러한 무의식적 측면을 분석하기 위해 웃기게도 정신분석학을 사용하고 있으며, 덕분에 오늘도 쓰레기만 양산되고 있다.
대중문화도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다. 단일한 대중문화는 존재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대중문화가 병존한다. 한쪽에서는 SOD같은 과학유튜버가 과학만능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을 설파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스피카 스튜디오가 저질 음모론을 양산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 같은 인터넷인데도 문재인을 보는 트위터의 관점과 야갤의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은 주로 세대와 계급,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후자는 세계화와 함께 확산되는 글로벌 문화와 지역의 전통문화간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2.대중문화의 정치경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지금은 그닥 주류적인 위치가 아니지만, 그들이 주장한 대중문화의 자본주의적 구조는 아직 많은 대중문화 연구자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대중문화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따라 생산되며, 또한 정치권력의 하수인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탄환 이론).
경제적 구조
현대 대중문화의 특징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민중문화는 민중이 생산해서 민중이 소비했지만, 현대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유통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대중문화 역시 경제학적 법칙에 따라 유통된다. 하지만 문화연구자들은 문화컨텐츠가 소비자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품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향을 미쳐 사회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대중문화가 정치/경제 권력에 지배당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문화연구자들은 자본가들이 대중문화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대중문화의 목적은 이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컨텐츠는 대량으로 생산되어야 하며, 또한 되도록 많은 소비자들이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변동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문화 컨텐츠는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면서, 보수적인 방식으로 생산되는 특징이 있다. 가령 한국 방송사에서는 TV방송을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만들라는 암묵의 룰이 있는데, 이는 그 정도일때 가장 소비자가 늘어나서 시청률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보수성으로 인해, 대중문화 컨텐츠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의 성공을 모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의 대부분의 노래들이 사랑이나 이별만 반복하는 이유는 그런 노래가 가장 잘 팔리기 때문이다. 아침드라마에서 삼각관계와 신데렐라,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신파 등이 밥먹듯이 등장하는 이유도 주요 드라마 소비층에게 그것이 가장 잘 먹혔기 때문이다. 90년대 말 조폭영화가 한국 영화를 점령한 사례나, 일본에서 잘 팔린 라노벨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도 문화 생산자들이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이 대중문화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대중문화의 경제적 구조이다.
스타
스타 시스템(스타덤, stardom)은 대중문화 컨텐츠를 안정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인물인 스타는 그 스타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이 스타가 출현하는 문화컨텐츠를 안정적으로 소비하게 만들어 수익을 안정화한다. 그래서 문화산업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스타를 생산하고 미디어 이벤트(영화제 등)를 통해 이를 강화한다. 그러나 하나의 스타는 시간이 지나면 수익성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스타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생산되며 신인 스타들은 자신의 차별성과 개성을 강조하면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
비록 스타와 유사한 개념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문화연구자가 관심을 가지는 스타는 1910년대 할리우드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연구에서는 스타 시스템의 구성요소를 스타의 외형, 극중 성격, 제작된 사생활, 지속적인 미디어 노출, 팬클럽으로 본다. 먼저 외형의 경우, 여성은 성적 매력이 넘치는 미인이고 남성은 반항적인 터프가이여야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문화연구자는 주장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스타 제조에는 화장, 보디빌딩, 성형수술 등 다양한 기술이 동원된다. 문화연구자는 존 웨인을 대표적인 남성 스타로, 마릴린 먼로를 대표적인 여성 스타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기안84나 김민경은 어떻게 되는지는 차지하더라도, 이 기준이 신좌파의 영향력이 강해진 1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도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만들어지는 사생활도 문화연구자들이 꼽은 스타 시스템의 특징이다. 실제 초창기 할리우드에서 배우는 영화에 출연할 때 사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 포함된 계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가령 버스터 키튼은 실생활에서는 대중 앞에서 절대 웃으면 안된다는 계약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돌이나 연예인은 자신의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생활에 여러 제한이 가해지고, 이러한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강화된다. 이는 일본 아이돌과 버튜버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한데, 반면 한국 버튜버는 조작된 사생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버튜버가 더욱 선호된다.
스타는 과거에 주로 TV를 통해 만들어졌으며, 기획사와 프로그램 제작사가 스타를 제조한다. 가령 아이돌의 경우, 기획사는 시장조사와 경험을 통해 스타를 만들 기획안을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인원을 모은 후 훈련시켜 아이돌을 육성한다. 그리고 곡과 댄스를 개발한 후 아이돌과 결합하여 미디어에 송출한다. 아이돌 곡은 시장주기가 빠르기 때문에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아이돌의 지속적인 신곡과 활동이 필요한데, 문화연구자들은 그래서 아이돌도 금방 나타났다고 해체되어 버려지는 상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상 HOT의 수명은 문화연구의 사상적 흐름만큼이나 길다.
문화연구자는 스타의 기능으로 소비자의 욕구충족을 들었다. 스타는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소비자가 동경하는 대상이 되고, 동일시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충족한다. 여기서 문화연구자는 스타의 그러한 모습이 허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개 신좌파인 문화연구자는 자본주의의 본질이 없던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스타는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의 충실한 하수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타를 '보여지는 객체'로 소비자를 '보는 주체'로 규정한 후 소비자가 스타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고 주장한다.
스타 본인에게 있어 스타는 힘든 일이다. 연예시장이 막 열렸던 2000년대 한국이나 지금의 일본처럼 스타가 되고자 하는 경쟁이 심하고 연예시장의 역사가 짧은 경우 스타가 기획사보다 큰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다. 이는 노예계약과 성상납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비록 지금은 대형 스타를 중심으로 불공정관행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연예업계는 한정된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기획사는 물론 선배 스타나 방송국의 갑질에도 제대로 된 대응이 힘들다.
한편 서정남은 대중이 다음의 과정을 통해 할리우드 스타를 좋아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3
- 특정 스타에게 약한 호감을 가진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연기하는 인물을 관찰하며 감정적으로 친밀해진다.
- 영화에 몰입하면서 스타가 연기하는 인물과 심리적 동일화를 경험한다.
- 영화속 인물에 대한 정보에, 가십지나 매체들을 통해 스타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페르소나를 구성한다.
- 스타의 페르소나에 자신의 욕구와 염원을 투사한다. 그러면서 스타를 더 좋아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와 자신간에 정서적 교감이 있다고 느끼며 정서적 만족을 얻는다.
정치적 영향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대중문화가 자본주의 구조를 종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를 홍보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들은 현재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에 이롭기 때문에 대중문화가 현재의 정치질서를 존속시키는 장치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시각에서 문화와 관련된 각종 제도나 위원회들이 바로 현재 체제를 존속시키는 장치들이며, 이들 위원회의 위원들 중 많은 이들이 대중문화 연구자들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자폭을 하고 있다.
정치가 대중문화를 통제하는 대표적인 장치로는 검열이 제기된다. 이 검열은 독재국가에서 행해지는 검열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모든 나라에서 검열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검열의 주체와 방식, 수준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선진국은 민간이 주체가 되어 검열이 이뤄지는 나라이며, 후진국은 단지 검열 주체가 국가일 뿐이다. 이외에 후진국일수록 검열이 엄격하고 허용되는 문화적 표현이 좁다는 특징도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대중문화가 현실도피(escapism)와 마취(narcotization)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서 지배 체제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도 대중문화는 사회 특유의 여러 가치관(자본주의, 가부장제)이 은연중에 반영되어 해당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대중문화의 현실도피와 마취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세를 막아내는 거점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이 난해해보이는 논쟁은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방안도 사람도 없기 때문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사실 실질적으로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수용자의 역할
과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이 단순히 주어진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문화중독자, cultural dope)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화주의자들은 대중문화의 소비는 주체적인 소비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경제 권력의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번외로 최근의 사회적 경향은,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흩트려 놓아 이 구조 자체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문화컨텐츠는 초대형 플랫폼에 계정을 둔 무수한 수의 소규모 생산자들의 의해 생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유튜버이면서 동시에 다른 유튜브 구독자이기도 한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다.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이들을 포스트모던 문화라고 명명하면서도, 이것이 자신들이 주장한 정치경제적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편 문화주의자들은 일찍이 대중이 주체적인 해독자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스튜어트 홀과 데이비드 몰리(David Morley)는 대중이 주어진 텍스트를 구별하는 3가지 방식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지배적-헤게모니적 해독(dominant-hegemonic reading)과 교섭적 해독, 대립적 해독이 그것이다. 지배적-헤게모니적 해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말했듯이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호적 해독(preferred reading)이고, 대립적 해독(oppositional reading)은 지배층의 헤게모니에 반발하여 텍스트의 메시지도 반대하는 해독이다. 그리고 교섭적 해독(negotiated reading)은 텍스트를 받아들이되 자신의 경우에서는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이러한 이론을 통해 스튜어트 홀과 몰리는 대중이 문화컨텐츠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수용한다고 주장했다.
미셸 드 세르토와 존 피스크는 수용자가 어떻게 지배적 헤게모니에 저항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틀을 정립한 학자들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드 세르토(Michelle de Certeau)는 수용자가 문화컨텐츠를 일상에서 녹여내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임대주택의 인테리어를 주인 몰래 변형한다던가, 직장에서 몰래 주식을 보는 것이 지배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존 피스크(John Fiske)는 비슷하게 문화컨텐츠를 소비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저항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기호학적 저항(semiotic resista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과연 이것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저항의 역할을 하는지는 미지수이다.
팬클럽
팬클럽은 대중이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문화연구자는 팬클럽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문화를 향유한다고 찬양한다. 그리고 비슷하게 강한 정보욕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도 문화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대중문화 소비자이다. 이들이 대중문화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더 커지고 있고, 이에 대한 문화연구자의 관심도 높다.
특히 문화연구자는 집단으로 모인 팬이 가지는 정체성과 현상 일체인 팬덤(fandom)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팬덤은 문화연구에서 하위문화 현상으로 간주되며, 이들은 그 증거로 엘리트주의적인 예술(가령 클래식)에서는 팬덤이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과거나 지금이나 특정 지휘자나 작곡가에 몰리는 팬층은 존재하기 때문에 이는 다소 사실과 다른 믿음이다. 따라서 팬덤에 비판적인 사람은 엘리트주의자라는 문화연구의 공격도 사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팬클럽은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생겨날 수 있으며, 국내에는 80년대 중반에 영미권의 팝가수나 조용필을 대상으로 팬클럽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20대로 구성되었고 정기적으로 모여 음악을 감상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동호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부터 CD나 뮤비를 주로 소비하는 10대를 중심으로 팬클럽이 나타났고, 90년대부터 문화시장이 성장하면서 팬클럽의 수도 폭증하였다. 90년대에는 주로 청소년과 청년이 주로 팬클럽을 조직하였고, 특히 여중생과 여고생이 이러한 팬클럽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나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팬클럽을 조직하면서 인구학적 구성은 다양해졌다.
팬클럽이 하는 활동은 다양하다. 과거처럼 정보 교환도 일어나고, 스타가 출연하는 방송에 참여하거나 스타의 특별한 날(가령 생일)에 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팬클럽이 수행한다. 회지를 발간하는 경우도 있으며, 연예인 팬클럽의 경우 스타의 스케줄에 맞추어 현장에 참여하고 인기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당 연예인의 음반을 사재기하는 경우도 있다. 스타와 관련된 굿즈 생산 및 판매도 주된 팬클럽의 활동 중 하나이다.
문화연구자는 팬클럽의 형성 배경을 청소년에서 찾았다. 팬클럽 연구가 이루어지던 90년대에 팬클럽 형성의 주축은 청소년이었다.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가 억압적인 학교환경에서 탈피하기 위한 청소년의 놀이터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청소년은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들 중에는 문화적 우월감을 목표로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청소년은 스타의 굿즈를 통해 서로 모여 사회정체성을 형성한 결과가 팬클럽이라고 문화연구자들은 믿었다.
팬클럽 형성 초창기인 90년대의 문화연구자들에게 팬클럽은 10대 여성의 하위문화였다. 이러한 팬클럽의 규모는 소속사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지만, 스타 시스템의 맥락에서 문화연구자들은 어느 규모이건 팬클럽 또한 스타를 제조하고 홍보하는 스타 시스템의 일부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팬클럽의 중심이 문화연구자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팬클럽을 반자본주의적인 정체성 형성의 장이라고 찬양하는 시각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당대 문화연구자에게 팬클럽이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결합이며,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마니아 담론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자들은 마니아(매니)도 능동적인 대중문화의 소비자라며 좋아했다. 문화연구자들은 마니아를 '특정한 문화 텍스트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상당히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 수준의 수용자'로 이해했다. 이러한 마니아는 대중적인 장르(특히 스타 시스템)보다는 대중적이지 않은 하위문화에 많다고 믿어졌다. 문화연구자들은 '오타쿠'와 마니아를 구분했는데, 이는 이들이 오타쿠를 특정 문화에 대한 집착으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멸시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자들에게 마니아는 대중문화의 다양화를 의미했고, 주체적인 의지와 시각으로 문화를 수용하는 적극적인 수용자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리고 다양과 주체는 문화연구자들이 좋아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니아도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김홍대는 프로그레시브 록 덕후를 대상으로 다양한 질적 연구를 수행한 후, 이들이 문화산업의 틀을 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홍대가 관찰한 덕후들은 자신의 하위문화를 확산하고, 부트렉(bootleg)과 같은 생산물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모습은 김홍대에게 다양성을 키워 시장에 맞서고 주체적인 수용자가 되려는 모습이라고 해석되었다. 김창남 4은 심지어 마니아를 '문화적 민주화의 산물'로 추앙하기도 하였다. 5
그러나 실제 오타쿠는 이들이 상상하는 마니아와 달랐고, 이 점이 문화연구자들을 실망시켰다. 문화연구자들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오타쿠의 모습에 실망했고, 그들이 지엽적인 정보로 우쭐해대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문화연구자들은 이것을 잘못된 마니아상으로 규정하고 올바른 마니아의 모습과 대비시켰다.
3.뉴미디어 담론
미디어는 인간이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여 전달하는 수단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왔으며 미디어 기술이 당대 사회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문화연구자들은 이러한 미디어가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어떤 상황에서, 왜 만들어지는지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현재 사회를 이해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는 새로이 등장한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에 주로 집중하고 있다.
뉴미디어란 정보처리 기계인 컴퓨터와 정보전달 네트워크인 통신 기술의 결합 및 응용에 기반하는 미디어를 말한다. 뉴미디어는 모두 정보를 0과 1로 처리하는 디지털 기술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소리와 영상, 문자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서 뉴미디어는 여러 매체를 동시에 사용하는 멀티미디어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여러 멀티미디어도 하나의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는 유비쿼터스도 도래하고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보의 홍수로 정말 수많은 정보가 유입되면서 소비자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조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니코동이나 유튜브, 커뮤니티 사이트 등 소비자가 직접 컨텐츠에 참여하거나 컨텐츠를 생산하는 경우(프로슈머, prosumer)도 많아졌다. 6
이러한 현상을 문화연구자들은 포스트모던 텍스트로 해석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텍스트(컨텐츠)가 완성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며, 수용자의 해석과 행동에 따라 변화되고 확장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연구자는 소비자의 컨텐츠 참여나 2차창작 등을 이러한 텍스트의 변조로 해석한다. 리믹스(remix)나 하이퍼 드라마(hyper-drama)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연구자들이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뉴미디어에서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권력이 비슷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뉴미디어 생산자의 경우 유통망이 글로벌화되고 멀티화되었다고 여겨진다. 같은 컨텐츠를 여러 미디어를 통해 소비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one source multi-use, 원소스 멀티유스) 문화산업의 생산자는 물리적인 형태를 가진 특정 제품보다 그 제품에 들어있는 컨텐츠를 판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동시에 세계화의 영향으로 각국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문화시장 또한 넓어졌고, 그놈의 문화적 정체성 타령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모바일과 인터넷
정보사회에 들어 인터넷과 휴대폰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문화연구자들은 인터넷과 휴대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인식은 대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적으로 보는 꼰대 행동의 전형이었다. 가령 김창남은 휴대폰이 우리 삶에 준 가장 큰 영향이 빨리빨리 문화의 강화라고 주장하였다. 언제 어디서든 통화할 수 있으니 재촉이 쉬워줬다는, 정말 병신같은 추론에 의해서였다.
문화연구자들은 휴대폰이 커뮤니케이션의 확대, 특히 친교적 커뮤니케이션(phatic communication)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보았다. 이들은 휴대폰을 통해 현 세대의 인간관계가 질에서 넓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휴대폰을 통한 소통은 주로 문자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의사소통은 정서와 의도를 전달하는데 면대면 소통보다 한계가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이모티콘과 문법 파괴가 그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는 휴대폰 카메라의 보급에서도 드러난다. 휴대폰이 일상화되면서 이제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 일이건 촬영이 가능해졌고,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유튜브나 인스타에 올라온다. 문화연구자들은 이것을 몰래카메라와 사생활 침해의 결과로서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문자를 통한 소통이 메시지의 복기를 통해 친밀함을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과연 온라인 의사소통이 오프라인 의사소통만큼 풍요로운 커뮤니케이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국내 문화연구자의 블로그 연구는 주로 싸이월드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이들은 블로그가 개인중심의 미디어이며, 주로 인간관계의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소비자의 생산자화의 좋은 예시로 긍정했지만, 동시에 개인정보 노출과 사생활 침해, 저작권 침해 등을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로 지목하였다.
블로그보다 수용자의 생산자화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유튜브이다. 문화연구자들은 유튜브가 UCC(User Created Contents)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영상 컨텐츠에 관심을 가져왔다. UCC 시절 문화연구자들은 늘 그래왔듯이 대단한 낙관을 부여했는데, 이들은 UCC를 통해 미디어 권력을 뒤엎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튜브로 인한 극단화와 렉카, 유언비어 문제는 이제 일상이 되었지만, 이들이 생각한 단점이라고는 악플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UCC 시절부터 정보의 유통이 문자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을 이전부터 예측하는데 성공했다.
문화연구자들은 인터넷의 보급으로 일과 여가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이들이 인터넷을 여가가 이뤄지는 사적 공간에서 공적인 일이 가능한 장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보사회에서 창의성과 상상력을 중시한다는 점도 이들이 이렇게 예측한 이유였지만, 이들의 주장은 정보사회가 도래한 2024년에도 아직 오지 않았다. 한편 문화연구자들은 늙은이 특유의 꼰대질을 발휘하여, 히키코모리와 오타쿠가 정보사회의 산물이고 인터넷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를 두고 인터넷 탓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주변사람을 돌아보는데 시간을 썼더라면 히키코모리 발생건수가 반은 줄었을 것이다.
4.정보사회 담론
정보사회가 도래하기 시작한 90년대부터 문화연구자도 정보사회에 관심을 가져왔다. 당시에 그들은 '정보화사회'를 해석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끼워맞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화연구자는 민간과 재계에서 만들어진 정보사회 담론이 기술결정론적이고 대중을 소외했으며 자본과 정부가 독점했다고 공격하고, 진정한 대중의 정보화를 내세우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권좌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2009년 촛불시위가 정보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이들은 IMF가 한국의 산업화가 뿌리부터 문제였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진단하고, 촛불시위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였다. 비록 디워 광풍이나 황우석 사태도 정보사회의 면면이라고 이들은 해석하였지만, 동시에 이것이 대중의 새로운 힘과 주체성을 보여준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들이 정보사회에 희망을 가졌던 이유는 인터넷이 양방향 매체라는 점도 있었다. 이들이 비관과 공격으로 점철된 미디어 담론을 발전시켰던 20세기의 미디어는 대부분 화자와 수용자가 정해져 있었다. 반면 인터넷은 수용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더 용이하다. 때문에 비관적인 미디어 담론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랬던 문화연구자들은 인터넷에 비현실적인 기대를 걸었다. 비록 가능성일 뿐이라고 조심하는 학자도 일부 있었으나, 많은 문화연구자는 인터넷이 기득권에서 벗어난 하위문화를 양산하고 세상을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망상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좌파 아니랄까봐 비판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이들은 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발생할 정보격차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정보격차 해소와 자본의 폭주를 막기 위해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시민단체의 확대와 국제연대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인터넷 이용자 개개인이 항상 말하는 '주체성'을 확립해야 정보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기한 것은 민간 세력의 부흥과 국제적 연대, 이를 통해 기득권에 반하는 주체성의 확산은, 대안우파의 경우에 놀랍도록 부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안우파는 문화연구자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정작 대안우파는 기득권의 화신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촛불시위 담론
때마침 정보화와 함께 도래한 2009 촛불시위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명박의 한미FTA에 반대한 사람들은 기존의 한국시위와 달리 촛불을 든 평화시위를 통해 이에 반대하였다. 문화연구자들은 촛불시위의 참여자 중에 일반인, 특히 10대의 비중이 많아진 것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문화적 '주체성'의 단서로 보았다. 그리고 시위대가 사용한 디지털 기기는 정보사회의 단서로, 시위 중 벌어진 노래나 공연은 신좌파에서 좋아하는 '유쾌하고 발칙한 저항'의 예시로 보여져 이들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문화연구자를 포함하는 2000년대 한국 지식인들은 촛불시위를 집단지성의 발로라고 믿었다. 마치 위키피디아가 그러하듯이 시민들이 모여 집단적인 지혜가 발생했고, 이것이 기득권을 무너트렸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었다. 비록 황우석 사태나 디워 광풍처럼 시민들이 모여서 멍청한 짓을 벌이는 사례도 많았지만, 지식인들은 촛불시위가 집단지성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촛불시위가 끝나고 1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촛불시위를 예시로 가져온다.
5.대중문화 각론
스포츠
문화연구자에게 스포츠는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자본주의의 축제이다. 스포츠는 TV의 자극성을 더 강화하고, 막대한 광고 수입을 올리며 자본가들에게 봉사한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볼거리가 많은 종목은 살아남고 볼거리가 없는 종목은 도태된다. 이러한 모습을 문화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싫어하나, 2000년대 초반에는 이러한 태도가 약간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이들이 사랑하는 월드컵 정신이 바로 이 스포츠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스포츠를 즐기는가? 문화연구자들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경쟁이 스포츠가 재미있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스포츠는 격렬한 신체활동을 통해 서로 경쟁하는 게임이다. 이러한 스포츠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억압된 육체가 해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 욕망이 해소된다고 문화연구자들은 주장한다. 더 나아가 문화연구자들은 스포츠가 카니발과 마찬가지로 가상적이고 대리적인 체험을 통해 욕망을 해소하는 축제라고 주장한다.
두번째 요소인 경쟁도 스포츠의 중요한 요소라고 문화연구자들은 생각한다. 이들은 동시에 이 경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스포츠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스포츠는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은 선수들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린다. 이 승패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반영한다. 하지만 능력의 배분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문화연구자에게 스포츠의 경쟁은 자본주의의 경쟁과 마찬가지로 공정하지 못하다. 문화연구자들은 스포츠가 실제로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공정하다고 포장함으로서,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으나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스포츠는 자본주의 안에서도 미디어산업의 이벤트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스포츠의 발달에서 TV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TV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깊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문화연구자들은 TV가 1)이미지의 변화와 시야 확대가 가능하고, 2)하이라이트를 통해 장기간의 경기를 요약하여 보여주며, 3)정지화면이나 슬로우 모션 등을 통해 경기를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4)클로즈업을 통해 특정 측면을 부각하면서, 5)부가정보를 화면을 통해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은 문화연구자들이 스포츠를 공격하는 핵심 지점이다. 스포츠가 상업화되면서 스포츠가 광고의 수단이 되었고, 경기장과 유니폼까지 광고로 도배되게 되었다. 광고 효과를 얻은 기업과 시청률과 광고비를 받은 방송사,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결합하면서 상업화된 스포츠 시스템은 지속되고, 광고를 촉진하기 위해 치어리더처럼 스포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여러 행사가 중간에 추가되었다. 여기에 문화연구자들은 스포츠가 상업화되면서 잘생긴 선수가 더 주목받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현대스포츠를 '왜곡'되었다고 규정하였다.
결과적으로 문화연구자들은 스포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좋은' '진정한' 스포츠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현대스포츠는 정치와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것이고, 진정한 스포츠란 관객이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여 스스로 참여하는 스포츠이다. 즉 동네 조기축구회는 진정한 스포츠고 월드컵은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다. 이는 '주체성'에 대한 문화연구자들의 강박을 반영한다.
스포츠와 정치
문화연구자들은 스포츠가 사회정체성을 재생산하는 행사라고 본다. 그리고 이 과정을 스포츠 스타가 매개한다. 스포츠 스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타가 대표하는 팀과, 팀이 속한 자신의 국가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자의 많은 주장이 두루뭉실하거나 실제 과학적 사실에 반하지만, 이 주장은 실제 검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스포츠 문화의 왜곡이라는 주장은, '진정한'이 들어간 이전의 모든 주장에 비추어 볼때 그냥 '나 이거 싫어'의 수사적 표현에 불과해 보인다.
사회정체성의 측면을 떼놓고 봐도 스포츠는 정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쪽 진영 국가만 참가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었고, 올림픽의 시작부터가 건장한 프랑스 군인을 길러내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20세기 중반 미중은 서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탁구를 사용했고, 지금도 정치적인 이유로 스포츠 행사에 불참을 선언하는 국가가 더러 있다. 전두환도 국내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추진한 적이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훌리건도 정치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훌리건은 스포츠 현상이 맞지만, 이들은 훌리건의 폭력이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포장한다. 대중의 폭력적인 에너지가 스포츠를 통해 해소되면서 나타난 것이 훌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떤 감정이 '해소'되면 사라진다는 오래된 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오래된 주장은 실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과 육체
문화연구자들은 한국인의 이중적인 성 담론에 비판적이다. 성문제에 엄격한 여느 사회가 그렇듯이, 한국도 성에 대해 아주 엄격하면서도 뒤로는 유흥산업이 한계까지 치달아 있다. 창작물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면서도 동시에 룸살롱이 거리를 매우고 있고 인터넷에선 조건만남 광고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담론이 금욕주의 가치관을 통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향락을 통해 이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군사정권의 잔재라고 주장한다.
문화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 그들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사정권과 그 추종자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독재를 사랑하는 이들이 운동권이고, 문화연구자들은 그 운동권의 적자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도그마에 따라 애먼 헬스케어 산업까지 끌어와 성문화로 규정한 다음에 지금 사회가 성문화가 범람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것이 성에 대한 억압이 사라지면서 표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들은 역시 인문학적 도그마에 따라 표출되는 성 에너지를 건전하게 해소하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비판했던 가위질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반복한다.
성문화와 반드시 관련이 있지는 않지만, 헬스케어 산업과 패션 산업도 한국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는 외모지상주의의 강화와 동반되는 부작용의 증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급증하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문화연구자들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공격한다. 이들은 외모지상주의의 원인이 남성중심적 사회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동시에 남성도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남자보단 여자가 피해받는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한다.
이러한 시각은 몸매 만들기가 새로운 착취라는 논리로 확장된다. 문화연구자들은 과거에는 직접적인 억압을 통해 여성을 억압했지만, 지금은 교묘한 세뇌를 통해 여성을 착취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성적 해방과 동일시하고, 그러한 몸을 원하는 것을 남성의 착취라고 규정한 다음, 헬스케어 산업이 남성의 여성착취를 자연적인 것으로 위장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여성이 스스로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그는 '주체적'이지 않으며 단지 수동적인 남성의 욕구 표출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폄훼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일견 타당한 점이 있지만, 그놈의 '주체' 타령과 '착취' 드립이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의문이다.
미인대회는 마치 이들의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이 보인다. 때문에 문화연구자는 육체담론에서 여성착취의 '증거'로서 미인대회를 인용하고, 미인대회가 언제 열리는지도 모르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우려먹는다. 문화연구자들은 미인대회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육체산업의 돈벌이에 불과하며, 마침내 모든 여성이 인간이 아닌 성적 구경거리로 전락할 것이라고 선동한다. 그리고 미인대회에 참여하려는 여성이 늘고있다고 개탄하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는 제발 올해애 미인대회(이름도 모르겠다. 미스코리아 맞지?)를 언제 하는지 알려나 주고 말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시각에서 야동은 그냥 악이다. 특히 페미니스트에게 야동은 여성을 착취하고 성적 대상화하며 타자로 만들고 모든 남자가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증거이자 아무튼 다 나쁜 것이다. 실제로 포르노가 성범죄를 늘린다는 증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반대파를 여혐으로 규정하며 개소리를 그치지 않고 있다. 이와 비교해볼때 포르노를 옹호하는 김창남의 관점은 다소 신기할 수 있지만, 그도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포르노가 이중적인 성 담론과 낫다는 의미에서 포르노를 옹호한 것이지 포르노를 긍정적으로 보거나 용인한 것은 아니다. 7 전반적으로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체 담론에서도 문화연구자의 해석은 이데올로기에 너무나도 경도되어 있다. 8
놀이 담론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는 인간이 놀이를 만들고 즐기는 특성을 이르는 표현이다. 문화연구에서는 놀이를 비노동 혹은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다른 한국 좌파와 달리 노동이 신성하다는 주장을 배격하고 놀이의 존재를 옹호한다. 원시시대에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놀면서 보냈고, 고대에 노동은 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노동이 신성시된것은 근대화를 거치며 청교도적 윤리가 자본주의를 타고 곳곳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자들은 여기에 노동가치설을 붙이면서 노동은 단지 착취의 수단이라고 공격하고, 그 반대인 놀이를 옹호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놀이를 여러 유형으로 나눈다. 사회학자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는 놀이를 아곤과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로 나눈다. 아곤(agon)이란 축구와 같이 경쟁을 통한 놀이를 의미하고, 알레아(alea)는 주사위처럼 우연을 발판삼아 진행되는 놀이를 말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역할놀이처럼 다른 인격을 가장하여 흉내내는 놀이를 말하고, 일링크스(illinx)는 놀이기구처럼 극한의 스트레스를 일으켜 즐기는 놀이를 의미한다.
국내 문화연구자들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지금은 베짱이의 시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지금이 베짱이의 시대라는 표현은 실상 이들을 통해 유통된 것이다. 문화연구자는 고용불안정으로 인해 개미가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고, 이제 행복하려면 베짱이처럼 놀아야 한다고 웅변한다. 스타의 존재에는 그렇게 비판적이지만, 그 스타의 이름에 '베짱이'가 붙으면 좋아한다.
문화사회론자들은 여기서 놀이의 양극화도 걱정한다. 이들이 보기에 미래사회는 기술의 발달과 인구증가로 인해 실업이 만성화된다. 그렇다고 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자니, 이들이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스타만이 살아남는 경쟁적인 문화환경을 조장한다. 이러한 놀이의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 문화사회론자들은 주장하나, 구좌파가 늘 그렇듯 보통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숨겨진 답이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놀이가 이뤄지는 인프라로서 축제를 중시한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축제는 중세유럽의 카니발(carnival, 사육제)을 이상으로 두고 있다. 사순절 이전에 위치한 카니발은 신분적인 질서가 약해지고 온갖 일탈이 허용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카니발에 비추어 볼때 한국의 축제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보다는 산업박람회에 가깝다고 문화연구자들은 생각한다. 이는 그들이 한국의 축제를 공격하는 이유가 된다.
놀이의 역사
인류학자들은 놀이가 어떠한 목적을 기원하는 의례에서 출발했다고 보고한다. 놀이는 일상적인 모습을 신성화하여 신성한 행위로 재현하는 일종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 문화연구자들은 문학적 해석을 덧붙여 일상의 낮설게하기가 놀이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김창남은 '놀다'가 생산을 의미하는 '낳다'가 '놓다'를 거쳐 변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9
이러한 놀이가 근대로 오면서 놀이 주체의 변화와 상업화가 일어났다고 문화연구자들은 주장한다. 산업사회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하는 와중에 일정한 휴식시간을 가지는데, 문화연구자들은 이것을 놀이를 제공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휴식이 노동생산성에 기여한다는 점에 더해, 현대의 여가가 자본주의적 서비스를 통해 이뤄지는 점을 들며 자본주의가 놀이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이 놀이에서 소외되었다고 표현한다.
주체를 좋아하는 문화연구자들답게 현대의 놀이는 주체가 상실되었다고 문화연구자들은 비관한다. 이들은 과거의 놀이가 주로 체험형 놀이였다면 현대의 여가는 구경과 소비라며 둘을 구분한다. 많은 현대인이 스포츠나 게임 등 다양한 참여형 여가를 즐기지만, 문화연구자들은 TV가 여가의 전부이던 20세기 초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구경과 소비가 현대 놀이의 전부인 양 단정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자신의 망상이 아니라 '노동중심사회'라고 규정된 현대사회로 돌린다.
그러고는 정보시대에는 다시 주체적인 놀이가 돌아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취미가 거의 사멸한 한국을 제외하면 그러한 단절은 없었건만, 문화연구자들은 21세기 이후 한국에서 참여형 놀이가 증가하는 것을 정보시대의 필연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정보사회 사람들의 주체적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며, 놀이가 그 자체로 중요한 영역으로 변한 결과라고 문화연구자들은 낙관한다.
잘 노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김창남은 좋은 놀이의 기준으로 6가지의 기준을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놀이는 자유로워야 한다. 놀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시작되고 끝나야 하며, 의무가 되었거나 중독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놀이는 탈일상 또는 탈노동적이어야 한다. 놀이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문화사회론자인 김창남이 보기에 노동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는 탈위계적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서로 평등하게 놀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10
또한 놀이는 비생산적이어야 한다. 이는 놀이를 하면서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놀이는 창조성, 역동성, 변화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김창남은 놀이가 아무튼 무언가를 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이고, 공장노동처럼 루틴이 없으니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놀이는 정신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창남은 인간의 쾌락을 육체적 본능인 주이상스(jouissance)와 정신적 쾌락인 플레지르(plaisir)로 나누고, 플레지르는 주이상스와 달리 특정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해야 즐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이상스는 쾌락의 역설에 취약하기 때문에 플레지르를 더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김창남은 인터넷에 매우 긍정적이다. 인터넷은 아주 간단한 조작을 통해 들어갔다고 나올 수 있고, 쌍방향적이며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화연구자들의 입맛에 부합한다. 그래서 김창남은 앞으로의 놀이가 인간의 창조적 에너지와 인터넷의 이점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드라큘라 담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20세기에 들어 타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표현한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주디스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에 따르면 <드라큘라>는 인간의 대척점으로 나타난 드라큘라에게 비주체적인 특성을 부여하고(negative, 음화), 비틀리고 비정상적이며 괴물같은 모습을 부여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담론적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할버스탐은 드라큘라가 주체가 아닌 타자이기 때문에, 유색인종이나 하류층 계급, 여성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드라큘라는 당대 주류사회에 대한 위협의 상징이며, 괴물성(monstrosity)이 늘 그렇듯이 당대 사회에 위협이 되었던 비주류 세력의 상징이라고 할버스탐은 결론내린다. 모레티(Franco Moretti) 11는 <드라큘라>가 초반부에는 서로 다양한 관점이 나타나게 하다가 드라큘라의 정체가 확정된 이후에는 같은 관점으로 수렴하도록 구성되었는데, 이것이 이러한 주제의식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12
이러한 주장은 할버스탐만의 주장은 아니다. 주디스 와이스만(Judith Weissman)은 <드라큘라>가 19세기 말의 신여성에 대한 불안을 드라큘라로 형상화했으며, 성역할에 대한 판에 박은 태도를 조장한다고 공격했다. 윌리엄스(Anne Williams) 13는 <드라큘라>가 어머니의 정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고, 아라타(Stephen Arata) 14는 <드라큘라>가 야만세계에 의해 문명이 식민화되는 소위 제국고딕(imperial gothic) 장르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외에 케인(Michael Kane) 15은 <드라큘라>가 보어전쟁과 1차대전으로 표현된 영국의 신제국주의를 보여준다고 주장했으나, 그러한 사조가 1차대전으로 이어졌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아무튼 많은 문학자들은 <드라큘라>가 '괴물'의 담론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16 <드라큘라>가 흥행한 비결이 이것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7 18
한편 다른 문학자들은 마르크시즘적 시각에서 <드라큘라>를 평론한다. 모레티(Franco Moretti)는 드라큘라가 노동자의 고혈을 착취하는 독점자본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고, 권과 유 19는 드라큘라가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중산층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크롤리(Langua sagolla Croley) 20는 드라큘라가 최하층 계급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동네가 그렇듯이 사실 여부를 판가름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외에 위크(Jennifer Wicke) 21는 <드라큘라>에서 나타난 두려움이 새롭게 등장하는 22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피쿨라(Tanya Picula)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급속히 부상한 소비주의와 광고에 대한 양가적 반응이 여성과 여성의 성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23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문학자들은 <드라큘라>가 제국주의나 인종차별 등 그들이 싫어하는 이념을 옹호한다고 공격하거나, 반대로 제 3자 담론을 옹호한다고 해석함으로서 그러한 억압과 폭력을 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가령 Schaffer는 하커 주니어의 탄생이 동성애를 이성애로 전환시켜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주장했고, Smith 24는 드라큘라가 우리 모두를 괴물과 동일시한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사조는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김순원 25은 <드라큘라>를 평론하면서,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드라큘라가 괴물, 트란실바니아, 야만, 동성애로 상징되는 저들뿐만 아니라 인간, 영국, 과학, 이성애로 대표되는 우리 진영에서도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가령 그에 따르면 하커를 습격한 드라큘라 여성이 세명이고 미나에게 구혼한 남성도 세명이라는 점이 그러한 징표이다. 또한 하커가 세 흡혈귀 여성에게 농락당하는 장면 뒤에 영국의 일상을 배치한 것이 두 세계의 대비를 보여준다는 기존 해석에 반대하여 두 세계가 가깝다는 것을 은유한다는 해석 26을 인용한다. 27
이외에 상당히 많은 사례를 들어 김순원은 <드라큘라>가 우리와 저들 간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보여서 타자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근거로 든 대부분의 사례들은 모두 기존의 이분법적 담론을 지지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는 그는 <드라큘라>에 묘사된 일부 묘사가 기존의 가부장적 담론에 맞지 않는다고 그것이 가부장적 담론에 반대된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문학 작품이 특정 담론에서 주장하는 측면에 완벽히 들어맞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더 비현실적일 것이다. 결국 편향과 비현실적 가정, 그리고 과대해석으로 점철된 김순원의 해석은 <드라큘라>의 저항적 성격보다는 문학평론의 본질적 모호함을 보여주며, 하나의 텍스트가 한쪽 극단에서 다른쪽 극단까지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순원은 작중에 타자기와 녹음 실린더가 등장하고 이러한 신기술을 통해 생산된 원본과 사본이 모두 동시에 중요하게 취급받는다는 점을 들고, 이것이 벤야민의 예술의 정치화에 대한 관점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벤야민이 주장했듯이 브램 스토커도 작가와 대중의 경계를 허물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하며, 흡혈귀의 존재 자체가 여기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래스터패리 교(rastafarian,라스타파리안 운동)
라스타파리안(rastafarian) 운동은 70년대 자메이카 출신 미국 흑인들이 일으킨 종교로, 여기서 라스타파리안은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이름인 터퍼리(tafari)에서 유래했다. 이름의 유래가 에티오피아 황제이듯 이들은 에티오피아 국기를 본 딴 옷을 입고 레게 음악을 부르며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데, 유명한 신자가 레게 가수인 밥 말리(Bob Marley)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밥 말리는 45년에 태어나 62년부터 음악을 시작했고, 자메이카의 토속 리듬과 록을 결합한 레게 장르를 탄생시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는 한동안 <bob marley and the wailters>에서 활동하다가 81년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세계화
세계화는 21세기 초 사회학과 인문학의 핫이슈였는데, 특히 문화연구자들은 세계화가 자본주의 선진국에 의한 문화적 침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런 주제에 매달렸다. 이들은 특히 여러 국가에 진출하는 복합 미디어 그룹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규모의 경제이기 때문에 문화산업체는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시장을 원하며, 때문에 세계화에 더 적극적이다. 그러나 문화 차이로 인해 자국의 문화컨텐츠가 타국에 잘 수출되지 못할수도 있기 때문에(cultural discount, 문화적 할인), 가족과 폭력, 성 등 인류 보편적으로 관심을 끌 만한 소재로 컨텐츠를 만든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문화연구자들은 문화상품의 소비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자의 정체성과 의식, 정서를 형성하는 과정(실천)이라고 보았으며, 그래서 미국 문화의 해외진출은 이들에게 침략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국적인 것을 중시하고 '우리 것'과 '전통성'을 강조하는 신토불이 정신이 좋게 평가되지는 않았는데,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이것이 세계화에 대한 반응은 될지언정 세계화의 대안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세계화로 인해 계급/지역/세대에 따른 문화적 격차가 심해진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비수준의 격차가 상대적 박탈감과 증오를 부르고, 막가파 사건과 지존파 사건이 이것의 실례라고 주장했다. 또한 90년대의 신세대 담론이 압구정과 홍대를 중심으로 흥행한다는 점을 두고 지역 간에 문화가 달라졌다고 주장했으며, 요즘 젊은 사람들의 문화는 생산중심주의와 다른 소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기성세대의 문화와 뿌리부터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동안 지방 사람들도 무리없이 서울에서 생산된 문화컨텐츠를 즐겼으며,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로 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이들은 끊임없이 젊은이와 기성세대의 문화가 다르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을 보여줄 실증적인 근거는 없었다. 결국 한국의 문화연구자들 또한 지역에 갇혀있던 시절에서 자라 '요즘 젊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 불과했으며, 그러한 편견이 지적 거름망을 갖추지 못한 인문학의 한계로 인해 그대로 표출된 결과 위의 편견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세계화가 가속화되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여겨지고 한국사회가 점차 다문화사회로 변해감에 따라, 기존의 문화제국주의론에 심취해 있던 한국 문화연구자들도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비록 문화제국주의론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민중문화를 우선시하고 대중문화를 배척하는 자세 또한 거부했으며, 그 대신 이 시대의 대중을 위한 새로운 대중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현 대중이 문화적 자생력을 가진 주체적 대중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이들은 믿었는데, 과연 무엇이 주체적 대중인지는 이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어 보인다.
슈퍼히어로와 국가 이데올로기
문학자들은 슈퍼히어로 장르가 미국중심주의를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만화가 마크 웨이드는 슈퍼맨이 커다란 파란색 보이스카우트(big blue boyscout)로서 현 체제를 보호하는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했다. 문학자들에게 슈퍼맨은 대공황 시기 미국인들의 실추된 자신감을 회복시키기 위해 등장한 영웅으로서, 미국식 해결책(american way)을 강조하며 미국 문화를 재생산하는 문화적 장치로 인식된다. 비슷하게 캡틴 아메리카는 복장에서부터 미국의 상징임이 드러나며, 아이언맨도 냉전기 미국의 욕구를 반영한 산물이다. 28
최근 할리우드의 신좌파적 경향성에 대해 인문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슈퍼히어로 장르가 여전히 미국중심적이며, 미국의 강력한 힘을 슈퍼히어로를 통해 표현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슈퍼히어로들의 힘과 폭력은 그 동기의 순수성을 통해 정당화되고, 고뇌하고 고통받는 영웅의 이미지를 통해 폭력의 부정적 모습을 희석한다. 다양한 가치관으로 갈등하는 히어로들은 악당 앞에서 단합되면서 미국의 통합을 강조한다. 실제로 마블 영화(MCU)에서 슈퍼히어로들은 미국의 국가기관 실드 산하에 소속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슈퍼히어로 장르가 미국중심적 이데올로기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아이언맨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용되는 무기들을 보여주며, 테러와의 전쟁이 가진 모순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2008년 이후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슈퍼히어로가 가진 무력의 충돌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영화학자들은 현재 슈퍼히어로 영화가, 다른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미국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여기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29
슈퍼히어로의 타자성
문학자들이 보는 슈퍼히어로는 특이한 지위를 가진다. 슈퍼히어로는 그 강대한 힘으로 인해 타자로 간주되어, 타자성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슈퍼히어로는 도덕성을 가지며, 공동체를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타자성이 괴상함과 함께 정상성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성을 의미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타자인 슈퍼히어로가 우월한 도덕성을 가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다. 문학자들은 이러한 슈퍼히어로의 모순적인 특성이 사회문제에 대한 비정상적 해결책(폭력)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탄생하였으며, 막강한 힘을 통해 정상과 타자의 세계를 통합함으로서 모순을 해소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슈퍼히어로의 타자성은 그들이 가진 강한 도덕성에 의해 상쇄된다. 슈퍼히어로는 슈퍼맨과 같이 태생적으로 선할수도 있고, 아이언맨처럼 후천적인 경험과 선택을 통해 선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만약 슈퍼히어로가 도덕성을 상실한다면, 그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으로 간주될 것이다. 문학자들은 도덕성이 사라진 슈퍼히어로는 타자성만이 남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은 슈퍼히어로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한편 페미니스트들은, 슈퍼히어로 중에서도 여성 슈퍼히어로들이 특히 강한 타자성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 슈퍼히어로들은 남성 슈퍼히어로에 종속되어 있으며, 남성적 힘을 과시하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고 동시에 여성적 매력을 뽐내 여성에 대한 대상화를 유지한다. 여성 슈퍼히어로는 남성 슈퍼히어로의 파트너이자 성적 대상에 불과하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남성적 면모를 보이면 남성적 가치에의 복종이라고 하고, 여성적 면모를 보이면 가부장제 공고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순을 얘들이 대체 언제쯤 깨달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개혁개방기의 중국영화
중국 영화는 으레 공산국가가 그러하듯이 철저히 정부의 선전만 쏟아내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중국 영화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다시금 일어났고, 해외에서도 중국영화가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다이진화는 이 시기의 중국영화를 시대에 따라 1)예술지상주의를 통해 문혁의 여파를 극복하고자 했던 4세대, 1)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 본격적인 해외진출이 시작되었던 5세대, 3)다양한 문화적 취향에 따라 영화계가 다양화되었던 6세대로 나누었다. 30
한국의 청년문화
한국의 청년문화는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왜냐하면 청년의 요구가 기성세대에서 무시되고 있고, '청년'이라는 단어가 '실업'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문화연구자들은 지배문화와 청년문화가 대립하는 구도는 거부하는데, 이들은 청년문화가 기성세대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창출되는 것이고, 기성세대는 청년문화를 통해 경제적 이득과 도덕적 정당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설명방식은 문화연구자들 또한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청년문화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은 청년문화의 핵심을 대학문화에서 찾았다. 이들이 보기에 좋았던 청년문화 컨텐츠는 모두 대학의 운동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해 대학문화가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자 문화연구자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폭거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현재 자본주의 일색인 대중문화와, 자폐적이고 시니컬한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대학문화가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대학문화 기반의 새로운 청년문화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고 인권, 평화, 복지, 참여, 생명의 가치를 살아숨쉬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데, 불행히도 그들의 낙관적 예측은 들어맞은 적이 거의 없다.
김창남은 새로운 청년문화는 과거와 현재 문화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서 7-80년대에 문화생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적 감수성을 일깨워야 하고, 그러면서도 신세대의 개인주의 가치관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창남은 현재의 청년문화가 구세대와의 차이점만 강조하다보니 끊임없이 분열되고 해체되었다고 공격하면서, 새로운 청년문화는 지금 청년의 문화와 문화연구자들이 좋아하는 과거 청년문화의 결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류 담론
한류(korean wave)란 한국의 가요, 드라마, 영화, 게임 등 한국의 문화컨텐츠가 외국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전에도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소수의 개인은 있었지만, 90년대 말부터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와 한국의 문화컨텐츠에 관심을 가지는 대단위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류가 일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 잦아들었지만, 20년대부터는 방탄소년단과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필두로 이러한 인기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한류는 한국인 특유의 민족주의와 얽히면서 한국인의 자랑거리로 여기졌으며 한국 정부에서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한류 초기에 학자들은 어째서 한류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요인을 주장하였다. 하나는 문화적 할인율(cultural discount)로, 한류가 초기에 유행한 아시아의 경우 한국과의 문화적 거리가 작기 때문에 한류의 전파가 쉬웠다는 주장이 잇었다. 이외에 신흥시장인 중국과 베트남을 때마침 나타난 한류가 선점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들은 홍콩 문화의 몰락과 한류의 부흥이 겹치는 것이 그 근거라고 주장한다. 주류 문화연구자는 한류의 성공이 한국 대중문화의 질적 성장에 기인했다고 주장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 한류가 부진한 것은 시장논리가 한류를 잠식하고 이명박이 문화를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류를 보는 한국의 주류 담론은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담론 하에서 한류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자랑스러운 쾌거이며 좋은 것이다. 또한 한류의 전파를 통한 경제적 이득도 기대할 수 있다. 정부와 언론은 이러한 논지에서 한류에 호의적이었으며, 이는 연구비로 이어져 경제학자와 다른 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한류의 경제적 효과와 이익증대 방안을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조금 회의적인 사람들은 한류의 성장이 앞서 말한 문화적 할인율의 결과라고 일축하였다. 이들은 텔레노벨라의 사례를 들었는데, 텔레노벨라는 50년대에 남미에서 제작된 에스파냐어 드라마들로 언어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남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텔레노벨라가 중남미에서 인기를 끈 것은 할리우드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화적으로 근접해서였으며, 한류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비판적 문화연구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한류도 문화제국주의라고 공격하였다. 이들은 한류와 한류를 칭송하는 담론이 국가주의이고 경제주의라고 매도하고, 한류를 수용하는 대중을 타자화하는 제국주의라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일본문화가 한국을 잠식하는 것이 나쁘듯이 한류도 나쁘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왜 둘 다 나쁘다고 봐야하는지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이들중 일각에서는 한류가 미국 문화를 수용한 한국 대중의 창조적인 재설계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비슷하게 김창남은 문화적 할인율 시각과 비판적 문화연구를 결합하여 한류가 아시아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이며, 한류를 통해 문화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대동아공영권 냄새가 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요새 한류 흐르는걸 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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