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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심리철학의 패러다임 본문
심리철학에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이중 어떤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어떤 것은 비주류 입장으로 남아있으며, 현재 심리철학의 주류는 기능주의이나 이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유명한 심리철학 교재의 저자 라벤스크로프트는 마음에 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들 6개를 나열했는데, 심리철학의 이론이 다음의 사실들을 잘 설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
- 어떤 심적 상태는 세계의 상태에 의해 일어난다. 고통은 보통 고통을 받아야 일어난다.
- 어떤 심적 상태는 행위를 일으킨다. 몸이 가려우면 보통 긁는다.
- 어떤 심적 상태는 다른 심적 상태를 일으킨다. 트럼프가 구세주라는 신념은, 트럼프에 대한 강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 어떤 심적 상태는 의식적이다. 나는 매우 피곤하고 자고 싶다는 느낌을 의식적으로도 잘 인지하고 있다.
- 어떤 심적 상태는 세계 속의 사물을 향한 것이다. 사실 마음에 대한 철학적 생각들도 마음이라는 세계 속의 사물을 표상하는 것이다.
- 어떤 심적 상태는 어떤 뇌 상태와 체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특정 심리상태가 특정 뇌활동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의 합리적인 생각은 전두엽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고, 어디 중독되서 못 헤어나오는 것은 보상회로의 활성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기능주의
https://tsi18708.tistory.com/227
기능주의는 현대 심리철학의 주류 패러다임이다. 기능주의에서는 마음을 일종의 기능으로 정의하며, 마음을 입력항과 출력항을 연결하는 중간항으로 본다. 많은 심리철학자들이 기능주의를 지지하며 대다수 이론과 논증도 기능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원론
심리철학에서 이원론은 몸과 마음이 별개의 존재라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이원론을 신봉하고 있는데, 마음이 몸과 별개인 영혼이라는 믿음이 대표적인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마음과 몸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실체이원론과, 마음과 몸이 다른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속성이원론으로 나눌 수 있다.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실체이원론은 폐기되었고 이원론은 비주류로 떨어졌지만, 속성이원론은 아직도 남아있다.
실체이원론과 그 반박
실체이원론을 처음으로 논증과 함께 주장한 학자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근세에 절대적인 앎을 추구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앎이 절대적으로 참인 기반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명한 방법론적 회의끝에 데카르트는 그 기반이 인간의 이성, 즉 정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성중심주의를 철학에 가져왔다. 동시에 그는 물질과 정신(이성)을 분리함으로써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이 정신을 건드리지는 못하게 하였고, 존 설에 따르면 오히려 이렇게 신학과 과학의 영역을 정신과 물질로 나눔으로써 종교적 반동의 광기에서 과학을 구하려고 하였다.
데카르트의 기본적인 사상은 정신과 몸이 완전히 별개인 존재라는 것이다. 정신의 본질은 사유함(여기에는 모든 의식적 활동이 포함된다이며, 물질의 본질은 공간적 연장됨이다. 여기서 공간적으로 연장되었다는 말은 공간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여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정신은 물질과 상호작용하며, 인간은 정신이 중심이 되어 물질이 합쳐진 존재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의심과 실존 논증을 사용하였는데 그 논증은 다음과 같다.
- (1) 나는 내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 (2) 나는 내 신체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다.
- 고로 나는 내 신체와 동일하지 않다. (2)
- 고로 사유하는 정신으로서의 나는 내 신체와 동일하지 않다. (1,3)
이 논증은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몇가지 한계가 있다. 먼저 이 논증은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는 다음과 같다.
- 모든 x와 y에 대해, x=y라면 x와 y의 모든 속성들도 일치한다.
- ∀x∀y{x=y->∀P(Px<->Py)}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는 라이프니츠가 제안한 이래로 합당한 논리적 전제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바로 인식적 속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물리적 속성만을 고려할 경우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가 성립하지만, 인식적 속성을 포함하면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로 천연비타민과 합성비타민은 물리적 속성이 동일한 같은 물질이지만, 둘의 인식적 속성은 다르다.(천연인 좋은거vs합성된 나쁜거) 또한 배트맨과 존 웨인은 실제로 같은 인물이지만 서로 다른 인식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다크히어로vs졸부) 이렇듯 인식적 속성은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에 해당하지 않는데, '의심할 수 있다'나 '의심할 수 없다'는 인식적 속성에 해당한다. 즉 데카르트의 저 논증은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의 잘못된 적용에 의한 결과이다.
한편 데카르트의 주장을 형이상학적 틀로 보면, 실체이원론을 지지하는 다른 논증이 튀어나온다. 상상가능성 논증이라 불리는 이 논증은 본질의 문제에 집중하는데, 분석철학에서 본질이란 어떤 x를 존재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즉 a가 b의 본질이라면, b가 a없이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이용하는 상상가능성 논증은 아래와 같다.
- (1)내 존재(정신)의 본질은 사유함이다.
- (2)내 신체의 본질은 공간적 연장됨이다.
- (3)공간적 연장됨이 부재한 나를 논리적 모순없이 상상할 수 있다.
- (4)공간적 연장됨은 내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3)
- 고로 내 존재는 신체와 별개로 존재한다.(4)
여기에 위치가 없는 스칼라의 존재를 들어 물리학적으로 논박할 수도 있지만, 심리철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상상가능성 논증을 논박했다. 먼저 3번 주장에서 제시된 상상이 논리적 모순이 없는지 모호하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상상이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그의 주장일뿐이다. 먼 미래에 과학이 발전하면 공간적 위치가 정신의 필요조건임이 밝혀질 수 있으며, 적어도 과학자들과 대부분의 심리철학자들은 물질이 정신의 필요조건이라는데 동의한다. 비슷하게 양상논리학자 솔 크립키는 인간이 H2O가 아닌 물(수소/산소와 관련없지만 어쨋든 찰랑거리는 무언가)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듯이, 2 물질 없이 존재하는 정신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이것이 모순을 내포할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비록 로위(lowe)와 같은 몇몇 철학자가 이런 식의 비판이 꼬리를 물면 결국 절대적인 논리적 전제마저도 의심하기 때문에 직관적인 참(상상가능성과 양상논리상 가능성의 동일함)을 논리적 전제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약점으로 인해 상상가능성 논증은 폐기되었다.
이외에 실체이원론은 두가지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먼저 마음과 몸이 별개로 존재하는 실체라면,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이는 심령술사들의 논리에도 작용되는데, 심령술 지지자들은 심령 현상이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실험기기로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적인 실체인 유령은 어떻게 폴터가이스트같은 물리적 현상을 일으키는가? 분명 물질적인 실험기기와 상호작용하지 못할 정도로 별개의 실체인데 말이다. 이에 대해 라벤스크로프트는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른 실체라 해서 이들이 상호작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나, 정작 어떻게 마음과 몸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면 실체이원론자들도 답을 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학자들은 수십년의 연구끝에 영혼이라는 별개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인간의 정신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신경생리학의 설명적 완결성(causual-explanatory closure of the neural-physical)이라 불리는 이 반론은 모든 물리적 사건이 물리계 이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물리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의 변형인데, 모든 심리적 사건이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 신경과학의 발전 정도로 볼때 아직 시기상조이지만, 실제로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사건이나 실재들이 물리적인 신경계에 의존함을 발견하였다. 뇌의 손상이나 변화는 정신의 손상이나 변화와 관련되고, 뇌크기나 뉴런의 연결패턴이 개인간의 능력차는 물론 개성까지 설명할 수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물리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는 분석철학과 과학에서 합당하다고 인정된 전제이며, 과학자(신경과학 포함)들을 이를 실제로 증명해가고 있다.
신경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은 심리철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추가적인 정신의 존재를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오컴의 면도날로 영혼을 제거하게 만들었다. 현재 심리철학자 대부분은 마음과 몸이 하나라는 물리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오직 소수만이 마음과 몸이 다르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도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라는 것이 아니라 속성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 주장이 뒤에서 볼 속성이원론이다.
속성이원론(비환원적 물리주의)
속성이원론(property dualism, 영국 창발론)은 마음이 심리적 속성을 가지며, 심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개발된 사건 존재론에서 나왔는데, 사건 존재론은 사건을 존재의 중심으로 보는 입장이다. 분석철학에서 사건(E)은 특정 시점에 임의의 속성 P를 예화(발현)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오늘 내가 낮잠을 자는 사건은 특정 시간(오늘 낮)에 임의의 속성(피곤함, 수면상태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속성이원론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추어 어떤 존재를 마음으로 정의하게 하는 본질인 심리적 속성이 있으며, 이 심리적 속성은 다른 물리적 속성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에 따르면 무거움과 질량은 서로 다르고 환원될 수 없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에 동조하는 몇몇 과학자들은 신경계가 마음이라는 현상을 창발시키기 때문에 마음의 구조와 특성이 신경활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속성이원론자들은 영혼을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다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으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속성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실체이원론자들이 난항을 겪었던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인데, 심적 인과의 문제(the problem of mental causation)라고 명명된 이 문제는 서로 별개인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이 같은 실체 안에서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 탐구했다. 비록 실체이원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좌초되었지만, 속성이원론자들은 자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철학적 행동주의
철학적 행동주의는 20세기 초반에 나타나 한때 심리철학의 주류였던 입장이다. 철학적 행동주의는 모든 심적 특성이 어떤 행동을 일으키려는 행동경향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이들에 따르면 고통은 고통 반응을 일으키려는 행동경향이고, 정서도 어떤 반응을 표출하려는 행동경향이다. 철학적 행동주의는 20세기 초 과학의 발전이 본격화되면서 주가가 상승한 물리주의가 철학에 개입된 결과이다. 실체이원론이 몰락한 이후 물리주의자들은 마음을 분석하기 위해 3가지 방향으로 접근했는데, 이중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게 철학적 행동주의이다.
철학적 행동주의는 방법론적 행동주의, 즉 행동주의심리학과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 둘 다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으며, 심적 특성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행동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철학적 행동주의는 행동과 별개로 존재하는 심적 특성을 아예 부정한 반면, 행동주의심리학은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들은 심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고 다룰 필요도 없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래서 행동주의심리학은 심적 특성의 존재를 불가분에 부치는 선에서 끝났지만, 철학적 행동주의는 모든 심적 특성을 행동적인 용어로 번역하는 대담한 기획을 시도하였다.
철학에서는 행동주의를 3가지 명제를 따르는 입장으로 정의하였다. 첫번째는 존재론적 행동주의로, 심적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두번째는 방법론적 행동주의인데, 심적 현상이 학문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없는 대상이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은 의미론적 행동주의로, 심적 현상을 기술하는 심적 용어가 모두 행동과 자극에 기초한 행동적 용어, 즉 물리적 용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행동주의심리학은 방법론적 행동주의로 분류되고, 심리철학에서 유행했던 철학적 행동주의는 의미론적 행동주의에 속한다.
철학적 행동주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나의 마음은 나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인식적으로 비대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반대로 나는 타인에게 마음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problem of other minds) 왜냐하면 내 마음과는 달리 상대방의 마음은 내 마음을 보는 것처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간접적인 추론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나와 타인이 물리적으로 비슷하고, 비슷한 자극이 가해졌을때 비슷한 반응이 나타난다면, 타인도 나와 같은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추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과 별개로 존재하는 심적 특성을 가정한다면 이러한 추론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적 특성이 행동경향인 경우에는 같은 행동이 나타난다는 사실만 관찰해도 비슷한 종류의 마음(행동경향)을 가진다고 추론할 수 있지만, 행동과 별개로 내면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면 같은 행동이 나온다고 해도 안에 든 내용물까지 같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각자가 서로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도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는 단어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간주관성을 가짐을 기억하라. 어떤 단어가 분석철학적으로도 의미를 가지려면 그 단어는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지칭해야 한다. 즉 마음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지칭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각자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무언가라고 가정하면, '마음'이 단어로써 가지는 지위가 흔들릴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나의 단어로서 기능하려면 명확한 특정 대상을 지칭해야 하는데, problem of other mind로 인해 나와 타인의 '마음'이 동일한 무언가라고 가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하나의 단어로 기능하려면 충분히 대상을 지칭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칭해야 하며, 개인 내면의 고유한 무언가는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나와 너가 모두 같은 대상이라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논증을, 각자의 마음을 상자 속 딱정벌레에 비유하여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적 행동주의자들은 마음을 일종의 행동경향으로 정의한다. 이들에 따르면 마음은 곧 행동경향이며, 따라서 행동을 관찰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가정하면 몇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먼저 마음이 곧 행동경향이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의 존재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인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행동을 한다면,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동경향은 나와 너가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 사실 행동주의심리학은 전적으로 행동을 관찰하여 정립된 것이고, 거기서 밝혀낸 조건화 법칙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적 행동주의는 위에서 제기한 2가지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장점을 통해 철학적 행동주의가 정립된 이후, 행동주의자들은 더 대담한 기획을 준비하였다. 만약 마음이 행동경향과 동의어라면, 정서, 사고, 느낌, 감각 등 모든 심적 특성도 행동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모두 행동적인 용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마음이 행동경향이라면, 모든 심적 특성을 '-한 행동을 하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기 논리실증주의자였던 노이라트가 모든 과학을 객관적인 비자연 언어로 번역하려는 통합과학 운동을 시도했듯이, 철학적 행동주의자들도 모든 심적 특성을 행동으로 번역하려는 대담한 기획을 실천하였다.
한계
철학적 행동주의자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거대한 계획을 시작했지만, 그 계획은 실패하였다. 순환성(circularity) 문제라고 알려진 이 문제는, 심적 언어를 행동적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암만 노력해도 심적 언어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행동경향이 항상 같은 행동을 낳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령 똑같은 자극이 가해진 두 사람을 상상해보자. A씨는 홍어냄새를 맡자, 코를 막으며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B씨는 홍어냄새를 맡았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B씨는 예전에 지인의 추천으로 홍어를 접해본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자극이 가해져도 이전의 기억이나 신념, 기호 등 다양한 심적 특성에 의해 행동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적 특성을 행동경향으로 번역하려면 이러한 요소들도 번역해야 하는데, 정작 이들도 다른 심적 특성에 따라 양상이 좌우되는 경우가 다발하다. 사실 심적 특성들은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엉겨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번역하지 않는 이상 개별적으로 번역하다가 순환에 갇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날 뿐이다.
또한 퍼트넘은 행동과 별개인 심적 특성이 가능하다고 철학적 행동주의를 논박한 바 있다. 이른바 초금욕주의자 논증이라 불리는 논증에서 그는 어떠한 극단적인 절제를 행하는 사람을 가정한다. 초금욕주의자라 불리는 이 사람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자신의 심적 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파도 울지 않고, 화나도 화내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완벽한 연기자도 가정할 수 있는데, 완벽한 연기자는 모종의 이유로 실제로 자신이 느끼지 않는 심적 상태를 완벽히 흉내낼 수 있다. 퍼트넘은 가상적인 초금욕주의자와 완벽한 연기자를 가정하지만, 사실 극단적이지 않은 사례는 우리 주위에 매우 많다. 우리 주위에는 자식을 위해, 국가를 위해 힘든 일도 티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표를 끌어모으거나 위기상황을 넘기기 위해 악어의 눈물을 짜는 공인들도 다수 있다. 이러한 논증을 해결하려면 심적 상태와 행동의 괴리를 유발하는 모종의 이유들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러면 역시 순환성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이러한 단점과 더불어 거대 기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철학적 행동주의는 몰락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에서도 인지과학이 출현하면서 행동주의심리학은 몰락하였다. 우연히도 이로부터 몇십년 후 이들의 모태가 되었던 논리실증주의도 내부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였다. 이로써 마음과 신체가 분리되었다는 주장에 이어 마음과 행동이 동일하다는 주장도 사멸하였고, 이후 반대로 신체를 행동의 근원이라고 보는 동일론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동일론
동일론(identity theory)은 철학적 행동주의가 몰락한 이후 주류였고, 지금도 완전히 힘을 잃지는 않은 입장이다. 중앙 상태 유물론(central state materialism), 유형 물리주의(type physicalism), 환원적 물리주의(reductive physicalism)라고도 불리는 이 주장의 골자는, 인간의 정신의 뇌의 활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동일론이 대두되면서 심신문제가 본격적으로 심리철학의 주요 주제가 되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초보적인 동일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동일론은 뇌과학이 점점 발전하고 인간의 많은 행동이 뇌로 설명되면서 대두되었다.
동일론의 주요 명제는 마음-두뇌 상관성 논제(mind-brain correlation thesis)라고도 불린다. 이 논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기체 o에서 발생하는 모든 심적 유형 M에 대하여 대응하는 두뇌 유형(신경상관자, 신경토대) B가 존재한다. 시점 t에서 o에게 M이 발생할 필요충분조건은 시점 t에서 o에게 B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심적 현장의 물리적 토대를 뇌에 위치시키며,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철학적 행동주의의 목적을 부분적으로 실현한다. 또한 뇌활동과 정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뇌활동과 정신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매우 간단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강점이 있다.
마음과 신체의 상관성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사실은 동일론이 심리철학의 주류가 되는데 일조하였다. 왜냐하면 다른 이론들은 지금까지 심신 문제를 설명하는데 실패해왔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후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을 통해 신이 영혼과 신체가 서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게 조율한다고 주장했고 malebranche도 비슷하게 신이 영혼과 신체 사이를 주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이 같은 실체의 다른 측면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주장은 서구철학에서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다른 설명들도 마음과 신체가 왜 그렇게 밀접한지에 대한 설명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이로 인해 이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의 (틀린) 실체이원론이 대세였지만, 동일론이 등장하면서 이에 대한 충분한 해석의 길이 열렸다.
동일론은 형식에 따라 유형동일론과 사례동일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논쟁과 관련된 것으로, 어떤 유형을 실체로 보는지 아닌지에 따라 나뉘는 관점이다. 유형동일론(type identity theory)은 심적 상태의 유형이 물리적 상태 유형과 동일하다고 본다. 반대로 사례동일론(token identity theory)은 개개의 심적 상태가 개개의 물리적 상태와 같다고 본다. 즉 추상적인 심적 상태를 가정하지 않고, 개인이 가진 특정한 심적 상태가 물리적 상태라고 본다. 다른 사례에서도 그렇듯이, 유형의 동일은 사례의 동일을 함축하기 때문에 유형동일론이 더 설명력이 강하다.
동일론은 얼핏 보면 맞는말처럼 보이지만, 현대 심리철학의 주류는 동일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론은 복수실현 가능성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수실현 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이란 서로 다른 신경상태를 통해 정신이라는 같은 실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인간의 경우 인간의 정신은 1.4kg의 뇌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문어, 개, 돌고래, 악어 등 다양한 동물들이 정신(과학적 의미)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뇌구조와 신경구조는 인간과 많이 다르다. 사실 같은 인간도 뇌의 연결패턴과 구조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두 비슷하게 기능하는 정신을 보유한다.
이는 동일론의 약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동일론의 시각으로 접근할 경우 도대체 어떤 뇌가 정신과 같은 것인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심리철학자 김재권의 뇌활동을 예시로 들며 이것이 정신과 동일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정의에 따라 문어, 개, 원숭이 등 동물들은 정신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뇌의 연결패턴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는 여성과 동양인, 저소득자도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사실 시냅스 패턴이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자신 빼고는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러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일론은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다시 주류에서 밀려났다. 당시 동일론자들은 복수실현 가능성 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신적 존재들이 공유하는 토대를 찾으려고 하였고, 이는 정신을 뇌활동 그 자체가 아니라 뇌활동이 수행하는 기능이라고 보는 기능주의로 이어진다. 그리고 기능주의의 일부 분파와 협력하여 동일론은 복수실현 가능성 논제를 일부 해결하게 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김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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