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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월든 - 경제생활1 본문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쓰던 무렵, 나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의 월든 호숫가에서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다. 내가 손수 지은 그 집은 반경 1.6km 안에는 이웃 하나 없는 외딴 숲속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순전히 손노동만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2년 2개월을 살았고, 지금은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와 잠시 지내고 있다.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유별난 관심을 가지고 캐묻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글을 써서 나의 사사로운 일을 독자들 앞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을 무례하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상황을 고려하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떤 이들은 나한테 뭘 먹고 사느냐고 물었다. 외롭지 않으냐, 무섭지 않으냐고 묻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내가 수입의 어느 정도를 자선활동에 쓰는지 알고 싶어 했으며, 대가족을 거느린 어떤 이는 내가 불쌍한 아이를 몇이나 돌보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몇 가지 질문에 답변하게 될 텐데, 나한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독자들도 이 점 양해해주기 바란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흔히 일인칭 '나'가 생략되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면에서 보면 그것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이다. 말하는 사람이 결국은 언제나 일인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린다. 내가 나만큼 잘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나도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주제가 '나'자신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는 모든 작가들에게, 타인의 삶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꾸밈없고 진솔한 이야기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에컨대 머나먼 타향에서 친지들에게 써보낼 만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가 성실하게 살아왔다면 그 삶은 나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나 가능했을 테니까. 나는 이 책을 특히 가난한 학생들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 밖의 독자들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대목만 받아들이면 된다. 외투를 입을 때, 솔기가 터지는데도 억지로 입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투는 몸에 맞는 사람에게나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중국인이나 하와이 원주민에 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이곳 뉴잉글랜드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상황, 특히 이 세상과 이 마을에서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지금처럼 나쁜 상황이 과연 불가피한지, 개선될 가망은 없는지에 대해 쓰고자 한다. 나는 콩코드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게든 사무실이든 밭이든, 사람들이 수천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브라만 승려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사방에 불을 피워놓고 앉아서 뜨거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하고, 타오르는 불길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도 하고, 고개를 틀어 어깨 너머로 하늘을 쳐다보느라 "결국에는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되거나, 목이 뒤틀려 죽 말고는 어떤 음식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게 되기도" 하고 나무 밑동에 사슬로 묵인 채 평생을 보내기도 하고, 광대한 인도제국을 애벌레처럼 온 몸으로 기어서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자발적인 고행조차도 내가 매일같이 목격하는 장면들만큼 충격적이거나 놀랍지는 않다.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도 내 이웃들이 겪는 고난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열두 과업을 마치는 것으로 고역이 끝났지만, 내 이웃들은 괴물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도 없으며, 그들의 고역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히드라의 머리를 불로 지져줄 이올라오스 같은 친구가 없어서, 머리를 하나 잘라내면 그 자리에 두 개가 생겨난다.
우리 마을에는 농장과 집, 헛간, 가축, 농기구를 물려받아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젊은이가 많다. 이런 것들은 얻기보다 거기서 벗어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그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태어나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기가 어떤 들판에서 일하도록 소명을 받았는지를 더 맑은 눈으로 볼 수도 있었을 테니까. 누가 그들을 땅의 노예로 만들었는가? 사람은 평생 동안 한 펙(9리터)의 먼지만 먹어도 될 운명인데, 왜 그들은 25헥타르의 땅에서 나는 먼지를 먹어야 하는가? 그들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이 모든 짐을 밀면서 한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길이 2미터에 너비 1.2미터인 헛간,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처럼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는 외양간, 경작지와 목초지와 조림지 등 40헥타르의 땅을 앞으로 밀면서 인생길을 기어가다가 그 짐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버린 가련한 영혼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물려받은 유산이 없어서 그런 골칫거리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조그만 육신 하나 건사하고 유지하기가 버거운 실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육신의 대부분은 곧 흙 속에 묻혀 거름이 될 것이다. 흔히 필연이라고 불리는 허울 좋은 운명은 그들에게 옛날 책에도 나와 있듯이 오래지 않아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몰래 들어와 훔쳐갈 재물을 쌓아올리는 일을 시킨다. 1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인생이다. 그 사실을 미리 알지는 못하더라도 생애가 끝날 때쯤에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머리 뒤로 돌을 던져 인간을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우리 인류는
단단한 심장으로 고통과 근심을 견디며
우리 몸도 돌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그러니 어줍은 신탁을 맹신하여 머리 뒤로 돌을 던지고는 그 돌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보지도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말자.
비교적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은 단순한 무지와 착각때문에 부질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노동에 시달리느라, 인생의 달콤한 열매를 따보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지나친 노동 때문에 투박해진 손들은 열매를 딸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 겨를도 없고, 남들과 인간다운 관계를 유지할 여유도 없다. 그렇게 하려고 들다가는 그의 노동력은 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기계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시간이 없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지식을 그렇게 자주 써먹어야 한다면 과연 자신의 무지를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공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고 강장제로 원기를 북돋워주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좋은 자질은 과일 껍질에 생기는 분가루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게속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을 그처럼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떤 사람은 하도 가난해서 먹고살기도 힘들고, 때로는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서 헐떡거릴 정도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자기가 먹은 저녁 값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람, 옷과 신발이 낡아서 해졌는데도 새로 마련할 돈이 없는 사람, 책 읽을 시간도 없어서 남에게 빌리거나 훔친 한 시간으로 여기까지 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이 얼마나 비루하고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경험으로 예민해진 내 눈에는 또렷이 보인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빚더미에서 빠져나가려 애쓰느라 여러분은 늘 한계점에 다다라 있다. 빚은 태고적부터 있어온 수렁이고, 동전을 놋쇠로 만들었던 로마인들은 빚을 '남의 구리'라고 불렀는데, 여러분은 여전히 이 놋쇠에 묶인 채 살고 죽고 묻힌다. 항상 갚겠다고, 내일 갚겠다고 약속하지만 끝내 갚지 못한 채 오늘 죽어가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갈 죄만 빼고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고 고객을 얻으려고 애쓴다. 이웃을 설득하여 구두나 모자나 코트나 마차 만드는 일감을 얻어내거나 식료품을 수입하는 주문을 받아내기 위해 거짓말하고, 알랑거리고, 의견을 표명하고, 예의바르게 몸을 움츠리거나 반대로 크게 부풀려 빈약하고 덧없는 관대함을 보인다. 여러분은 병들 때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저축해두기 위해, 낡은 궤짝이나 벽장 뒤에 양말 속에, 또는 벽돌로 지은 은행에-장소가 어디든, 액수에 상관없이-무언가를 챙겨두려다가 오히려 몸을 병들게 하고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우리 미국인이 흑인노예제도라는 야비하고 외래적인 제도에 빠져들 만큼 천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주인들이 많다.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자기가 자신의 노예 주인이 되는 경우다.
인간의 내면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밤낮없이 짐마차를 몰고 장터를 돌아다니는 마부를 보라. 그의 내면에 어떤 신성이 꿈틀거리고 있단 말인가? 그의 가장 큰 의무는 말에게 물과 먹이를 주는 것이다. 운송업의 대가와 비교할 때 그의 운명은 그에게 무엇일까? 그는 그저 '세간의 평판'이라는 나리를 위해 마차를 몰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신성하며, 어떻게 불멸의 존재이겠는가? 그가 얼마나 비굴하게 굽실거리는지, 온종일 얼마나 막연한 불안에 떨고 있는지를 보라. 그는 불멸의 존재도 아니고 신성하지도 않다. 자기가 한 일로 얻은 평판, 즉 자기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얽매여 있는 노예이자 포로일 뿐이다. 세간의 평판은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아니 결정한다기보다 암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공상과 상상 속의 서인도제도에서도 자기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우리에게는 어떤 월버포스가 나타나 그런 해방을 실현시켜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생생한 관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죽는 날까지 화장대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땅의 여인들을 생각해보라. 마치 영원을 해치지 않고도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태도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소위 체념이라는 것은 고착된 절망에 불과하다. 우리는 절망의 도시를 떠나 절망의 시골로 들어가서, 밍크와 사향쥐의 용기 3에서 위안을 찾아야 한다. 진부하지만 무의식적인 절망은 인류의 경기와 오락이라고 불리는 것 밑에도 숨어 있다. 거기 놀이는 전혀 없다. 놀이는 노동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지혜의 한 특징이다.
인간의 주요 목적은 무엇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은 무엇인지를 교리문답식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이 평범한 생활양식을 택한 것은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심하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도 태양이 떠오른 것을 기억한다. 잘못된 편견은 지금이라도 버리는 게 낫다. 아무리 오래된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라 해도, 입증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오늘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진실이라고 말하거나 묵인하는 것일지라도 내일은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고, 밭에 단비를 뿌려줄 구름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연기처럼 덧없이 사라질 단순한 의견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노인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도 막상 해보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옛날 사람에게는 오래된 방식이 있고 요즘 사람에게는 새로운 방식이 있는 법이다. 옛날 사람들은 불을 계속 피우기 위해서는 땔감을 계속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석탄을 가마솥 밑에 조금씩 태워서 새처럼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선생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과정에 뭔가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깨닫지 않겠느냐고,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줄 만한 조언이란 거의 없다. 그들의 경험은 너무 불완전했고, 인생마저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패의 원인을 개인적인 이유에서 찾지만, 그 참담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신념이 조금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옛날보다 덜 젊을 뿐이다. 나는 이 지구에서 30년쯤 살았지만, 선배들로부터 유익하거나 새겨들을 만한 조언을 단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나에게 도움되는 말을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고, 지금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하나의 실험이다. 선배들이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나한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가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인생 선배들이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 농부는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푸성귀만 먹고는 살아갈 수 없잖소. 푸성귀에는 뼈를 만들 성분이 없으니까." 그래서 농부는 뼈의 성분을 공급하는 일에 하루의 일부를 헌신적으로 바친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온갖 장애물을 무릅쓰고 무거운 몸뚱이와 쟁기를 끌고 가는 소를 뒤따라가고 있는데, 그 소의 뼈야말로 풀만 먹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어떤 물건이 노약자나 병자에게는 생필품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치품에 불과할 수도 있고, 또 그런 물건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높은 봉우리든 깊은 골짜기든 인간이 사는 모든 땅을 선조들은 이미 다 가보았고, 세상사 전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존 이블린 4에 따르면, "현명한 솔로몬은 나무들 사이의 거리를 정하는 법을 제정했고, 로마 집정관들은 이웃 땅에 들어가 거기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주워도 무단침입죄에 해당하지 않는 횟수를 정했고, 그렇게 주운 도토리 가운데 주인의 몫은 얼마인지를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손톱 자르는 방법에 대한 지침까지 남겼는데, 거기에 따르면 손톱은 손가락 끝에 맞추어서 잘라야 하지, 그보다 길거나 짧게 자르면 안 된다. 삶의 다양성과 즐거움을 고갈시키는 권태와 따분함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측정된 적이 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선례에 따라 판단해서도 안된다. 인간이 지금까지 시도해본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어떤 실패를 겪었든 간에, "괴로워하지 마라, 내 아들아, 네가 손대지 않고 남겨둔 일로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5
우리는 간단한 테스트로 우리 자신의 삶을 시험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밭에 심은 콩을 여물게 하는 태양은 우리 지구와 같은 행성들로 이루어진 소우주도 동시에 비추고 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몇 가지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햇빛은 내가 괭이로 콩밭을 일구었을 때의 햇빛은 아니었다. 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고 있는가! 우주 속의 여러 궁궐 6에 사는 다양한 존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자연과 인간의 삶은 우리의 다양한 체질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나의 삶이 남에게 어떤 전망을 가져다줄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잠깐 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시대를, 아니 모든 시대의 모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역사와 시와 신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읽는 독서 가운데 이보다 더 놀랍고 유익한 독서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웃들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들 대부분이 실은 악이라고, 속으로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후회한다면 내 선행을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악마에게 사로잡혔기에 그렇게 착한 행동을 한 것일까? 70년을 살면서 이름뿐인 명예를 얻은 노인은 나름대로 현명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말라고 속삭이는 거역하기 힘든 목소리를 듣는다. 새로운 세대는 지나간 세대가 벌여놓은 사업을 마치 난파선처럼 버리고 떠나는 법이다.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 정직하게 관심을 쏟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한 걱정은 떨쳐버려도 된다. 자연은 우리의 강점만큼 우리의 약점에도 잘 길들여져 있다. 어떤 이들처럼 끊임없이 불안과 긴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고질병과 같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병에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조심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피할 수만 있다면 신앙에 기대어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낮에는 줄곧 경계심을 풀지 않고, 밤이 되면 마지못해 기도를 하고 불확실성에 몸을 맡긴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거부하며,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중심점에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반경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수없이 많다. 모든 변화는 기적으로 여겨지지만, 그 기적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것(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 7감히 예견하건데, 상상속의 사실을 오성 속의 사실로 환원했을 때, 인간은 마침내 그 토대 위에 자신의 삶을 확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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