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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고독

과학주의자 2022. 6. 14. 18:36

기분 좋은 저녁이다. 온몸이 하나의 감각기관이 되어 모든 땀구멍으로 기쁨을 빨아들인다.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기묘하게도 자유롭게 자연 속을 돌아다닌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 뿐만 아니라 꽤 쌀쌀하지만, 나는 셔츠만 입은 채 돌투성이 호숫가를 따라 걷는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지만, 자연의 모든 요소가 유난히 기분 좋게 느껴진다. 황소개구리들은 밤이 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고, 쏙독새의 노랫소리는 수면 위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려온다. 바람에 펄럭이는 오리나무나 포플러나무 잎과의 공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호수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내 마음도 잔물결만 일 뿐 어지럽게 넘실대지는 않는다. 저녁 바람이 일으킨 이 잔물결은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과 마찬가지로 폭풍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어둠이 깔렸지만 바람은 여전히 숲속에서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불고, 물결은 여전히 부딪혀 부서지고, 어떤 동물들은 자신의 노래로 나머지 동물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완전한 휴식은 없다. 가장 사나운 짐승들은 휴식을 취하는 대신 이제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여우와 스컹크와 산토끼들은 이제 두려워하지 않고 들과 숲을 헤맨다. 그들은 자연의 야경꾼이며, 활기찬 삶이 약동하는 낮과 낮을 이어주는 고리다.

 

집에 돌아오면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명함을 두고 간 것을 발견한다. 그 명함이란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환일 때도 있고,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쓴 이름일 때도 있다. 드물게 숲에 오는 사람들이 도중에 나뭇가지를 꺾어서 갖고 놀다가 일부러 또는 우연히 두고 가는 경우도 있다. 버드나무 줄기의 껍질을 벗겨서 고리 모양으로 엮은 것을 내 탁자 위에 놓고 간 사람도 있다.  

 

내가 없을 때 손님들이 다녀갔는지는 구부러진 나뭇가지나 풀잎이나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또는 떨어진 꽃 한 송이, 뜯어서 던져버린 풀 한 줌 같은 사소한 흔적만 보고도, 또는 희미하게 감도는 담배 냄새만 맡고도 나는 손님의 성별과 나이와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300미터나 떨어진 큰길을 어떤 나그네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의 파이프 담배 냄새로 알아차린 적도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대개 넉넉한 공간이 있다. 지평선은 우리 옆에 바싹 다가와 있지 않다. 울창한 숲은 바로 우리 문 앞에 있지 않고, 호수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의 숲은 항상 개간되고 있고, 우리가 자주 다니면서 우리 발에 밟혀 길이 생기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전유물이 되어 울타리가 쳐지고, 이렇게 해서 자연이 개척된다. 이 광할한 땅, 몇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이 인적 드문 숲을 나는 무엇 때문에 내 은둔의 터로 삼은 것일까? 가장 가까운 이웃도 1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고,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으면 내 집 주위의 1킬로미터 안에는 어떤 집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숲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지평선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 한쪽에는 호숫가를 지나는 철도가 저 멀리 보이고, 다른 쪽에는 숲길과 접해 있는 울타리가 아득히 보인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대초원만큼이나 적막하다. 여기는 뉴잉글랜드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나는 나만의 해와 달과 별을 가지고 있으며, 작은 세계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는 내 집 옆을 지나가거나 문을 두드리는 여행자도 없었다. 내가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거나 최후의 인간이라 해도 이보다 더 고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봄에는 이따금 마을에서 메기를 낚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어둠을 미끼로 써서, 자기만의 월든 호수에서 훨씬 많은 고기를 낚았다). 하지만 대개는 세상을 어둠과 나에게 남겨둔 채 빈 바구니로 돌아갔다. 그래서 밤의 어두운 핵심이 인간들에게 더럽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녀들은 모두 교수형을 당했고 기독교 신앙과 양초가 보급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따금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을 싫어하는 불쌍한 사람이나 지독하게 우울한 사람조차도 자연계의 사물 속에서 가장 유쾌하고 다정하고 순수하고 도움 되는 교제 상대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 한복판에 살면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정말로 극심한 병적 우울증은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귀에는 어떠한 폭풍도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그렇지 않은 폭풍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소박하고 용감한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 삼아 살아가는 동안은 어떤 것도 나에게 삶을 부담스러운 짐으로 만들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내 콩밭에 물을 주고 나를 집 안에 묶어두는 저 보슬비는 지루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내 콩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유익하다. 비 때문에 나는 김을 매지 못하지만, 비는 김을 매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비가 너무 오래 계속되어 땅속에서 씨가 썩고 저지대의 감자가 못쓰게 되어도 고지대의 풀에게는 좋을 것이고, 풀에게 좋다면 나한테도 좋을 것이다.

 

이따금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나는 과분할 정도로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듯하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갖지 못한 허가증과 보증서까지 갖고 있어, 신들에게 특별한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우쭐대는 게 아니라 신들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고 고독감에 짓눌린 적도 없다. 그러나 딱 한번, 내가 숲에 온 지 몇 주 지났을 때, 평온하고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가까운 이웃에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시간쯤 한 적이 있었다. 혼자 있다는 게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기분 속에서 약간의 광기 같은 것을 의식했으며, 그런 기분에서 곧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보슬비가 한창일 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 내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풍경 속에 너무나 상냥하고 다정한 교제 상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대기처럼 무한하고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으면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겨졌던 이점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 후로는 그 이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솔잎 하나하나가 공감으로 확대되고 부풀어 올라 내 친구가 되었다. 황량하고 음산하다고 흔히 말하는 곳에도 친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나와 혈연적으로 가깝거나 친절한 존재가 반드시 사람, 특히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는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애도는

슬퍼하는 자들의 목숨을 때 이르게 소모시키니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그들이 사라질 날은 거의 없다.

토스카의 아름다운 딸이여![각주:1]

 

나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은 봄이나 가을에 폭풍우가 오랫동안 지속될 때였다. 그럴 때면 나는 오전만이 아니라 오후에도 집 안에 갇힌 채, 끊임없이 윙잉대는 바람소리와 세차게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일찍 찾아온 황혼은 긴 밤이 올 것을 예고했고, 그러면 나의 숱한 생각들은 밤새 여유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북동풍에 실려와 몰아치는 비가 마을의 집들을 덮치면 하녀들은 집이 물바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현관 앞에 대기해야 하지만, 그런 날씨에도 내 작은 집에 하나뿐인 문은 그 뒤에 앉아 있는 나를 철저히 보호해주었다.

 

한번은 천둥 번개와 함께 세찬 소나기가 쏟아질 때 벼락이 호수 건너편의 커다란 리기다소나무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 벼락은 꼭대기부터 밑동까지 깊이가 3센티미터쯤 되고 너비가 10센티미터쯤 되는 상처를 또렷하게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지팡이에 나선형 홈을 파놓은 것 같았다. 나는 일전에 그 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8년 전 순박한 하늘에서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벼락이 떨어진 그 흔적이 전보다 더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기서는 정말 외로울 것 같아요. 특히 비나 눈이 오는 날, 특히 밤에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주 공간에서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기 있는 저 별의 너비는 우리의 측량도구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데,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왜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사는 행성인 이 지구도 은하수 안에 있잖아요? 당신이 던진 질문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그의 동료들과 갈라놓고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건 어떤 종류의 공간일까요? 두 다리를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두 사람의 마음이 더 가까워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답니다. 우리는 무엇과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 할까요? 많은 사람? 그건 분명 아닐 겁니다. 기차역이나 우체국, 술집, 회관, 학교, 식료품점, 비컨힐이나 파이브포인츠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영원한 원천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어 하겠죠. 물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가 물이 있는 방향으로 뿌리를 뻗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각자의 본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곳에 지하실을 팔 겁니다."

 

어느날 저녁, 나는 월든 거리에서 이른바 '상당한 재산'을 모은 콩코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소 두 마리를 몰고 장에 가는 길이었는데,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포기할 마음이 생겼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런 생활이 그런 대로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와서 침대에 들어갔고, 그 사람이 어둠과 진창길을 더듬으며 브라이턴(보스턴의 도살장)으로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이튿날 아침에야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깨어나거나 되살아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시간이나 장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은 항상 같으며,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에 형언하기 어려운 쾌감을 준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동떨어지고 일시적인 상황만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도록 허용한다. 사실은 그런 상황이 우리의 정신을 교란시키는 원인이다. 모든 사물과 가장 가까운 곳에는 그것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바로 우리 옆에서 가장 위대한 법칙이 계속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옆에는 우리가 고용한 일꾼이나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일감으로 삼는 일꾼이 있다.

 

"천지의 오묘한 힘은 얼마나 성대하고 심오한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질과 일체가 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천하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바르고 밝게 하고 옷을 엄숙하게 차려입고 조상들에게 제사를 바치게 한다. 그것은 오묘한 지혜의 바다다. 그것은 우리 위와 좌우 도처에 있으며,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각주:2]

 

우리는 내가 적잖은 흥미를 갖고 있는 어떤 실험의 대상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잠시나마 서로 어울려 잡담이나 나누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의 기운을 북돋워줄 우리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는 없을까?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각주:3]라는 공자의 말은 참으로 옳다.

 

사색을 통해 우리는 건전한 의미에서 자신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정신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행동과 그 결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급류처럼 우리 옆을 지나쳐간다. 우리는 자연에 완전히 휘말려 있지는 않다. 우리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하늘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보는 인드라일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와 훨씬 더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 실제 사건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인간적 실체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사고와 감정의 무대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초연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이중성이 나에게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강렬한 경험을 해도 그 경험을 고유하지 않고 그저 방관자로서 관찰만 하는 나의 일부가 내 안에 존재하는 걸 의식하고 있다. 그 일부는 남이 아니며, 나 자신도 아니다. 비극일 수도 있는 인생이라는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각자 제 제 갈길로 가버린다. 그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연극은 일종의 허구, 즉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일 뿐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이따금 우리를 형편없는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기 쉽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금세 싫증이 나고 피곤해진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고독만큼 편안한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체로 방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때 더 고독하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항상 혼자다. 고독은 나와 동료들 사이의 거리로는 측정되지 않는다. 벌통 같은 하버드대학의 강의실에서도 정말로 부지런한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고독한 법이다. 농부는 온종일 혼자 밭에서 김을 매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어도 일에 열중해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밤에 집에 돌아오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지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 기분을 풀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온종일 혼자 지낸 자신에게 보상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학생이 밤새도록, 그리고 낮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권태와 울적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생은 집에 있으면서도 농부처럼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자신의 숲에서 나무를 벤다는 것, 그리고 농부와 같은 기분풀이와 교제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농부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제는 대개 값싼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새로운 가치를 얻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하루 세 끼 식사할 때마다 만나서 곰팡내가 날 만큼 오래된 치즈를 새로 맛보라고 서로에게 내놓는다. 그 치즈가 바로 우리다. 우리는 이 잦은 만남을 참을 수 있도록, 그래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예의범절이라고 불리는 일정한 규칙에 합의해야 했다. 우리는 우체국이나 친목회에서도 만나고, 밤에는 난롯가에서도 만난다. 우리는 너무 밀집하여 살기 때문에 서로 방해가 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린다. 덜 자주 만나도 중요한 대화를 얼마든지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꿈속에서도 혼자 있을 때가 거의 없다. 내가 사는 이곳처럼 1제곱킬로미터 면적에 한 명밖에 살지 않는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반드시 만져봐야만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나무 밑에서 굶주림과 탈진으로 죽어가던 남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몸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병적인 상상력이 작동하여 기괴한 환영들이 그를 에워쌌는데, 그는 그 환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면, 그 남자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교제를 통해 계속 기운을 얻을 수 있고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집에는 많은 친구가 있다. 특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에는 더욱 그렇다.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물들과 비교해보겠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떠들썩하게 웃어대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외로운 호수가 도대체 어떤 친구를 갖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호수는 그 파란 물속에 푸른 악마가 아니라 푸른 천사들을 갖고 있다. 태양도 혼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태양이 둘로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는 가짜다. 하느님도 혼자다. 하지만 악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악마는 많은 패거리를 거느린 군단이다. 목초지의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밀브룩(콩코드 시내)이나 지붕 위의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나기, 정월의 눈 녹은 물, 그리고 새 집에 자리 잡은 첫번째 거미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숲에 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이 윙윙거리며 세차게 부는 긴 겨울밤이면 이따금 호수의 옛 개척자이자 원주인이었던 사람이 이따금 찾아온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는 월든 호수를 파서 바닥에 돌을 깔고 소나무로 주위를 둘러쌌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옛날에 있었던 일과 새로 찾아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사과나 사과술이 없어도 서로 사귀는 기쁨과 유쾌한 견해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을 보낸다. 나는 지혜롭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그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월리나 고프[각주:4]보다 더 은밀하게 처신해서 좀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지만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 이웃에는 역시 대다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노부인도 살고 있다. 이따금 나는 이 노부인의 향기로운 약초밭을 거닐면서 약초도 캐고 부인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노부인은 비할 데 없이 풍부한 재능을 가졌고, 그 기억력은 신화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모든 전설의 기원, 그러니까 그 전설이 어떤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도 말해줄 수 있다. 그 사건들은 그녀가 젊었을 때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날씨와 계절도 좋아하는 이 혈색 좋고 활기 넘치는 노부인은 자식들보다 더 오래 살 것 같다.

 

태양과 바람과 비, 여름과 겨울 등 자연의 형언할 수 없는 순수함과 자애로움은 우리에게 영원히 건강과 활기를 준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류와 깊이 공감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하면 자연 전체가 영향을 받을 것이다. 태양의 눈부신 빛은 흐려지고, 바람은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고, 구름은 눈물 같은 비를 내리고,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어뜨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대지와 교감하지 않겠는가? 나 자신도 부분적으로는 나뭇잎과 식물의 부식토가 아닌가?

 

우리를 건강하고 평온하고 만족스럽게 해줄 묘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나 당신의 증조부가 빚은 환약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증조모인 자연이 만든 보편적인 식물성 생약이다. 자연의 여신은 이 약으로 항상 젊음을 유지해왔고, 파 영감님[각주:5]처럼 장수를 누린 수많은 노인들보다 더 오래 살았으며, 그들의 썩어가는 지방을 흡수하여 자신의 건강을 유지했다. 내 만병통치약은 돌팔이 의사가 아케론과 사해의 물을 적당히 섞어서 만든 물약이 아니다. 그런 약은 우리가 이따금 보는 유리병 운반용 마차, 길고 납작한 검은 배 같은 마차에서 나온다. 그런 엉터리 약보다는 차라리 희석되지 않은 아침 공기 한 모금을 마시게 해달라.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에서 이 아침 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아침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아침 공기를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침 공기는 아무리 시원한 지하실에서도 정오까지 버티지 못하고, 정오가 되기 오래전에 병뚜껑을 밀어젖히고 에오스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서쪽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약초를 즐겨 쓴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며 한 손에 뱀을 들고 다른 손에는 그 뱀이 마시는 물이 든 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기념물에 새겨져 있는 히기에이아를 나는 결코 숭배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헤라와 야생 상추의 딸이고 신과 인간을 회춘시킬 능력을 지녔으며 제우스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헤베를 숭배한다. 이 여신은 지구를 걸어다닌 젊은 여자들 가운데 아마 유일하게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춘 건강하고 활달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나 봄이었으니까.

  1. 오시안의 <크로마> 중 [본문으로]
  2. 중용 16장 [본문으로]
  3. 논어 4편 25절 [본문으로]
  4. 청교도혁명 당시의 군사지도자. 왕정복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 [본문으로]
  5. 152세까지 살았다는 영국 노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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