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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월든 - 더 높은 법칙들 본문
잡은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 들고 낚싯대를 질질 끌면서 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졌지만, 그때 마멋 한 마리가 내 앞을 살금살금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는 야만적인 기쁨과 함께 야릇한 전율을 느꼈고, 녀석을 잡아서 날것으로 먹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마멋이 상징하는 야생성에 굶주려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호숫가에 사는 동안, 반쯤 굶주린 사냥개처럼 묘하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새나 집승을 찾아 숲속을 헤맨 적이 한두 번 있었다. 그때는 어떤 짐승의 고기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더없이 거칠고 난폭한 장면에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이 더 높은 삶, 이른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과 원시적으로 야만적인 삶을 갈망하는 본능이 나 자신 안에 공존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나는 이 두 가지 본능을 둘 다 존중한다. 나는 선한 것 못지않게 야생적인 것을 사랑한다. 내가 아직도 낚시를 좋아하는 까닭은 낚시질에 야생과 모험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야생적인 생활을 받아들여 하루하루를 동물처럼 보내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자연과 친해진 것은 어릴 적부터 낚시와 사냥을 한 덕분일 것이다. 낚시와 사냥은 우리에게 일찌감찌 자연을 소개하고 자연의 풍경 속에 우리를 붙잡아둔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나이에는 자연을 거의 알지 못할 것이다.
낚시꾼, 사냥꾼, 나무꾼, 그 밖에 들판과 숲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자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일하는 틈틈이 자연을 관찰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접근하는 철학자나 시인들보다 훨씬 호의적인 태도로 자연을 대한다. 자연은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초원을 여행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냥꾼이 되고, 미주리 강이나 컬럼비아 강의 상류를 여행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덫사냥꾼이 되고, 세인트메리 폭포를 여행하는 사람은 낚시꾼이 된다. 단순히 여행만 하는 사람은 세상을 간접적으로, 게다가 불완전하게 배우기 때문에 진정한 권위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이들이 실제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과학이 보고할 때 우리는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 그런 과학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 즉 인간 경험의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영국만큼 공휴일이 많지 않고 어른과 아이들도 영국인만큼 다양한 놀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즐길 줄 모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이곳 미국에서는 사냥이나 낚시같은, 훨씬 원시적이지만 홀로 즐기는 오락이 다른 오락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대체로 열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에 엽총을 어깨에 멨고, 사냥터와 낚시터도 영국 귀족의 사유지처럼 구역이 한정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크기도 원시인의 수렵지보다 훨씬 넓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마을 공터에 자주 놀러가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동물에 대한 자비심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냥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들 중에서 사냥꾼이 아마도 사냥감의 가장 좋은 친구일 것이다.
호숫가에 살 때 나는 가끔 식단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물고기를 추가하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인류 최초의 낚시꾼들과 똑같은 필요성 때문에 물고기를 잡았다. 물론 낚시에 반대하는 인도주의적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내 생각에 부자연스러웠고, 내 감정보다는 내 철학과 더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지금 나는 오로지 낚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냥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다른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숲으로 들어오기 전에 엽총을 팔아버렸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몰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감정이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고기나 벌레한테는 별로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낚시는 그저 하나의 버릇이었다.
사냥에 대해 변명하자면, 엽총을 메고 다닌 마지막 몇 년 동안 나는 조류학을 연구하고 있었고 처음 보는 새나 희귀한 새만 찾아다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조류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새를 사냥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방법을 쓰려면 새들의 습성에 훨씬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엽총을 기꺼이 버렸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사냥을 반대하면서도, 사냥을 대신할 만큼 유익한 스포츠가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몇몇 친구가 아들에게 사냥을 허락해도 좋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언을 청했을 때, 나는 사냥이야말로 내가 받은 최고의 교육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아이들을 사냥꾼으로 키워보게. 하지만 처음에는 운동 삼아 사냥을 시키고, 가능하면 마지막에는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황야에 나가서도 그가 감당할 만큼 큰 동물은 더이상 찾아내지 못할 만큼 뛰어난 사냥꾼으로 키워보게.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자 잡기도 하는 사냥꾼으로 말일세."
이런 점에서 나는 초서의 작품에 나오는 수녀와 같은 생각이다. 그 수녀는
사냥꾼은 성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털 뽑힌 암탉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1
알공킨족은 사냥꾼을 '최고의 인간'이라고 불렀지만, 사냥꾼이 '최고의 인간'이던 시절은 인류의 역사만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에도 있었다. 엽총을 한 번도 쏘아보지 못한 소년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이가 남들보다 인정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냥에 열중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때가 되면 그들도 사냥 취미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분별없는 소싯적이 지나면 자기와 똑같은 조건으로 생명을 건사하고 있는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산토끼도 궁지에 몰리면 어린애처럼 운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경고하거니와, 나의 동정심은 결코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젊은이는 대개 그렇게 숲을 처음 만나고,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과도 처음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사냥꾼이자 낚시꾼으로 숲에 간다. 하지만 자신 속에 더 나은 삶의 씨앗을 갖고 있다면, 결국에는 시인이나 자연주의자로서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찾고 엽총과 낚싯대를 버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도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냥하는 목사를 보는 것도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성직자는 훌륭한 양치기견이 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목자와는 거리가 멀다.
나무를 베거나 얼음을 잘라내는 따위의 일 이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을 어른이든 아이든 월든 호수에 꼬박 한나절 붙잡아둘 수 있는 일거리는 내가 아는 한 낚시뿐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나절 내내 호수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음에도, 꿰미에 가득 꿸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하면 대개는 재수가 없었다거나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낚시질의 잔해가 호수 바닥에 가라앉고 그들의 목적이 순수해지려면 천 번쯤은 호수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정화 과정은 그동안 줄곧 계속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주지사와 주의회 의원들도 소싯적에 낚시를 하러 갔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월든 호수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고 신분이 고귀해져서 낚시를 하러 가지 못한다. 그래서 월든 호수를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도 죽어서는 천국에 가기를 기대한다. 주의회가 이 호수에 관심을 보인다면 그것은 거기서 사용되는 낚싯바늘의 수를 규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은 입법기관을 미끼로 써서 호수 자체를 낚으려는 낚싯바늘 중의 낚싯바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처럼 미숙한 인간들은 문명사회에 살면서도 인류 발달사의 수렵 단계를 겨우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낚시질을 할 때마다 내 자존감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을 거듭 자각했다. 나는 낚시질을 수없이 해본 사람이다. 나는 낚시 기술이 있고, 많은 동료들처럼 낚시질에 어떤 직감을 가졌고, 그 직감이 이따금 되살아난다. 하지만 낚시를 하고 나면 언제나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미한 암시지만, 첫 아침 햇살도 희미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안에는 하등동물에게나 속할 야생의 본능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인정이 더 많아진 것도 아니고 지혜가 더 늘어난 것도 아니지만, 해가 갈수록 낚시질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낚시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야생에서 살아야 한다면 다시 본격적인 낚시꾼이자 사냥꾼이 되고 싶어질 것이다.
게다가 물고기와 모든 고기에는 근본적으로 불결한 무언가가 있다. 이제 나는 집안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안다. 집을 날마다 깔끔하게, 유쾌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또한 온갖 악취와 보기 흉한 꼴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도 잘 안다. 나는 차려진 밥상을 받는 신사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푸주한이자 설거지꾼이자 요리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남달리 완벽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내 경우, 육식을 반대하는 실질적인 이유는 불결함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물고기를 잡아서 깨끗이 손질한 뒤에 요리해 먹어도 그것이 나를 근본적으로 만족시킨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했고,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았다. 약간의 빵이나 감자 몇 개로 끼니를 해결했다면 수고도 덜 들고 불결하지도 않고 영양도 물고기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동시대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오랫동안 육류나 차와 커피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음식들이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음식이 내 상상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본능이다. 검소한 옷을 입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것이 많은 점에서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완벽하게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내 상상력을 충족시킬 만큼은 해보았다. 자신의 고상하고 시적인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고 애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육류를 멀리하고,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과식하는 것을 삼가려 애썼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커비와 스펜스의 책 2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실려 있다. "성충이 된 어떤 곤충은 섭식기관을 갖추고 있는데도 그 기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곤충학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일반적으로 성충 단계에 있는 거의 모든 곤충은 유충 때보다 먹이를 훨씬 적게 먹는다. 식욕이 왕성한 배추벌레는 나비가 되고... 먹성 좋은 구더기는 파리가 되고 나면" 꿀이나 단물 한두 방울로 만족한다. 나비의 날개 아래 있는 배에는 아직도 유충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맛있는 부분 때문에 나비는 결국 한입거리의 신세가 되고 만다. 대식가는 유충 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온 국민이 그런 상태에 있는 나라도 있다. 그런 국민들은 환상도 상상력도 없고, 커다란 배가 그들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낸다.
상상력을 해치지 않는 소박하고 정결한 음식을 장만해서 요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육신을 먹일 때는 상상력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신과 상상력은 같은 식탁에 함께 앉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과일을 적당히 먹었을 때는 식욕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는 데 방해 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음식에 양념을 지나치게 넣으면 그것은 우리 몸에 독이 된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날마다 다른 사람이 준비해주던 음식을 자기가 직접 준비하는 모습을 남에게 들키게 되면 대다수 사람은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문명인이 아니고, 신사와 숙녀일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남자와 여자는 아니다. 여기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상상력이 왜 살코기나 비계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둘이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치욕이 아닐까? 실제로 인간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고,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덫을 놓아 토끼를 잡거나 양을 도살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삶의 방식은 비참하다. 인간에게 지금보다 해롭지 않고 건강에 좋은 음식만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류의 은인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나의 식생활과는 관계없이 인류는 점점 발전함에 따라 결국에는 육식 습관을 버리게 될 것이고,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야만족이 더 문명화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식인 풍습을 버린 것 만큼이나 확실하다.
내면에서 보내오는 희미하지만 끊임없는 목소리는 분명 진실이지만, 거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목소리가 우리를 어떤 극단이나 광기로 이끌어 갈지 모른다. 하지만 의지와 믿음이 강해지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바로 그쪽 방향에 있다. 건강한 사람은 육식에 대해 희미하지만 확실한 반감을 느끼고, 그 반감은 결국 인류의 주장과 관습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가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식을 포기한 결과로 몸이 약해졌을지는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이 후회스러운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더 높은 법칙에 따른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낮과 밤을 기쁘게 맞이하고 삶이 꽃이나 달콤한 풀처럼 향기를 발산한다면, 그래서 삶이 더 유연해지고 더 별처럼 빛나고 더 영원해진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온 자연이 우리를 축하하고,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을 축복할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가장 큰 이득과 가치는 그 진가를 인정받기가 가장 어렵다. 우리는 그런 이득과 가치의 존재를 쉽게 의심하고, 그것들을 금세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현실이다. 아마도 가장 놀랍고 가장 현실적인 사실들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결코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얻는 참다운 수확은 아침이나 저녁의 빛깔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 손에 잡힌 약간의 우주 먼지이고, 내가 움켜쥔 무지개 조각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식성이 유별나게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때로는 튀긴 사향쥐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아편쟁이의 천국보다 자연 속의 하늘을 더 좋아하며,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술이 아니라 물을 마신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 취기에는 한도 끝도 없다. 현자에게는 물이야말로 유일한 음료라고 생각한다. 포도주는 결코 고상한 음료가 아니다. 한잔의 따뜻한 커피로 아침의 희망을 꺾어버리거나 한잔의 차로 저녁의 희망을 부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런 음료의 유혹에 빠지면 얼마나 낮은 곳으로 추락하겠는가! 심지어 음악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원인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멸망시켰고, 영국과 미국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 어차피 취해야 한다면, 자기가 숨쉬는 공기에 취하는 쪽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힘든 노동을 오래 계속하는 것을 반대하게 된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고 나면 엄청나게 먹고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이런 점에서 전보다 덜 까다로워진 편이다. 식탁에까지 종교를 가져가는 일이 줄었고, 식탁에서 축복을 기도하지도 않는다. 내가 전보다 현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솔직히 고백하자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세월과 함께 더 거칠어지고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듯이 젊은 시절에만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내 실천은 종적을 감추었고, 내 생각만 여기 남아 있다.
베다에는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는 초월자를 진심으로 믿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가 먹는 음식이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준비했는지 묻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나 자신이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인도인 주석자가 말했듯이,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이 특권을 '곤경에 빠졌을 때'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음식을 먹었는데도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저급한 미각 덕분에 정신적 지각을 얻었고, 입천장을 통해 영감을 얻었으며, 언덕 비탈에서 따먹은 산딸기 덕분에 내 천성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 증자는 "마음이 자체를 다스리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음식의 진정한 맛을 분별하는 사람은 결코 폭식가가 될 수 없고, 음식의 진정한 맛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폭식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시의원이 거북 요리를 탐하듯이 청교도도 식탐을 부리며 흑빵 한 조각에 달려들 수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음식을 향한 식탐이 사람을 더럽힌다. 문제는 음식의 질이나 양이 아니라 감각적인 맛에 탐닉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인 생명을 유지하거나 우리의 정신적인 삶에 영감을 주는 양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는 벌레들의 먹이가 될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 사냥군이 자라나 사향쥐같은 야만스러운 고기를 좋아하고 고상한 숙녀가 족발로 만든 젤리나 원양에서 잡아온 정어리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피장파장이다. 사냥꾼은 물방아용 연못을 찾아가고 숙녀는 식품저장실을 찾아가는 게 다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와 여러분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이 끔찍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노릇이다.
우리의 삶은 놀랄 만큼 도덕적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순간의 휴전도 없다. 선이야말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투자다.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하프의 선율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프는 우주의 보험회사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추천하는 외판원이고, 보험료는 우리가 베푸는 작은 선행이다. 젊은이는 결국 무관심해지겠지만, 우주의 법칙은 어떤 경우에도 무관심해지지 않고 항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 편에 서 있다. 바람이 솔솔 불 때마다 귀를 기울여 저 꾸짖는 소리를 들어보라. 그 소리는 듣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사람이다. 하프의 현을 만지거나 괘를 움직이면 어김없이 도덕의 선율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음악으로 들리고, 우리 삶의 천박함을 풍자하는 자랑스럽고 감미로운 선율로 들린다.
인간의 내면에는 동물이 한 마리 들어 있어, 고결한 본성이 잠들면 그것이 깨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동물은 비열하고 관능적이며, 아마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도 우리 몸을 차지하는 기생충과 같다. 우리는 그 동물로부터 멀어질 수는 있지만 그 속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동물이 독자적인 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건강하다 해도 순수해질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일전에 나는 돼지의 아래턱뼈를 주운 일이 있다. 하얗고 건강한 이빨과 엄니가 그대로 박혀 있는 턱뼈였는데, 정신적인 것과 구별되는 동물적인 건강과 활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동물은 절제와 순결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성공적인 삶을 구가했던 것이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것을 금세 잃어버리지만 군자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간직한다." 3고 맹자는 말했다.
우리가 순수한 경지에 이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순수함이 무엇인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 그를 찾아 나서겠다. "정신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데에는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고 육체의 외적 감각을 통제하는 힘과 선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베다는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은 잠시나마 육체의 모든 부분과 기능에 침투하여 그것을 통제할 수 있고, 그리하여 겉보기에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육체적 욕망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 몸가짐이 헤플 때는 쓸데없이 낭비되고 우리를 불결하게 만들지만, 우리가 절제할 때는 우리에게 활력과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천재적 능력, 영웅적 용기, 성스러움 같은 것들은 순결의 꽃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리면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간다. 순수함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불순함은 우리를 나락으로 내던진다.
내면에서 동물적 속성은 날마다 소멸하고 신성한 측면은 확립되어간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인간이다. 자신과 결합되어 있는 열등하고 잔인한 동물적 속성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누스나 사티로스같은 신 또는 반인반신, 즉 짐승과 합체된 신, 욕망의 노예가 된 피조물이 아닐까. 우리의 삶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치욕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짐승들에게 적당한 장소를 내주고
마음의 숲을 개척한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말, 염소, 늑대, 등 모든 짐승을 부릴 수 있음에도
자신은 어떤 짐승의 노새 노릇도 하지 않는 자!
그렇지 않은 인간은 돼지치기일 뿐 아니라
돼지들을 격분시켜 더욱 비참하게 만든 악귀이기도 하다. 4
모든 육체적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국 하나다. 모든 순수함도 하나다. 어떤 사람의 육체적 욕망은 그가 먹든 말든, 마시든 말든, 누구와 살든 말든 또는 자든 말든, 결국에는 똑같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려면, 그가 이런 행위들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하는지만 보면 된다. 불순한 자는 순수하게 서지도 못하고 순수하게 앉지도 못한다. 파충류는 굴의 한쪽 출입구를 공격당하면 다른 출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순결하고 싶으면 절제해야 한다. 순결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자기가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까?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미덕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들은 소문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나 찧을 뿐이다.
힘든 노력에서 지혜와 순수함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육체적 욕망이 나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은 마음의 나태한 습성이다. 불결한 사람은 보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고, 난롯가에나 앉아 있는 사람이고, 해가 떠도 누워 있는 사람이고, 피곤하지도 않은데 쉬는 사람이다. 불결함과 온갖 죄악을 피하고 싶으면, 비록 그것이 마구간을 치우는 일이라 해도 열심히 해야 한다. 타고난 본성은 극복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이교도보다 순수하지도 못하고, 이교도보다 욕망을 자제하지도 못하고, 이교도보다 종교적이지도 못하다면, 당신이 기독교도라는 게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단으로 여겨지는 종교 중에도 그 가르침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해도 새로운 노력을 하도록 자극하는 종교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기가 좀 망설여진다. 하려는 이야기의 주제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나 자신의 불순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육체적 욕망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이야기하지만, 또 어떤 형태의 육체적 욕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우리는 어찌나 타락했는지, 인간 본유의 필수적인 기능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옛날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신체 기능에 대해 경건하게 이야기하도록 법률로 규제하기까지 했다. 현대인의 취향에는 불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인도의 입법자(마누)는 어느 것 하나도 사소하게 넘기지 않았다. 그는 먹는 법, 마시는 법, 남녀가 함께 사는 법, 대소변을 배설하는 법 따위를 가르침으로써 비속한 것을 드높였고, 이런 행위들을 하찮게 다룸으로서 위선적으로 빠져나가려 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바칠 육체라는 신전을 자기 나름으 방식으로 짓는 건축가다. 대신 그 신전 가장자리에 망치로 대리석을 박아놓아서 그 자신도 신전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우리가 쓰는 재료는 우리 자신의 살과 피와 뼈다. 따라서 고결한 정신은 그 사람의 용모를 섬세하게 다듬어놓지만, 천박하거나 감각적인 욕망을 품으면 용모가 짐승처럼 변하기 시작한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존 파머는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날 한 일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끝내고 나서 자신의 지적인 면을 즐겁게 해주려고 문간에 앉은 참이었다. 날씨는 제법 쌀쌀했고, 이웃들 중에는 서리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줄줄이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동안 누군가의 피리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그의 기분과 잘 맞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후렴처럼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흘렀고, 그는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일을 계획하고 궁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피부에서 계속 떨어져 나가는 비듬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리 소리는 그가 일하고 있는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서 그의 귀에 사무치게 들려와,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기능들이 해야 할 일을 제시했다. 피리 소리는 그가 살고 있는 동네와 마을과 나라를 그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몰아냈다.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너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이곳에 머물면서 이렇게 천하고 고된 삶을 살고 있느냐? 저 별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들판 위에서도 똑같이 반짝이고 있는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실제 다른 곳으로 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내핍 생활을 실천하고, 정신이 그의 몸속으로 내려가 육체를 구원하게 하고,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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