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월든 - 경제생활6(본편)

과학주의자 2022. 6. 7. 19:54

1845년 3월 말에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린 뒤 월든 호숫가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호수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으려고, 곧게 자란 소나무들을 재목감으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남에게 아무것도 빌리지 않고 일을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뭔가를 빌려서 이웃들이 당신 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친절한 행위가 아닐까? 도끼 주인은 나에게 도끼를 건네주면서, 그 도끼가 자기한테는 보물 같은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도끼를 더 잘 들게 다듬어서 돌려주었다.

 

내가 일한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쾌적한 언덕배기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였고,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한 숲속의 빈터도 보였다. 호수의 얼음은 군데군데 녹아서 물이 보이는 곳도 있었지만, 아직 다 녹지는 않았고, 온통 어두운 빛을 띤 채 젖어 있었다. 낮에 그곳에서 일할 때면 이따금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철도변으로 나오면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이 아지랑이 속에서 반짝거렸고, 철도 자체도 봄날의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또한 우리와 함께 새해를 시작하려고 벌써 이쪽으로 건너온 종달새와 딱새 같은 새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겨우내 쌓인 인간의 불만도 대지와 함께 녹아내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도끼자루가 빠지는 바람에 호두나무의 생가지를 잘라 돌로 때려서 쐐기를 박아넣었다. 자루가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쐐기를 물에 불리려고 도끼를 호수의 얼음 구멍에 담근 순간, 줄무늬 뱀 한 마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뱀은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적어도 15분 넘게 호수 바닥에 가만히 있었지만 불편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동면 상태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현재의 비참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참다운 봄기운이 자신을 깨우는 것을 느끼면 사람들은 반드시 더 높고 영적인 생활을 향해 일어설 것이다. 나는 전에 서리가 내린 아침 길을 걷다가 여러 번 뱀을 만났는데, 뱀들은 추위에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햇빛이 녹여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초하룻날에는 비가 내리면서 호수의 얼음이 녹았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길 잃은 기러기 한 마리가 호수 위를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잃은 듯이 또는 안개의 정령이라도 되는 듯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며칠동안 나는 도끼 한 자루만 가지고 나무를 베고 깎아서 기둥과 서까래를 다듬었다. 사람들에게 전할 만한 생각이나 학자다운 생각은 별로 하지 않은 채 그저 혼자서 노래만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안다고 말하지.

하지만 보라! 모든 게 날개를 펴고 날아가버렸다.

예술도, 과학도,

무수한 발명품도.

부는 바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아는 전부이다.

 

나는 원목들을 사방 15센티미터 정도의 각목으로 다듬었다. 기둥으로 쓸 나무들은 대부분 양면을 다듬고, 서까래와 마루용 판재들은 한쪽만 다듬고 다른 쪽은 나무껍질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래야 목재가 톱으로 켠 것처럼 고르면서도 훨씬 튼튼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는 다른 연장도 빌려왔기 때문에 목재 밑동에 장부를 깎고 장붓구멍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이어 맞췄다. 내가 숲에서 보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거의 날마다 버터 바른 빵을 도시락으로 싸 들고 갔다. 정오가 되면 베어낸 소나무가지 사이에 앉아 빵을 쌌던 신문지를 펼쳐 읽었다. 손에 묻은 송진이 빵에도 스며들어 소나무 향내가 풍기곤 했다. 집이 다 지어질 무렵에는 소나무의 원수라기보다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소나무를 여러 그루 베기는 했지만, 이 나무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숲속을 어슬렁거리던 사람이 내 도끼질 소리에 이끌려 찾아오기도 했는데, 우리는 내가 일하면서 남긴 지저깨비들 위에 앉아서 즐거운 한담을 나누었다.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공들여 일한 까닭에 집의 뼈대를 갖추고 세울 준비가 된 것은 4월 중순이었다. 판자를 구할 요량으로 나는 철도 인부로 일하는 제임스 콜린스라는 사람의 판잣집을 이미 사둔 상태였다. 그의 판잣집이 꽤 쓸 만하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집을 살펴보러 갔을 때 콜린스는 집에 없었다. 나는 바깥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높은 데다 깊이 들어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집 안에서 내가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 판잣집은 오두막처럼 아담한 크기였고 뾰족한 너새지붕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는데, 집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흙을 두엄더미처럼 한 키 높이로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지붕은 햇살에 말라 뒤틀리고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쓸 만한 부분이었다. 문지방은 아예 없었고, 문짝 밑으로는 닭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마침내 콜린스 부인이 문을 열고 안쪽도 둘러보라고 말했다. 내가 문으로 다가가자 닭들은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대부분이 흙바닥이어서 우중충하고 눅눅한 탓에 학질에라도 걸릴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널빤지가 깔려 있었지만, 떼어내려고 하면 부서질 것 같았다. 부인은 등잔불을 켜서 벽 안쪽을 보여주고, 널마루가 침대 밑까지 깔려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하실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지하실은 60센티미터 깊이의 쓰레기 구덩이 같았다. 부인 말대로 "지붕널과 벽널은 쓸 만하고, 창문도 괜찮은 편"이었다. 창문에는 온전한 판유리 두 장이 끼워져 있었는데, 최근에 고양이만 그리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집 안에 있는 것은 난로 하나, 침대 하나, 의자 하나, 이 집에서 태어난 아기 하나, 양산 하나, 테두리에 금박을 입힌 거울 하나, 그리고 어린 떡갈나무에 못을 박아 걸어놓은 신형 커피 기계가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집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매매계약은 곧 이루어졌다. 그날 밤 안으로 4달러 25센트를 지불하면 그는 이튿날 아침 5시에 집을 비워주고, 그 사이에는 아무에게도 집을 팔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아침 6시에는 내 소유가 될 터였다. 콜린스는 나에게 아침 일찍 오라고 했다. 집터와 땔감에 대해 부당하고 애매한 청구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선수를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골칫거리라고 강조했다.

 

이튿날 아침 6시에 나는 길에서 그의 가족을 마주쳤다. 짐이라고는 커다란 꾸러미 하나뿐이었는데, 그 안에는 침대와 커피 기계, 거울, 닭들, 그러니까 고양이를 뺀 그들의 전 재산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는 숲속으로 달아나 들고양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마멋을 잡으려고 설치한 덫에 걸려 결국 죽고 말았다.

 

나는 그날 아침 판잣집을 허물었다. 못을 뽑아낸 판자들은 손수레로 몇차례에 걸쳐 호숫가로 실어나른 뒤 풀밭에 펼쳐놓았다. 햇볕에 말려 소독도 하고 뒤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숲길을 따라 수레를 밀고 갈때, 아침 일찍 일어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런 와중에 패트릭이라는 아이가 내게 고자잘하기를, 내가 호숫가로 판자를 옮기는 사이에 이웃에 사는 실리라는 사내가 아직 쓸 만한 못 몇 개와 꺾쇠와 대못 따위를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내가 집터에 돌아오면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헐린 자리에 서 있다가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러면서 할 일도 없고 해서 구경하러 왔다고 말했다. 구경꾼을 대표해서 온 셈인데, 그는 이 보잘것없는 일을 마치 트로이의 신상을 옮기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마멋 한 마리가 굴을 파놓은 남향의 언덕 기슭에 지하 저장실을 팠다. 옻나무와 블랙베리의 뿌리를 헤치고 풀이나 나무뿌리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 깊이로, 다시 말해 고운 모래가 나올 때까지 파내려갔다. 사방 1.8미터 너비에 2미터 깊이로 팠는데, 그 안에서는 한겨울에도 감자가 얼지 않을 터였다. 측면은 경사진 그대로 두고 돌로 마무리하지 않았다. 햇빛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모래가 허물어지지 않았다. 이 일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두 시간쯤 걸렸는데, 이렇게 땅을 파는 일에서 나는 각별한 즐거움을 느꼈다. 어떤 위도에서든 땅을 파고 들어가면 일정하고 변함없는 온도를 얻을 수 있다. 도시의 으리으리한 주택에도 지하 저장실이 있고, 그곳에는 옛날처럼 근채류를 저장한다. 지상의 건축물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후세 사람들은 이 지하실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집이란 아직도 동굴 입구에 세운 현관 같은 것이다.

 

마침내 5월 초순이 되었다. 나는 몇몇 지인의 도움을 얻어 들보를 올렸다. 도움이 필요했다기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이웃과 친목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들보를 올리는 데 나보다 훌륭한 일꾼을 거느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더욱 고귀한 건물의 상량식에 참석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