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4.5단계
4단계 사고에 해당하는 세 종교는 모두 축의 시대에 나타났다. 제국이 출현하고, 인류문명이 복잡해지면서, 신화가 더이상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시기가 오자 각지의 문명에서 종교를 탄생시켰다. 종교는 궁극의 의미,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신화를 대신하여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인간이 변했다는 이유로 신화가 종교로 대체되었다면, 종교 또한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도 있다. 지난 200년간 인류는 기계의 힘을 통해 폭발적으로 재화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대규모 중산층을 탄생시켰다. 이 사회는 지속적인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유지가능하다. 이러한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종교도 일정 부분 변해야 한다.
종교의 조건
근대 문명은 전근대 문명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특히 현대인에게 의미를 제공해야 하는 종교에 있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이슈가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탈주술화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주술적 사고가 상당히 약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주장에 근거를 요구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더 힘들어졌다.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도 상당히 약해졌다. 무엇보다 종교는 현대문명을 건설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새로운 지식체계, 즉 과학에 부합해야 한다. 과학과 대립한다고 해서 종교가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충분히 세속화된 대중에게 과학을 부정하는 종교는 노망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종교는 일상을 긍정해야 한다. 이미 현실을 긍정하는 것은 3대 종교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일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근대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권의 개선, 개인주의화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행복 수준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끌어올렸다. 또한 이러한 발전은 중산층, 즉 정신적 가치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수를 폭증시켰다. 이제 사람들에게 현실은 고통이고 이를 탈출해야 한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도피로 들리기 쉽다. 그러한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일상을 보다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심지어 종교는 일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현대의 종교는 인간 진보의 가능성을 수용해야 한다. 전근대 문명은 지속적인 진보를 보장할 수 없었고, 오히려 영원한 순환을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근대는 기본적으로 진보의 시대다. 과학은 발전해야 하고, 새로운 시장은 열려야 하며, 정치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근대는 내일의 세상이 더 좋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만약 종교가 인간 진보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인간 진보를 믿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늙어빠진 헛소리로만 들릴 것이다.
현대인은 과학과 세속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개중에는 내일의 더 나은 세상을 믿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직관에 종교가 부합하지 않는다면 현실에서 힘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힌두교나 낭만주의(혹은 예술)가 이러한 현실에 적응한 예가 될 수 있고, 이어서 소개할 동아시아 불교가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동아시아 불교
필자는 앞에서 계속하여 인도불교와 동아시아불교를 구분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실제로 두 종교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부처를 좇아 해탈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심지어 두 종교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인도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거부했지만 동아시아불교에서는 화엄종 등에서 형이상학적 논의가 이뤄졌다. 인도불교에서는 일체의 고정된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불성도 부정하였다. 하지만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불성을 수용하고 이를 기초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인도불교에서는 현실에서의 삶을 기피하지만, 동아시아불교에서는 현실의 삶을 긍정한다.
이러한 차이는 동아시아불교가 성립 과정부터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 불교도들은 불교 전파를 쉽게 하기 위해 도가의 용어로 불교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불교가 발달하고 더 많은 불경이 유입되면서 약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 결과 동아시아불교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도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고, 도가의 도는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분별을 거부하고 현실에서의 행복을 중시하는 태도도 유입된다.
동아시아불교에는 상당히 많은 분파가 있다. 이를 최초로 통합하려고 한 시도는 천태지자대사의 천태종이다. 그의 주장을 담으려면 책 한권이 필요할 정도이나, 가장 중요한 주장을 뽑자면 번뇌즉보리가 있다. 천태지자대사는 고정된 만물이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공 사상을 발전시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도 깨닫지 못함의 상태로 변화하고,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도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둘 간의 극명한 구분은 불가능하며, 깨달은 부처나 번뇌하는 중생이나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 번뇌즉보리 사상이었다.
천태종 뒤에 나타나 불교학을 완성시킨 종파는 화엄종이다. 화엄종은 세상의 구조에 대해 일즉다 다즉일을 주장하였다. 일즉다 다즉일은 세상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 온 세상이 들어있고, 온 세상이 모두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다. 화엄종에서는 이 세상의 선과 악, 강함과 약함, 삶과 죽음, 번뇌와 깨달음 모두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온 세상이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온 세상은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이미 영원한 삶과 죽음이 주어져 있다. 더 나아가 화엄종에서는 깨달은 존재인 부처도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화엄종의 번성기에 나타났던 파지옥게송에 잘 나타나 있다.
응당여시관
應當如是觀
응당 관찰할 지어다
심조제여래
心造諸如來
니 마음에서 모든 부처가 만들어진다
화엄종 이후에 나타난 선종은 경전을 통한 공부보다는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선종은 자신의 수행을 요약하며 견성성불이라고 표현했다. 화엄종의 연장선상에서 선종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부처라고 주장했다. 온 세상이 다 나에게 들어있고, 깨달음과 모든 부처도 이미 다 들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부처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도에 따르는 것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가 아닌줄 착각해서 고통이 발생하며, 우리 자신의 본성을 관찰하여 그것을 알아차리면 깨닫게 된다고 선종에서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지 하에 선종은 심지어 수행하지 않는 일반인마저도 이미 다 깨달은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리는 비록 불교는 아니더라도 양명학에서도 반복된다.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경전이나 도덕책은 단지 그것을 해설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후기 양명학에서는 욕망 추구처럼 악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사실은 선의 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양명학과 선종 모두 일상을 살며 욕망을 추구하는 개개인도 모두 깨달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욕망추구 모두 수행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을 수도 있다.
동아시아불교의 해석
동아시아불교는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인도불교와 많은 차이가 난다. 동아시아불교는 인도불교와 달리 현실과 현실에서의 삶을 긍정한다. 해탈은 삶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집착으로 인해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깨달은 부처이다. 깨달은 자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은 둘 다 동의한다. 하지만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이미 우리는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동아시아불교를 불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도 구별되게 해준다.
동아시아불교는 과학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는 불교 전반에 해당하는 사실이다. 비록 윤회나 3계는 과학적 사실과 어긋나지만, 물질의 순환이나 주관적 현실로 대체하면 교리가 크게 손상되지 않으면서 핵심은 전달된다. 동아시아불교의 경우도 과학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는 않으며, 사실 이 부분에서는 아직 과학적 앎이 미진하다. 고정된 사물이 없다는 것도 과학과 일치한다.
일즉다 다즉일은 2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도 온 우주의 법칙이 거기 적용되고, 그 물질과 에너지가 모여 우주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혹은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 마음은 실제로 온 세상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객관적 현실을 모사하는 주관적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관적 현실은 외적인 조건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는다. 이는 모든 사물이 다른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것과 같다. 마음은 세상을 만들어내고, 그런 마음은 사실 세상과 하나이다.
또한 동아시아불교는 현실의 삶을 긍정한다. 동아시아불교는 신성함을 깨달은 영웅뿐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부여한다. 세상을 초월하여 온 세상을 통할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여 그 형태는 유한하나 그 자체로 이미 영원한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체이다. 신성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은 없다. 세상의 사건 하나하나,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성한 것이다. 궁극의 지혜와 권능은 바로 현실의 삶에서 표출된다.
그럼에도 동아시아불교는 몇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동아시아불교는 진보의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 진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오랜 기간 불교는 세상의 진보보다는 현상유지에 기여해왔다. 게다가 얼핏 보면 동아시아불교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듯하다. 모든 존재에 선과 악이 들어있다면, 온 세상이 선하다는 논리와 온 세상이 악하다는 논리가 동시에 성립한다. 비록 화엄종과 선종은 선을 강조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거기에 논리적 근거를 대기는 힘들 것 같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논리적 근거가 아니라 영적 경험이 요구된다. 그것이 필자가 앞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이기도 하다.
자비
온 세상이 그 자체로 완전하며 신성하다는 주장은 악을 정당화할수도 있다. 이미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인도불교에서 적대하는 욕망마저 긍정하였다. 그렇다면 살인과 강간, 학살, 전쟁을 정당화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실 이러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그래서 선과 악의 구분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을 완전히 철폐한 종교가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힘들 수 있고, 실제 스님이 경험한 바와도 맞지 않다. 필자도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온 세상이 완전하며 신성하다는 주장은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모든 존재에 죽음과 고통이 산재해 있으며 악이 가득하다. 이 세상은 절망과 고통의 바다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슬프게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슬펐다. 설령 내가 깨달아 마음의 평안을 얻더라도, 다른 모든 세상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깨달음은 필요없다. 나는 차라리 깨달음을 버리고 나도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과 죽음에 쌓인 모두를 어떻게든 돕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반하고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의 양심이 나를 고통받는 세상을 향해 이끌었다. 관세음보살이 해탈을 거부하고 고통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였듯이.
이것은 나의 결단이자, 기적이었다. 내게 느껴지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세상을 향한 나의 자비심은 커졌다. 고통은 자비로 이어져, 고통을 치유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깨달음을 거부하는 이 모습은 바로 부처의 모습이었다. 싯다르타가 가장 강조한 덕목은 자비가 아니었던가.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붓다였다. 세상의 악은 자비를 일으켰고, 깨달음을 포기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확실한 부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내던지고 중생을 향하는 행동은 자신이 부처라는 주장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자비를 통해 악이 극복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악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비도 강해진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하나고, 악과 자비도 하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비가 발생하는 근원은 타인의 고통을 아파하고 도우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나의 마음이자, 동시에 세상의 의지이기도 하다. 세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이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또한 신성하고 완전한 세상의 모습일 뿐만 아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본 모습이자, 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이러한 주장을 논리로 납득시키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물론 영적 체험은 보통 강렬한 이타심을 동반하기 때문에, 영적 체험을 거친 사람은 이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고통에서 자비가 태어나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오직 이 글을 보는 이들이 각자의 수행을 통해 이를 경험하여 깨닫는 수밖에 없다. 명상이나 수행, 혹은 선종에서 말했듯이 일상생활이나 욕망의 추구가 이를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4.5단계 사고
4.5단계 사고는 동아시아불교의 관점을 통한 세상의 이해이다. 4.5단계 사고에서 세상은 자연법칙, 즉 도에 따라 움직인다. 이 도는 항상 변화하며, 항상 변화하면서 모든 선과 악, 강함과 약함, 삶과 죽음이 만들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 도의 발현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신성하며 완전하다. 그 안에 있는 개개의 사물 모두에 온 세상이 들어있고, 본질이 같은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세상이다. 이 원리를 간단히 표현한다면 자연, 변화, 그리고 자비로 표현할 수 있다. 비록 온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만, 이 악은 자비를 통해 상쇄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온 세상에 자비의 빛이 내리쬐는 그곳이 바로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삶과 죽음은 변화의 한 단면이다. 삶은 반드시 죽음을 낳고 죽음은 반드시 삶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두에 자비가 내리쬐어 삶에는 행복이, 죽음에는 안식이 내려진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곧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4.5단계 사고에서 나의 죽음은 없다. 물론 육체적인 나의 죽음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육체적인 나 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그 변화하는 세상 전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이미 부처이다. 우리는 이미 영웅이고, 신이며, 초월해있다. 그런 우리는 세상의 고통에 아파하여 자비를 베푼다. 우리는 도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타인을 도움으로서 세상 곳곳에 자비의 빛을 내린다. 우리의 삶은 나와 모두에게 따사한 자비의 빛을 내리는 과정이며, 그것을 매순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여 나와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그러한 일을 하는 자신이 곧 세상이고 부처라는 것을 매순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이다.
4.5단계 사고의 장점은 그것이 현대인에게 더 부합한다는 점이다. 4.5단계 사고에서는 우리가 이미 궁극의 지혜를 얻어 초월해있고, 현실은 그것이 실현되는 장이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발산되는 자비가 모든 인간에게 내리쬐고, 문명의 진보는 그러한 자비가 작동하는 한 방편이다. 무엇보다 4.5단계 사고의 특징은 아이러니하게도 1단계 사고와 가장 부합한다는 점이다. 자연과 비자연의 구분을 거부하고 현실과 괴리된 초월의 세계를 거부하며 과학적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은 4.5단계 사고와 1단계 사고의 공통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4.5단계 사고에서 바라본 현실은 객관적 현실과 가장 유사하다.
세상은 이미 완전하고, 신성하며, 아름답다. 온 세상 곳곳에 자비가 깃든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있다. 삶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나는 세상과 하나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내가 이미 완전하고 신성하다는 점을 깨닫는 것, 그리고 나의 본성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며 자비를 베푸는 것, 그것이 4.5단계 사고에서 제시하는 우리의 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세상과 삶을 이해하게 해주었고, 평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과제는 남아있다. 여러 외적인 이유로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그러한 평온과 행복이 사라질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잊지 않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