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인간의 윤리학 - human being과 human doing
홉스는 자신의 유명한 사회계약 이론을 인간에 대한 단순한 가정으로 시작했다. 그는 인간을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정의하고, 여기서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연역해 내었다. 이러한 가정을 택한 이유는 내전과 쿠데타로 점철된 당대의 혼란했던 사회상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러한 가정이 가져오는 편리함과 유용성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은 먼저 인간관의 필요성과 판단기준에 대해 논하고, 인간을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과 운명을 개척하는 인간으로 가정한다. 이후 이 가정의 장점에 대해 얘기하고, 여기서 도덕의 위치를 끌어낸다. 이때 인간관이란 인간에 대한 단순한 가정으로,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나 마르크스가 했던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주장이 인간관에 해당한다.
왜 인간관인가?
현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이제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심리학과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가 인간의 행동과 본성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쌓게 도와주었다. 비록 아직도 탐구할 많은 주제가 남았지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전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옛날에 있었던 어떤 논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제 답을 할 수 있는데,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에 대해 심리학과 경제학, 생물학은 다채롭고 명료한 설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현대과학적 입장은, 비록 정확하기는 하나 여러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중 하나는 현대과학이 밝혀낸 인간의 복잡다양함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은 인간이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수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점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심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이타적이라는 점도 충분히 증명하였다. 과학자들은 태어나면서 인간이 가지는 선함과 함께 태어나면서 가지는 악함도 발견하였다. 인간은 사회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지만, 그 중 어떤 것은 고정되어 있고 선천적이다.
개인차와 자기실현적 예언은 과학적인 인간이해를 더 복잡하게 한다. 21세기에 들어 과학자들은 우리가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조두순으로 만드는 강한 유전적 압력을 받는다. 반면 다른 사람은 그를 테레사로 만드는 강한 유전적 압력을 받는다. 유전자뿐만 아니라 태내 환경, 가정환경, 청소년기 경험, 사회문화적 배경이 사람들을 서로 판이하게 다르게 만든다. 이처럼 사람들의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어떠한 가정도 설명력이 제한되며 하나 이상의 반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인간의 심리적 특성이 사회적 합의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어떤 한국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의 일부는 유교에서 제시한 인간상과 비슷하다. 반면 서구 문화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대표되는 이기적 인간상을 흔히 가정하는데, 실제로 서구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행동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더욱 중요시한다. 정서는 능히 통제될 수 있다고 믿는 동양인은 정서를 억압해도 큰 문제가 없는 반면, 정서는 통제될 수 없고 통제되어서도 안된다고 믿는 서양인들은 정서 억압이 큰 심리적 문제를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어떤 심리적 특성은 그 사회와 개인의 믿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적 본성은 사회와 개인의 믿음에 따라서도 변한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 매우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인간관을 가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논증하는 일은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가정하는 인간관은 실제 인간 본성보다 훨씬 단순해서, 그만큼 공리로 차용하여 논리를 전개해나가기 굉장히 수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인간 이타성에 대한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정을 고수하는데, 이러한 가정에 기초한 이론들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복잡한 특성을 '인간관'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여 도덕논증의 토대로 삼는 일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인간관의 판단: 어떤 인간관이 좋은가?
이 글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떠한 가정을 한 후, 여기에서 도덕법칙의 위치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논증을 이끌어 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논증에 사용할 인간관이 필요한데, 이때 우리는 모호한 가정을 사용할때 종종 부딪히는 문제들에 다시 부딪힌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들이 있는데, 그중 무엇이 가장 좋으며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어떤 인간관을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하여 인간관은 모두 틀렸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인간은 서로 대립하는 여러 특성을 가진 복잡다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단순한 가정'인 인간관은 모두 인간의 일부 특성만을 보여준다. 이기적 인간은 인간의 이기적 특성만 보여주고 이타적 인간은 인간의 이타적 특성만 강조하며, 두 인간관 모두 실제 인간과 다르다.
과학적 잣대를 들어 인간관을 폐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관의 언어적 형태를 바꿔야 한다. 즉 인간관은 '인간은 a이다'가 아니라 '나는 인간을 a로 본다'의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가령 '인간은 이기적이다.'는 명제는, 실제 인간이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의 이타적인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거짓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해석한다.'는 명제는 나의 생각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보통 참이며 과학적 사실과 대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관을 '나는 인간을 a로 본다'라는 형태의 문장으로 바꾸면 우리는 안전하게 인간관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인간관의 판단불가성은 아직 남는다. 이기적 인간과 이타적 인간이라는 두 대립하는 관점을 보자. 하나는 '사람 a는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해석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b는 인간이 이타적이라고 해석한다'이다. 이는 모두 참이고,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하지만 우리가 어느 인간관을 차용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때 생긴다. 나는 사람 a도 아니고 사람 b도 아닌데, 과연 어떤 인간관을 사용해야 하는가? 모두 참인 두 인간관의 우열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인간관들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모호하고 주관적인 인간관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실 객관적 평가란 것은 없을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 글의 결론도 아주 특정한 인간관에 동의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필자는, 실용적으로 인간관을 평가하는데 유용한 기준을 2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기준은 인간관뿐만 아니라, 보통 '세계관'이나 '관점'이라 불리는 다른 유형의(그러나 문장 형태는 비슷한) 것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필자가 제시하는 두 기준은 유용성과 동의성이다.
동의성은 어떠한 인간관에 대해 사람들이 동의하는 정도이다. 가령 '인간은 악하다'는 인간관은 유학자들에게 동의를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학자들은 보통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맹자의 주장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선하다'는 인간관은 맹자와 부합하기 때문에 유학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이때 성선설은, 유학자들을 대상으로 할때, 성악설보다 동의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전체 인류에 대해 어떤 인간관이 동의성이 높다면, 그 인간관은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의성이 높은 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 인간관을 받아들일 것이고 수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용성은 어떤 인간관이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이다. 가령 경제학자들은 흔히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가정하는데, 이러한 가정은 그들이 현실과 맞는 경제이론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이 경우에 '이기적 인간'은 유용하며, 따라서 경제학 연구에 있어서는 타당한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마르크시즘은 경제학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사람들을 규합하고 저항하게 만드는 데에 마르크스적 인간관은 많은 도움이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적 인간관은, 사회운동과 저항에 있어서 타당한 인간관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객관적인 윤리이론을 도출한다는 명확한 목적 하에 있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 유용성이 동의성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동의성이 높은 윤리이론은 받아들여질 확률도 높은 만큼, 동의성도 나름대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겠다. 따라서 유용성과 동의성은 앞으로 필자가 전개할 인간관을 평가하는 두 기준이 될 것이다.
human being과 human doing으로서의 인간
여기서 필자가 제시할 인간관은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뒤랑은 세계 각지의 신화와 종교, 철학, 문학을 연구한 후, 모든 신화가 낮의 이미지와 밤의 이미지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낮의 이미지는 보통 자연으로 상징되는 주변환경을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반면, 밤의 이미지는 반대로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탄생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필자는 뒤랑의 이론을 자세히 서술하는 대신, 중요한 함의만 일부 가져와 필자의 인간관을 전개하는데 사용하고자 한다. 이 인간관은 인간이 낮의 속성과 밤의 속성, 진보의 속성과 자연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이 둘은 서로 상보적이다. 이때 낮의 속성을 human doing, 밤의 속성을 human being으로 부른다.
human being
인간에 대한 여러 신화적/종교적/문학적 문헌들을 보면, 인간에 대한 다소 운명론적이고 순환적인 묘사가 발견된다. 가령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생과 멸을 반복하며,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하게 욥기에서는 알수 없는 이유로 야훼의 저주를 받은 욥이 야훼에게 항변하자,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신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일갈을 듣는다. 그리스 비극은 초반에 주인공의 운명을 예언이나 신탁의 형태로 제시한 후,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파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뒤랑은 이처럼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서사와 이미지를 정리해 이를 밤의 체제라고 불렀다. 밤의 체제에서 인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유한성과 나약함, 그리고 자연법칙의 엄격함은 비단 신화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엄밀한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물리법칙과 생물학적 법칙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법칙마저도 우리는 지배한다.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중력을 거스를수 없고, 모든 인간은 결국 생이 다하여 죽고 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다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죽었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나약해서, 국가적 혁명에 비해서는 아주 사소한 일인 다이어트계획이나 금연 계획도 실패하여 매년 작심삼일에 그친다. 자연과학적 법칙은 불변하며, 사회과학적 법칙은 바꾸기 매우 힘들고 개인의 심리적 본성을 바꾸는 일도 우리에게 아주 버겁다.
아무리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라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모두 죽음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몸소 증명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된 후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상이 꺾이고 현실에 순응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절절하게 느낀다. 크게는 물리법칙의 엄밀함에서 작게는 끝내 못참고 치킨을 시키고 마는 우리의 모습까지, 인간은 자신이 자연(과 사회)의 일부이며 그 섭리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being)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human being)이다.
human doing
여러 신화적/종교적/문학적 문헌들은 인간의 유한성도 묘사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진취성과 가능성도 묘사한다. 영웅담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데, 절대다수의 문화권에서 나오는 영웅담은 항상 주어진 환경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영웅을 그린다. 이들은 자연을 상징하는 괴물을 무찌르고, 검을 들어 정의를 바로세운다. 심지어 운명에 패배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저항과 용기는 두고두고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 비극에서 많은 영웅은 운명에 패배하여 파멸하였지만, 극작가들은 영웅을 찬미하며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많은 종교에서 순환적이고 변하지 않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유독 일신교에서는 직선적인 세계관을 가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역사는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이며, 결국 신의 섭리에 의해 정의가 실현되고 만다. 이처럼 어떤 세계관은 자연의 섭리가 가진 강고함을 인정하더라도, 정의실현의 가능성 또한 인정한다. 사실 현대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공산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즘을 비롯한 다른 신좌파 사상도 저항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정의가 실현되리라고 보는 서사와 이미지를 뒤랑은 낮의 체제로 정리했는데, 낮의 체제에서 인간은 무궁한 가능성과 능력을 통해 자연과 투쟁한다.
인간의 진취적이고 진보하는 성질은 현대에 들어 더욱 두드러졌다.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가난은 하늘도 어찌할 수 없으며, 신분은 자연의 섭리로서 극복할 수 없었다. 사실 진짜 자연의 섭리인 호환(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막기 힘들었다. 그러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촉발된 이후 우리는 절대빈곤율을 극적으로 감소시켰고,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시켰으며, 이제 한국에서 호랑이는 절멸되었다. 지난 2000년에서 200년전까지 일어난 일보다. 지난 200년간 일어났고 이루어진 일이 더 많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한 일이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 누군가들의 투쟁과 노력이 이룬 결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은 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존재한 존재 중 어떤 것도, 자신의 의지와 편의를 위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성과 별은 매우 크고 에너지도 엄청나지만, 그들은 오로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며 탄생하고 파괴된다. 생물은 자신의 생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환경을 조작하지만, 그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 어느 동물과 식물도 전 지구의 기후패턴을 200년 안에 바꾸거나, 높이 800m의 산을 10년안에 쌓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떠한 새도 대기권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으며, 어느 누구도 지구를 넘어 달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를 창조하고,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며, 달에 사람을 보냈다. 무엇보다 현재 인간사회의 정치경제시스템은 인간에 대한 영향을 넘어서 자연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세상은 기존의 자연법칙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과학법칙의 지배도 받게 되었다. 지표면의 광물 이동과 결합은 경제학의 지배를 받으며, 정치적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정치학적 법칙은 이제 특정 생물종의 생존여부도 결정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넘어서 아예 새로운 자연법칙을 창조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과학적 법칙은 자연과학적 법칙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게 되었는가? 인류의 역사와 근대의 역사를 볼때, 인간의 능력은 지성과 사회성, 의지력에 기인한다. 이 세 특성은 모두 인간이 유별나게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통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존재로서 항상 같이 살아가면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사회조직을 구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주어진 상황을 조작하려고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간을 가장 성공적인 종 중 하나로 만들었고, 특히 이것들이 과학과 국민국가/시장경제, 그리고 계몽주의적 인간관으로 꽃피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지성과 사회성, 의지력에 기초하여 인간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상을 조작하고 바꿔나가며 새로운 법칙을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비록 아직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doing)하여 세상을 바꿔나가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위해 행동하는 인간(human doing)이다.
human being-human doing 인간관의 장점
얼핏 존재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은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human being으로서 인간은 자연법칙으로 주어진 자신의 본능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지성과 사회상, 의지력이 모두 포함되며, 주어진 상황을 조작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한편 human doing은 세상을 조작하기 위해 세상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듯이,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human being과 human doing은 다르지 않으며, 둘은 같은 인간 본성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human being-human doing 인간관의 장점은 그것이 전세계에 걸친 신화적 전통과 닿아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인간관은 질베르 뒤랑의 이론에서 가져왔으며, 뒤랑이 제시한 낮의 체제와 밤의 체제는 human doing과 human being에 각각 대응된다. 즉 이 인간관은 뒤랑의 경유해서, 전세계의 신화와 종교들에게 지지를 받는 셈이다. 또한 운명에 대한 순응과 저항의 대립구도는 오랜 세월 여러 문화권의 문학에서 나타났는데, human being-human doing 인간관은 운명론과 개척론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에 두 관점을 지지하는 각각의 사람들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사실 운명과 노력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보통 사람들은 어느 한쪽을 택하는 대신 둘 다 있다고 인정하며 논의를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human being-human doing 인간관의 진가는 그 유용성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이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human doing으로서 기존에 자연에 없던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내고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도덕법칙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동시에 그러한 도덕이 언제 어떻게 유의미한지 얘기할 수 있다.
도덕의 자리
윤리학의 역사는 소급하면 적어도 2000년은 넘지만, 아직도 어느 것이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인지는 확립되지 않았다. 공리주의와 덕윤리를 비롯한 다양한 윤리이론이 있지만, 이들 학파 간의 우열을 평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학자들은 윤리이론의 근거를 자연에서 가져와 이론을 단단히 하려고 하고, 실제로 자연법 사상은 그 근거를 자연에서 찾는다. 하지만 자연법 사상을 비롯해 자연에 공고한 토대를 두려는 윤리이론들은, 마지막에 자연주의의 오류에 좌초된다.
이러한 혼란은 부분적으로, 실제 도덕법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도덕법칙은 실제 자연에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은 (자연주의 오류에서 그러하듯이)그저 자연법칙이지 도덕법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자들은 도덕법칙을 새로 만들어야 하며, 도덕법칙은 자연에 대한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역으로 자연을 조작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도덕법칙이 과연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 어떻게 도덕법칙을 만들어야 할지, 과연 무슨 기준으로 도덕법칙을 판단할 수 있는지는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human being-human doing 인간관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몇가지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먼저 이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human doing으로서 자연법칙을 새로 창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법칙은 비록 그것이 실제 자연법칙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대립하더라도 실제적 의미를 가지고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human being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을 실현하기보다는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종합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을 실현할 수도 있고,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모순처럼 보인다!
모순을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은, 우리가 human doing인 부분과 human being인 부분을 나누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소기업 사장인 나는 내 직원들은 통솔할 수 있지만, 내 거래처는 통솔할 수 없다. 무직 백수인 나는 파판 만렙은 찍을수 있지만, 리니지 만렙은 찍을수 없다.(리니지 만렙은 돈이 많이 든다) 이를 위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서만 도덕법칙을 실현할 수 있으며 반대로 할 수 없는 일에서는 도덕이 무의미하다.
한편 human doing로 구성된 사회는 필연적으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원하는 이상과 목표는 다르고, 이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교 원리주의자와 페미니스트의 이상은 서로 대립되고, 결국 어딘가에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성과 사회조직을 통해 자연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human doing은 반드시 사회를 이루어야 존재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human doing으로서의 우리는, 각자의 human doing간 충돌을 조정하고 사회를 구성할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한다. 홉스의 이기적 인간이 모두를 보호할 규율을 요구하듯이, 우리의 human doing도 서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조정할 규율을 요구한다.
이런 논의에서 2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human doing으로서의 인간은 서로의 능력과 가능성을 조율하고 제어할 규칙을 필요로 한다. 이 규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두가 준수해야 하며 지향하는 당위가 되어야 한다. 심지어 서로가 옹호하는 당위적 기준(도덕관)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는 준수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홉스에서도 그랬듯이 서로를 보전하고 보장하려면 서로의 조율 규칙이 먼저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의 비존재함과 당위성을 들어 여기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즉 도덕은 행동하는 인간들 사이를 조율하는 사회적 규칙이며, 이것이 human doing들을 조율하는 적절한 규칙인지 평가하여 도덕법칙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다.
한편 human doing의 조율 규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은, human being에 있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human being은 그 법칙을 실현할 능력이 없고, 그러한 법칙이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human being 간 갈등은 사회과학법칙에 의해 조율된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나의 투표참 수여는 도덕의 대상이 되지만, 나의 성적 지향은 도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에서 많은 경우 투표권은 언제든 행사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사람의 성적 지향을 바꿀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human doing은 무슨 꿈을 꾸는가
앞에서 우리는 질베르 뒤랑의 상상력 연구에서 특정한 인간관을 도출하고, 이 인간관에 기초하여 도덕의 위치를 재정립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이자, 동시에 자연을 개척하고 개선하는 행동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하는 인간은 서로 가치관과 목표가 달라 충돌하기 때문에, 이들을 조율할 규칙이 필요하다. 이 규칙이 바로 도덕이며, 따라서 도덕은 우리가 무언가 행동할 수 있는 영역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영역과 행동할 수 없는 영역을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어떤 일은 명백히 우리가 할 수 있고, 어떤 일은 명백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일들은 그 중간에 있어서, 우리가(혹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한 기준은 확실하지 않으며, 판단은 개인의 성격과 제반 환경,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필자는 그러한 경우 일단 human doing의 영역으로 가정하고 도덕을 실천하라고 제안하는데, 왜냐하면 필자는 도덕이 실현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판단을 하는 일 자체가 human doing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한편 이 글에서는 도덕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직도 우리는 이 human doing들이 롤스주의를 택할지, 자유지상주의를 택할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필자는 다음 글에서 human doing들의 도덕은 human doing의 가상적 사회계약에서 도출되며, 이 사회계약은 순서대로 인권과 차등원칙, 공리주의를 도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