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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숫자-ㄱ

과학주의자 2022. 5. 24. 19:48

4월의 노래(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둔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둔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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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꽃(서지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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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이호우)

 

 

꽃이 피네 한잎 두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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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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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백기만)

 

그대여!

나는 이 땅을 떠나갑니다.

멀리 멀리 삼만리나 아득한 저편

북극이란 빙 세계를 찾아갑니다.

 

거기는 세간 물결이 못 미치는 곳

추악도 없고 갈등도 없고

눈과 얼음이 조촐하길래

순박한 백곰들의 낙원이라오.

 

영롱한 얼음판에 뛰고 뒹굴고

발가벗은 몸으로 살아가려는

밤에는 등불 없이 달 돋아오고

외로울 때 백곰과 춤추렵니다.

 

오오 그대여, 안녕히 계셔요!

이제는 아무래도 떠나렵니다.

조그만 내 가슴에 불이 붙어서

언제나 식을 날이 찾아오려나.

 

만약에 나 간 뒤에 누가 묻거든

머나먼 곳으로 갔다고 해요.

외로운 그림자를 사랑 심어서

울며 웃으며 비틀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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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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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꿑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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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나태주)

 

 

보고 싶었다 

많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남겨두는 말은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입속에 남아서 그 말

꽃이 되고

향기가 되고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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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이구락)

 

 

노을에 젖은 고로쇠나무 지나

사람들은 바람 속을 굳은 얼굴로 지나갔다

이웃이 집을 짓고 겨울채비를 하고

더러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동안

나는 가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까닭 없이 몸이 아파왔다

열이 내리면 횃불 같기도 하고 사랑 같기도 한

가을앓이. 행간 사이로

부질없는 송신의 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잠시 반짝이던 때 묻은 희망의 새벽 지나

야윈 햇살아래 내려서니

고로쇠나무는 잎을 모두 버리고

좀더 나이든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문 앞에 나와 석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시 행간 사이 자욱한 노을이 지고

오리무중의 수상한 잠 속으로

나는 천천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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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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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줘요(아르튀르 랭보)

 

 

날 기억해줘요

나 가고 없을 때

머나먼 침묵의 나라로 나 영영 가버렸을 때

당신이 더이상 내 손을 잡지 못하고

나 되돌아가려다 다시 돌아서버리는 그대에

날 기억해줘요

당신이 짜냈던 우리들 앞날의 계획을

날마다 나한테 이야기할 수 없게 될 때에

날 기억해주기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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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최재목)

 

 

나무마다 꽃망울이 맺혔다

우리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다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꽃이 될 만한 그리움을

누구나 가슴에 안고 걷는다

새로 심은 몇 그루의 덩치 큰 가로수들은

부축을 받았다

잘려나간 아카시아 숲엔 곁가지가 빛난다

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

허공에도 깊은 파도가 있다

찢어지지 않은 것들의 흰 속을

죄다 들여다 볼 순 없지만

등이 휜 참나무 숲은, 겨울동안

참 많이도 흔들렸을 것이다

산에 묻혀서 산 밖에 모르는 길이

봉우리에서 끝났다면,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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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北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約束(약속)이며!

 

한 바다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城에는

나비처럼 醉(취)하는 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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