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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읽기]역사의 승자는 프라뇨 투지만인가

과학주의자 2022. 5. 23. 23:10

원문:https://angelusnobus.tistory.com/199?category=757026

 

남유럽 끝자락의 조그마한 땅 발칸 반도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질게 없다. 인구도 적고, 경제수준도 낮은데다, 그리스나 끽해야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볼만한 관광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는 그 역사의 복잡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관심을 받아왔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이후 잔혹한 인종청소가 결합된 인종분규가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현재 발칸 반도는 1차대전 직전의 발칸 반도와 같이 세계의 화약고로서 뭇 역사가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앙겔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여러 숨은 지식인 중 하나로, 주 전공은 역사학이었으며 본인도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앙겔 글 특유의 복잡함으로 인해 이 글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제목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프라뇨 투지만을 중심 주제로 놓을때 글이 정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인 프라뇨 투지만(Franjo Tudman)을 소개하면서, 앙겔은 유고의 붕괴와 크로아티아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본문

유고의 성립과 유지에서 티토의 기여는 엄청났다. 2차대전 당시부터 티토는 적절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반대진영인 서방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성립된 이후에도 적절한 중립외교와 동화정책을 통해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또한 범러시아권에 속하는 동슬라브인이나 체코, 폴란드 등과 연결되는 서슬라브인과 달리, 두 번에 걸쳐 상호 학살전을 벌였던 남슬라브인들을 같은 국가 아래 통합한 것은 티토가 유일했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에서 그리스를 아우르는 지역에 분포하는 남슬라브인들을 통합시키고 한 나라로 유지시킨 지도자는 티토가 유일했다.

 

그러나 티토가 죽으면서, 사실은 티토 집권기 말부터, 통합되었던 유고인(과 남슬라브인)들은 다시 분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은 민족을 제외하더라도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분열은 필연이었다. 비록 티토 사후에도 유고슬라비아는 산하 6개 공화국이 대통령을 순차적으로 배출하면서 국가를 유지했지만,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밀로셰비치와 같은 민족주의자가 발흥하면서 국가의 유지가 한계에 부딫히고 분열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고의 분열은 발칸 반도의 주요 국가들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그리고 실질적인 유고의 중심국가였던 세르비아의 갈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라뇨 투지만은, 이때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일찍이 티토와 함께 공산 게릴라에 참여했던 투지만은, 전후 역사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역사학도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하였는데, 티토와 함께한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크로아티아적 역사관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강하게 신봉하게 되었다. 비록 티토 생전에 그는 분리주의자로서 당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그의 신념은 티토 사후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을 벌여, 크로아티아를 독립시키기에 이른다.

 

이미 서로 사이가 안좋은 민족들이 모두 분리된 이상, 당분간 발칸 반도에는 다시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 남슬라브주의를 외쳤던 티토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고, 이들이 다시 뭉칠 일도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이러한 구도만을 보면 발칸 반도의 역사는 티토를 위시한 통합주의자의 패배와, 투지만을 위시한 민족주의자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르게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는 발칸의 패권을 추구했던 중심국(세르비아)과 독립을 추구했던 주변국(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갈등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유고의 붕괴는 세르비아에 대한 주변국들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 다르게 보면, 유고의 성립과 붕괴의 역사는 두 영웅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고는 분열된 발칸을 통합한 공산 게릴라 영웅 티토에 의해 성립되었고, 티토의 리더십과 능력을 통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티토 사후에도 유지되던 유고는 결국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 붕괴되었는데, 이 뒤에는 유고 시절부터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부르짖었던 투지만의 영향도 있다. 영웅에 의해 성립된 나라가 결국 또다른 영웅에 의해 붕괴된 셈이다. 

 

사견

이 글에서는, 앙겔 본인도 밝혔듯이 영웅주의 사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실 이 글에서 등장한 영웅주의는 이 글에 달린 댓글에서도 지적된 사항이고, 앙겔이 바로 다음 글을 다루면서 논한 주제이기도 하다. 비록 많은 역사학자들이 영웅주의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역사에서 어떤 개인들이 차지했던 역할은 무시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만약 티토가 아니었다면, 그럼에도 발칸 반도는 통합된 유고로 존재했을 것인가? 스탈린이 없었다면 소련이 산업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을까? 루스벨트없는 미국이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광기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투지만은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티토보다 격이 떨어져 보인다. 티토는 수천년간 분리되었던 발칸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하고, 그가 죽은 후에도 10년간 유지되도록 공고히 하였다. 티토가 수천년의 관성을 거스르고 자신의 이상을 관철했던 반면, 투지만은 밀로셰비치, 이제트베고이치와 함께 불어오던 민족주의의 열풍에 단순히 탑승한 감이 크다. 물론 투지만은 유고 시절부터 민족주의의 정신적 기반을 쌓아왔지만, 그 기반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수천년간 존재해온 발칸 분리주의의 압력과 민족주의의 바람(밀로셰비치도 탑승했던)이었다. 역사의 흐름에 순응한 사람이 역사의 흐름에 거스른 사람보다 덜 영웅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앙겔이 투지만을 '범속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러한 점이 작용했으리라.

 

한편, 투지만이 역사학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투지만은 공산 게릴라 시절만 해도 티토의 동지였고, 그런 그를 바꾼 것은 역사학 공부였다. 사실 투지만을 떠나 역사관은 사람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나치의 아리아인 역사관과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적 역사관, 그리고 한국의 뉴라이트가 향유하는 식민사관이 세상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관뿐만 아니라 철학 사상이나 문학 작품과 같은 이른바 '문과'의 발명품은, 일반적으로 경시되는 것과 다르게 문화의 형성과 역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과들이 과학이론과 기술을 발견하고 개발한다면, 문과가 개발하고 보완하는 상품들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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