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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는 세계를 반영한다? 언어철학과 pc운동

과학주의자 2022. 5. 23. 23:09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어떤 단어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그것이 고려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사회 곳곳에서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특이한 글을 보았다. 은 <시사인>에서 발행한 논설인데, 글에서 기자는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했다. 기자는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인용하여 자신의 pc주의를 옹호했다.

 

기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박이 가능하다. 성중립 텍스트(pc적으로 올바른 글)가 일반적인 텍스트보다 일기 어렵다는 증거도 없지만, 반대로 일반적인 텍스트가 성차별을 조장한다는 증거도 찾기 어렵다. 또한 기사에서 인용한 실험은 남성형/여성형 명사를 대상으로만 실험을 진행했기 때문에, people who menstruate처럼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pc단어도 비슷한지 알기 힘들다.(개인적으로 연구의 정확한 제목을 인용하지 않은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사실 심리학에서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보고 있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이 저 유명한 경구에서 말한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1차논리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인공언어'이고, 그마저도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스스로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점들을 앞세우기 이전에, 이 기회를 통해 언어철학의 유명한 이론들을 소개할 수 있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언어철학과 분석철학의 역사는 100년을 넘어가지면,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콰인만 약간 알고 전반적인 언어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이로인해 비트겐슈타인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고, 콰인은 이상한 방향으로 곡해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언어철학을 조금만 더 잘 이해한다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이 어떤 한계가 있고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필자가 바라는 바이다.

 

 

언어철학의 아주 간략한 역사  

언어철학이란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철학이다. 보통 언어를 연구한다는 말은 1)발음이나 문법과 같은 언어의 특성을 연구하거나, 2)언어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연구하거나, 3)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지시하는지 연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철학은 3번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강아지'라고 할때 '강아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대체 '의미'라는게 무엇인지, 혹은 의미를 아는게 가능한지 탐구하는 철학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철학자들은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증과 전제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언어철학적 이론들은 보통 일정 수준 이상 합리적이다.

 

언어철학은 100년전 프레게라는 논리학자가 만들었다. 이후 프레게와 다른 철학자 러셀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대립하는 언어철학 이론(의미론)을 만들어서 언어철학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을 남겼고, 비트겐슈타인의 동지와 제자들이 언어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생각이 바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말을 뒤집고, 이어서 콰인이 기존의 의미론이 가진 한계들을 공격하면서 비트겐슈타인(before)과 프레게, 러셀 등 기존의 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은 힘을 잃게 되었다.

 

현재 언어철학의 주요 이론은 추론주의 의미론, 의미 회의론, 자비의 원리 이론, 인과적 지시 이론이 있다. 이들이 언어철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써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기에는 이들 이론들로 충분하다. 언어철학은 그 특성상 논리와 합리성을 굉장히 중시하기 때문에, 많은 이론들은 논리적 약점과 근거부재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뒤로하고 살아남은 이 4가지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탄탄하고 좋은 이론이라고 볼만하다.

 

 

1.추론주의 의미론

추론주의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가 그것을 사용하는 규칙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강아지'의 의미는, 우리가 '강아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귀여운 개의 새끼를 말할때 '강아지'라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길에 나자빠진 사람들을 말할때도 가끔씩 '강아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기고양이를 보고 '강아지'라고 말하면 안된다. 추론주의 의미론에 따르면, 이때 '강아지'의 의미는 '주로 개의 새끼를 말하거나, 가끔씩 개가 된 사람들을 말할 때 쓰고 다른 경우에는 쓰지 않는 명사'이다.

 

추론주의 의미론은 일상언어학파의 직계 후손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찐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가 그 사용이라고 주장했다. '강아지'는 꼭 개의 새끼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내가 저기 저 길가의 주정뱅이를 보고 '강아지'라 하면 '강아지'는 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내 앞의 이 거지같은 놈을 보고 '강아지'라고 하면 '강아지'의 의미는 내 앞의 이 거지같은 놈이다. 언어의 의미는 원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게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추론주의 의미론의 입장에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언어의 구조가 반드시 세계의 구조를 반영할 필요는 없고,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면, '누가 저놈좀 깨워라.'라는 말은 대체 세계의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 좀 자자.'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와 어떻게 비슷하다는 말인가? 전자는 저기 저놈을 깨우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고, 후자는 잘 시간이 되었으니 빨리 자자는 주문이다. 굳이 여기에 세계의 구조같은 거창한 무언가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할까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란 없다. 언어는 내가 그걸 쓰는 것에 달린 것이고, 그것을 쓰는 규칙에 달린 것이다. 분명 '깜둥이'는 정치적으로 부당한 말이다. 우리의 언어규칙에 따르면 그 말은 흑인을 비하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규칙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하용어가 아니다. '남녀평등'은 다른 젠더를 억압하는 용도로 사용되는게 아니다. 이들은 전혀 정치적으로 부당하지 않으며, 이들을 '장애우'나 '성평등'으로 바꿔봤자 우리가 얻는건 아무것도 없다.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은 그대로이고, 따라서 의미도 이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2.의미 회의론

의미 회의론은 언어철학에서 가장 극단적인 이론이다. 의미 회의론에서는 객관적인 언어의 의미란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강아지'는 나에게 새끼 개라는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이를 검증할 과학적 방법은 없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이 말하는 '강아지'가 뭔지 대충은 알아서, 그 사람이 강아지를 보여달라고 하면 강아지를 보여주거나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의미 회의론의 핵심은, 이 이외의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다는 것이다.

 

의미 회의론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강아지'가 강아지인지 어떻게 확신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새끼 개를 보고 '강아지'라고 했다고 하자. 그게 '강아지'가 새끼 개라는 증거인가? 어쩌면 그 사람은 새끼 개가 아니라 새끼 개의 꼬리나, 목걸이나, 혹은 특정 시점에 특정 공간에만 있는 새끼 개(새끼 개-state)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정보를 많이 모아도 이런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강아지'라 불리는 존재가 나타나면 일단 저 사람도 '강아지'라고 말한다는 것만 알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과연 강아지의 어디를 보고 '강아지'라고 했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의미 회의론의 아버지인 콰인은 이를 언어성향 매뉴얼이라고 한다. 언어성향 매뉴얼이란,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들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 대한 법칙이다. '강아지'가 실제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강아지가 나타났을때 저 사람이 '강아지다!'라고 말하는 것이 언어성향 매뉴얼이다. 의미 회의론의 핵심은 우리가 오로지 언어성향 매뉴얼만 알 수 있고, 실제 의미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 사람이 나에게 강아지를 보여달라고 할 때 내 강아지나 사진을 보여주면 좋아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으나, 과연 저 사람이 말한 '강아지'가 진정으로 대체 무슨 뜻인지는 평생 알 수 없다.

 

의미 회의론의 입장에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언어의 구조도 모르고, 상대방이 무슨 언어를 쓰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모르는데 그게 세계를 반영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물론 언어성향은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고 세계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으니 비슷한거 같긴 하다. 그 이상은? 그런거 몰라.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할까요?

그전에 물어보자. 어떤 언어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어떻게 아는가? 왜 '미혼'은 정치적으로 부당한데 '비혼'은 올바른가? 어쩌면 저 사람이 사용하는 '미혼'은 '결혼을 하지 않기로 택한 숭고한 사람들'이란 뜻이고, '비혼'은 '병신 pc충 무뇌아새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미혼'과 '비혼'을 사용하는 언어성향 매뉴얼은 알수 있지만, 정말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수 없다. 그렇다면 남들이 그 단어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쓰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의 pc용어는 정말로 pc한가?

 

3.자비의 원리

자비의 원리는 의미 회의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명한 언어철학자 데이비드슨이 고안한 대안이다. 데이비드슨은 물론 상대방이 '강아지'로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가정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상대방이 말하는 '강아지'는 개목걸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목걸이를 발견해서 부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보통은 그보다 잘 보이는 강아지 전체를 부른다고 보는게 더 상식적이지 않나? 이처럼 상대방이 우리와 비슷하게 거짓말하지 않고 충분히 똑똑하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적당한 정도로는 알 수 있다.

 

데이비드슨은 이러한 점에서 콰인과 대립했지만, 어떤 부분은 동의한다. 데이비드슨은 언어를 연구할 때 실제 언어를 대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인공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반영하니 마니 왈가왈부하는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실제 사용하는 언어, 한국어나 중국어, 영어 등의 언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연구는 상대방이 상식적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 완벽하게 객관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데이비드슨에게 있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만큼 의미없는 말은 없다. 수학에서 쓰는 수리논리학적 언어는 분명 세계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라고? 너는 사람보면 '안녕?'이라고 인사하지 '54+32>13' 뭐 이렇게 말하나? 의미론은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가지고 만들어야지, 저러면 안된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할까요?

그럴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부당한 단어는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는 이를 적당히 객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몇가지 조건을 붙여야겠다. 우리는 '인디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하용어라고 쉽게 단정해선 안된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현재 사람들이 '인디언'을 정말로 그런 의미로 쓰는지 연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충분히 똑똑하다고 먼저 가정해야 한다. 저 사람이 '나는 인디언을 비하용어로 쓰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인디언'을 비하용어로 쓰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계급의식(혹은 페미니즘 정신)이 부족해서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은, 적어도 데이비드슨의 입장에서는 옳지 않다.

 

4.인과적 지시 이론

인과적 지시 이론은 언어의 의미가 지난 역사동안 그것이 실제로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를 맨 처음 사용(명명)한 사람이 그 언어로 가리킨 것이다. '강아지'가 개의 새끼인 이유는, 그냥 필자가 부모님께 새끼 개를 '강아지'라고 부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그 윗세대에 배웠고, 그 윗세대는 또 그 윗세대에게 배웠다. 이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새끼 개를 보고 처음으로 '강아지'라고 말한 사람이 나올 것이고, 이 사람이 새끼 개를 보고 '강아지'라고 했기 때문에 '강아지'가 새끼 개인 것이다.

 

인과적 지시 이론의 특징은 언어에 뭔가 고상한 특징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강아지'는 새끼 개인가? 그냥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왜 '장애인'은 몸이 불편한 누군가인가? 그냥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왜 하켄크로이츠는 나치의 상징인가? 그냥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에 내재된 의미나 뭔가 그밖의 심오한 무언가는 없다. 언어는 그냥 가리키는 것이다. 

 

인과적 지시 이론의 입장에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언어가 구조가 어떻고 어원이 어떻고 정치적 의도가 어떻든,  그 언어의 의미는 그냥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다. 인과적 지시 이론을 만든 논리학자 크립키는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지에 대해 더 깊고 심오한 이론을 만들긴 했지만, 이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으니 생략한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할까요?

정치적으로 부당한 언어는 없다. '아줌마'는 비하용어가 아니라, 그냥 중년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여성 경찰을 '여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냥 '여경'이 여성 경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혐오가 내재된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명명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woman을 처음 만든 사람이 'woman이란 단어를 통해 여성이지만 생물학적 여성은 아닌 사람들을 차별하고 비하해야지!'라는 의도로 woman을 만들었겠는가? 그것도 13세기에? 물론 '미개한 흑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깜둥이'와 같이 혐오적인 의미로 정의되는 단어도 있지만, 크립키는 그러한 단어가 별로 많지 않다고 보았다.

 

 

언어철학과 pc

위의 4가지 의미론은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추론주의 의미론에서 의미는 규칙이다. 그래서 어떤 단어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는 그 규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의미 회의론에서 의미는 없다. 따라서 pc는 무의미하다. 데이비드슨은 그보다 pc에 긍정적이지만, 대신 무분별하게 딱지를 붙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인과적 지시 이론에서 의미는 그냥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혐오도, 정치적 부당함도,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를 언어철학이 pc와 완전히 대치된다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언어철학은 철저히 의미론을 다루는 반면, pc는 구문론과 화용론까지 포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pc적 주장은 언어철학과 대치될 수 있지만, '약자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pc적 주장은 언어철학과 양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자의 주장은 화용론이고,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철저히 의미론만을 다루었고, 그 결과 '혐오적인 단어가 혐오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언어철학 이론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따라서 언어철학에 기반한 pc 비판은 의미론적 측면에 한정되어야 한다.

 

pc운동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다. 어떤 것은 정치적이고, 어떤 것은 과학적이다. 이제 여기에 언어철학을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련지 모르겠다. 현대 언어철학 이론들에 따르면 언어는 그를 사용하는 규칙이나 그것이 실제로 명명된 대상이 무엇인지로 판단되어야지, 내재된 혐오표현 같은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이를 판단하려면 그냥 주관적으로 분석하고 결론내리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 단어를 쓰는 사람들과 호의적인 대화를 나눠야 한다. 게다가 어쩌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부당한 언어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적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pc운동에 대한 지지는 이전보다 더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말은 언어철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언어철학은 이미 예전부터 저 말을 벗어났다. 이미 많은 언어철학자들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졸업하고, 새로운 이론들과 의문들 속에서 새로운 언어철학을 싹틔우고 있다. 만약 시사인의 기자가 언어철학을 잘 알고 있었다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경구를 잘못 인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더 기대를 해본다면, 그는 새로운 언어철학 속에서 pc를 지지하는 좀 더 좋은 경구를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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