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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쓰는 왕희지체(시)

과학주의자 2022. 5. 24. 19:38

물로 쓰는 왕희지체

 

 

손택수

 

먹물인가 했더니 맹물이다

소흥 왕희지 사당 앞

노인이 길바닥에 논어 한구절을 옮겨놓고 있다

페트병에 꽂은 붓으로

한자 한자 그어내리는 획이

왕희지체 틀림없다

앞선 글자들이 지워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저 그어내리는 순간들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도 있구나

드러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지워져가는,

소멸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글씨체

스치는 붓으로 바닥을 닦는다

쓰고 지워지길 골백번

붓을 밀걸레 삼아

땡볕에 달아오른 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날아오르는 왕희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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