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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월든 -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과학주의자 2022. 6. 14. 18:15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우리는 모든 장소를 집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는 곳에서 사방 2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시골을 모두 조사해보았고, 상상 속에서나마 모든 농장을 잇달아 사들였다. 어느 농장이든 모두 살 수 있는 것이었고, 가격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야생 사과를 맛보고, 농사에 대해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얼마를 부르든 그 가격으로 농장을 사서, 마음속으로 그 땅을 다시 그에게 저당잡히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 농장에 농부가 부르는 값보다 더 높은 가격을 매길 때도 있었다. 나는 농장의 권리증만 빼고는 모든 것을 인수했고, 농부의 말을 권리증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농장을 경작했고, 어느 정도는 농부도 교화시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즐긴 뒤에는 그가 농사를 계속 짓도록 맡겨두고 물러났다. 이런 경험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일종의 부동산업자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어디에 자리를 잡든 거기서 살 수 있었고, 따라서 풍경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집이란 라틴어로 세데스(sedes), 즉 '앉는 자리'가 아닌가? 시골에 있는 '앉는 자리'라면 더욱 좋다. 나는 많은 집터가 곧 활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은 그 집터가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마을이 그 집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 여기라면 살아도 좋겠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시간 동안 머물면서 여름과 겨울을 살아보고, 어떻게 하면 몇 년을 보내면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장차 그곳에 살게 될 사람들은 어디에 집을 짓든지 자기보다 먼저 그곳을 집터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 그 땅을 어떻게 과수원과 숲과 목초지로 분할할 것인지, 문 앞에는 어떤 멋진 참나무와 소나무를 남겨둘 것인지, 어디서 보아야 말라버린 고목들이 가장 근사해 보일 것인지를 정하는 데는 오후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그런 다음 나는 이 땅을 휴경지로 묵혀두었다.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더 부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상상력을 발휘하여 몇몇 농장의 선매권까지 얻게 되었지만, 농장을 실제로 소유하여 호된 꼴을 당하지는 않았다. 내가 하마터면 농장을 실제로 소유할 뻔했던 것은 할로웰 농장을 샀을 때였다. 나는 씨앗을 선별하기 시작했고, 물건을 실어나를 외바퀴 수레를 만들려고 필요한 재료도 모았다. 하지만 땅주인이 나에게 권리증을 넘겨주기 전에 그의 아내가 마음이 변해서 농장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어떤 남자에게나 그런 아내가 있는 법이다. 그러자 땅주인은 위약금으로 10달러를 주겠다고 나에게 제의했다. 진실을 말하면 그때 내게는 단돈 10센트밖에 없었다. 내가 10센트를 가진 사람인지, 농장을 가진 사람인지, 10달러를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셋 다 가진 사람인지, 내 산술 능력으로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농장 소유의 꿈을 충분히 즐겼기 때문에 땅주인에게 10달러도 농장도 그냥 두라고 말했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관용을 베풀기 위해 농장을 산값으로 되팔고, 그는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10달러를 얹어주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는 10센트와 씨앗과 외바퀴 수레를 만들 재료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가난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도 잠시나마 부자 노릇을 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곳의 풍경을 마음속에 간직했고, 외바퀴 수레가 없어도 그 후 해마다 그 풍경이 생산하는 것을 가져왔다. 경치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이며

그런 내 권리를 문제 삼을 자는 아무도 없다.[각주:1]

 

나는 어느 시인이 농장의 가장 귀중한 부분을 즐기고 물러가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무뚝뚝한 농부는 야생 사과 몇 알만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인이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훌륭한 울타리인 시의 운율 속에 그의 농장을 집어넣고, 그것을 완전히 가둔 채 젖을 짜고 위에 뜬 찌끼를 걷어낸 다음 크림은 모조리 자기가 가져가고 생크림을 제거한 탈지유만 농부에게 남겨놓았지만, 농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할로웰 농장이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곳이 완전히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농장은 마을에서 약 3킬로미터, 가장 가까운 이웃과도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고, 넓은 밭이 한길과 농장을 갈라 놓고 있었다. 두번째 이유는 농장이 강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땅주인은 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봄철 서리로부터 농장을 보호해준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폐허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회색 집과 헛간, 그리고 망가진 울타리는 나와 전 주인 사이에 시간적으로 긴 간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토끼들이 갉아 먹어서 속이 비고 이끼로 덮인 사과나무들은 내가 앞으로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될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나는 것은 처음 배를 타고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의 추억이다. 집은 울창한 숲을 이룬 꽃단풍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나무들 사이로 그 집의 개가 짖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땅주인이 바위들을 들어내고 속이 빈 사과나무들을 베어내고 목초지 곳곳에 돋아난 어린 자작나무 몇 그루를 뿌리째 뽑아버리기 전에, 요컨데 농장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손질을 가하기 전에 그 농장을 사려고 서둘렀다. 이런 매력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세상을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농장을 경영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틀라스가 그 고생의 대가로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는 듣지 못했다. 나는 그 농장값을 치를 수 있다는 것,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농장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것 말고는 농장을 살 동기도 없고 이유도 없었지만, 그 모든 일을 기꺼이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농장을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도 내가 원하는 산물을 풍성하게 생산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결국 농장을 사지 못했다.

 

대규모 농장에 대한 꿈(작은 텃밭은 꾸준히 가꿔왔다)은 이렇게 씨앗을 준비한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씨앗은 오래 묵을수록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시간이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구별해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마침내 씨를 뿌릴 때가 오면 실망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내 동료인 인간들에게 되도록 오랫동안 구속받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갈고 당부하고 싶다. 농장에 얽매이든 감옥에 얽매이든, 구속받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내가 영농 교과서로 삼고 있는 <농업론>에서 카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장을 살 때는 욕심 부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하라. 농장을 살펴보는 데 수고를 아끼지 말고,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지 마라. 좋은 농장이라면 자주 가서 볼수록 더욱 마음에 들 것이다."

농장을 살 때 나는 욕심 부리지 않을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둘러볼 것이며, 죽으면 거기에 가장 먼저 묻힐 것이다. 그러면 그 땅은 더욱 내 마음에 들지 않겠는가.

 

이번에 내가 다루려는 것은 같은 종류의 두번째 실험인데, 편의상 2년 동안의 경험을 1년으로 축약하여 좀 더 자세히 기술하겠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절망을 주제로 송가를 쓰려는 게 아니라, 내 이웃들을 깨울 수만 있다면 횃대 위에 올라앉은 아침 수탉처럼 기운차게 허세를 부려볼 작정이다.

 

내가 처음 숲속에 거처를 정한 날, 그러니까 낮만이 아니라 밤에도 거기서 지내기 시작한 날은 우연히도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때 내 집은 아직 월동 준비가 끝나지 않아서 겨우 비바람만 막아주고 있었다. 회벽도 굴뚝도 없었고, 벽은 빗물에 얼룩진 거친 널빤지로 되어 있었다. 널빤지에는 널찍한 틈새가 있어서 밤에는 서늘했다. 곧게 다듬은 하얀 샛기둥과 갓 대패질한 문틀과 창틀 덕분에 집은 깨끗하고 통풍이 잘되는 것 같았다. 특히 아침에 목재가 이슬에 젖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점심때쯤이면 나무에서 달콤한 수액이 배어나올 거라고 상상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이 집은 온종일 이 새벽의 특징을 다소나마 유지하면서, 내가 1년 전에 방문했던 산장을 생각나게 했다. 회반죽을 칠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 오두막집은 신이 여행하다 들르기에 좋았고, 여신이 옷자락을 끌고 다닐 만한 곳이었다. 내 집 위를 스쳐가는 바람은 산등성이를 휩쓰는 바람이어서, 지상의 음악 가운데 끊어진 선율, 천상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절만 전해주었다. 아침에는 바람이 쉴새없이 불고, 창조의 시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듣는 귀는 드물다. 속세를 벗어나기면 하면 올림포스 산은 어디에나 있다.

 

보트를 제외하면, 내가 지금까지 소유한 집은 여름에 여행할 때 이따금 사용한 텐트뿐이다. 이 텐트는 돌돌 말려서 아직도 내 다락방에 처박혀 있다. 하지만 보트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 시간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렸다. 이제 나에게는 더 튼튼한 오두막이 있으니 세상에 정착하는 쪽으로 상당히 나아간 셈이다. 별로 걸친 것이 없는 이 집의 뼈대는 나를 에워싼 일종의 결정체였고, 자기를 지어준 나에게 정칙한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윤곽만 그린 그림처럼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나는 바람을 쐬러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집 안 공기가 신선함을 전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문 안쪽에 앉아 있다기보다 오히려 문 뒤에 앉아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리밤사>[각주:2]에는 "새들이 없는 집은 양념하지 않은 고기와 같다"는 말이 나오지만, 내 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새들의 이웃이 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새를 잡아 가두어서가 아니라, 새들 가까이에 우리를 짓고 거기에 나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원과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리는 새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전혀 또는 거의 없는, 더욱 야생적이고 감동적인 숲속의 노래꾼들인 개똥지빠귀, 풍금조, 방울새, 쏙독새, 그 밖의 많은 새들과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콩코드 마을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호수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마을보다 지대가 좀 높고, 콩코드 마을과 링컨 마을 사이에 넓게 펼쳐진 숲의 한복판으로, 콩코드 전쟁터로 널리 알려진 들판에서 남쪽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내 집은 숲에 묻혀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역시 숲으로 덮여 있는 1킬로미터 거리의 맞은편 호숫가가 나의 가장 먼 지평선이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호수를 내다볼 때마다 높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닥이 다른 호수들의 수면보다 훨씬 높은 산중턱의 호수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해가 떠오르면 호수는 안개 옷을 벗어던지고 여기저기서 부드러운 잔물결과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안개는 밤의 비밀 집회를 막 끝낸 유령들처럼 살금살금 사방팔방으로 물러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산중턱에 있기 때문인지 이슬도 다른 곳보다 늦게까지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 작은 호수는 8월에 가벼운 폭풍우가 오락가락하는 동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이웃이 되었다. 폭풍우가 오면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어도 공기와 물은 더없이 잔잔해서 오후 나절인데도 저녁처럼 고요했고, 개똥지빠귀의 노랫소리가 호숫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호수는 바로 이런 때 가장 잔잔한 법이다. 호수 위의 맑은 공기층은 얕고 구름으로 어두어져 있는 반면, 빛과 그림자로 가득 찬 수면은 그 자체가 더 낮은 하늘이 되어 그만큼 더 소중해진다.

 

최근에 나무를 베어낸 가까운 언덕에서 바라다보면, 호수 건너편에 기슭을 이루는 언덕들 사이의 넓은 골짜기를 통해 남쪽으로 상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언덕 비탈이 골짜기를 향해 경사져 내려온 것을 보면 나무 우거진 골짜기를 지나 그쪽 방향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떤 시내도 없었다. 그쪽에는 가까운 초록빛 언덕들 사이로 또는 언덕들 너머로 푸른빛을 띤 한층 높은 산들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발돋움을 하고 서면 북서쪽에 더 푸르고 더 멀리 있는 산맥의 몇몇 봉우리를 얼핏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 하늘의 조폐국에서 찍혀 나온 남빛 동전 같았다. 여기서는 마을도 일부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도 나를 둘러싼 숲만 보일 뿐,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물이 있으면, 대지에 부력을 주어 땅을 띄어주기 때문에 좋다. 아무리 작은 샘이라도 가치 있는 까닭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땅이 대륙이 아니라 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샘물이 버터를 차갑게 유지해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언덕마루에 올라서면 호수 너머에 펼쳐진 서드베리 초원이 바라보이는데, 언젠가 홍수가 났을 때 나는 그 초원이 신기루 현상에 의해 소용돌이치는 골짜기 속에 마치 대야 속의 동전처럼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호수 너머의 땅은 그 사이에 있는 이 작은 수면 때문에 고립되어 둥둥 떠 있는 얇은 빵조각처럼 보인다. 내가 사는 이곳이 한 조각의 마른 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 집 문에서 보이는 전망은 언덕마루에서 바라본 전망보다 훨씬 오그라들어 있었지만, 옹색하거나 갇힌 듯한 기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충분한 드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호수 맞은편 기슭에서 비탈져 올라간 곳에는 관목과 참나무가 우거진 낮은 구릉지가 서부 대평원과 동몰 대초원 쪽으로 뻗어 있어서 유랑하는 모든 인간 가족에게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모다라(크리슈나)는 자신의 소들에게 더 넓은 새 목초지가 필요해질 때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드넓은 지평선을 마음껏 즐기는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

 

장소와 시간이 모두 바뀌어, 나는 나를 가장 매혹시킨 우주의 어떤 장소, 역사의 어떤 시대에 더욱 가까이 살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밤이면 천문학자들이 관측하는 수많은 장소만큼이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우주의 외진 한구석, 소음과 소란에서 멀리 떠어진 카시오페이아의 의자 뒤쪽 어딘가에 진귀하고 유쾌한 곳이 있을 거라고 늘 상상한다. 나는 내 집이 실제로 그렇게 외떨어져 있지만 우주에서 항상 새롭고 더렵혀지지 않은 장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나 히아데스 성단, 혹은 알데바란이나 견우성 가까이에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정말로 그런 곳에 살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생활로부터는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도 나는 달이 없는 밤에만 겨우 보일 만큼 희미하게 깜박이는 한 줄기 빛에 불과했다.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주의 공간은 바로 그런 곳이었으니,

 

그곳엔 한 목동이 살고 있었다.

양떼가 그의 옆에서 풀을 뜯어 먹던

산들만큼이나 높은 생각을 품은 채[각주:3]

 

만약 양떼가 목동의 생각보다 더 높은 목초지를 찾아 올라갔다면 목동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날마다 아침은 나에게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순결하게 살라고 권했다. 나는 그리스인들처럼 진지하게 새벽의 여신을 숭배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종교 의식이었고,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기도 했다. 중국 탕왕의 욕조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다시 날마다 새로워지라."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침은 영웅시대를 다시 가져온다. 꼭두새벽에 문과 창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으면 보이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게 내 집 안을 돌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가 희미하게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는 명성을 찬양한 어떤 나팔소리 못지않은 감동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진혼곡이었다. 그 소리 자체가 자신의 분노와 방랑을 노래하며 공중을 떠도는 <일리아드>요 <오디세이아>였다. 그 소리에는 우주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 소리는 이 세상의 영원한 활력과 번식력을 금지당할 때까지 계속 광고하고 있었다.

 

하루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시간인 아침은 각성의 시간이다. 이때는 졸립다는 느낌이 가장 적다. 밤낮없이 온종일 잠만 자는 우리 몸의 어떤 부분도 아침에는 적어도 한 시간 동안 깨어 있다. 우리 자신의 타고난 천성 덕분에 잠을 깨는게 아니라 하인이 기계적으로 흔들어주기 때문에 잠을 깬다면, 공장의 종소리 대신 천상의 음악이 보내오는 파동과 대기를 가득 채운 향기와 함께 우리가 새로 얻은 힘과 내면의 열망에 의해 깨어나 전날보다 더 고결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런 날을 과연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날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 그렇게 깨어나야만 비로소 어둠은 열매를 맺고, 빛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루하루는 어제 내가 더럽힌 시간보다 더 이르고 더 신성하고 더 찬란하게 빛나는 새벽의 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 절망하여 어두운 내리막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다. 감각적인 생활을 부분적으로 중단한 뒤에는 인간의 영혼, 아니 영혼의 모든 기관은 아침마다 활력을 되찾고 그의 천성은 또다시 고귀한 삶을 영위하려고 애쓴다. 모든 기억할 만한 사건은 아침 시간과 아침의 대기 속에서 일어난다. <베다>에도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와 예술,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기억할 만한 인간의 행위는 바로 아침 시간에 이루어진다. 모든 시인과 영웅들은 멤논처럼 에오스의 자식들이고, 해가 뜰 때 그들의 음악을 토해낸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활달하고 기운찬 생각을 가진 이에게 하루는 영원한 아침이다.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든,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어떻게 일하든 상관없다. 아침은 내가 깨어 있고, 내 속에 새벽이 있는 때이다. 도덕적 개혁은 잠을 쫓아내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이 졸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자신의 하루를 그렇게 형편없이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그렇게 계산에 서투른 사람들이 아니다. 졸음에 지지 않았다면 무언가를 해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육체노동을 할 만큼은 깨어 있다. 하지만 지성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백만 가운데 하나뿐이고, 시적인 생활이나 신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 있는 사람은 수억 가운데 하나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만났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기계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새벽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다시 깨어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새벽은 우리가 가장 깊은 잠에 빠졌을 때에도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인간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삶을 향상시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고무적인 것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들어 어떤 대상을 미화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매체와 대기 자체를 조각하고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은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루의 질적 수준에 영향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활을 세세한 부분까지 잘 관리하여, 하루 가운데 가장 숭고하고 소중한 시간에 대해 깊이 관조해볼 가치가 있도록 만들 의무가 있다. 우리가 얻는 하찮은 정보를 그나마 거부하거나 다 써버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신탁이 분명히 알려줄 것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해도 인생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죽을 때 내가 인생을 헛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삶을 깊이 살고 싶었고 삶의 정수를 죄다 흡수하고 싶었고,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하게 살아서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파괴하고 싶었다. 낫과 칼로 바싹 잘라내고, 삶을 구석으로 몰아넣어 가장 낮은 한계까지 끌어내리고, 그리하여 삶이 천박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천박함의 적나라한 전모를 포착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반대로 삶이 숭고하다면 그 숭고함을 체험으로 깨달아, 다음에 글을 쓸 때는 거기에 대해 정확하고 충실하게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신의 것인지에 대해 이상하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고, 여기서 사람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은 "신을 찬양하고 신을 영원히 향유하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우화에서는 우리가 오래전에 인간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개미처럼 비천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소인족처럼 두루미들과 싸운다.[각주:4] 그것은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는 것이고,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덧대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미덕은 불필요하지만 불가피한 불행을 계기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은 사소한 일로 조금씩 낭비된다. 정직한 사람은 셈을 할 때 열 손가락 넘게 쓸 필요가 거의 없다. 혹시 손가락이 모자랄 경우에는 발가락 열 개를 추가하고, 그래도 남는 것은 한 묶음으로 처리해버리면 된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일을 백 가지나 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로 줄이도록 하자. 백만 대신 대여섯까지만 세고, 계산 결과는 엄지손톱 위에 적어두도록 하자. 문명생활이라는 이 험한 바다 한복판에서는 먹구름과 폭풍과 암초 등 수많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배가 침물하여 항구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태를 피하려면 추측항법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 간소화하고 또 간소화하자. 하루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자. 백 가지 음식 대신 다섯 가지로 만족하자. 다른 것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자.

 

우리의 삶은 독일영방과 비슷하다. 수많은 군소국가로 이루어진 독일은 국경이 수시로 변하고 있어서 독일인조차도 현재 국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미국도 이른바 내적 개혁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실은 외적이고 피상적인 개혁에 불과해서, 이제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다루기 힘든 조직이 되어버렸다. 가구는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널려 있고, 자기가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꼴이다. 사치와 낭비뿐만 아니라, 치밀한 계산과 가치 있는 목표의 결여 때문에 나라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구성하는 백만 가구도 역시 파산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국가와 가정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제책은 엄격하게 절약하면서 스파르타인보다 더 검소하게 생활하고 목표를 더 높게 끌어올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생활 속도가 너무 빠르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무역을 해야 하고, 얼음을 수출하고, 전신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며, 시속 5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개코원숭이처럼 살아야 하는 거지 아니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건지는 불명확하다. 우리가 침목을 내리고 레일을 깔고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는 대신 삶을 개선한답시고 어설프게 땜질만 하고 있으면 철도는 누가 건설하겠는가? 그리고 철도가 건설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제때에 때맞춰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집 안에 머물면서 자기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누가 철도를 필요로 하겠는가? 우리가 철도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철도가 우리 위를 달리는 것이다.

 

철도 밑에 깔린 침목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침목 하나하나가 인간, 아일랜드 사람이거나 뉴잉글랜드 사람이다. 그들 위에 철도가 놓이고 모래가 덮이면 기차들이 미끄러지듯 그들 위를 달리는 것이다. 그들은 견고한 침목이다. 그건 확실하다. 몇년마다 침목이 새로 놓이고 그 위로 기차가 달린다. 그래서 어떤 족속이 철도 위를 달리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다른 족속은 그 밑에 깔리는 불운을 겪게 되는 것이다. 기차가 잠에 취해 걷는 사람, 즉 엉뚱한 위치에 놓여 있는 예비 침목을 치어서 그를 잠에서 깨우면, 사람들은 갑자기 기차를 세우고 무슨 예외적인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을 떤다. 침목을 제자리에 놓고 평평하게 유지하려면 10킬로미터마다 한 무리의 인부를 배치해야 한다. 그 침목들이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바쁘게,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하다. 우리는 제때의 바늘 한 땀이 나중에 아홉 땀의 수고를 덜어준다고 하면서도 내일의 아홉 땀을 덜기 위해 오늘 천 땀의 바느질을 하고 있다. 일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는 늘 일에 허덕이지만 막상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무도병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두지 못할 뿐이다.

 

마을에 불이라도 나서 내가 교회종을 몇 번 치기만 하면, 교외의 농장에서 일하던 모든 남자들, 오늘 아침만 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 바빠 죽겠다고 투덜대던 남자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만사 제쳐놓고 종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온 목적은 불길 속에서 재물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불구경을 하기 위해서다. 재물은 어차피 불타버릴 게 뻔하고, 우리가 일부러 불을 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 끄는 것을 구경하다가 재미있어 보이면 슬그머니 끼어들기 위해 달려온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불난 건물이 마을 교회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점심을 먹은 뒤 30분쯤 낮잠을 자고 눈을 뜨면 고개를 쳐들고 "무슨 뉴스라도 있나?"하고 묻는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인류 전체가 그를 위해 보초라도 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30분마다 깨워달라고 부탁하는데, 그렇다고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는 그 대가로 꿈 이야기를 해준다. 하룻밤 자고 나면 뉴스는 아침 식사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새 소식을 들려줘. 이 세상 어디서 누구한테 일어난 일이라도 상관없어." 그러고는 커피와 빵을 먹으면서 신문을 읽는다. 오늘 아침에 한 남자가 와시토 강에서 눈알이 뽑혔다는 뉴스인데, 그 자신도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매머드 동굴[각주:5]에 살고 있으며 한쪽 눈이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나는 우체국이 없어도 아무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우체국을 통해 연락해야 할 중요한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우표값을 하는 편지는 평생 한두 통밖에 받아보지 못했다. 1페니 우편제도[각주:6]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르쳐주면 1페니를 줄게"하던 농담이 정말로 1페니를 내는 제도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문에서 기억할 만한 뉴스를 읽은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거나 살해를 당했거나 사고로 죽었다는 뉴스, 어떤 집이 불타고 어떤 배가 난파하고 어떤 기선이 폭발했다는 뉴스, 어떤 소가 기차에 치이고 어떤 미친개가 죽임을 당하고 겨울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는 뉴스는 두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한번이면 충분하다. 원칙만 알면 되지 무수한 실례와 응용에 왜 신경을 쓴단 말인가?

 

철학자에게 이른바 뉴스는 모두 가십에 불과하고, 그것을 편집하거나 읽는 사람은 차를 마시는 나이든 여인들뿐이다. 하지만 이런 가십에 걸신들린 사람이 적지 않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요전 날 방금 도착한 해외소식을 알기 위해 어느 신문사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그 압력으로 건물의 커다란 유리창이 몇 장이나 깨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정도 뉴스는 조금만 재치 있는 사람이라면 12개월 전, 아니 12년 전에도 꽤 정확하게 작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령 스페인을 예로 들어보면, 돈 카를로스와 인판타,[각주:7] 돈 페드로와 세비야와 그라나다[각주:8]같은 이름들(내가 신문을 본 뒤에 이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을 그때그때 적당한 비율로 집어넣고, 다른 기삿거리가 없을 때는 투우에 관한 기사로 땜질하는 요령을 알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정확한 기사가 될 테고, 신문에 나온 같은 제목의 간결하고 명료한 기사 못지않게 스페인의 정확한 실상 혹은 혼란상을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줄 것이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에서 들어온 마지막 중대 뉴스는 1649년 혁명(청교도 혁명)이었다. 여러분이 영국의 1년 평균 농산물 수확량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그리고 돈을 벌려고 농산물에 투기하는 게 아니라면, 그 문제에 다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처럼 신문을 별로 보지 않는 사람이 판단하건데, 외국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뉴스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보다는 세월이 지나도 낡지 않는 것을 아는게 훨씬 중요하다.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이 공자의 소식을 알려고 사람을 보냈다. 공자는 그 사자를 가까이에 앉히고 물었다. "주인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그러자 사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제 주인님은 허물을 줄이려고 하시지만 여의치 않은 듯합니다." 사자가 떠난 뒤에 공자는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다! 정말 훌륭한 사자야!"

 

교회의 목사도 한 주의 마지막 휴일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로 졸린 농부들의 귀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일요일은 새로운 한 주를 참신하고 용감하게 시작하는 날이 아니라 고단히 보낸 일주일을 적절하게 끝맺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우레 같은 목소리로, "멈춰라! 기다려라! 겉으로는 빠릿빠릿해 보이면서 왜 그렇게 느려터진 것이냐?"고 호통을 치는 게 나을 것이다.

 

오늘날 진실은 거짓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허위와 망상은 건전한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인간이 진실만을 꾸준히 관찰하고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우리가 아는 그런 것들에 비해 동화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가 불가피한 것과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만 존중한다면 음악과 시가 길거리에 울려퍼질 것이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현명하게 살면,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사소한 두려움과 사소한 쾌락은 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기운을 북돋워줄 뿐만 아니라 숭고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잠이나 자고 겉꾸밈에 현혹당함으로써 틀에 박힌 일상과 관습을 확립하고 공고히 다진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아직도 환상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삶을 놀이로 여기는 아이들은 인생의 참된 법칙과 관계를 어른들보다 더 명확하게 분간해낸다. 어른들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지도 못하면서 경험 덕분에, 즉 실패 덕분에 자기가 아이들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힌두교 경전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어렸을 때 왕궁에서 쫓겨나 나무꾼의 손에서 자란 왕자가 있었다. 그런 처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그는 자신이 함께 사는 미개한 종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왕의 대신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그의 진짜 신분을 알려주었다. 젊은이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기가 왕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자기가 놓인 상황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거룩한 스승이 진실을 밝혀주면, 그제야 자기가 '브라흐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유는 사물의 겉만 볼 뿐 속까지 꿰뚫어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린다. 어떤 사람이 우리 마을을 지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본다면 '물방아용 둑'은 어디로 가겠는가? 혹시 그 사람이 거기서 본 현실을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해도, 우리는 그가 설명하는 장소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회관이나 재판소나 감옥, 상점이나 주택을 보라. 진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말해보라. 여러분이 말하는 동안 그것들은 모두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계의 변두리에, 가장 먼 별 뒤쪽에, 아담 이전에, 최후의 인간 다음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영원 속에는 진실하고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계기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신 자신도 지금 이 순간 절정에 이르러 있고, 모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지금보다 더 신성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이 계속 우리에게 스며들어 거기에 흠뻑 젖어야만 비로소 숭고하고 고결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그리고 고분고분 우리 생각에 응답한다. 우리가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거기에는 우리가 지나갈 길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삶을 고안하고 구상하는 데 생애를 바쳐보자. 시인이나 예술가가 마음속에 품은 아름답고 고상한 구성은 적어도 후세의 누군가가 완성해낼 수 있었다.

 

하루를 자연처럼 유유히 살아보자. 철도 위에 견과류 껍질이나 모기 날개가 떨어질 때마다 탈선하는 기차처럼 되지는 말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든 거르든 관계없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조용히 평온하게 지내보자. 친구가 오든 말든, 초인종이 울리든 말든, 애들이 울든 말든,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기로 결심하자. 우리는 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야 하는가? 정오의 얕은 여울에 자리 잡은 점심이라는 이름의 무서운 격류와 소용들이에 휩쓸려 압도당하지 말자. 이 위험만 뚫고 나가면 우리는 안전하다. 나머지 길은 내리막이니까, 긴장을 풀지 말고 아침의 활력을 간직한 채, 율리시스처럼 돛대에 몸을 묶고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면서 그 위험을 빠져나가자. 기적이 울리면, 애쓴 보람도 없이 목이 쉴 때까지 울게 내버려두자. 초인종이 울린다고 왜 뛰어나가야 하는가? 그 소리를 일종의 음악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차분히 자리를 잡고, 의견과 편견, 전통과 망상과 겉모양이라는 진창 속에 발을 담그고, 지구를 덮고 있는 모래톱을 지나고,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를 지나고, 교회와 지방을 지나고, 시와 철학과 종교를 지나서, 마침내 우리가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단단한 바닥과 바위에 닿으면 "맞아, 바로 여기야!"하고 외쳐보자. 그런 다음, 홍수와 서리와 불 밑에 거점을 마련했으니 작업을 시작하자. 여러분은 그 거점에 성벽이나 나라를 세울 수도 있고, 안전하게 가로등을 세울 수도 있고, 위선과 겉치레의 홍수가 진실을 얼마나 깊이 뒤덮었던가를 미래 세대가 알 수 있도록 측정기를, 나일로미터[각주:9]가 아니라 리얼로미터를 설치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사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사실이 마치 시미타(신월도)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의 양쪽 표면에 햇빛이 반사하여 빛나는 것을 보고, 그 감미로운 칼날이 여러분의 심장과 골수를 가르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여러분은 삶을 행복하게 마치게 될 것이다. 삶이든 죽음이든 우리는 오로지 진실만을 갈망한다. 우리가 정말로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목 안에서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수족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자. 우리가 살아있다면 해야 할 일에 달라붙어 열심히 일하자.

 

시간은 내가 낚싯줄을 내리는 시냇물일 뿐이다. 나는 거기서 물을 마신다. 하지만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모래 바닥을 보고 냇물이 얼마나 얕은지 알아낸다. 시간의 얕은 냇물은 흘러가버려도 영원은 그 자리에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마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려 있는 하늘의 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싶다. 나는 하나라는 수도 셀 줄 모르고, 알파벳의 첫 글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나던 날만큼 현명하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해왔다. 지성은 큰 칼이다. 사물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내 손을 바쁘게 놀리고 싶지 않다. 내 머리가 손과 발이다. 나는 나의 최고 능력이 모두 머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어떤 동물이 주둥이와 앞발로 굴을 파듯, 나는 굴을 팔 때 내 머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나는 이 머리로 굴을 파면서 주변 언덕들을 뚫고 나갈 것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노다지 광맥이 있을 것 같다. 탐지 막대와 가늘게 피어오르는 증기를 보고 나는 판단할 것이다. 자, 여기서 채굴을 시작해보자.

  1. 윌리엄 쿠퍼의 <알렉산더 셀커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에서 [본문으로]
  2. 마하바라타의 부록. 하리(비슈누)의 가계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3. <필리데이를 향한 목동의 사랑> 중 [본문으로]
  4.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인은 소인족(피그미)과 싸우는 두루미에 비유되었다 [본문으로]
  5. 켄터키 중부의 세계 최대 규모의 석회암 동굴 [본문으로]
  6. 우편요금을 1페니로 획일화한 영국 제도 [본문으로]
  7. 인판타는 왕녀 이사벨을 이르는 말로,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여왕에 즉위하였다. 그러자 숙부 돈 카를로스가 이에 반발하여 1839년까지 내전에 지속되었다. [본문으로]
  8. 돈 페드로(페드로 1세)는 카스티야의 왕으로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잔혹왕 또는 정의왕으로도 알려졌다. [본문으로]
  9. 나일강의 범람을 예측하기 위해 설치한 수위 측정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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