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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독서 본문
직업을 선택하는 데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한다면 누구라도 근본적으로는 학생이나 관찰자가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심이 많으니까 말이다. 자신이나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으고 가정이나 국가를 세우고 심지어 명성까지 얻는다 해도 우리는 결국 죽고 말지만, 진실을 다루면 불멸의 삶을 살게 되고 변화나 우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고대 이집트나 인도의 철학자는 신의 조각상을 덮어둔 베일의 한 귀퉁이를 걷어 올렸고, 그래서 지금도 흔들리고 있는 그 베일은 여전히 걷어 올려진 채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고대 철학자가 보았던 것과 같은 신선하고 찬란한 광휘를 바라보고 있다. 옛날 그렇게 대담했던 자는 그 철학자 안에 있는 나였고, 지금 그 모습을 회상하는 자는 내 안에 있는 그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 베일에는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다. 그 신의 조각상에서 신성이 드러난 뒤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로 활용하는 시간 혹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내가 살던 집은 사색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해서도 대학보다 여건이 훨씬 좋았다. 내가 살던 곳은 순회도서관조차 찾아오지 않는 벽지였지만, 온 세상을 순회하는 책들, 처음엔 나무껍질에 적혔으나 지금은 때때로 아마 종이에 복사되는 책들의 영향을 어느 때보다 많이 받았다. 시인 미르 카마르 웃딘 마스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만히 앉은 채 정신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이점을 나는 책 속에서 얻었다. 한잔 술을 마시고 취하듯이 나는 현묘한 교리라는 술을 마시고 이 즐거움을 맛보았다."
나는 이따금 책장을 넘겨보는 정도였지만, 여름 내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책상 위에 놔두고 있었다. 집을 짓는 일을 마무리해야 했고 동시에 콩밭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처음엔 일이 바빠서 더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마음껏 독서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기분을 다독이고 있었다. 일하는 틈틈이 가벼운 여행기를 한두 권 읽었지만, 그러는 동안 그런 짓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끝내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도대체 어디냐고 자문하곤 했다.
학생이라면 방탕이나 사치에 빠질 위험 없이 호메로스나 아이스킬로스를 그리스어로 읽을 수 있다. 학생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작품 속의 영웅들과 경쟁하며 오전 몇 시간을 책에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영웅들을 묘사한 책이 우리 모국어로 인쇄되어 있다 하더라도, 타락한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마치 죽은 언어로 쓰인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혜와 용기와 관용 속에서 일상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추측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애써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책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쇄술이 많은 번역서를 낳고 있긴 하지만, 그 책들이 고대 영웅들을 다룬 작가들에게 우리를 가까이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그 작가들은 여전히 고독해 보이고, 책에 인쇄된 글자들도 여전히 낯설고 진기해 보인다. 고대 언어는 항간의 세속적인 시시함을 초월하는 불멸의 암시나 자극을 주기 때문에, 그 언어의 낱말을 몇개 배우는 것만으로도 젊은 시절의 귀중한 시간을 바칠 만한 가치는 있다. 농부가 주워들은 라틴어 낱말 몇 개를 외워서 흉내내보는 것도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고전 연구가 언젠가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에 길을 비켜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하지만 탐구적인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쓰였건,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건, 그런 것은 문제 삼지 않고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사상의 기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전이야말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는 델포이나 도도나(제우스의 신탁소)도 줄 수 없는 가장 최근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독서, 즉 참된 책을 참된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이 운동은 현대의 풍습이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힘든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참고 견뎌야 하는 것과 같은 훈련을 요구하며,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평생 일관되게 간직해야 한다. 책은 그것이 쓰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시간을 들여 정성껏 읽어야 한다. 책이 쓰인 나라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아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구어와 문어, 귀로 듣는 언어와 눈으로 읽는 언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어는 대개 일시적인 것, 즉 소리나 발음이나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언어를 동물들처럼 어머니한테 무의식적으로 배운다. 문어는 구어가 성숙되고 경험을 쌓아서 이루어진 언어다. 구어가 어머니의 말이라면 문어는 아버지의 말이고, 귀로 듣기에는 너무나도 의미 깊은 표현, 그것을 말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할 만큼 신중하고 선택된 표현이다.
중세에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연히 그때 태어났을 뿐이고, 그들이 모두 그 언어로 쓰인 천재들의 작품을 읽을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작품들은 그들이 아는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선택된 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나 로마의 더욱 고상한 언어를 배우지 않았고, 그것이 쓰여 있는 책 자체는 그들에게 휴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런 책들보다는 당대의 저속한 문학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유럽의 몇몇 나라가 비록 조잡하지만 자신들의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겠다는 목적에는 충분히 부합되는 문어를 갖게 되면서 비로소 학문이 되살아났고, 학자들은 시간의 긴 간격을 넘어서 고대의 보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대중이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수의 학자들이 읽었고, 지금도 몇몇 학자들만이 그것을 읽고 있다.
웅변가의 열변에 우리가 아무리 감탄한다 해도, 기록된 말들은 입에서 나오면 덧없이 사라지는 일상어 너머에 있다. 별들이 총총히 박힌 창공이 구름 너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별은 아득히 먼 저쪽에 있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별을 읽을 수도 있다. 천문학자들은 끊임없이 별들에 대해 설명하고 관찰한다. 별들은 우리의 일상적 대화나 입김처럼 증발하여 사라지는 발산물이 아니다. 토론장에서의 열정적인 웅변이 서재에서는 단순한 미사여구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웅변가는 그때그때의 즉흥적인 영감에 따라 자기 앞에 있는 군중, 즉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는 웅변가에게 자극을 주는 사건이나 군중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인류의 머리와 가슴, 그러니까 그를 이해해주는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원정을 떠날 때면 귀중품 궤짝에 <일리아드>를 넣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 기록된 말이야말로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유물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품보다 우리에게 친근하고 보편적이며 삶 자체와 가장 가까운 예술품이다. 그것은 모든 언어로 옮겨질 수 있으며, 읽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사람의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기도 한다. 화폭이나 대리석에 재현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의 숨결로 새겨질 수도 있다. 이처럼 고대인의 생각을 상징하던 것이 현대인의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지나간 2000천번의 여름은 대리석 조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문학의 기념비들에도 무르익은 가을의 원숙한 황금빛 색조를 더했을 뿐이다. 그리스 문학은 세월의 침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차분하고 천상적인 분위기를 모든 땅에 가져왔기 때문이다.
책이란 이 세상의 귀중한 재산이며, 모든 세대와 모든 민족을 거쳐 물려받은 유산이다. 아무리 허름한 오두막일망정 그 집 선반에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훌륭한 책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꽂혀 있다. 책 자체는 주의주장을 갖고 있지 않지만, 독자를 계몽시켜주고 고무시켜주는 한, 상식을 가진 독자라면 책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책의 저자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거부할 수 없는 타고난 귀족이며, 왕이나 황제 이상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식한 탓에 학문 따위를 경멸하는 상인이 장사꾼 기질과 근면으로 평소에 염원하던 여가와 자립을 얻어 부유한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지면,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 높은, 그러나 아직은 접근할 수 없는 지성과 재능의 세계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교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고, 또 재산이 덧없고 쓸데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지적 교양을 자식들만큼은 갖추게 하려고 애씀으로써 그는 한 집안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옛 고전을 원어로 읽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 대해 매우 불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문명 자체가 고전의 번역이라고 여긴다면 모르지만, 어떤 고전도 현대어로 번역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아직 영어로 인쇄된 일이 없고, 아이스킬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작품은 아침의 맑은 공기처럼 신선하고 내용이 충실하고 아름답다. 우리가 후세 작가들의 재능을 어떻게 평가하든, 옛 고전 작가들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성도, 평생에 걸친 영웅적인 노고에 견줄 만한 작가는 드물다. 고전을 모르는 자들만이 그것을 잊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런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학식과 재능을 갖추게 되면 그때는 고전을 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문화적 유산과, 고전보다 더 오래되고 수도 많지만 덜 알려진 어려 민족의 경전들이 지금보다 더 널리 수집되고, 바티칸이 <베타>와 <아베스타>와 성경, 거기에 호메로스와 단테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지고, 그 기념비적 작품들을 미래세대가 차례로 세계의 광장에 쌓아올리면, 그 시대야말로 참으로 풍요로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쌓아올린 문화유산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의 계단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1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오직 위대한 시인들만이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아직 인류에게 읽힌 적이 없다. 행여 대중이 읽었다 해도, 그저 별을 읽듯이, 그것도 천문학적으로가 아니라 점성술적으로 읽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부를 적거나 거래에서 속지 않기 위해 셈법을 배우듯 사소한 편의를 위해 읽기를 배울 뿐, 고귀한 지적 활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수준 높은 독서야말로 진정한 독서이고, 사치품처럼 우리를 어르고 달래어 고귀한 능력을 잠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돋움을 한 것처럼 모든 신경을 집중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국어 문자를 배운 뒤에는 최고의 문학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평생을 초등학생처럼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가나다라나 단음절 낱말만 되뇌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성경이라는 좋은 책을 읽거나 남이 읽는 것을 듣고 어쩌다 그 지혜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머지 인생은 이른바 허접한 문학을 읽으면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탕진해버린다. 우리 마을의 순회도서관에는 <리틀 리딩>이라는 제목의 몇 권짜리 작품이 있었는데,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내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을에 관한 책인 줄만 알았다. 무엇이든 낭비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고기와 채소로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에도 가마우지나 타조처럼 이런 잡동사니를 얼마든지 소화해내는 사람도 있다. 작가가 이런 여물을 만들어 제공하는 기계라면, 그들은 그 여물을 읽어 치우는 기계다. 2
그들은 제블론과 세프로니아에 관한 9천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이 젊은 남녀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랑했다는 둥, 그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는 둥, 어쨌든 그 사랑은 나아가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나아갔다는 둥, 또한 어느 불쌍하고 불행한 남자가 교회 종탑에 올라갔는데, 그 사람은 그곳까지 올라가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둥, 그렇게 그 사람을 쓸데없이 거기에 올려놓고 신이 난 소설가는 종을 울려서 세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사람이 다시 내려왔다면서 그 이유를 떠벌인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넋을 잃고 있다. 3
나는 소설 왕국에 널리 퍼져 있는 그런 야심적인 주인공들이 지상에 내려와 정직한 사람들에게 못된 장난을 칠 수 없도록, 마치 고대 작가들이 주인공을 하늘의 별자리 사이에 올려놓았듯이 그들을 풍향계로 둔갑시켜 녹이 슬 때까지 빙글빙글 돌아가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소설가가 종을 울리면, 교회당이 불에 타서 내려앉아도 나는 꼼짝하지 않을 작정이다. "유명한 <티틀 톨 탠>의 작가가 새롭게 선보이는 중세 로맨스 <팁 토 홉의 뛰어넘기>가 매달 출간될 에정, 주문이 쇄도하고 있으니 한꺼번에 몰려들지 마십시오!" 이런 광고에 사람들은 유치한 호기심으로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뜨고 귀를 곤두세우고, 아직 날을 세울 필요도 없는 튼튼한 위장 속에 집어삼키듯이 읽어댄다. 그것은 네 살짜리 아이가 걸상에 앉아서 2센트짜리 금박 표지의 <신데렐라>를 읽는 것과도 같다. 그런 책을 읽어봤자 그 아이는 발음이나 억양에 조금도 진전이 없고, 교훈을 끌어내거나 끼워 넣는 능력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력이 떨어지고 혈액 순환이 나빠지고 지적 능력이 위축되거나 감퇴할 뿐이다. 이런 종류의 생강 빵은 날마다 거의 모든 부엌에서 순수한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보다 훨씬 많이 구워지고, 훨씬 확실하게 팔려나간다.
이른바 훌륭한 독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조차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콩코드의 교양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 마을에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언어로 쓰인 영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거나 상당히 괜찮은 작품들에 대해서 흥미조차 없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마을에서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이른바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조차 영문학 고전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인류의 기록된 지혜인 옛 고전이나 경전들은 알려고만 하면 누구나 쉽게 구해볼 수 있을 텐데도, 그것과 친해지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중년의 나무꾼은 프랑스어 신문을 받아보고 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뉴스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캐나다 출신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잊어먹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특별히 이루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프랑스어 말고도 영어를 계속 공부해서 실력을 키우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는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하는 일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영어 신문을 구독하는 것이다.
영어로 된 가장 훌륭한 책을 방금 다 읽은 사람이 그 책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몇 명이나 찾아낼 수 있을까? 또는 이른바 문맹인 사람도 훌륭한 책이라는 칭찬을 귀가 아프게 들어서 그 가치를 알고 있는 그리스어나 라틴어 고전을 누군가가 원어로 읽었다고 치자. 아마 그는 그 책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전혀 찾지 못하고 그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학에서는, 그리스어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그리스 시인의 지혜와 작품의 어려움까지 극복하여 젊은 독자들에게 어떤 교감을 나누어줄 수 있는 교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이나 경전에 관해 말한다면, 그 책들의 제목만이라도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마을에 과연 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유대인 이외의 다른 민족도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달러짜리 은화를 줍기 위해서라면 상당히 먼 길을 돌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현인들이 말했고 후세의 현인들이 그 가치를 대대로 보증해준 황금 같은 말들이 여기 있는데도, 우리는 기껏해야 초급 독본이나 교과서 정도의 '쉬운 읽을거리'밖에 읽지 않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이들이나 초보자를 위한 <리틀 리딩> 따위를 읽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우리의 독서와 대화와 사고는 소인족과 난쟁이에게나 어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낮다.
나는 여기 콩코드에서는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 마을이 배출한 어떤 인물보다도 현명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어쩌면 나는 플라톤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의 책은 읽은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플라톤이 우리 마을에 사는데도 그를 만난 적이 없거나, 바로 이웃인데도 그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거나, 그의 말에 담긴 지혜에 귀를 기울인 적도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불멸의 지혜가 담긴 그의 <대화>가 내 서가에 꽂혀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읽은 적이 없는 형편이다.
우리는 상스럽고 비루하며 미숙하게 살아간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아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무식함이나, 아이들과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책밖에 읽지 않는 사람들의 무식함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비슷해져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발육부전인 동물이어서, 지적으로 일간지의 칼럼 이상은 날아오르지 못한다.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책 속에는 아마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다룬 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말들을 실제로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말들은 아침이나 봄보다도 더 우리 삶에 기운을 주고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마 우리의 기적을 설명하고 새로운 기적을 계시해줄 책이 우리를 위해 존재할 것이다. 지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어느 곳에선가 표현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를 동요시키고 혼란시키고 현혹시키는 문제들은 일찍이 모든 현인들에게도 일어났던 것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능력에 따라 말과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의 지혜와 함께 관용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옛 현인들에게 배운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콩코드 교외의 한 농장에 고용되어 외롭게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는 개종을 통해 독특한 종교적 체험을 겪고 자신의 신앙 때문에 엄숙한 침묵과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천년 전에 차라투스트라도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체험을 했다. 하지만 그는 현명했기 때문에 그 체험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그 깨달음에 따라 이웃들을 대했으며, 하나의 종교를 창시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로운 농부도 겸손한 태도로 조로아스터와 교류하고, 모든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도 교류하며, '우리 교회' 따위의 배타적인 태도는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19세기에 살고 있으며,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 마을이 자체의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하는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싶지도, 아첨을 받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양쪽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처럼 우둔하니까, 소처럼 빨리 달리려면 채찍질을 당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 즉 초등교육에 대해서는 비교적 훌륭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겨울철에만 열리고 아사 직전에 놓인 강습회와 최근에 주정부의 제안으로 문을 연 보잘것없는 도서관을 제외하면 성인을 위한 교육시설은 전무한 실정이다. 우리는 정신적 자양분은 등한시하면서 육체적 자양분이나 질병에 대해서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도 성인을 위한 어엿한 학교를 세울 때가 되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교육을 그만두는 것을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 그리고 각 마을이 곧 대학이 되고, 주민들은 여유를 가지고 특별 연구원이 되어 교양을 쌓으면서 여생을 보낼 때가 온 것이다. 세계가 과연 언제까지 하나의 파리대학, 하나의 옥스퍼드 대학으로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학생들이 이곳에 기숙하면서 콩코드의 하늘 밑에서 교양 교육을 받을 수는 없을까? 아벨라르같은 뛰어난 학자를 초빙하여 그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축을 돌보거나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구실로 너무 오랫동안 학교를 멀리해왔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교육이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각 마을이 어떤 면에서는 유럽의 귀족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술의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 마을은 그렇게 할 만큼 재력이 충분하다. 다만 그렇게 할 만한 아량과 교양이 부족할 뿐이다. 농부와 상인들이 좋다고 하는 일에는 돈을 펑펑 쓰지만, 지적인 사람들이 훨씬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돈을 쓰자고 제안하면 꿈같은 소리 말라는 핀잔이나 듣기 십상이다. 우리 마을은 행운 덕택인지 정치 덕택인지 마을회관을 짓는 데 1만 7천 달러를 썼지만, 그 껍데기 안에 들어갈 진짜 알맹이, 즉 살아있는 지성을 키우는 일에는 100년이 걸려도 그렇게 많은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 겨울철 강습회를 위해 해마다 걷히는 125달러의 기부금은 이 마을에서 모금된 같은 액수의 어떤 기부금보다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가 19세기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왜 19세기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려 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신문을 읽고 싶다면, 보스턴의 가십거리나 다루는 신문 따위는 치워버리고 세계 최고의 신문을 구독하는게 어떤가? 이곳 뉴잉글랜드에 산다고 해서 <중립적 가정> 4의 이유식을 빨아먹거나 <올리브가지>를 뜯어먹는 일은 이제 그만두는게 어떤가? 모든 학회의 보고서를 받아서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보자. 5
왜 우리는 우리가 읽을 책의 선정을 하퍼출판사나 레딩출판사에 맡겨야 한단 말인가? 세련된 취미를 가진 귀족이 교양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 이를테면 지능, 학문, 지혜, 책, 회화, 조각, 음악. 철학 등으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듯, 우리 마을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우리의 필그림 파더스가 황량한 바위 땅에서 겨울을 날 때 그랬다고 해서 우리도 교사 한명, 목사 한명, 교회지기 한명, 교구 사서 한명, 행정위원 3명으로 만족하지는 말자.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은 우리 제도의 정신과 부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유럽의 귀족보다 번영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재력 또한 그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뉴잉글랜드는 세상의 모든 현인들을 초빙하여 배울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지방의 낙후성을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을 위한 학교다. 귀족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고상한 마을을 만들어보자. 필요하다면 길을 좀 돌아가더라도 강 위에 다리를 하나 덜 짓고,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지의 검은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를 더 놓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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