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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역사

과학주의자 2022. 8. 15. 13:57

근대적인 정신의학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정신분석학이 우세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물학적 접근이 강화되어 현재는 많은 정신과에서 약물치료를 우선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활동범위를 정신의학에서 점차 다른 분야까지 넓혀갔다. 이 문서는 주로 임상심리학적 접근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의학적 관점과는 다른 사실이 있을수 있다.

 

 

정신의학의 여명

과거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정신질환은 영적으로 이해되었다. 정신질환자는 대개 미쳤거나, 귀신들렸거나, 신의 저주를 받은 결과였다. 어떤 경우에는 머리속의 악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머리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각주:1] 이에 대한 최초의 자연주의적 접근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는데,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이 그 시작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의사로, 다양한 의학적 주제에 관심을 가져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히포크라테스는 정신질환을 조증(mania), 울증(melancholia), 광증(phrenitis)으로 나눴는데, 조증은 양극성 장애, 울증은 우울장애, 광증은 조현병과 비슷하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질환은 신체에 있는 4가지 체액의 부조화로 인해 발생한다. 비슷하게 플라톤도 영혼의 문제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서가 신체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리스에도 다른 문명권과 같이 전체론적인 사고관이 질병 인식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매우 초창기부터 인류에게 알려진 우울증도 체액의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서양의학에서는 우울증이 검은 쓸개즙(bilis atra)이 많을때 나타나는 증상이며, 검은 쓸개즙이 많은 체질인 후모르 멜란콜리쿠스(humor melancholicus)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문학이나 철학에서는 우울증이 깊은 사색이나 천재성이 심화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 이해하기도 했으며, 우울증 환자가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도 존재했다.[각주:2]

 

정신질환에 대한 논의는 로마시대에도 융성했으나, 중세가 도래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영적 접근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후에 근대가 도래하여 기독교가 약화되었고, 동시에 인간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논의도 다시 활발해졌다. 이 시기를 전후로 많은 정신병원이 생겨났는데, 이 시대의 정신병원은 치료보다는 정신질환자의 감금을 목적으로 하였다. 환자들은 치료대신 학대를 당했고, 열악한 시설에 거주하면서 수치료를 적용한다는 명목으로 물고문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프랑스의 의사 필리프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이다. 필리프 피넬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학대를 반대하고 처음으로 환자들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를 주장했다. 피넬은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정신병원인 at labicetre의 소장이 되었는데, 거기서 피넬은 환자에 대한 구타와 쇠사슬 착용을 금지시키고 햇빛쬐기와 운동 시간을 주었다. 또한 처음으로 정신질환자의 치료에 중점을 두어 여러 명의 치료자를 고용하였고, 근대적인 의무기록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이러한 인도주의 운동은 영국의 William Tuke(1732-1822)와 미국의 도로시 딕스(Dorothea Dix, 1802-1887)에게 전파되었고, 이제는 전세계의 정신병원에 기본 상식이 되었으나 아직 환자에 대해 학대를 자행하는 병원도 상당수 존재한다.

 

임상심리학의 탄생과 발전

19세기 중반에는 정신의학과 임상심리학의 기반을 이루는 긴요한 발전들이 이루어졌다. 먼저 다윈의 진화론이나 멘델의 유전학처럼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였다. 동시에 인간의 심리적 기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는데, 한편에서는 최면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메스머리즘이 흥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에 의해 최초로 지능검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노력들은 심리학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 정신의학자이자 정신분석학파였던 에밀 크레펠린(1856-1926)이 '역동적 분류체계'라는 이름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분류법을 제안하였는데, 이 분류법은 1952년 DSM 출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DSM의 아버지 에밀 크레펠린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추앙되었다.

 

임상심리학은 최초의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 카텔의 제자 라이트너 위트머(Lightner Witmer, 1867-1956)가 1896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처음으로 '임상심리학'의 명칭을 가진 임상심리 센터를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임상심리 센터의 주 업무는 학습부진아에 대한 지원이었는데, 그래서 위트머는 인근 공립학교에서 학업이나 행동 지도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의학적/심리학적 검진을 실시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학습부진 완화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임상심리학이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동시에 위트머는 학교심리학의 창시자로도 여겨져 지금도 학교심리학에서 공헌한 사람은 라이트너 위트너 상을 수상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접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서 필리프 피넬이 인도주의적 치료운동을 전개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후 Clifford Beers(1876-1943)와 Adolf Meyer(1866-1950)가 정신위생운동(mental hygiene movement)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사회개혁을 통해 정신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당시 미국 개신교계에서는 신사고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인간 의식의 개혁을 추구하는 임마누엘 운동(emmanuel movement)이 일어났다. 임마누엘 운동을 주도한 목사들은 의학과 심리학, 그리고 기독교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의 주장은 오늘날 목회상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목회상담이 별 의미있는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임마누엘 운동은 사이비과학적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정신의학이 발전하면서 미국에도 정신분석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신분석을 받아들인 이들은 대개 의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정신분석 치료가 오로지 의사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주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당대의 신경과 의사 Morton Prince(1854-1929)는 정신질환 연구에서 심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처럼 심리학을 존중하는 관습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후 임상심리학이 뿌리내리면서 1906년 임상심리학 3대 저널 중 하나인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가 발간되기 시작하였고, 1909년에는 William Healy(1869-1963)가 시카고에 청소년 정신병질 연구소를 열었으며, 1926년에는 하버드에 심리클리닉이 설치되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임상심리학자인 Grace Fernald와 Augusta Bronner도 미국에서 활동했다.

 

점점 커지는 임상심리학은 순수과학을 강조하던 APA 체제에 불만을 제기했고, 독자적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는 1917년 미국임상심리사협회(AACP) 등 다양한 단체의 설립 시도로 이어졌고, 마침내 1944년 APA가 분과체제로 전환하면서 최초로 임상심리학회가 등장하였다. 이와 유관된 단체 중 하나인 뉴욕자문심리사협회(ACP)는 <Journal of Consulting & Clinical Psychology>를 발간하였는데, 이 학술지는 오늘날 3대 임상심리학 저널 중 하나이다. 

 

정신분석의 탄생과 발전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의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는 최면을 통해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보통 히스테리(histeria)라 불리는, 정서적으로 혼란스런 경험의 결과로 인지적 혹은 운동 기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증상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환자가 최면에 빠졌을때 증상이 완화되는 현상을 보고 최면에 흥미를 가졌다. 최면에 흥미를 가진건 샤르코만이 아니었는데, 거기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젊은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도 포함되었다.

 

샤르코에게서 최면치료를 배운후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점차 샤르코와는 다른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가 보기에 히스테리의 원인은 고통스러운 아동기 경험으로 보였고 이 경험이 무의식을 통해 작동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무의식(unconscious)의 존재를 주장했고, 자신의 고유한 무의식 이론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기반을 다졌다. 프로이트는 마음이 이드와 초자아, 자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드(id)는 오로지 본능만을 추구하는 쾌락의 원리를 따르고, 부모의 훈육이 내재화되어 사회에 따르기를 추구하는 초자아(super ego, 슈퍼에고)는 그 성질답게 사회적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도덕 원리를 따르며, 이 둘을 현실과 잘 조율하는 자아(ego)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현실 원리(2차 과정)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이드는 삶을 추구하는 에로스(eros) 본능과 삶의 파괴를 추구하는 타나토스(thanatos) 본능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쪽이든 초자아와 사이가 안좋다. 그래서 초자아와 이드는 자아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데, 이드가 강할 경우 이드가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 사고를 칠수 있다는 신경증적 불안(neurotic anxiety)이 일어나고 반대로 초자아가 강하면 자신이 도덕을 언제 어길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도덕적 불안(moral anxiety)이 나타난다는게 프로이트의 주장이다.[각주:3] 실제 위협에서 오는 불안은 현실 불안(reality anxiety)라고 따로 불렀는데, 신경증적 불안이나 도덕적 불안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안됨은 명확하다. 따라서 자아가 이들을 적절히 처리해야 하는데, 프로이트는 자아가 억압과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불안을 통제한다고 하여 방어기제의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 또한 프로이트는 어릴때 부모가 오냐오냐해준 아이들은 초자아가 발달하지 못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고, 이드와 초자아의 긴장이 너무 크거나 억압적인 양육으로 인해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억압된 이드가 폭발해 범죄나 정신질환을 일으킬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주류 심리학계는 프로이트의 과학적 방법론 결여를 들어 정신분석을 거부했다. 여기에는 성욕을 강조하고 성기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외설적인 설명도 한몫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고 이들은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모여 정신분석(psychoanalysis)을 형성하였다. 이 중에 영향력있었던 제자로는 카를 융(Carl Jung)과 아들러(Adler, 1870-1937)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신분석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으로 융은 집단무의식과 원형 개념을 강조한 분석심리학(analytic psychology)을 개발했고, 아들러는 열등감과 보상욕구, 라이프스타일의 개선으로 나타나는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개발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흐름과 프로이트가 충돌하면서 결국 융과 아들러는 정신분석에서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고,[각주:4] 프로이트 사망 후 남은 제자들도 다른 학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된다. 후에 정신분석이 미국에 전래되면서 20-30년대에 의사들에게(다소 베타적인 태도로) 정신분석이 수용되었고, 이들의 주장은 후에 다양한 심리치료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알프레트 아들러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W. Adler, 1870-1937)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임상심리학자이다. 그는 아들러 치료의 창시자이며, 빈 정신분석학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1870년 2월 7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홍역을 앓거나 수레에 2번이나 치이는 등 병약한 시절을 보냈다. 이때 그가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느낀 신체적 열등감이 아들러 치료의 밑바탕이 되었다.

 

성인이 된 그는 러시아 유학생이었던 아내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가졌다. 당시 아내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함을 옹호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옹호하였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아들러는 그 자신도 사회주의자가 되는 동시에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때 발생한 사회적 관계의 강조는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발전한다.

 

아들러가 프로이트를 만난 건 1902년이다. 당시에 프로이트에 심취한 아들러는 곧 프로이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빈 정신분석학회를 열어 프로이트의 충실한 종복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와 미래를 강조하는 그의 주장이 본능과 과거를 강조하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점점 충돌하였고, 결국 그는 1912년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여 개인심리학회라는 그만의 학파를 따로 창시한다. 이때 권력과 완전성의 추구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이 정립되었다.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이라는 생각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꽃피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아들러는 부상병들이 가지는 높은 연대감에 깊이 감명받았고, 곧 공동체의식이 건강한 인간의 필수조건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이렇게 아들러 치료가 정립된 이후, 그는 빈에 정신병원을 열고 영미권까지 자신의 이론을 보급하였다. 또한 다른 정신분석학파와 달리 정신질환의 예방을 중요시해서, 아동교육과 아동지도 클리닉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상심리학의 현재[각주:5]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많은 심리학자를 동원하였고, 이들의 성과가 임상심리학에도 반영되었다. 알파-베타 검사가 1차 대전기에 등장하였고, 최초의 자기보고식 성격검사가 등장하였다. 이들의 규모는 전쟁 기간 동안 급속도로 커졌고, 이는 전후 심리학의 발전 잠재력이 되었다. 미국 심리학자들은 1943년 미네소타대학의 임상심리학자 해서웨이(hathaway)와 정신과 의사 맥킨리(mckinley)를 중심으로 처음으로 경험적인 연구방법을 통해 MMPI를 제작하였고, 1955년과 1949년에 각각 WAIS와 WISC를 제작하였다. 한편 1946년 APA 산하 임상심리학 수련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임상심리학 수련과정의 표준화를 시도하였고, 4년간의 대학원 기간(석사 2년+박사 2년)과 1년의 수련기간으로 정해진 방안이 제정되었다. 이는 1947년에 발족한 미국 전문심리학 평가위원회(ABEPP)가 감독하기로 했는데, ABEPP는 나중에 미국 전문심리학 위원회(ABPP)로 개편된다.

 

한편 ABEPP에서 제시한 수련과정 표준화 방안은 1949년 콜로라도 볼더에서도 논의되었고, 과정이 더 체계화되면서 동시에 과학자-실천가 모델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표준안을 볼더(Boulder) 모형이라 부르며, 이때 제정된 이후 볼더 모형은 학계의 표준이 되었다. 볼더 모형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아래와 같다.

 

  1. 임상심리학자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2. 심리학자로서 먼저 수련받고 이후에 임상가로 수련을 받아야 한다.
  3. 임상수련을 이수해야 한다.
  4. 진단과 심리치료에 대해 수련해야 한다.
  5. 수련의 정점은 박사학위이며, 임상가는 독창적인 연구로 학계에 공헌해야 한다.

 

1950년대는 정신의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먼저 심리치료에서 행동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이외에도 게슈탈트 치료나 인간중심 치료 등 정말 다양한 치료법이 나타났다. 이때 APA는 1955년 심리학자격관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심리학자의 등록과 면허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치료법과 함께 심리검사도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APA는 1954년 교육 및 심리검사 표준도 공포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셴크가 심리치료의 효과를 부정한 유명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이에 반발한 임상심리학자들에 의해 심리치료의 효과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동시에 정신의학자들은 정신과 약물을 최초로 개발했는데, 1951년 FDA에서 이미프라민을 최초의 우울증 치료제로 승인한 이후 리튬(항조증제), 클로로프로마진(조현병), 할로페리돌(조현병), 벤조디아제핀(진정제, 항불안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듯한 유명한 약물이 마구 등장하였다. 이러한 약물이 정신질환자를 3분의 2 가까이 줄이면서 정신질환이 치료될 수 있다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고, 1963년 지역사회건강법이 제정되면서 지역사회 정신건강 운동 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정신보건 사회복지학의 시초가 된 이들은 정신질환의 예방과 초기 개입을 중시하였고, 만성 정신질환자의 퇴원과 사회복귀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정신의학의 힘이(특히 임상심리학의 힘이) 커지자 정치권에도 이것이 반영되었다. 1970년 미국 정부는 APA를 심리학자 인증 대행기관으로 정식 승인하였고 1978년 켈리포니아에서 심리학자의 병원 진료권을 최초로 인정하였다. 이는 2006년까지 37개 주로 확대되었으며, 다른 12개 주에서는 부분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보험에 대한 조치는 더 빨랐는데, 1969년 뉴저지에서 정신과 의사의 감독이나 의뢰 없이도 심리서비스에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정하였다. 이후 1980년 버지니아 임상심리사회는 보험사와의 소송에서 승소하여 심리서비스에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요구를 다시 한번 관철시켰다. 한편 볼더 모형은 임상적 측면을 강조한 베일(Vail) 모형으로 대체되었는데, 베일 모형은 심리학 박사(Psy. D.) 과정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유명한 반 정신의학 사건이 있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은 몇몇 동료와 함께 가짜로 증상을 만들어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이들은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어떠한 증상도 꾸며내지 않았다. 이들이 퇴원하기까지는 1-2달이 걸렸고, 이로 인해 정신의학이 신뢰할 수 있는 학문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이는 특히 정신병원들에서 로젠한이 보낸 가짜 환자를 적발했다며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내보내면서 더 심해졌고, 정신의학 전반에 자성적인 노력을 일으켰다. 그 일환으로 학자들은 매우 모호하고 정신분석학에 편향되어 있었던 DSM-Ⅱ를 DSM-Ⅲ로 개정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를 업데이트해 1988년 DSM-Ⅲ-R, 1994년 DSM-Ⅳ, 2000년 DSM-Ⅳ-TR, 2013년 DSM-5로 이어졌다.

 

DSM이 개정되는 시기에 MMPI도 개정이 이뤄졌다. 1982년 미국에서는 MMPI-2 재표준화 위원회가 발족되어 1989년 MMPI-2를 제작하였다. MMPI-2는 기존 MMPI와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임상척도들과 그 개념을 모두 보전하여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했지만, 그만큼 새로운 타당도 척도를 도입하고 하위척도라는 개념을 새로이 도입하여 검사의 유용성을 키웠다. 1989년에는 청소년 프로젝트 위원회도 발족되어 92년 청소년용 MMPI인 MMPI-A를 제작했지만 이는 MMPI-2에 비해 잘 쓰이지 않는다. 

 

이처럼 혼란이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 임상심리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DSM은 5판까지 나왔고, 1995년 APA에서 약물처방권 수련과정을 승인한 이후 특정 약물에 대해서는 독자적 처방권을 확보하였다. 동시에 1990년대 들어 심리학 박사 출신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임상심리학에 대한 수요도 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건강보험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10년대에는 오바마케어가 법제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보험의 비호 아래 정신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정신의학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있다.

 

한편 90년대부터 임상심리학에서는 긍정심리학과 근거중심의학의 바람이 불어왔다. 1998년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APA 회장에 취임하면서 인간의 긍정적인 특성에 주목하려는 임상심리학자가 증가하였다. 한편 심리서비스에 대해 보험료를 지급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보험사는 임상가들에게 근거가 있고 확실한 치료법을 실시할 것을 주문했는데, 이는 때마침 의학에서 불어오던 근거중심의학 패러다임과 맞물렸다. 정신분석 치료는 다시 한번 욕을 먹었고, CBT가 다른 어떤 치료보다 우선시 되었으며, 동시에 효과적이고 단기적인 포스트모던 치료가 각광을 받았다. 새로운 정신과 약물인 SSRI가 등장하여 정신약물학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동시에 심신의학 개념이 재조명받으면서, 건강심리학도 새로이 떠오르게 되었다. 지난 몇천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세균성 질환들이 항생제에 의해 퇴치되면서, 감염의 위협은 크게 감소했고 인류의 기대수명은 크게 증가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인류가 겪는 주된 질병은 암이나 심장질환 등 만성적이고 예방과 관리가 중요한 질병으로 변하였다. 동시에 학자들은 이러한 질병이 스트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특히 정신신체(psychosomatic) 질환으로 알려진 위궤양, 류마티스 관절염, 고혈압, 천식, 갑상선 항진증, 궤양성 대장염 등은 심리적 요인이 발병 경과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또한 질병 이외에 다른 만성 통증을 완화하는 것도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 요인을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발견은 생물심리사회 모델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새로 출현한 생물심리사회 모델은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병의 생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일환으로 만들어진 학문 중 하나가 심리신경면역학으로, 심리신경면역학은 행동, 특히 스트레스가 면역과 관련 질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모든 움직임이 결실을 맺어 건강심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론 벡

아론 벡(Aaron T. Beck, 에런 벡, 1921-)은 인지치료를 처음 개발하고 BDI를 비롯한 각종 심리검사를 만든 심리치료자이다. 유년기의 벡은 아들러와 마찬가지로 잦은 질병에 시달렸는데, 이로인해 발생한 불안증세와 물 공포증 등으로 인해 그는 자주 학교를 결석하고 성적도 낮은 문제아가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그가 20세가 될때까지 극복되지 못했고, 다행히 성적은 개선되었는지 후에 브라운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파이-베타-카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brwon daily herald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으며, francis wayland 장학금과 william gastor 상을 받았으며 philo sherman bennett essay award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예일의대에 진학하였다. 이때 그는 어느날 자신의 물 공포증이 자신의 물에 대한 잘못된 신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물에 대한 공포가 별로 합리적이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자, 이후로 거짓말처럼 물 공포증이 사라졌다. 이 경험은 향후 벡이 인지치료를 개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예일의대에서 벡은 정신분석학을 수련하였다. 당시에 행동주의 치료는 태동기였고, 심리치료는 정신분석이 꽉잡고 있었다. 그러나 벡은 정신분석적 아이디어에 거부감을 가졌는데, 특히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이를 절실히 느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신경증이 초자아와 이드의 불안정에서 기인한다고 가르쳤지만, 그가 보기에 우울증은 환자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관점을 취해서 생기는 현실왜곡의 결과였다. 

 

이러한 생각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결과, 벡은 정신분석적 접근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 맞서 우울증이 우울증 환자들이 가지는 부정적으로 편향된 사고방식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했고, 개인이 가진 주관적 현실이 개인의 감정과 행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인지치료를 정립해 나갔고, 1961년에는 BDI와 벡 불안척도를 개발하였다.

 

칼 로저스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 1902-1987)는 인본주의심리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1902년 1월 8일 시카고 외곽의 오크 파크에 있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저스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개 독실한 기독교는 엄격한 통제와 죄의식이 따라오기 마련이며, 따라서 로저스는 어린 시절 부모의 엄격한 통제와 강압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다른 선구적인 심리치료자들처럼 몸이 안좋아 예민한 성격이 발달했고, 3번의 전학으로 친구관계도 부족했다. 이러한 빈자리를 로저스는 공상과 독서를 통해 채우려고 하였다.

 

그의 인생은 1922년 베이징에서 있었던 세계학생기독교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WSCF) 대회에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나간 로저스는, 대회에서 다양한 사람과 만나 여러 경험을 하면서 부모의 종교적 통제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인생관을 스스로 재정립하였고, 목사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신학과를 그만두고 심리학과로 전환하였다. 이후 그는 1931년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동보호상담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동보호상담소에서 그는 정신분석 치료를 현장에 적용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또한 그는 다양한 치료경험을 통해 치료에 있어서 치료기술보다는 치료자의 인간적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과, 결국 치료는 내담자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는 그가 비지시적 치료를 개발하도록 이끌었는데, 비지시적 치료에서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느낌과 내면세계를 자유로이 탐색하도록 허용하면서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도록 촉진했다. 내담자의 고유성과 내면적 경험에 대한 중시, 잠재력에 대한 믿음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로저스의 비지시적 치료는 1940년대에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시카고대학에서 적극적인 치료활동을 벌이던 로저스는 어느 여성 내담자와 2년의 치료기간 동안 자신에게 심리적 고통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에서, 비지시적 치료의 일부를 수정하여 현재의 내담자 중심 치료를 정립하게 된다. 그는 1957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자신의 새 치료법을 주장했으나, 당대의 주류였던 정신분석학에서는 그를 거부하였다.

 

제도권에서 방출된 그는 정신분석학과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대신, 책을 쓰고 치료를 하면서 제도권 밖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다른 주요 심리치료자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실무를 중시했고, 카운슬링이라는 단어를 처음 도입하였다. 1963년 그는 제도권 외부의 치료자들과 함께 참만남 집단 운동을 주도했고, 1968년 인간연구센터를 세워서 그의 치료이론을 전파했다. 나중에 정신분석학이 몰락하면서 그는 학계에서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고, 70년대 후반에 그는 내담자 중심 치료라는 단어를 인간중심 치료로 바꾸게 되었다. 

 

한국 임상심리학의 역사

1946년 창설된 조선심리학회에서는 임상심리학이 큰 영향이 없었다. 한국의 임상심리학은 1964년 조선심리학회의 후신인 한국심리학회에서 임상심리분과회를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61년 육군에 임상심리장교 제도가 시행되다가 4명만 배출하고 1967년 중단되었고, 1987년 임상과 상담이 분리되었다. 임상가에 대한 자격규정은 1972년에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후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되면서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1997년부터 정신보건 임상심리사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에 그 문제많은 임상심리사 자격증이 신설되었고, 2016년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공적 지원이 확대되었다.

 

1962년에는 국립병원에서 처음 임상심리과가 편성되었다. 한국의 초기 임상심리학은 주요 심리검사를 번안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1952년 웩슬러-벨뷰 검사가 도입되었고 1963년에는 한국판 웩슬러 지능검사(KWIS)가 번안되어 1992년에 K-WAIS로 개편되었다. 1963년에는 이정균과 정범모, 진위교에 의해 MMPI가 번안되었는데, 당시에 저작권자인 미네소타 대학의 허락을 받지 않아 논란이 되었지만 APA에서 후진국 배려 차원으로 묵인하였다. 이때 제작된 MMPI는 1989년 한국임상심리학회 주도로 재표준화되었다.

 

이후 세계 15위권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MMPI-2를 번안하였다. 이를 위해 2001년 김중술 지도하에 한경희, 임지영, 이정흠, 민병배가 MMPI-2 및 MMPI-A 표준화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들은 이번에는 저작권자에게 정식으로 저작권료를 지불한뒤, 2000년 인구 및 주택총조사를 바탕으로 표준화집단을 구성하고 한국판 MMPI-2와 MMPI-A를 표준화하여 2005년 발표하였다. 이때 협력한 마음사랑 사가 현재 MMPI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국내 임상심리학은 중앙대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지금도 중앙대는 임상심리학의 본진으로 남아있다. 1972년 이현수가 국내 최초로 임상심리학 교수로 부임했고, 이장한, 현명호 등 후학들을 키워냈다. 1965년에는 김중술이 성모병원 신경정신과에서 3명의 수련생과 함께 임상심리 수련과정을 최초로 개설하였고, 이후 한양대와 서울대에서 임상심리 수련과정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UCLA에서 임상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권정혜가 민병배와 함께 서울인지지치료 상담센터를 개설하였다.

 

21세기 들어 바다이야기 사태로 인해 도박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정부는 각종 도박 이권단체에 수익금의 일부를 도박중독자의 재활지원에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로 인해 강원랜드와 한국 마사회 등 도박 이권단체에서 도박중독센터를 개설하였고, 여기에 임상가들이 고용된다. 이후 정부는 임상가를 고용하는 범위를 점점 늘려갔고, 2008년에는 Wee센터를 통해 학교로, 2005년에는 범죄분석요원 제도를 통해 사법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후 2014년 세월호 사고때 임상가들이 적극적으로 활약하면서 한국에서 심리학의 입지를 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현재 많은 임상가들이 9급 공무원으로 채용되고 있는데, 심리학계에서는 9급이 들인 비용과 자격에 비해 너무 낮다고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심리치료의 역사

임상심리학은 기초심리학보다 약간 늦게 시작되었으며, 심리치료도 약간은 더 늦다. 피넬이 정신의학 운동을 벌이던 19세기 중반에도 한편에선 수치료(hydrotherapy)라는, 신화적으로는 의미있지만 물고문과 다를바 없는 헛짓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각주:6] 하지만 대체적으로 둘은 탄생시기가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임상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활동이 시작된건 미국의 심리학자 lighter witmer가 자신의 대학교에 센터를 개설하면서 이를 clinical psychology로 명명한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위시한 초기 정신분석학자들은 심리치료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미국과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했다고 보는게 더 바람직하다.

 

20세기 전반부의 심리치료는 정신역동과 행동주의가 지배하였다. 유럽에서 정신분석학은 본래의 기치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기반을 쌓아나갔다. 정신을 여러 무의식적 요소의 상호작용과 갈등으로 보는 이들의 시각은 현재 심리치료 학계 전반에 수용되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새롭게 부상한 행동주의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의 선구자들은 곧 행동주의 원리를 심리치료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비록 정신분석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많은 기간 행동주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50년대부터 wolpe의 체계적 둔감화 기법을 중심으로 행동주의 치료가 심리치료 학계에 정착하였다. 동시에 20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심리치료 이론이 등장하는데, 이때 등장한 인간중심치료와 실존주의 치료, 게슈탈트 치료를 인본주의-실존주의 치료라고 묶어 부른다.

 

인본주의-실존주의 치료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인간중심치료였다. 2차대전 이후 젊은 정신분석 치료자였던 칼 로저스는 비록 자신이 정신분석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인간의 과거와 무의식, 욕망을 중시하는 정신분석학에 의문을 가졌다.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성취동기, 성장 잠재력과 같은 긍정적인 특성도 중요했다. 이후 칼 로저스는 정신분석학에서 독립하여 인간의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특성에 초점을 둔 인간중심치료를 창안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실존주의자들도 실존주의 치료를 만들었으며, 이미 인간중심치료 이전에 부흥했던 게슈탈트심리학에서도 fritz Pearls를 중심으로 게슈탈트치료라는 독자적인 치료법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과거의 심리치료 이론과 달리 인간의 의식적이고 긍정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중 인간중심치료에서 나타난 공감과 수용에 기초한 상담기법은 후에 심리치료계 일반에 수용되었다.

 

인본주의-실존주의 치료가 등장한 이후 다양한 심리치료 이론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인지혁명 이후 인지과학의 성공이 알려지면서 인지치료가 나타났다. 그리고 당대에 이미 정착되었던 행동주의 치료는 사회학습 이론이 보강되면서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이 행동주의 치료가 인지치료와 결합하면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치료이론인 CBT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윌리엄 글래서는 어느 대안학교에서의 치료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치료를 고안하였고, 31년에는 제이콥 모레노가 연극치료를 고안하였다.[각주:7] 연극치료와 같은 집단치료 중 가족치료는 50년대에 탄생하고 70년대부터 학계에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편 새로운 심리치료가 막 태동하던 50년대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의학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었다. 유명한 심리학자 한스 아이센크는 1952년 여러 심리치료의 효과를 조사한 후, 심리치료(특히 정신분석 치료)의 효과가 전무하며 오히려 환자의 회복을 방해한다는 연구를 발표하였다.[각주:8] 이 연구는 심리치료에 큰 파문을 가져왔으며, 실제로 어린이들에게 심리치료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파문은 더 커졌다.[각주:9] 아이센크에게는 즉각적인 비판이 이어졌고,[각주:10] 다른 한편으로 이때부터 학자들은 심리치료의 효과에 대한 엄격한 연구를 시작했다. 비록 과거의 심리치료(와 비슷한 현대의 심리치료)가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등의 부작용을 다수 보였지만,[각주:11] 현재 아이센크의 연구는 해석이 잘못된 결과로 보인다.[각주:12] 최근 아이센크가 연구윤리에서 심각한 추태를 벌였다는 사실#을 볼 때 아마 아이센크의 협잡질이었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해결중심치료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치료가 각광을 받았다. 해결중심치료는 1970년대 후반 미국 팔로알토의 정신건강연구소(Mental Research Institute, MRI)에서 발전했는데, 당시 MRI에서도 다른 치료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치료를 대체할 치료를 탐색하였다. 특히 이들은 10회기 이내로 진행할 수 있는 단기치료를 연구했는데, 그 구성원 중 하나인 드세이저와 동료들이 가족치료 기법을 개발하던 중 해결중심치료의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후 드세이저는 동료들과 함께 MRI를 떠나 1978년 미국 위스콘신의 밀워키에 단기가족치료센터(Brief Family Therapy Center, BFTC)를 설립하였다. 이곳에는 그는 당대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버그와 립칙, 와이너-데이비스, 데이비드 오한런과 함께 해결중심치료를 발전시켜 나갔다. 여기에는 밀턴 에릭슨의 최면이론도 영향을 주었는데, 모든 내담자에게 스스로를 성장시킬 자원이 있다는 해결중심치료의 전제는 밀턴 에릭슨에서 왔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드세이저는 동료들과 함께 1982년 해결중심치료를 세상에 내놓았고, 이것이 포스트모던 치료의 시작이 되었다.

 

이야기치료는 조금 더 늦은 90년대에 탄생했다. 이야기치료의 창시자인 마이클 화이트(white)는 가족치료자인 동시에 당대의 포스트모더니즘 기류에 익숙했던 사람으로, 그는 가족치료와 심리치료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연구/문화비평, 페미니즘, 분석사회심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화이트는 해결중심치료보다 더 포스트모더니즘과 깊이 연관된 이야기치료를 개발하였고, 1990년 데이비드 앱스턴(David Epston)과 함께 '문학적 방법을 통한 치료적 결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제럴드 몽크(Gerald Monk), 질 프리드먼(Jill Freedman), 콤스(Gene Combs)도 이야기치료의 형성에 참여했으며, 이와중에 '문학적'이라는 표현이 '이야기'로 대체되었다. 화이트는 2001년과 2004년에 한국에도 와서 이야기치료 워크샵을 열었고, 이때부터 한국에도 이야기치료가 퍼져서 2011년에는 한국이야기치료학회가 창립되었다. 

 

포스트모던 치료는 이전의 심리치료 이론과 달리 인간 본성에 대한 견고한 관점을 거부하며, 대신 최대한 내담자의 신념을 존중하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데 초점을 둔다. 과연 이것이 내담자의 심리에 통찰을 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포스트모던 치료는 단기간에 강한 효과를 내며 부작용도 거의 없다. 한편 오컬티스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트랜스퍼스널심리학이 커지면서 심리치료에서도 이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트랜스퍼스널심리학자들은 그들 고유의 무기인 영성을 통해 내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해결중심치료가 새로이 각광받는 동안, 다른 치료법에도 변화가 있었다. 정신분석 계열 치료가 60년대부터 발전이 정체된 반면 CBT는 마음챙김, 혹은 수용전념치료와 결합한 MCBT로 변모하여 효과가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CBT의 일환이 된 행동주의 치료도 마음챙김, 치료적 관계, 정서적 표현 등의 개념을 수용하면서 좀 더 유연한 방법론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행동 자체의 변화 못지않게 문제행동을 유발하는 맥락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앨버트 앨리스

앨버트 앨리스(Albert Ellis, 1913-2007)는 REBT를 창시한 심리치료자이다. 그는 아론 벡과 함께 CBT를 개척한 선구자 중 하나로, REBT의 많은 부분이 인지치료와 CBT로 이어졌다. 그는 1913년 9월 27일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다른 위대한 심리치료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어렸을때 갖은 역경을 겪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했고, 그러다보니 애정을 잘 받지 못했다. 그 예로 그가 신장염에 걸렸을때, 그는 아무도 문병오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투병을 해야 했다. 이런 역경에 그는 많은 독서(특히 철학)와 통찰로 대응했고, 후에 그는 자신이 강한 자율성과 독립성으로 역경을 이겨냈다고 술회했다.

 

이후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련을 시작했는데, 아론 벡과 마찬가지로 그도 처음에는 정신분석가로서 수련받았다. 그러나 치료현장에서 그는 많은 환자들이 저항하고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시간이 부족한 환자들에게 정신분석은 너무 오래 걸렸다. 또한 앨리스가 보기에 환자들의 부적응적 행동은 잘못된 신념이 영향인데, 정신분석은 단지 그것을 말해주기만 할뿐 다른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이들에게 필요한건 그냥 그렇다고 알려주는게 아니라, 그들의 비합리적 신념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앨리스는 원래 소설가를 지망했고, 실제로 철학과 문학을 즐겨 읽었다. 이러한 배경은 REBT의 탄생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에픽테토스가 주장한 마음의 중요성을 받아들여 인지적 접근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처음 심리치료로 가져왔고,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 전환 조건을 활용해 환자의 패러다임(신념)을 전환하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당대 유행하던 논리실증주의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모든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오로지 검증대상으로 모든 것을 환원한 논리실증주의 기획은 그가 실용적 진리론을 택하고 경험적 접근을 통해 환자와 접촉하도록 하였다.

 

현실치료의 발달

현실치료는 1960년대에 미국의 정신과 의사 윌리엄 글래서(William Glasser,1925-)가 개발한 심리치료 기법이다. 글래서는 1925년 5월 11일 오하이오의 클리브랜드에서 태어났는데, 어린시절 그는 잦은 부부싸움 밑에서 고통받았다. 이때 그는 부모의 부부싸움을 지켜보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과 원만한 부부관계를 추구하게 되었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관념을 자라게 했다.

 

이후 그는 공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나, 곧 전공을 심리학을 바꾸고 1961년 정신분석 수련을 받아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 청소년교정기관인 ventura school of girls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정신분석이 가진 한계를 체감하였다. 그는 학교에 있던 비행청소년들의 문제는 무의식적 갈등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잘 인식하면서 적절한 책임의식 속에 이를 충족하도록 교육하였다. 이것이 80%의 학생에게서 성공을 거두자 그는 1964년 논문을 통해 현실치료를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글래서는 1960년대에 현실치료를 확장하고, 88년에는 행동의 선택 이론을 고안하여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강연과 심리치료를 진행하였다. 이 시기에 현실치료는 3명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첫번째는 글래서의 지도교수 조지 해링턴(George Harrington)으로, LA 재향군인병원에서 근무하던 해링턴은 글래서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치료와 약물치료가 가진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현실치료가 청소년과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효과를 발휘하자 글래서와 함께 현실치료를 발표하였다.

 

두번째는 William Powers였다. powers는 지각된 통제이론을 발표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유기체의 행동은 유기체가 자신의 지각된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수단으로, 즉 자의적으로 이를 늘리거나 없앨수도 있다. powers에 따르면 이는 뇌 안에 있는 내적 통제체계의 통제를 받으며, 유기체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타인을 향한 통제로 이어지면 유기체의 행동은 갈등과 어려움을 낳을수도 있다.

 

세번째는 경영학자 에드워즈 데밍(Edwards Deming)이었다. 데밍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본기업의 경영을 연구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는 효과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4단계 순환을 고안하였다. 이는 경영학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현실치료에서 내담자의 혁신적 자기변화를 일으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정신장애 진단의 역사

옛날에도 정신장애에 대한 진단은 존재했고, 도망노예를 탈주마니아(drapetomania)라는 병으로 정의한 시도도 이때 있었다.[각주:13] 그러나 과학적인 정신장애 진단은 1883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정신의학의 아버지 중 하나였던 에밀 크레펠린은 역동적 분류체계를 고안했는데, 정신분석가였던 크레펠린은 이 체계를 통해 정신적 문제를 분류하여 진단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조현병이나 히스테리 등 유명한 진단명도 이때 제안되었다. 역동적 분류체계는 후에 APA에서 1952년 DSM 초판을 출간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2차대전기에 각국은 참전군인의 정신상태와 장애를 진단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ICD를 개정하도록 이끌었다. 원래 ICD는 각 나라의 사망원인을 통일된 용어로 정리할 필요성에 의해 1900년에 만들어진 기준으로, 당시 이름은 국제사망원인 목록(International list of Causes of Death)이었다. ICD는 10년마다 개정되었는데, 정신장애 진단에 대한 수요가 늘자 신설된 WHO는 1949년 ICD-6을 개정하면서 여기에 정신, 정신신경 및 성격장애(mental, psychoneurotic, and personality disorder)라는 이름으로 정신장애를 추가하였다. ICD-6의 정신장애는 정신증, 정신신경증 장애, 성격.행동 및 지적장애의 3개 영역으로 분류되는 26개 범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세세한 진단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ICD-6의 영향을 받은 미국 정신의학회는 1952년 DSM을 출간하였다. DSM은 기본적으로 질병의 의학적 모델을 따랐다. DSM은 총 103쪽 분량의 자료에서 106-108개의 정신장애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정신장애를 기질적 뇌 증후군과 기능적 장애(functional disorder), 정신박약(mental deficiency)으로 구분하였다. 기질적 뇌 증후군은 신경질환이고 정신박약은 정신지체를 말하며, 기능적 장애가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이는 다시 정신증적 장애와 신경증적 장애, 성격장애로 나뉘었다. DSM은 또한 별도로 아동청소년 적응반응과 아동기 정신분열병적 반응을 포함한 아동청소년 장애를 서술하였다.

 

DSM-Ⅱ는 1968년에 출간되었는데, DSM-2는 WHO와 미국 정신의학회의 협력 하에 ICD-8과 ICD-8a에 상응하게 설계되어 180-182개 정신장애를 11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이때부터 DSM과 ICD는 용어와 코딩체계, 범주 순서와 하위범주에서 상당히 유사해졌으며 ICD-8a는 진단기준도 가지게 되었다. DSM-2는 당대 유행하던 정신분석학과 행동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신장애가 심리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특히 아동청소년 관련 장애에서 그러했다. 또한 별도의 진단기준은 마련하지 않았지만 집단비행반응, 과잉행동반응, 과잉불안반응, 가출반응, 비사회화 공격반응, 철회반응을 이상행동으로 명시했는데, 여기서 청소년비행과 가출을 정신병으로 분류한 건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DSM-2는 반정신의학 실험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은 몇몇 동료와 함께 가짜로 증상을 만들어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이들은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어떠한 증상도 꾸며내지 않았다. 이들이 퇴원하기까지는 1-2달이 걸렸고, 이로 인해 정신의학이 신뢰할 수 있는 학문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이는 특히 정신병원들에서 로젠한이 보낸 가짜 환자를 적발했다며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내보내면서 더 심해졌고, 정신의학 전반에 자성적인 노력을 일으켰다. 그 일환으로 학자들은 DSM-Ⅱ가 매우 모호하고 정신분석학에 편향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1980년 DSM-Ⅲ를 출간했다.

 

DSM-Ⅲ는 정신역동적 원인을 중심으로 장애를 진단하던 기존 DSM의 병인론적 진단기준에서 벗어나,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진단을 내리도록 진단준거를 수정했다. 또한 새로 만들어진 진단기준은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되었고,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환자군의 인구통계적 특성과 감별진단, 장애의 발병/경과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였다. 또한 임상적 유용성을 높이기 위해 다축체계를 도입하였다. 이후 DSM-3는 1987년 DSM-Ⅲ-R로 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수면장애와 흡입제 관련 장애가 신설되고 아동청소년기 정신분열열성 장애를 삭제하였다. 또한 동성애도 삭제되었는데, 동성애는 DSM-2에서도 중간에 학자들의 투표를 거쳐 삭제되었다.[각주:14]

 

다축적 진단체계(다축체계)는 여러 측면에서 환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DSM-3에서 4까지 사용되었다. 다축체계는 5가지 측면에서 환자를 평가하는데, 이 축은 아래와 같았다.

 

  1. 임상적 장애: 환자의 현재 증상 정도
  2. 성격장애 및 정신지체: 환자의 장기적인 심리적 특성. 여기에는 방어기제 양상도 포함된다.
  3. 일반적 신체적 상태: 증상에 신체건강이 끼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기준이다.
  4. 심리사회 및 환경적 문제
  5. 적응적 기능 수준(GAF)

 

DSM-Ⅳ는 1994년 출간되었다. DSM-4는 1992년 출간된 ICD-10과 호환되도록 설계되었고 다축체계와 기술적인 진단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저 경험적 증거에 따른 보완만을 실시했다. 이것도 2000년에 개정판인 DSM-Ⅳ-TR이 나와서 장애의 문화/연령/성별 특성과 예상 경과, 유병률, 가족 영상 등의 장애 관련 정보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성격장애 중 편집성 성격장애와 분열성, 연극성, 의존성 성격장애가 여러 성격특성이 혼합된 장애이기 때문에 향후 진단기준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DSM-5

DSM-5는 2013년 출간되었다. DSM-5는 ICD-11과 부분 호환되도록 설계되었으며 최신 연구를 반영하고 편리한 진단기준을 마련하도록 노력하였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다축체계는 임상적 유용성이 적다고 퇴출되었고, GAF 대신 WHODAS 2.0을 환자의 기능수준을 평가하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이름에 로마자 숫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편의성을 증대시켰다. WHODAS(WHO Disability Assessment Schedule, 세계보건기구 장애평가목록)는 환자의 기능수준을 평가하는 총 36문항의 자기보고식 설문지인데, 이동능력, 자조, 사교활동, 일상활동, 이해력/의사소통, 사회참여의 6개 평가영역에서 환자를 평가한다.

 

또한 기존 DSM에서 NOS(Not Otherwise Specified)로 분류하던 진단을 Other specified와 '명시되지 않은'으로 분리하였고, 차원적 분류체계를 일부 도입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자폐성 장애와 아스퍼거 장애, 아동기 붕괴증 장애, NOS 전반적 발달장애를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단일화하였다. 그리고 생애 관련 발달주제를 진단에 포함시켰고 성별 불쾌감 개념과 함께 파괴적 기분조절 곤란장애, 피부벗기기 장애, 도박장애, 저장장애를 새로 추가하였다. 그리고 성격장애를 A, B, C군으로 분류하였다. 성격장애들은 전부 보존되었고 대신 자기기능과 대인관계에서 기능수준을 5점으로 평가하게 하였다. 반면 게임중독은 ICD와 달리 예비 진단범주에 포함하였다.

 

투사검사의 역사

모호한 자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역사가 깊다.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는 잉크얼룩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최초로 과학적으로 시도한 사람은 헤르만 로르샤흐(Herman Rorschach)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로르샤흐는 이러한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1911년 수련의 시절부터 청소년과 환자들이 잉크얼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관찰했다.

 

일반의로서의 경력이 시작된 로르샤흐는 1917년부터 잉크얼룩에 대한 조현병자의 반응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였고 마침내 1921년 117명의 정상인을 포함한 405명을 대상으로 연구해 그 결과를 정신진단학(Psychodiagnostik, 심리진단법)으로 발표했다. 조현병 진단을 위해 개발된 이 검사는 굳이어 무의식을 평가하는 용도로 확장되었고 로르샤흐는 이 검사를 형태해석검사(Form Interpretation Test)로 명명하였다.[각주:15]

 

Psychodiagnostik에서 로르샤흐는 형태해석검사가 개인의 지각과정을 통해 행동을 예측하는 도구라고 주장했고, 개인의 무의식은 알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로르샤흐가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가 1922년 4월 사망한 이후 그의 유고집에서, 로르샤흐가 로르샤흐 검사를 무의식을 파악하는 좋은 도구로 쓸수 있다는 언급이 발견되었다. 결국 로르샤흐도 마지막에 인정했듯이, 로르샤흐 검사는 중요한 무의식의 탐구도구로 인정되었고, 이후 풀배터리 검사에 포함되었다.

 

로르샤흐 검사가 만들어진 후 로르샤흐 검사의 해석은 정신분석학과 현상학의 배경에서 이뤄졌다. 물론 정신분석이 실제로도 로르샤흐 검사의 해석에 기여한 부분이 많지만, 정신분석학 특유의 비과학성[각주:16]과 모호함으로 인해 로르샤흐 검사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그러나 50년대에 실험적 접근이 이뤄지고 이후에 엑스너에 의해 표준적인 채점체계가 확립되면서 로르샤흐 검사는 다시 학계의 인정을 받고 풀배터리 검사의 주요 검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도 많은 심리학자(특히 심리측정학)가 로르샤흐 검사의 실효성을 의심하지만 임상심리학자들은 로르샤흐 검사가 임상에 꼭 필요한 검사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로르샤흐 검사는 정신분석이 정착한 후에 만들어 졌지만, 그림검사는 사실 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이미 프로이트부터 상징에 대한 꿈과 예술적 표현이 그림에 녹아든다고 주장했다. 이를 체계화한것은 카를 융으로,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분석심리학파의 창시자인 융은 그림검사의 기초를 마련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벅(buck)이 20세기 중반에 HTP를 개발하여 지능과 성격을 측정하려고 시도했고, 1948년에 macnover가 신체상(body-image) 가설을 고안하였다. koppitz는 1968년 설리번의 대상관계이론을 응용하여 그림검사로 아동의 발달수준과 정서지표를 측정하고자 하였고, 아동 그림의 발달적 항목을 분리하였다.

 

한편 SCT는 고전심리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896년 에빙하우스는 무의미한 단어목록을 외우게 하여 사람들의 기억력을 측정했는데, 그는 미완성된 문장에 답하는 방식을 통해 피검자의 심리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초기의 비네 시몽 검사에도 포함되었지만, 신뢰도와 타당도의 부족으로 삭제되었다. 현대 SCT는 1910년 융의 단어연상검사에서 출발하였고, 1965년에는 군대 성격평가 배터리에 포함되었다.[각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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