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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 본문
나무(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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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그대를 사랑하리(J 포스터)
다시 태어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싶은 것은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이
바로 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한 번도
그대 자신을 위해 울어본 적이 없는
그렇게도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연약한 나를 위하여
눈물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싶은 것은
이제 내가 그대를 위해
울어줄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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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이호우)
洛(낙)東江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風景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山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淨化된 초가집
할머니 <趙雄傳(조웅전)>에 잠들던 그날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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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시간(이구락)
돌은 사물이 아니라 시간이다 돌을 길러본 이는 한 겹씩 시간을 벗겨내는 인고의 맛 아느니, 돌에 물 주고 돌에 햇빛 쬐이고 돌에 바람 쐬이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은 속살을 드러낸다 켜켜이 가슴에 쌓아온 물소리 바람소리도 토해낸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두 해가 아니고 일이십년이 아닐 수 도 있다 깊은 골짜기 모암에서 떨어져 나와, 수십 억 년 물과 바람에 씻기고 다시 흙 속에 묻혀 군살 털어내고 다시 흙 밖으로 나와 물길 따라 뒹굴며 흐르는 동안, 돌은 누가 불러내 해독해줄 때까지 겹겹의 무늬로 온몸 감싼다 그 무늬 속 나이테 따라가다 보면 억 년 전 불의 제단과 만 년 전 얼음궁전과 천년 전 먼 우레의 들판이 바람벽처럼 우우우 일어서서 삼년 홍수와 칠년 가뭄까지 불러낸다 오늘 돌 앞에 서서 우러러 경배하는 나의 아침이 아, 천길 물속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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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도현)
별을 쳐다보면
가고싶다
어두워야 빛나는
그 별에
셋방을 하나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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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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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오철환)
비인 하늘
앙상한 산에
문득
배시시
연초록 빛 사연이
숫처녀 젖 망울 마냥
소롯이 싹트고
버릇처럼
철없는
슬픈 손가락이
익숙하게
휴대폰 번호를 누르면
좋아지고 있는 중이야
봄이 오면
벚꽃을 보며
너랑 술 한 잔 하자꾸나
벌써 떠나버린
너
목소리
허허롭게
허공을 맴돌아
그래 무거운 육신일랑
그렇게도 성급하게
훌훌 벗어 던진
무섭도록 영특한 친구야
바람 없는 봄날
벚꽃이 피면
남은 우리
미련스럽게
너의 이름을 불러보자꾸나
이제
남아있는 우리
그래도
혼이나마
한번 불러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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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수(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려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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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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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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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핀 마을(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은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려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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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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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람 지나간 뒤(이장희)
님이시여
모르시나이까?
지금은
그리운 옛날 생각만이,
시들은 꽃
싸늘한 먼지
사그라진 촛불이
깃들인 제단을
고이고이 감돌면서 울음 섞어 속삭입니다.
무엇을 빌며
무엇을 푸념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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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손택수)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하다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꽂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 올려 바를 넘을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어쩌면 추락이야말로 모든 집중된 순간순간들의 아찔한 황홀이 아니던가
당겨진 근육들이 한점 망설임 없이 그를 응원할 때
나른하던 공기들도 칼날이 지나간 듯 쫙 소름이 돋는다
뜨거운 포옹과 날렵한 결별 속에서 태어나는 몸
출렁, 깊게 패는 매트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쏘아올려야 하는 자의 고독이 장대를 들고 달려간다
폭발하는 한점 한점,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물수제비 물결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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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손택수)
지상엔 수없이 왔으나 처음 당도한 여름 끝의 노을이 걸려 있습니다
모래바람 날리는 저물녘 해변의 산보는 당신의 왕오천축국전
내디딘 대지에 한발 한발 기도를 드리듯이 걷습니다
불안하게 술렁이는 허공을 더듬거리면서 더디게 모아지는 발들,
한참을 머물렀다 또 한걸음을 뗄 때
그 숨 막히는 보행은 차라리 구도가 아닙니까
반쪽 몸에 내린 빙하기가 반쪽 몸의 봄을 더 간절하게 합니다
쇄빙선처럼 길을 트는 가쁜 한걸음 속에서
몸의 밑바닥은 의식의 가장 높은 고원,
불어가는 바람이 해저에서 막 융기하는 산맥의 바위처럼
굽이치는 당신의 이마를 환하게 쓸고 갑니다
단 몇 미터를 걷는 데 평생이 걸린다면
몇 미터의 대륙이 품에 안은 수십억년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
마비된 근육과 혈관 너머로 추방당한 복류천 맥박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
깨어진 모래 한알이 무릎걸음으로 해변을 동행할 때
더듬거리는 걸음과 걸음 사이의 침묵이 제 유창한 보행을 망설이게 합니다
지상에 말랑한 첫발을 내딛는 아기의 경이처럼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탁, 탁 터져나오는 탄성
한번도 온 적 없는 여름 끝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일만번의 여름을 살며 스스로 풍경이 된 이름이 파도에 잠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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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화산(이호우)
일찍이 천길 불길을
터트려도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달래어
자듯이 이 날을 견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믿어
함부로치 못함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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