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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사상체질은 실존하는가? 본문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의사를 뽑으라면, 아마 허준이 1위이고 2위가 이제마일 것이다. 사실은 1위가 이제마고, 2위가 허준일 수도 있다. 실제 순위가 어떻든 이제마는 가장 유명한 한의사 중 하나이고, 철학자이자 한국의 위인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비단 태양인 이제마가 방영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체질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자신이 태음인인데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냐는 질문이 인터넷에 종종 올라온다.
사상체질론은 가장 인기있는 한의학인 동시에, 유사과학 시비가 가장 많이 붙는 이론 중 하나였다. 의협에서는 끊임없이 사상체질의 비과학성을 공격했고, 한의협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 보여주겠다고 외쳐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사상체질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두 편의 오래되고 곰팡내나는 연구만이 사상체질을 과학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필자는 각고의 희생 끝에 그 연구를 발견했고, 사상체질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상체질이란?
사상체질론은 모든 인간을 4가지 체질로 나눌 수 있으며, 사람의 체질에 따라 몸의 체형과 성격, 건강에 맞는 음식, 심지어는 효과가 있는 약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같은 약이어도 어느 체질인 사람이 먹느냐에 따라 병이 나을 수도 있고, 반대로 독약이 되어 몸을 해칠 수도 있다. 체질에 따라 약의 효능이 다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한의사들이 사상체질에 관심을 가져왔고, 체질에 따라 몸에 맞는 음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많은 주부들이 사상체질에 관심을 가져왔다.
사상체질의 인기와는 별개로, 그것의 과학성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의협에서는 사상체질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현대과학에서 체질의 존재를 부정하며, 체질진단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들어 사상체질을 공격해왔다. 특히 체질진단이 부정확하다는 점이 주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한의사들은 정확한 체질진단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한때는 거금 4000억을 들여 정확한 체질진단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지금도 많은 한의학자들이 체질진단의 정확성을 높이고 체질 간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의협과 한의사 둘 다 문제가 있다. 먼저 한의사들은 체질진단의 정확성을 높이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사상체질이 실존하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봐, 여기 사상체질이란게 있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확하게 진단하려고 노력할거야.' 물론 노력은 가상하지만, 문제는 진단을 정확히 하려면 그 전에 진단을 통해 감별하려는 그 '체질' 자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체질에 대한 수많은 한의학 논문이 있었지만, 과연 체질이 존재하며 4가지가 있는지에 대해 다룬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다룬 소수의 연구도 옛날에 쓰인 학위논문이라 그 객관성이 부족할 수 있으며, 먼지에 묻힌 채 어느 대학도서관에 잠들어 있어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보자면 지금의 한의학에서 발간하는 논문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만약 진단하려는 체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애초에 사상체질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러한 점을 의협에서 공격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의협에도 있다. 의협의 문제는 의협에서 공격과 비난은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사상체질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에는 의협도 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사상체질이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기 때문에, 사상체질이 허구라고 공격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체질에 따라 맞는 약이 달랐다는 한의사들의 임상 보고가 있었고, 그렇다면 정말로 사상체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의학은 과학이 아닌가. 진정한 과학자라면 자신이 싫어하는 이론을 무턱대고 공격하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그것의 참/거짓 여부를 밝혀야 할 것이다. 특히 사상체질이 국민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려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래서 사상체질이 존재하니?에 대한 질문에는 한의사도 의협도 답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사상체질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직접 우리가 연구하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연구를 한 사람이 이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대체 체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체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만약 태음인이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나온 사람'이라면, 태음인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세상 사람 70억 중에 성격이 활발하면서 배가 나온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사상체질은 존재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체질을 어떻게 정의하든, 무슨 '하늘을 날아다니며 메테오를 퍼붓는 체질'이 아니라면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접근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체질을 찾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나온' 체질이 있다면,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들어간' 체질도 있을 것이다. 또 '성격이 조용하고 배가 나온' 체질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70억이나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무한한 체질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4체질이 아니라, 70억체질론을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마가 70억체질론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질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다시 사상체질로 돌아가 보자. 사상체질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강 현상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나온' 체질은 성격과 똥배뿐만 아니라, 얼굴 생김새, 장기의 기능, 착한지 아닌지 여부 등 아주 많은 우리의 특징에 영향을 준다.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나온' 체질은 그 뿐만 아니라 얼굴도 잘생기고 간은 건강하지 못하고 사람은 착하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한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격이 활발하고 배가 나온' 체질이거나 '성격이 조용하고 배가 들어간' 체질인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성격이 조용하고 배가 나온' 체질은 놀랄만큼 적다. 거의 살면서 단 한번밖에 못볼 정도다. 만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체질이 이처럼 종류가 매우 적다면 그 체질을 아는 것이 의사들에게 중요할 것이다. 특히 그 체질이 성격과 똥배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한 건강과도 관련되어 있다면, 오히려 체질을 모르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체질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가진 체질의 갯수가 의외로 적고, 그것과 관련된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한의사들이 사상체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체질이 4가지로 나뉠 수 있고, 그것이 정말 다양한 영역(특히 약의 효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체질이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의 체질이 실제로 적다면, 그리고 다양한 건강 관련 특징이 특정 체질과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체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체질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군집분석과 요인분석
이미 과학자들은 예전부터 그러한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만들어 왔다. 그중 우리는 군집분석과 요인분석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군집분석이란, 사람들이 실제로 몇개의 집단으로 묶일 수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이다. 가령 우리는 사람들을 남녀로 묶을 수도 있고, 좌파와 우파로 묶을 수도 있다. 이때 사람을 남녀로 나누거나 좌우파으로 나누거나 사람은 2개 집단으로 나뉘지만, 지지하는 정당이 무엇인지 살펴본다면 남녀집단보다는 좌우파 집단이 차이가 더 클 것이다. 군집분석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나눌 때, 집단과 집단 사이에 차이가 가장 큰 방식으로 집단을 묶는 방법이다.
가령 사상체질을 군집분석으로 조사한다고 하자. 만약 사람들의 건강 특성이 4개의 체질로 나뉜다면, 건강 특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나눴을때 사람을 4개 집단으로 나누는 것이 집단 간의 차이가 가장 클 것이다. 그렇다면 군집분석을 실시했을때 사람들이 4개 집단으로 나뉜다면, 사상체질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뉜 집단들의 특성을 살펴보니 이들의 특성이 사상체질론에서 말했던 각 체질의 특성과 비슷하다면, 사상체질은 확실히 존재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인분석은 군집분석처럼 사람을 나누는 방법은 아니다. 요인분석은 데이터를 가장 잘 설명하는 소수의 요인을 찾는 방법으로, 쉽게 말하면 설명하려는 현상들이 사실 몇개의 요인에 의해 결정될 때 그 요인을 찾는 방법이다. 가령 우리가 사회학자이고, 사람들이 밥값을 내는 방식을 알아보려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밥값을 내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더치페이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이 다 낼수도 있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돈을 낼 수도 있다. 밥값을 내는 무수한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조사하려고 했다간 머리가 터져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은 가망없는 조사를 이어가다가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더치페이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회비를 걷어서 내거나, 서로 돌아가면서 돈을 내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에 자신이 다 내려는 사람은 윗사람이 돈을 내거나, 돈 많은 사람이 쏘는 것을 좋아한다. 밥값을 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보니 밥값을 내는 모든 방법이 더치페이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방법과 자신이 다 내는 사람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이때 당신은 더치페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방법을 '더치페이'라고 부르고, 자신이 다 내는 사람이 좋아하는 방법을 '가오'라고 부른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더치페이'와 '가오'가 바로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요인분석이다. 즉 요인분석이란 실제로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몇몇 요인을 찾는 방법이다. 어떻게 보면 군집분석이 사람을 묶는다면, 요인분석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원인을 묶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상체질을 요인분석으로 조사한다고 하자. 만약 사람의 체질이 4개이고 이 체질이 정말 중요하다면, 건강과 관련된 무수한 현상들이 4개의 요인으로 묶일 것이다. '성격이 활발한' 체질은 똥배와 안좋은 간 건강, 우황청심환의 좋은 효과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성격이 조용한' 체질은 날씬한 몸매와 좋은 간 건강, 우황청심환의 부작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를 요인분석하면 2개의 요인으로 그런 현상들을 모조리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사상체질이 사실이라면 4개의 요인으로 건강 관련 현상들을 모조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군집분석과 요인분석을 통해 우리는 사상체질이 존재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볼 연구는 군집분석과 요인분석을 모두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주의할 점이 있다. 만약 4개 집단이 나타나거나 4개 요인이 나타나도, 그것이 사상체질과 맞지 않다면 사상체질론이 맞다고 하기 힘들 것이다. 가령 소양인은 '시력이 좋은 집단'인데 막상 군집분석을 해보니 나온 소양인 집단은 시력이 나쁘다면, 사상체질이 존재한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이제 실제 연구가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살펴보자.
군집분석: 송지영과 동료들의 연구(1993)
송지영,박병관,고병희,이정호,장환일,and 전성일. "신체형장애의 신체증상에 대한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체질의학 이론의 적용에 관한 연구." 신경정신의학 32.6 (1993): 863-885
송지영과 동료들이 한 연구는 사상체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의사들이 진행한 연구이다. 당시에는 의사와 한의사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옹호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한의학에도 호의적이었던 시대이다. 특히 사상체질은 한국 고유의 한의학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 송지영도 논문 곳곳에서 사상체질을 옹호하려고 노력한다.
송지영은 앞서 말했듯이 군집분석을 통해 사상체질을 조사하려고 했다. 먼저 그는 한의사와 임상심리학자를 모아서, 이제마가 직접 쓴 책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를 읽고 각 체질이 가진 특징을 번역해서 설문지로 만들게 했다. 그런 다음에 건강한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이어서 한의사들과 협조하여 설문지로 그 사람의 체질을 진단하였다. 그리고 이 설문지 자료를 토대로 군집분석을 하였다. 만약 사상체질이 실존한다면, 군집분석에서 4개 집단이 도출될 것이다. 그리고 4개 집단은 태양인과 태음인, 소음인, 소양인에 딱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연구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구결과 집단은 4개가 아니라 5개가 나왔다. 약간 실망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한두개 정도 요인이나 집단의 수가 다른 일은 왕왕 있는 일이다. 그저 약간 이론에 수정을 해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집단이 각 체질에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자와 여자를 따로 분석했기 때문에 우선 남자부터 보기로 하자. 먼저 가장 수가 많았던 집단(전체의 50%)은, 놀랍게도 어느 체질에도 속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연구자들은 각 집단이 이제마가 말한 체질과 얼마나 비슷한지 보고, 그에 맞게 이름을 붙였다. 가령 소양인과 비슷하다면 '소양인 집단'인 셈이다. 그런데 가장 수가 많았던 집단은 특정 체질과 비슷한게 아니라, 모든 체질과 다 비슷했다. 정확히는 어느 체질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어느 체질도 아닌 것이다!
다른 집단을 봐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태음인 집단과 태양인 집단은 실제로 태음인, 태양인과 비슷했다. 그런데 소양인 집단은 태양인의 특성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 집단(5번)은 태양인과 소양인, 소음인 체질과 비슷하여 셋 모두에 해당하였다. 이는 여자의 경우 더 심각했다. 태양인은 소양인의 특성도 가지고 있었고, 태음인은 태음인의 특성과 소음인의 특성을 모두 동등하게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의 경우 어느 체질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전체의 70%였다. 즉 여자에게 있어 체질은 의미가 없는 셈이다.
우리의 가설과 연구를 비교해 보자. 사상체질에 따르면 집단은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4개 집단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5개 집단이 나왔고, 그 중 2개 집단은 어떤 체질과도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그 2개 집단이 다른 3개 집단보다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체질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서, 가령 소양인이라 하더라도 태음인이나 소음인, 태양인의 특성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질이 없거나, 자신의 체질이 아닌 체질의 특성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저자는 논문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이 실제 사상체질론에 부합했다면서, 사상체질론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고 열심히 사상체질론을 옹호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랬던 군집분석에서는 사상체질의 존재를 지지하지 않는 증거가 나왔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인분석이 사상체질의 존재를 보여주는지 기대해 보도록 하자.
요인분석: 민성길과 동료들의 연구(2001)
민성길,김동기,박진균,and 전세일. "사상체질론의 정신의학적 타당성에 대한 연구." 신경정신의학 40.3 (2001): 396-406.
이 연구는 오히려 송지영의 연구보다 깐깐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연구를 진행한 민성길과 동료들은 한의학을 까칠하게 대하고, 제목부터 '타당성에 대한 연구'라고 지으면서 '너희들의 타당성을 까발려 주겠어'같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터무니없이 깎아내리는 것은 동료평가에 걸려서 논문으로 나오지 못하니, 연구자의 양심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보도록 하자.
민성길은 앞서 말했듯이 요인분석을 통해 사상체질을 조사하였다. 이번에는 동의수세보원을 한의사가 번역한 <사상의학원론>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각 체질에 해당하는 특징을 뽑아내고, 그리고 정신과에서 환자들을 진단할 때 중요하게 보는 증상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의대생들과 정신과 환자들한테 이런 체질 특징이 얼마나 있는지, 증상은 어떤 것이 있는지 측정한 다음, 이번에는 사상체질을 진단하는 설문지와 한의사들의 도움을 빌려 체질을 진단하였다. 그리고 특징과 증상을 측정한 자료로 요인분석을 실시하였다.
만약 사상체질이 존재한다면, 요인이 4개가 나타날 것이다. 각각 태양인 성향, 태음인 성향, 소양인 성향, 소음인 성향인 4개 요인이 나타난다면 사상체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실 사상체질은 태/소 여부와 음/양 여부로 달라지니까, 2개 요인이 나올지도 모른다. 설령 요인이 6개 이상 나타나더라도, 각 체질과 딱 맞아떨어지는 요인 4개가 거기에 들어있다면 사상체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연구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아쉽게도 4요인은 나오지 않았다. 연구자는 3개의 데이터 세트를 가지고 요인분석을 했는데, 셋 모두에서 요인이 5개 이상이었다. 게다가 5개 요인 중에 사상체질에 대응하는 요인은 없었다. 모든 체질이 모든 요인을 어느 정도 반영했고, 한 체질에서만 독특하게 높은 요인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사상체질은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연구자는 요인분석을 한 후에, 진단된 체질을 기초로 해서 요인분석을 통해 나온 요인의 점수가 체질과 체질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상의학원론을 토대로 사상체질을 지지하는 53개 가설을 만들고, 체질 간의 요인점수 차이가 이를 얼마나 지지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53개 가설 중에 단 3개 가설만이 입증되었다. 결국 요인분석도 사상체질을 보여주지 못한 셈이다.
결론: 그렇다면 사상체질은 무쓸모인가?
사상체질 자체에 대한 거의 유이한 두 연구를 살펴본 결과, 사상체질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만약 사상체질이 존재한다면, 군집분석을 했을때 4개의 집단이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인분석을 했을때 4개 요인이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집단과 요인이 각 체질과 딱 맞아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군집은 5개였고, 요인은 5개 이상이었다. 게다가 체질과 딱 맞아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볼 때 사상체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는 의협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사상체질은 존재하지 않으니 사상의학은 쓸데없는 학문이고, 한의사들은 어서 빨리 예산낭비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체질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일까? 다음의 상황을 한번 보자.
갓 입사한 직장인 덕웅이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다. 생각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넉넉한 돈을 받은 덕웅이는,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항상 열심히 일하고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그래서 어제 예약한 고급 케이크를 빵집에서 받아들고 부모님께 대접했다. 그런데 왠걸? 다음날 아침 부모님께서 몸져 누워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제 먹은 고급 케이크에는 특별한 유기농우유가 들어갔는데, 부모님이 유당불내증이 있어서 그것이 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유당불내증은 상당히 중요한 증상이지만, 유당불내증 체질은 아마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군집분석을 해도 사람들이 유당불내증/유당불내증아님으로 나뉘기는 힘들 것이고, 건강에는 유당불내증 여부보다 중요한 요인이 산더미처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당불내증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부모님의 유당불내증에 고급 유기농 우유가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미리 그런 케이크를 피해서 참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는 덕웅이보다 의사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의사들은 아주 많은 수의 환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꼭 사상체질이 없더라도, 어떤 약은 다른 어떤 음식이나 약과 함께 먹으면 독이 되고 생명을 해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이런 '사소한 체질'에 대해서 알아둬야 할 것이다. 어떤 약이 어떤 약과는 같이 먹으면 안되고, 어떤 음식과 함께 먹으면 안되고, 어떤 체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해로운지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한 체질은 70억체질론에나 나올법한 아주 사소한 체질이지만, 그럼에도 아주 중요한 체질이다.
사실 한의사들이 사상체질을 주의깊게 바라보는 이유도, 분명히 어떤 한약이 몸에 안듣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우황청심환을 먹어도 발을 덜덜 떨고, 별 효능이 없는 탕을 먹었더니 병이 낫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몸에 좋다는 한약을 먹었다고 실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례를 계속해서 보아왔으니, 한의사들에게는 사소하고 모호해 보이는 체질이라도 중요하게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체질론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한의사들이 체질을 보아야 할 때는, 100년전 책에 나온 읽기도 어려운 구절보다 자신의 경험을 따라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어떤 한약이 좋았는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다른 한의사의 말도 들어보고, 혹은 유당불내증에 대한 의학 논문을 찾아서 읽을수도 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사상체질에 의존하는 대신 실제 환자들을 치료하고 약을 처방할 때 고려해야 할 체질이 무엇인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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