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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월든 - 동물 이웃들 본문
이따금 함께 낚시를 하는 친구(앨러리 채닝)가 있는데, 그는 마을 반대편에 살기 때문에 읍내를 지나 내 집으로 왔고, 저녁에 먹을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저녁을 함께 먹는 일 만큼이나 교제를 돈독하게 해주었다.
은자: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군, 나는 지난 세 시간 동안 메뚜기 한 마리가 소귀나무 위를 지나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어. 산비둘기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잠들었는지, 날개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방금 숲 너머에서 들려온 건 농부가 정오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였나? 일꾼들은 삶은 고기와 사과술과 옥수수빵을 먹으러 들어가고 있겠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근심걱정이 많을까? 먹지 않는 사람은 일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그나저나 오늘은 얼마나 수확했을까?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라면, 누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까? 집안일은 또 어떻고! 이렇게 화장한 날에는 그놈의 문 손잡이를 윤이 나게 닦아야 하고, 물통을 문질러 씻어야 해! 집이 없는게 차라리 나아. 속이 빈 나무 같은 데서 사는게 더 좋을거야. 그러면 아침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저녁 회식도 없겠지. 문을 두드리는건 딱따구리뿐일거야. 사람들은 너무 몰려 살아. 거기에 해가 비치면 너무 더워져.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생활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가버려서, 나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 내게는 샘에서 길어온 물이 있고, 선반에는 통밀빵 한 덩어리가 있지. 들어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군. 마을의 굶주린 개가 사냥 본능에 이끌려 나온 걸까? 아니면 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돼지일까? 비가 내린 뒤에 나도 그 돼지 발자국을 보았지. 빠르게 다가오고 있군. 옻나무와 찔레나무가 흔들리고 있어. 아, 시인, 자네였군? 오늘은 세상이 어떤가?
시인:저 구름을 보게, 하늘이 어떻게 떠 있는지! 오늘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멋지군. 옛날 그림에도 저런 건 없고, 외국에도 저런 건 없어. 스페인 앞바다에 있을 때가 아니면 저런 건 볼 수 없지. 저건 진정한 지중해의 하늘이야. 나도 먹고살기는 해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낚시나 갈까 생각했지. 낚시야말로 시인에게 딱 맞는 일이고 또 내가 배운 유일한 기술이니까. 어때, 함께 가지 않겠나?
은자:거절할 수는 없지. 빵도 곧 없어질 테니까. 기꺼이 가겠지만, 지금은 명상을 마무리하는 중이야.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까 잠시만 나를 혼자 있게 해주게. 하지만 늦어지지 않도록 자네는 그동안 미끼를 파내고 있게나. 이 부근에는 거름을 준 적이 없어서 지렁이를 만나기 힘들 거야. 아마 거의 멸종된 상태라고 봐야지.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지렁이를 파내는 일도 낚시질과 맞먹을 만큼 재미있어. 오늘은 그 재미를 자네 혼자 실컷 누리게, 저기 물레나물이 흔들리는 거 보이지? 그곳 땅콩밭을 삽으로 파보게. 김을 매듯이 풀뿌리 사이를 잘 들여다보면, 세 포기를 뒤집을 때마다 지렁이 한 마리는 나올 거야. 그건 장담해도 좋아. 아니면 좀 더 멀리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좋은 미끼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하여 늘어난다는 걸 알았거든.
어디 보자, 내가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아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야. 세계는 이런 상황에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 천국에 갈 것이냐, 낚시를 하러 갈 것이냐. 이 명상을 빨리 끝내면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올까? 사물의 본질 속으로 거의 녹아 들어간 기분이었는데, 내 평생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내 생각이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군.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어서 돌아오라고 그 생각들한테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 생각들이 나한테 무언가를 제안할 때 "거기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는 게 현명한 짓일까? 내 생각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그래서 나는 그 생각들이 지나간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게 뭐지?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어. 일단 공자가 말한 세 문장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아까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상태가 우울한 상태였는지 황홀한 상태였는지는 모르지만. 1
시인:이젠 끝났나? 내가 너무 빨리 돌아왔나? 나는 온전한 지렁이 열 세 마리와 토막나거나 작은 놈 몇 마리를 잡았다네. 그래도 작은 물고기를 낚기에는 충분할 거야. 낚싯바늘을 감싸지는 못하겠지만, 마을 지렁이들은 너무 커서, 피라미라면 한 끼 배불리 먹고도 낚싯바늘을 구경조차 못할 정도야.
은자:그럼 출발하세. 콩코드 강으로 가볼까? 수위가 너무 높지만 않으면 거기가 좋을 거야.
왜 세상은 우리가 보는 대상들로 이루어졌을까? 왜 사람은 이런 동물들을 이웃으로 가지고 있을까?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틈새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생쥐밖에 없는 것 같지 않은가? 비드파이(판차탄트라의 작가)같은 우화작가들은 동물들을 한껏 이용한 것 같다. 그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짐을 나르는 짐승,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생각의 일부를 떠맡고 있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내 집에 드나드는 생쥐들은 흔한 외래종 생쥐가 아니라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야생 토종 생쥐였다. 내가 그 생쥐 한 마리를 저명한 박물학자에지 보냈더니 그 학자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집을 지을 때 생쥐 한 마리가 집 밑에 보금자리를 지었는데, 내가 두 번째 마루를 깔고 대팻밥을 다 쓸어내기 전에는 점심때가 되면 으레 보금자리에서 나와 내 발치에 흩어진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곤 했다. 아마 녀석은 그때까지 사람을 본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녀석은 곧 나와 친해져서, 내 신발을 뛰어넘고 내 옷을 기어오르곤 했다. 몸놀림이 다람쥐를 닮아서, 다람쥐처럼 깡충깡충 뛰는 동작으로 방안 벽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벤치에 팔꿈치를 얹고 기대앉아 있는데, 녀석이 내 옷을 따라 위로 올라오더니 옷소매를 타고 내려가서는 점심이 담긴 봉지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봉지를 여며쥐고 녀석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녀석과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마침내 내가 엄지와 검지로 치즈 한 조각을 쥐고 가만히 있자 녀석은 다가와서 내 손바닥 위에 앉아 치즈를 조금씩 뜯어 먹었다. 그런 다음 파리처럼 제 얼굴과 앞발을 깨끗이 씻고 가버렸다.
얼마 뒤에는 딱새 한 마리가 내 헛간에 둥지를 지었고, 울새는 내 집에 기대어 자라는 소나무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6월에는 본래 조심성이 많은 자고새가 새끼들을 데리고 내 집 뒤에 있는 숲에서 나오더니, 내 집 창문을 지나 앞쪽으로 갔다. 자고새는 암탉처럼 꼬꼬댁 소리를 내어 새끼들을 불렀고, 이런 행동으로 자기가 숲의 암탉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람이 접근하면 새끼들은 어미의 신호에 따라 마치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갑자기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게다가 새끼들은 모양이 마른 나뭇가지나 낙엽을 닮아서, 사람들은 새끼들 한복판에 발을 들여놓아도 녀석들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더구나 어미가 요란스럽게 퍼덕거리거나 걱정스럽게 울어대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로는 어미가 사람과 마주치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데굴데굴 구르거나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사람도 한동안은 그게 어떤 생물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새끼들도 나뭇잎 밑에 머리를 처박고 납작 엎드려서 가만히 웅크린 채 멀리서 어미가 보내는 신호에만 신경을 쓰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새끼를 밟을 수도 있고,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게 자고새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언젠가 나는 꼼짝도 않고 납작 웅크려 있는 자고새 새끼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래도 녀석들은 어미와 본능에만 충실한 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이런 본능이 얼마나 철저한지, 한번은 내가 새끼들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낙엽 위에 내려놓을 때 우연히 한 녀석이 옆으로 쓰러졌는데, 10분 뒤에도 나머지 녀석들과 함께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고새 새끼는 다른 새들의 새끼와는 달리 깃털이 나 있고, 발육도 병아리보다 더 완벽하고 조숙하다. 크게 뜬 맑고 차분한 눈에 담겨 있는 성숙하면서도 천진한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모든 지혜가 그 눈에 어려 있는 듯하다. 유년기의 순수함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뚜렷해진 지혜까지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런 눈은 새가 태어날 때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눈에 비친 하늘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보석은 숲도 다시는 잉태하지 못할 것이고, 여행자도 그렇게 맑은 샘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무지하고 무모한 사냥꾼이 어미 자고새를 쏘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이 천진한 새끼들은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짐승이나 맹금류의 먹이가 되거나, 자신들과 꼭 닮은 썩어가는 낙엽과 차츰 뒤섞이게 된다. 암탉이 자고새의 알을 품어서 부화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자고새 새끼들은 뭔가에 놀라면 뿔뿔이 흩어져 행방불명이 된다고 한다. 녀석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어미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자고새들이야말로 암탉이고 병아리였다.
숲속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이 은밀하게 야생 그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마을 근처에서도 얼마나 많은 동물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놀랄 만하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사냥꾼들뿐이다. 수달은 여기서 얼마나 은밀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수달은 다 자라도 몸길이가 1미터 정도니까, 어린애만 한 이 수달을 얼핏 본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전에 내 집 뒤에 있는 숲에서 너구리를 본 적이 있고, 아직도 밤에는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씨를 뿌린 뒤 정오가 되면 나는 보통 샘터 그늘에서 한두 시간 쉬면서 점심을 먹고 책을 읽었다. 내 밭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브리스터 언덕 아래서 스며나오는 이 샘은 늪과 개울의 원천이었다. 이 샘에 가려면 어린 리기다소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풀이 무성한 분지를 연달아 내려가다가 늪 근처에서 큰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샘터에는 가지를 넓게 펼친 백송나무 밑에 한적한 그늘이 있고, 거기에 땅바닥이 단단해서 앉기 좋은 깨끗한 잔디밭이 있었다. 나는 샘을 파내어 맑은 물이 고인 우물을 만들었다. 그래서 휘젓지 않고도 깨끗한 물을 양동이 하나쯤 퍼낼 수 있었다. 호수의 물이 가장 따뜻한 한여름이면 나는 거의 날마다 이 샘터로 물을 길으러 갔다.
샘터에 가서 보면 도요새도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진흙 속에서 벌레를 찾고 있었다. 어미는 30센티미터 높이에서 둑을 따라 날아오고, 그러면 새끼들은 그 밑에서 떼를 지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면 어미는 새끼들 곁을 떠나 내 주위를 빙빙 맴돌면서 조금씩 다가왔다. 그렇게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오면 어미는 날개와 다리가 부러진 척하면서 내 주의를 끌어 새끼들을 도망치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새끼들은 어미가 지시한 대로 가냘프지만 꿋꿋하게 삐악거리며 일렬종대로 늪을 지나 행군하고 있었다. 어미는 보이지 않고 새끼들의 삐악거리는 소리만 들릴 때도 있었다.
그곳에는 멧비둘기도 찾아왔다. 녀석은 샘터 위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내 머리 위의 백송나무 가지를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붉은 다람쥐는 나와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스스럼없이 굴면서 호기심을 보였다. 누구라도 숲을 찾아가 마음에 드는 곳에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그곳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차례로 찾아와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다소 평화롭지 못한 사건도 목격했다. 어느 날 장작더미,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루터기를 쌓아둔 곳에 가서 보니 큰 개미 두 마리가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 마리는 붉은 개미였고, 또 한 마리는 훨씬 커서 몸길이가 거의 15센티미터나 되는 검은 개미였다. 두 녀석은 서로 뒤엉킨 채 떨어질 줄 몰랐다. 나무토막 위에서 끊임없이 밀고 당기고 뒹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놀랍게도 나무토막들이 그런 전투원들로 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두 마리의 결투가 아니라 두 종족 간의 전쟁이었다.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가 맞붙은 형세였지만, 붉은 개미 두 마리가 검은 개미 한 마리를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미르미돈 군단은 내 장작 마당에 있는 언덕과 계곡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땅바닥에는 양쪽 진영의 사상자가 가득 널려 있었다. 2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목격한 유일한 전투였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내가 발을 디뎌본 유일한 전쟁터였다. 붉은 공화주의자와 검은 제국주의자가 격돌한 대살육의 현장! 개미들은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간 병사도 그렇게 결연하게 싸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무토막 사이의 양지바른 계곡에서 서로 끌어안고 단단히 얽혀 있는 두 전사를 지켜보았다. 그때는 한낮이었지만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아니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울 태세였다. 몸집이 작은 붉은 전사는 적의 가슴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 전쟁터에서 그렇게 몸부림치고 뒹굴면서도 적의 더듬이 하나를 뿌리 근처에서 물어뜯는 것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다른 더듬이는 이미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힘이 더 센 검은 개미는 적을 떨쳐내려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고,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붉은 개미도 다리 몇 개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그들은 불독보다 더 끈질기게 싸웠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전쟁 구호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인 게 분명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붉은 개미 한 마리가 이 계곡의 비탈을 혼자 기어올라왔다. 이 녀석은 무척 흥분한 기색이었는데, 적을 이미 해치웠거나 아니면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듯했다. 사지가 멀쩡한 것으로 보아 후자인 게 분명했다. 싸움에 이겨서 방패를 갖고 돌아오든가 죽어서 방패에 실려 오라는 훈계를 어머니한테 들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킬레우스같은 장수로서 홀로 떨어져 분노를 품고 있다가,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구하거나 그의 죽음을 복수하러 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서 이 불공평한 전투(검은 개미가 붉은 개미보다 두 배나 컸다)를 지켜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전사로부터 1센티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검은 전사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앞다리의 뿌리 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대도 그의 다리 중 하나를 골라잡았다. 그리하여 세 마리는 세상의 모든 자물쇠와 시멘트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접착제라도 발명된 것처럼 영원히 결합되었다.
그때쯤 나는 양쪽 진영에 군악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높은 나무토막 위에 배치된 채 국가를 연주하면서 기운 빠진 전사들을 격려하고 죽어가는 전사들을 위로했다. 나 자신도 그들이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개미와 인간의 차이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미국의 역사라면 몰라도, 적어도 콩코드의 역사에는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의 수나 전사들이 보여준 애국심과 용기에서 이 개미 전쟁에 견줄 만한 전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참전자의 수와 사상자의 수만 놓고 본다면 이 개미 전쟁은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드레스덴 전투에 필적할 만했다.
콩코드 전투! 민병대 쪽에서 두 명이 전사하고 루서 블랜처드(콩코드 전투 최초의 부상자)가 다친 그 전투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개미가 버트릭(콩코드 전투 당시 민병대 지휘관) 같았다. "쏘아라! 어서 쏘아라!" 수천 마리의 개미가 데이비스와 호스머의 운명을 맞았다. 이곳에는 용병이 하나도 없었다. 개미들은 우리 선조들처럼 차에 붙는 3페니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신념을 위해 싸웠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는 거기에 관련된 자들에게는 적어도 벙커힐 전투만큼이나 중요하고 기억할 만한 것이리라.
나는 앞에서 특별히 묘사한 세 개미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던 나무토막을 집으로 가져가서 창턱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유리컵을 덮어놓았다. 싸움의 결과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언급한 붉은 개미한테 현미경을 들이대고 살펴보았더니, 녀석은 상대의 남은 더듬이마저 잘라버리고 앞다리를 열심히 물어뜯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팍도 갈가리 찢긴 채 중요한 내장이 검은 개미의 턱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 있었다. 검은 개미의 가슴패기는 너무 두꺼워서 붉은 개미가 꿰뚫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붉은 개미의 검붉은 눈동자는 전쟁만이 흥분시킬 수 있는 잔인성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개미들은 유리컵 밑에서 반시간을 더 싸웠고, 내가 다시 보았을 때는 검은 개미가 두 적의 머리를 몸에서 끊어낸 상태였다. 하지만 붉은 개미의 머리들은 검은 개미의 양쪽을 물고 늘어진 채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안장머리에 매달아놓은 무시무시한 전리품 같았다. 검은 개미는 더듬이도 없고 하나 남은 다리마저 반쯤 잘려나갔고 그밖에도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 없는 몸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적의 머리들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시간이 지났을 때, 마침내 녀석은 목적을 이루었다. 내가 유리컵을 들어올리자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창턱을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검은 개미가 그 싸움에서 결국 살아남아 여생을 앵발리드에서 보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악착같은 기질은 그 후 별로 쓸모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 승리했고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전투에서나 볼 수 있는 처절하고 잔혹한 살육을 내 집 앞에서 목격하고, 그날 내내 흥분하고 착잡한 기분에 시달렸다. 3
커비와 스펜스에 따르면 개미들의 전투는 오래전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지만, 현대의 저술가들 가운데 개미 전쟁을 목격한 사람은 위베르(스위스의 곤충학자)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이네아스 실비우스(비오 2세의 필명)는 배나무 줄기에서 큰 개미들과 작은 개미들 사이에 벌어진 끈질긴 싸움을 자세히 기록한 다음, '이 싸움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 시대에 유명한 법률가인 니콜라스 피스토리엔시스의 눈앞에서 일어났고, 그는 그 전쟁사를 매우 충실하게 기록했다.'고 덧붙였다. 역시 큰 개미들과 작은 개미들 사이에 벌어진 이와 비슷한 전투를 스웨덴의 신부인 올라우스 마그누스도 기록하고 있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작은 개미들은 전우들의 시체는 매장했지만 적들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폭군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에서 축출되기 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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