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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과 주변 학문들

과학주의자 2023. 2. 15. 14:51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은 언어와 논리에 기반하여 철학적 주제를 탐구하는 철학 학파를 말한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했으며, 현재도 영미권에서 주류 철학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미철학으로도 불리는데, 사실 초창기 분석철학자들의 상당수는 독일인이다. 분석철학은 탐구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중시하며, 주로 대상의 언어적 의미를 분석하여 대상을 탐구한다. 다른 철학과 달리 상당수의 분석철학 이론들은 탄탄한 논리적 근거에 기초하기 때문에 더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 하며, 과학철학 일부와 심리철학, 윤리학이 분석철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스탠포드 철학사전을 기본으로 한다.

 

언어철학

https://tsi18708.tistory.com/231

언어철학은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이다. 언어철학은 논리실증주의가 탄생하는 시기에 탄생하였으며, 언어철학의 창시자들이 분석철학을 창시했다. 이후 언어철학의 발전은 분석철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했고, 지금도 분석철학의 방법론과 기초지식을 익히기 위해서는 언어철학을 알아야 한다.

 

심리철학

https://tsi18708.tistory.com/225

심리철학은 인간 마음의 본질과 특성을 분석철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철학이다. 분석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심리철학은 논증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며, 분석철학과 많은 공리를 공유한다. 심리철학은 인지과학을 만든 공헌자 중 하나이며, 분석철학 전통의 학문 답게 다른 철학보다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크립키 의미론

https://tsi18708.tistory.com/181

분석철학의 역사는 크립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립키의 등장으로 분석철학은 안전하게 형이상학으로 선회했고, 논리실증주의를 극복하면서도 논리적 정합성은 유지할수 있었다. 크립키는 분석철학에서 칸트의 시대를 끝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를 새로 열었다. 최신 분석철학을 알려면 비트겐슈타인만큼 크립키를 알아야 한다. 

 

 

1.개요

분석철학은 20세기 논리학자 고틀로브 프레게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프레게는 당시까지 절대진리로 여겨졌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수학적으로 체계화하고 발전시켜 언어를 수학적으로 분석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러셀을 비롯한 다른 수리철학자들이 가세하여 논리에 대한 수학적인 탐구가 이어졌다. 한편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가 가능해지자 언어는 철학의 핫한 주제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언어에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자 언어에 대한 지식으로 다른 철학적 주제 또한 다룰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언어철학이 급부상하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과학의 힘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에 반대하던 낭만주의 사조가 퇴보하자 사람들은 과학의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게 되었고, 이것이 논리실증주의로 이어진다. 논리실증주의는 학문적 연구대상을 검증가능성을 통해 나누고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급진적인 철학 사조이다. 언어철학을 주도하던 논리학자들과 새로이 나타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아주 많았고, 이들 속에서 철학적 대상을 논리적이고 언어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는 분석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분석철학은 논리학과 언어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논리학은 분석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동시에 분석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논리학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언어철학도 분석철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일부 예외가 있지만 언어철학적 방법론은 분석철학을 연구하는데 핵심이다. 이외에 심리철학과 윤리학, 과학철학도 분석철학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연구가 진행되는데, 과학철학의 경우 쿤의 과학혁명 이론 이후 그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과학철학자들의 반은 속칭 '해석학'자들로, 이들은 대륙적이고 인문학적인 방법을 통해 과학의 본질과 속성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소칼 사건에서 보았듯이 과연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분석철학의 역사는 3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흄의 시기로, 논리실증주의가 철학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이다. 당시 분석철학자들은 경험주의 전통에 기반하여 여러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콰인 등에 의해 논리실증주의가 비판받으면서 논리실증주의는 붕괴되었고, 이후 인간의 내적인 가정을 중심으로 철학이 전개된 칸트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논리학자 크립키가 크립키 의미론을 제창하면서 칸트의 시기도 허물어졌고, 21세기부터는 본질 개념과 형이상학이 다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다.

 

분석철학의 특징은 과학과 상당히 친하다는 점이다. 분석철학의 창시자들부터가 수학자나 물리학자 등 과학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이 제시한 철학도 과학자들이 탐구를 위해 암묵적으로 사용하던 가정이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지금도 분석철학은 과학과 친한데, 현대 분석철학자들은 과학적 사실이 상당히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믿는다.[각주:1] 그래서 이들은 과학적 사실을 의지할 만한 기반이라고 보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할 때도 과학적 사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현대 분석철학의 주요 주제는 형이상학과 자연화된 철학이다. 논리실증주의가 태동한 초창기에 상당수의 분석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했고, 이들에 의해 형이상학은 빠르게 퇴출되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가 퇴보하고 크립키 의미론에서 언어적/논리적 방법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가능성이 보이면서 분석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연화된(naturalized) 철학은 말 그대로 자연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철학으로,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에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철학을 말한다. 형이상학이 발흥하는 한편 다른 분석철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철학에 직도입하는 대담한 기획을 실현하고 있으며, 일부는 통계처럼 매우 하드한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논리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분석철학을 태동한 철학 사조로, 학문적 연구대상을 검증가능성을 통해 나누고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20세기 초의 급진적인 철학 사조이다. 논리실증주의는 1920-30년대 빈에서 발족했던 비엔나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비엔나 클럽은 원래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모리츠 슐리크, 오토 노이라트 등)이 가지던 친목 모임이었는데, 이들이 에른스트 마흐 학회를 설립하고 여기에 물리학자 루돌프 카르납, 수학자 쿠르트 괴델 등이 합류하면서 빈 학파(비엔나 학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비트겐슈타인, 프랭크 램지 등 철학에서의 논리적 접근을 강조했던 다양한 철학자들과 뭉치면서 논리실증주의가 시작되었다.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유명한 테제가 '의미는 검증기준이다.'라는 말이다.(검증주의 의미론) 이는 우리가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모든 주장, 가설들이 일종의 검증조건이며, 현실에 대한 관찰을 통해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논리실증주의의 창안자들이 과학자였던 영향이 크다. 논리실증주의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치밀한 과학적 방법론이나 더 치밀한 수학적 증명에 익숙했던 과학자, 수학자들이었으며, 때문에 검증과 반증을 필두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했다. 검증주의 의미론은 모든 언어가 어떠한 귀납적 관찰을 지시하는 것으로, 관찰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따라 의미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언어적 표현이 어떠한 귀납적 관찰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이 모든 학문의 모범이라고 여겼고, 철학은 단순히 이를 보조할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같은 이유로 이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얘기들만 하는 종교나 형이상학을 싫어했고, 과학과 이성을 적대시하는 오컬트와 낭만주의, 민족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이들이 말한 의미는 검증기준이라는 말은 반대로 검증가능하지 않은 말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관찰을 통해 검증할 길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종교나 형이상학은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단순히 말장난이었으며, 폐기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특성상 과학과 수학에 친숙했으며, 당대에 인기를 얻은 언어에 대한 철학적 분석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에서는 과학과 수학, 언어에 대한 논의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에서 이들은 주장을 상당히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전통은 분석철학으로 이어졌으며,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2차대전기에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분석철학이 미국 철학의 주류가 되었다.(영국은 이미 러셀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그리고 분석철학자들이 윤리학, 심리철학, 과학철학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들 분야에서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경향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과학철학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약간 퇴색하였다)

 

그러나 후에 논리실증주의는 정서를 강조하고 이성과 그 자식들(국가체제, 과학)을 적대시했던 반문화 운동이 나타나면서 쇠락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비판자들은 실증주의의 도그마를 제시했는데, 실증주의의 도그마는 논리실증주의의 기본 명제들은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었다. 즉 논리실증주의는 종교나 형이상학을 경험적으로 검증불가능하다고 비판했는데, 종교나 형이상학을 경험적으로 검증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그 기본주장 자체는 검증될 수 없었다. 비록 명제논리에 대해서는 타당성이 입증되었지만, 논리실증주의는 기초적인 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이에 헤처(hatcher)는 논리실증주의가 당대 유행하던 과학적 방법론의 특정 측면에 비과학적 독단을 결헙한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거기다가 논리실증주의의 구성원이었던 콰인이 논리실증주의가 신봉하는 과학 그 자체를 공격하면서 논리실증주의는 급격히 허물어졌다. 콰인은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주장했는데, 이에 따르면 과학적 관찰은 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콰인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애초에 과학적 관찰 결과가 이론에 따라 해석되기 때문에 관찰을 통해 이론을 검증/반증하는게 불가능하다고 과학을 공격하였다. 여기다가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이 과학이 단지 관찰을 이론에 끼워맟추는 행위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던지면서 논리실증주의는 완벽하게 몰락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현재 논리실증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는 매우 소수이다. 철학의 주류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옮겨갔고, 논리실증주의의 직계 자손인 분석철학에서도 논리실증주의를 한때의 오류로 취급한다. 다만 논리실증주의의 모태가 되었던 과학에서는 아직 논리실증주의적인 태도를 일부 고수하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이 검증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검증될 수 없는 주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20세기 말부터 부상한 과학적 회의주의 운동도 주로 검증불가능한 주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한편 위에서 나타난 과학에 대한 공격은 후에 과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의 반론에 부딫혔고, 이로 인해 촉발된 과학과 인문학의 충돌은 과학전쟁으로 이어진 바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과학과 철학 간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다.

 

 

경험주의 비판[각주:2]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 of empricism>은 콰인이 1951년 발표한 논문으로, 분석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논문 중 하나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분석철학의 역사는 콰인 이전과 콰인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만큼 분석철학은 콰인 이후 극적으로 달라졌다. 분석철학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논리실증주의는 콰인과 함께 허물어졌고, 콰인은 분석철학에서 흄의 시대를 끝내고 칸트의 시대를 열었다.

 

콰인의 경험주의 비판의 핵심은 논리실증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공격하고자 했던 것은 연역명제와 귀납명제의 구분과 검증주의 의미론이었다. 그는 연역명제와 귀납명제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했고, 검증주의 의미론도 틀렸다고 주장했다. 엄격한 자연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이상에 맞게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적인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하며, 개별 명제가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단위로 검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석명제의 무의미함

콰인의 첫번째 공격은 분석명제에 대한 공격이다. 논리실증주의에서 분석명제는 어떠한 경험적 검증에서도 참이 되는 진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역명제는 경험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경험적 검증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다. 극렬 자연주의자였던 콰인은 이에 반대했고, 경험적 검증과 괴리된 명제는 무의미하며 실제 경험적 관찰결과도 이와 대치된다고 주장했다. 

 

콰인의 공격은 칸트와 프레게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다. 20세기 중반 연역명제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내놓은 학자는 칸트와 프레게 이외에 별로 없었고, 저 둘이 가장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은 모호하고 약점이 많다. 먼저 칸트는 연역명제가 주어가 술어를 포함한 명제라고 했는데, 이러한 정의는 모호할 뿐더러 주어-술어 형태의 문장이 아니면 적용할 수 없다. 괜히 프레게가 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게 아닌 것이다. 따라서 콰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프레게로 향한다.

 

프레게는 연역적 참은 순수하게 논리적 법칙과 정의들만을 사용해서 증명가능한 참이라고 정의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연역적 참이 아니다. 논리법칙만 가지고는 증명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연역적 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삼각형이 생긴걸 보지 않아도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참임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ET는 외계인이다'도 연역적 참이다. 물론 ET가 외계인이어야 한다는 논리법칙은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ET'를 '영화에 나온 외계인의 일종'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ET'와 '외계인'에게 바른 정의를 할당하고, 이 정의들과 논리법칙들을 통해 ET가 외계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

 

프레게의 정의는 매우 강력하고, 이를 비판하기는 힘들다. 논의를 논리학에 한정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논의를 의미론으로 넓히면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불'을 물이라고 정의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불은 화합물이다'는 참이다. 우리가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은 화합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은 '불'의 옳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을 물로 정의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불은 연소반응이다'는 거짓이다. 명백히 이는 참이지만, 우리가 방금 '불'을 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문제는 우리가 단어에 정의를 할당하는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논리학은 어떤 추론이 올바른 추론인지는 잘 말해주지만, 단어에 어떻게 뜻을 할당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왜 '불'이 불이 되어야 하는가? 물이 되면 안되는가? fire와 물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논리학이 탄탄해도, 단어가 올바르게 쓰이지 않으면 연역명제가 참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논리법칙을 따지기 이전에 단어에 제대로 된 정의를 할당해야 한다.

 

분석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법칙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단어도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불'이 불을 의미하고 '연소반응'이 연소반응을 의미해야, '불은 연소반응이다'가 연역적으로 참인 동시에 실제로 참이 된다. 그러려면 '불'과 '연소반응'은 실제로 서로가 연역적으로 같게 만드는 그러한 정의를 반영해야 하며, 즉 옳은 정의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정의가 옳은 정의인지 확정할 수 있는 규칙이 있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콰인은, 그러한 규칙이 있기나 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옳은 정의의 문제와 결론

그렇다면 대체 옳은 정의란 무엇인가? 왜 어떤 정의는 명제를 의미있게 만드는데, 어떤 정의는 명제를 공허한 기호논리학 연습예제로 만드는가? 이 부분에서 기존의 의미론들은 한계에 부딪힌다. 한가지 가능한 방법은 정의항과 피정의항이 같은 외연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불'이 지시하는 대상의 집합과 실제 불인 대상의 집합이 같아야 하며, 같은 외연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쓰는 '불'이 가리키는 집합은 물의 집합과 다르기 때문에 물은 '불'이 아니다. 따라서 '불'의 집합과 불의 집합은 동일한데, 불의 집합의 원소들은 모두 연소반응이기 때문에, 우리는 연역적이고 필연적으로 불은 연소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술어 의미론에서 집합 이론이 가지는 단점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DNA를 가진 생물은 RNA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DNA를 가진 생물'은 RNA를 가진 생물과 동일한 집합을 가지면서 서로를 바꿔도 진리치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DNA를 가졌다는 말은 RNA를 가졌다는 말과 동의어인가? 그것은 아니다. DNA와 RNA는 엄연히 다른 실재이다. 하지만 옳은 정의를 동의성으로 정의하면, 우리는 'DNA를 가진 생물'이 'RNA를 가진 생물'과 동의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반론이 가능하다. 우리는 DNA는 가졌지만 RNA는 가지지 않은 생물을 상상가능하다. 그러한 생물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는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이렇게 논의 영역을 모든 가능세계로 확장해서, 모든 가능세계에서 정의항과 피정의항이 동일한 명제가 분석적 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크립키 의미론이 가진 함의이자, 내포적 의미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경우 '1+1=2는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도이다'가 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가능세계에서 두 명제가 치환가능하기 때문이다. 내포적 의미론이 가진 한계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또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필연적이라면, 왜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필연적인가? 어떤 명제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지는 경험적으로 알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역적인 유도를 통해 이를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연역적인 유도가 연역적인 이유는 이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능세계를 통해 분석명제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분석성(연역성)과 필연성 사이의 무한한 쳇바퀴를 돌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분석성과 필연성의 차이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콰인은 순수한 분석명제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연역적 참은 공허하다. 따라서 옳은 정의에 기반한 연역명제만이 의미를 가지는데, 옳은 정의가 무엇인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연역적 참을 정의하려면 우리는 무엇이 필연적인지 정해야 하고, 이는 다시 연역적 참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는 순환적이다. 고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검증주의 의미론을 일부 따르는 것, 즉 의미가 경험을 통해 오며 따라서 분석명제도 경험적으로 입증되거나 반증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따른다면 우리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를 구분할수 없게 되며, 연역명제와 귀납명제 모두 경험에 의해 검증되는 명제이다. 

 

사실 콰인은 양자역학이 연역적 참을 반박했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상태가 병존하는데, 이는 배중률에 반한다는 것이다. 물론 배중률은 양자논리에서 잘 통용되고 있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산 것과 죽은 것도 아니라 파동함수라는 상태에 있다. 살아있다거나 죽었다거나 하는 것은 관측 시에 파동함수가 가질 수 있는 상태이고, 그저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게 배중률을 위배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배중률은 1차논리의 주요 공리로서 양자역학에서 아주 잘 쓰이고 있다. 게다가 현대의학에서는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이 불연속적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인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 필자의 의견

 

첫번째 비판에 대한 반론

물리학자들의 비판과는 별개로 콰인의 첫번째 비판은 많은 철학자들의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연역명제와 귀납명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가? 한쪽은 논리적으로 필연적 참이고, 다른 한쪽은 논리적으로 우연적 참인데, 어떻게 둘이 같을수 있는가? 콰인이 연구를 발표한 이후 이에 대해 많은 비판과 반론이 오갔고, 이는 현재에도 끝나지 않고 있다. 학자들은 콰인의 비판이 일견 타당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오류를 범한다고 믿는다. 

 

주류적인 비판 중 하나는 정합론적인 비판이다. 정합론적 진리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콰인의 비판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콰인은 연역명제의 의미에 대한 정의가 순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애초에 순환적인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정합론자들은 진리가 서로에 대해 일관된 명제들의 집합이라고 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 분석적인 것이고 분석적인 것이 필연적이라는 말은 아무 문제도 낳지 않는다. 오직 콰인만이 여기 반대할 것인데, 왜냐하면 진리가 자연과 관계없이 만들어진다는 정합론은 콰인이 가진 자연주의의 가장 적대적인 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비판은 콰인의 주장 자체보다는, 콰인의 태도를 문제삼는다. 콰인이 비판에서 보인 것은 칸트와 프레게식 이해가 연역명제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지, 연역명제가 귀납명제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콰인은 연역명제가 귀납명제와 어떤 점에서 같은지 논증하는 대신, 현재 주류 이론들을 반박하는데 그쳤다. 그런 경우 철학자들의 정상적인 반응은 새로운 이론이나 가능성을 실험해보거나, 혹은 둘이 같다는 것을 직접 논증하는 것이다. 내포적 의미론은 발전하고 있고 프레게 의미론도 발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편 이런 논의와는 별개로, 필연성과 분석성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크립키 의미론에서 필연성이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는 말이고, 분석성이란 그것이 연역적으로 유도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 있다'는 분석적 참이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에 우연적이다. 분석적 우연적 참과 후험적 필연적 참 개념은 필연성과 분석성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는 콰인이 가정하는 극단적인 자연주의와 어긋나기 때문에, 콰인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현대 분석철학자들이 콰인의 첫번째 비판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번째 비판: 뒤엠-콰인 논제

두번째 비판은 첫번째 비판보다 더 유명하다. 왜냐하면 이 비판을 통해 논리실증주의가 끝장났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을 철학적으로 정식화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뒤엠-콰인 논제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침몰했으며, 이후 역사를 중시하는 과학철학이 대두되었다. 뒤엠-콰인 논제는 피에르 뒤엠이 주장한 문제를 콰인이 발전시킨 것으로, 콰인이 비자연주의자라는 오해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뒤엠-콰인 논제는 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관찰에서 시작한다. 과학지식은 대개 중심원리가 있고, 이를 보조하는 보조가설들이 있다. 가령 '중력은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물리학의 중심원리이다. 그리고 '태양의 중력은 금성에서보다 지구에서 약하다'는 이를 지지하는 보조가설이다. 대부분의 과학에서의 중심원리는 검증하기 힘들고, 따라서 보조가설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중력이 정말 거리에 반비례하는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중력을 가지는 물체들의 중력을 실제로 측정하여 이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중심원리 1이 있고 보조가설 2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실험을 통해 보조가설 2를 폐기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경험적으로 폐기한 것은 중심원리 1일까 아니면 보조가설 2일까? 일단 보조가설 2는 확실히 끝장났다. 하지만 중심원리 1은? 중심원리에서 유도되는 보조가설이 폐기되었으니 아마 중심원리도 틀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잘못된건 보조가설이고 중심원리는 아직 반박되지 않았다. 논리만 가지고는 중심원리도 폐기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이것이 중심원리가 반박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중심원리가 거느린 무수한 보조가설들 중 51%가 박살난다면, 우리는 이제 중심원리의 신빙성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몇가지 함의가 도출된다. 먼저 검증은 항상 전체 규모로 진행된다. 중심원리를 검증하려면 보조가설 하나만 입증해선 안되고, 중심원리가 거느린 무수한 보조가설이 함께 입증되어야 한다. 콰인이 가바가이 문제를 통해 말했듯이, 검증은 항상 전체 규모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개별 명제가 개별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논리실증주의와 대치되고, 중심원리는 그 자체로는 검증할수 없기 때문에 또한번 논리실증주의와 충돌한다.

 

논리실증주의의 대안: 자연주의x1000

두 비판을 통해 콰인은 성공적으로 논리실증주의를 무너트렸다. 의미는 검증조건이 아니고, 사실 콰인에 따르면 의미란건 없다. 연역명제와 귀납명제는 의미가 구분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논리실증주의가 무너지자, 콰인의 소문은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까지 전해졌다. 콰인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학자가 되었고, 대륙에서도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콰인이 반실증주의자고, 상대주의자이며, 본인들 표현으로는 이성과 과학의 '허구성'을 폭로했다는 오명이 따라붙게 되었다.

 

그러나 콰인은 논리실증주의를 대신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대안은 상대주의자들에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철저한 자연주의자였고, 모든 학문이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논리실증주의를 무너트린 다음 그는 유의미한 학문은 과학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전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그만큼 과학의 범위를 확장했다. 그가 보기에는 논리학, 형이상학, 종교, 이데올로기 모두 과학이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가부를 가릴 수 있다.

 

콰인은 믿음의 그물망(the net of belief) 이론에서 과학이론이 중심논제와 주변논제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중심논제는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조가설들을 하나로 엮는 존재이자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논제이다. 반면 주변논제는 그렇게 핵심적이지 않아서 쉽게 갈아치울수 있지만, 그만큼 경험적으로 입증가능한 논제이다. 콰인에 따르면 과학이론은 물론, 형이상학과 논리학도 이러한 이론이다. 삼단논법은 논리학 '이론'의 중심논제이고, 실제 세상에서 이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타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콰인의 과학의 범위를 많이 확장하긴 했지만, 그는 과학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했고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이론들은 모두 쓰레기라고 평가했다.

 

이제 콰인의 주장을 응용해보자. 콰인에 따르면 양자역학 이론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물리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과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에 기뻐하며, 번역 미결정성 문제를 가져와서 둘이 동등하거나 여성물리학이 더 낫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콰인은 동시에 두 이론 모두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자역학은 수많은 보조가설이 증명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참으로 보인다. 반면 여성물리학 이론은 아무것도 입증된게 없고, 제대로된 보조가설도 없다. 페미들의 입발린 말 외에 경험적 근거가 없는 여성물리학이 갈 길은 하나이다.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는 거지같은 여성물리학 이론을 '과학적으로' 폐기해야 하고, 양자역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콰인은 극단적인 자연주의자였다. 그는 의미있는 학문은 과학처럼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고, 그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논리학을 끌어내렸다. 상대주의는 그가 가장 배격하는 주장중 하나이고, 과학은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이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의도했던 아름다운 과학은 더이상 없다. 하지만 포스트모던한 과학은 콰인 기준으로 헛소리이고, 특히 담론이니 이데올로기니 뭐니 하는 것들은 경험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것으로서 콰인의 주장과 가장 거리가 멀다. 슬프게도 이러한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있지 않다.

 

한편 콰인의 논문은 아이러니하게도, 형이상학을 분석철학에 부활시켰다. 당시까지 형이상학은 검증불가능하기 때문에, 논리실증주의에서는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학문으로 보고 경시하였다. 그러나 콰인은 중심논제가 보통 검증이 힘들며, 믿음의 그물망 전체의 검증여부와 함께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과학의 핵심 주장이 직접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형이상학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형이상학적 주장도 주변논제를 충분히 결합하면 과학으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콰인은 형이상학이 정도의 차이만 있고 실제로는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함의는, 형이상학을 싫어했던 콰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크립키 의미론과 맞물려서 분석철학에 형이상학의 시대를 다시 열었다. 현재 형이상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이론인 물리주의는 과학이론들이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간접적으로(중심논제들이 그렇듯이) 지지되고 있다.

 

 

실체

실체가 어떤 뜻인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분석철학에서는 실체를 보다 확실히 정의하여 사용한다. 실체(substance)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지속되거나 변화하는 속성을 갖는 것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어떤 존재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이것이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면 이것이 실체이다. 그래서 만약 어떤 대상 a가 마치 돈을 빌리러 오는 친구처럼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대상 a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언어에서 주어로 사용되며, 술어로는 사용될 수 없다. 

 

 

인과율(인과)

인과율(causality)은 모든 존재에는 선행하는 필요조건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a와 b에 대해서 a와 b가 a가 원인인 인과적 관계에 있다면, a가 존재함으로 인해 b가 존재하며 b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a가 필연적이라는 뜻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a->b로 표현한다. 인과율은 분석철학자들이 논리적 전제로 삼을만한 진리로 간주하는 전제인데,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정의된 인과율은 아래 3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 P1: 모든 현상 a에는 원인 b가 존재한다.
  • P2: 인과관계는 시간적 연속성을 포함한다. 즉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으로 연속되어야 한다.
  • P3: 물리적 사건은 비물리적 원인을 가질 수 없다.

 

이중 특히 P1은 매우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형이상학적 전제이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일때 a가 b의 원인이라면, a는 어떤 가능세계에서건 b를 발생시켜야 한다. 이를 경험적 용어로 표현하면, a가 발생한 이후에는 항상 b가 발생하여야 한다. 또한 a와 b는 시간적 연속성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a가 일어나면 그 '다음'에 b가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분석철학자들이 인정하는 인과율이지만, 과학자들은 여기 모순되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복잡한 네트워크(생물, 사회 등)에서는 원인 a가 발생해도 다른 요인들이 아귀가 맞지 않아 b가 생겨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물리학자는 원인보다 선행하는 결과의 존재를 제안하기도 한다.(사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당연할 수 있다) 분석철학자들이 과학은 잘 모르는 사람들임에 주의하라.

 

비록 현대 분석철학자들이 인과율을 형이상학적 진리로 여기고 있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철학자도 존재한다. 흄은 경험론적 입장에서 어떤 a가 어떤 b의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원인 a가 결과 b에 앞서는 것을 관찰할 수 있고, a와 b가 시공간적으로 인접함을 관찰할 수 있으며, a-b 연결이 자주 관찰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a가 원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으며, 오로지 귀납적으로 판단할 때만 그러하다. 즉 엄격한 논리적 입장에서 볼때 인과율은 단지 상관관계일 뿐이며, 이때 원인은 그저 좀 더 자주 시간상 앞에 위치하는 요소일 뿐이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있다. 흄은 인과율에 대한 비판을 처음 제시하였다.

 

반사실적 조건문으로서의 인과

한편 인과율은 반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의 형태로도 정의될 수 있다. 즉 a가 b의 원인이라는 명제는, 'a가 없었다면 b도 없었다.'라는 형태로 일종의 가상적(반사실적) 상황을 제시하는 방식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데이비드 루이스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데이비드슨은 자신의 무법칙적 일원론을 지지하기 위해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인과를 정의한 바 있다.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기술된 인과 관계의 의미는 2가지로 기술될 수 있는데, 법칙-도출적 접근과 가능세계 접근이 그것이다. 현재 주류는 가능세계 접근이다.

 

법칙-도출적 접근은 원인과 법칙, 조건을 통해 인과를 정의한다. 즉 위 명제를 법칙-도출적 접근으로 해석하면 'a와 a-b 법칙, 그리고 주변 상황(조건)들이 결합하면 b가 도출된다'로 기술될 수 있다. 가능세계 접근은 이름에서 나오듯이 가능세계로 이를 정의하는데, 가능세계 접근에서는 위 문장을 'a가 참이고, a가 참임을 제외하면 현실과 가장 비슷한 가능세계에서 b가 참이다'로 기술할 수 있다. 즉 가능세계 접근에서는 a가 없는 가능세계와 최대한 비슷한(a의 존재만 빼고) 최근접 세계를 가정하고, 이 최근접 세계에서 b가 참일 때 a와 b가 인과 관계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가능세계 접근에서 정의하는 최근접 세계는 대상이 되는 가능세계, 즉 a가 없는 가능세계와 최대한 비슷해야 한다. 이는 최근접 세계가 원 가능세계가 가지는 모든 존재는 물론, 법칙까지 공유해야 함을 말한다. '사과가 분리되지 않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가 참인 가능세계를 상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모든 조건이 동일하면서 '사과는 분리되었지만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가 참인 가능세계 c와 '사과는 분리되었고 땅에 떨어졌다'가 참인 가능세계 d를 상정할 수 있다. 이때 후자의 가능세계가 더 근접한 세계인데, 왜냐하면 후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가 보유하지 못한 중력의 법칙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사실적 조건문은 인과 관계를 잘 정의하는 듯이 보이나,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반사실적 조건문은 과도인과 사례를 잘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도인과는 2개 이상의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는 상황을 말하는데, 이 원인들 중 하나의 원인만 남아도 결과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도인과를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기술하면 과도인과가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a와 b가 c를 일으킨다'를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기술하면 'a가 없었다면 b도 없었다'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들어 김재권은 반사실적 조건문이 인과를 정의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진리론(진리)

진리나 사실이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쓰기는 하지만, 대체 진리가 무엇인지는 철학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물론 과학자들은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으로 진리를 정의한다. 그러나 이것을 철학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을 진리론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진리론은 충 4개가 있는데, 대응론과 축소적 진리론이 주류이다. 여러 시대에 걸쳐 대응론은 거의 항상 우세했지만, 지금은 축소적 진리론이 약간 더 우세하다고 한다.

 

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진리 대응론)은 어떤 명제가 세계와 대응될때 그 명제가 진리라고 정의한다. 가령 '나무는 지구의 생물이다'라는 명제는 실제 지구에만 살고 있는 나무의 존재 및 특성에 대응된다. 비슷하게 '전자는 원자핵을 돈다'도 실제 전자의 행동 양태와 대응된다. 이렇게 대응론은 진리가 세계의 어떤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에 대한 정의이며 과학자들도 이렇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명제들은 명백히 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계에 대응하는 부분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정합론(진리 정합론)은 어떤 명제가 다른 명제들과 서로 잘 조화될때 그 명제가 진리라고 정의한다. 가령 '자본주의는 악마다'라는 명제는 '공산주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나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한다'와 같은 명제와 잘 조화된다. 반면에 '개인의 부는 노력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는 둘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정합론은 진리가 서로 잘 조화되는 명제들의 모음이라고 주장하는데, 패러다임 이론과 비슷해 보인다. 정합론은 상대주의가 강세였던 20세기 후반에 인기를 끌었으나, 현재는 가장 인기없는 진리론이며 오직 포스트모더니즘에서나 지지하고 있다.

 

실용주의 진리론은 어떤 명제가 유용할때 그 명제가 진리라고 정의한다. 가령 '뱀은 위험하다'는 아마존에 사는 원주민에게는 참이다. 왜냐하면 아마존에는 독사가 매우 많고, 병원은 매우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 조련사에게 그 명제는 거짓인데, 왜냐하면 뱀 조련사가 뱀을 무서워하면 취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용주의 진리론에서는 진리가 실제 우리에게 유용한 명제라고 주장한다. 실용주의가 득세할때 실용주의 진리론은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현재는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 다만 임상심리학(특히 정신역동적 관점)에서는 부분적으로 실용주의 진리론적 진리 개념을 수용한다.

 

마지막으로 축소적 진리론은 참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진리론은 'a가 참이다'라고 할때 a를 참을 만드는 조건에 주목했다면, 축소적 진리론은 'a가 참이다'라는 명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공격한다. 왜냐하면 '사과는 붉다'와 '문장 '사과는 붉다'는 참이다'라는 문장은 의미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그냥 주장일 뿐이다. 따라서 축소적 진리론은 무엇을 진리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제안한다.

 

 

초랑 논변

초랑 논변은 가상의 색 초랑을 통해 전개되는 논증으로, 귀납적 일반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증이다. 물론 귀납적 일반화된 결론은 연역적으로 참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암묵적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귀납적 참을 참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굿맨이 제기한 초랑 논변은 이러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논증으로, 연역적 참 여부와 관계없이 귀납적 일반화가 약하다는 논증이다. 초랑은 '지금 시점까지는 초록이고, 지금 시점 이후부터는 파랑인 색'인데, 초랑 논변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 지금까지 발견된 에메랄드는 모두 초록이다.
  • 지금까지 발견된 에메랄드는 모두 초랑이다.(2)
  • 에메랄드는 초랑이다.(2,귀납적 일반화)
  • 앞으로 발견될 에메랄드는 모두 초랑이다.(3)
  • 앞으로 발견될 에메랄드는 모두 파랑이다.(3,초랑의 정의)

 

우리가 귀납적 참을 받아들일 경우 위 논증은 참인 논증이다. 그러나 위 논증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지금부터 발견될 에메랄드가 모두 파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귀납적이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합리적인 추론을 하려면, 귀납적 일반화를 버려야 한다. 초랑 논변은 이러한 파급력으로 다시 한번 귀납법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동시에 많은 학자들이 초랑 논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여 여러 해답이 제시되었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넬슨 굿맨(Nelson Goodman)이 있다. 굿맨은 초랑 논변을 제시하였다.

 

초랑 논변의 해결

첫번째 반론은 초랑이라는 개념이 언어를 오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랑 개념은 실제 자연종 명사라기보다는 우리가 '초랑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선언한 개념이다. 또한 초랑은 특정 시점에서는 이렇고 특정 시점에서는 저렇다고 하여 대상을 국소적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국소적 사실은 자연법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내 노트북은 삼성 노트북이다.'라는 말은 참일 수 있지만, 이는 자연법칙도 아니고 무언가를 예측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선언적으로 정의된 무언가를 속성으로 간주하는 일은 부당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민주당과 공화당은 '민주당 지지자거나 공화당 지지자이다.'와 '민주당 지지자거나 공화당 지지자거나 공산당 지지자이다.'라는 속성을 공유한다. 이러한 선언적 속성의 명단은 거의 무한히 만들 수 있는데, 민주당과 공화당이 무한히 많은 속성을 공유한다고 둘을 거의 같은 정당으로 취급하는 일은 적어도 정치인이나 정치덕후들에게 부당한 일로 비칠 것이다. 따라서 초랑 논변은 초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굿맨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우리는 초랑과 비슷한 방식으로 파록을 정의할 수 있는데, 파록은 '지금 시점까지는 파랑이고, 지금 시점 이후부터는 초록인 색'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할 경우 초록은 '지금 시점까지는 초랑이고, 지금 시점 이후부터는 파록인 색'으로 정의되고, 파랑은 '지금 시점까지는 파록이고, 지금 시점 이후부터는 초랑인 색'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초록-파랑 쌍이 초랑-파록 쌍보다 낫다고 할 언어철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초랑-파록 쌍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선언적이고 국소적인 개념은 초록과 파랑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 첫번째 반론은 폐기되었다.

 

이에 무법칙적 일원론으로 유명한 데이비드슨은, 귀납법칙이 오로지 동질적인 언어 사이에서만 성립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에 따르면 초랑 논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초록-파랑 계열 언어로 정의된 '에메랄드'라는 단어와 초랑-파록 계열 언어로 정의된 '초랑'을 섞어놓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슨은 초랑-파록 계열 언어로 에메랄드를 재정의하는데, 그가 제시한 '에메리어'는 '지금 시점에서는 에메랄드고, 지금 시점 이후부터는 사파이어인 보석'이다. 초랑-파록 계열 언어로 정의된 에메리어를 도입하면 초랑 논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

 

  • 지금까지 발견된 에메랄드는 모두 초록이다.
  • 지금까지 발견된 에메랄드는 모두 초랑이다.(2)
  • 에메리어는 초랑이다.(2,귀납적 일반화)
  • 앞으로 발견될 사파이어는 모두 초랑이다.(3)
  • 앞으로 발견될 사파이어는 모두 파랑이다.(3,초랑의 정의)

 

이 논증의 결론은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것이다. 이렇게 데이비드슨은 동일한 기술방식을 따르는 단어들로만 귀납법칙을 기술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귀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제안하여 과학에서의 언어사용을 제한하였다.

 

한편 이재호[각주:3]는 우리가 초랑 논변의 해결에 실패한 이유는 우리가 오직 언어적인 논의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즉 분석철학자들은 초랑 논변의 언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두고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제 과학현장에서 과학자들은 언어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여러 기법들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어쩌면 순전히 언어철학적인 방법으로 논리학의 모든 문제를 풀려는 생각은 오류일지도 모른다. 이재호는 자연적 속성의 개념을 도입해서 초록을 자연종 명사(자연적 속성)로, 초랑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여 이를 간단히 해결했는데, 이는 실제로 과학적으로 동의할만한 내용이다.(색의 본질은 단일한 파장이다) 이는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비약적이고 근거가 없지만(자연종 명사와 아닌 명사를 나눌 언어적 기준이 있는가>), 크립키의 고정지시어 이론으로 보면 타당하다.

 

 

헴펠의 까마귀(ravens paradox)

헴펠의 까마귀는 철학자 카를 구스타프 헴펠이 제안한 역설로, 과학적 검증에서 나타나는 역설로 제안된 것이다. 헴펠에 따르면 어떤 과학적 주장에 대한 검증은, 해당 과학적 주장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대우 명제를 검증하면서 검증될 수 있다. 가령 '모든 까마귀는 검다'의 대우는 '검지 않은 모든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와 동일한데, 그렇다면 후자의 명제를 입증해도 전자의 명제를 입증할 수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후자의 명제는 까마귀와 관련이 없는 것(하얀 공책 등)을 들고 와도 입증이 되는데 과연 이것이 전자의 명제를 입증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주로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다뤄졌고, 지금은 명제의 형식을 잘못 파악하였다는 인식 하에서 여러 해결책이 나와 있다. 가장 주류인 해결책은 베이지안 접근법으로, 베이지안 접근법에서는 후자의 명제가 사후확률의 증대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자의 입증이 전자의 입증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논파한다. 가설연역법(Hypothetico-Deductivism, HD)에서는 보조가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령 '모든 까마귀는 검다'와 같은 과학적 가설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임의의 장소에서 발견된 까마귀 a가 검은색이다'와 같은 보조가설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 가설은 '대상 a가 까마귀다'와 같은 보조 가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보조 가정은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과 논리적으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자의 명제의 경우 '대상 a가 까마귀다'와 논리적으로 일관되기는 커녕 모순되기 때문에 결국 두 명제는 동일하지 않다.

 

사실 헴펠의 입증 이론과 달리 가설연역법에서는 '까마귀 a가 검다'도 가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아닐 수 있다. 가령 '어떤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의 경우, '까마귀 a가 검다'는 가설연역법에서 가설의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제시된 근거(까마귀 a가 검다)가 반증되어도 가설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에,(그 까마귀는 '어떤' 까마귀가 아닌갑지) 그러한 증거는 본 가설에서 연되는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설연역법은 오로지 가설과 논리적으로 일관된 보조 가설을 통한 입증만 입증으로 인정하며, 그래서 '까마귀 a가 검다'도 '모든 까마귀는 검다'에서 논리적으로 연역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가설의 근거로 인정된다.

  1. Searle(2010). 신경생물학과 인간의 자유: 자유의지, 언어, 그리고 정치권력에 관한 고찰. 강신욱 역. 궁리,p46 [본문으로]
  2. Quine, W. V. O. (1951). "Two Dogmas of Empiricism". The Philosophical Review. 60 (1): 20–43. [본문으로]
  3. 이재호. (2014). 과학철학의 형이상학적 회귀. 철학탐구, 36, 71-1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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