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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 의미론 정리

과학주의자 2022. 8. 9. 10:31

현대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대륙철학의 상대주의를 극복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공약불가능성과 상대주의를 빌미로 서로 다른 집단의 소통을 방해하고 정체성 정치를 부추기고 있지만, 분석철학에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서로 소통할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선험적 참이 있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후험적 참도 있다. 그리고 서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명확하고 단일한 대상이 있다면 충분히 얘기를 끌어갈수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양상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솔 크립키 이후에 등장하였다. 현대 분석철학은 크립키 이전과 이후로 나눌수 있으며, 어떤 철학자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칸트와 함께 크립키를 꼽는다. 크립키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논리적인 용어로 부활시켰고, 후험적 참의 개념을 제시하며 과학철학에 일대 파란을 불러왔다. 논리학에서 폭풍을 불러왔던 그는 철학에서도 폭풍을 불러왔다. 현대 분석철학의 주류 이론은 크립키 의미론이며, 크립키 의미론을 모르고 비트겐슈타인만 외치는 사람은 현대 분석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수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스탠포드 철학사전을 기본으로 한다.

 

 

배경

크립키 의미론은 언어철학의 거장인 러셀과 프레게, 특히 러셀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다. 러셀과 프레게의 의미론은 모두 간접지시의미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제안한 단칭 용어는 거의 모두 대상을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프레게의 단칭 용어는 조건을 만족하는 대상만 지칭하고, 러셀의 한정기술구는 만족해야 하는 규정이 빼곡하다. 이는 소박한 의미론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크립키였고, 그의 주요 목표는 언어철학의 주류였던 간접지시의미론을 반박하는데 있었다.

 

가능세계 의미론

크립키의 의미론은 가능세계라는 개념에 기반한다. 가능세계는 양상논리학을 풀이하면서 등장하는 개념인데, 존재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실제로 있거나 없는 세상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은 평행세계물이나 대체역사물에도 자주 나타난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뤘다면 어땠을까? 이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조선이 일본보다 먼저 근대화되지 말았어야 할 논리적 근거는 희박하며, 이를 막을 어떠한 연역적인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조선이 일본보다 먼저 근대화된 이 세계는 가능세계에 속한다.

 

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가능세계를 통해 필연성과 우연성을 정의한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것은 필연적이다. 조선이 먼저 근대화를 했더라도 그 세계에서 피타고라스 정리는 참이다. 만약 타노스가 실제하는 세계였다면, 그래도 둥근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인피니티 스톤이 얼마가 있더라도 불가능하다) 이처럼 연역적인 참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며, 이를 필연적이라 하고 □로 표기한다. 반면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인 것은 우연적이다. 필자가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것은 우연적이다. 조선이 늦게 근대화한 것도, 물론 역사적 조건이 매우 불리하지만 우연적이다. 왜냐하면 역사학적 법칙과 물리학적 법칙도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에서 물리법칙은 참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거짓일 수도 있었다. 귀납적 참은 항상 거짓일 가능성이 존재하며, 해가 서쪽에서 뜨는 가능세계는 얼마든지 상상가능하다. 이처럼 귀납적인 참은 대개 가능하지 않은 가능세계가 하나 이상 존재하며, 이를 우연적이라 하고 ◇라 표기한다.(가능하지만 현실에선 참이 아닌 경우 가능적이라 한다)

 

필연양화사와 우연양화사는 진리함수적이지 않다. 즉 진리표를 통해 진리조건을 제시할수 없다. 또한 이들은 하나만 있어도 상대를 정의할수 있는데, 이를 통해 두 양화사를 아래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P=-◇-P
  • ◇p=-□-P

 

가능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논쟁이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의 양상실재론에서는 가능세계가 실존한다고 여긴다. 즉 우리가 논리적 모순없이 상상가능한 모든 세계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한다. 다만 현실세계와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탐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주장하는건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다른 학자들은 다른 의미론을 주장하는데, 이중 하나는 가능세계를 논의 전개를 위한 일종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에 반대하여 가능세계를 실재하나 구체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 일종의 추상적 존재로 보았다.

 

크립키의 간접지시의미론 비판

양상논리에 기초하여 크립키는 러셀과 프레게(특히 러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2가지 논증으로 그들을 비판했는데, 이중 첫번째 논증은 러셀의미론에서 반박될수 있으나 두번째 논증은 반박되기 힘들다고 여겨진다.

 

첫번째 논증은 한정기술구 이론에서 출발한다. 한정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다음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 빌 에반스는 waltz for debby의 작곡가이다. -1

 

빌 에반스는 waltz for debby를 작곡한 x로 정의되는 한정기술구이기 때문에,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참이라면, 다음도 참이다.

 

  • waltz for debby의 작곡가는 waltz for debby의 작곡가이다.
  • 빌 에반스는 빌 에반스이다.

 

1번 문장이 참임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문장도 참이다. 게다가 위의 문장들은 선험적이고 연역적으로 참이고 필연적으로도 참이다. 그런데 위 문장은 1번 문장과 동일함으로(치환성), 1번 문장도 선험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크립키는 반박에 나선다. 현실에서 빌 에반스는 waltz for debby의 작곡가지만, 그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의 조카가 데비가 아니었으면 이름이 바뀌었을수도 있고, 사물의 위치 하나만 바뀌어도 에반스의 심정에 변화가 생겨 음이 달라졌을수도 있다. 즉 1번 문장은 후험적이고 우연적인 참인데, 이는 논증 결과와 모순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빌 에반스를 -한 x로 정의하지 말아야 하며, 즉 간접지시의미론을 거부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더밋(dummit)이 제시했는데, 더밋은 빌 에반스가 waltz for debby의 작곡가가 아닐수도 있다는 인식적 직관으로 이를 해결한다. 어쩌면 크립키 말대로 빌 에반스인 x와 waltz for debby의 작곡가인 x는 다를수도 있다. 그래야 할 연역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 에반스에 대한 한정기술구의 3번 문장을 ◇(∀x)(Fx->Gx)로 고치면 문제는 해결된다. 다른 가능세계에서면 몰라도 현실에선 의미가 변함이 없으면서, 가능세계에서 따르는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뭔가 불완전하긴 하지만 적어도 크립키의 비판은 해결하면서 한정기술구 이론의 기본 주제는 유지한다.  

 

그러나 두번째 논증은 치명적이다. 크립키의 두번째 논증은 괴델을 예로 든 논증으로, 이는 크립키가 괴델에 이상한 라이벌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괴델은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사람인데, 따라서 우리는 한정기술구 이론에 따라 괴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수 있다.

 

  • 어떤 x에 대해서, x는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x가 괴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면 어떨까? 사실은 불완정성 정리를 괴델의 제자 슈미트가 증명했다면? 실제로 과학의 세계에서 제자의 연구를 갈취한 연구자는 가끔씩 관찰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실제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사람은 슈미트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사람은 괴델이다. 왜냐하면 괴델은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x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슈미트는 괴델로 강제 개명을 당하게 된다! 비슷하게 만약 waltz for debby의 작곡가가 빌 에반스가 아니라 동료 베이시스트였던 스콧 라파로였다면, 라파로도 에반스라고 강제 개명을 당하는 셈이다.(오류로부터의 논변)

 

문제점은 하나 더있다. 우리가 이런 오류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사실이 아닐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쳐낸다고 하자.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한 x는 금지다. 그러나 우리가 틀릴수도 있는 모든 명제를 제거하면 우리에게 남는 정의가 없다. 남자인 x도 안되고 오스트리아인인 x도 안된다. 남은건 (∃x)(Fx)와 -(∃x)(∃y)((x≠y)&(Fx&Fy))뿐인데, 이게 해당되지 않는 대상이 대체 몇개나 있을지 의문이다. 즉 실질적으로 우리는 한정기술구나 다른 간접적인 지시를 통해 무언가를 지시할수가 없다!(무지로부터의 논변)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적어도 사람과 같은 고유명사는, 간접지시를 할수가 없다. 정의를 달아 정의하는 방법은 고유명사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유명사는 간접지시가 아니라,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direct reference theory) 기델은 그냥 괴델이지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이를 밀(mill)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러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러셀은 this나 that은 논리적 고유명사로서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셀은 이 this와 that으로 대상을 지시했지만, 크립키는 대상을 다이렉트로 지시한다.

 

고정지시어

이 비판에서 우리는 크립키 의미론의 독특한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크립키가 제시한 '빌 에반스'나 '괴델'은 다른 정의가 필요하지 않다. 이들은 그 자체로 자신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가진 x나 어떤 학벌을 가진 x가 아니다. 남/여성인 x도 아니고 민주당/한나라당을 지지하는 x도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다. 그 어떤 외적 조건(간접/기술적 정의, 한정기술구)도 당신을 정의하지 못한다. 뭔가 있어보이는 인생철학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엄연히 크립키 의미론의 탄탄한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이때 괴델이나 '나'같은 고유명사를 크립키는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라고 부른다.

 

고정지시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가능세계마다 달라지는 기술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성별, 국적, 신념이 달라져도 당신은 당신이다.(뭔가 또 멋있는 말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명칭은 다른 것을 지시할수도 있다. 가령 괴델은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이름이 '델괴'였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름은 일종의 간접적 정의고, 고정지시어의 본질을 해치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인격같은 고유명사는 모두 고정지시어이다. 나중에 가면 자연종 명사라는 개념도 등장하지만,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고정지시어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가능세계마다 변하는 간접적 정의가 모두 삭제되고 지시체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문장은 필연적이고 선험적으로 참이다.

 

  • 이승만은 이승만이다.

 

그러나 비고정지시어는 다를수 있다. 비고정지시어는 고정지시어 이외의 고유명사를 말하는데, 이는 가능세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문장은 우연적이고 후험적인 참이다.(아래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모든 가능세계로 확장하라)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모든 고유명사는 고정지시어이다. 그러나 어떤 고정지시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정기술구일수도 있다. 삼각형은 수학적 정의가 가능한 대상이지만,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기 때문에 고정지시어이다. 이러한 고정지시어는 정의를 통해 간접지시하기 때문에 대상을 간접지시한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고정지시어와, 모든 고유명사들은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

 

어떤 표현들은 일반적인 단어를 고정지시어로 만들기도 한다. 가령 아래의 문장을 보자.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바이든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바이든이다.'는 참이 아닐수도 있다. 왜냐하면 2016년의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였고, 1919년은 윌슨이였기 때문이다. 즉 저 문장에서 대통령은 고정지시하는 대상이 없는 한정기술구이다. 하지만 '현재'가 붙어버리면, 지시하는 대상은 바이든 하나로 한정된다.(현재 시점은 2021년 5월 12이다) 물론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아닐수도 있지만, 적어도 현실세계에서는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고정지시어이다. 그럼 다음을 보자.

 

실제로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바이든이다.

 

이 문장에는 '실제'가 붙었다. '실제'는 가능세계말고 오로지 현실만을 다루라는 명령어로, 이제 대상이 현실세계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현재 미국 대통령은 바이든 하나밖에 없다. 이처럼 어떤 술어가 대상의 범위를 특정한 가능세계로 한정할때 이를 양상적 고정지시한다고 말한다.('지구-4에서'도 양상적 고정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를 통해 일반적인 단어를 고정지시어로 만들수 있다.

 

인과적 지시이론

크립키는 간접지시의미론의 대안으로 인과적 지시이론을 제안하였다. 인과적 지시이론에 따르면 단칭 용어(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으로,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지시해왔던 무언가가 된다. 언어가 자의성을 가지듯이, 그 고유명사가 그 대상을 지시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단지 누군가가 대상을 그러한 용어로 부르기로 했고, 그것이 널리 수용되면서 그것이 이름이 된것 뿐이다. 인과적 지시이론에 따르면 '괴델'은 '괴델이라고 이름붙여진 무언가'가 되는 셈이다. 

 

인과적 지시이론은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인과적 사슬을 가정한다. 필자는 괴델의 이름을 어느 책에서 들었다. 책의 저자는 미국의 수학자였는데, 아마 그는 스승으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은 아마 논문과 입소문으로 이름을 들었을 것이고, 발원지는 괴델일 것이다. 그리고 괴델은, 자신을 둘러싼 어느 커다란 아저씨와 아줌마가 자신을 '쿠르트 괴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괴델'이라는 단어는 괴델의 부모가 그를 '괴델'이라고 부르면서 의미를 획득하였으며, 인과적 사슬을 타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인과적 지시이론은 다음의 원리를 제시한다.

 

  1. 만약 a가 어느 대상 b를 n으로 명명하면, a는 단칭 용어 n을 사용하여 b를 지시한다.(명명의 원리)
  2. 만약 c가 a에게 듣고 대상 b를 n으로 부르면, c는 a가 n으로 지시하는 것을 n으로 지시한다.(승계의 원리)

 

인과적 지시이론은 무지로부터의 논변을 해결해준다. 무지로부터의 논변에 따르면 한정기술구 이론은 불충분한 이론이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잘 모르면 대상을 지시할수 없고, 실제로도 확실히 아는게 없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프레게 의미론을 따라가도 대상이 뭔지도 모르면 단칭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인과적 지시이론을 따르면 우리는 그냥 대상의 이름만 알면 된다. 어차피 이름이 무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결국 어딘가에서 내려왔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 이름을 사용하여 대상을 지시하면 된다. 내가 멍멍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멍멍이'하고 부르면 멍멍이가 쪼르르 달려올 것이다. 

 

고정지시어의 한계와 비판

고정지시어는 훌륭하게 대상을 지시하고, 현재 고유명사에 대한 의미론으로서는 주류이다. 그러나 고정지시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가령 '우산도'를 보자. 우산도는 원래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 및 인근 섬을 지칭하던 단어로, 당시에는 동해 지리와 울릉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인근 지역을 전부 우산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가 축적되었고,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는 우산도가 독도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중간에 인과적 연결이 끊긴 셈인데, 그렇다면 과연 우산도는 독도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울릉도도 의미하는가?

 

이에 크립키는 재명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반박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산도의 의미는 독도이다. 왜냐하면 이미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우산도'의 인과적 사슬이 끊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우산도는 안용복 사건 이후 조선인들이 '재명명'한 독도이다. 즉 우리가 따르는 인과적 사슬은 안용복 이후의 것이니 의미가 혼동될 일은 없다. 위의 사례는 재명명을 통해 훌륭히 해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가령 '아서왕'의 경우를 보자. 아서왕은 중세 영국에서 활약했다고 여겨지는 전설상의 왕으로, 그가 누구인지 아니 존재조차 했는지 모두 불명이다. 이때 우리가 인물 a가 아서왕이었음을 알아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아서왕'이 지칭하는 대상은 a이다. 그러나 우리는 a가 아서왕이 아닌 가능세계도 상상가능하다. 어쩌면 a가 아니라 a를 시종들던 b가 아서왕인 가능세계도 가능한지 모르다. 우리가 부르는 아서왕은 중세 영국의 영웅왕이기 때문에, 그가 a가 아닌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즉 아서왕은 고정지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크립키는 한발 물러선다. 크립키는 어떤 고유명사는 한정기술구일수도 있다고 본다. 아서왕은 한정기술구일수 있다. 잭 더 리퍼는 한정기술구로 여겨져왔다.(최근에 진범이 밝혀졌다) 어쩌면 신도 한정기술구일수 있는데, 이러한 논리로 러셀은 자신의 불가지론적 견해를 지지한다. 물론 이것이 크립키의 패배선언은 아니다. 대다수의 고유명사는 지시체가 명확하고, 이들은 고정지시어이다. 물론 한정기술구인 소수의 고유명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들고온 그것은 아니다.

 

쌍둥이 지구 논변[각주:1]

크립키가 고정지시어 개념을 발견하는 동안, 또다른 분석철학자 퍼트넘도 비슷한 개념을 발견하였다. 그가 제시한 개념은 자연종 명사로, 나중에 자연종 명사는 고정지시어의 하나임이 밝혀졌다. 퍼트넘의 자연종 명사 개념은 그의 쌍둥이 지구 논변에서 고안되었는데, 쌍둥이 지구 논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지구에서 물은 h2o이다. 우리는 이것을 '물'이라고 부른다. 이 물은 물의 특성(watery stuff)을 가지고 있는데, 즉 물은 차갑고 부드러우며 무색무취이다. 이때 물은 watery stuff인 x라는 한정기술구로 표현할수도 있고, 그 자체로 물인 고정지시어로 볼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속에서 물은 watery stuff이다.

 

그런데 우리가 평행지구를 발견했다고 하자. 루이스의 양상실재론이 참으로 밝혀지고, 과학자들이 마침내 다른 가능세계로 이동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미국에서 바로 옆의 가능세계의 지구에 우주선을 발사하였다. 이 지구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지구와 똑같다. 오직 한가지만 우리와 다른데, 이곳의 물은 h2o아 아니라 xyz라는 것이다. 이곳의 물도 차갑고 부드러우며 무색무취이지만, xyz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러한 가능세계는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지구와 평행지구를 볼때, 우리 지구인과 평행지구인은 모두 h2o와 xyz가 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h2o를 물이라고 생각하고, 평행지구인들은 xyz를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시체를 의미로 보는 러셀과 크립키의 이론을 따른다면, 각각이 말하는 '물'은 서로 다르다. 한쪽은 h2o고 다른 한쪽은 xyz이기 때문이다. 즉 지구인과 평행지구인들은 모두 자신이 물을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이 '물'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퍼트넘은 단어의 의미가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의미는 사고 밖에 있다는 의미 외재론을 제안한다.

 

한편 우리는 다른 문제에도 처한다. xyz는 h2o와 다르다. xyz는 물인가? 사실 이 부분은 문화에 따라 갈리는데, 보통 서양인은 아니라고 하고 동양인은 맞다고 한다. 이는 문화의 인지적 차이(문화와 인지)에 기반하는데, 언어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서양인은 물을 고정지시어로 보는 반면 동양인은 물을 한정기술구, 즉 watery stuff로 보기 때문이다. 퍼트넘은 서양인의 직관을 따라서 물이 고정지시어라고 주장했으며, 사실 우리가 소박한 의미론의 흐름을 계승한다면 물은 h2o가 맞다.(한 단어가 2개를 동시에 지시할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를 그것의 지시체로 한정해도 앞으로의 논의 전개에 문제될건 없다. 그리고 앞으로의 논의 전개란, 여기에서 도출되는 자연종 명사의 개념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퍼트넘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미가 반드시 그것의 지시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프레게가 했듯이 의미를 지시체가 아닌 그 무언가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프레게의 간접지시의미론이 크립키에 의해 무너졌음을 알고 있다. 사실 크립키도 의미 회의론처럼 의미에 대해 소박한 의미론을 벗어나는 주장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언어철학에서 다루는 의미는 소박한 의미론의 테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퍼트넘을 포함한 분석철학자들은 의미를 그것의 지시체로 정의하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할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크립키의 공격을 먼저 이겨내야 할것이다.

 

자연종 명사

자연종 명사는 여러 대상을 지칭하는 유형이자 고정지시어로,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를 그 존재 자체로 지시하게 만드는 필연적 조건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물은 푸름, 차가움, 일산화이수소, 부드러움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종으로서의 물은 h2o이다. 왜냐하면 푸르거나 차가운 대상은 물 이외에도 존재하는 반면에(또한 물도 따뜻할 수 있다) h2o인데 물이 아니거나 h2o가 아닌 물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실재가 자연종 명사는 아니지만(혼합물은 자연종이 아니다), 자연종 명사는 실제 자연에 존재하는 실재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보통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자연종 명사는 한정기술구로 기술할 수도 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자연종 명사를 '-한 대상'이나 '-를 만족하는 무언가'(지시 고정적 기술구라고 한다)로 흔히 정의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자연종 명사는 그렇게 정의될수 없다. 아닌 경우가 가능할수 있기 때문이다. 금을 '노란 금속'으로 정의한다면, 금이 붉은색(실제로 작은 크기에서는 붉은색이다)이거나 금속의 속성을 가지지 못하는 가능세계에서의 금을 제대로 지시하지 못한다. 오직 금을 금으로 만드는 그 무언가만이 정의가 될 수 있는데, 아마 '양성자 79개로 구성된 원소'라는 정의는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참이리라고 화학자들은 인정할 것이다. 양성자가 그보다 많거나 적은 원소는 그냥 금이 아닐 뿐이다. 이처럼 모든 가능세계에서 자연종 명사를 제대로 지시하는 조건을 본질이라고 부른다.

 

크립키와 퍼트넘에 따르면 고정지시어에 대한 본질적 진술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즉 '물'이라는 고정지시어가 있을때 '물은 일산화이수소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왜냐하면 물을 물로 만드는 본질이 일산화이수소이며, 일산화이수소가 아닌 물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일산화이수소가 아니면서 물과 완벽히 똑같은 특성을 가진 xyz를 상상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그것은 '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물'은 일산화이수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크립키와 퍼트넘은 자연종 명사도 개개인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고정지시어라고 제안하였다. 즉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도 나는 나이듯, 자연종 명사도 마찬가지로 하늘이 두쪽이 나더라도 동일한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본질의 개념은 분석철학의 역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논리실증주의가 도래한 이래, 사물의 본질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검증대상인 불확실한 명제만 있을뿐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이라는 개념은 있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립키와 퍼트넘은 사물의 필연적인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논증하였다. 비슷하게 몇백년전 로크는 사물의 본질을 진정한 본질(real essence)과 그것의 사례들을 탐지하기 위한 규칙인 명목적 본질(nominal essence)로 나누었는데, 경험주의자였던 그는 사물을 분류하는 규칙인 명목적 본질만 알수 있고 진정한 본질은 알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논리실증주의 시대에도 무시되고 지금도 무시되지만, 그가 말한 이원적인 본질 개념은 신기하게 크립키와 맞아떨어지는것 같았다. 하여튼 크립키의 본질 개념은 논리실증주의가 종결된 분석철학에 새로운 빛을 안겨주었고, 많은 분석철학자들을 형이상학으로 전향시켰다.

 

후험적이고 필연적인 참

크립키는 자연종 명사의 개념에 기반하여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참이 되는 두가지 종류의 필연적 참을 제시했다. 첫번째는 개념적 참이다. 개념적 참은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볼 수 있는 명제로, 가령 '세 면을 가진 도형은 삼각형이다.'라던가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다.'와 같은 명제가 개념적 참이다. 모든 개념적 참은 참이며, 이는 논리전개를 통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박은 데카르트와 같은 지독한 회의주의자나 논리에 무지한 종교인들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철학자들이 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고정지시어 개념을 통해 후험적이면서 필연적인 참의 존재를 제시한다. 이것이 크립키가 제시한 두번째 참인 자연적 참이다. 자연종 명사를 관찰하면 우리는 특이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자연종이 가지는 특성은 필연적 참이지만, 그것은 선험적으로 알 수 없다. 가령 물은 일산화이수소지만, 이는 술어논리에서 연역되지 않는다. 물이 일산화이수소라는 사실은 화학자들이 귀납적 연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연역적 결론에 비견되는 참이다. 즉 크립키는 어떤 참의 경우 후험적으로 알려지지만 필연적이라고 제안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만나봐야 하고, 어떤 자연종에 대해 알려면 이를 직접 연구해봐야 한다. 

 

후험적으로 알려지는 참이 필연적이라는 개념은 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연역적 참만 필연적이라고 여겼으며, 이것은 당연히 선험적으로 연역된다. 하지만 크립키는 그 연역논증을 통해 어떤 필연적인 참은 선험적으로 알 수 없고 후험적으로 알려진다고 주장했다. 이걸 잘만 활용하면 우리는 과학적 발견을 연역적으로 정당화하고, 귀납적 결론을 정당화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심리학자 스타노비치[각주:2]는 과학에서 연구되는 대상은 먼저 정의된 후에 탐구되지 않으며, 오히려 대상을 탐구하면서 대상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종 명사의 본질이 필연적 참이지만 선험적으로 간접지시되지 않으며, 후험적으로 밝혀져야만 한다고 얘기하는 크립키의 이론과 유사해 보인다.

 

250년전 칸트가 선험적인 인식틀로 후험적 발견들을 해석하려 한 이래 크립키는 가능세계를 통해 후험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의 토대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크립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이후의 철학계를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만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지표어의 이해

지표어(indexical)는 발화의 맥락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단어들을 이르는 말로, '나'나 '이것' 등이 지표어에 속한다. 러셀이 유일하게 인정했던 고유명사인 this와 that도 지표어이다. 지표어의 의미는 지표어가 발화되는 발화의 맥락에 의해 결정되며, 특히 손동작 등의 행동없이 의미가 결정되는 지표어를 순수 지표어(pure indexical)라 한다. 혹자는 지표어없이도 언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모호한 지표어를 언어철학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학자들은 지표어가 언어에 있어 본질적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러셀의미론의 경우 this와 that을 빼면 현실세계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해지며, 크립키 의미론에서도 '여기'를 통해 지칭된 무언가에 대한 탐구가 없으면 후험적 필연적 참도 불가능하다. 

 

크립키 의미론에서 지표어는 비고정지시어이다. 가령 '나는 전설이다.'에서 '나'는 이 말을 하는 필자를 지시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나는 전설이라고 말한다면, 그 '나'는 그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프레게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으로, 크립키는 프레게의 지표어 정의를 따르면 지표어를 사용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내가 말하는 '나'가 다르고 니가 말하는 '나'가 다른데, 대체 우리가 뭔수로 '나' 단어를 가지고 소통을 하나?

 

지표어에 대해서는 러셀 의미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크립키 의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왜냐하면 가능세계 의미론을 받아들이는 경우, 가능세계 또한 맥락으로 작용할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 문장을 보자.

 

나의 개는 푸들이다.

 

여기서 '나'의 의미는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말하면 이는 '필자의 개가 푸들이다.'라는 뜻이고, 거짓이다. 반면에 푸들을 키우는 a가 말했다면 문장의 의미는 'a의 개는 푸들이다.'이고 참이다. 여기에 가능세계를 첨가하면, 가능세계도 일종의 맥락으로 작용한다. 가령 '나'가 필자를 가리키지만, 그 필자가 푸들을 키우는 가능세계의 필자라면, 문장은 참이 된다. 반면에 a가 푸들을 키우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는 문장이 거짓이 된다. 

 

이처럼 가능세계는 화자 및 청자와 함께 지표어의 의미를 결정하는데 기여한다. 둘다 일종의 맥락이지만, 구분을 하기 위해 우리는 화자나 청자와 같은 현실 속에서의 발화의 맥락을 발화의 문맥(context of utterance)이라 하고, 발화가 일어나는 가능세계를 평가의 상황(circumstance of evaluation)이라 한다. 이러한 이해는 두가지를 이해하게 해주는데, 하나는 선험적 우연적 참의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차원주의이다. 선험적 우연적 참은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이 문장은 선험적으로 참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는 보통 '나'가 있는 곳이고, 따라서 '나'는 무조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를 가능세계 전체로 확장하면 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가능세계에서의 '나'는 '여기'에 있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우리 기준으로 '저기'에 있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는 '여기'인 한국에 있지만, 가능세계에서는 '저기'인 미국에 있을수도 있다. 물론 이는 연역적으로 참이지만 모든 가능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 가능세계에서만 성립하는 '우연적'인 참이다.

 

선험적 우연적 참의 의미를 크립키 의미론으로 이해할수 있다면, 후험적 필연적 참의 의미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이 이차원주의인데, 이차원주의는 크립키 의미론의 핵심으로 뽑힌다.

 

이차원주의(two-dimensionalism)

이차원주의는 후험적 필연적 참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고안된 이해의 틀이다. 우리는 앞에서 '물'은 항상 h2o를 지시하며 xyz는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이는 얼핏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물이 xyz인 세상을 상상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가능세계에서 물은 h2o가 아니다. 그렇다면 물이 h2o라는 명제는 필연적 참이 아니지 않은가? 어째서 우리는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h2o가 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차원주의는 말 그대로 2개의 차원을 정한다. 이 차원은 '물'을 일종의 지표어로 간주하고, 물의 의미를 정하는 맥락이다. 첫번째는 발화의 문맥으로, ​사람들이 말을 통해 고정지시하는 대상이다. 우리 세계에서 사람들은 '물'로 h2o를 고정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물'로 xyz를 고정지시하는 상황을 상상할수 있다. 사실 동양인들은 '물'을 watery stuff를 지시하는데 사용하니 그렇게 틀린 상황은 아니다. 두번째는 평가의 상황으로, 지시가 이루어지는 가능세계이다.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watery stuff는 h2o일수도, xyz일수도 있다. 이는 가능세계마다 다른데, 우리는 xyz의 경우 watery stuff라 할지라도 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의 도표가 나온다.

 

   평가상황1:watery stuff가 h2o  평가상황2:watery stuff는 xyz
 발화맥락1:물은 h2o를 지시 1번 세계:물은 h2o 2번 세계:물은 h2o 
 발화맥락2:물은 xyz를 지시 3번 세계:물은 xyz 4번 세계:물은 xyz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상황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는 4가지의 가능세계를 도출할수 있다. 1번 세계에서 물은 h2o이다. watery stuff도 h2o로, 우리도 h2o를 물이라 부른다. 2번세계에서 watery stuff는 xyz지만, 우리가 '물'로 고정지시하는 대상은 h2o이기 때문에 여전히 물은 h2o이다. 3번세계는 이와 달리 물이 xyz인데, 이는 우리가 xyz를 '물'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4번세계는 우리가 지시하는 것도 xyz이고 watery stuff도 xyz이니 물은 xyz이다.

 

이 표에서 물이 xyz가 되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우리가 '물'로 xyz를 고정지시하면 물은 xyz이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물을 '물'이라고 부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은 충분히 상상가능하다. 즉 물이 xyz인 가능세계는 충분히 존재하며, 3,4번 세계가 그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말하는 물은 항상 h2o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물을 h2o라고 부르는 1,2번 세계에서 물은 항상 h2o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세계에서 물은 필연적으로 h2o이고, 물론 이것은 우리가 후험적인 화학연구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1,3번 세계와 2,4번 세계를 통합해보자. 사실 발화의 맥락이 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건 아니다. 현실세계에는 '신'으로 야훼를 지시하는 사람과 '알라'를 지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폭탄을 던지고 있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총을 쏠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같은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을 xyz라 하는 사람에게 물은 모든 세계(평가상황1과 평가상황2)에서 xyz이고, 우리에게 물은 모든 세계에서 h2o이다. 그러나 발화맥락2를 따르는 관점에서 물은 xyz이며, 이러한 경우는 충분히 상상가능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은 모든 가능세계에서(즉 필연적으로) h2o지만, 동시에 물이 xyz인 경우도 상상가능함을 알수 있다.

 

한편 크립키를 이 틀을 통해 단어의 의미를 2가지로 나눈다. 1차 내포는 단어의 의미를 선험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물'을 watery stuff로 정의하면, 이는 선험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물'을 차가운 것으로 정의하면, 우리는 물이 차갑다는 결론을 이끌어낼수 있다. 왜냐하면 물의 정의가 차가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를 거부하고 2차 내포로 단어를 정의하는데, 2차 내포는 단어의 의미를 그것의 본질로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의 본질은 그 사람 자체이고, 자연종 명사의 본질은 자연종의 본질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후험적 참이기 때문에 우리가 탐구하기 전까진 알수 없다. 1차 내포는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상황이 일치할때 항상 참이고, 2차 내포는 특정 발화자의 시점을 채택할때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의미론적 외재주의, 그리고 크립키적 의미의 문제

쌍둥이 지구 논변은 자연종 명사뿐만 아니라 의미적 외재론도 도출해 내었다. 앞서 우리는 물이 h2o이며, h2o가 물의 본질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물이 h2o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평행지구 사람들은 물이 xyz라고 생각한다. 즉 이들의 '물'이 지시하는 대상은 우리의 '물'이 지시하는 대상과 다르다. 이때 우리는 프레게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의미에 대한 인식을 바꿀수 있는데, 프레게의 간접지시의미론은 이미 앞에서 신나게 얻어맞았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의미는 우리 마음속에 없고, 의미는 우리 마음 바깥에 있다. 이러한 입장을 의미론적 외재주의라고 한다.

 

의미론적 외재주의는 많은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사실은 고정지시어 이론이 가정하는 의미론도 문제를 낳는다. 우리는 앞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처럼 단칭 용어가 대상을 직접 지시할때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을 보았다. 크립키 의미론을 이것을 잘 해결하는지는 미지수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안이 3가지 있는데, 하나는 의미의 문제를 인지의 차원과 지시의 차원으로 나누는 것이다.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는 결국 인지적 가치의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니, 인지적 차원에서는 프레게 의미론과 러셀의 한정기술구가 적용되고 실제 지시의 차원에서는 크립키 의미론이 작동한다고 보면 이것은 합당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러셀의 한정기술구는 지시대상이 아니라 지시대상의 인지적 측면을 기술하는 셈이다.

 

다른 해결책은 아예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크립키는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을 통해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회의론을 주장했다. 아니면 의미를 언어철학에서 추방할 수도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인지적 가치와 관련된 문제를 언어철학이 아니라 인식론이나 심리철학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언어철학의 주류는 크립키 의미론이지만, 크립키 의미론을 어떻게 인지적 가치 문제와 조화시킬지는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크립키의 의미 회의론은 다른 의미로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크립키의 의미 회의론(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

크립키의 의미 회의론은, 크립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이다. 크립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읽고 그가 의미 회의론을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크립키가 주장한 의미 회의론 논증은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이라고 불린다. 비록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아주 단단히 오독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지만, 이 논증은 콰인의 의미 회의론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중요시되고 있다.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의미이론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경험적으로 가려낼 수 없다. 즉 '콰인이 +로 덧셈을 의미한다'와 같은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크립키(크립키 말로는 비트겐슈타인)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의미를 판별할 수 있는 사실이 포함된 영역을 모두 살펴보고, 그러한 영역이 없음을 밝힌다. 

 

이를 위해 다음을 가정하자. 과인은 어떤 사람인데, 그는 지금까지 57보다 작은 수만 덧셈을 해왔다. 그리고 바로 지금 57+68을 계산하고, 그 답이 125라고 주장한다. 이때 과인은 대체 어떻게 답이 125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단 과인은 68로 뭘 더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경험에서 배운건 아니다. 아마 과인이 답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덧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크립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과인이 쓴 +가 덧셈기호인가? 아니면 x+y에서 x와 y가 모두 57 이하면 덧셈을 하고, 이상이면 답을 5로 출력하게 하는 닷셈이라는 다른 연산을 나타내는 기호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과연 과인이 말한 +는 덧셈일까, 닷셈일까? 이를 판단하게 해줄 사실이 어떤게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먼저 답변은 +가 덧셈인지 닷셈인지 결정하는 사실이 어떤 종류의 사실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로크에 따르면 그 사실은 우리 마음 속의 사실이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그 사실은 마음 밖에 있다. 어느쪽이든, 답은 결정하는 사실이 어디에 있는 사실인지 말해야 한다. 또한 답변은 +를 사용하는 옳은 경우와 잘못된 경우에 대해 알려주어야 한다. +가 덧셈이라면 과인은 옳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닷셈이라면, 과인은 틀렸다. 과연 과인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그리고 과인의 의미이론을 만들려는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는지 답변은 답해야 한다.

 

가능한 답변들과 한계

먼저 관찰 가능한 사실로 이를 판별할 수 있는지 보자. 과인이 57 이상은 더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 사례를 보고 판단하는건 불가능하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건 어떨까? 과인은 지금까지 덧셈을 잘 해왔다. 정확히 말해서 과인은 +를 할때, x개의 돌(실제든 가상이든)과 y개의 돌을 준비해서 모두 합친 다음에 이들의 총 수를 세었다. 과인은 이러한 규칙을 내재화(룰팔로잉)했고, +가 말하는 것은 이 규칙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과인이 그런 규칙을 학습한 역사가 있는지 살펴보거나, 그러한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방법처럼 보인다. 다만 질문이 있다. 센다는게 무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세는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과인에게 센다는 것은 다른 의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인에게 '세다'는, 'x나 y보다 큰 돌들을 합칠 때는 5라고 말하는 규칙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규칙도 덧셈과 닷셈을 구분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우여곡절 끝에 과인의 '세다'의 의미를 알아내서, 'x개와 y개의 돌들을 하나씩 헤아리는 규칙'이라고 하자. 그런데 헤어라다는 무엇인가? 이렇게 논의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과인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는 방법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과인이 하는 행동들을 기술하는 그 언어 자체도, 다시 그 뜻이 무엇인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머릿속 내용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즉 관찰은 힘들지만, 과인의 정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서 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우리가 과인의 머릿속을 알 수 있다면, 그가 덧셈을 하는지 닷셈을 하는지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과인의 머리 속에서 '덧셈'이 올라온다면, 아까처럼 그 덧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태클이 들어올테니(과인의 '덧셈'은 닷셈인지도 모른다) 이건 무시하자. 그보다 과인이 +를 할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은, 심상은 이미지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이 아니라 부여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이것도 힘들다. 사고내용도 안되고 심상도 안되니, 아마 정신을 뒤져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콰인식 해결책은 어떨까? 앞서 과인은 57+68이 125라고 말했다. 즉 '57+68'이라는 원인이 '125'라는 결과를 산출한 셈이다. 만약 닷셈이 맞다면 과인은 125가 아니라 5를 산출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콰인이 그랬듯이 덧셈을 덧셈-상태와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덧셈을 x와 y가 입력되었을때 x+y가 산출되는 법칙이자 언어성향이라고 하면, 적어도 과인은 우리가 아는 덧셈과 같은 언어성향을 가진 연산을 +로 했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여기에도 비판적이다. 먼저 콰인도 말했지만, 과인은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우리도 엄청 큰 수의 계산은 가끔씩 실패한다. 그렇다면 57+68의 결과로 나온 125는, 본래 성향이 아니라 과인이 잘못 계산한 것 아닐까? 실수를 지적하면 수정하지 않을까?(말이 통한다면 말이다) 만약 125가 실수로 나온 답이라면, 우리는 +를 덧셈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를 덧셈으로 이해하고 대화를 해 버리면, 80+80=160이라고 했다가 과인이 한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어성향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어느 면에서 억울하다. 사람들은 충분히 큰 수의 덧셈에서는 오류를 잘 범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언어성향(충분히 큰 수의 덧셈이면 무조건 답이 아닌 숫자를 산출한다)을 고려하여, 인간들의 덧셈은 충분히 큰 수를 더할때 무작위적인 오답을 산출하는 연산이라고 정의하면 이것이 옳은 정의인가?

 

우리는 과거사례와 행동관찰, 심상분석, 사고분석, 언어성향 연구 등을 통해 우리가 과인의 +가 덧셈인지 닷셈인지 알 방법이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없었다. 지금까지 덧셈과 닷셈이 구분된 방법은 없고, 행동역사를 관찰하기에는 그 이전에 무슨 규칙을 학습했는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다. 생각도 마찬가지고, 심상은 의미가 없고, 언어성향은 명백히 틀린 답(그리고 본인도 오답임을 아는 답)을 정답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며,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이러한 의미 회의론을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1. Putnam, H. (1974). Meaning and reference. The journal of philosophy, 70(19), 699-711. [본문으로]
  2. Stanovich.심리학의 오해.신현정 역,혜안,200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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