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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 총론

과학주의자 2023. 2. 1. 16:25

인지과학은 심리학과 뇌과학, 그리고 철학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즉 인지과학자 중에는 철학자가 끼어 있다. 인지과학 이전부터 마음을 연구해왔던 이들은 비록 과학이 발전하면서 위치가 약해졌지만, 분석철학 특유의 논리적이고 엄밀한 방법론을 통해 객관성을 인정받아 인지과학에 당당히 참여하게 되었다. 이중 심리철학은 경험의 주체, 의식, 행위자, 합리성 등 마음에 대한 개념을 분석철학적으로 분석하고, 물리적 세계에서 마음의 존재론이나 마음과 몸의 관계 등에 대해 형이상학적 틀을 제공하는 학문이다.

 

상당히 오랜 기간 심리에 대한 철학은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자 개개인의 공상과 통찰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심리철학은 발달한 인지과학에서 밝혀낸 마음에 관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마음의 본성에 대해 보다 엄밀한 논의가 가능해졌다.[각주:1] 심리철학은 과학적 발견에 기반하여 엄밀하고 객관적인 논증을 통해 주장을 전개하고 검증하기 때문에 분석철학이 그렇듯 다른 철학에 비해 객관성이 보장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김재권이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스탠포드 철학사전을 기본으로 한다.

 

심리철학의 패러다임

https://tsi18708.tistory.com/226

심리철학에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존재한다. 이중 어떤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어떤 것은 비주류 입장으로 남아있다. 현재 심리철학의 주류 패러다임은 기능주의로, 기능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분파가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심리철학의 역사를 빚어온 여러 논증들을 이해하는 것은 심리철학과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심신문제

심신문제는 마음과 신체가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고대부터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밀접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다. 왜냐하면 절대다수의 인간은 정신을 통해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데, 정신은 신체와 별개의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뇌과학이 탄생한 이후 정신이 신체, 특히 뇌의 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신과 뇌가 가지는 아주 특수한 관계를 설명할 형이상학적 틀이 요구되었다.

 

과거에는 정신이 신체와 분리된 실체라고 여겨졌지만, 이는 후술하듯이 반박되었다. 현대에 심신문제에 대한 입장은 총 3가지가 있는데, 이중 환원적 물리주의와 부수현상론이 주류이다.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은 마음이 신체활동의 부산물이라고 본다. 즉 우리가 모래사장을 걸으면 발자국이 남듯이 마음은 뇌의 활동이 남긴 부산물이라고 본다. 창발론(Emergentism)은 이에 반대하여 마음이 별개의 실체라고 보는데, 이들은 비록 마음이 신체에 종속되지만 신체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완전히 마음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이들이 예로 드는 것은 카오스에서 나타나는 창발로, 이들은 무질서계에서 질서가 창발되듯이 뇌의 활동이 일정수준 이상 복잡성이 증가하여 창발된게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존 설도 바퀴의 예를 드는데, 바퀴는 분자의 결합으로 이뤄졌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바퀴의 물적 특성이 구성 분자의 운동에도 영향을 준다.[각주:2]  환원적 물리주의(Psychophysical Identity theory, 심물동일론)는 부수현상론과 궤를 같이하되, 더 급진적이다. 환원적 물리주의는 마음이 신체활동과 동일하다고 본다. 즉 우리의 마음은 창발된 실체도 아니고 부수현상도 아니며, 그냥 뇌의 활동 그 자체이다.

 

마음의 구성요소

마음을 구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정서-인지-행동으로 마음을 구분하며, 신경과학에는 그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중처리과정 이론은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한다. 심리철학자들은 마음을 3가지 요소로 분류하는데, 이 셋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요소에 일정 부분 걸쳐있는 심리적 특성도 존재한다.

 

첫번째 요소는 경험적 상태(experiental state)이다. 경험적 상태는 마음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로, 의식연구에서 말하는 의식과 매우 비슷하다. 심리철학자들은 의식의 핵심적인 요소를 감각질(qualia)이라 부르는데, 감각질(phenomenal consciousness, 현상적 의식)이란 어떤 것을 느끼거나 떠오르는 상태를 말한다. 감각질은 매우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되기 힘들며, 외부에서 온 무언가를 경험하는 상태로 '지향'하는 상태는 아니다. 경험적 상태는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심리학적 감각을 일컫는 신체 감각(bodily sensation), 지각을 일컫는 지각 경험(perceptual experience), 특별한 자극이나 상태와 관련없이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상태인 느낌(mood, feeling)으로 나눌 수 있다. 고통, 안락함, 불안, 특정 지각/감각경험 등이 경험적 상태에 속한다.

 

표상적 상태(represential state)는 어떤 대상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 상태로, 특정 대상에 대한 태도들을 말한다. 표상적 상태는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존재를 표상하고 이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데, 가령 '저 사람은 못생겼다.'라는 생각은 '저 사람'이라는 대상에 대해 '못생겼다'라는 태도를 형성하고 있다. 비슷하게 '국물이 짜다.'는 느낌은 '국물'에 대해 '짜다'는 태도를 형성하고 있다. 주로 어떤 명제를 향한 태도이기 때문에 명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고도 부르며, 어떤 대상을 심적 내용(mental content)으로 다루는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진다. 생각, 관념 등이 표상적 상태에 속하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서도 무언가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에 정서는 경험적 요소가 강한 표상적 상태라고 여겨진다.

 

행위(action)는 외부대상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태로, 마음의 3요소 중 가장 복잡한 요소이다. 왜 행위가 마음에 속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행위는 마음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팔을 올렸을때 실제 팔을 올린 것 말고 무엇이 남는가'라고 질문했는데, 만약 행위가 마음의 요소가 아니라면 우리가 우리의 팔을 들어올리는 행위를 누군가 내 팔을 잡아 올린 것과 구분하여 마음과 연관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팔을 들어올릴때는 '내'가 올렸다고 말하며 특별히 나의 마음과 연결시킨다. 즉 행위는 외부에 대한 간섭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mental element이며, 표상적 상태 중 의지(volition)와 관련된 요소들이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의지가 행위의 필연적인 선행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행동은 행위에 속하며, 결정, 계획 등 의지와 관련된 심리적 특성들은 행위의 요소를 매우 강하게 가진 표상적 상태이다.

 

자가접근성(accessibility), 즉 마음의 상태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경험적 요소가 제일 강하다. 사실 경험적 상태는 사유보다는 느낌의 형태로 경험된다. 표상적 상태는 자가접근성이 보다 약하며, 외부세계와 연관된 행위는 성공여부가 외부세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행위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다. 반면 언어를 통한 표현가능성(expressibility)은 행위에서 현저하며, 표상적 상태에서도 현저하다.(다만 절차기억에 기반하여 행해지는 행위는 표현가능성이 낮다) 또한 지향성도 표상적 상태와 행위에서는 현저하게 나타난다. 반면 이 두 특성은 경험적 상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즉 경험적 상태는 특정 대상을 지향하지도 않고 언어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마음의 표지

심리철학은 마음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마음을 정의하기는 쉽다. 마음은 신경작용의 총체이다.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마음은 간단하다. 마음은 자율적인 정보처리 알고리즘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너무 단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에 답을 해주지 않는다. 개미에게 마음은 있는가? 알파고는 마음이 있는가? 극단적으로 중증 조현병 환자는 마음이 있는가? 대체 마음의 정의가 무엇인가?

 

마음의 표지는 마음과 비심리적 존재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즉 마음의 표지를 가진 것들은 모두 마음이고, 마음의 표지가 없으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심리철학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마음의 표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수십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표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의 표지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마음과 마음이 아닌 것 사이에는 매우 모호한 경계가 자리하는지도 모른다. 현재 존재하는 마음의 표지 후보들은 모두 인식론적 단서와 관련된 인식론적 기준(epistemological criteria)인데, 비인식론적 기준이었던 지향성은 경험적 상태를 포함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작에 폐기되었다.

 

마음의 표지 후보로 거론된 대표적인 표지는 직접적 앎(direct knowledge)이다. 직접적 앎은 한 존재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추가적인 추론 없이 존재의 상태를 바로 알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지는 바로 알 수 있지만, 앞에 있는 동물이 아픔을 느끼는지는 여러 가지 고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의 상태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직접적 앎이 마음의 표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재권은 우리가 빨간색을 보고 바로 빨간색으로 알듯이, 어떤 물리적 상태는 심리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반박한다. 반면에 자신의 역동과 같은 주제는 심리적 상태임에도 추가적인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두번째 후보는 사밀성(person privilege, privacy)이다. 사밀성은 상태를 직접적이고 주체적으로 느끼는 것으로, 우리는 오직 마음에서만 사밀성을 경험한다. 다른 물리적 상태는 객체로 지각되고 3인칭으로 묘사되지만, 마음의 상태는 매우 직접적이고 직감적인(소위 경험적인) 상태로 경험되고 1인칭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인식의 비대칭성이 마음의 표지라고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는데, 이에 김재권은 자기수용감각(propriception)을 반례로 든다. 자기수용감각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감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통합된 느낌이다. 그러나 자기수용감각이 사밀성을 가지는 감각이지만 그 내용인 손이나 발의 위치는 엄밀히 따지면 물리적 상태이다. 손과 발의 '위치'가 사밀성을 가진다면, 위치감지도 마음에 해당하는가?(이제 GPS에게 마음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마지막 후보는 인식적 투명성(epistemic transparency)이다. 인식적 투명성은 오류불가성의 세련된 변형이다. 오류불가성은 데카르트가 마음의 표지로 주장한 후보로, 데카르트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지식은 물리적 상태에 대한 지식과 달리 확실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인지과학에 정통한 사람은 알겠지만 마음의 상태에 대한 앎은 매우 불확실하고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인식적 투명성은 이보다 더 현실적인데, 마음의 인식적 투명성은 마음의 상태가 그 존재에 대해서는 확실성을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인식적 투명성을 가진다는 말은, 마음 속에 화, 불안, 생각과 같은 존재가 있을때, 그 세부적 내용에 대해서는 틀릴지라도 물리적 상태와 달리 그것의 존재 자체는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블랙홀이 있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지만 자신의 화가 났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담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자신의 실제 심리상태가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일은 매우 빈번하며, 사실 사람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정서와 인지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실상 우리의 마음 대부분은 인식적으로 불투명하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김재권이 있다.

 

 

1.수반 문제(supervenience)

현대 심리철학자들(과 분석철학자들)은 물리주의를 기본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분석철학자들과 현대 형이상학자들은 이 세상에 모든 존재가 물리학적 설명(또는 연역적 설명) 대상에 포함된다는데 동의한다.(심지어 신을 인정하는 학자들도 신이 물리적 존재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철학자들도 마음이 물리적 존재이며,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 정보 그 이상이 아니다. 이럴 경우 철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과연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정신이 물리적인 존재 이상이 아니라고 말할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정신이 물리적 대상을 통해 전적으로 실현된다는 명제를 어떻게 논리적 언어로 정식화할수 있을까? 마음은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정의하는 문제는 많은 심리철학자들의 고민거리이다. 수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수반은 김재권이 도입한 개념으로, 어떤 속성이 어떤 존재를 통해 실현될때 이를 그 속성이 존재에 수반한다고 표현한다. 수반은 원래 미학에서 물질인 작품이 어떻게 미적 속성을 실현하는지 정의하기 위해 도입되었으며, 이후 윤리학과 심리철학에서도 사용되었다. 수반을 심리철학에 처음 도입한 김재권은 수반을 약수반, 강수반, 총체적 수반의 3가지로 정의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약수반으로 정의되는 수반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물리적 대상에 수반한다고 할때, 이는 물리적 속성이 동일한 두 존재가 심적 속성도 동일한 가능세계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가능세계가 바로 우리 현실세계이다. 즉 약수반은 적어도 우리 세상에선 물리적으로 동일하면 마음도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x∀F∈A[Fx → ∃G∈B(Gx & ∀y(Gy → Fy))]

 

강수반은 수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음이 물리적 대상에 수반한다는 말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모든 정신적 속성에 대응하는 물리적 속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강수반이 약수반과 다른 점은 약수반은 마음이 물리적 대상과 연결되지 않는 가능세계를 허용하는데 반해, 강수반에서는 마음이 반드시 물리적 대상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수반은 좀더 '강'하다. 이는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x∀F∈A[Fx → ∃G∈B(Gx & □∀y(Gy → Fy))]

 

총체적 수반은 수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음이 물리적 대상에 수반한다는 말은, 어떤 두 세계(보통 가능세계)가 물리적 속성에서 완전히 일치할때 정신적 속성도 일치한다는 말이다. 총체적 수반은 아래에서 다룰 복제물 문제를 잘 해결하기 때문에 가장 옳은 수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는 故김재권이 있다.

 

복제물 문제

복제물 문제는 수반 문제를 정의하면서 발생한 문제이다. 복제물 문제는, 어떤 물체의 물리적 속성을 완전히 모방한 복제물이 존재할때, 복제물이 원본의 심적 속성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일반적인 과학의 시각으로 보면 이는 질문할 가치도 없는 문제지만, 이를 각 물체에 한정하여 정의할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복제물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알아야할 점이 있다. 어떤 물체의 복제물은 원본의 모든 속성을 모방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물체는 페르미온이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즉 충무로의 이순신 동상의 복제물을 만들 경우 이 복제물은 충무로에 없거나 최소한 충무로의 원본과는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 두 물체는 위치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원본을 만들고 다음에 복제물을 만들면 둘이 가지는 시간적 속성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이런 경우에 둘이 복제물이 아니라고 할 경우, 복제물을 정의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복제물을 정의할때 언급되는 속성을 한정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루이스는 복제물에서 복제되는 속성을 자연종 속성에 한정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복제물에서 복제되는 속성은 그 원본을 원본이게 만드는, 필연적이며 후험적인 자연적 속성(자연종 속성)이다. 이렇게 복제물이 복제하는 속성을 자연적 속성으로 한정하면서 우리는 복제물의 존재를 가능케하고 과학적으로 복제물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복제물 문제를 심리철학으로 가져올때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심적 속성이 외부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표상적 상태 일부는 외부환경이 존재해야 성립하는데, 가령 심리철학에서 기억은 개인이 가진 기억과 이 기억이 발생한 시공간적 배경이 존재해야 성립한다. 그러나 기억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복제물은 기억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복제물은 원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것을 기억한다고 말하고, 원분만큼이나 생생하게 이를 회상할 것이다. 그러나 복제물은 실제 그 기억이 만들어진 시공간적 위치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기억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제물은 심적 속성을 복제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심적 속성이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고 하거나, 심적 속성이 물리적 존재에 수반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직관과 반하기 때문에 후자를 수용해야 할 듯이 보인다.

 

이 문제는 약수반과 강수반에 대해서는 타격이 된다. 왜냐하면 위의 문제에 따르면 물리적 속성을 복제한 두 물체도 심적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체적 수반을 도입하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총체적 수반에서 다루는 단위는 세계이고, 이 세계는 기억이 발생한 시공간적 위치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복제물 문제를 총체적 수반의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 속성이 동일한 두 세계는 당연히 기억이 발생하는 시공간적 위치도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세계에서 사람이 가진 기억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총체적 수반이 복제물 문제를 자 해결하기 때문에, 총체적 수반은 심리철학에서의 물리주의를 정의하는 주된 방법이었다.

 

수반의 문제

수반은 최근까지 심리철학에서 물리주의를 정식화하는 방법이었으나, 2010년대 이후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좌초하게 되었다. 수반이 가지는 문제는 논증에 신을 도입하면서 제기되었는데, 여기서 신은 서양의 신이다. 지금까지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변증론적 분석철학자들은 연역적인 방법으로 신을 옹호하려고 하는데, 이들에 따르면 신은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존재로서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한다. 아직 이들의 논증 중 성공한 것은 없지만, 이를 도입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극렬 무신론자는 다른 고정지시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가능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모두 가능하다. 이런 경우 우리는 신이 리처드 도킨스에게 수반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는 참인 말로, 왜냐하면 리처드 도킨스적 속성(도킨스가 실존한다는 말이다)에서 동일한 모든 가능세계는 신적 속성(신이 있다는 말이다)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수용할 경우 우리는 신이 도킨스에게 의존한다는, 도킨스가 존재하지 않으면 신이 존재할 수 없으며 리처드 도킨스를 통해 신을 설명할 수 있다는 괴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는 물론 심리철학자들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을 논증하는 어떠한 논증도 실패했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논증을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논리적 명제들은 마찬가지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수학적 정리가 이재현에 수반한다는 결론도 참이다.(이재현 본인은 좋아할 듯 하다) 비슷하게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를 원소로 가지는 집합에 대해서 수반하며, 마음이 절대정신에 수반한다는 결론도 참이다. 그리고 절대정신은 완전한 형태의 순수정신이다. 즉 우리가 수반 개념을 도입할 경우, 물리주의 전제를 기반으로 비물리적인 순수정신이 존재한다는 모순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절대정신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수반 정의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수반 개념은 빠르게 퇴출되었고, 수반 개념의 제안자인 김재권조차 수반을 '속성 공변 패턴에 관한 현상적 관계'로 격하하게 되었다. 현재 심리철학자들은 근거부여(grounding)를 통해 물리주의를 이해하는데, 이는 마음을 정의하는 자연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더 좋은 정의가 나왔기 때문에 수반 개념은 왕좌에서 물러났지만, 완전히 쓸모가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반 개념이 성립한다고 물리주의를 충족하진 않지만, 수반 개념을 충족하지 못하면 물리주의도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물리적 대상에 수반해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충분조건이다. 

 

 

2.내용 문제(지향성, 내용 이론, 심적 의미론)

앞에서 보았듯이 어떤 심적 상태는 외부와 관련된다. 표상적 상태는 존재하려면 그것이 결부되는 외부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어떤 대상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심적 상태를 지향적 상태라 부르며, 지향적 상태는 '만족조건을 가지는 상태'로 정의된다. 만족조건이란 어떤 a가 대상 b를 묘사할때 a가 b를 잘 묘사했는지 판단하는 기준인데, 즉 만족조건을 가진다는 말은 대상을 잘 묘사할수도, 잘못 묘사할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향적 상태는 대개 명제 태도이며, 마음이 어떻게 이러한 명제 태도를 가지는지 설명하는 이론이 심적 의미론(psychosemantics, 내용 이론)이다. 심적 의미론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지향적 상태, 즉 내용을 가지는지 탐구하며, 다른 학문과 같이 이를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한다. CTM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표상(지향적 상태)이 내부로 주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심적 의미론은 CTM은 물론 연결주의의 성립에 중요하다.

 

좋은 내용 이론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명제 태도를 가지는지 잘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에 대해 심리철학자들은 좋은 이론을 내놓지 못하였다. 

 

유사성 이론

유사성 이론은 내용 문제를 설명하는 고전적인 가설이다. 유사성 이론에서는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과 닮았기 때문에 대상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가지는 어떤 표상을 개 표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모사하는 내용이 실제 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개 표상이 실제 개와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있게 내가 개를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모든 실체가 서로 약간씩은 닮은 점이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유사성 이론에서는 닮아야 할 속성을 외적 모습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외적 모습을 닮아야 할 속성으로 정의하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가령 숫자 5의 표상은 5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 5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표상도 사랑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처음으로 인터넷에 야동을 올린 사람의 표상은 실제 대상을 볼 수 있지만, 그 표상이 실제 대상과 닮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한 그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고 그의 얼굴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의 표상도 비슷한 문제에 시달린다. 우리가 개의 표상을 가지고 있을때, 그 표상이 묘사하는 모습은 치와와를 닮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수요일 오후에 아파트 근처를 산책하는 이름모를 애완견이나, 주인을 찾아 3만리를 떠돌았다는 진돗개의 모습을 닮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내가 생각하는게 개인가, 치와와인가, 이웃집 애완견인가, 설화속 진돗개인가? 이런 문제로 인해 유사성 이론은 폐기되었다.

 

인과 이론

인과 이론(지시판 이론)은 개가 개 표상의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개 표상이 개라는 실제적인 존재에 의해 발생하고, 개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개 표상이 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일반화하면 어떤 표상이 x의 존재에 의하 발생하고, x 이외의 존재에 의해 발생하지 않을때 표상이 x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샤논은 이를 정보 의미론으로 표현했는데, 정보 의미론에서는 상태 a가 상태 b에 의해 발생하고 다른 요인으로 발생하지 않을때 상태 a가 상태 b의 정보를 전달한다고 말한다. CTM에 따르면 입력되는 정보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인과 이론은 CTM과도 관련되어 있다.

 

인과 이론에 대한 한가지 반론은 공상의 존재이다. 우리는 직접 개를 보지 않고도 개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개가 아니라 관련된 자극(강형욱처럼)을 봐도 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케르베로스를 떠올릴 수도 있는데, 케르베로스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케르베로스 표상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인과 이론은 간접적 인과적 연결을 통해 이를 해결한다. 즉 강형욱은 개와 관련된 사람이기 때문에 강형욱->강형욱 표상->개 표상의 과정을 거쳐서 개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케르베로스같은 상상의 동물은 일종의 복합 관념으로, 일반적인 개의 모습+3개의 머리+여러 개의 꼬리가 결합된 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케르베로스를 떠올릴때 실제로 떠올리는 것은 가상적인 케르베로스가 아니라 실재하는 구성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인과고리에 개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러한 예들은 인과 이론을 잘 반박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인과 이론도 한계를 가진다. 먼저 유사성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과 이론은 2 표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유형을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2를 떠올리려면 2를 가지는 모든 구성요소를 떠올려야 하는데 그 수가 무한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인과 이론은 깊이 문제를 가진다. 가령 우리가 개를 볼때, 개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은 개인가, 개 모양의 시각자극인가, 개의 한쪽 면인가? 우리가 엄밀한 태도를 가진다면 개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은 개 모양의 시각자극 한 면이라고 해야 하지만, 이는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아 보인다. 비슷하게 넓이 문제는 표상이 대상의 일부만 대표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가령 우리가 개를 볼때 실제로 보는 것은 개의 한쪽 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개 표상이 지향하는 것은 개의 앞쪽 면인가? 아니면 뒷쪽 면인가? 필자는 넓이 문제가 깊이 문제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과 이론이 가지는 선접(disjunction) 문제는, 표상이 발화하는 과정에서 내재된 문제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개를 보면 개를 떠올리지만, 간혹 다른 동물을 보고도 개를 떠올릴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어떤 그림자를 개의 그림자로 착각할 수 있고, 늑대를 개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늑대를 보고 개라고 잘못 인식한 경우, 개 표상은 개를 지향하는가, 늑대를 지향하는가? 어느쪽도 개와 늑대를 개로 인식하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합당한 설명은 개 표상이 개와 늑대를 동시에 지향한다는 것인데, 이 설명은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아 보인다.(개 표상은 개과 표상과 분명히 다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인과 이론도 주류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포더 이론

포더 이론은 말 그대로 포더가 제안한 이론으로, 정확히는 선접 문제를 해결하여 인과 이론을 보완하는 설명이다. 포더는 선접 문제에 의존 개념을 도입하여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가령 우리가 개를 늑대로 착각하는 경우에, 개와 개 표상에는 인과적 연관이 있지만, 늑대와 개 표상에는 직접적인 인과적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개를 모른다면 늑대를 개로 착각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늑대-개 표상의 관계는 개-개 표상이라는 인과적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전자는 후자에 의존한다. 이를 바탕으로 포더는 대상과 표상의 관계가 다른 인과적 연관에 의존하지 않을때 표상이 대상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표상 x가 대상 y를 지향한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 x와 y에 법칙적 관계(인과적 연관)가 존재한다.
  2. x와 -y의 법칙적 관계가 (1)의 법칙적 관계에 의존한다.
 

여기서 포더는 y에 가상의 속성도 포함한다. 즉 y가 실제세계에 존재하지 않아도 위 법칙은 성립한다. 가령 x에 용 표상을, y에 용을 넣어보자. 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가능세계에는 용이 존재한다. 즉 적어도 하나 이상의 가능세계에서는 용이 존재하고 이 용은 용 표상과 인과적 연관이 존재한다. 이런 논증을 통해 포더는 가상의 존재가 야기하는 문제도 잘 해결했다.

 

포더 이론은 실제로 선접 문제를 잘 해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과 이론이 증명되는건 아니다. 왜냐하면 깊이 문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를 볼때 개 표상을 떠오르게 하는건 정확히 무엇인가? 사실 엄밀히 말해서 개 표상의 원인은 망막에 비친 개의 상이다. 즉 우리가 엄밀한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개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이 개가 아니라 개 모양의 망막에 비친 상이라고 해야 한다. 오히려 개-개 표상 관계는 개모양 상-개 표상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후자를 간접적 인과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포더가 있다. 포더는 CTM의 연구자이자 비판자이다.

 

필자는 포더 이론이 부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위의 결론이 직관에는 맞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참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개처럼 짖고 개처럼 생긴 홀로그램을 가상현실에서 본다면, 우리가 이 개를 실제 개와 구분할 수 있는가? 결국 후술할 좁은 내용의 관점에서 보면, 개 홀로그램은 개와 마찬가지로 개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이다. 즉 표상의 범위를 좁은 내용으로 한정한다면, 포더 이론이 지향성을 잘 설명하는 듯이 보인다.

 

목적론적 이론

목적론적 이론은 진화론적 틀을 사용하여 선접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이다. 목적론적 이론에서는, 우리가 개 표상을 머리에 담도록 진화한 목적이 개를 잘 인식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 표상이 개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즉 개 표상은 우리가 개를 인지하고 이와 관련하여 정보처리를 하기 위한 기제이기 때문에, 개 표상은 그 목적인 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어떤 생물학적 기제를 진화적 이점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진화생물학에서 가져왔다.

 

목적론적 이론에서는 정상조건을 강조하는데, 정상조건은 기능이 본래의 생물학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다. 가령 매운맛은 원래 독극물을 피하기 위해 진화한 기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운맛 기제의 목적은 먹은 음식이 실제로 독극물일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비자연적인 상황, 예를 들어 얼큰한 매운탕을 들이키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 여기서 보듯이 어떤 기능이 제 목적을 달성하려면 기능이 작동할 것이 상정된 정상조건이 갖춰져야 하며, 정상조건에서 기능이 작동하는 바를 통해 기능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에 대한 생각도, 그 생각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정상조건에서 무엇을 지향하는지 봐야 실제로 지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늑대를 개로 착각하는 상황은 정상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예에서 제거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 표상이 개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론은 일견 선접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들이 항상 주의하는 사항은 생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기능은 동시에 2가지 이상의 목적을 실현하는 기제일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표상은 정상조건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약 어떤 곰이 시베리아 벌판을 떠돌고 있다면, 그 곰에게 개 표상은 늑대를 의미하든 개를 의미하든 중요하지 않다. 모두 자신의 사냥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전방에서 기관총을 잡고 있는 사수는 인종 표상이 의미없을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달려오는 모든게 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표상이 수행하는 목적이 상황마다 다를수도 있고, 개체마다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개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주장은 역시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밀리컨이 있다.

 

기능적 역할 이론

기능적 역할 이론은 기능주의에서 파생된 가설이다. 기능적 역할 이론에서는, 개 표상이 가지는 표상간 연결고리가 우리가 개를 보았을때 활성화되기 때문에 개 표상이 개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개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개는 짖는다'는 문장의 경우 개는 짖는다->짖으면 시끄럽다->시끄러우면 민폐다->개를 키우면 짖는다->개 키우는건 민폐다 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때 1번 문장은 2,4로 이어지고, 2는 3으로 이어지며, 3,4는 5로 이어진다. 이때 이 연결망은 5개의 M이 연결된 T문장으로 볼 수 있고, T문장의 첫번째 M에 개 표상을 대입하면 개 표상을 램지-루이스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즉 기능적 역할 이론에서는 어떤 대상이 특정한 M이 관련된 연결망을 활성화 시킬때 M이 그 대상을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중간 문장들도 M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에 있는 다섯문장 중 어느것도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연결망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에서 심적 상태는 항상 전체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중간 문장을 고정한채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우리는 개를 지향하지 않지만 개 표상인 무수한 사례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저 연결망에 대해, 연결망의 형태가 아니라 개 표상의 특성이 연결망을 구성하는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만약 개가 짖지 않는 동물이었다면, 저 연결망은 1번부터 깨졌을 것이다.

 

게다가 각 M이 저렇게 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현대심리학적 관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고, 대상에 대한 인식하는 바가 달라져도 표상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우리의 귀여운 뽀삐 표상이 있을때, 우리는 '뽀삐는 짖는다.'라는 연결고리를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뽀삐가 성대수술을 받는다면 이 연결망은 무력화될 것이다. 그러나 연결망이 깨졌다고 뽀삐 표상이 지향하는 대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기능주의는 이 분야에서만큼은 실패했다.

 

좁은 내용과 넓은 내용

앞서 보았듯이 아직 잘 만들어진 내용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서, 학자들은 좁은 내용의 개념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좁은 내용이란 적용대상이 우리의 머릿속에 한정되는 내용을 말한다. 가령 우리 지구와 거의 같은 평행지구를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여기 지구에 김정은이 있듯이 평행지구에도 김정은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구와 평행지구의 차이점이 있는데, 평행지구의 대포동 미사일은 크로노슘으로 되어 있다. 크로노슘은 플루토늄과 핵화학적으로 똑같이 작용하지만 엄연히 원자구조가 다른 물질로, 평행지구 사람들은 크로노슘이 플루토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종 명사를 잘 적용한다면, 크로노슘은 엄연히 플루토늄과 다른 물질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 지구의 김정은 생각하는 핵폭탄과 평행지구의 김정은이 생각하는 핵폭탄이 같은가? 그들 입장에서만 보면 핵폭탄은 같다. 김정은이 아는 핵폭탄은 플루토늄으로 되어있고, 평행지구의 김정은이 아는 평행 핵폭탄도 자기가 알기로는 플루토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지향하는 대상까지 포함하면, 둘의 믿음은 다르다. 김정은의 핵폭탄 표상이 지시하는 대상은 플루토늄인 반면, 평행 김정은의 핵폭탄 표상이 지시하는 대상은 크로노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향내용이 다르다고 해서 둘의 믿음이 다르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바로 여기서 넓은 내용과 좁은 내용이 갈라진다. 넓은 내용은 개인의 내적 표상과 그 표상이 실제 지향하는 대상을 모두 포함한다. 반면에 좁은 내용은 개인의 내적 표상과 그 표상이 어떤 대상을 지향하려고 하는 지 여부만 포함한다. 넓은 내용은 그 내용을 갖는 주체 외부의 세계에 의해 결정되고, 좁은 내용은 그 내용을 갖는 주체 내부의 세계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상은 넓은 내용으로 보이지만(내 눈앞이 개가 실제 개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적다), 사실 우리의 표상은 좁은 내용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왜냐하면 주관적 현실에서 보이듯이,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는 외부현실보다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넓은 내용을 받아들일 경우 적어도 의미에 대해서는 후술할 부수현상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ctm을 비롯한 계산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정확히 의미를 처리하는게 아니고, 의미를 담고 있는 구문론적 내용들을 처리하여 의미를 생성한다. 즉 바깥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먹든 인간에게 실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입력된 구문론적 정보이고, 좋게 봐줘도 구문론적 정보에 의해 내부에서 형성된 좁은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내용을 내용으로 정의하면 우리는 부수현상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후술하겠지만 부수현상론은 일반적으로 심리철학자들이 거부하는 입장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심리철학자들은 내용을 좁은 내용으로 한정하려고 하거나, 적어도 심리학과 심리철학의 연구대상이 좁은 내용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이렇게 할 경우 외부현실의 문제로 인해 좌초된 몇몇 이론은 다시 회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좁은 내용이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한다. 이들은 좁은 내용이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이라는 개념과 별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좁은 내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3.정신인과

정신인과는 정신이 포함되는 인과로, 심적 요소가 심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심심인과나 물리적인 외부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심물인과, 그리고 외부현실에 영향을 받는 물심인과 모두가 정신인과에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독립적으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즉 정신인과를 인정한다. 이는 대부분의 심리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인과는 인류 지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과학의 가정은, 인간이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이를 추론하여, 실험을 통해 과학지식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각은 물심인과이고, 추론은 심심인과이며, 실험은 심물인과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면 반드시 정신인과가 존재해야 한다. 여기다 아래에서 후술할 행위의 인과성 문제로 인해 주류 심리철학에서는 정신인과가 성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김재권이 있다. 김재권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반박하고 배제 논변을 주장했다.

 

행위와 정신인과

정신인과는 행위의 존재에 필수적이다. 심리철학에서 행위는 행위자(agent)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행위가 일반적인 자연현상과 구별되려면 행위자에게 인과를 일으킬 힘이 존재해야 한다. 심리철학자들은 행위를 DBA 원리로 정의하는데, DBA란 행위가 욕구-믿음-행위의 순으로 행위를 일으킨다는 원리이다. DBA는 '어떤 행위자가 s를 원하고 a가 그것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다면, 행위 a가 나타난다.'는 명제로 정의된다. 밑에서 보듯 DBA에도 한계가 있지만, DBA는 일반적으로 행위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이론으로 평가된다.

 

DBA의 문제는 이것이 현실과 그렇게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미군이 가진 모든 핵무기를 쏟아부으면 북한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북한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핵을 날리면 북한의 살아남은 핵무기가 미국 본토로 날아올 것이고, 미국이 핵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안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주식투자에서 5억을 벌려면 10억을 투자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5억이 필요하지 않은 청백리여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10억을 투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심리철학자들은 DBA를 약화시켜서, DBA가 대치되는 다른 s가 없을때만 작용한다고 설명하거나 DBA 자체를 어떤 확률이나 경향성, 즉 ceteris paribus 법칙으로 정의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행동은 복수의 동기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리철학자들은 행동을 일으킨 바로 그 원인 하나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분석철학에서 복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매우 소수인데, 그래서 행동이 복수의 동기로 일어날 가능성이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도 어떤 행동이 일어난 동기를 하나로 압축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 동기는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며, 그 행동과 동기는 인과관계로 맺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행동과 동기가 인과적으로 맺어진다는 점이다. 즉 다른 이유없이 바로 그 동기가 행동의 원인이어야 한다. 이러한 명제는 먼저 동기라는 형태의 마음을 가정하고, 그 마음이 물리적 현상(행동)을 일으킨다고 가정한다. 즉 행위가 가능하려면, 정신이 물리적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먼저 성립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인과의 성립여부는 행위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필자는 분석철학에서 가정하는 이상한 존재론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복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일은 부지기수고, 특정한 원인없이 발생하는 일도 우주에 널리고 널렸다. 이들을 감안한다고 쳐도 행위가 가능하려면 정신인과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부수현상론

앞서 필자는 주류 심리철학이 정신인과를 가정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즉슨 어떤 학자는 정신인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수현상론은 정신인과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으로, 19세기 과학자 헉슬리에 의해 처음 주목을 받았다. 부수현상론은 정신인과는 없으며 정신은 단지 물질의 결과일 뿐이라는 이론으로, 물심인과는 인정하지만 심심인과와 심물인과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처음 제창한 헉슬리는 인간이 의식을 가진 자동기계라고 제안했고, 의식이 마치 자동차의 그림자와 같아서 물질과 비슷하게 움직이고 영향도 끼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두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설먼의 논증에 비추어 다시 설명해보면, 설먼은 원인에 변형을 가했을때 결과도 변형되면 그것만이 진정한 인과라고 논증했다. 그런데 의식을 변형한다고 행동이 변하지는 않기 때문에(대개 의식을 변형한다고 하는 행위들은 사실 뇌를 변형한다), 의식이 인과적 원인이 될 수 없다는게 부수현상론이다.

 

부수현상론은 심리철학에서는 파격적인 이론이다. 엘레아적 견해에 따르면 아무런 인과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가 아닌데, 그렇다면 마음은 존재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지각도 없고 의식은 그냥 동떨어진 환상이라는 제거주의도 가능하겠지만, 제거주의를 받아들이는 부수현상론자는 거의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부수현상론을 받아들이며, 김재권에 따르면 무법칙적 일원론을 비롯한 많은 심리철학 이론들도 사실은 부수현상론이라고 한다.

 

과학자 중에는 부수현상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만(이들은 대개 동일론자이다) 심리철학자 중에는 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봤듯이 부수현상론을 가정하면 실험과 추론의 존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모든 지식체계의 존재를 무위로 만들어버리며, 그렇게 되면 다시 부수현상론이 부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철학에서는 정신인과를 잘 보존하는 이론이 좋은 이론이라고 평가되며, 김재권은 정신인과의 존재를 공리로 삼아 동일론을 옹호했다.

 

필자는 부수현상론이 지식체계를 무위로 돌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속성이원론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정신이 부수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추론과 지각, 행동을 실시하는 전두엽과 운동신경이 사라지는게 아니다. 즉 정신이 부수현상이던 아니던 신체는 얼마든지 추론과 실험이 가능하고, 그 결과가 부수현상으로서 정신으로 나타난다면 앎이 가능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식도 물리계에서 발생해서 마음에 투사된다는, 더 강한 심물인과를 주장하는 것이다.

 

무법칙적 일원론

무법칙적 일원론은 데이비드슨이 심신 문제에 대해 제안한 해법으로, 그가 고안한 언어철학 이론이 집대성되어 있다.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마음은 두뇌상태를 기술하는 다른 방법으로, 그 실체는 두뇌상태(또는 기능)와 동일하다. 그러나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마음이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심물인과(또는 반대인 물심인과)를 도출하는 자연법칙은 불가능하지만, 심물인과 자체는 가능하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6가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 6가지는 각각 데이비드슨이 고안하고 제안한 이론들이다.

 
  1. 법칙은 homogeneous한 개념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2. 믿음-욕구 귀속은 자비의 원리에 제약받는다.
  3.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 사이에 엄밀법칙은 불가능하다.
  4. 사건은 상이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는 외연적 대상이다.
  5. 인과는 사건 간의 외연적 관계이다.
  6. 인과적 관계는 인과 관계에 놓인 두 사건이 엄밀법칙 하에 묶여야 발생한다.
 

첫번째 공리는, 데이비드슨이 초랑 논변을 해결하면서 제안햇다. 데이비드슨은 초랑 논변이 '에메랄드'와 '초랑'이라는 서로 다른 기술방식에 기초한 언어를 섞어놓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즉 에메랄드는 시간개념을 신경쓰지 않는 기술방식이지만 초랑은 시간개념과 결부된 기술방식이다. 초랑 논변에서의 오류는 이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시간개념을 신경쓴 기술방식인 '에메리어'로 에메랄드를 재정의하여 사용하면 초랑 논변은 해결된다. 이를 통해 데이비드슨은 자연법칙이 동질적인 대상, 즉 동일한 기술방식으로 표현된 개념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제안하였다.

 

두번째 공리는, 콰인이 의미 비판에 대한 해답으로서 도출되었다. 콰인은 '의미'라는 개념이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의미란 관찰된 내용에 대한 해석인데, 이 해석은 무한히 다양한 종류로 가능하다. 가령 어떤 아마존 원주민이 토끼가 튀어나오자 '가바가이'라고 소리쳤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가바가이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가바가이는 토끼일수도 있고, 튀어나온 토끼일수도 있고, 튀어나오는 무언가일수도 있고, 이외에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정말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바가이는 그냥 의성어고 실제 의미는 손짓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바가이는 뱀이라는 뜻인데, 원주민이 멍청하거나 거짓말을 좋아해서 가바가이라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현상에 대해서 무한한 의미가 가능하기 때문에 콰인은 의미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콰인의 주장에 대해, 데이비드슨은 자비의 원리를 도입해 이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즉 아마존 원주민이 합리적이고 선한(=거짓말을 안하려는) 믿음을 가진다고 가정하자는 것이다. 아마존 원주민이 합리적으로 언어를 구사하고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맨 마지막 가능성은 없어질 것이다. 물론 자비의 원리를 반드시 가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데이비드슨은 일반적으로 철학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는게 합당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두번째 공리의 중요한 결론이 도출되는데, 의미와 같은 심적 속성은 형성에 자비의 원리가 개입한다는 점이다. 물리적 속성은 자비고 나발이고 없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심적 속성은 자비의 원리와 같은 합리성의 원리가 작용하여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필자는 심적 속성을 합리성의 원리로 설명하는게 적어도 이상심리학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번째 공리는 1,2번 공리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번째 공리에 따라 서로 다른 기술방식에 기초한 개념끼리는 자연법칙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두번째 공리에 따르면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은 다르다. 이들은 마치 칸트가 세상을 물자체인 페노메나와 작용하는 이성이 존재하는 누메나를 구분했듯이, 한 세계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이고 기술방식이다. 따라서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 사이에는 자연법칙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무법칙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네번째 공리는, 인과에 대한 데이비드슨의 고유한 정의이다. 데이비드슨은 인과를 두 사건 사이의 관계로 정의하였다. 즉 마치 발단이 결말을 불러일으키듯이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다른 사건이 발생했을때 이 두 사건을 인과 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김재권이 제안한 '속성과 실체가 특정 시공간적 위치에서 예화한 것'이라는 사건의 정의와는 다르며, 실제로 이로 인해 논쟁이 벌어졌다. 현재 분석철학자들은 김재권의 정의를 지지한다. 한편 데이비드슨이 정의한 사건은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 즉 같은 사건이라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여기서 물리적 사건이 심적 사건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이 도출된다.

 

여섯번째 공리는, 데이비드슨의 엄밀법칙을 이해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 엄밀법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해도 존재할 수 있는 법칙으로, 데이비드슨은 두 사건이 엄밀법칙 하에 묶여 있어야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즉 '떨어진 공이 볼링핀을 무너트렸다.'라는 인과 관계는, 그것을 '거대한 구체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면서 가련한 핀들을 땅바닥에 나뒹굴게 하였다.'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여도 참이기 때문에 인과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여섯가지 공리를 통해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지 보자. 먼저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을 연결하는 자연법칙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심물인과나 물심인과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과 인과 관계로 엮인다. 왜냐하면 심리철학의 주류 견해인 물리주의에 따르면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의 다른 표현인데(이는 데이비드슨의 사건 개념에 의해 가능하다), 심적 사건의 본질은 물리적 사건은 기술방식을 바꾸어도 다른 물리적 사건과 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즉 운동피질의 활성화가 팔 움직임이라는 사건을 일으킬때, 이 두 사건은 엄밀법칙 하에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기술해도 성립한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려는 의지라는 심적 사건은 운동피질 활성화의 다른 기술방식이기 때문에(과한 단순화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기술방식에 상관없이 팔을 움직이려는 의지라는 심적 사건은 팔 움직임이라는 물리적 사건과 인과 관계로 묶인다.

 

한편 무법칙적 일원론에서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지만, 심적 사건의 부분인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과 동일하지 않다. 둘은 서로 다른 기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무법칙적 일원론은 유형동일성은 인정하면서 사례동일성은 부정하는 기묘한 형태가 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도널드 데이비드슨이 있다. 데이비드슨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제안했다.

 

무법칙적 일원론 비판

무법칙적 일원론이 나왔을때 무법칙적 일원론은 정신인과를 잘 설명한다고 호평받았다. 그러나 당시 새롭게 등장한 김재권이 이를 반박하면서 상황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김재권의 비판의 핵심은 무법칙적 일원론이 부수현상론이라는 것이다.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정신인과는 가능하긴 하지만, 정신이 필수적이지는 않다. 가령 오랜만에 친구를 본 영희가 악수를 한다고 하자.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친구를 보고 활성화되어 악수 행동을 유발하는 신경상태는 '반가움'으로 다르게 기술될 수 있으며, 따라서 반가움이 원인인 인과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정신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악수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물리적 상태로서의 신경상태이고, 심적 속성이 있건 없건 영희는 악수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질적으로 인과의 주인공은 물리적 속성이며, 심적 속성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데이비드슨은 이에 실질적으로는 정신이 인과관계에 맞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신적 실체가 없다고 밝혀진 이상 '정신이 물리적 사건을 일으킨다.'라는 정신인과적 명제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사건을 일으킨다.'가 되는데, 심적 속성마저도 아무 할일이 없다면 무법칙적 일원론은 그냥 부수현상론일 뿐이다. 이에 데이비드슨은 그러한 주장이 실질적 관계와는 상관없이 설명적 이유의 관점에서 본 문제라고 반박하지만, 김재권은 다시 설명적 이유로서의 정신도 성립해야 정신인과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보존된다고 반박하였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엄밀법칙의 개념을 파기해서 심물법칙을 인정하거나 대안적인 인과 개념을 제시하는 것인데, 전자를 따른다면 무법칙적 일원론은 '유'법칙적 일원론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데이비드슨은 후자를 택했으며, 인과를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기술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김재권이 있다. 김재권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반박하여 폐기까지 몰고 갔다.

 

반사실적 조건문의 경우

만약 우리가 반사실적 조건문을 인과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무법칙적 일원론은 정신인과를 보존하는 이론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신인과를 '심적 속성이 없다면 물리적 사건/심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정의한다면, 이것은 무법칙적 일원론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심적 속성(으로 기술된 물리적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반사실적 조건문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해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엄밀법칙에 연결되지 않아도 인과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떨어트린 담배꽁초가 화재를 일으켰다면, 반사실적 조건문에 따라 담배꽁초는 화재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담배꽁초를 화재와 연결시키는 법칙은 없다. 그저 '연소'라는 성질을 가진 담배꽁초가 우연한 환경과 조합되면서 일어나는게 화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반사실적 조건문을 어떻게 의미지우냐가 문제가 된다.

 

데이비드슨은 가능세계 접근을 받아들였다. 그에 따르면 정신인과란 심물법칙을 가정하는 것이고, 이를 다르게 말하면 최근접 세계가 보존해야 할 원 가능세계의 법칙 중에 심물법칙이나 심심법칙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 문단에서 열렬히 심물법칙을 때리던 사람이 갑자기 왜이러나 싶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정확히 심물 '엄밀'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둘을 연결하지만 절대적이진 않고 확률이나 경향성의 형태로 연결하는 ceteris paribus 법칙은 가능하다. 즉 다른 조건이 다 동일할때 인과를 발생시키는 법칙은 가능하다. 데이비드슨은 이렇게 ceteris paribus 법칙인 심물법칙/심심법칙을 가정하고, 정신인과를 '최근접 세계가 심물법칙/심심법칙을 보존한다'로 정의한 다음, 이것이 무법칙적 일원론과 충돌하지 않음을 보여 무법칙적 일원론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재권은 대체 ceteris paribus 법칙이 무어냐고 반문한다. 사실 분석철학자들은 확률이나 경향성의 형태로 표현되는 법칙에 아직 적응을 못했으며, 그래서 ceteris paribus 법칙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래서 ceteris paribus 법칙의 철학적 본질이 밝혀지면 그것이 무법칙적 일원론에 돕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어떤 철학자는 ceteris paribus 법칙을 어떤 다른 절대적인 법칙에 의존하는 법칙으로 이해하는데, 실제로 이는 얼핏 타당해 보인다. ceteris paribus 법칙인 수많은 생물학적/사회과학적 법칙들은 모두 절대적 법칙인 화학/물리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심물인과는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엄밀법칙에 의존해야 하며, 그 엄밀법칙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유법칙적 일원론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데이비드슨은 답을 하지 못했고 결국 무법칙적 일원론은 침몰하였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김재권이 있다. 김재권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반박하여 폐기까지 몰고 갔다.

 

배제 논변

무법칙적 일원론을 침몰시킨 김재권은 더 대담한 기획을 들고 등장하였다. 무법칙적 일원론이 침몰한 후, 김재권은 심리철학자들에게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배격할 것을 강요하였다. 즉 속성이원론을 비롯해 모든 이원론은 물론 동일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원론을 폐기하라는 것인데, 김재권은 그 이론들이 모두 부수현상론과 동일하기 때문에 정신인과를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배제 논변은 이를 증명하는 논증이고, 이는 물리적 인과적 폐쇄성 원리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폐쇄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만약 어떤 물리적 사건이 t에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t에 충분한 물리적 원인을 가진다. 이는 더 쉽게 말하면 모든 물리적 사건이 하나 이상의 물리적 원인을 가지며, 물리적 사건의 원인을 물리적 세계 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기존의 물리주의보다 약한 주장으로, 물리적 폐쇄성 원리는 비물리적 원인이 물리적 사건에 기여하거나 물리적 사건에 어떠한 원인도 없는(양자역학에서 자주 보인다) 경우를 부정하지 않고 심신이원론과도 양립한다.(실체이원과는 양립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를 기본적인 전제로 간주한다.

 

문제는 물리적 폐쇄성 원리를 심물인과에 적용할때 발생한다. 물리적 폐쇄성 원리에 따르면 심물인과 상황에서도 우리는 심적 원인 이외에 원인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요인을 추론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생각이 뇌에 기반해서 생성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음과 같다. 한 사건에 똑같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둘은 동일한가?(동일론) 아니면 이는 과도인과의 사례인가? 만약 우리가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지지한다면 동일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례가 과도인과 사례라고 가정해야 한다. 즉 하나 이상의 원인이 작용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과도인과를 가정하는 것은 심리철학에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분석철학에서는 과도인과를 매우 희귀한 사건이라고 때문이다. 분석철학에서 과도인과는 두 총알이 동시에 발사되서 사형수의 심장을 동시에 뚫는 상황같이 우연적이고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다. 물론 여러 요인이 관여하는 상황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으리라고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게다가 과도인과를 받아들여도 문제인게, 대부분의 정신인과는 심적 원인이 없어도 발생가능하다. 왜냐하면 물리적 원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적 원인은 대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심물인과와 심심인과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심적 원인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대체 왜 우리가 그것을 '심'물인과나 '심'심인과라고 불러야 하는가? 김재권은 이러한 논증을 배제 원리로 정식화했는데, 배제 원리에서는 진정한 과도인과 사례가 아니면 두개 이상의 원인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1. 심적 원인 m은 결과 a의 원인이다.(정신인과)
  2. 물리적 원인 p는 결과 a의 원인이다.(일반적 참)
  3. m=/=p(비환원적 물리주의)
  4. 3은 과도인과 사례가 아니다.(과도인과의 희귀성)
  5. m은 결과 a의 원인이 아니다.(1,2,3,4)
  6. 마음은 물리적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 즉 정신인과는 거짓이다.(5)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먼저 1번 전제를 부정하여 부수현상론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부수현상론은 심리철학자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결론이니 제외한다. 두번째는 3번 전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것을 일으키는 물리적 실체와 동일하다면, 정신인과는 살릴 수 있다. 따라서 김재권은 배제 논변을 통해 심리철학자들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그들은 부수현상론을 택하거나, 동일론을 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동일론이 아직까지 비주류로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배제 논변이 발표된 후 심리철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물론 배제 논변에도 무수한 비판이 가해졌다. 그중 하나는 정신인과가 본질적으로 과도인과라고 제안한다. 이는 분석철학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이지만, 생물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비일비재하고 일어나는 일이다. 배제 논변의 비판자들은 마음이 결국 물리적 사건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인과가 나타날 때마다 그 마음을 일으킨 물리적 원인이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이외에 다양한 비판이 있으나, 아직까지 어느 쪽으로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은채 논쟁은 2020년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김재권이 있다. 김재권은 배제 논변을 발표하여 동일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심리철학 이론을 공격했고, 본인도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김재권의 동일론 옹호

배제 논변을 발표한 이후 김재권은 수반 논변을 통해 다시 학자들에게 동일론과 부수현상론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수반 개념에 따르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기생하는 존재이다. 물리적 속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김재권은 수반 논변을 제시핸다.

 

수반 논변은 심적 사건이 다른 심적 사건을 일으키는 심심인과 상황을 가정한다. 수반 개념을 받아들이면 모든 심적 속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물리적 토대가 있는데, 따라서 심적 사건 a가 다른 심적 사건 b를 일으키려면 b가 실현되는 물리적 토대인 c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즉 a->c->b가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심심인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이 인과관계는 c-b이기 때문으로, 결국 심적 사건 b의 원인은 물리적 사건인 c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심심인과는 불가능하고 심물심 인과가 가능한데, 배제 논변을 통해 심물인과도 부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부수현상론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동일론을 통해 심적 사건 b와 물리적 사건 c를 동일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김재권이 있다. 김재권은 배제 논변을 발표하여 동일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심리철학 이론을 공격했고, 본인도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4.의식

의식은 21세기 이후 심리철학의 주된 화두가 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신경과학과 심리학이 발전하면서 의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의식에 대한 연구에서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 심리철학에도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 대다수는 철학적으로 부족하다고 평가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심리철학자들도 의식 문제에 참가하여 여러가지 논의를 벌이게 되었다.

 

심리철학에서는 의식을 현상의식과 접근의식, 자의식, 감시의식으로 나눈다. 현상의식(현상적 의식)은 감각질로, 경험적 상태 그 자체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감각질은 설명이 불가능한데, 예를 들어 맹인이거나 맹시인 사람한테 풍경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일은 가장 뛰어난 시인이 와도 힘든 일이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운동을 지각하는 운동맹의 존재를 보고했고 이들의 행동과 양상, 두뇌상태까지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대체 운동을 못본다는게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접근의식은 심리학에서의 작업기억에 저장되는 단기기억들과 작업기억의 총체로, 일종의 집행기능이다. 접근의식이 되려면 아래 3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만약 x가 접근의식이라면 x는 다음을 만족해야 한다.

 
  • x는 말의 합리적 통제에 사용될 수 있다.
  • x는 행동의 합리적 통제에 사용될 수 있다.
  • x는 추론에 필요한 전제로 사용될 수 있다.
 

접근의식은 정서적 통제나 무의식적 통제와는 다르다. 물론 정서는 정보처리에 관여하며, 사실 인간의 정보처리 대다수는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집행기능의 역할에는 주어진 정보를 이를 처리하는데 적절한 곳(무의식에 위치)으로 보내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들이 집행기능에 포함되지는 않듯이, 무의식적 정보처리나 정서적 통제는 접근의식에 해당하지 않는다.

 

차머스의 좀비 논변

차머스의 좀비 논변은 심리철학자 차머스가 물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고안한 논변으로, 적어도 인간의 마음과 관련해서는 물리주의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이것은 신경과학의 입장에서는 있지도 않은 것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헛소리지만, 심리철학에서는 나름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차머스의 좀비 논변은 심리철학에서 제기된 물리주의에 대한 도전 중 가장 유의미한 것이며, 그만큼 많은 비판도 받았다. 다양한 심리철학자들이 차머스의 좀비 논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좀비 논변은 정신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면서 물리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가정하여 물리주의를 반박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고안된 존재가 철학적 좀비인데, 철학적 좀비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 중 경험적 상태, 즉 감각질만을 빼고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철학적 좀비는 식인을 하지도 않고 똑바로 걸어다니면서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지만, 비를 맞는 느낌이나 우산을 펴는 느낌은 가지지 못한다. 차머스는 여기서 철학적 좀비가 상상가능하기때문에 물리주의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아마 언어철학적 논리에 경도되지 않았다면 이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을 직감할 것이다. 사실 언어철학적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를 비판했다. 만약 상상가능한것이 무조건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골드바흐의 추측이 맞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인게 가능하다고 하면 바로 거기서 골드바흐의 추측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골드바흐의 추측은 수학적 공리 안에서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믿는다) 비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차머스도 경악할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철학자들은 다른 관점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대표적인게 크립키의 논증으로, 크립키는 후험적 참이 가능함을 논증한 대표적인 논리학자이다. 가령 물이 h2o라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이것은 후험적으로 발견되어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물의 화학적 성질을 모르거나 아예 화학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사람들은 물이 h2o임을 모르고, 물이 co2이거나 아예 화학물질이 아닌 그 무언가라고 상상하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물이 h2o와 다르다고 하는 것은 틀리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가능성이 실제로 존재가 가능하다는 말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머스도 철학자임을 기억하라. 크립키의 자연종 명사는 철학과에서 학부시절부터 배우는 내용으로, 차머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론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다. 차머스는 상상가능성이 존재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떤 상상가능성은 존재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철학적 좀비가 그러한 경우임을 논증한다. 이를 위해 차머스는 의미에 있어서 1차 내포와 2차 내포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1차 내포는 우리가 부여한 의미를 말한다. 물을 예로 들어보면 물의 1차 내포는 흐르고, 투명하며, 마실 수 있고, 기타 어쩌고저쩌고한 특성(watery stuff라고 통칭한다)을 가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보통 부여하는 정의이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참이다. 반면 2차 내포는 실제 참을 말한다. 현대과학은 물이 h2o임을 밝혀냈는데, 물이 H2O라는 사실이 물의 2차 내포이다. 이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을 1차 내포를 통해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이 H2O가 아닌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비록 거짓이지만 상상은 가능하며, 다만 물이 watery stuff가 아닌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선험적 참이기 때문이다. 차머스에 따르면 물에 대한 거짓된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1차 내포와 2차 내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머스는 마음의 경우 1차 내포와 2차 내포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가지는 본질은 비대칭성으로 인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의 본성을 알려면 값비싼 실험장비들을 동원해야 하지만, 고통의 본질은 알 수 있다. 거지같이 아픈게 고통의 본질이고, 이는 우리가 직접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있어서, 특히 감각질에 있어서 1차 내포와 2차 내포는 다르지 않다. 이는 1차적 내포와 2차적 내포가 다른 물의 경우와는 다르고, 따라서 철학적 좀비의 상상가능성은 존재가능성을 함축한다.

  1. Searle(2010). 신경생물학과 인간의 자유: 자유의지, 언어, 그리고 정치권력에 관한 고찰. 강신욱 역. 궁리 [본문으로]
  2. Searle(2010). 신경생물학과 인간의 자유: 자유의지, 언어, 그리고 정치권력에 관한 고찰. 강신욱 역. 궁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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