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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철학 총론

과학주의자 2023. 2. 15. 15:23

언어에 대한 탐구는 꽤 최근에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창한 문장의 주어-술어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이는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머물렀고 언어의 특성과 본질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철학의 변방에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수리논리학이 개화하면서 언어철학이 탄생하였고, 분석철학이 꽃피면서 언어철학도 발전하였다. 언어철학은 분석철학을 하는데 필수적인 기초이며, 분석철학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스탠포드 철학사전을 기본으로 한다.

 

크립키 의미론

https://tsi18708.tistory.com/181

현대 언어철학의 주류 이론은 크립키 의미론이다. 다른 이론들은 모두 크립키 의미론에 반박당하거나, 최소한 수정을 해야 했다. 따라서 현대 언어철학을 이해하려면 크립키 의미론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크립키 의미론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그 이전의 이론인 소박한 의미론과 프레게 의미론, 한정기술구 이론을 반드시 알고 가야 크립키 의미론을 이해하기 편하다.

 

 

개요

언어철학이란 언어의 의미과 구조, 사용에 대해 분석하는 학문인데, 실제적으로 언어철학은 언어, 특히 논리적인 언어의 의미론을 탐구하는 분석철학의 분과이다. 언어철학의 시초는 20세기의 수학자 프레게인데, 프레게는 논리적 언어를 수학적으로 정식화하여 논리학을 발전시킬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해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외에도 언어철학적 주제의 3분의 1은 프레게가 관여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레게의 업적은 엄청나다. 이후 이에 호응한 러셀, 비트겐슈타인 등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언어에 대한 연구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언어철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반영하거나,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탐구하기 위해 언어철학에 뛰어들었다.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주장은 꽤 오래되었다. 칸트의 주요 탐구주제 중 하나도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세상의 실체들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주어도 어떠한 술어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 적용하면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문장은, 실체에 속성이 결합한 사태와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삼단논법은 올바른 말의 이치인데, 동시에 올바른 세계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언어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와 어떤 측면에서 유사할지 모른다.

 

언어에 대한 연구는 구문론, 의미론, 화용론에 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구문론은 언어의 문법적 요소들로, 언어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탐구이다.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가 지시(지칭)하는 지시체와 언어의 관계를 다루거나 언어의 진리치를 다루는 탐구를 말한다. 화용론은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탐구로, 어떠한 맥락(배경지식) 하에서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언어과학은 구문론과 화용론을 다루는 반면, 언어철학은 주로 의미론에 집중한다.

 

언어철학에서 다루는 의미는 인지적 의미(cognitive meaning)이다. 이는 표현적 의미와는 구분된다. 인지적 의미는 말 그대로 인지적인 의미로, 문장의 진리값과 연관된 의미를 말한다. 반면에 표현적 의미(expressive meaning)는 문장이 전달되는 표현방식과 관련된 의미인데, 표현적 의미는 문장의 진리값과는 관련이 없고 대신 화용론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수학적 언어나 기타 언어철학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언어는 표현적 의미가 없다. 반면에 욕은 인지적 의미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며(느금마라고 할때 진짜로 상대의 어머니에 대해 진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미적 주장이나 도덕적 주장이 표현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와 인지적 의미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언어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 먼저 언어철학에서는 사용(use)과 언급(mention)을 구분한다. 단어가 현실세계의 어떤 대상, 즉 어떤 지시체를 가리키는 경우 이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반면에 단어가 어떠한 단어를 지칭하는 경우 이는 언어를 언급한다고 한다. 그래서 산은 사용이고, '산'은 언급이다. 한편 언어철학에서는 유형(type, 타입)과 개체(token, 토큰)를 구분한다. 가령 'Your mom is mom.'에서 유형은 3개이나 개체는 4개이다.(단어기준) 이는 나중에 동일성에 대해 언급할때 중요할 것이다.

 

또한 언어철학에서는 동일성을 지칭하는 be동사와 술어화를 의미하는 be동사를 구분한다. 가령 'I am Sam'과 'I am hungry'에서 am은 의미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I는 Sam과 동일한 존재이지만, 후자에서 hungry는 I의 속성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언어철학에서는 단어의 지시(reference)와 의미(meaning)를 구분하는데, 지시는 단어가 지시하는 지시체를 말하고 의미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물'은 H2O를 지시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투명하고 시원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 지시와 의미는 일치하지 않으며, 어떤 철학자들은 의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구성성(compositionality)은 언어의 의미가 그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과 문법규칙의 의미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간단한 문장의 경우 문장의 의미는 주어의 의미와 술어의 의미, 그리고 주어를 수식하는 술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문장의 구성요소들이 가지는 의미도 알아야 한다. 구성성은 언어의 주요 특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언어철학 이론을 평가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타르스키 문장(T sentence, T문장)은 언어철학에서 무언가를 정의할때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문장이다. 타르스키 문장은 자신이 지시하는 특정 예화에서만 참인 문장으로, 가령 '팔이 가렵다'라는 문장이 실제로 팔이 가려울때만 참이 될때 이 문장은 타르스키 문장이다. 진짜 별거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타르스키 문장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반증불가능하거나 애매모호한 문장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주장이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 혹은 사이비과학까지 많은 주장들이 자신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특정 예화를 지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주장을 참/거짓으로 가려주는 방법이 없다. 이런 점을 볼때 언어철학적 정의는 물론 다른 과학에서의 이론도 모두 타르스키 문장을 충족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동일성

어떤 두 대상이 동일하다는 말은 두 대상이 완전히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신 둘이 적당히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는 좀 모호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동일성을 재귀성과 대칭성, 이행성이 모두 충족되는 경우로 정의하였다.

 

재귀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속성이 항상 적용됨을 말한다. 가령 대상 a가 항상 속성 b를 가지고 있을때, b는 a에 대하여 재귀성을 가진다. 이를 철학에서는 'Ra일때 R은 재귀적이다.'라고 표현한다.

 

대칭성은 관계가 바뀌어도 속성이 성립함을 말한다. 가령 a가 대상 c에 대해 항상 b를 가지고, 반대로 c도 a에 대해 항상 b를 가질때 b가 a, c에 대해 대칭성을 가진다. 이를 철학에서는 'Rab이고 Rba일때 R은 대칭적이다'라고 한다.

 

이행성은 관계가 존재의 다리 하나를 거쳐도 유지됨을 말한다. 가령 b가 Rac이면서 c가 대상 d에 대해서 Rcd일때, b가 Rad에 대해 이행적이라고 한다. 이를 철학에서는 'Rab이고 Rbc일때 Rac가 성립하면 R은 이행적이다'라고 한다.

 

명제

명제는 참/거짓 중 하나의 값을 가지는 문장으로 된 함수를 말한다. 어떤 문장이 명제의 기준을 충족하려면 그 문장이 1)의미를 가져야 하고, 2)진리치(참/거짓)를 가져야 하며, 3)명제 태도의 대상, 즉 이상적으로 볼때 표상적 상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수학적으로 명제는 잘 정의되고 철학에서도 명제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지만, 정확히 명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분석철학과 논리학에서 명제를 정의하는 주된 방식은 3가지가 있다.

 

러셀(russellian proposition)은 명제를 사건에 대한 서술로 이해했다. 즉 명제는 어떤 속성과 실체가 특정한 시공간적 위치에서 예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명제는 좋든 싫던 실제 세계의 어떤 측면(서술하는 사건)에 의존해야 한다. 반대로 프레게(fregean proposition)는 명제를 추상적인 사고(thought)로 정의했다. 즉 실제 사건이 어떻던 명제는 하등 관계가 없고, 단지 진리치를 치역으로 가지는 특정 형태의 함수가 프레게가 정의하는 명제이다. 

 

현재 학자들이 주로 받아들이는 정의는 데이비드 루이스의 정의(내포적 의미론)로, 루이스는 명제를 가능세계의 집합으로 정의하였다. 즉 '삼성은 한국 회사다.'라는 명제가 있을때, 이 명제가 지시하는 대상은 삼성이 한국 회사인 모든 가능세계를 원소로 하는 집합이다. 이 이론은 현재 정설이나, 연역적으로 참인 명제를 서로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가령 '삼각형은 세 각의 합이다'와 '1+1=2'는 가능세계의 전체집합을 지시하는데, 그렇다면 둘은 같은 명제인가? 이에 루이스는 둘이 실제로 같은 명제라는 답을 제시했으나, 아직 이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명제는 문장에 포함되어 있지만, 문장의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즉 같은 문장도 맥락에 따라 포함하는 명제가 다를수 있다. 가령 '나는 빨갱이다.'는 문장은 발화자가 공산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반면에 '샘은 개다.'와 'Sam is a dog.'은 문장은 다르지만 명제는 같다. 명제는 문장이 가지는 형태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수도 있는데, 가령 평서문은 명제를 주장하고(주장적 힘, assertive force), 의문문은 명제가 세계에 부합하는지 질문하며(의문적 힘, interrogative force), 명령문을 명제를 현실세계에 예화시킬 것을 요구한다.(명령적 힘, imperative force) 명제가 어떠한 힘을 발휘할지는 문장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맥의 영향도 받는다. 

 

문장의 구성

언어철학에서 분석의 기본 단위는 원자 문장이다. 원자 문장(atomic sentence)은 1개 이상의 주어와 하나의 술어로 되어 있는 문장이다. 다른 언어학에서는 동사나 형용사, 부사, 조사 등 다양한 구문론적 분류가 있지만, 언어철학에서는 모든 단어를 주어와 술어로 구분한다.

 

언어철학에서 주어는 어떠한 실체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중 단칭 용어(singular term)는 특정한 하나의 대상만 가리키는 주어로, 고유명사가 여기에 해당된다. 단칭 용어의 의미는 단칭 용어가 지시하는 지시체이다.(NP2) 

 

술어(predicate)는 주어를 수식하는 단어로, 언어철학에서는 문장에서 주어를 제거했을때(술어 추출, predicate extraction)[각주:1] 남는 단어로 정의한다. 문장에 주어가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술어를 부르는 명칭이 다른데, 하나만 들어있으면 일항 술어(one-place/modalic predicate)라 하고 두개가 있으면 이항 술어(two-place/binary predicate)라 한다. 비슷하게 주어가 3개 있으면 삼항 술어(three predicate)라 하며 이론상 무한항 술어라는 명칭까지 가능하다. 그리고 주어가 2개 이상인 문장에서 주어를 하나만 없애도 술어 추출로 인정되는데, 문장에서 모든 주어가 사라진 경우의 술어를 순수 술어(pure predicate)라 한다. 

 

존재양화사가 술어에 포함되는지, 즉 'a가 존재한다'가 주어-술어의 결합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한편에서는 존재양화사가 술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프레게 이론에서는 존재양화사가 술어가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x가 존재한다'라는 문장이 x 자체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는가? 우리가 x에 대해 알고 있을때, 'x가 존재한다'를 알아서 추가적인 정보가 습득되는가? 그러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술어 의미론

앞에서 우리는 주어가 어떠한 실체를 지칭하는 단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술어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단어라면 무언가를 지시해야 하는데, 술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애매하다. 가령 '지구는 푸르다'라고 할때 '푸르다'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에 대한 논의를 술어 의미론이라 하며, 3가지 이론이 제시되어 있는데 보편자 이론이 주류이다.

 

첫번째는 관념 이론이다. 관념 이론은 로크가 제시한 주장으로, 술어가 그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지구는 푸르다고 할때 푸르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파랑이라는 관념을 지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술어가 대응하는 정신적 이미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술어에 대한 관념이 서로간에 다른 경우도 왕왕 있다.(신의 정의가 얼마나 다양한지 보라) 무엇보다 철학적 행동주의와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사적인 관념은 언어의 지시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어떤 단어를 얘기할때 단어가 내 마음속의 무언가(남들은 못봄)를 지시한다면, 대체 상대방이 말하는 단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처럼 매우 다양한 약점이 있어서 관념 이론은 폐기되었다.

 

두번째는 집합 이론으로, 비주류지만 크립키 의미론을 통해 아직도 남아 있다. 집합 이론은 술어가 어떠한 속성을 공유하는 모든 원소의 집합을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푸르다'는 파랑의 속성을 가진 블루 문, 유럽연합 깃발, 바다, 푸른 하늘 등의 원소들이 모두 속한 집합을 지시한다. 데이비드 루이스는 이 원소들에 가능세계에만 존재하는 원소들까지 포함하였다. 집합 이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집합을 이용하기 때문에 관념 이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며, 객관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술어의 의미를 정의한다.

 

그러나 집합 이론은 3가지 쟁점이 있어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 먼저 콰인은 동일한 집합을 가리키는 두 다른 술어가 가능하다고 비판했는데, 심장을 가진 인간 집합과 뇌를 가진 인간 집합은 같은 원소들을 가진다. 그러나 심장을 가졌다는 말이 뇌를 가졌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이에 대해 집합 이론 지지자들은 두 집합이 모든 가능세계에서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술어라고 반박한다. 두번째 반론은 술어가 지시하는 집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가령 민주당 깃발은 앞의 파랑 집합에 들어가지만 민주당이 깃발을 바꾸면(실제로 자주 있는 일이다) 파랑 집합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집합이 변한다는 얘긴데, 가변적인 집합을 지시하는 술어가 명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집합 이론가들은 통시적 동일성을 부정하여 반박하는데, 즉 이들은 특정 시점의 대상 a가 다른 시점의 대상 a와 다르다고 반박한다. 얼핏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철학자들은 통시적 동일성을 회의적으로 본다. 

 

마지막 이론은 보편자 이론(보편실재론)으로, 보편자 이론에서는 술어가 술어적인 의미를 가진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지구는 푸르다'는 문장에서 '푸르다'는 파랑이라는 어떤 추상적인 대상을 지시하는데, 이 대상은 파랑이라는 속성을 가진 모든 존재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어 있으며 이때 파랑은 그 존재와 예화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서 보편자 이론에 따르면 일항 술어는 어떠한 속성을 지시하며, 이항 술어에서는 두 주어 간의 관계를 지시한다. 이 이론이 현재 주류 이론이나, 비판자들은 대체 속성이나 관계를 어떤 보편자나 존재자로 간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필자는 집합 이론을 지지한다.

 

 

소박한 의미론

소박한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말 그대로 소박하다. 소박한 의미론은 언어의 구성성을 강하게 따른다. 그래서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그것의 지시체이며, 그 지시체는 문장의 구조와 각 단어들의 지시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문장은 어떠한 명제를 지시하고, 동시에 세계의 어떠한 부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제가 세계의 어떠한 부분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어떤 명제와 그 명제가 지시하는 세계의 어떤 사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소박한 의미론은 참인 명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원자 문장이 지시하는 어떠한 원자 명제가 1)일항 명제이고 대상 o와 속성 p를 가졌을때 실제로도 o가 p를 소유했거나, 2)이항 명제이고 대상 o1, o2, 그리고 둘 간의 관계 r로 구성되었을때 실제로 o1과 o2가 r의 관계로 엮여 있는 경우, 그 원자 명제를 참이라고 한다. 소박한 의미론에서 제시한 참에 대한 정의는 타르스키 문장을 충족하기 때문에 훌륭한 참에 대한 정의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은 그 자체로는 참을 정의할 수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왜냐하면 단순히 어떤 명제가 어떤 사태와 동일하다고 하면, 그 명제가 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명제는 어떤 사태를 지시하고, 이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모든 명제는 참이 된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대응론적 입장을 따르면 모든 명제가 어떤 사태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를 예방하려면 사태에 어떤 제한을 부여해야 한다. 즉 실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태에 대응하는 명제만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은 이러한 제한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소박한 의미론은 단칭 용어에 지시체가 없는 경우 문제가 생긴다. 가령 현재까지의 과학적 발견을 종합하면, 슈퍼맨은 없다. 즉 '슈퍼맨'은 지시체가 없다. 즉 '슈퍼맨은 대머리다.'라는 문장은 지시체가 없으므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배트맨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배트맨'와 '배트맨은 부자다.'도 지시체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엄격하게 소박한 의미론을 준수한다면 '슈퍼맨은 대머리다.'와 '배트맨은 부자다.'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DC 코믹스 팬들에게 원성을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DC 코믹스 팬들에게 있어 슈퍼맨과 배트맨은 엄연히 다르며, 전자는 거짓으로 여겨지지만 후자는 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소박한 의미론은 사장되었다. 특히 프레게가 지시체가 부재한 위의 경우와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를 들어 소박한 의미론을 비판하면서 소박한 의미론은 비주류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의미를 그것의 지시체로 보는 소박한 의미론의 테제는 이후 러셀로 이어졌고, 크립키나 퍼트넘처럼 다른 논리학자들에게도 꾸준히 이어져갔다.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morning star and evening star)

또한 프레게는 소박한 의미론이 개밥바라기(evening star)와 샛별(morning star)를 해결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개밥바라기와 샛별 문제는 프레게가 제시한 반론인데,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모두 금성을 이르는 말이다. 과거 인류는 개밥바라기와 샛별이 서로 다른 별이라고 믿었으나,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두 별이 같은 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개밥바라기'와 '샛별'이 지시하는 대상은 같은 셈(금성)인데,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두 단어의 의미도 같은 셈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문장들도 의미가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개밥바라기는 행성이다.
  • 샛별은 행성이다.

 

사실 두 문장 모두 천문학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논리적 의미에서 보자면, 두 문장의 의미는 같지 않다. 개밥바라기와 샛별이 같다는 것은 후험적이고 귀납적인 발견이다. 즉 순수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두 문장은 같아서는 안되며, 저 문장 중 하나는 믿고 하나는 거부할때 위배되는 어떠한 논리적 법칙도 없다. 더욱이 두 문장에서 개밥바라기와 샛별을 바꿀 수 있다면, 다음의 문장도 동일한 문장이다.

 

  • 개밥바라기는 샛별이다.
  • 샛별은 샛별이다.

 

위의 두 문장은 역시 천문학적으로는 같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때 두 문장은 동치가 아니다. 아래는 연역적인 동어반복 명제인 반면, 위 문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위의 발견은 천문학적 발견의 일종으로서 천문학 교양 강좌에서 소개되지만, 아래 문장은 차라리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 나오는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는 문장의 의미가 단순히 지시체로 환원되지는 않으며, 지시체와는 별개의 인지적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레게 의미론

논리학자 프레게는 소박한 의미론을 비판한 이후 새로운 의미론을 제안하였다. 프레게 의미론의 핵심은 의미가 지시체와는 별개의 무언가이며, 명제의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진리 조건이라는 것이다.

 

프레게 의미론에서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meaning은 기존의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명제의 지시체를 말한다. 그러나 프레게 의미론에서 더 중요한 의미는 sense인데, sense는 문장이 지시체를 지시하게 하는 무언가이다. 즉 문장이 세계의 어떤 부분에 대응한다고 할때, 무엇에 대응하게 할지를 결정하는게 sense, 즉 프레게 의미론에서의 의미이다. 프레게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는 세계의 부분이 우리에게 표상되는 상태(mode)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프레게 의미론에서 문장은 지시체를 지시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문장은 어떠한 명제를 표현하는데, 이 명제는 세계의 부분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명제는 세계의 어떤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문장이 무엇을 지시할지를 결정한다. 주어는 문장이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술어는 문장이 지시하는 외연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이들의 결합을 통해 문장의 지시체와, 특히 문장의 진리치(진리 여부)가 결정된다. 이를 간접지시의미론이라고도 한다. 간접지시의미론에 따르면 언어의 구성성 원리는 2가지 의미를 가진다.

 

  • 언어의 의미는 문법 구조와 언어의 요소 의미들에 의해 결정된다.
  • 언어의 지시체는 문법 구조와 언어의 요소 지시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의미(sense)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프레게에 따르면 의미는 명제인데, 명제는 어떠한 사고(thought)이다. 그러나 이를 관념 이론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프레게가 말한 사고는 생각(thinking)보다는 추상적인 관념에 가까운 것으로, 피타고라스 정리나 리만 가설처럼 우리 머릿속에 그릴 수는 있지만 객관적인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 이론에서의 관념과 달리 객관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 후에 더 발전한 개념에 따르면 사고는 일종의 함수(프레게는 이를 concept(개념)라고 지칭했다)인데, 함수형태는 술어이고 주어는 미지수에 해당한다. 이 함수는 진리치를 치역으로 가지는 함수로,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문장이 참이면 1을, 거짓이면 0을 산출한다.

 

프레게는 술어 의미론에서 집합 이론을 지지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술어는 어떤 집합을 지시하며, 문장의 진리치는 문장의 주어가 술어가 지시하는 집합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프레게는 치환성 원리(라이프니츠의 법칙)를 받아들이는데, 치환성 원리는 문장 S에서 특정 단어를 지시체가 동일한 다른 단어로 바꿔도 S의 진리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가령 '샛별은 행성이다.'에서 샛별을 개밥바라기로 바꾸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치환성 원리가 성립하는 언어는 외연적 언어(extensional language, 지시적으로 투명한 언어)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언어를 비외연적 언어(non-extensional language)라 한다. 프레게 의미론에서 치환성 원리는 아주 중요하다. 

 

앞서 프레게는 지시체가 부재한 경우의 의미와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를 들어 소박한 의미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프레게 의미론에서는 잘 해결된다. 먼저 지시체가 부재한 경우, 두 문장은 확실히 서로 의미가 다르다. 다만 지시체가 없어서 진리치가 없는 것 뿐이다. 또한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의 경우에도 두 문장의 의미는 다르다. 다만 우연히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을 뿐이며, 이 경우에도 두 문장의 진리치는 같지만 의미까지 같지는 않다. 프레게 이론은 많은 각광을 받았고 이를 통해 현대 언어철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후학자들은 프레게가 가정하는 형이상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 프레게 의미론에서는 다른 개념을 통해 프레게 의미론을 기술한다. 이들은 의미론적 값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의미론적 값은 문장의 요소가 문장의 진리치에 기여하는 부분과 방식을 말한다. 가령 주어는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지를 통해 문장의 진리치에 기여하며, 술어는 그 대상이 어떠한 집합에 포함되는지를 통해 문장의 진리치에 기여한다. 또한 'Ab and Cd'에서 Ab는 문장이 참일 확률을 50% 정도 증가시켜서 문장의 진리치에 기여한다. 이처럼 현대 프레게 의미론에서는 의미가 지시체를 결정한다는 형이상학적 가정보다는, 의미가 진리치에 기여한다는 개념을 선호한다.

 

프레게 의미론의 비판과 반론

프레게 의미론은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이중 몇가지는 오늘날에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프레게 의미론이 존재형태에 대한 문장(∃x)은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아래의 문장을 보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x)(x=신))

 

적어도 과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저 문장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저 문장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가진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의 지시체도 없기 때문에 저 문장도 진리치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 문장은 진리여야 한다. 왜냐하면 저 문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신'의 지시체가 없다는 주장도 거짓이기 때문이다. 즉 저 문장은 반드시 진리치가 있어야 하는데, 프레게 의미론에 따르면 저 문장은 진리치가 없다. 이러한 문제는 존재양화사가 개입하는 모든 문제에 해당한다.

 

이 비판에 대해 프레게는 존재양화사가 술어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은 존재양화사로, 술어와는 다르다. 실제로 수리논리학에서는 존재양화사가 따로 존재한다. 프레게는 그래서 위와 같은 문장이 'x=신 인 그런 x가 존재하지 않는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장은 신을 일종의 조건 상태로 만드는데, 이러한 표현방식에 따르면 신은 주어가 아니라 술어이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에서 잘 써먹는다.

 

다른 비판은 명제 태도와 관련하여 나왔다. 이 비판의 핵심은 치환성 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아래의 문장들을 보자.

 

  • 나는 김성근이 야신이라고 믿는다. I believe that sunken is the god of baseball.
  • 나는 세이콘이 야신이라고 믿는다. I believe that saikon is the god of baseball.

 

두 문장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특히 김성근의 일본식 이름이 세이콘이라는 것으로 모르는 사람은 전자는 믿지만 후자는 믿지 않을수 있다. 그러나 치환성 원리를 적용하면 두 문장은 동일한 진리치를 가진다. 따라서 내가 김성근이 야신이라고 믿는다면, 나는 세이콘도 야신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에는 이것이 참이지만, 세이콘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거짓이다. 이는 치환성 원리에 어떠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비판에 프레게는 that절에는 치환성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 즉 that 뒤에 있는 문장들, '김성은은 야신이다.'와 '세이콘은 야신이다.'에는 치환성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위의 원 문장들은 '나'가 어떤 명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 대한 문장으로 Abc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때 that절은 b/c에 해당하는 단칭 용어로써 기능하며 그 구성요소들(김성근, 세이콘, 야신)은 개별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례는 치환성을 잘못 적용했을때 일어나는 사례이다.

 

한편 근본적 비판과는 별개로, 후에 크립키는 프레게의 지표어 개념을 따로 반박했다. 지표어는 '나'나 '여기'처럼 화자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를 말하는데, 프레게는 일단 맥락이 결정되면 지표어가 한가지 대상만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나는 전설이다'에서 '나'는 이것을 말한 윌 스미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지표어를 그렇게 이해하는 경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쓰는 '나'와 각기 다른 시점에서 쓰이는 '현재'의 의미가 다 다른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지표어로 소통이 가능하냐고 반박한다.

 

포화된 용어의 문제

위 비판은 허술하게 무너졌지만 다른 비판(list problem)은 치환성 원리를 더 심각하게 공격한다. 가령 '스페셜 위크는 말이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 보자. 스페셜 위크는 경주마로, 즉 저 문장은 참이다(원래 비판에서는 레드 럼(red rum)을 사용하였다). 이 문장은 '스페셜 위크'라는 주어와 'x는 말이다'라는 술어로 나눌수 있는데, 후자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주어로 취급할 수도 있다.(사실 집합은 주어로 많이 지칭된다) 즉 'x는 말이다'라는 술어는 '말의 집합'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그러면 위의 문장은 '스페셜 위크 말의 집합'이라는 문장이 된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도 이상하고, 주어-주어 형태이기 때문에 진리치도 없어 보인다. 

 

초반에 프레게는 술어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함수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고(thought)를 어떤 함수로 볼 경우, 주어는 미지수로, 술어는 함수의 형태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술어가 어떤 집합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술어는 주어와 달리 함수의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단칭 용어로는 쓰일수 없다. 오직 우리가 '문장'이나 '의미'를 지시할 때처럼 이차적(혹은 메타적)으로 말할때만 단칭 용어가 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도 위와 같이 치환성을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러한 대응은 일견 훌륭해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이 대응은 한계를 보인다.

 

  • x는 말이다.
  • 'x는 말이다.'는 말의 개념을 지시한다.
  • '말의 개념'은 말의 개념을 지시한다.

 

프레게의 concept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위 문장들은 모두 참이다. 그리고 프레게에 따르면, 첫번째 문장과 3번째 문장은 공지시적이다.(즉 진리치가 같다) 그러나 이 문장들을 다시 스페셜 위크에 대해 적용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얻게 된다.

 

스페셜 위크 말의 개념

 

이로써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에 프레게는 술어는 포화된 용어가 아니라서 적용하면 안된다고 반박했다. 포화된(saturated) 용어는 프레게에 따르면 문장에서 무엇이든 지시할 수 있는 용어로 단칭 용어가 여기 해당한다. 이는 문장 안에서 정상적인 역할을 할때만 무언가를 지시하는 술어와 다르다. 프레게는 술어는 포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술어가 메타적으로 무언가를 지시한다고 여겨서는 안되며, 따라서 단칭 용어와 치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포화되었다는 말의 정의가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그렇다. 포화되었다는게 무슨말인지, 왜 포화된 용어와 불포화된 용어는 서로 치환하면 안되는지 프레게는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고, 이는 후대 학자인 데이비스에 의해 비판받는다.

 

필자는 왜 프레게가 그렇게 치환성을 고수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러셀의 의미론(한정기술구 이론)

프레게의 이론은 많은 환영을 받았지만, 그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았다. 특히 영국 경험주의자들은 추상적인 명제와 의미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했고, 의미가 그냥 지시체라는 소박한 의미론을 더 좋아했다. 따라서 이들은 소박한 의미론의 스탠드는 유지하되 문제만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분석철학의 아버지이자 영국의 논리철학자, 논리학자였던 러셀이 바로 이러한 일을 하였다.

 

러셀은 이론을 세우면서 한정기술구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한정기술구는 어떠한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통 the X로 표시된다. 한정기술구는 보통 하나의 단일한 대상을 지시하며, 단칭 용어가 아니라 술어이지만 일반적인 언어에서 단칭 용어처럼 사용될 수 있다. 이를 단칭 용어가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와 구별하기 위해 러셀은 한정기술구가 대상을 denote(지시로 번역)한다고 표현하였다. 한정기술구를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은 the X is F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러셀 주장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아는 주어가 대부분 한정기술구라는 것으로, 러셀에 따르면 복합 단칭용어는 모두 한정기술구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자.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이 문장은 러셀의 의미론을 설명할때 아주 잘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리고 보통 저 문장은 Fa(a=프랑스, F=대머리인 x)로 번역되는데, a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형적인 소박한 의미론의 한계이다. 하지만 러셀에 따르면, 저 문장은 Fa로 번역되지 않는다. 대신 저 문장은 다른 3개의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저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진리조건이기도 하다. 러셀에 따르면 정의는 동일한 것을 지시하는 다른 표현(문맥적 정의, contextual definition)이나 연역적으로 동치인 정확한 표현(명시적 정의, explicit definition)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아래 3개 문장은 명시적 정의이다.

 

  1. 프랑스왕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x)(Fx) 이를 존재조건이라 한다.
  2. 프랑스왕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x)(∃y)((x≠y)&(Fx&Fy)) 이는 프랑스왕이 한정기술구이기 때문이다. 이를 독특성(uniqueness)이라 한다.
  3. 모든 프랑스왕은 대머리이다.(∀x)(Fx->Gx) 이를 정언명제 조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3가지 조건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래 문장은 위의 진리조건들에서 연역되고, 반대로 이 문장에서 위의 진리조건들도 연역할수 있다.

 

(∃x)(Fx&((∀y)(Fy->(y=x&Gx))

> 증명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Fa로 간주하는 명제가, 사실은 한정기술구를 주어로 가진 명제일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프랑스왕은 대머리라는 명제는, 위에서 보았듯이 프랑스왕이라는 대상에 대한 명제라기보다는 '프랑스의 왕'이라는 속성을 가지는 어느 x에 대한 일반명제이다.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로 보면, 프레게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각각 개체상항이라고 보았다. 반면 러셀은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프랑스 왕과 마찬가지로 단칭 용어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둘은 일반적인 언어에서는 아주 비슷하지만, 논리적으로 분석되는 상황에서는 아주 다른 모습을 취한다.

 

우리가 샛별과 개밥바라기 문제가 한정기술구 명제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를 다루는 방법도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 프레게는 해당 명제가 Fa 형태이며, 다만 a의 지시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명제는 한정기술구 명제이다. 즉 샛별과 개밥바라기에 대응되는 어떤 대상이 있다기보다는, 이를 the X의 형태를 가진 일종의 술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샛별과 개밥바라기 명제는, 프랑스왕 명제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Fx인 셈이다.

 

이를 프랑스왕 명제에 적용해보자.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는 문장은 주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참/거짓을 판별할 수 없으며, 프레게에 따르면 진리치를 가지지 않아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왕이 술어(한정기술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프랑스 왕은 대머리라는 문장은 프랑스왕인 x가 대머리인 x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자세하게 말하면 프랑스왕이면서 동시에 모든 y에 대하여 y가 프랑스왕일때 y가 x이고 대머리인 어떤 x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x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어떠한 대상을 가정하거나 문장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고도(진리치를 빼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러셀은 기존에 사용되던 부정의 의미를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내적 부정(internal negation)으로, 내적 부정은 문장 안의 어떤 요소가 거짓이라는 뜻이다. 가령 프랑스왕 명제에서 내적 부정문은 프랑스왕이 대머리가 아니거나, 대머리가 프랑스왕이 아니라는 등 문장 내부의 무언가를 부정하며, 전자의 경우 (∃x)(Fx&((∀y)(Fy->(y=x&-Gx))로 표현된다. 반면에 외적 부정(external negation)은 문장 전체가 거짓이라는 뜻으로, -(∃x)(Fx&((∀y)(Fy->(y=x&Gx))로 표기된다. 

 

프랑스왕 명제의 경우 외적 부정은 성립한다. 그러나 '프랑스왕은 대머리가 아니다.'는 내적 부정문이고, 이것도 거짓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왕 명제는 외적 부정이 참인데, 외적 부정문은 프랑스왕 명제의 전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명제의 내적 부정이 성립하면, 그 명제는 거짓임으로 자연스럽게 외적 부정도 성립한다. 그러나 외적 부정문은 연역적으로 내적 부정문을 도출하지 않는다. 한편 내적 부정문에서 양화사는 주 연결사로서 기능하지만 외적 부정문에서 양화사는 ~에게 주 연결사 자리를 뺏겨 좁은 부분에서만 의미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두고 내적 부정문은 양화사가 넓다(wide scope)고 말하고, 외적 부정문은 좁다(narrow scope)고 말한다. 

 

이처럼 러셀은 한정기술구를 통해 단칭 용어의 사용을 제한했고, 주어를 술어로 기술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를 통해 프레게와 다른 방식으로 소박한 의미론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진리치나 사고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레게의 형이상학에 반대한 학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한정기술구 이론의 특성

한정기술구 이론은 소박한 의미론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프레게 의미론과 같다. 그러나 프레게와 달리 한정기술구 이론은 주어가 존재하지 않는 명제가 무의미하다고 치부하지 않는다. 대신 이 명제가 단칭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러셀도 단칭 용어가 존재한다고는 인정했지만, 그 범위를 축소하고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대신 남은 주어들의 대부분을 한정기술구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무의미하다고 버려진 명제들(주어가 존재하지 않는 명제들)에 의미와 진리치를 부여하였다.

 

한편 한정기술구 이론은 샛별과 개밥바라기 명제처럼 치환성 원리가 문제가 되는 명제에 대해서도 해석을 시도한다. 가령 아래의 두 문장을 보자.

 

  • 조지는 샛별이 개밥바라기인지 모른다.
  • 조지는 샛별이 샛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지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두 문장이 다 참이 될수 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소박한 의미론에서는 샛별=개밥바라기이기 때문에 두 문장은 동시에 성립할수 없다. 하지만 한정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샛별은 새벽에 뜨는 별인 x이고, 개밥바라기는 저녁에 뜨는 별인 x이다. 두 술어는 엄연히 다르며, 이때 조지가 모르는 것은 (∃x)(Fx&((∀y)(Fy->y=x)x=s))이다.(이때 Fx는 개밥바라기인 x. s=샛별) 즉 조지는 (∀x)((Fx->Fy)&x=y)는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문장은 엄연히 다른 것을 기술하는 문장이고, 상충되지 않는다.

 

한정기술구 이론은 경험론자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비판도 받았다. 주된 비판은 아래의 경우 한정기술구 이론이 이를 해결할수 없다는 것이다.

 

유령은 고블린이 아니다.

 

이는 지극히 맞는 말이다. 심지어 생김새도 다르다. 하지만 술어는 집합을 가리키는데, 유령 집합과 고블린 집합은 모두 공집합이다. 따라서 '유령'과 '고블린'이 모두 술어라면,위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러셀은 술어의 집합 이론을 버리고, 보편자 이론을 받아들였다. 러셀은 '유령'과 '고블린'이 서로 다른 유형을 가리키는 보편자이기 때문에, 설령 같은 공집합이더라도 서로 다른 술어라고 주장했다. 러셀은 이러한 해결책에 만족했지만, 아마 술어의 집합 이론 지지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양상논리를 동원하면 집합 이론을 가지고도 유령=고블린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집합 이론은 양상논리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논리적 고유명사와 러셀의 고유명사

러셀은 아주 긴 논증을 통해 주어란건 사실 술어라는 것을 논증했지만, 그가 모든 단칭 용어가 술어라고 주장한건 아니다. 1차논리가 성립하려면 어떻게든 Fa가 존재해야 하며, 이 a가 없다면 논리학 전체가 무너질수도 있다. 그래서 러셀은 논리적 고유명사(logically proper name)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단칭 용어는 실재한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적 고유명사를 찾아보는 일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다.

 

러셀은 일반적인 언어에서 사용되는 주어 거의 전부가 한정기술구라고 주장했다. 가령 2021년에 많은 사람들이 문재인을 욕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욕하는 문재인은 같지 않다. 한나라당 지지자에게 문재인은 민주당 대통령인 x이다. 디시 유저들에게 문재인은 현직 대통령인 x이다. 국민들에게 문재인은 전월세를 폭등시킨 x이다. 다행히도 이 x는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조금만 상황이 어긋나면 문제가 생긴다. 

 

만약 문재인의 부동산 정책이 성공해서 전월세가 내려간다면 어떨까? 대다수 국민들은 전월세를 폭등시킨 x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제 문재인은 나쁜 놈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디시 유저들에게 문재인은 여전히 나쁜놈이다. 문재인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말하는 바가 다르며, 이들은 모두 한정기술구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재인이,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정기술구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문재인은 지시체도 달라진다.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먼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면 아예 회화가 안된다. 어떤 대상을 부르는 명칭이 사람마다 다르면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사실 신 논쟁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또한 모든 주어가 이모양이면, Fa 형태의 명제는 성립할수 없다. 즉 우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단칭 용어를 설정해야 하며, 이게 설정되어야 논리적 대화가 가능하고 Fa를 기본 분석단위로 놓을수 있다.

 

무엇이 단칭 용어인가?

대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단칭 용어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단칭 용어가 무엇을 충족해야 하는지도 쉽게 알수 있다. 단칭 용어는 정의가 동일해야 한다. 문재인은 해당 안된다. 금성도 안되는데,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다르다고 하는 참극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단칭 용어는 누가 봐도, 그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가정 하에,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즉 논리적 사고능력을 갖췄다면 대상의 모든 특성과 성질을 알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기술해도 그게 그것임을 알아야 하며, 혼동이 없어야 한다. 가령 삼각형은 누가 봐도 인정할 각종 수학적 특성들을 가지기 때문에(상대주의자들은 꺼져라) 삼각형은 훌륭한 단칭 용어가 된다.

 

러셀은 단칭 용어가 this와 that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수학적 존재들은 잠시 무시하자) this는 여기 있는 것이고, that은 저기 있는 것이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여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다른 특성은 모른다.(애초에 미정이다) 따라서 오류를 범할 일도 없고 문제없이 치환성도 성립한다. 러셀은 단칭 용어가 3가지로 가능하다고 제안했는데, 보편자(삼각형과 같은 것), 자아(내 마음), 그리고 this와 that으로 지시되는 감각자료들이다.

 

감각자료들은 사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언어의 대상은 못된다.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this나 that으로 지시된 감각자료는, 이미 상대방도 같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객관적이며 따라서 단칭 용어를 충족한다. 이 경우 this/that은 어떠한 감각자료를 지시하는 것이며, 이러한 감각자료의 원인이다. 러셀은 this와 that이 감각자료들을 간접적으로 지시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간접지시의미론이라고도 한다. 

 

이 지점에서 러셀의 경험론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러셀은 대면 원리를 제안하였는데, 대면 원리(principle of acquaintance)는 명제가 전적으로 우리가 대면하여 알 수 있는 구성요소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편자는 생각을 통해 바로 알수 있는(대면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면 원리를 충족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대상들은 대면 원리를 충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을 통해 그것들을 보는 것이지, 그것을 직접 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자신의 휴대폰을 직접 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당신이 보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조그만 사각형 안에 글자들이 나열된 이미지이고, 휴대폰은 아마 그 이미지의 원천일 것으로 추정되는 this이다. 

 

러셀에 따르면 외부 사물은 단칭 용어로 기술되지 않고, 우리 앎의 기초도 아니다. 대신 기초는 감각자료이다. 이 감각자료를 통해 우리는 그것의 원인일 this/that을 유추해내고, 이것은 단칭 용어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 감각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this/that이 가리키는게 과연 무엇일지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러셀은 명제의 기초가 감각자료이며, 즉 사고의 기초도 감각자료라고 주장했다. 이는 감각이 모든 앎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던 영국 경험론에 잘 부합한다.  

 

 

화용론적 의미론

지금까지 우리는 철저히 의미론적 측면에서 언어를 다뤘다. 소박한 의미론에서 크립키 의미론까지 지금까지의 모든 언어철학 이론은 언어의 문법이나 사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미론을 구문론이나 화용론과 구태여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사용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르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나 방식이 달라질 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어가 진리치를 지시한다는 것도 언어를 사용하는 예 중 하나 뿐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문을 품은 몇몇 언어철학자들은 화용론과 의미론이 결합된 새로운 언어철학 이론을 만들고자 했다.

 

화용론을 의미론과 결합하려는 시도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을 뒤집으면서 시작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모사한다고 한 자신의 이전 주장을 뒤엎고, 언어가 특정한 규칙에 따라 사용되는 것이며 일종의 게임과 같이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다른 학자들도 호응하면서 철학적으로 다뤄지던 '이상언어' 대신 일상적으로 쓰이는 '일상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후에 일상언어학파로 불리게 된다.

 

명제에서 우리는 화용론에 대해 맛보기를 했다. 명제는 문장의 힘(force)에 따라 의미가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 '공 잡았다.'와 '공 잡아라'는 같은 명제를 담고 있지만, 다른 힘을 가지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는 다르다. 힘은 대개 언어적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데, 가령 한국어에서 문장이 의문적 힘을 가지려면 문장 끝에 '?'가 붙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너 병신이니?'는 의문문이 아니고, 반면 '나는 니가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의문문이다. 이처럼 힘은 항상 언어적 관례(convention)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상언어학파의 주장은 논리적인 기반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이 시도하는 귀납적인 접근은 이미 언어학에서 더 견고하게 실시하고 있다. 따라서 일상언어학파의 주장은(추론주의 의미론 제외) 신뢰하기보다는 특정한 철학 학파의 사상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언어행위 이론(speech act)

언어행위 이론(화행론)은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인 존 랭쇼 오스틴(John Austin)이 만든 첫번째 화용론적 의미론이다. 언어행위 이론에서는 기존에 언어철학에서 다뤄졌던 진리치를 표현하는 문장 이외에, 어떠한 의미를 진리로 실현하도록 종용하는 문장도 있다고 제안하였다. 가령 아래를 보자.

 

제인은 케인에게 먹이를 주었다.

제인은 케인에게 먹이를 주거라.

 

두 문장은 같은 명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상언어에서 두 문장이 하는 역할은 다르다. 위 문장은 단순히 주어진 어떤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제인이 케인에게 먹이를 준 사실을 그냥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래 문장은 단순한 보고를 넘어, 명제를 현실에 실현할 것을 종용한다. 아래 문장의 상황에서 제인이 케인에게 먹이를 준 사건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제인은 이 사건을 현실에 실현시켜야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어떤 말은 타인이나 자신에게 어떤 명제를 현실에 실현하도록 명령하는데, 오스틴은 이러한 말을 수행적 동사(performative verb)라 했다.

 

오스틴은 수행적 동사가 그러하듯이 언어는 무언가를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되는 대상은 자신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으며,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기준 하에서 오스틴은 발화행위(언어)를 아래처럼 3가지로 구분하였다.

 

  • 발화행위(locutionary act): 단순히 명제를 표현한다. 기존의 언어철학에서 다루는 문장이다. 그러나 '아야'처럼 명제를 가지진 않으나 문장을 표현하는 경우도 발화행위에 포함된다.
  •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 화자에게 명제를 실현할 책임을 부여한다. '나는 앞으로 살을 빼겠어.'라는 문장이 발화수반행위이다.
  •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ary act): 타인에게 명제를 실현할 책임을 부여한다. '너 고만 좀 먹어라'가 발화효과행위이다.

 

위에서는 3가지 행위가 각자 나뉘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위 3가지 모두 한 문장에서 함께 나타난다. 가령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자.

 

너 민트초코 먹니?

 

위 문장은 '너가 민트초코를 먹고 있다.'는 명제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발화행위이다. 한편 이 문장은 자신에게 타인에게 위 명제를 질문하도록 강제한다.(그리고 실제로 했다) 이는 발화수반행위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상대방에게 민트초코를 먹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발화효과행위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명제는 3가지 발화행위를 동시에 한다.

 

오스틴에 따르면 화용론의 주된 대상은 발화수반행위이다. 왜냐하면 발화수반행위는 화자가 그 언어로 하려고 하는 의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화수반행위가 가지는 힘(illocutionary force)은 문장의 관례에 따라 달라지며, 한편으로는 관례와 별개로도 작용한다. 반면 발화효과행위는 청자 중심이기 때문에 화자의 의도와 관련된 화용론과는 연관이 적으며, 화자의 의도가 동반될 필요도 없다.(니가 그럴 의도가 없었어도, 내가 상처받은건 변하지 않는다) 이때 발화효과행위는 화자를 주어로 하고 청자를 목적어로 하는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화자는 청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으로 발화를 하기 때문에, 완전히 관계가 없지는 않다.

 

함의(implicature)

함의 이론은 자비의 원리를 제안한 그라이스가 제시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종래의 언어철학에서 사용했던 함축 개념의 대안으로 함의를 제시한다. 함축(entail)은 언어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로, 서로 필요충분조건인 두 대상을 기술할때 사용된다. 가령 a<=>b라면, a는 b를 함축한다.(반대도 성립한다) 이런 사용은 복잡한 수리논리학적 명제를 기술할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래의 두 문장이 왜 같은 뜻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찰리씨 집에 있니?

찰리좀 바꿔줄수 있니?

 

논리적으로 볼때, 위 문장은 찰리가 집에 있는지 여부를 묻고 있다. 반면 아래 문장은 찰리에게 전화를 바꿔줄 수 있는지 여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위의 말을 들으면(특히 찰리가 근처에 있다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찰리에게 전화를 바꿔줄 것이다. 분명 두 문장은 논리적으로 다른 명제를 표현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두 문장이 같은 명제를 표현하는 듯이 행동한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그라이스는 대화적 함의(conversational implicatur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대화적 함의는 두 문장이 서로를 함축하지는 않지만, 화용론적으로는 서로를 함축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위의 문장은 서로를 함축하진 않지만, 대신 서로를 함의한다. 따라서 화용론적 입장에서 위 문장중 하나를 거절하고 다른 하나를 수용하는 것은, a<=>b일때 a를 부정하고 b를 수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행위이다. 그라이스는 화용론에서 대화적 함의가 발생하는 이유로 협조적 원리(cooperative principle)를 들었다. 협조적 원리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할때 가정하는 일종의 대화 규칙인데, 그라이스는 사람들이 대화를 할때 모두 협조적 원리를 추가적인 가정으로 도입하기 때문에 대화적 함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협조적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 maxims of quality: 남한테 거짓말하지 마라. 니가 잘 모르는 것도 함부로 말하지 마라.
  • maxims of manner: 간단하고 명확하게 얘기해라.
  • maxims of relation: 맥락 안에서 얘기해라. 갑자기 뜬구름 잡지 말라는 소리다.
  • maxims of quantity: 정보는 필요한 만큼한 얘기해라. 사족붙이지 말라는 소리다.

 

협조적 원리들은 일종의 구성적 룰(constitutive rule)이다. 그래서 그라이스에 따르면, 협조적 원리들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규칙이 아니라 그것을 대화라고 부를 규칙이다. 구성적 룰이 성립하지 않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음성의 교환일 뿐이고, 대화는 구성적 룰 하에서 시행되는 음성 교환이다. 그러나 대화의 형식과 상황에 따라 협조적 원리는 약간씩 위배될 수 있다. 가령 협조적 원리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직설적인 부정적 표현은 되도록 삼가려고 한다.

 

이제 함의 개념을 다른 문제에 적용해보자. 다음 문장을 보라.

 

니가 대통령이면, 나는 대통령 할애비다.

 

위 문장은 보통 거짓으로 받아들여진다. 듣는 사람이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우기더라도, 저 문장 자체는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너는 내 할애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때 이 문장은 참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니가 대통령'인 상황에서는 '나는 대통령 할애비'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 전건이 거짓이고 후건도 거짓인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장이 포함한 두 명제는 거짓이 되지만, 전체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 문장이 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 문장에 협조적 원리들을 적용해 보자. 내가 대통령 할애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나라의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따라서 위 문장에서 '나는 대통령 할애비다'라는 문구는 누구나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장은 엄밀히 따지면 maxims of quantity를 위반한 문장이며, 화용론적으로는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이 보통 어떤 놈이 자기가 대통령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maxims of relation에 따라 상대방이 그놈의 헛소리에 맞받아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가정 하에서 사람들은 위 문장이 거짓이라는 것과, 그러면서도 용인될 만한 말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다.

 

한정기술구 논쟁

이제 화용론이 의미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다른 의미론을 보도록 하자. 일상언어학파가 언어철학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후, 어떤 학자들은 화용론적 입장에서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이중 스트로슨은 러셀에 대한 비판자였다. 그리고 스트로슨이 한정기술구 이론에 가한 비판은 다분히 화용론적인 성격이 짙었다. 두 학자의 충돌은 러셀이 언어의 지시대상이 한정기술구의 형태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 반면, 스트로슨은 인간이 그 한정기술구로 지시하는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데에서 발생했다.

 

스트로슨의 공격

스트로슨의 반대는 러셀의 처음 가정부터 시작한다. 러셀은 '프랑스왕은 대머리다.'가 거짓이며, 이를 프레게 의미론이 잘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스트로슨은 프랑스왕 명제를 거짓으로 볼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프랑스왕이 지시하는 대상은 없고, 당대 기준으로 아무도 '프랑스왕'으로 누군가를 지시하지 않았다. 즉 저 문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문장으로, 고리타분한 철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지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저걸 의미가 없는 문장으로 놔두면 되지 왜 굳이 끌고와서 거짓이라고 단정하는가?

 

또한 러셀은 프랑스왕 명제를 쪼개서 '프랑스의 왕인 x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끄집어낸다. 그러나 스트로슨은 그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과연 그것을 주장하냐고 공격한다. 실제로 저 문장을 제시했던 러셀에게 가서 물어보자. 아마 그도 자신이 프랑스의 왕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답할 것이다. 즉 저 문장에 프랑스 왕이 들어있긴 하지만, 아무도 그걸 가지고 프랑스에 왕이 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이에 러셀의 지지자들은 언어의 지시대상은 한정기술구가 결정하지, 그걸 말하는 사람이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에 스트로슨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The apple is on the table.'은 번역하면 사과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러셀 식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된다. 왜냐하면 이 문장의 주어는 apple이 아니라 the apple인데, 이 단어는 한정기술구라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과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가정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반박하려면 apple과 is 사이에 '이 방에 있는'이나 '여기있는'과 같은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문장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문장을 듣는 사람이 그런 판단을 하기 때문에 숨어있는 수식어를 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언어의 지시대상이 문장의 형태로 결정된다는 주장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스트로슨은 한정기술구 이론을 대신할 다른 의미론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한정기술구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다.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상이고, 사람이 맥락과 문장의 의미를 통해 지시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언어의 의미는 맥락과 명제가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러셀의 지지자들은 방식이 어떻든, 결국 대상을 지시하는건 언어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맥락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결국 맥락과 문장이 결합하여 명제가 형성되면 이 명제는 사람이 뭐라하든 특정 대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로 인해 스트로슨과 러셀 지지자들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도널란의 중재

도널란은 위의 문제를 referential use와 attributive use의 구분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attributive use는 단어를 한정기술구처럼 사용하는 경우로, 러셀 의미론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국회의원이 새로운 장애인 복지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 법이 '장애인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x를 이르는 말로, 반드시 그 국회의원이 지시하는 대상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설령 그가 자기 지역구의 장애인들을 위해 법안을 발의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기자회견장에서 말한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x를 지시한다.

 

반면 referential use는 화자의 의도에 따라 지시대상이 결정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스트로슨의 주장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지시한다. 가령  어떤 사람들이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야이 눈장애인 새끼야'라고 했다고 하자. 이때 그가 말한 '장애인'은 실제로 눈이 불편한 사람들을 지시하는게 아니라 자신과 싸우고 있는 눈 멀쩡한 상대방을 지시하는 말이다. 비슷하게 우리는 최근까지 윤상여 씨를 화성 8차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잘못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동안 '화성 8차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실제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상여 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near-miss case)

 

위의 예에서 보이듯이, 도널란은 단어가 attributive use와 referential use를 동시에 가진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된 무언가를 가리킬때 쓰기도 하고, 내가 부르고 싶은걸 부를때 쓰기도 한다. 과학 논문을 쓸때는 철저히 attributive use가 강조되고, 반면에 욕은 거의 다 referential use다. 도널란은 스트로슨의 가장 큰 실수가 단어의 attributive use를 부정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러셀도 단어의 referential use를 부정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추론주의 의미론

현재 일상언어학파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다. 화용론적 입장 중 언어의 사용이라는 개념은 이들이 언어철학에 가져온 후 의미론과 결합하여 추론주의 의미론이 되었으며, 이 이론은 주류는 아니지만 나름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샐리스와 브랜덤이 제안한 추론주의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가 그 언어의 규칙이라는 이론이다. 

 

이들은 논리학에서의 도입룰과 제거룰이, 언어와 비언어적 요소를 잇는 일종의 언어간 규칙(interlinguistic rule)이라고 주장한다. 도입룰은 비언어적인 어떤 현상을 언어적인 현상으로 명명하는 규칙이다. 제거룰은 언어적인 현상을 제거하여도 비언어적 현상이 표현되는 경우를 규정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규칙에서 비로소 의미가 정의된다. 따라서 언어의 본질은 추론규칙이고, 의미라는 것은 그저 추론규칙의 파생물에 불과하다.

 

추론주의 의미론에서는 논리적 개념이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다. 'p가 참이다'는 명제는 추론주의 의미론에서는 'p를 주장할 수 있다'로 번역된다. a=b는 추론주의 의미론에서는 'a=b라고 주장할 수 있다'로 번역된다. 지시와 진리라는 개념은 규칙(normativ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일상언어학파의 시조 격인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유래했고, 지금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데이비드슨의 의미이론

분석철학은 20세기 중반에 두개의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칸트적인 입장이 발흥하면서 논리실증주의가 쇠락했고, 그 사이에 등장한 크립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를 다시 열었다. 특히 분석철학에 나타난 칸트주의자들은 논리실증주의를 뒤엎으면서 경험주의의 우위를 잠재웠고, 언어철학은 물론 철학계 전반에 상대주의 기조를 부흥시켰다. 어찌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 열풍에는 두명의 공헌자가 있는데, 바로 콰인과, 고대철학의 전공자였던 도널드 데이비드슨(데이빋슨)이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데이비드슨이 콰인보다 먼저지만, 데이비드슨의 이론은 콰인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콰인은 자연주의자이자 과학주의자였고, 의미란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철학자였다. 데이비드슨도 콰인과 마찬가지로 의미론이 경험적으로 연구되어야 하며, 프레게나 러셀처럼 선험적으로 무언가를 가정한 채로 의미론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콰인과 달리 경험을 통해 의미를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자비의 원리를 이성이 가진 선험적 원리로 제시하면서 분석철학에서 칸트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언어의 의미이론

데이비드슨의 의미론은 기존의 의미론과는 차이가 있다. 종래에 정설이었던 러셀과 프레게의 의미론은 논리학에 기반했으며, 즉 수학적 필요를 위해 개발된 술어논리 언어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의미론은 그러한 인공언어가 아니라 실제 자연언어를 대상으로 이뤄져야 하며, 따라서 의미론은 우리가 모든 구성요소를 아는 인공언어의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이 아니라 특정 자연언어 L이 가지는 의미와 의미론적 사실들을 기술하는 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은 기존의 의미론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언어 L에 대한 의미이론(a theory of meaning for L, 의미이론)이라고 불린다. 이때 언어 L을 대상언어라 하고 의미이론을 기술하는 언어를 메타언어라 한다. 가령 영어에 대한 의미이론을 다루는 경우, 이 이론의 대상언어는 영어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국어로 이 이론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의미이론의 메타언어는 한국어이다. 한국어 화자인 우리는 귀납적인 방법으로 영어를 연구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데이비드슨도 의미이론은 대상언어에 대한 귀납적 연구를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슨의 작업은 의외로 논리실증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이비드슨은 다른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실제 의미이론을 만드는 것은 과학이 하고 철학자들은 의미이론이 어떠한 형태를 가져야 하는지 형태만 잡아주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할 일은 의미이론이 어떠한 형태를 가져야 하는지 철학적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의미이론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여기에 더해 데이비드슨은 모든 언어가 구성성을 가지기 때문에, 의미이론은 그 언어가 어떻게 유한한 표현으로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지 잘 설명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프레게 비판

의미이론의 형태를 다지는 것은 철학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철학자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할 수가 있다. 데이비드슨은 연구를 거듭한 후, 어떤 방식은 의미이론을 규정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중 하나가 프레게 의미론으로, 데이비드슨은 프레게 의미론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따르면 프레게 의미론은 결국 의미이론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표현 a의 의미는 b이다.

 

그렇다면 프레게 의미론의 문제는, 도대체 b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b가 지시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프레게가 제시한 의미(sense)는 진리조건이지 진리값(지시체)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b는 어떤 추상적인 의미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의미이론은 '표현 a의 의미는 표현 a의 의미다.'라는 이상한 형태를 취한다. 이건 번역되었을때 의미가 제대로 보존되는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이게 이론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또한 이 이론은 언어의 구성성을 잘 담지 못한다. 의미이론은 표현 '나'와 표현 '먹었다', 표현 '물고기'를 결합할때 어떤 방식으로 의미가 구성되는지 제시해야 하는데, 안그러면 '나는 물고기를 먹었다'와 '물고기가 나를 먹었다'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list problem) 

 

한가지 가능한 대안은 의미이론을 '표현 a는 p를 의미한다.'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p는 특정 메타언어 표현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가령 사과의 의미이론을 만든다면, 'apple은 '사과'를 의미한다.'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메타언어의 사용자들에게 대상언어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고(이게 번역의 기본 원리이다), p는 구성적이기 때문에 list problem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프레게의 외연주의가 발목을 잡는다. 프레게는 술어가 어느 집합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는데, 지시체가 같은 술어는 서로 바꿔도 문장의 진리치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아래의 문장(술어)은, 프레게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기 때문에 서로 바꿔써도 된다.

 

1+1=2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

 

이는 프레게 의미론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프레게 의미이론에서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one plus one equals two는 1+1=2를 의미한다.'는 참인데, 그렇다면 치환성 원리에 따라 다음의 문장이 참이 되기 때문이다.

 

one plus one equals two는 'ㅊ'를 의미한다.

 

물론 이는 참이 아니다.

 

데이비드슨의 해결책: T문장

앞서 우리는 타르스키 문장의 형태를 갖춘 의미론이 좋은 의미론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는 의미이론에도 해당하는 듯하다. 데이비드슨은 프레게 의미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술어를 외연으로 정의하는 프레게의 특징은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데이비드슨은 의미이론을 다음과 같은 T문장으로 만들었다.

 

표현 a는 p가 참이고, p가 참인 경우에만 참이다.

 

이를 위에 적용해보자. one plus one equals two는 1+1=2일때 참이다. 둘은 구성성도 공유하고, 메타언어 사용자들에게 대상언어의 의미도 충분히 전달한다. 이제 다음 조건을 보자. one plus one equals two는 1+1=2가 참인 경우에만 참이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가 성립하면 one plus one equals two도 참이긴 하지만,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이 되든 160이 되든 상관은 없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60인 이상한 상황이 되도 one plus one equals two는 참일 수 있지만, T문장에 기반한 정의에 따라 1+1=2이 거짓이면 one plus one equals two도 거짓이다. one plus one equals two는 1+1=2가 참이 되는 그 경우에만 참이다. 따라서 술어의 집합 이론과 치환성 원리를 여전히 유지된다.

 

T문장도 프레게 의미론과 마찬가지로 진리조건을 제시한다. T문장은 술어 p와 단칭 용어 a에 의존하는 진리함수이다. 따라서 데이비드슨의 새 해결책에서도 의미는 진리조건이다. 그러면서도 T문장의 형태를 띈 의미이론은 외연적이고, 대상언어의 의미를 적절히 알려준다. 그러나 T문장은 a의 구성성을 오로지 p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T문장식 의미이론은 언어의 구성성은 아직 잘 담아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며, 무한한 수의 a에 각각의 T문장을 만들어 붙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데이비드슨도 이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의미이론을 구성성을 담을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

 

T문장식 의미이론

대부분의 언어는 구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정된 어휘와 문법을 가지고 무한한 수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미이론도 '이론'으로서 한정된 어휘와 추론규칙을 가지고 무한한 수의 의미를 이해해서 메타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비드슨의 해결책은, 자신이 앞에서 거부했던 의미론을 차용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기본적인 방향은 거부하되, 그들이 사용한 기호논리학은 가져와서 사용하는 것이다.

 

술어논리를 한번 다시 보자. Fa에서 a는 지시체이고 F는 술어이다. Fa는 a가 F를 만족하고, a가 F를 만족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다. -Fa는 Fa가 거짓이고,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다. Fa&Ga는 Fa가 참이고 Ga가 참이면서 오직 그러할 경우에만 참이다. 우리는 각각의 개체상항과 술어, 연산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처음 보는 기호논리 문장이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있다. 술어논리 문단은 2021년 5월 기준으로 6문단에 22줄밖에 안되지만, 이것만 알면 무한한 수의 기호논리 문장이 가진 뜻을 전부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추론규칙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Fa->Ga란 문장이 무슨 뜻인지 직접 배우지 않았더라도, F와 a가 각각 무슨 뜻이고 ->가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에 이들을 써서 뜻을 조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언어도 추론규칙, 즉 문법을 알면 뜻을 알 수 있다. 'Senny hate quatulu.'라는 문장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주어-동사-목적어로 구성되는 영어의 문법규칙과, hate가 '싫어하다'라는 뜻을 가진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저 문장을 태어나서 처음 봄에도 불구하고 'senny가 quatulu를 싫어한다'는 저 문장의 뜻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의미이론의 반은 완성했다. 의미이론은 T문장의 형태를 가져야 하고, 문법규칙들과 각 어휘들에 대한 의미만 T문장으로 정리하면 된다. 그러나 술어논리와 같은 인공언어와 달리 자연언어에서는 문법규칙과 어휘를 알기 힘들다. 세상에서 처음 듣는 언어의 문법을 무슨 수로 아는가? 이제 우리는 의미이론의 나머지 반, 의미이론을 어떻게 입증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번역 미결정성 문제

번역 미결정성 문제는 같은 현상을 기술하는 언어표현이 최소한 2개 이상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콰인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번역 미결정성 문제는 일부 과학철학자들과 대다수의 과학사회학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갖은 오류를 양산해 대었다. 그러나 사실 번역 미결정성 문제는 언어의 문제고, 콰인이 의도한 것도 특정한 의미론적 주장을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과학철학적 입장과 아주 무관하지만은 않고, 데이비드슨은 번역 미결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번역 미결정성 문제는 철학을 배운다면 한번씩은 들어보게 될 가바가이를 번역하는 와중에 튀어나오는 문제이다. 당신이 어느 아마존 원주민의 언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라고 해보자. 그들은 영어도 모르고, 포르투갈어도 모른다. 당신은 그들의 언어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고, 다만 얼굴표정을 통해서 예/아니오는 알수가 있겠다. 이때 저기 저 숲에서 토끼가 튀어나오자 원주민 하나가 '가바가이'라고 했다. 당신이 토끼를 가리키며 '가바가이?'라고 묻자, 원주민은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비가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T문장을 만들 수 있다.

 

가바가이는 토끼가 있고, 토끼가 있는 경우에서만 참이다.

 

이제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인류학자는 아마존 친구들의 언어에 대해 더 많은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말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본 결과, 그들은 뱀이 나타나면 '볼로가이'라 하고, 사람이 나타나면 '데루가이'라고 한다. 아마 이 '가이'란 표현이 '-가 있다'라는 뜻인갑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아마존 원주민 언어의 문법규칙을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아마존 원주민이 캐피바라를 보고 '가바가이'라고 말했다. 관찰 결과를 놓고 볼때, 이들에게 캐피바라는 토끼의 일종인가 보다. 그러나 인류학자는 그 아마존 원주민이 실수를 자주 하고, 사냥에서도 항상 엉뚱한 표적을 쫓기 일쑤이며, 언젠가 일주일간 밖에 있다가 돌아왔더니 이놈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냥 얘가 멍청해서 캐피바라를 토끼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바가이는 캐피바라도 포함하는가? 아니면 토끼만 얘기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평상시에도 발생한다. 인류학자는 이들이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으며,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손에 상처를 내고 물에 넣어두는 멍청한 민족임을 알고 있다.(잘못하면 피라냐에 물린다) 그렇다면 이런 의심도 가능하다. 이들은 토끼랑 다른 동물을 구분할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가바가이는 사실 사슴이나 아나콘다를 뜻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혹은 저번에 족장이 다른 원주민의 통수를 쳐서 고기를 훔쳐간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친구들이 나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바가이가 토끼라고 해석할 근거가 있는가?

 

콰인은 이런 경우 우리가 가진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원주민들은 착하고, 똑똑하며, 저 친구도 토끼랑 캐피바라는 구분할줄 안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가바가이는 캐피바라를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주민들은 착하고 똑똑하지만, 저놈은 멍청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면, 가바가이는 그냥 토끼이다. 그리고 '원주민은 항상 나를 속이려 든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면, 가바가이는 토끼가 아니다. 단순히 원주민들의 말을 들어서는 이 셋 중 어느 이론이 맞는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는 어떤 이론에 근거해서 가바가이가 무슨 뜻인지 결정한다. 현상은 동일하지만, 가바가이의 의미는 우리가 가진 선입견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콰인은 과학을 버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의미'라는 개념을 버린다. 선입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면,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게 가능한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왜 연구하는가? 따라서 번역 미결정성의 문제는 콰인의 자연주의와 결합하여 의미라는 게 그냥 없는 개념이라는 일종의 허구주의로 귀결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와 과학사회학자들은 의미를 버릴수는 없기 때문에, 대신 과학을 버리고 온갖 비방을 일삼고 있다. 데이비드슨은 과학과 의미를 모두 살릴 수 있는 길을 고안했다. 마치 200년전 칸트가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살릴 길을 고안했듯이 말이다.

 

자비의 원리 확장판

자비의 원리(자비의 원칙)는 상대방과 토론을 할때, 상대방이 성심성의껏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상대방과 토론을 할때 나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적절한 근거가 있으며,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방의 주장은 가급적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메시지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터넷 병신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자비의 원칙을 유지하기가 참 쉽지 않지만, 일단은 규칙이다. 

 

데이비드슨의 핵심 주장은, 언어의 의미를 해석할때 자비의 원리를 항상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슨은 실제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비의 원리에 따라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비의 원칙은 논리적인 대화를 할때 실질적으로 필요하다. 학자들은 서로 대화할때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기 때문에 '한남'이니 '메갈'이니 딱지를 붙이고 쌍욕을 박는 것으로 대화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자비의 원리는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며, 적어도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원리가 꼭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슨은 위의 아마존 원주민들에게도 자비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비의 원리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똑똑하고, 선량하며, 저 멍청해 보이는 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마 가바가이는 캐피바라도 같이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면 서로 이론이 대립하지도 않고, 안정적으로 의미를 찾아내는게 가능하다. 물론 자비의 원리를 가정할 경험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이는 과학적 연구는 아니다. 하지만 과학적이진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의미를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성은 과학에서 쓰이는 이성보다는 칸트의 이성 개념에 가깝다. 칸트는 이성이 세상을 이해하는 선험적 틀이며,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인 시공간은 우리 이성이 사용하는 선입견이지만, 이것이 반드시 참일 필요는 없다. 비슷하게 데이비드슨도 자비의 원리가 무조건 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의미는 해석에 의해 발견되며, 해석은 이성이 능동적으로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이성은 바로 이 자비의 원리 하에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이런 면모 때문에 데이비드슨이 칸트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이다.

 

데이비드슨의 주장은 분석철학은 한번 뒤흔들었다. 콰인의 번역 미결정성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한 논리실증주의는 자비의 원리 개념으로 완전히 박살이 났다. 증명되지 않고 증명될 수도 없는 기초적인 원리가 우리 이성과 탐구의 기반이라면, 이것이 다른 형이상학보다 우위에 있는가? 데이비드슨이 주장한 자비의 원리는 분석철학에 칸트주의를 불러왔고, 분석철학에서는 칸트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이성의 절대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분석철학에 상대주의적 기조가 강해졌고, 대륙철학에서도 상대주의적 분위기가 더 강화되었다. 21세기에 들어 크립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뜰때까지 철학은 한동안 칸트와 상대주의자들이 지배했다.

 

그러나 자비의 원리를 탐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지는지는 미지수다. 언어학자들은 자비의 원리를 전혀 가정하지 않고서도 언어를 잘 연구한다. 언어심리학에서는 아기들이 어떻게 단어를 지각하고 음소를 지각하는지에 대해 무수한 연구를 쌓아왔는데, 데이비드슨도 아기들에게까지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칸트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은 상대성 이론과 함께 박살났고, 이제 최소한 물리학자들은 휘어지고 꺾이는 시공간 개념을 아주 잘 받아들인다. 자비의 원리가 없어도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의미를 아주 잘 연구하는 듯하다.

 

 

의미 회의론

현재 언어철학에서 가장 핫한 이론은 의미 회의론이다. 의미 회의론은, 말 그대로 의미란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많은 언어철학자들은 의미 회의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의미 회의론을 어떻게 이겨낼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이론을 처음 학계에 제안한건 콰인이고, 콰인의 대척점이기도 한 크립키도 의미 회의론을 주장하면서 언어철학에 의미 회의론이 널리 알려졌다. 한편 의미가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설명하는 단일한 의미론을 만드는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콰인의 언어철학

콰인은 분석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유명한 학자로, 그 영향은 분석철학을 넘어 대륙철학으로(다소 형태가 이상하긴 하지만) 퍼졌다. 극단적으로 분석철학의 역사는 콰인 이전과 이후로 나뉘고, 콰인의 유명한 논문[각주:2]은 분석철학에서 흄의 시대를 끝내고 칸트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철저한 자연주의자이자 과학주의자로서 모든 학문이 과학이 되어야 생각했고, 철학도 일종의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유명한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서 논리법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그조차도 경험적으로 연구되는 과학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의미이론도 과학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무의미한 말놀음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논증끝에, 그는 의미이론이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의미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는 과학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이론은 무의미한 말놀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콰인은 의미는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기는 해도 철학적인 의미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콰인의 의미이론(gabagai, 가바가이 문제)

콰인도 데이비드슨과 마찬가지로 의미론은 언어에 대한 경험적 탐구에서 얻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콰인이 먼저고 데이비드슨은 그 다음이다. 콰인은 언어성향 매뉴얼이 의미이론의 탐구대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언어성향 매뉴얼이란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문장에 동의하고, 어떤 문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어떤 문장은 둘중 하나를 택하지 못하는지를 규정하는 매뉴얼이다. 콰인은 이러한 언어 성향 매뉴얼을 탐구하는게 의미이론이 하는 일이며, 이를 알면 그 언어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수 있는 모든 것을 알수 있고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이론이 어떠한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콰인은 정글의 언어학자를 가정했다. 당신이 어느 아마존 원주민의 언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라고 해보자. 그들은 영어도 모르고, 포르투갈어도 모른다. 당신은 그들의 언어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고, 다만 얼굴표정을 통해서 예/아니오는 알수가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콰인은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 상황이라고 정의했으며, 의미이론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언어를 탐구한다고 제안했다.

 

데이비드슨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저기 저 숲에서 토끼가 튀어나오자 원주민 하나가 '가바가이'라고 했다고 하자. 당신이 토끼를 가리키며 '가바가이?'라고 묻자, 원주민은 그렇다고 했다. 다른 원주민들도 토끼가 튀어나온 상황에서는 모두 가바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바가이는 토끼가 나타나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가바가이가 '토끼가 튀어나옴' 사건과 인과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으며, 과학자들은 모두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각 표현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낼 방법은 생겼다. 이제 구성성을 파악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며칠 후 당신은 원주민이 흰 토끼를 보고 '가바가이 블라'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원주민이 흰 뱀을 보고 '비올레타 블라'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흰 뱀과 흰 토끼는 모두 흰색을 공유하고 있음으로, '블라'는 흰색을 의미하는것 같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형용사를 알 수 있고, 동사나 논리적 연결사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만 고려해보면 의미이론은 충분히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 미결정성 문제(indeterminancy of translation)

그러나 가바가이가 실제로 어떤 뜻을 가지는지를 확인해야 할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가바가이는 '토끼가 나타남' 상황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가바가이의 뜻은 토끼인가? '나타남'인가? 아니면 큰 두 귀인가? 혹은 짧은 꼬리인가? 흰 뱀을 보고 비올레타 블라라고 하니 일단 나타남은 아닌것 같다. 그렇다면 큰 두 귀를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가 오래 조사하면서, 큰 두 귀나 짧은 꼬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하자. 그럼 가바가이의 뜻은 토끼인가? 현재 토끼인 x를 의미하는 토끼-상태(rabbit-stage)일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흰 뱀이 비올레타 블라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하는가? 비올레타는 기다란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일수도 있지 않은가?

 

이 긴 대화가 의미하는 것은 단어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의를 확장해보면, 우리는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의미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관찰한 토끼 나타남-가바가이 연결고리는, 가바가이가 토끼가 아니라 큰 두 귀이거나 토끼-상태여도 성립한다. 같은 현상을 번역하는 많은 방법이 있으며, 콰인은 이 번역들(의미 후보들)이 모두 동등하게 현상을 설명한다고 논증한다. 이들을 경험적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없다. 즉, 단일한 의미를 결정할 과학적 방법은 없다.

 

이처럼 어떤 현상을 지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역설을 콰인은 지시의 불가해성(inscrutability of reference)이라 한다. 그러나 지시의 불가해성은 번역 미결정성의 일부일 뿐이다. 역시 데이비드슨에서 했듯이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자. 어느날 어느 아마존 원주민이 캐피바라를 보고 '가바가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한가지 해석은, 이들에게 캐피바라는 토끼의 일부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는 그 아마존 원주민이 실수를 자주 하고, 사냥에서도 항상 엉뚱한 표적을 쫓기 일쑤이며, 언젠가 일주일간 밖에 있다가 돌아왔더니 이놈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냥 얘가 멍청해서 캐피바라를 토끼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바가이는 캐피바라도 포함하는가? 아니면 토끼만 얘기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평상시에도 발생한다. 인류학자는 이들이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으며,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손에 상처를 내고 물에 넣어두는 멍청한 민족임을 알고 있다.(잘못하면 피라냐에 물린다) 그렇다면 이런 의심도 가능하다. 이들은 토끼랑 다른 동물을 구분할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가바가이는 사실 사슴이나 아나콘다를 뜻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혹은 저번에 족장이 다른 원주민의 통수를 쳐서 고기를 훔쳐간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친구들이 나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바가이가 토끼라고 해석할 근거가 있는가?

 

콰인은 이런 경우 우리가 가진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원주민들은 착하고, 똑똑하며, 저 친구도 토끼랑 캐피바라는 구분할줄 안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가바가이는 캐피바라를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주민들은 착하고 똑똑하지만, 저놈은 멍청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면, 가바가이는 그냥 토끼이다. 그리고 '원주민은 항상 나를 속이려 든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면, 가바가이는 토끼가 아니다. 단순히 원주민들의 말을 들어서는 이 셋 중 어느 이론이 맞는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는 어떤 이론에 근거해서 가바가이가 무슨 뜻인지 결정한다. 현상은 동일하지만, 가바가이의 의미는 우리가 가진 선입견에 의해 결정된다.

 

콰인의 결론과 대안

이러한 역설은, 의미이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시체를 가리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언어에 대해 어떤 가정을 하지 않으면, 의미를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것도 알 수 없다. 물론 이는 언어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가바가이가 '토끼 나타남' 현상이 있을때 나타난다는 법칙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가바가이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없으며, 옳은 의미로 여겨질 수 있는 후보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콰인의 결론은 하나다. 과학이 아닌 학문은 무가치하며,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의미란건 존재하지 않는다.

 

콰인이 경험주의 비판에서 혁명을 일으켰듯이 그의 의미 회의론도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프레게와 러셀의 지지자들은 의미가 반드시 경험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비웃었으며, 실제로 의미와 같은 심적 존재가 객관적인 행동으로만 연구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행동주의는 이미 그때도 침몰하고 있었다. 크립키도 인공언어의 지지자 중 하나지만, 그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 회의론을 만들어서 콰인의 결론을 더 강하게 지지했다. 

 

과학학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콰인을 곡해하여 과학과 이성이 무너졌다고 선전했다. 물론 그러면서 그들은 담론이나 내러티브라는 의미를 가정하고 신나게 놀음을 벌였는데, 이들은 그저 콰인을 이해하지 못한 놈들이다. 가장 영향력있는 대안을 내놓은 사람이 앞서 본 데이비드슨으로, 데이비드슨이 내놓은 자비의 원리라는 대안이 언어철학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콰인이 박은 못에 데이비드슨이 최종적을 망치를 내려찍으면서 분석철학에서 흄의 시대는 끝났고, 칸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크립키의 의미 회의론

크립키의 의미 회의론은, 크립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이다. 크립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읽고 그가 의미 회의론을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크립키가 주장한 의미 회의론 논증은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이라고 불린다. 비록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아주 단단히 오독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지만, 이 논증은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정신을 가정한 상태에서도 의미 회의론을 논증하기 때문에 콰인의 의미 회의론보다 더 강력하다.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의미이론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어떤 사실로 가려낼 수 없다. 즉 '콰인이 +로 덧셈을 의미한다'와 같은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크립키(크립키 말로는 비트겐슈타인)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의미를 판별할 수 있는 사실이 포함된 영역을 모두 살펴보고, 그러한 영역이 없음을 밝힌다. 

 

이를 위해 다음을 가정하자. 과인은 어떤 사람인데, 그는 지금까지 57보다 작은 수만 덧셈을 해왔다. 그리고 바로 지금 57+68을 계산하고, 그 답이 125라고 주장한다. 이때 과인은 대체 어떻게 답이 125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단 과인은 68로 뭘 더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경험에서 배운건 아니다. 아마 과인이 답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덧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크립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과인이 쓴 +가 덧셈기호인가? 아니면 x+y에서 x와 y가 모두 57 이하면 덧셈을 하고, 이상이면 답을 5로 출력하게 하는 닷셈이라는 다른 연산을 나타내는 기호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과연 과인이 말한 +는 덧셈일까, 닷셈일까? 이를 판단하게 해줄 사실이 어떤게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먼저 답변은 +가 덧셈인지 닷셈인지 결정하는 사실이 어떤 종류의 사실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로크에 따르면 그 사실은 우리 마음 속의 사실이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그 사실은 마음 밖에 있다. 어느쪽이든, 답은 결정하는 사실이 어디에 있는 사실인지 말해야 한다. 또한 답변은 +를 사용하는 옳은 경우와 잘못된 경우에 대해 알려주어야 한다. +가 덧셈이라면 과인은 옳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닷셈이라면, 과인은 틀렸다. 과연 과인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그리고 과인의 의미이론을 만들려는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는지 답변은 답해야 한다.

 

가능한 답변들과 한계

먼저 관찰 가능한 사실로 이를 판별할 수 있는지 보자. 과인이 57 이상은 더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 사례를 보고 판단하는건 불가능하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건 어떨까? 과인은 지금까지 덧셈을 잘 해왔다. 정확히 말해서 과인은 +를 할때, x개의 돌(실제든 가상이든)과 y개의 돌을 준비해서 모두 합친 다음에 이들의 총 수를 세었다. 과인은 이러한 규칙을 내재화(룰팔로잉)했고, +가 말하는 것은 이 규칙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과인이 그런 규칙을 학습한 역사가 있는지 살펴보거나, 그러한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방법처럼 보인다. 다만 질문이 있다. 센다는게 무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세는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과인에게 센다는 것은 다른 의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인에게 '세다'는, 'x나 y보다 큰 돌들을 합칠 때는 5라고 말하는 규칙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규칙도 덧셈과 닷셈을 구분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우여곡절 끝에 과인의 '세다'의 의미를 알아내서, 'x개와 y개의 돌들을 하나씩 헤아리는 규칙'이라고 하자. 그런데 헤어라다는 무엇인가? 이렇게 논의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과인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는 방법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과인이 하는 행동들을 기술하는 그 언어 자체도, 다시 그 뜻이 무엇인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머릿속 내용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즉 관찰은 힘들지만, 과인의 정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서 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우리가 과인의 머릿속을 알 수 있다면, 그가 덧셈을 하는지 닷셈을 하는지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과인의 머리 속에서 '덧셈'이 올라온다면, 아까처럼 그 덧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태클이 들어올테니(과인의 '덧셈'은 닷셈인지도 모른다) 이건 무시하자. 그보다 과인이 +를 할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은, 심상은 이미지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이 아니라 부여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이것도 힘들다. 사고내용도 안되고 심상도 안되니, 아마 정신을 뒤져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콰인식 해결책은 어떨까? 앞서 과인은 57+68이 125라고 말했다. 즉 '57+68'이라는 원인이 '125'라는 결과를 산출한 셈이다. 만약 닷셈이 맞다면 과인은 125가 아니라 5를 산출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콰인이 그랬듯이 덧셈을 덧셈-상태와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덧셈을 x와 y가 입력되었을때 x+y가 산출되는 법칙이자 언어성향이라고 하면, 적어도 과인은 우리가 아는 덧셈과 같은 언어성향을 가진 연산을 +로 했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여기에도 비판적이다. 먼저 콰인도 말했지만, 과인은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우리도 엄청 큰 수의 계산은 가끔씩 실패한다. 그렇다면 57+68의 결과로 나온 125는, 본래 성향이 아니라 과인이 잘못 계산한 것 아닐까? 실수를 지적하면 수정하지 않을까?(말이 통한다면 말이다) 만약 125가 실수로 나온 답이라면, 우리는 +를 덧셈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를 덧셈으로 이해하고 대화를 해 버리면, 80+80=160이라고 했다가 과인이 한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어성향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어느 면에서 억울하다. 사람들은 충분히 큰 수의 덧셈에서는 오류를 잘 범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언어성향(충분히 큰 수의 덧셈이면 무조건 답이 아닌 숫자를 산출한다)을 고려하여, 인간들의 덧셈은 충분히 큰 수를 더할때 무작위적인 오답을 산출하는 연산이라고 정의하면 이것이 옳은 정의인가?

 

우리는 과거사례와 행동관찰, 심상분석, 사고분석, 언어성향 연구 등을 통해 우리가 과인의 +가 덧셈인지 닷셈인지 알 방법이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없었다. 지금까지 덧셈과 닷셈이 구분된 방법은 없고, 행동역사를 관찰하기에는 그 이전에 무슨 규칙을 학습했는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다. 생각도 마찬가지고, 심상은 의미가 없고, 언어성향은 명백히 틀린 답(그리고 본인도 오답임을 아는 답)을 정답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며,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이러한 의미 회의론을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뒤에서 보겠지만, 이는 사실과 멀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제안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은 실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에도 의미를 부정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을 잘 파악했다.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이론 등을 통해 러셀이나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언어가 세계의 부분을 일대일로 지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시골 중학교에서 교사를 한 이후,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자신의 철학 이론을 180도 선회하였다. 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크립키-비트겐슈타인 논증과 비슷하게 통일된 의미론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하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사용 이론)은 화용론적 의미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일상언어학파의 시초로서, 언어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데에서 의미가 획득된다고 주장했다. '사과'가 사과인 이유는 '사과'가 사과를 지시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과'로 사과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이 '사과'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로 하면 '사과'는 사과를 지시하지 않을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생각해보라. 요즘 사과 시세가 비싸다. 대구사과가 좋다는 건 옛말이다. 사과충들 극혐이다. 뉴스봤는가? 애플이 또 헛짓거리를 했단다. 이래서 사과놈들은 안된다. 이준석을 당대표로 선출한 것은 어쩌면 독사과인지도 모른다.

 

위 말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과'를 사용했지만, 이들이 모두 같은 사과를 지시하는 건 아니다. 사과 시세에서의 사과는 상품으로서의 사과이다. 대구사과는 옛날 노인네들이 기억하는 그때 그시절의 대구 특산품으로서의 사과이다. 사과충은 애플 제품 사용자들을 비하하는 단어이고, 때로는 애플 사 자체를 비하할때도 사용된다. 이준석을 가리켜 독사과라고 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독이 든 사과라서가 아니라, 그가 당에서 독사과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 혹은 비난이다. 이 모든 경우에 '사과'는 단일한 사과를 지시하지 않으며, '사과'가 지시하는 대상은 맥락과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언어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 외의 것들도 알아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일종의 언어게임이라고 표현했는데, 언어게임을 잘 하려면 언어규칙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알아야 한다. 대구사과에 대해 알려면 대구의 경제사를 약간이라도 알아야 한다. 애플과 삼성의 대립구도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사과충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만약 이준석이 독사과라고 조롱하는 상대편에게 대응하고 싶다면, 우리는 2021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을 이해하면서 상대편이 어떤 부분에서 취약한지 알고 적절한 화술을 배워야 한다. 아니면 사과가게 점원이라면, '사과 5개'를 사용하는 언어게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사과 5개를 집어내서 포장하는 기술을 숙달해야 한다. 이처럼 언어게임을 하기 위해 알아야 할 언어외적/비언어적 요소를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forms of life)이라 불렀다.

 

언어의 사용 이론은 러셀과 프레게 류의 의미론과 대립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의미론에서는 언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고정된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용 이론에서 언어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지시체가 변한다. 따라서 상황에서 벗어난 언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은 마치 심장을 잘라낸 후 심장이 신체에서 하는 역할을 조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심장이 도대체 신체에서 뭘 하는지를 알려면 살아있는 몸 속에서의 심장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언어게임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론은 어떻게 만들수 있을까?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언어를 사용한다. 쇼핑하기, 상사와 대화하기, 자녀와 대화하기 등 다양한 대화에서는 각자 다른 언어규칙이 요구된다. 상사와 대화할때는 존댓말을 써야 하고, 친구와 대화할때는 괜히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면 안된다. 물론 많은 대화상황은 서로 비슷한 점을 많이 공유하고 있어서(가족 유사성), 한 대화에서 통하는 규칙이 대체로 다른 대화에서도 통한다. 하지만 약간씩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특정 규칙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언어에 통용되는 단일 의미론을 만드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발'은 한정기술구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거 복사좀 해주게'는 진리치가 없다. 협조적 원리는 싸가지없는 놈과 대화할때는 약간씩 무시된다. 뭔가 못미더운 사람들과 대화할때 상대방의 말에 자비의 원리를 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용 이론에 따르면, 어떤 의미론도 그것이 통하지 않는 대화 상황이 있다. 그러한 대화 상황에서 통용되는 언어규칙이나 의미론은 따로 있으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사용, 사람들의 언어 사용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용이 언어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사용에 따라 규칙이 달라지기 때문에 모든 언어에 통용되는 언어규칙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 반대로 문장에 주어를 결합하는 행위를 술어화(predication)라고 한다 [본문으로]
  2. Quine, W. V. O. (1951). "Two Dogmas of Empiricism". The Philosophical Review. 60 (1): 20–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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