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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기능주의 이론 정리(심리철학) 본문
현재 심리철학의 주된 패러다임은 기능주의이다. 물론 철학의 특성상 비판과 반론이 존재하지만, 많은 심리철학자들이 기능주의의 토대에서 활동하며 심리철학에서 경합하는 최신 이론들은 모두 기능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심지어 동일론도 기능주의와 부분적으로 결합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기능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대 심리철학을 이해하는게 매우 힘들 것이다.
개요
기능주의(functionalism)는 마음을 '기능'으로 정의하는 이론이다. 즉 기능주의에 따르면 마음은 무언가를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기능이다. 가령 시각을 생각해보자. 시각은 무언가를 보는 것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오징어, 원숭이, 매버릭 미사일도 가지고 있다. 즉 시각은 복수실현되는데, 모두 시각정보를 탐지하여 행동을 조정하는 기능을 한다. 즉 시각을 통해 오징어는 먹이를 찾거나 포식자를 피하고, 원숭이는 과일을 찾거나 가까운 이웃을 발견하며, 매버릭 미사일은 궤도를 조정하여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고, 인간은 이들을 포함한 많은 행동을 한다. 즉 시각이 구현되는 하드웨어는 각각 다르지만, 모두 수행하는 기능은 같다. 기능주의는 윈도우가 인텔에 깔리든 AMD에 깔리든 똑같은 윈도우듯이, 하드웨어에 상관없이 발휘되는 어떤 기능이 마음이라고 제안한다.
기능주의자들은 마음을 일종의 중간항으로 본다. 즉 외부에서 정보가 입력되고 행동을 통해 출력될때 이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마음이다. 이 기능들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기능주의자들은 철학적 행동주의가 부딫힌 문제에 같이 부딫혔다. 즉 한 심적 상태를 기능으로 정의하려면 다른 심적 상태가 튀어나오고, 이들이 무한히 순환하다보니 개개의 심적 상태를 어떤 기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능주의자들은 램지-루이스 문장을 동원하여 이를 해결하였다. 램지-루이스 문장은 과학철학에서 고안된 문장으로, 램지-루이스 문장은 대상은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가령 전자를 정의하는 경우, 아래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x는 음전하를 가진 최소단위의 입자이다.
- 집합 A에 위 명제를 참으로 하는 x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
기능주의자들은 먼저 T문장을 구성하였다. T문장은 어떤 심적 상태의 특성을 서술하는 모든 참인 명제로, 물리적 특성과 심적 특성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모든 심적 상태에 대한 서술을 담은 T문장을 고안한 후, 여기 포함된 각각의 심적 상태에서 이름을 제거하고 M으로 지칭한다. 즉 고통은 M3이 되고, 사랑은 M6가 되고, x는 Mx가 될 것이다. 이후 각 M을 특정 x에 대입한다. 이러면 각 심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x는 심적 상태 a이다=def ∃[T and x⊂Mx]
가령 고통을 정의한다면, 고통인 x는 T 안에서 특정 M에 대응되는 존재이다. 이렇게 모든 심적 상태를 다시 빠짐없이 채워넣으면, 우리는 심적 상태들이 의미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그리게 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장점은, 순환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심적 상태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T문장을 사용하면 우리는 구태여 심적 상태를 서술하는 목록을 나열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 M이나 가져와서 'x는 Mx이다.'라고 선언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능은 어떤 물리적 상태를 일으키거나, 다른 기능을 호출하는 것이 된다. 이는 실제 컴퓨터와도 비슷하며, 실제와 매우 잘 부합한다.
기능주의는 실체이원론과 양립가능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특정 기능이라고 말해도 뭐라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실체이원론에 근거나 있는지, 심신 문제를 잘 설명하는지 뭐라할 것이기 때문에 실체이원론이 다시 올라올 날은 요원하다. 철학적 행동주의는 기능주의와 모순되는데, 왜냐하면 철학적 행동주의에서 없다고 하는 것을 기능주의에서는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능주의는 철학적 행동주의가 부딫힌 한계를 잘 해결했으며(비록 내적 상태가 동원되었지만), 어떤 행동을 출력항에 놓기 때문에 기능주의는 세련된 철학적 행동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일론은 일부 기능주의에서 다시 부활하기도 하는데, 이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기능주의의 분파
기능주의가 주류여서 그런지, 기능주의자들인 이제 스스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기능에 대한 정의와 기능의 형태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다. 가장 주된 분류로 기능주의를 역할기능주의와 실현자 기능주의로 나누는데, 역할 기능주의는 기능을 어떤 역할로 정의한다. 반면에 실현자 기능주의는 어떤 기능이 수행될때 그 기능이 수행되는 하드웨어를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즉 길가던 사람이 갑자기 아파하고 있을때, 역할 기능주의는 그 사람이 신음소리를 내게 하는 작용과 시스템을 마음으로 정의하고, 실현자 기능주의는 고통이 발생하는 그 사람의 신경회로를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현자 기능주의가 강하다.
실현자 기능주의는 논증을 거듭하다 보면 특정 유형의 동일론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실현자 기능주의자인 암스트롱과 루이스의 이행성 논증에 따르면, 만약 특정 심적 상태를 그것이 실행되는 신체와 동일시하면 그것은 전형적인 동일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수실현 가능성 논제에 의해 폐기된다. 만약 특정 심적 상태를 그것이 실행되는 특정 유형의 신체상태와 동일시하면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해결되지만, 이것도 제한적인 동일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우로 한정하면, 인간의 뇌활동이 곧 마음이라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 심적 상태를 그것이 실행되는 모든 신체상태와 동일시하면, 이것은 사례동일론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심적 상태를 실행하는 신체상태가 곧 그 심적 상태라는 주장은 정확히 사례동일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능주의는 마음의 본질이 역할인지 실현자인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기능을 정의하는 방법에 따라 기능주의를 나눌 수 있는데, 일종의 기계적 기능으로 보는 경우 기계 기능주의(machine functionalism), 램지-루이스 문장으로 정의하는 경우 인과-이론적 기능주의(casual-theorical functionalism)으로 나눌 수 있다. 이때 casual-theorical functionalsim은 문장을 심리학적 명제로 채우는지 일상적인 직관심리학적 명제로 채우는지에 따라 심리학적 기능주의(psychofunctionalism)과 분석적 기능주의(analytic functionalism, logical functionalism, 논리적 기능주의)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따라 classical computational theory of mind와 연결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후술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라벤스크로프트가 있다. 라벤스크로프트는 실현자 기능주의자이며, 유명한 심리철학 교재를 출간한 바 있다.
기능주의의 평가
라벤스크로프트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심리철학의 이론이 설명해야 하는 6가지 주제를 설정한 바 있다. 기능주의는 다른 세가지 이론과 달리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므로, 이들 7가지 주제를 잘 설명하는지 관찰하는게 소득이 있을 것이다. 6가지 사실을 기능주의에 대입해보면, 상당수의 사실은 기능주의에 부합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1,2,6번 명제는 기능주의와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3번 명제의 경우, 후술할 계산적 마음이론과도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4번 명제는 기능주의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식은 대체 무슨 기능이 있는지 도무지 알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기능들이 있으며, 인간 정신기능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수행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의식이 왜 필요한지, 경험적 상태가 왜 존재하는지 알수 없다. 5번 명제의 경우에는, 어떤 기능주의를 수용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명제는 기능주의와 잘 부합하나, 4번 명제는 기능주의와 충돌한다. 필자는 의식이 통제적 정보처리를 위해 진화된 특수기제라고 주장한다. 사실 의식적 정보처리와 무의식적 정보처리가 다르다는 사실은 심리학 일반에 잘 알려져 있다.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박
기능주의가 정설이긴 하지만 원래 학자란 놈들은 정설을 물어뜯기 위해 여념이 없는 존재들이다. 과학사학자들은 과학활동이 그냥 패러다임 안에서 벌어진다고 하지만, 그 패러다임과 결과가 안맞으면 신이 나서 무슨 중요한 발견이라도 한 것마냥 떠드는게 학자라는 동물이다. 심리철학도 예외는 아니라서, 기능주의가 태동한 그 순간부터 심리철학에는 기능주의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어떤 기능을 수행함에도 마음이 아닌 것이나, 마음인데도 수행하는 기능이 딱히 없는 것을 제시하여 기능주의를 공격해왔다.
존 설은 중국어 방 논증과 비슷한 중국어 체육관 논증을 통해 기능주의를 공격하였다. 중국어 체육관 논증에서는 한 무리의 중국인을 가정한다. 이들은 각자의 공간에 틀어박혀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내부회선으로 서로 연락하는 일로, 이들의 사무실 벽면에는 어떤 연락이 어디서 왔을때 이걸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빼곡히 적혀있다. 이런 중국인이 한 수억 모여있는 체육관을 가정해보자. 실제 뉴런이 이렇게 기능하기 때문에, 어떤 시진핑이 나타나서 지침을 적절히 통제하면 이 중국인들은 하나의 뇌처럼 기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이 무슨 마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인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지침대로 전화걸고, 전화받고, 전화걸고, 전화받는 일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얘들을 잘 조직하면 어떤 계산을 하고 군대를 운용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마음은 아무도 없고, 그냥 똑같은 일만 내도록 하는 로봇들만 있을 뿐이다.
중국어 체육관 논증은 마음이 기능이라는 주장을 잘 반박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마음은 저런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능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이것이 일종의 편향이라고 반박한다. 우리가 중국어 체육관이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중국인들 개개인에게 마음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우리 뇌속에 중국인은 없다. 대신 중국인 비슷하게 일하는 뉴런들이 있는데, 중국어 체육관 논증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 뇌에도 마음이 없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실은 허상이라고 믿는가? 그런 주장도 존재하긴 하지만 별로 설득력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중국어 체육관에 마음이 있다고 하자.
기능주의를 비판하는 다른 논증은 블록머리 논증이라고 불린다. 블록머리 논증은 블록머리를 한 어떤 로봇을 가정한다. 이 로봇은 천문학적인 계산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안에는 특정 상황에서 특정 대답을 하도록 하는 명령문이 무수히 들어있다. 그래서 이 명령문에 따라 이 로봇은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마시고, 길가다가 어깨를 부딫히면 바로 말로 사과하며, 임포스터가 감지되면 5.56mm 총탄을 해당 위치에 발사한다. 이 로봇은 명령문이 너무 완벽해서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로봇에 마음이 있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로봇은 그냥 주어진 명령문만 수행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중국어 방 논증과 비슷해 보이는 이 논증에 대해 기능주의자들은, 블록머리 로봇이 기능주의의 최소한도 충족하기 못한다고 반박한다. 블록머리 로봇이 겉으로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겠지만(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나중에 다룬다), 이 로봇은 인간과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어떤 심적 상태가 다른 심적 상태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심적 상태와 다른 심적 상태가 인과의 고리로 묶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로봇은 아예 심적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고리도 없다. 또한 이 로봇은 정해진 명령문에 따라 한가지 자극에 한가지 반응만을 하기 때문에, 한가지 자극에도 매우 다양한 행동이 튀어나오는 인간과 다르다. 결국 이 로봇이 기능주의를 위협하는지는 둘째치고, 기능주의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인간의 기준도 충족하지 못한다. 철학적 행동주의에서나 기준을 충족할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논증이 논박되지만(그래서 주류인 것이다), 기능주의는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기능주의는 감각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동과 사고는 모두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그 기능을 찾을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적 상태, 감각질, 느낌, 감각은 대체 뭘 하는 건지 알수가 없다. 고통이나 감정은 어떻게든 설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느낌은? 의식은? 대체 우리의 '느낌'은 무슨 기능을 하는가? 이러한 상태들은 기능으로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경험적 상태의 존재는 기능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며, 기능주의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CTM
CTM(Computational Theory of Mind, 정신에 대한 계산이론)은 기능주의의 분파 중에서 정신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의 하나이다. 이 이론은 원래 인지과학에서 출발했는데, 인지과학에서 나타난 계산주의 마음이론이 약간 개량되어 심리철학에 CTM으로 소개되었다. CTM의 주요 주장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의 튜링머신(컴퓨터)이며, 구문적 조절을 통해 의미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CTM이 인간 정신의 모델을 튜링머신에서 발견한 이유는, 튜링머신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언어철학자들은 언어표현을 구문론과 의미론으로 나누는데, 구문론은 기호를, 의미론은 기호가 담긴 의미를 다룬다. 그리고 언어과학에서도 다루지만, duality of patterning에 의해 기호를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의미를 다룰수는 없다. 이는 알파벳을 다 안다고 영어단어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CTM이 나올때까지 철학자들은 어떻게 인간이 의미론을 구현하는지 궁금해했다.
CTM은 인간의 정신을 튜링머신으로 정의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사실 기호만을 다뤄서 의미를 처리하는 일은 프로그래머들이 늘상 하는 일이다. 이들은 기호를 조작하고 조합하여 함수나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들은 비록 기호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의미를 처리하도록 기능한다. 그래서 Rstudio의 함수들이 자료에서 의미있는 통계량을 산출하고, 인터넷으로 실시한 심리테스트가 바로 결과(다소 쓰레기인)를 보여준다. 튜링머신은 기호를 적절하게 조작하도록 알고리듬을 심어주면, 기호를 처리하는 것은 물론 의미를 산출하도록 프로그래밍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정신을 튜링머신으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합당해 보인다.
CTM의 장점은 구문론과 의미론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사실 구문론을 통해 의미론을 창출한다는 것은 연결주의도 공유하는 장점인데, 그래서 인지과학의 계산주의 마음이론은 연결주의와 CTM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하여튼 CTM은 어떻게 기호에서 의미와 사고가 창출되는지 잘 설명하며, 기능주의와도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튜링머신에 내장된 모든 알고리듬은 무언가를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튜링머신은 진공관에서 반도체는 물론 심지어 마인크래프트 속의 아이템(레드스톤)으로도 만들수 있는데, 이는 기능주의의 장점인 복수실현 가능성을 기능주의와 함께 명쾌하게 설명한다.
튜링머신은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테이프는 입력자료가 늘어선 무한히 긴 테이프로, 각 칸에 입력된 정보가 적혀 있다. 헤드는 이를 읽는 장치인데, 테이프의 값을 읽은 헤드에는 그 값이 저장된다. 헤드는 테이프의 값을 읽거나, 값을 지우고 다른(내장되었던) 값을 입력하거나, 테이프 사이를 이동하거나, 멈출 수 있다. 헤드는 읽은 테이프의 값을 저장하거나 내적 상태에 따라 처리하는데, 이는 기계표의 명령을 따른다. 기계표는 헤드가 해야할 일을 지시한 명령문들로, 알고리듬의 집합이다. CTM 이론가들은 인간의 심적 상태가 헤드에 해당하고, 인간 정신의 법칙이 기계표에 내장되어 있으며, 기계표에 적절히 고안된 알고리듬에 따라 심적 상태가 움직이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테이프)를 처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생각을 비롯한 모든 심적 상태는 이러한 계산활동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CTM의 지지자였던 철학자 포더는 사고언어 가설을 통해 CTM을 뒷받침하였다. 그의 사고언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고언어를 통해 사고와 언어를 처리한다.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문장의 구조를 이해할 능력이 필요한데, 이는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많은 철학자들이 사고와 언어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왔다. 포더는 인간의 사고가 사고언어를 통해 이뤄지며, 나중에 해당 문화권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사고언어가 그 언어로 대체되면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사고를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특정한 기호가 사용되며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조작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 사고언어가 CTM에 따라 작용하는 알고리듬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았으며, 언어과학적 연구에 비추어 볼때 사실과 멀어 보인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제리 포더(Fodor)가 있다. 포더는 CTM의 아버지 중 하나이다.
CTM 비판
CTM이 처음 나왔을때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각광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CTM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CTM에 대한 비판은 대략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기원에 대한 의문, 연결주의의 우위, 중국어 방 논증, 감각질의 존재가 있다. 이중 연결주의에 대한 부분은 나중에 다룰 것이다.
한 무리의 학자들은 기호를 조작하여 의미를 산출하는 알고리듬이 대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대부분의 튜링머신에게 그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인간(프로그래머, 공장 노동자)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튜링머신이라면, 그 알고리듬은 누가 넣어줬는가? 이에 어떤 학자는 복잡성이 증가하면 저절로 구문론에서 의미론이 창출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구문론에서 의미론이 창출되는 다양한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과학적으로 결정되었다. 인간이 가진 알고리듬은 기나긴 진화의 역사 속에서 적응적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진화해왔다. 신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지루하고 의미없는 설명을 피한 것은 칭찬할 만 하지만, 심리철학자들은 과학을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중국어 방 논증
존 설의 유명한 중국어 방 논증은 CTM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이 논증이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데, 합의에 의하면 중국어 방 논증은 아무런 사고도 하지 않지만 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를 들어 튜링머신이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유명한 중국어 방 논증은 어떤 거대한 방을 가정하는데, 이 방에는 미국인이 컴퓨터와 지침서에 둘러쌓여 있다. 이 미국 토박이는 중국어라곤 니하오밖에 할줄 모르지만, 중국어를 듣고 응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행히도 그의 옆에는 어떤 문장이 들어오면 어떤 문장을 입력해서 보내라는 수많은 지침서들이 있기 때문에, 이 지침서를 활용하면 임무는 어찌저찌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지침서가 너무나도 완벽한 나머지, 밖에 있는 사람은 방 안에 있는 사람이 필시 중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은 튜링머신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고안되었다. 즉 이 방의 미국인은 중국어의 중 자도 모르지만, 지침서를 통해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한다. 이는 의미의 의 자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구문을 적절히 조작하는 알고리듬을 통해 완벽하게 의미를 처리하는 튜링머신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미국인 친구가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느냐면,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중국어를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미국인을 중국어 낙제생이라고 부른다면, 튜링머신도 마음으로서 낙제생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과연 튜링머신을 마음의 후보로 계속 둬야 할까?
이 논증이 대체 뭘 말하는지 모호하다는 비판은 놓아두더라도, 학자들은 이에 대한 반론을 곧 구성하였다. 이 반론의 핵심은 우리가 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철학자들에게는 익숙하겠지만, 여기서 미국인은 그냥 부품일 뿐이다. 미국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침서를 읽고 하라는 대로 하는것 뿐이며, 이 친구를 한국인이나 라트비아인으로 바꿔도 달라지는 건 없다.(이를 소외라고 한다) 사실상 중국어 방에서 인간은 기계 부품에 불과하고, 그냥 지침서와 지침서를 잇는 톱니바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국인을 우리의 마음과 동일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엄밀한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중국어 방 전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마음 속에 어떤 감독자가 있다는 단순한 주장은 이미 예전에 심리학에서 폐기되었다. 현대심리학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지침서와 지침서들로 연결된 지침서 창고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뇌 속의 어느 미국인에게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버려야 하며, 이 지침서와 지침서들의 뭉치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튜링머신이라는 관념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설도 이에 대해 반박을 제시했지만, 전반적으로 중국어 방 논증은 여러 결함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외에 포더는 다른 반박을 주장했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인이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에 대한 지식과 느낌이 없어서 의식을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더는 어떤 의미를 심적으로 '이해'하려면 의식의 작용이 동반되어야 하며, 그 미국인은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의식의 작용이 없어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인이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되지만, 중국어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이해가 포함된 경험적 상태에 대해서는 한계를 가지지만, 표상적 상태에 대해서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감각질의 문제는 이미 기능주의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로, 중국어 방 논증은 기능주의를 공격하는 것이지 딱히 CTM과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다고 비판한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존 설, 대니얼 데닛, 제리 포더(Fodor)가 있다. 존 설은 처음으로 중국어 방 논증을 제시했고, 데닛과 포더는 이를 비판했다.
연결주의
연결주의(connectivism)는 CTM의 대안으로 등장한 이론으로, CTM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중 하나이다. 또한 CTM과 마찬가지로 신경과학에서 제기되었으며 인간의 정신이 어떠한 계산이라고 본다. 연결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일종의 신경망이라고 가정한다. 즉 연결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머신러닝에서 사용되는 신경망 모델로 설명하고자 한다.
연결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신경망(연결주의 망) 모델로 구성된 컴퓨터라고 본다. 신경망 모델은 신경과학에서 제시된 개념으로, 뉴런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확립된 설명이며 머신러닝의 기반이기도 하다. 신경망은 자료가 입력되는 입력층과 출력되는 출력층, 그리고 중간에 이를 중개하는 중간층(은폐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을 연결하는 선은 입력된 값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전달한다. 가령 입력층 노드에 2라는 값이 입력되어 가중치가 0.5인 선으로 들어간다면, 중간층에는 1의 값이 입력된다. 이러한 가중치들은 선마다 다르며, 신경다윈주의가 적용되어서 가중치가 출력값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그리고 각 노드들은 임계값이 존재해서, 입력된 값이 특정 값 이하인 경우 활성화되지 않는다. 신경망은 입력층에 정보가 입력되면 이를 중간층에서 처리하여 출력층에서 출력한다.
신경망과 튜링머신의 차이(물론 현존하는 신경망은 튜링머신에 기반하여 돌아간다)는 신경망이 가변적인 기계표를 갖는다는 점이다. 튜링머신은 자료를 처리하는 지침이 고정된 채로 기계표에 나열되어 있다. 반면 신경망에서 정보의 처리를 결정하는 가중치는 결과값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망은 훈련이 가능한데, 즉 지속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게 하고 이를 피드백하여 가중치를 변화시키고 성능을 개선할 수 있다. 역전파(back propagation)가 주로 피드백을 하는 방법으로, 역전파가 시행되면 출력층에 가까운 선부터 결과값에 영향을 받는다.
신경망과 마음의 유사성
연결주의가 가지는 장점은 신경망이 실제 뇌의 작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실 신경망은 그 말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신경'을 연구하면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는 특이한 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신경망은 훈련을 통해 학습될 수 있으며, 이는 시행착오를 거쳐 학습하는 인간과 비슷하다.(다만 인간은 un-supervised learning으로도 학습가능하다) 또한 신경망은 위에서 보듯 순식간에 다량의 노드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튜링머신과 달리 정보를 병렬적으로 처리하는게 가능하다. 그리고 인지과학자들은 실제로 뇌가 많은 정보를 병렬처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신경망에서 정보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여러 노드에 걸친 네트워크의 형태로 저장되는데, 인간의 기억 단위로 여겨지는 스키마도 다량의 정보가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미 심리학자들은 장기기억이 특정 지역이 아니라 관련 정보의 처리와 관련된 뇌부위에 퍼져서 저장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신경망은 약한 값에 의한 정보처리도 능하다. 일반적인 컴퓨터(튜링머신)로는 인간의 지각적 특성을 잡아내는 일이 힘든데, 이는 인간이 지각의 어떤 부분에서 유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은 꽃병을 어떤 각도로 놓든 그것이 꽃병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컴퓨터는 조금만 각도가 어긋나도 꽃병을 꽃병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분야에서 엄청난 컴퓨터공학적 발전이 일어났는데, 신경망 모델을 사용하면서 인식기술이 개선되었다. 또한 신경망은 일부가 손상되어도 기능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데 이는 뇌가 부분적으로 망가져도 완전히 일상기능이 망가지지 않는 인간과 유사하다. 신경망은 중앙통제장치가 없어도 잘 작동하는 특징이 있는데, 연결주의자들은 이 또한 인간의 특징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중처리과정 이론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튜링머신과 신경망을 비교해보면, 인간의 인지체계는 신경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지각적 처리는 신경망이 튜링머신보다 월등히 잘하며, 인간과 수행이 비슷하다. 또한 학습을 통해 개선된다는 점도 신경망과 인간의 마음이 일치한다. 반면에 신경망은 튜링머신에 비해 대규모 자료의 저장/재생과 수리적/논리적 계산은 못하는데, 이는 실제로 인간도 힘들어하는 것이다. 인간이 한번에 저장할 수 있는 기억용량은 최대 7가지이며, 자료를 저장하고 재생하기 위한 작업기억 공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또한 수리적/논리적 사고는 인간이 힘들어하는 분야이며, 사실 논리적 사고는 창의적 사고, 자기통제와 함께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정신활동이다.
또한 인간의 뇌는 신경망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병렬처리하여, 직렬처리밖에 하지 못하는 튜링머신과 다르다. 어떤 학자는 100단계 규칙을 통해 연결주의와 CTM을 비교했는데, 100단계 규칙은 어떤 정보처리가 100단계 이내에 발생하는지 보는 것이다. 신경과학에 따르면 뉴런은 통상 100번의 활성화를 통해 기본적인 정보처리를 수행하는데, 만약 어떤 시스템이 인간의 마음과 비슷하다면 역시 100번에 가까운 활성화로 정보를 처리할 것이다. 실험결과 튜링머신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처리하는 인지과업을 수행하는데 2-3만번의 연산을 거쳐야 했으며, 반면에 신경망은 매우 적었다. 요약하면 인간의 마음은 신경망과 매우 유사해보이며, 사실 적어도 인간 마음의 많은 부분이 신경망이라는 점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연결주의 비판
연결주의가 CTM보다 많은 우위를 가지지만, 연결주의도 여러 한계를 가진다. 어떤 분야에서는 연결주의가 CTM보다 우위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CTM이 더 우위이다. 연결주의가 공격받는 부분은 주로 언어나 사고와 관련된 부분이다.
첫번째 비판은 현재 신경망이 가지는 한계와 관련되어 있다. 비록 신경망이 인간과 비슷한 성과를 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경망은 supervised learning을 한다. 즉 매 정보처리마다 알고리듬 외부의 무언가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반면 인간은, 물론 인간도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적지 않은 경우 피드백을 받지 않으면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사실 과학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스스로 무슨 기준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피드백한 역사였다. 그람, 빛의 구분, DSM 등 다양한 과학적 기준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거의 무에서 발견해낸 것이며, 스스로의 발견을 피드백(검증)하는 과학적 방법론 역시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또한 신경망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학습은 너무나 적은 시행으로 너무나 빨리 이루어진다. 필자는 후자가 심리학의 이론-이론에 의해 설명된다고 제안한다.
더 맹렬한 공격이 가해지는 부분은 사고에 관한 부분, 특히 구조와 합리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추상적 사고는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합리성에 대한 이해도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각 항들이 가진 관계를 구조화하지 못하면 명제를 구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문법은 과장하면 언어의 구조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끝난다. 튜링머신은 이미 그 자체가 합리적인 계산을 수행하는 도구이고, 각 항들을 구조적으로 처리하는 알고리듬을 가진다면 구조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CTM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아주 잘 설명한다.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은 과연 신경망이 이를 잘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경망이 합리적 계산이나 구조적 처리를 시행할 수 있는가? 한가지 실험에서 벡텔과 아브라함센은 신경망 컴퓨터에게 6개의 타당한 논증과 6개의 부당한 논증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피드백하여 컴퓨터를 훈련시켰다. 그 결과 컴퓨터는 84%의 확률로 논증의 타당성을 알 수 있었다. 일반인이 갖가지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연결주의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컴퓨터가 76%의 성공률을 내기 위해서는 5000번의 학습을 받아야 했으며, 84%의 성공률을 내기까지는 거의 2만번을 학습해야 했다. 이는 논리학 예제 십몇개 풀고 B를 맞는 대다수의 논리학 과목 수강생보다 한참 떨어진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인간의 경우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논리 예제를 반복적으로 무수히 경험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인간의 우위)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엘만이 신경망 컴퓨터에서 단문과 복문으로 된 문장을 제공하고 복문의 비율을 늘려가며 언어를 학습시킨 결과, 컴퓨터는 문법적으로 알맞은 단어를 빈칸에 잘 넣을 수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연결주의를 지지한다. 사실 논의를 심리철학 밖으로 돌리면 연결주의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데, 2010년대 중반까지 거지같은 번역으로 악명이 높았던 튜링머신 기반의 구글번역기는 신경망 기반 딥러닝 기술이 적용된 이후 번역의 질이 급격히 향상되어 원어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역시 인간과 비교해보면, 인간은 훨씬 적은 학습량으로 더 많은 언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한다. 필자는 이를 LAD 이론으로 설명한다.
연결주의가 사고 면에선 CTM보다 약세를 보이고 실제 인간보다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연결주의는 여전히 CTM과 싸우고 있다. 어쩌면 진실은 연결주의와 CTM이 둘 다 맞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중처리과정 이론에서는 인간의 정보처리체계를 CSS와 SAS로 나누는데, CSS는 정보를 병렬적이고 빠르게 처리하는 반면 SAS는 정보를 직렬적이고 느리게 처리한다. CSS가 주로 처리하는 과제는 지각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기능 대부분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언어와 사고는 SAS에서 담당한다. 이를 보면 인간의 정신은 튜링머신(SAS)과 신경망(CSS)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인지도 모른다. 다른 심리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아예 튜링머신도 신경망도 아닌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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