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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재평정으로서의 비극 가설(tragedy as reappraisal) 본문
비극이란 슬프거나 비참한 것을 소재로 한 문학의 한 갈래로, 아주 오랜 기간 서구 문학계에서 심도깊게 다뤄졌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극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비극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극이 어떤 것이고 비극의 조건이 무엇인지, 무엇이 비극이고 아닌지 논쟁하고 있다. 문학적 보수주의자들은 비극을 상류층 주인공이 운명에서 맞서 파멸하는 작품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19세기 독일 이후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비극을 폄하하거나 비극의 민주주의적 속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과 충돌하면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임상심리학적으로 문학이란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치유의 수단이며, 자신이 겪은 경험을 표현하면서 타인과 교류하고 의미를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비극 또한 부정적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으며, 특히 슬픈 정서를 경험했을 때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재평정하는 과정이자 결과물일 수 있다. 비극의 구성요건과 함의가 다른 것은 이러한 재평정 결과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또한 보수주의자와 그 반대자들이 비극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의 차이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기저의 문화적 과정에서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정서의 기능과 인지적 측면
일반적으로 정서는 인지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심리학적으로 정서는 낮은 수준의 인지로 인지와 별개가 아니다. 정서는 편도체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편도체에서 외부자극을 단순하고 부정확하지만 빠른 수준으로 처리하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행동과 인지를 조정하는 것이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 상황에 적절한(적어도 진화적으로 적절했던) 대처를 취하도록 만들며, 심리학자들은 정서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여 특정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만드는지 연구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슬픔의 특징은 부정적이고 각성이 낮다는 것이다. 슬픔은 외부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낄 때 발생하며,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 보다는 소극적으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적절할 때 발생한다. 슬픔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철수하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자신에게 좋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그걸 해결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 때 상황을 넘기거나 타인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슬픔은 부정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일어나는 정서이다.
한편 정서가 가진 진화적이고 생물학적인 기능에 관심을 가진 심리학자도 있었지만, 다른 심리학자들은 정서에 인지가 끼치는 영향에 주목해 왔다. 이들에 따르면 정서는 상황에 대한 더 정교하고 복잡한 해석에도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측면을 이해해야 인간의 정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똑같은 사건을 보고 슬픔을 겪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절망으로 경험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그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는 편도체가 정서를 일으킨 후 대뇌가 상황을 더 자세하게 판단하고 이것을 정서에 반영했기 때문으로, 그렇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상세하고 복잡한 해석에 따라 인간이 겪는 정서의 뉘앙스는 달라질 수 있다.
인지적 재평정은 그러한 과정의 일부로, 인지적 재평정이란 자신이 겪은 상황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정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가령 우리가 슬픈 일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찾아내거나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겪는 슬픔을 경감시키거나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시도를 재평정이라고 한다. 문학이나 예술도 일종의 재평정 시도라고 볼 수 있으며, 비극도 그러한 견지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재평정으로서의 비극
만약 문학 활동을 부정적인 정서를 해소하기 위한 재평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면, 비극도 그러한 활동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비극이 다루는 상황은 대개 불완전한 인간이 매우 강력한 힘에 저항하여 패배하는 경우이며, 부조리극과 같은 현대적인 비극의 경우에도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이나 상황에 의해 좌절하는 경우를 다루고 있다. 이는 해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슬픔을 경험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게 비극이 슬픔과 관련된 문학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봤을때 비극의 공통점은 상황에 대한 어떠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적인 비극은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고 여기에서 교훈을 도출하거나 긍정적인 인간성을 강조하고 찬양하였으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현대 비극은 사회적 연대나 저항을 비극적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대중적인 비극도 해피엔딩을 추가하는 등의 방식으로 비극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며, 부조리극도 비극적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저항을 대안으로 제시하거나 최소한 절망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재평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측면을 볼 때 비극은 슬픔을 주제로 창작을 하여 슬픈 상황을 재평정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모든 비극은 비극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타인과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를 통해 비극의 작가와 독자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공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사회적 욕구를 해소한다. 이는 인간이 슬픔에 대응하는 주된 방식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슬픈 상황을 재평정하여 슬픔을 경감하거나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하고, 무엇보다 슬픈 정서를 공감받음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가설의 확장
비극이 슬픔에 대한 재평정이라면, 개인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따라 비극의 주제가 달라지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의 슬픈 상황이 피할 수 있었던 자신의 실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면 개인의 실수로 인해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는 비극을 창작할 수도 있다. 혹은 불의한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있다면, 불의한 권력이 비극적 상황을 일으키고 사회적 저항을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는 비극을 창작할 수도 있다. 사람이 자신의 정서를 재평정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며, 여러 비극이 서로 다른 함의와 특성을 가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재평정에서는 개인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문화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특히 문화는 개인이 세상을 해석하고 행동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에 유행했던 비극의 특징은 비극의 작가와 독자들이 공유하는 문화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도 있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종교 행사의 일부였으며, 시민들에게 세상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고 사회적 규범을 주입하는 의식이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비극의 상황이 개인의 부도덕에서 발생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그리고 현대 비극에서 사회적 저항을 주장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좌파가 공유하는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조리극에서 제시하는 절망은 현대사회의 아노미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비극에 대한 보수주의적 입장도 문화적 측면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 비극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구 엘리트이자 인문학 지식인이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나 셰익스피어에 의해 창작된 고전을 배우고 자랐으며, 그러한 문화적 산물이 자신에게 있어 개인적으로 중요하거나 생업의 수단일 수 있다. 이는 그들이 비극을 자신이 배운 고전을 중심으로 인식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그들로 하여금 비극을 고대 그리스나 19세기 이전 유럽에서 생산된 작품으로 한정하게 만들 수 있으며, 자신이 가진 세계관과 사고방식과 맞지 않는 현대 비극에 거리감을 느끼고 멀리하게 만들 수 있다.
한편 비극을 일으키는 슬픔의 견지에서 생각해 본다면, 문화는 비극의 형태뿐만 아니라 비극의 발생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거대한 힘에 의해 좌절할 때 경험하는 슬픔은 실제로 역경에 부딫힐 때에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개인의 목표치가 너무 높을때도 나타날 수 있다. 이는 개인주의가 태동하던 그리스에서 비극이 발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집단과 세상의 힘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을 강조하는 집단주의와 달리 개인주의는 외부적 힘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따른다면 고대 그리스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극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으며, 19세기 독일의 경우에도 기존의 권위에 순응 대신 대항할 것을 주장하는 계몽주의적 사고의 유입이 비극의 발생을 촉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의 경우 비극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의 한도 비극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느끼는 한의 정서는 맞설 수 없는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좌절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정서이다. 이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한국인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개인주의적 자기관이 발달해 있으며, 한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자기관이 집단주의적 규범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정서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구도는 강대한 외부의 힘에 의한 좌절을 형상화하는 비극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한은 서구 비극이 한국 문화에서 나타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설의 평가와 검증
이 가설의 특징은 비극을 엄밀한 과학적 개념 하에서 규정한다는 점이다. 약칭 재평정 가설은 비극이 슬픔을 재평정하는 문학활동이라고 보며, 여기서 슬픔과 재평정은 이미 여러 과학적 연구와 발견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가설은 비극이 가지는 함의의 다양성과 플롯, 주인공, 배경, 결론의 다양성을 잘 포괄한다. 재평정 가설의 관점에서 볼 때 비극론이 가치관과 문화에 따라 다양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비극의 작가와 독자가 가진 문화적 가치관을 통해 비극의 특성을 예측해 볼 수 있다.
특히 재평정 가설은 여느 과학이론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다른 비극 이론들에 비해 본 가설이 가지는 압도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직관과 가치관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기존의 비극론과 달리 재평정 가설은 경험적 검증을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 검증을 통해 지지되는 경우 다른 비극론에 비해 확실한 토대를 가졌다고 옹호할 수 있으며, 반증되는 경우 철저히 폐기하여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재평정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 일 수 있다. 가령 비극이 슬픔에 대한 재평정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슬픈 사람이 비극 작품을 읽을 경우 그 슬픔이 경감될 것이다. 그러한 효과는 독자와 비극 작품의 문화적 배경과 가치관이 일치하는 경우 더 강할 수 있다. 이미 정서를 측정하는 방법은 여럿 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실제로 비극 작품을 읽는 것이 슬픔을 경감시키는지 실험적이고 통계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또한 가설의 예측을 따른다면 독자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비극 작품보다는 일치하는 비극 작품, 가령 한국인의 경우 햄릿보다는 취화선이 슬픔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더 크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는 위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으며, 이것이 검증된다면 비극의 창작을 통해 우울을 약화시키는 프로그램의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비극의 내용과 발생이 문화적 영향을 받는다면, 반대로 문화적 특성을 통해 비극의 내용과 발생을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개인주의 문화는 비극의 정서를 더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비극 작품을 읽고 거기에 공감하는 정도나 슬픔이 경감되는 정도는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더 높을수도 있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출간되는 비극 작품의 비중도 더 높을 수 있는데, 이는 각국에서 출간된 소설을 무작위로 수집한 후 다수의 문학평론가에게서 현대 비극으로 인정된 작품의 비율이 개인주의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지 조사하여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개인의 실수나 부도덕함이 비극적 상황의 원인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더 많을 것이며, 이것 역시 문학평론가들을 통해 원인을 평정하고 비중을 비교하여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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