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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주의 제안 - 해결 방안들

과학주의자 2025. 1. 30. 19:50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해결 방안이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것 만큼이나(혹은 더) 어렵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정의하였다. 근대 자체의 특성과 신자유주의의 발흥으로 인해 삶의 불확실성이 증대되었고 그것을 해소해줄 만한 친밀한 인간관계는 빈약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하고, 사람들에게 인간적 따뜻함을 제공하여 스트레스를 견딜 만한 체력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 분야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시도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따라서 이런 부분에서 전문성이 있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 불행히도 필자 또한 이런 일을 경험해본 바도 없고, 전문성 또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서 제시하는 여러 방안은 현재진행형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여기서 제시된 방안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지, 따뜻함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지 검토되어야 하며, 여기서 제시된 것 이외에 더 좋은 방안은 없는지도 개방적인 자세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 글은 단지 그러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도로서 의미있을 것이다.

 

이 글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제공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2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이러한 방안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할 것이다. 이후 이를 위한 제도적인 방안을 소개하고, 사회 전반의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할 방안도 제시한다. 그리고 따뜻함의 제공에 기여할 사상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면서, 리버럴과 대안우파, 종교 등이 어떻게 그러한 가이드라인을 따를 수 있는지 예시를 보일 것이다.

 

 

목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데 앞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목표를 확실히 하지 않는 경우, 후발주자에 의해 목표가 왜곡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기에 페미니즘의 목적은 여성의 권리 신장과 계몽을 통한 전체 인류의 계몽과 복리 증진이었지만, 현재 페미니즘의 목적은 여성해방이라는 두루뭉술한 타이틀과 실질적인 여성우월주의이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래의 해결방안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여야 한다.

 

먼저 우리의 1차적 목표는 대다수 인구에 대한 따뜻함의 제공이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함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여러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아래의 해결 방안은 대다수 인구에게 따뜻함을 제공해야 한다. 친밀한 인간관계 구축을 원조하든, 친구를 지정하든, 따뜻함을 충족할 기술적 해법을 동원하든 그 목적은 따뜻함의 제공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관심받고, 이해받고, 공감받고, 위로받고,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을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따뜻함을 제공하는 2차적 목표는 불확실성의 대응이다. 현대사회는 계속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며, 불확실성의 증가는 우리 문명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불필요한 불확실성은 줄이면서, 사람들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따뜻함의 충족은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강력한 자원이고, 관계성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 또한 불확실성을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현대인이 겪는 불확실성을 일부 감쇠하고,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이겨낼 힘을 길러 점증하는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을 견디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우리는 근대 질서의 유지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과학과 인권,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우리의 풍족한 삶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들이다. 이러한 것이 무너진다면 다시 무지와 가난, 억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따뜻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를 거대한 유치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제공하여 그들이 자신의 진영이 아닌 주변 사람과 근대사회를 사랑하고, 사회에 비근대적 진영논리를 요구하는 대신 근대적 질서를 충분히 수용할 힘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제도적 해결

사상이 사상 그 자체에만 머물면 현실에 대한 영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사상이나 문화를 주입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연계된 활동과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이에 필자는 따뜻함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제공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방안을 아래에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사회복지의 확대와 외로움에 대한 연구지원 또한 물론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필자는 사람들이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관계권이 인간의 기본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밀한 인간관계는 행복의 필수 요소이며, 친밀한 인간관계가 부족할 때 사람들은 여러 불행과 질병, 능력의 저하,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그것을 향한 욕망은 생존에 대한 욕망 못지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관계권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며, 사회복지 체계는 여기에도 조력해야 한다.

 

관계권을 보장하려는 시도는 외로움 담당 부처의 설립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이미 일부 국가는 자국의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계 부처를 설치하거나 관련 부서에 외로움 해소 업무를 부과하였다. 영국은 고독부(ministry of lonliness)를 설치해서 사회적 취약계층의 외로움 해소를 지원하고 있고, 일본도 내각관방 산하에 고독.고립 대책실을 신설하였다. 이러한 외로움 부서는 사회 전반의 외로움을 국가적으로 대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부처의 서비스 대상이 노인, 여성 등 약자집단뿐만 아니라 전체 인구로 확대될 때 사회 전반의 외로움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따뜻함을 제공하는 하나의 방안은 핵가족의 강화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통해 따뜻함을 제공받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와 배우자, 혹은 자식에게서 정서적, 물질적 지원을 받는다. 이러한 핵가족이 안정성을 보장받고 잘 기능한다면 따뜻함의 제공에도 그만큼 기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혼숙려 프로그램의 활성화와 가족교육 및 가족상담 지원, 2인 이상 가구에 대한 세제혜택, 가족단위 활동의 지원, 미디어를 활용한 가족중심 문화의 홍보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핵가족이 반드시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4인가족은 아니다. 부부가정이거나 동성가족, 대가족, 심지어는 쉐어하우스에서의 공동거주 또한 인간적 피난처로서의 핵가족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정부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서는 안되며, 비혼과 탈가족을 외치는 페미니즘에 휘둘려서도 안된다. 특히 정부는 저출산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정책적으로 비혼을 지양하고 결혼과 출산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미디어에 간섭하는 다양한 방법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핵가족만큼 취미공동체도 따뜻함의 제공에 기여할 수 있다. 하나의 활동을 공유하는 장기적인 친구관계는 가족만큼이나 관계성 욕구의 충족에 기여할 수 있다. 더구나 취미공동체는 관계성 욕구만큼 중요한 다른 심리적 욕구, 자율성 욕구(자유에 대한 갈망)와 유능성 욕구(능력을 키우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욕망)의 충족에도 기여할 수 있다. 지속되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취미산업은 계속 커지고 있으며, 어쩌면 19세기에 노동조합이 수행했던 시대변혁의 과제를, 21세기에는 취미공동체가 해낼지도 모른다. 여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취미에 가해지는 각종 불필요한 규제(직구 규제, 에어소프트 규제 등)를 폐지해야 하고, 취미공동체에 장소를 제공하거나 취미단체가 취미 관련 행사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취미공동체뿐만 아니라 스터디모임, 노조, 이슈중심 정치결사 등 풀뿌리 조직에 대한 지원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에 의해 이뤄지는 자생적인 조직 활동은 친밀한 인간관계 구축을 도울 수 있고,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해소하고 정치적 식견을 기르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이전에도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은 여럿 이뤄졌지만, 그러한 지원은 대부분 사상적/인구학적으로 편중된 단체에만 주어졌다는 한계가 있었다. 풀뿌리 조직에 대한 지원이 더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덜 편향된 형태로 이뤄진다면 이전에 거두지 못했던 시민의 정치참여 증가와, 친밀한 인간관계의 구축 모두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간관계 교육도 친밀한 인간관계의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 현대인이 친밀한 인간관계 구축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적인 이유는 인간관계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반응적으로 행동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지각해야 하며, 규범과 상대의 의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젊은 청년들 중에서 이러한 기술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여럿 보았고, 외로움 문제의 핵심인 히키코모리들은 특히 이 문제에 취약하다. 인간관계 교육은 이러한 사람들이 원할한 인간관계를 맺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방안과 함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 전반으로 사회복지의 범위 확대가 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선별복지를 하는 국가에서 사회복지의 주요 수혜자는 빈민이었으며, 신좌파의 영향으로 여성, 비행청소년, 노인, 이민자, 퀴어 등으로 확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소외되었고, 특히 1인가구 남성은 외로움에 가장 취약한 계층임에도 사실상 복지 사각지대에 있다. 관계권의 보장을 위한 복지 활동은 약자라고 규정된 특정 집단에 한정되어선 안되며, 외로움에 고통받는 대다수 인구로 지원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보편복지가 선별복지보다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1인가구는 관계적 약자로서 긴요한 복지 취약계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해법과는 별개로 기술의 발전이 따뜻함의 제공에 기여할 수도 있다. 정부의 두드러진 도움 없이도 케어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여러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용 로봇이 실제로 시중에 출시되었다. 속된 말로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통해 1인 1 AI메이드가 보급될 수 있다면,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에 대해 우리는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기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기술 발전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한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고 확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돕는다면 좋을 것이다.

 

따뜻함과는 큰 관련이 없지만, 기본소득은 불확실성의 해소에 일부 기여할 수 있다. 미래의 경제체제는 사람들에게 더 긴 교육기간과 더 빈번한 직업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불확실한 경제적 삶에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경제환경의 변화에 대비할 시간을 줄 수 있다. 그것이 기본소득이건, 안심소득이건, 일자리보장제이건, 삶의 안정성을 보장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방안은 삶의 불확실성을 부분적으로 해소할 기회를 줄 것이다. 특히 그 중 일자리보장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릴 기회를 제공해서,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에도 일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적 해결

단순히 제도만 바뀐다고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관련된 행동과 함께 그 변화를 지지하는 메시지가 함께 제시될 필요가 있다. 따뜻함을 강조하는 가치관과 사상은 따뜻함을 강조하기 위한 메시지 구성에 사용하기 용이하고, 전술한 여러 방안에 대한 사상적/문화적 반대를 완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한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따뜻함을 중시하고, 서로 관계맺으며, 이를 위한 방안을 고안하도록 동기부여할 수 있다. 조직문화가 성과에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상적 해결책 또한 따뜻함주의의 확산에 중요하다.

 

따뜻함주의 선언

필자가 5개의 글을 통해 서술하는 따뜻함주의는 인간에 대한 2가지 인식을 요구한다. 인간은 외롭다.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도록 진화하였으며,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하고, 조금이라도 옆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이 자기 주위에 있어주기를 본능적으로 원한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과 함께하고, 관심을 가져주며,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필요한 핵심 요소이자 목표이다.

 

여러 서구 인문학 사조는 개인을 강조하고, 개인과 세상을 대립시킨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인간상과 어긋날 뿐더러, 우리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어긋난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항상 주위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사람의 온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우정은 환상이 아니며, 모성은 죄악이 아니고, 따뜻함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에서 강조하는 독립된 자주적 개인은, 과학적으로도 그렇듯이, 탄탄한 사람의 온기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뜻함주의는 삶의 목표를 인간적 따뜻함에서 찾는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인간은 타인에게 애정을 받고, 타인에게 애정을 주기 위해 살아간다. 그 속에서 사람은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고, 인간의 모든 훌륭한 덕목이 거기서 나오며, 하나님의 왕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지고의 자유는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하며, 독립성과 강건함은 목표가 아니라 따뜻함을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서로 관계맺고, 사랑하고, 헌신해야 한다. 어머니적인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이상이다.

 

이러한 인식은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따뜻함을 제공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로서 잘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실지로 많은 인문학 사조는 자신이 강조하는 바를 위해 수많은 오류를 범하며, 마르크스와 니체, 고진, 쇼펜하우어, 우나무노, 칸트, 헤겔, 헤르더 모두 과학과 논리의 범위로 들어갈 때 비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따뜻함주의도 여러 한계를 가지지만 소기의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하리라 기대한다.

 

다른 사상의 변용

따뜻함주의가 따뜻함을 제공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함께, 적절히 설계된 메시지를 통해 전파된다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메시지를 설계하고 전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와 노하우가 쌓여 있으며, 그것은 이 글은 물론 필자의 앎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만 여기서 필자는 그러한 하나의 방법으로 기존 사상의 변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어떤 사상에 따뜻함의 요소가 포함된다면, 그 사상의 지지자들에게 따뜻함을 강조하는 일도 더 수월할 것이다.

 

리버럴은 따뜻함을 제공하는 범위를 전체 인구로 확대한다면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리버럴이 자칭 약자집단에게 들이는 정성이 일반인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해보라. 리버럴은 약자집단이 겪는 고통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일반인 또한 경험한다. 특히 외로움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인간은 약자이며, 우리는 우리 모두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리버럴이 이분법적 틀을 버리고 인간 보편에 관심과 정성을 들인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바겐크네히트가 비슷한 시도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대안우파는 공동체주의의 요소를 도입하여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대안우파로 간주되는 사람 중 일부(조너선 하이트, 조던 피터슨)는 공동체주의에 더 가까워보인다. 대안우파가 나오기 전부터 공동체주의는 전근대의 미덕을 강조했고, 그러한 미덕을 현대에 실천하기 위한 윤리학적, 제도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공동체주의가 강조하는 미덕은 강인함과 책임감뿐만 아니라 우정, 박애 등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대안우파보다도 종합적이고 뛰어나다. 한때 유승민의 비전이 많은 사람에게 지지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공동체주의는 '대안 대안우파'로서의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쩌면 종교가 근대문명을 보존하고 따뜻함을 제공하는 구세주가 될 수도 있다. 현재 세계의 주류 종교는 체제적 필요성으로 인해 보편적인 인간을 상대로 사랑을 호소하는 교리와 관습을 발달시켰으며, 지금도 그 잠재력이 남아있다. 종교가 더 근대친화적인 방식으로 변한다면, 종교는 근대문명을 보전하면서도 따뜻함을 제공하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수도 있다. 혹은 기성 종교가 아닌 시민종교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류 종교의 핵심 교리는 습득하면서도 구시대적 아집에서 자유로운 시민종교는 근대의 틀에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설파하는 역할을 더 수월하게 해낼 수도 있다.

 

 

보다 따뜻한 세상을 위해

많은 철학 사조는 과장하면 철학자 자신의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필자 또한 따뜻함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유에는 필자의 개인사가 결부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왕따로 고생하였고, 지금도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 처한 사람은 타인을 외면하거나,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해 외로움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다행히도 필자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지능이 조금 높았으며, 무엇보다 소중한 몇몇 사람들을 짧은 인생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들 덕분에 필자는 자신의 마음을 직면할 수 있었고, 진정 내가(그리고 다른 사람도) 원하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세월 속에서, 필자는 따뜻함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 중 하나라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함께하고, 관심받고, 사랑받고, 이해받고, 공감받고, 위로받고, 도움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것을 받을 기회가 적어졌으며, 기존에 세워졌던 대안은 약화되고, 대안 사상 또한 우리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제도를 통해, 그리고 인식의 전환을 통해, 따뜻함의 중요성을 직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우리의 최종결론은 아닐 것이며,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따뜻함주의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가치관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고, 결국 무엇을 하게 될 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신봉한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시도가 새 시대를 향한 여정에 일부라도 기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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