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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의 세 가지 뿌리와 세 가지 해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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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의 세 가지 뿌리와 세 가지 해결

과학주의자 2025. 9. 29. 19:55

카를 슈미트는 그가 활동했던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 중 하나이다. 지지자에게 슈미트는 새 시대의 사상가이자 새로운 비전의 제시자였고, 적대자에게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에 불과했다. 나치 패망 후 함께 사장되었던 슈미트는 90년대 이후 다시 떠오르고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일련의 반민주주의자들이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를 슈미트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인문학계에서는 슈미트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슈미트의 철학이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슈미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반대자였고,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자비한 독재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절대왕정이었다. 그는 여느 독일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정치를 이상으로 접근했고, 현실적인 타협과 방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슈미트의 토론 혐오와 독재자의 독단과 강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민주시민으로서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점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슈미트에 대한 비평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 지독한 독재 찬양자가 최근 현대사회를 위협하는 좌우파의 극단주의자들에게 추종받고 있으며, 그 수가 계속해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는 좌파의 상투어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탐색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하며, 거기에는 슈미트에 대한 이해도 포함된다. 우리는 슈미트 사상이 왜 지금 유행하는지 이해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 대응할 수 있다.

 

필자는 슈미트 사상의 배경을 3가지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슈미트는 근대화가 무르익지 않은 바이마르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불안정한 성격과 바이마르의 혼란은 그가 우익권위주의에 기울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이 3가지가 슈미트 사상을 낳았다. 필자는 슈미트 사상의 이 3가지 배경을 더 자세히 서술하려고 한다. 그리고 3가지 배경이 현대에 작용하는 방식과, 잠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슈미트를 낳은 3가지 배경

인문학을 학문적으로 대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는 어느 인문학 사조에 대해, 논리와 사실, 직관을 통해 그 타당성을 평가해볼 수 있다. 혹은, 그 인문학 사조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탐구하여 사조를 낳은 시대를 읽으려고 할 수 있다. 이 중 필자는 두번째 접근, 슈미트를 낳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회적 배경: 근대화되지 못한 독일

슈미트가 활동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돈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최소한의 정치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반목하였다. 수많은 정파는 판이하게 다른 국가를 지향했고, 이를 위해 상대와의 합의는 커녕 서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쿠데타와 무장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대통령과 의회는 계속해서 대립하였다. 바이마르의 정계는 가장 타협에서 거리가 먼 공산당과 나치가 장악하였다. 슈트레제만이 이룩한 합의는 호황기에 잠깐 지속되었지만, 대공황이 일어나자 삽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의 혼란은 동시기 다른 서유럽과 너무나도 달랐다. 최대 숙적 프랑스는 100년도 전에는 바이마르보다 더한 혼란을 겪었지만, 1871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합의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영국은 400년 전의 내전 이후로 정치체제가 안정되었으며, 체제의 안정성이 오히려 급격한 진보를 가로막기도 했다. 시작부터 민주주의로 출발한 미국은 자본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많은 국민들이 19세기 말까지 시민의 자유와 작은 정부의 이상을 공유하였다. 이들 나라도 대공황기에는 극심한 혼란을 경험했지만, 4개 국가 중 민주주의를 상실한 국가는 독일이 유일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의 혼란은 다른 국가도 겪었던 사건과 유사하다. 바이마르가 혼란을 겪기 100여년 전, 프랑스는 왕당파와 자유주의, 사회주의자 간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그 투쟁은 3번의 혁명과 3번의 쿠데타,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폭력을 동반했다. 400여년 전 영국은 의회민주주의와 절대왕정을 둘러싸고 전국적인 내전을 벌였으며, 종교적 동기까지 포함된 이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실제로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했던 영국 내전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나마 몇 번의 반란과 한 번의 내전, 한 번의 독립전쟁으로 끝낸 미국이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이들이 겪은 진통은 넓은 견지에서 보면 근대화의 과정이었다. 근대국가는 전근대와 다른 경제와 사회적 조건에 직면하고, 특히 다양한 이해관계와 교양을 갖춘 개인주의자 시민들에 직면한다. 낡은 사상과 체제는 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새로운 사상과 체제가 필요해지고, 그러한 변화는 혼돈을 전제한다. 근대를 맞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처했던 상황이 바로 그 혼돈이었고, 그들은 혼돈을 겪으며 새로운 가치와 질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하나하나 조각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영국과 프랑스(그리고 네덜란드와 미국, 스웨덴 등도)에게 민주주의는 공허한 사상이 아닌 정치적 실체였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제도와 기관, 규범, 노하우를 거느린 실체였고,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정파들과 혼란에 지친 민중이 각고의 투쟁과 토론 끝에 성사시킨 합의의 결과였다. 대의제와 입헌군주, 양원제, 이원집정부제, 내각, 토론, 보통선거,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민주주의 체제를 존속하고 여러 이해집단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경험으로 선택된 연장이었다.

 

반면 이러한 경험을 거친 적 없는 독일에게 민주주의는 공허한 사상에 불과했다. 자유도시 이후로 정치적으로 정체되었던 독일은 프로이센을 통해 그나마 근대화가 되었는데, 프로이센은 민주주의를 일부만 허용하고 많은 부분을 황제와 관료의 통제 하에 두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는 제국의회의 장식품에 불과했고, 베버의 책에 나오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신민으로 자라난 독일인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고, 민주적 타협을 이끌어낸 경험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를 작동시킨 경험도 없었다. 

 

경험의 부족은 바이마르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혼란과,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정치적 협의를 해본 적이 없는 독일인에게 논의란 머리아프고 복잡하기만 한 과제였고, 의회민주주의는 구색에 불과했으며 똑똑한 사람(자본가)의 장난감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체제(바이마르)의 혼란과 위험은 황제 체제(독일 2제국)의 질서와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민주주의를 왜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감이 없는 독일 대중에게 이 차이는 이전 시대에 대한 향수와 민주주의 불신을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배경이 슈미트가 자신의 사상을 고안하고 확산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자본가 독재로 단순화하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아나키즘에도 절대왕정에도 속하지 못한 모순의 산물로 묘사하였다. 그는 민주적 토론을 결정을 미루는 회피라고 치부하였고,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의회와 여론은 무시한 채 판사의 결정만을 강조하였다. 토론과 민주주의로 이어진 역사적 경험과 개인주의적 배경은 그의 글에서 전혀 나타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슈미트의 한계였고, 슈미트와 함께한 독일의 한계였다. 근대의 경험이 없는 독일인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형식적인 이상에 불과했고, 더러는 혼란만 부추기는 문제의 근원이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프리드리히로(슈미트는 보댕으로) 익숙해진 절대왕정과 독재정이 이들에게는 더 친숙했다. 사실 근대화 초기 국가가 독재정으로 기우는 모습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근대 경험의 부족으로 독재와 반민주주의로 기우는 것은 많은 근대 초년생이 앓는 열병이고, 독일도, 슈미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리적 배경: 위험한 세상에서의 우경화

슈미트는 정치적 의사결정에 있어 강한 주권자의 결단을 선호했다. 그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싫어했고, 그 어떤 덕목보다 결단과 그에 대한 복종을 중시했다. 또한 그는 '적'으로 규정된 타인,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나치 이후에는 본인도 반유대주의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인식의 배경에는 세상을 내 편(내집단)과 적(외집단)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극도로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곳으로 보는 슈미트의 세계관이 있었다. 이전의 독일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불안과 무기력, 비관으로 바라보았고, 슈미트 또한 그랬다.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슈미트만의 것이 아니다. 우익권위주의(RWA, Right-Wing Authoritarianism)는 전통적인 권위를 신봉하는 사회적 태도로, 파시즘을 연구하던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우익권위주의자들은 전통을 중시하고, 권위를 가진 권위자가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이들은 논의나 민주적 의사결정을 싫어하고, 상급자가 명령하면 하급자는 따르는 상명하달식 의사결정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좌파)과, 전통적인 위계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여성, 아동, 빈자 등)에게 적대적이다.

 

슈미트는 우익권위주의의 특성을 여럿 보이고 있다. 그는 보수주의 철학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그의 사상 곳곳에서는 후술할 보댕에서 비롯되는 절대왕정에 대한 향수와 선망이 강하게 묻어난다. 또한 그는 결단을 강조했으며, 독재자가 결단하면 나머지 국가의 모두가 복종하는 체제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반면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싫어했는데, 자유민주주의의 '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의사결정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적과 아군의 구분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국가와 권위의 적을 물리적으로 죽여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였고, 짧은 기간이지만 반유대주의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슈미트의 우익권위주의가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로 그의 세계관이다. 슈미트에게 세계는 극도로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언제든지 전투의 위험이 상존해 있으며, 적과 나의 전쟁이 영원토록 계속되고, 한치 앞을 볼 수 없어 진보하는지 퇴보하는지도 불확실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나의 집과 재산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이러한 세계관은 슈미트가 영향을 받은 홉스와 독일 보수주의 철학자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슈미트는 단지 개인과 개인의 전쟁을 국가의 국가의 전쟁으로 수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위험한 세계관(dangerous worldview)은 바로 우익권위주의의 근원이다. 세상이 위험하고,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으며, 나의 생존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할때 사람들은 우익권위주의자가 된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안정을 바라게 되고, 혼란을 끝내고 질서와 안전을 가져다줄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이는 오래된 안정의 역사를 가져온 전통과, 그 전통을 중심으로 질서를 세울 독재자에 대한 추종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사람들은 우익권위주의자가 되고, 홉스와 도노소 코르테스도 그러하였으며, 슈미트 또한 그랬다.

 

우익권위주의는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하고 혼란한 곳이라고 믿을 때 강해진다. 그렇다면 실제로 세상이 위험하고 혼란해진다면 우익권위주의도 강해질 것이다. 가령 의회파과 왕당파가 내전을 벌이고 있거나, 시민이 왕의 목을 자르고 반혁명파를 학살하는 상황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전쟁으로 기존 체제가 박살나고,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망가졌으며, 각기 정치세력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거리낌없이 테러와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도 특히 그러할 것이다.

 

바로 이 상황이 홉스가 처했던 상황이고, 메스트르가 처했던 상황이며, 슈미트와 추종자들이 살아가야 했던 환경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는 실제로 물리적 폭력이 횡행하던 시절이었고,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혼돈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슈미트는 당연히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느꼈을 것이고, 특히 항상 불안해하고 냉소적인 그의 성격이 그것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우익권위주의로 흐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고,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동조했던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사상적 배경: 키르케고르와 결단의 철학

슈미트는 다양한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홉스의 정치사상을 계승했고, 보댕의 충실한 후계자였으며, 도노소 코르테스와 조셉 메스트르를 잇는 후계자면서, 키르케고르의 열렬한 신도였다. 슈미트가 이 중 어느 철학자의 후계자라고 하는 것은 사태를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철학적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중 키르케고르는 슈미트의 선조를 묶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다.

 

슈미트는 기본적으로 보댕과 키르케고르, 홉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홉스와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키르케고르의 가치관을 받아들였으며, 보댕의 사상을 추종하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만인이 투쟁하는 장으로 보았고, 결단하는 주체를 인간 본연의 자세로 보았으며, 신 앞에서 결단하는 지도자와 결단에 복종하는 신민의 나라를 꿈꾸었다. 이 세 사상가는 서로 상당히 다르지만, 모두 결단하는 주체를 강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홉스는 혼란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독재자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슈미트는 그러한 독재자를 낳는 '결단'과, 그렇게 선출된 독재자의 '결단'을 강조하였다. 보댕은 왕을 신의 대리자로 보면서, 토의하기보다 왕에게 복종하기를 주문했다. 여기서 슈미트는 왕의 결단에 주어지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장 명확하게 결단을 강조한 사상가는 키르케고르였다. 그는 결단이 인간 실존의 본질이며 결단을 통해 인간이 실존의 단계를 넘어간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삶은 어떠한 규칙이나 법칙이 아니라 개개인이 내리는 결단에 의해 규정되었고, 신앙 또한 개인이 내리는 결단에 기초하였다.

 

결단은 적어도 슈미트의 사상에서 아주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사실 홉스와 보댕이 결단 그 자체에 그렇게 많은 중요성을 두진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다소 곡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더 직접적으로 결단을 강조하였고, 결단을 인간 실존의 본질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사상에 공감한 슈미트는 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예외상태에서 이뤄지는 결단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고, 인간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본질, 정치의 본질로까지 보았다.

 

결단에 대한 강조는 슈미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슈미트처럼 결단을 강조하진 않았지만, 당대 독일인들은 비슷한 개념에 비슷하게 높은 강조점을 두었다. 낭만주의자들은 후기로 갈수록 개인의 '의지'에 중요성을 두었다. 그들에게 의지는 이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이며, 그들은 의지의 내용이나 정당성보다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는 것 자체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니체도 부분적으로 계승하였고, 내용은 다르지만 하이데거도 주체적인 결단을 중시하였다. 결단주의는 1등은 아닐지언정, 독일 담론에서 항상 주된 자리를 차지했었다.

 

독일 담론의 결단주의적 배경은 슈미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신경성이 높으리라고 추정되는 그에게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또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앞서 보았듯이 바이마르 독일의 전근대성과 슈미트 본인의 우익권위주의에서도 슈미트 사상의 근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사상으로서 정립된 틀은 키르케고르에 있었다. 슈미트는 키르케고르의 추종자였고, 키르케고르를 중심으로 보댕과 홉스를 흡수했으며, 메스트르와 도노소 코르테스의 정서를 키르케고르의 이름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슈미트 사상의 직접적 근원을 키르케고르에서 찾을 수 있다. 슈미트 사상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기초했으며, 보댕의 철학과 홉스의 논리가 그 기둥을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이 탄생하고 확산된 배경에는 슈미트와 바이마르에 만연했던 높은 우익권위주의와, 우익권위주의의 상승을 초래한 바이마르의 혼란과 민주주의 경험의 미숙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사상적 근원이 결합되면서 슈미트의 사상이 탄생할 수 있었다.

 

 

현대의 근황

앞서 필자는 슈미트 사상의 사회적, 심리적, 사상적 근원을 언급하였다. 슈미트는 단죄되고 죽었지만, 그에 대한 추종은 다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그 원인이 슈미트를 낳은 3가지 근원에 있지 않은지 의심해볼 수 있다. 슈미트의 근원은 민주주의 미숙, 우익권위주의, 결단주의 철학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3가지는 다시 부활하고 있는가?

 

사회적 현황: 모두가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 경험을 쌓아왔다. 슈미트의 고장이던 독일조차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경쟁하며 협력하는 정치질서를 만들어냈고, 서구 전반에서 좌우파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정하고 협력적인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정착하였다. 20세기 중반 우파가 복지국가를 수용하고, 21세기 좌파가 신자유주의를 앞장서서 받아들이는 현실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미숙이 일어났으리라고 상상하기는 문득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지난 40년간 이러한 여론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좌우파는 점점 상대를 존중하고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대신, 상대방을 말살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비단 서구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민주당은 조국당을 제외한 전체 정치세력을 축출 대상으로 적대시하고 있고, 내란당은 반민주주의 쿠데타를 추종하는 세력이 당의 중심을 잡고 있다.

 

지난 몇십년간 좌파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적, 행동적 적대를 계속해서 키워왔다. 신좌파 철학은 지속적으로 정부가 약자를 핍박하는 불의한 악당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한 사상으로 무장한 학자와 시민운동가는 점차적으로 기성 정치인을 장악하면서 좌파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가상의 적을 매도하고 내부단합과 투쟁심을 고취하는데 능력이 있었지만,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일은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우파는 더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지난 20년간 우파는 기성 정치인이 대안우파와 경쟁하거나, 밀려나거나, 장악당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대안우파는 신좌파보다 더 명시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였고, 밑바닥 출신인 이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능력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또한 검열, 배척 등 리버럴의 횡포에 질려 대안우파에 가담하게 된 이들도 일부 있었는데, 이들에게도 민주주의는 자신을 핍박하는 불의한 체제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좌파가 사상적인 반민주주의를 키운 동안, 이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 반민주주의자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좌우파 모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고, 상대방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대신 투쟁하고 말살하는 태도를 키워왔다. 여기에 때마침 불어닥친 경제위기와 2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저성장은 사람들에게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을 더 키워주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와중에, 정치는 노련한 타협의 장이 아니라 적을 말살하려고 하는 좌우파의 골치아픈 전장이 되었다.

 

심리적 현황: 다시 위험해진 세상

여러 지표를 볼 때 우익권위주의가 강해지고 있다는 점은 다소 명확해 보인다. 우익권위주의의 행동적 지표인 민주주의 불신, 정치적 폭력, 증오범죄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우익권위주의가 원래 측정하고자 했던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강해지고 있다.

 

우익권위주의의 상승세는 사람들이 세상을 더 위험한 곳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사람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한 불확실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정보사회로 진입하면서 직업의 재배치가 현실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일자리로 진입해야 했다. 게다가 복지의 축소는 사람들의 경제적 존립을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 여기에 전염병, 사고, 테러의 위험은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었고, 사람들이 느끼는 위험의 크기를 가중하였다.

 

사실 극우의 부상은 경제적 하락보다는 경제적 불안정과 더욱 관련되어 있다. 과거 여러 사회학자들은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실업이 극우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실업이나 경기침체, 낮은 소득, 그리고 직접적인 이민이 극우를 강하게 하진 못했다. 대신 극우는 경제적 불확실성이 크고, 보편적 복지망이 약하며, 경쟁 압력(특히 인구집단간 경쟁)이 클 때 강해졌다. 이러한 요소는 사람들이 받는 실질 소득을 낮추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세상을 서로 투쟁하는 위험한 혼란의 장으로 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이러한 인식은 우익권위주의의 근원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극우화는 심해지고 있으며, 슈미트 또한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라고 할 만한 세상의 위험함과 혼란함 역시 강해지고 있다. 사실 세계화가 극우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반만 맞았다. 세계화와 이민이 직접 극우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세계화와 동반된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탄탄한 복지망 속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피해간 서구는, 복지망이 해체되자 다시 파시즘의 위기에 처했다.

 

사상적 현황: 만연해진 결단주의 사상

현대에는 결단주의 사상이 강해지고 있는가? 만약 질문을 '현대에는 주체의 철학이 주류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인기있는 철학의 대부분은 대륙철학에 속하고,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이 대부분이다. 한번 주위에 물어보라. 크립키와 콰인을 아는 사람은 어느 세대를 보더라도 찾기가 힘들다. 반면 니체와 사르트르를 아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찾아볼 수 있다. 시중에 있는 철학책의 대부분은 대륙철학의 맥에 속해있고, 내용은 대부분 자아탐구에 치중되어 있다.

 

그러나 질문을 '현대에 주체의 철학이 주류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니체와 사르트르를 아는 사람은 크립키와 콰인을 아는 사람에 비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젊은 세대에서뿐만 아니라 노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역사적으로 분석철학은 대륙철학보다 인기가 없었고, 상식적으로 대중이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양상세계에 대한 머리아프고 수학 기호가 나오는 논의에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시야를 철학 외부까지 확장하면, 윤리학은 교양서적의 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고 신좌파 이데올로기는 좌파 진영의 열렬한 충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실 슈미트의 사상은 결단주의 철학과 깊게 관련되어 있지만, 과연 지금도 결단주의 철학이 파시즘과 관련되어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간기에 결단주의 철학자는 대개 민주주의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민주주의에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륙철학을 전공하는 많은 사람은 민주주의 원리를 옹호하고, 특히 파시즘과 표면적으로 반대되는 리버럴에 경도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결단주의가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일은 비현실적일 수 있다.

 

다만 결단주의와 주체의 철학이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슈미트 사상에 대한 접근성은 높일 수도 있다. 슈미트는 결단을 강조한 대표적인 대륙철학자이고, 인문학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도 일부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인문학 지식인 중에도 파시즘을 지지하진 않더라도 슈미트에 호의적인 사람이 더러 있다. 이들이 네오나치가 되진 않더라도, 슈미트의 반민주주의에 동조할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슈미트가 활동했던 시대와 지금이 어느정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는 좌우파의 극단화로 인해 민주주의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정치를 흔들고 있고, 복지의 축소와 경제구조의 변화로 우익권위주의가 상승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인 투쟁이 만성화되는 위험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주체의 인문학을 통로로 슈미트에 접근하기도 쉽다. 이런 상황에서 슈미트 사상이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은 예상외의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신좌파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던 80년대에 슈미트 사상이 다시 발흥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만약 슈미트 사상이 부활하고 있다면, 우리의 1차적 과제는 그 해악을 막는 것이다. 슈미트 사상을 변용하여 수용하는 것도 고려할 만한 대안이지만, 슈미트 사상의 반민주주의적이고 독재적인 부분을 수용하는 것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길이다. 그리고 사회가 이견을 물리적으로 탄압하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슈미트 사상의 발흥을 이끈 상황에 대처할 필요 또한 있다.

 

어떻게? 다른 많은 사회문제가 그렇듯이 이것 또한 간단한 해결책을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슈미트 사상을 탄압하는 일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사람들은 슈미트를 추종한 것이 아니라, 슈미트의 사상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를 낳은 사회적, 심리적, 사상적 근원은 동시에 파시즘이 창궐하는 사회적, 심리적, 사상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병인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슈미트 사상을 발흥시키는 3가지 근원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해법: 공론장의 복구

사실 공론장의 복구는 가장 간단한 해법이나, 가장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만약 좌우파가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를 해나간다면, 파시즘의 준동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극우파의 정계 진출 또한 차단할 수 있다. 현재 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소한 정치관여층이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론장의 복구는 모두가 모색하는 문제 중 하나이면서, 아직까지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다.

 

공론장을 복구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필자가 알기로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우리의 지난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도해볼 만한 일은 있다. 먼저 우리는 중도민생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극단화된 좌우파 정당을 견제할 수 있다.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은 한쪽으로 극단화되기 어렵다. 또한 지금도 대다수의 시민은 극단화된 정치이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민생에 민감한 정당은 극단화된 정치이념에 물들기 다소 어렵다.

 

혹은 좌우파에 속해있으면서도, 상호간 대화를 통해 중도파를 생성할 수도 있다. 좌우파 중 하나지만 공론장의 복구를 지향하고 상대와 대화할 용의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이러한 일명 온건 좌파와 온건 우파가 서로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한다면, 양 진영의 극단화와 상호투쟁을 다소 완화할 수도 있다. 실제 미국에서도 민주당과 공화당의 극한 충돌을 막아온 이들은 중도 코커스였다.

 

이러한 전략은 개인의 행동이기 때문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상호간 대화는 실천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략은, 우리가 당장 시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어쩌면 가장 정석적으로 대안과 해결책을 생성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심리적 해법: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위험한 세계관의 확장은 부분적으로 복지망의 축소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복지망의 공고화가 우익권위주의의 약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복지망이 축소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경제적으로 실패했을때 생존의 위험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실감했다. 이러한 위험이 상당 부분 경감되고, 사람들이 경제적 불확실성을 위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면, 우익권위주의는 확실히 약해질 것이다. 이러한 복지는 생산적 복지가 아니라 공공부조의 형태를 취해야 하고, 기본소득은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좋을 수 있다.

 

위험의 해소와 큰 관련은 없을 수 있지만 인간관계의 확충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튼튼하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세상의 실제 위험을 줄여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 불안과 위협감을 함께 나누고 경감하게 할 수는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미 필자가 따뜻함주의의 형태로 제시한 바 있는데, 사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따뜻함주의를 제안한 부수적인 동기 중 하나가 우익권위주의의 감소였다.

 

사상적 해법: 앞으로도 잘하자

슈미트의 사상이 키르케고르와 결단주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결단주의 철학이 지금도 과거만큼 위험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키르케고르의 추종자는 대부분 리버럴이고, 보댕의 추종자는 거의 사멸했으며, 홉스 연구자의 대부분은 전체주의에 반대한다. 결단주의 철학에 대한 어떤 조치가 자유민주주의의 보호와 파시즘 배격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사상적인 면에서 우리가 할 일은 슈미트 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달리 결단주의 철학은 파시즘과 결부되는 경우가 있었고, 슈미트는 한 예이다. 이러한 점을 미리 알리고, 사람들이 슈미트의 반민주주의에 동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해도 충분히라리고 생각된다.

 

 

안녕 슈미트

슈미트는 여러모로 가장 유명한 사상가 중 하나이다. 그것이 호평이건 악평이건 그의 이름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오르내렸고, 최근에는 더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다. 그의 반민주주의와 독재 추종은 우리가 수용할 수 없지만, 그를 이해하고 대비하는 것은 우리 문명의 보존과 발전에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슈미트를 3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근대를 만들어가고 있던 바이마르 독일에서 태어났고, 세상이 위험하다는 그의 믿음이 그의 지향을 만들어냈으며, 키르케고르와 보댕에 힘입어 그의 사상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슈미트를 낳았고, 지금도 슈미트의 추종자를 낳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슈미트의 동료에게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우리의 선배는 큰 대가를 치뤄야 했다. 슈미트와 함께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 그들은 5000만명을 잃었고, 베버의 희망은 30년 후 잿더미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는 옛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을까? 슈미트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았지만, 나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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