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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인간의 윤리학 - 예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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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인간의 윤리학 - 예시

과학주의자 2022. 5. 20. 23:29

앞서 3개의 글에서 우리는 human doing 개념과 사회계약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이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이론은 도덕이 도덕법칙이 실현가능한 영역에서만 유의미하며, 도덕은 사람들의 행동을 서로 조율하는 조율규칙이라고 제안한다. 이 조율규칙은 사회계약에서 도출되며, 인권과 차등원칙, 공리주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이 이론은 장애인과 동물에도 적용되고, 처벌윤리와 덕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다.

 

한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는 방법은 이론을 직접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는 여러 과학 교과서에 항상 예제가 실려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제를 만드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대신 이 글에서는 외모지상주의와 난민 수용, 낙태의 3가지 윤리적 쟁점에 우리가 다뤄온 삼원적 사회계약론을 적용해보고,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며 어떠한 결과를 도출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는 주된 윤리적 쟁점은 아니지만, 여느 주요 쟁점 못지않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전반적으로 외모지상주의는 잘못되었다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서 인정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많은 논란과 논쟁이 있다. 한쪽에는 외모지상주의를 반대하는 페미니즘 진영이 있다. 이들은 외모지상주의가 여성억압의 도구이며, 여성해방을 위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반대쪽에는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업과 개인에게 외모로 사람을 선별할 자유가 있으며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사이에서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거나, 외모는 사회생활에 중요하다는 등의 두서없는 일반인들의 주장이 끼어들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논의를 매우 혼잡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성 이전에: 도덕이 가능한가?

외모지상주의의 도덕적 정당성을 따지기 전에 한가지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 해결가능한 문제인지 여부이다. 우리의 삼원적 사회계약론은 도덕이 적용가능한 영역에서만 적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만약 외모지상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인간 본성이고 이를 완화하는 일도 불가능하다면, 외모지상주의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은 아름다운 외모를 선호하는 본능적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와 관련한 도덕법칙은 성립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외모지상주의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는, 외모지상주의가 나타나는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인간의 생물학적 선호는 현재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도덕적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력서 사진에 기초한 채용 차별은 간단한 조치(블라인드 채용)를 통해 제거하거나 완화할 수 있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완화를 위한 이력서 사진 기입란 제거는 충분히 도덕적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비만인에게 일정 쿼터를 할당하여 취업을 보장하는 제도의 경우에도, 제도를 시행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능히 도덕적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뇌과학은 21세기에 가장 급속히 발달하는 분야중 하나이며, 정신상태를 변형하는 약은 현재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유통되고 있다. 결국 외모지상주의는 뇌의 보상회로 구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적 본능은 미래에 인간적 개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의 논의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미래에 대한 논의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를 제거하는 뇌과학 기술에 자금을 투자할 수도 있고, 그런 기술이 실용화되는 미래에 그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들도 역시 충분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외모지상주의는 그것이 작용하는 영역과 맥락에 따라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현재 고려대상이 될 수 없더라도 미래에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외모지상주의를 제거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도입하려고 하는 각종 제도들에 대해서 그것이 실현가능하다면 충분히 도덕적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 고려하여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외모지상주의를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바뀔수 있는 실천과 관행들'로 정의하고자 한다.

 

외모지상주의는 정당한가?

외모지상주의에서의 주된 쟁점은 사회적 공익과 개인적 자유의 충돌이다. 이는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 공리주의와 인권의 충돌과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섣불리 외모지상주의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특정한 이유로 인권에 대한 침해(세금, 징병 등)를 용인했음을 기억하라. 외모에 기반한 차별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약할 수도 있다. 섣불리 자유권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는 외모를 차별할 자유가 자유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 또한 외모에 의한 차별이 평등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지도 잘 논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점은, 현대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가 일정한 이익과 손해를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소비자의 선호를 충족하고, 요식업자들은 예쁜 알바생들을 통해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서구권에서는 건강한 사람의 모습이 좋은 외모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 외모지상주의는 사회 전반의 보건 환경을 개선하고 의료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반면 외모지상주의는 이점 못지않게 사회의 보건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 만약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외모가 좋은 외모의 기준이 된다면, 그 결과는 파괴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미녀에 대한 기준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한 외모지상주의가 주요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섭식장애는 미국인 중 3000만명이 경험하였으며, 섭식장애는 치사율 7%로 가장 주의깊게 다뤄지는 정신질환 중 하나이다. 또한 연약한 여성을 선호하는 외모 기준은 여성들의 근력운동을 방해하고 노년기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남성에 비해 매우 낮은 여성의 근력(과 관련 건강지표)은 일정 부분 이러한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반영한다.

 

공리주의 원칙과 차등원칙을 적용할 경우, 외모지상주의는 이점과 해악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판단은 불가능하거나 힘들다. 하지만 이점과 해악의 질적 차이를 고려하면 우리는 외모지상주의가 장려되기보다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모지상주의의 이점은 대개 경제적 가치인 반면, 해악에는 섭식장애와 같이 생명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권은 다른 권리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거나 최소한 섭식장애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정당할 수 있다.

 

차등원칙을 적용하는 경우에도 외모지상주의는 정당화되기 힘들어 보인다. 차등원칙에 따르면 외모지상주의는 그 체제에서의 최소수혜자들(못생긴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데, 외모지상주의 체제가 우리 사회의 못난이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사회의 여성들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과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점차 남성들도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외모지상주의는 전반적으로 다른 성별이나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는 이익을 주지만, 체제 자체의 최소수혜자들에게는 보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소수혜자를 포함하는 사회 전체의 평균효용을 증진시키는 물질지상주의(자본에 의한 차별)와 다르다. 

 

이러한 측면들을 살펴볼 때 외모지상주의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어 보인다. 외모지상주의는 중대한 생명권에 위협을 가져오며, 최소수혜자들에게 가능한 가장 나쁜 보상을 제공한다. 덧붙여 외모지상주의는 사회 내에서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그래서 쟁점인 것이다), 덕윤리로도 정당화되기 힘들어 보인다. 외모지상주의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섭식장애의 위험을 최소화할 추가적인 기제가 준비되어야 하고, 또한 외모적인 최소수혜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하는가

앞서 우리는 외모지상주의가 도덕적으로 부당하며 개선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패션잡지를 불태우고 모델 기획사에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령 외모지상주의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해도, 개선안은 사회에서 기업과 개인에 대한 자유를 최소한으로만 침해해야 하며 가장 좋은 효율을 산출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된 외모지상주의의 문제는, 개선안이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개선안은 외모지상주의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건강 문제, 섭식장애, 비만인에 대한 차별 등)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그러한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외모지상주의와 연관된 대중매체에서 세금을 걷어 정신병원을 증설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모호한 여성해방을 위해 래디컬 페미니즘 교육을 확대하는 일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그것이 외모지상주의는 완화할 수 있어도, 건강과 섭식장애와 같은 중요한 목표들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개선안은, 오히려 외모지상주의를 이용하는 방향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 만약 좋은 외모의 기준이 건강한 사람으로 잡힌다면 이러한 외모지상주의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한 외모지상주의는 섭식장애의 위험을 줄이고, 최소수혜자들에게도 건강을 위해 행동할 동기를 제공하면서 사회 전체의 보건 환경을 증진할 수 있다. 이러한 외모지상주의는 도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으며, 여러 이점도 있기 때문에 국가가 여기에 행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도 정당화될 수 있다.

 

 

난민

난민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또한 난민들이 불쌍하다는 것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난민을 우리나라에 들여와야 하는지는 많은 반대가 있다. 난민 문제는 점점 국제정치에서 주된 화두가 되고 있으며, 지정학적 상황과 국내 상황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윤리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며, '국가는 난민을 받을 의무가 있는가?'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아프간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나

대개 난민을 받는 국가들은 상당한 경제력과 행정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난민을 받는 일은 대개 실현가능하다. 고로 우리는 우리나라에 외국 난민들을 받을 의무가 있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일명 '난민 의무제'가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살펴봐야 하는데, 난민 의무제가 허용되기 위해서는 이것이 인권과 차등원칙, 공리주의 원칙에 잘 부합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사회계약론은 보편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난민과 국내 시민들이 모두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길고 복잡했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논의와 달리, 난민 의무제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다. 난민 의무제는 지극히 타당하며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난민은 대개 죽음의 위협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돌아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난민 보호는 생명권 보호와 연계되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은 응당히 난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생명권은 가장 명확하면서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에 어떠한 다른 권리나 사회적 효용에 우선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물론 현실에서 난민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이들은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슬럼가를 형성하여 공권력의 집행을 방해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점점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정치를 요구하며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난민이 모두 연쇄살인마거나 테러리스트가 아닌 한, 어떤 해악도 난민의 생명권 보호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국가는 난민에게 여러모로 인권침해적인 제한을 가하여 그러한 해악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제한은 난민 수용과 보호라는 기본 원칙에 어긋나서는 안된다.

 

난민 정책

앞서도 비슷하게 말했지만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도망온 압둘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때리고 죽여도 방관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난민 정책은 1차적으로 난민의 생명권 보호를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집행하는 국가는 국민들의 대표로서 자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여느 개인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칙을 실현할 의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 정책을 집행하는 국가는 난민들의 생명권 못지않게 자국민들의 안전과 이익도 보장해야 한다.

 

난민 정책에 대해 논의할 때, 난민들이 다소 우리가 다룬 장애인과 비슷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난민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정상인이지만, 법치와 민주주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인 선진국 시민들에 비해 낮다. 그러면서도 일반인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세속적인 법치민주주의적 질서를 해치고 도덕법칙의 실현을 방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국가는 거주구역 지정이나 난민 등록과 같이 이들에게 다소 인권침해적으로 보이는 통제를 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절차들은 도덕법칙의 실현(과 이를 통한 난민들의 권리보호)을 목표로 해야 한다.

 

또한 같은 권리에 있어서는, 난민의 권리보다는 자국민의 권리가 우선한다. 이는 국가의 텔로스와 관련되어 있는데, 국가는 자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에 국가의 텔로스는 자국민의 권리와 이익이다. 물론 이것이 국민들로 하여금 보편적인 사회계약 이행을 거부하게 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목표로 인해 국가는 최소한 난민들의 생명권보다는 자국민의 생명권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 

 

 

낙태

낙태는 가장 복잡하고 머리아픈 주제 중 하나이며, 아마 여기서 다뤄진 3가지 문제 중 가장 메이저한 주제일 것이다. 낙태는 단순한 종교적 윤리에 대한 대응에서 부터, 과연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골치아픈 철학적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또한 애석하게도 종교가 깊이 개입해있기 때문에, 낙태는 위 3가지 주제 중 가장 합의된 사항이 적은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문제

낙태 문제에서 가장 첨예하게 입장이 다른 문제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정의이다.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성숙한 후에 비로소 자궁을 나옴으로서 태어난다. 수정란에서 신생아에 이르는 전 과정이 모두 연속적이기 때문에, 이를 나누는 일은 매우 애매하다. 필자 역시 이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다만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 장애인과 인간을 나눈 문제들을 통해 약간의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삼원적 사회계약론의 입장에서 볼 때, 수정란은 동물이나 심지어 무생물에 가깝다. 수정란은 의식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human doing으로서의 측면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다수의 수정란은 자궁에 착상하기 전에 사멸하며, 착상한 수정란도 많은 경우 죽임을 당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불임 부부들도 잘 알고 있듯이 수정란이 태아로 자라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또한 태아마저도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까워 보이는데, 왜냐하면 고통과 의식이라는 공통점은 동물과 공유하는 반면 지성과 사회성, 의지력이 부재하여 태아 역시 human doing의 측면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성과 사회성, 의지력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식물인간을 동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하라. 우리가 어쩌면 동물보다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식물인간을 장애'인'으로 대접하는 이유는, 우리가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가능한 상태(사실 모든 인간이 이 상태를 거친다)인 수정란과 태아도 장애'인'으로 인정해야 하며, 적어도 착상과 태반 형성에 성공하여 인간으로 자라날 확률이 매우 높아진 태아의 경우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권리가 그에게도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원적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경계에 대해 추가적인 정의는 하지 않되, 태아가 일반적인 human doing으로 자라날 가능성의 정도로 태아의 인간성을 평가할 것을 제안한다. 대다수의 수정란은 생리와 함께 배출되기 때문에 이들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착상을 하고 태반을 형성한 태아는 정상적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적어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될 확률보단 높다) 이들은 우리 인간의 충분히 가능한 상태로서 능히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수정란은 물건으로, 잘 자라난 태아는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그 경계는 태아가 정상적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자랄 확률에 기초하여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는 허용되는가?

잠정적으로 인간의 기준에 대해 정의를 내렸으니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정란은 동물 이하이며, 착상에 성공한 태아는 인간이다. 고로 수정란의 낙태는 허용되고, 수개월된 태아의 낙태는 허용되어선 안된다. 여기에 임신은 대개 성관계라는 자유권의 행사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태 금지가 자유권을 침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수정란과 태아의 중간지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필자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며, 다만 심장박동 여부나 뇌활동 출현 여부가 잠정적인 중간지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지표들을 보이는 태아들은 생존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아는 장애인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가 산모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출산이 임박한 태아라도 낙태가 허용될 수 있다. 왜 모두 같은 생명인데 산모가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결론은 인권이나 차등원칙(생명이 걸려있기 때문에 죽는쪽이 항상 최소수혜자이다)에서가 아니라 공리주의 원칙에서 추론된다. 태아와 산모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의 생명은 같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남는 것은 둘의 쾌고감소 능력의 차이이다. 그리고 생존했을때 앞으로 더 많은 쾌락을 겪을 능력과 확률은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기능적인 신경계를 가진 산모이기 때문에, 산모가 생존하는 쪽이 더 많은 평균효용을 보장한다.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이 글의 마지막은 다소 민감하면서도 매우 복잡한 문제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주제는 이 글에서 가장 모호하고 미결된 주제이며, 필자도 아직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많은 국가에서 강간에 의해 임신이 일어난 경우, 설사 출산이 임박한 아이라도 낙태를 허용한다. 그러나 많은 윤리학자들은 강간에 의한 임신을 낙태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낙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모두 생명권에 대한 침해라고 여긴다. 과연 강간에 의한 임신은 예외사항이 될 수 있는가? 태아가 충분히 인간으로 취급되는 정도로 성장한 경우에도 낙태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경우에 이론에서 도출할 수 있는 일반적인 해답은, 우리의 인식과 반대로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도 낙태를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인했건 충분히 성숙한 태아는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태아의 생명권이 산모의 고통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다만 강간에 의한 임신과 출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산모에게 심대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에, 차등원칙에 따라 이러한 고통을 만회할만큼 충분한 지원이 최소수혜자(산모)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정서적 거부감을 제쳐두고라도 이 결론이 가지는 문제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한 human doing의 사회는 범죄로 인한 고통을 충분히 만회할 만큼의 보상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human doing인 동시에 human being이라는 점도 고려하라. 성폭행에 의해 임신까지 당한 산모에게 이를 만회할 보상을 제공할 능력이 현 인류에게 있는지는 알기 힘들며, 현재의 기술수준에서 낙태는 강간에 의한 임신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만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현재 최소수혜자인 산모에게 최대의 보상을 주기 위해서 태아의 생명을 해쳐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산모의 중대한 고통 중 어느쪽이 우선시되어야 하는지는 결정하기 쉽지 않다. 복잡성은 특히 태아의 지위와 처벌윤리의 필요성에 의해 가중된다. 앞서 우리가 태아에게 장애인의 지위를 부여했음을 고려하라. 물론 장애인도 생명권을 비롯한 각종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태아는 실질적으로 완전한 human being이며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은 물론 죽음에 대한 이해도 전무하다. 이러한 조건이 태아의 생명권을 제약하지는 않지만, 산모에게 초래될 심대한 고통과 비교될 경우 제약이 고려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앞 글에서 다룬 처벌윤리는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하고 도덕법칙을 다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범죄 피해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능히 기술적으로 회복가능한 피해(임신)를 회복하는 일을 다른 이유로 제약하는 것은 부당하게 보일 수 있다. 만약 타국의 침략으로 인해 불탄 내 집에 제비가 집을 짓고 산다면, 제비의 생명권을 이유로 나에게 이주를 강제하는 법이 합의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처벌윤리가 생명권을 이유로 회복가능한 중대한 피해를 회복하는 것을 제한한다면, 그러한 윤리는 적절한 처벌윤리로 합의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임시방편

가장 좋은 해결책은 산모가 당한 피해를 만회할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을 단기간에 개발될 지는 요원하며, 우선 우리는 현재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성폭행은 특성상 '영혼 살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삶의 지속과 행복추구에 막대한 지장을 주며, 이러한 외상을 회복하는 일은 오랜 기간과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피해자는 외상으로 고통받는 동안 사회권의 행사가 불가능해지며, 행복추구권과 같은 자유권 항목의 행사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강간에 의한 임신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죽어가는 바이올리니스트와 혈관을 연결했다고 하자. 주디스 톰슨의 바이올리니스트 비유로 잘 알려진 이 이야기에서, 나는 시한부 인생이 된 바이올리니스트를 살리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와 혈관이 연결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기본적인 사회권은 물론이고 이동의 자유같은 자유권 항목도 제한되는데, 기한이 9개월 이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사례가 이 비유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혈관을 끊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윤리규범은 '개인 a의 생명권을 위해 임의의 개인 b의 자유권(또는 평등, 사회, 참정)을 희생해야 한다.'로 일반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규범은 특정한 개인들에 대해서 그들의 일부 권리 항목이 상실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위의 예에서는 자유권이 그러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평등권이나 참정권이 양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생명 유지를 위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매우 많다는 점으로, 가령 2017년 기준 신장이식이 필요한 환자는 한국에서만 약 10만명이다. 여기에 아프리카와 중국의 빈민은 포함하지도 않았으며, 싱어가 말했듯이 우리는 빈국의 빈민들을 위해 우리 사회 예산의 상당부분을 사용해야 할 수 있다. 

 

사실상 위의 규범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전세계인에게 타인을 위해 특정 권리 항목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사회계약에 의해 보장되어야 할 여러 권리들이 생명권을 제외하고 전혀 보장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은 사회계약을 통해 용납되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보다 더 유연하고 우리의 권리를 잘 보장할 규범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경우 위의 규범보다는 좀 더 대안적인 규범, 즉 '개인 a의 생명권을 위해 임의의 개인 b의 자유권(또는 평등, 사회, 참정)을 희생하도록 권장한다.'는 규범을 더 지지할 것이다. 이 규범은 권리를 제한할 것을 요구는 하되 강제하지는 않으며, 권리 항목을 침해당하는 개인에게 그러한 선택을 거부할 권한을 주어 실질적인 권리의 보장을 가능케 한다. 

 

위의 새로운 규범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지만, 여전히 태아의 생명권은 포기하지 않음을 주의하라. 비록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는 주어지지만, 적어도 사회와 국가에서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개인들을 권고하고 설득할 의무가 남아있다. 국가는 개인들이 보다 더 많은 생명을 보호하도록 권장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의무는 덕을 권장할 때처럼 출산을 설득하거나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법과 같이 비강제적인 정책들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의학적/임상심리학적 연구를 지원하여 산모가 경험하는 피해를 만회할 역량을 증진함으로써,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산모의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정책을 시행할 수도 있다.

 

현재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우리는 임시방편적인 해결책만을 제안할 수 있다. 성폭행 피해는 영혼 살인이라 불릴 정도로 삶의 지속과 권리 행사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다른 개인의 생명권을 위해 나의 권리 항목 하나를 실질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한 경우 산모가 낙태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산모의 피해와 함께 태아의 생명권도 고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각종 비강제적 권유와 과학기술 투자를 실시해야 한다.

 

 

이제 다른 주제로

위에서 내린 결론들은 상황에 따라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으며, 필자가 더 많은 사실과 논의를 알게 될 때 변할 수도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부당하지만, 근육미녀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일은 정당할 수 있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의무지만, 난민 사이에 테러리스트가 포함되어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면 국가는 이를 주저할 수 있다. 수정란을 낙태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지만, 모든 수정란이 착상하는게 가능해진 사회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다. 조건과 배경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일은 실천윤리에서 드문 일이 아니며, 그것이 실천윤리의 묘미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윤리이론을 일관되면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동시에 이 글이 목표한 바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논의된 내용은 모두 삼원적 사회계약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삼원적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추론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내용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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