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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인간의 윤리학 - 이론의 확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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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인간의 윤리학 - 이론의 확장

과학주의자 2022. 5. 20. 23:24

인간은 자연을 개척할 의자와 능력이 있는 human doing이다.(하술할 '인간'이나 '사람'은 모두 human doing을 말한다) 이러한 휴먼 두잉은 서로 간의 충돌을 조율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규칙을 제정하며, 이렇게 제정되는 규칙이 최상의 도덕규칙이다. 이러한 도덕규칙은 사회계약으로부터 도출되는데, 인권과 차등원칙, 공리주의가 이 사회계약에서 도출된다. 필자는 앞으로 이 윤리이론을 삼원적 사회계약론이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삼원적 사회계약론의 골자는 거의 완성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점이 남아있다. 이러한 윤리적 기준은 어느 시점에 적용되어야 하는가? 사회계약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규칙이 적용되는가? 계약을 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 장애인과 동물들은 도덕의 대상이 아닌가? 우리의 윤리이론을 다듬기 위해서는 덕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윤리이론은 기본구조는 얼추 갖춰졌으나, 아직 여러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난점들에 대해 다룰 것이다.

 

 

1.처벌 윤리: 도덕위반자에 대한 처벌

저번 글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사회계약에 참여하여 도덕규칙을 제정한다는 점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 제정된 도덕규칙은 계약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였기 때문에, 역시 계약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저번 글에서도 보았듯이 모든 사람이 이 계약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 human doing이기를 거부하고 자연법칙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은 사회계약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특히 전자의 경우 오히려 사회계약을 거부하려고 들 것이다.

 

이들에게 도덕규칙을 적용해야할 합당한 이유는 찾기 어렵다. 이들은 계약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우리의 계약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놔둔다면, 이들의 행동이 우리의 인권이나 약자에 대한 배려, 최대이익을 해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의 도덕을 적용하지는 않되, 이들이 우리의 도덕규칙을 해치지 못하도록 행동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고 저들을 규제할 처벌 규정이 필요하다.

 

처벌 윤리의 기초

처벌 윤리는 일반적인 윤리이론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론에서는 분명히 사회계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명시하고 있고, 이들을 어떻게든 규제해야 실질적인 도덕규칙의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벌 윤리는 사회계약의 번외자들을 처벌하고 규제함으로써 도덕규칙을 실현하고 우리의 권리와 최소한의 보상, 최대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처벌 윤리가 어떠한 형태를 띄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우리의 처벌 윤리는 사회계약에 합의한 우리의 권리, 우리의 인권과 효용을 보호하는 것을 최고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처벌 윤리는 우리가 제정한 도덕규칙이 잘 실현되도록 통제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보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벌 윤리의 목적은 인간 권리의 보장이며, 반대로 처벌받는 번외자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번외자들은 사회계약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처벌 윤리는 우리와 우리의 도덕규칙을 지키기 위해 번외자를 처형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는 몇가지 함의점을 가진다. 먼저 우리의 처벌 윤리에서 응보주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응보주의에 따르면 어떤 범죄에는 그에 맞는 합당한 벌이 있으며, 그러한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어떤 범죄에 얼마만큼의 벌이 적당한지는 판단하기 힘들며, 그것이 정당화되리라는 기대도 하기 힘들다. 반면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처벌은 범죄자를 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를 통해 피해자의 피해를 줄이고 예방하여 사회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을 추구한다. 처벌 윤리도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들의 권리를 수호하고 도덕규칙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하기 때문에, 처벌 윤리는 회복적 정의 관념에 부합한다.

 

또한 우리의 처벌 윤리는, 범죄자의 인권에 지금보다 덜 관심을 기울이라고 촉구한다. 처벌 윤리에서 우리가 범죄를 벌하는 이유는 범죄를 막고 우리의 도덕규칙을 보전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 범죄자의 인권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연쇄살인마들을 프로파일링 연습을 위해 끊임없이 호출하고, 성범죄자에게 화학적/외과적 거세를 가하거나, 심지어 사형을 시킬수도 있다. 범죄자에 대한 존중과 더 나은 대우는, 오로지 그것이 재범률을 떨어트리고 도덕규칙을 온전히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내가 범죄자인 경우: 교화가능한 범죄

위에서 필자는 범죄자에게 거세를 하고, 생물학적/심리학적 실험을 가하며 사형까지 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의할 사항은, 실제 범죄자들은 우리가 가정한 번외자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가 상정한 가상적인 번외자는 스스로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범죄를 택한 반면, 실제 범죄자들은 유전적 특성이나 가정환경, 문화적 배경, 빈곤 등의 환경적 변인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다. 이들의 범죄는 스스로 범죄자이기를 택한 무법자들의 공격이 아니라, 계약에 동의했으나 실수로(혹은 피치 못할 이유로) 나쁜 일을 한 이웃사람의 행동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사법현장에서 범죄자에 대한 무분별한 인권침해는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범죄자들은 기본적으로 주체적인 쓰레기가 아니라, 계약에 참여한 당사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범죄자들 역시 인권이 보호되고, 최소한의 권리와 이익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계약 당사자들에게는 계약을 이행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즉 실제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도덕규칙이 다시 제대로 작동하는데 협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져야 하는 책임이 응보적이지 않음을 주의하라. 이들에게는 도덕규칙을 준수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처벌도 이들이 도덕규칙을 잘 준수하도록 돕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처벌은 피해자의 피해를 보상하고, 벌어진 범죄와 같은 불상사를 예방한다는 목표 하에 실시되어야 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불이익과 제약이 책임이라는 형태로 범죄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도덕규칙이 파괴되었으니, 이들에게는 이를 회복시키고 재파괴를 막도록 희생할 의무가 있다. 결론적으로 회복적 정의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번외: 무정부사회에서의 윤리

우리는 소수의 범죄자를 대하는 상황이 아니라, 다수의 범죄자를 대하는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다. 범죄자로 가득한 사회를 상상해보라. 곳곳에서 파괴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는다. 사회는 이미 무너졌고 무법자들이 날뛰고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에서 도덕규칙을 준수하려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이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은 범죄자라 할 수 있다. 논의를 단순히 하기 위해, 나를 제외한 모두가 범죄자인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무정부 상태는 우리가 앞에서 고려한 상황과 2가지 점에서 다르다. 먼저 이 상황에서도 나는 도덕규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이미 도덕규칙은 어느 사회의 어느 상태에서도 적용하리라고 약속한 헌법이기 때문에, 무정부 상태에서도 도덕규칙은 준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수의 범죄자들을 마주한 무정부 상황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계약에 동의한 사람인지 번외자인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 타인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점 만이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이렇게 유보될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오직 나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나의 인권과 이익을 보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타인의 인권과 이익은 오직 그들이 나처럼 도덕규칙을 준수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에만 고려되어야 하며, 그조차도 그들이 나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처벌을 가해 책임을 지워야 한다. 즉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는 무정부 상황에서 도덕이 유보될 수 있다고 인정하며, 남이 나를 죽이려 드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한편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또는 실수)에 의해 범죄를 저지르는 여러 범죄자들을 보았지만, 사실 많은 범죄자들은 통제할수 없는 자연적인 요소들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다. 특히 사이코패스를 비롯한 일부 정신이상자들은 그들의 질병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다. 이들의 행동은 이들의 책임에 들지 않을 뿐더러, 이들이 사회계약에 참여할 휴먼 두잉인지도 의심스럽다. 만약 오직 human being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도덕에서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

 

 

2.장애인 문제

우리의 윤리이론은 전적으로 우리가 휴먼 두잉이라는 전제 하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휴먼 두잉으로 보이지 않는 많은 존재들이 있다. 장애인들은 신체의 장애로 인해 스스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그나마 이들은 온전한 정신과 의지력, 사회성을 갖췄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존재하나, 정신장애인의 경우 이조차도 볼가능하다. 많은 중증 조현병 환자, 지체장애인, 자폐증 환자,  경계선 지능, 이외에 다른 중증 정신병 환자들은 대개 지능과 사회성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이들은 정상적인 인간으로 기능하기에는 너무 낮은 능력을 갖추어서, 이들이 사회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과연 이들에게도 도덕규칙이 적용되어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이들을 장애인으로 격하하고 인간의 자리에서 내쫓기 전에, 우리가 무지의 베일을 가정했음을 떠올리라. 우리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서 우리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며, 우리가 격하하고 내쫓을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사실 우리가 나이가 들어 조현병이 발병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신능력이 손상된 장애인들은 적지 않은 확률로 바로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실시하는 우리는 저들도 윤리적 고려의 대상에 넣어야 하며, 장애로 태어나거나 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권리와 이익이 여전히 보호되도록 합의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장애인들은 정신능력이 극히 떨어지기 때문에, 어떤 권리는 누리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해야 한다. 가령 이들은 적어도 현재의 기술로는 적극적 자유를 누릴 능력이 제한되기 때문에, 교육의 권리와 같은 일부 사회권은 일반인만큼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교육을 통한 능력의 보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는 일은 적극적 자유를 증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참정권도 행사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인권과 최소한의 이익은 장애인들도 똑같이 누려야 하나, 이처럼 어떤 권리는 제한되어야 하며 그 제한은 각 장애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본능에 의해 추동되는 이들의 어떠한 행동은, 그 행동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역시 제한될 수 있다. 우리는 장애인을 보호하자고 했지 이들을 위해 도덕규칙을 유보하자고는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소 장애인들을 통제하더라도 도덕규칙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이때 장애인들의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본능(자연법칙)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주체적인 인간 행동이 아니라 자연적 현상으로 취급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가령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각은 대개 그들의 본능이 발현된 결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분야에서 그렇게 하듯이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동 통제를 위한 많은 시도들을 허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호르몬 요법이나 혐오치료, 종신형을 통한 평생에 걸친 이동의 자유 박탈도 포함되는데, 이러한 처치들은 연쇄살인마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으면서 도덕규칙을 보호하기 때문에 삼원적 사회계약론에 부합한다.

 

동물권

같은 논의가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결국 원자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와 같은 다른 동물로 태어났을(그렇게 결합되었을) 확률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동물이 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며, 우리가 동물로 태어난 경우에도 여전히 권리와 이익이 보호될 수 있도록 도덕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장애인의 권리를 일부 제한했듯이, 동물의 권리도 일부(혹은 더) 제한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정의한 자유권은 동물이 누릴 수 없으며, 적극적 자유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회에 참여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참정권도 제한된다. 그리고 인간과 달리 많은 동물들은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하거나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모르며, 이들이 서로 공존하며 사는 이유는 자연의 법칙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 특히 우리가 처한 현실 상황에서, 동물들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동물의 관리에 대한 많은 부분을 자연에 일임하고 우리는 제한적으로만 개입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한편 어떤 동물들은 죽음의 개념을 모른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동물이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며(대다수는 '이해'라는 개념도 없다), 생명의 보전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시하는 동물들도 다수 존재한다. 또한 인간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동물들은 본능의 압력으로 인해 실질적인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에 따르는 기회비용도 인간보다 적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의 생명권은 인간의 생명권보다 중요성이 덜할 수 있으며,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면 동물의 생명권을 희생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은 인간의 육식을 옹호하는 논증이 될 수 있다. 비슷하게 행복을 누릴 권리와 같은 다른 권리들도, 동물들이 가진 낮은 비용과 인식체계의 차이로 미루어 보아 인간의 권리가 더 우선할 수 있다.

 

 

3.덕윤리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 덕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사회의 도덕규칙은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차등원칙과 공리주의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 또한 처벌도 이러이러해야 하고, 장애인이나 동물에 대해서는 저래저래해야 한다. 이러한 사항들이 모두 의무이기 때문에 삼원적 사회계약론은 기존의 윤리이론들(특히 사회계약론들)에 다 가깝고, 덕이 부재한다는 덕윤리학의 비판 대상이 된다.

 

삼원적 사회계약론은 각자 개인들에게 차등원칙과 공리주의에 따라 행동하라고 권유할 수 있다. 이는 개인 자유의 영역이라 의무적이지는 않은 권유 사항이기 때문에, 덕윤리에서 말하는 덕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필자는 이외에 삼원적 사회계약론에서 장려되는 덕목이 또 있는지 알아보고, 또한 어떤 사회의 덕이 삼원적 사회계약론 하에서 어떻게 취급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지성, 사회성, 의지력

사회계약을 통한 도덕규칙의 도출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뛰어난 지성과 협업,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을 통한 노력을 통해 기적을 창조한다. 아직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남아있지만, 이 중 많은 것들은 향후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제어가능한 일이 될 예정이며,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자유 총량도 증가하고, 보다 큰 자유권을 추구하는 인간은 이를 응당히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더 넓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도덕규칙을 준수하고 자유를 확대하는데 필요한 덕목들을 장려하저ㅏ는 데에 큰 이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성과 사회성, 의지력을 통해 우리는 휴먼 두잉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에, 이 3가지는 보다 넓은 자유 총량을 위해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3가지 추상적인 덕목은 현실적으로 볼때 지성과 이타성, 자기통제력으로 표현될 수 있다.

 

지성은 추론과 지식, 창의성, 메타인지 등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고안하는 능력이다. 이는 심리학에서의 지능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개방성, 그리고 구체적인 지식들을 모두 포함한다.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킨 과학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지성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에 지성은 그 어떤 다른 덕목보다 장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기관은 적극적 자유의 목록에 교육을 추가하고, 사람들의 연구활동이나 지능/창의성 개발을 지원할 수 있다. 

 

이타성은 서로를 신뢰하고 협조하고자 하는 성격으로, 기존의 이타성과 사회적 신뢰를 모두 포함한다. 사람들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공감하고 협동할 수 있으며, 이기적인 본성 하에 이뤄지는 경제적 협동도 높은 사회적 신뢰 하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이타성은 사람들이 타인을 고려하게 만들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차등원칙이나 공리주의 원칙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여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도록 국가기관은 인성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이타성을 증진하고, 각종 법적 장치들을 통해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신뢰가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자기통제력은 자신의 (주로 본능적인)충동을 제한하고, 스스로 목표한 것을 장기적인 노력을 통해 이뤄내는 능력이다. 인간은 그 어떤 동물들보다 높은 자기통제력을 통해 자신을 인내하고 단련하면서 큰 성과를 일궈낼 수 있다. 또한 타인과 협동하거나 자신의 앎을 늘리는 일도 부단한 자기통제와 자기통제력이 필요하며, 자기통제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뿐만 아니라 도덕을 실현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이를 증진하기 위해 국가는 심리학적 기법을 교육에 적용해 국민들의 자기통제력을 증진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이 국민들의 자기통제력을 증진하는 데 능하다.

 

충효의 정당화

우리가 지금까지 무지의 베일을 가정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규칙을 제정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의 능력과 가치관을 모른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도덕규칙의 적용범위를 특정 사회나 국가로 좁히면 무지의 베일 가정은 일부 수정되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보편적인 도덕규칙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도덕규칙을 제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합리성과 자유추구 이외에 효도나 가족우선과 같이 대부분의 한국인이 옳다고 여기는 덕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우리가 가상적인 한국인 사회의 도덕규칙을 제정한다고 하자. 이때 행위자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능력과 지위를 가질지 알지 못하며, 자신의 가치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이런 가정 하에서 도덕규칙이 제정된다면 그 형태는 우리가 앞서 다룬 도덕규칙과 상당히 흡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규칙이 추가될 것이다. 이번 계약의 경우 한국인인 계약 당사자들은 모두 효도를 해야한다는 점에 만장일치로 동의했기 때문에, 효도도 자유나 평등과 마찬가지로 주요한 도덕원리로서 책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즉 만약 어떤 사회에서 구성원 전체가 동의하는 어떤 덕목이 있을 경우, 그 덕목은 해당 사회에서 자유나 평등에 준하는 지위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출한 인권과 차등원칙도 만장일치를 거쳐 도출되었고, 이들 덕목도 역시 만장일치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사회나 국가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해당 사회의 특정 덕목도 기초적인 인권 못지않은 중요한 도덕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효도는 인권 못지않게 지켜져야 하고, 스파르타에서 전사의 자질은 덕목을 넘어 의무가 되어야 한다.

 

다만 우리의 가정과 달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덕목을 공유하지는 않음을 주의하라. 사실 한국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효도라는 개념을 싫어하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효도를 국가의 책임을 경감해주는 핑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이든 그 사회의 덕목을 거부하는 사람이 1명 이상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고, 그러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추방하는 일은 우리의 보편적인 헌법에 기초한 생명권과 자유권, 평등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사회의 덕목은 덕목으로서의 지위만 가져야 하며, 보편적인 사회계약에 기초한 인권과 차등원칙, 공리주의 원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내규칙의 경우

특정 사회의 덕목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개인을 추방하는 일은 허용되어선 안된다. 추방이 해당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물론, 생명권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방이 그러한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가령 어느 완전경쟁시장에서 한 회사가 사내규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한다면, 해고가 직원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을 끼치는가?

 

우리가 위 단락에서 말한 사회는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 중국 사회, 제주도 사회 등 지리적이고 규모가 큰 사회이다. 반면 현실에는 규모가 작고 유동적인 사회나 집단도 다수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기업들은 물론이고, 작은 단위의 지역사회와 공기업, 클럽, 동호회, 학교 등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 공동체는 영향력이 약하고 거대한 어느 사회의 부분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중대한 생명의 위협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 공동체가 진입과 퇴출이 매우 용이하다면 추방이 가져오는 부작용도 매우 작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공동체의 덕목이 공동체의 목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면, 이러한 추방은 공동체 내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 및 이익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추방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고 진입과 퇴출이 용이한 충분히 작은 공동체의 경우, 특정 덕목을 강제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회사가 생산성없는 직원을 해고하거나, 당규를 위반한 당원을 출당시키거나, 꼴사납게 구는 놈을 빼고 우리끼리 만나는 것은 도덕규칙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적은 비용을 들여 얼마든지 공동체에서 나갈 수 있고, 어떠한 경우 공동체의 이러한 특성이 전체 사회에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은 공동체의 덕목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이는 도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작은 공동체에서 덕목을 제정하고 회원들에게 요구하는 일 자체는 도덕적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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