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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가 비난의 대상인가

과학주의자 2022. 6. 29. 15:21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타쿠 문화의 저변은 매우 확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타쿠에 대한 혐오감과 멸시도 증대하고 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비만이거나 사회부적응자로 묘사하는 표현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를 떠나(대다수는 과학적 증명을 거치지 않았다) 인터넷 전반에서 오타쿠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나 비하, 혐오가 나타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떤 만화는 오타쿠를 부족한 자, 수정되어야 하는 인간상으로 지정한 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인간상으로 변모시키면서 이를 '나아졌다'고 표현한다.

 

대표적인 오타쿠에 대한 혐오표현의 사례. 오타쿠뿐만 아니라 비만, 안경 착용자, 다한증에 대한 멸시 표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이 그렇듯이 오타쿠가 왜 부정적인 집단이고, 멸시받아야 하며, 비정상적인 집단인지에 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부분 인터넷에서의 논의는 기형적인 행동이나 부적합한 언사를 보이는 소수 오타쿠의 사례를 근거로 들어 오타쿠에 대한 혐오를 고취하지만, 그러한 사례를 보며 비정상적이라고 깔깔대는 사람들 대다수도 오타쿠라는 점은 매우 특이한 사실이다. 즉 많은 오타쿠들은 혐오를 고취시키는 이상한 언사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다. 또한 그런 사례들은 진위가 검증되었는지는 불분명할 뿐더러, 이것이 대다수 오타쿠의 특성을 대표한다는 증거또한 없다. 오히려 혐오표현에 대한 오타쿠들의 반응을 보면 오히려 오타쿠 집단이 누구보다도 그러한 행동을 자제한다는 추론이 설득력있다.

 

설령 오타쿠들이 정상인이 보기에 부적합한 언행을 보이더라도 그것이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대우를 뒷받침하기는 힘들다. 인류 역사는 소위 정상인의 시각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미약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지속적으로 증명한다. 서로 모르는 타인 여럿이 한 방에 뒤엉켜 자는 중세 유럽의 숙박문화는 우리의 멸시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동시에 많은 여성이 노출도가 높은(중세의 기준에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현대의 의상문화는 중세 유럽인들의 멸시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중 어느 문화가 보다 좋은지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는 형성된지 80년도 채 안된 현대의 기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윤리학적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즉 모든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여기에는 의상의 자유도 포함된다는 논증을 통해서만 우리의 문화가 멸시받을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타쿠 문화에 대한 평가 역시 윤리학적 기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윤리학적 기준에서 오타쿠 문화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윤리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오타쿠

현대과학과 자본주의의 성공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 현대윤리학도 근대문명의 탁월한 산물의 하나이다. 그동안 지역적 범위 내에 갇혀있던 각 지역의 윤리학은 근대문명이 시작되면서 지역과 시간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기존의 도덕이 관습, 종교, 어떤 경우에는 유행에 기반하는 반면 윤리학이 도출한 결론은 엄밀한 논증에 기반한다. 가령 과거 일신교 사회에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이유는 '만민이 신 앞에 평등하다'라는 교리때문이지만, 윤리학에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이유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 윤리적 기준을 정립할때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해야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기준이 성립가능하기 때문이다.(소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강요하는 기준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소수의 반발에 부딫힌다) 비록 인권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논증이나 윤리의 본질처럼 윤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부분이 아직도 엄밀히 검증되지 못했지만 윤리학은 지금도 사회적으로 논란인 문제에 대해 명쾌한 결론과 정밀한 도구를 제공한다. 특히 공리주의, 칸트주의, 윤리적 이기주의는 많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최근에 출현한 덕윤리학은 기존의 윤리학이 포함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도덕적 해결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윤리학적 기준으로 오타쿠 문화를 분석하기 전에, 우리는 오타쿠 문화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오타쿠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이뤄졌지만 많은 정의는 너무 이상적이거나 특정 분야에서만 통용되도록 의미가 한정되어 있다. 아마 모든 의미를 포함하는 오타쿠의 정의는 대학원생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 보인다. 이런 상황은 심리학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심리학자들은 그럴때 학계에서 의미소통은 되고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만큼만의 의미만을 담도록 대상을 정의한다. 심리학은 지금까지 수없이 성공을 거뒀기에 필자도 심리학자의 방법론을 따르는게 합당해 보인다. 즉 오타쿠 문화를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낮은 사회성, 취미(주로 서브컬쳐)에 대한 몰두,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로 정의하는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물론 대다수의 오타쿠는 이 기준에서 많이 멀겠지만, 특정 개념을 이론적으로 논의할때 이러한 이념형(ideal type)을 사용하는 방법은 매우 유용하다. 막스 베버의 이론이나 공공선택론도 현실과 꽤 동떨어진 이념형을 취했지만 상당히 유용한 결과를 산출했다. 동시에 이 이념형은 오타쿠가 사용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러 사이트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위의 3가지 기준으로 오타쿠 문화를 정의하는 일은 향후 논의에 매우 유용해 보인다.

 

윤리학적 기준으로 볼때 알수 있는 사실은 오타쿠 문화뿐만 아니라 특정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당위를 명쾌하게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타인에 대한 이타적 태도를 강제하지 않으면 모든 주장과 태도를 허용한다. 칸트주의는 엄밀한 논증을 통해서만 특정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칸트가 남긴 저작중에 오타쿠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도록 주장하는 저작은 없다.(사실 오타쿠 문화의 특성은 상당부분 칸트의 특성이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침해하는 문화를 비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오타쿠 문화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피해를 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후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본사회에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오타쿠들이 창출한 아니메 시장은 오타쿠 본인은 물론 수많은 서브컬쳐 기업과 근로자, 투자한 금융사, 주주의 행복을 증진한다. 또한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서브컬쳐는 인간의 예술적 표현의 지평을 넓히며, 2015년 말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된 애니마믹 비엔날레 전시전은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예술적 표현의 저변 확대는 예술계의 발전은 물론이고, 밀이 제안한 고급쾌락을 충족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비록 몇몇 오타쿠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수 있지만, 그러한 불쾌감이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한 오타쿠의 행복 감소보다 크다고 보긴 힘들다. 결론적으로 오타쿠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며, 공리주의를 따른다면 오히려 도덕적으로 옳다고 평가해야 한다.

 

이 사람은 사회성도 그닥이고, 작은 키에 못생겼으며, 거의 자기 연구에만 광적으로 몰두했다. 그러나 많은 윤리학자는 칸트를 사회부적응자로 묘사하기보다는 철학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거인으로 바라본다.

최근 덕윤리학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덕윤리학을 분석의 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오타쿠를 까내릴때 쓰이는 표현(저속하다, 극혐이다 등)은 기존의 의무론적 윤리학보다는 덕윤리학에 더 가까우며, 가치의 옳고그름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가리는 덕윤리학은 오타쿠 문화를 평가할때도 잘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덕윤리학은 분석의 틀로 쓰이기에 그 자신이 잘 정립되지 못했다. 비록 세계 각지에서 덕을 발견하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는 대개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효의 덕윤리학적 정당성을 연구하지만 아직 인류보편적으로 납득할 만한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우정과 애국심, 가족애는 좋은 미덕으로 합의된 몇 안되는 사례지만 이것이 오타쿠 문화와 충돌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정은 단순한 관계의 양보다는 관계의 질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현대의 피상적인 인간관계(이러한 문제제기는 보통 덕윤리학자가 한다)가 오타쿠의 작은 사회관계보다 나은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한국 오타쿠들은 특유의 사회적,역사적 구조로 인해 일반인보다 더 극단적인 애국심을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엇보다 덕윤리학 자체가 정당성 있는 학문인지에는 이견이 있으며, 많은 윤리학자들은 덕윤리학이 기존 윤리학의 보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한다. 결국 덕윤리학의 관점에서 오타쿠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덕윤리학 자체가 알맞은 분석틀이 될 수 있는지도 불명확하다.

 

역사적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멸시와 모욕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현대윤리학자들은 여성, 빈자, 부자, 동성애자를 차별해야 할 윤리학적 근거는 전무하다는데 동의한다. 오히려 이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도가 비윤리적이라는 점이 지난 300년간 증명되어왔다. 세계 각지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도덕률을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차별없이 기본적인 인권을 누려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 조항을 오타쿠에게만 예외적용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결론하여 윤리학적으로 오타쿠 문화를 비도덕적이거나 나쁜 것으로 평가할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오타쿠가 필요하다

위에서 검토하지 않은 윤리학적 입장이 하나 있다. 실용주의는 윤리학 내부에서의 입김은 약하지만 어느 윤리학적 입장보다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19세기 말 퍼스가 실용주의를 창안한 이후 실용주의는 미국의 정신이 되었고 곧 세계의 정신이 되었다. 많은 기업가, 정치인, 관료들은 윤리적 정당성보다는 그것이 가져오는 실질적 이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미보다 빵이 중요하다면, 윤리적 정당성과 상관없이 오타쿠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안여돼 짤이나 올리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가지 점에서 필자는 그 반대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오타쿠를 까내리는 사람들이 본인을 정상인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본인을 기업가나 경제 관료로 지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이 오타쿠 문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잘 안보이는 이유중 하나인지 모른다. 2015년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1조 8000억엔에 육박한다. 이는 2018년 한국GDP의 절반에 약간 못미치는 수치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업계의 대부라 할 만한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시가총액은 2020년 2월 28일 기준 한화 1900억에 달하고 반다이 남코 홀딩스는 1조 2000억원에 달하는데, 이는 현재 방산업체 매출 1위를 차지하는 록히드마틴의 시가총액(한화 1097억원)을 능가한다.

 

개별 제품에서 봐도 2014년 개봉한 도라에몽 극장판은 세계적으로 200억엔의 수익을 올렸으며, 2015년 출시된 게임 페이트 그랜드 오더는 30억 달러 상당의 매출액을 달성하였는데 이는 2019년 한국 기업의 전기자동차 수출액 총액보다 크다. 일본뿐만 아니라 역시 오타쿠 문화의 하나로 보여지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을 살펴보면, 2001년 개봉한 영화 스타트렉:더 비기닝은 3억 7000만 달러의 매출을 벌어들였으며 스타워즈 시리즈의 브랜드 가치는 총 7000억 달러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 액수들은 기업가들이 오타쿠 시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오타쿠의 수요에서 출발한 산업은 많은 경제적 이득을 달성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정보 컨텐츠의 개발과 유통이 경제의 핵심이 될 정보사회에서 이들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여러 출처에 따르면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을 통해 많은 오타쿠들에게 탈덕을 권유했다고 한다. 아마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투자자들은 거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타쿠 문화에서 발생한 시장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많은 오타쿠들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한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진다. 많은 미국인들이 스타트렉 덕후나 스타워즈 덕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유명한 스타트렉 덕후인 스티븐 호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에서 오타쿠는 자주 얼굴을 드러냈다. 소닉을 좋아했던 발생학자 로버트 리들은 아체 형성에 중요한 단백질을 발견하고 이를 소닉 헤지호그라 명명했다. 비슷하게 어릴때 스타트렉을 보고 자라났던 물리학자들은 NASA에서 알큐비에레 드라이브를 고안했으며, 전세계의 많은 공학 연구자들은 스타트렉을 보고 자라나 그 꿈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한다. 사실 오타쿠를 정의할때 흔히 거론되는 '취미에 몰두하는 경향'은 연구자에게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한 강연에서 과학자에게 열망이 필요하다고 했고, 실제로도 자신의 연구 주제에 몰입한 과학자들은 더 나은 혁신을 거둔다. 한번 몰입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도 몰입을 경험하기 쉽다는 점을 고려할때, 자신의 취미에 자주 몰입해본 오타쿠는 과학연구에 더 쉽게 몰입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문명의 존망이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는 과학기술자에 달렸다고 말했는데, 우리의 미래를 짊어진 역군들 중에는 몇몇이 싫어하는 오타쿠들도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결언

인류 역사에서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에 대한 방어는 매우 덜 빈번하게 일어났다. 과거에는 그러한 혐오가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제재로 나타났지만, 타인지향형 사회가 형성되고 현대사회가 긍정적 자기착취를 주된 방법으로 삼게 되면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제재는 유화적이고 성장을 도모(정확히는 지배구조로의 편입을 도모)하는 권유와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식은 바뀌었지만 그 혐오에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한 듯 보인다. 여성,동성애,무신론에 대한 차별도 그랬지만, 오타쿠에 대한 혐오도 정당성을 찾기 힘들었다. 논의를 통해 우리는 오타쿠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할 윤리적 정당성이 전무함을 발견했고, 오타쿠에게서 얻을 2가지 미덕을 발견했다.

 

슬픈 사실은 이 글이 필자가 기대한 만큼의 숙고를 거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글에서의 논의는 현실을 너무 단순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령 지브리 애니메이션도 서브컬쳐의 산물이지만 일반에 받아들여지는 양상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같은 오타쿠라도 분야에 따라 행동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소위 '갓겜충'과 일반 게임유저가 같다고 보기는 힘들며, 만화 <니세코이>에서는 좋아하는 히로인에서 문화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논자들이 이 글을 평가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 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이 오타쿠 담론과, 오타쿠에 대한 인식개선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기여하게 된다면 필자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거의 대다수의 혐오는 정당한 근거를 찾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오타쿠 혐오를 예외로 취급할 합당한 이유는 찾기 힘들어 보인다. 윤리학은 오타쿠가 나쁘다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으며, 대신 필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오타쿠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의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합리성에 기초해야 하며,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관행은 멈춰져야 한다. 나는 그간의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온 이성의 칼날이 오타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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