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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영웅신화의 이해 본문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고래의 혈거인들은 전설로 내려오는 자기 부족의 전사에 대한 얘기를 들어왔고, 현대인들은 영화 속의 슈퍼히어로를 보고 열광하며 사회에서도 영웅을 만들어낸다. 현대 영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신화학과 문학에서 행해지는데, 신화학은 영웅 신화를 탐구하는 한편 문학은 주로 현대 매체에서 영웅을 다루는 방식과 그 정치적 함의를 탐구한다. 전자는 사회과학에 가까운 반면, 후자는 보다 인문학적 색채가 강하다.
1.개요
신화학에서 영웅(hero, heroine)은 뛰어난 능력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는 존재로, 많은 학자들이 영웅을 다양하게 정의한다. 영웅을 뜻하는 한자어 英雄은 꽃부리 영 자에 수컷 웅 자가 결합한 단어인데, 英은 천 명 중 우수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雄은 우두머리란 뜻도 있기 때문에 英雄은 직역하면 '많은 사람들 중에 출중한 우두머리'를 말한다. 반면 영웅을 뜻하는 영어 hero는 그리스어 헤로스(ἥρως)에서 왔는데, 헤로스는 '보호하다/봉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웅은 보통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또한 영웅은 자기극복의 귀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제약하는 어떤 제약들을 이겨내는데 능하다. 여기에 헤로스의 원 뜻이 지적하듯이, 영웅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이를 위해 상황적 제약과 맞서 싸워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영웅은 자기희생, 자기극복, 지혜, 용기, 불굴의 의지, 성장, 완성, 조화 등의 덕목과 결부되어 있으며, 집단의 이상과 규범을 실현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숭배 대상이 된다.
영웅의 일생
영웅담에서 묘사되는 영웅은 공통적으로 8가지 단계를 거쳐 태어나고 죽는다. 이 8단계는 동시에 영웅들이 가지는 주요 특성들이기도 하다.
- 고귀한 혈통: 영웅은 보통 고귀한 혈통의 자손이다. 많은 영웅은 반신인데, 특히 많은 경우 아버지가 신이다.
- 신이한 탄생: 영웅은 비정상적이고, 대개 신비한 형태로 태어난다. 설화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나와서 태어나자마자 두 다리로 섰다. 헤라클레스와 아서왕은 신적 존재가 어떤 여자의 남편으로 위장하여 동침하면서 탄생했는데, 두 설화의 유사성은 헤라클레스 신화가 아서왕 설화에 영향을 준 결과로 보인다.
- 유아기적 시련: 태어난 영웅은 운명의 힘(신탁)에 의해 우선 본래의 부모에게 버려지고,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 키워준다. 아서왕은 태어난 후 아버지 우서 펜드래건에 의해 버려지고 멀린과 엑터의 손에서 자랐다. 이때 멀린이나 엑터에서 보이듯이 새로운 후견인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에 영웅은 2명의 아버지를 갖는다고도 말한다.
- 죽음의 극복: 앞서 말했듯이 버려진 아기 영웅은 신의 가호로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생존한다.
- 성장을 위한 과업과 시련: 영웅은 자라나면서 끊임없이 역경이 닥치고 이를 해결한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12가지 과업을 완수해야 했다.
- 회귀: 역경을 해결한 영웅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 전리품은 엘릭서(elixir)라고 하는데, 역경을 이겨냈음을 증거하거나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 비범한 죽음: 영웅은 비극적인 요소로 인해 사망한다. 헤라클레스는 아내의 의심으로 인해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 스스로 불타 죽는다. 표면적으로 영웅의 죽음은 그 자신이 가진 폭력성이나 성격적 결함이 원인이나, 근본적으로는 운명의 힘이며 직접적인 다른 신의 개입으로 죽기도 한다.
- 사후 숭배: 비극적으로 죽은 영웅은 이후에 신적 존재가 되거나 그렇게 추앙받는다. 자살한 헤라클레스는 이후 반신이 되어 올림포스로 올려졌고, 그리스 영웅의 표본이 되었다. 이처럼 비범한 죽음을 당한 영웅은 대개 숭배의 대상이 되며,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탄생한다고 여겨진다. 국가 시조 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
8단계의 경우 정신분석학에서는 개성화의 과정이라고 본다.
원질신화 이론
원질신화 이론은 신화학자 조지프 켐벨이 제안한 이론으로, 영웅담이 3개의 막과 1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형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이 원형이 원질신화라고 불리며, 원질신화는 분리와 하강/입문, 회귀라는 3가지 주제 하에 17단계로 이뤄진다. 대부분의 영웅담에서는 17단계가 모두 나타나지는 않고 일부만 나타나지만, 영웅이 일상세계를 떠나서(분리) 모진 시련을 이겨낸 후 영웅으로 거듭나고(하강 및 입문), 전리품을 가지고 일상으로 복귀하는(회귀)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상승과 하강, 재상승의 구도는 최근의 실증적 연구에서도 주요 이야기 패턴으로 관찰되었으며, 이러한 구도와 비슷한 이야기는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로 여겨졌다. 1
분리(separation, 출발)는 영웅이 모험을 시작하는 단계로, 4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모험에의 소명에서 영웅은 일상에서의 변화를 감지하고 위기를 경험한다. 몬스터가 나타나서 공주를 납치한다는 이야기의 초반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영웅은 처음에는 모험을 거부하는데, 소명의 거부는 영웅이 어머니와의 관계 보전이나 망설임, 두려움 등으로 인해 영웅으로서의 모험을 거부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곧 영웅은 초자연적인 조력 단계에서 초자연적 존재의 경고나 예언, 물적 지원에 힘입어 영웅으로서의 모험에 나서게 되고, 첫 관문의 통과 단계에서 일상세계와 모험의 세계를 나누는 관문을 통과한다. 거대한 바위 사이를 벗어난 아르고 호 원정대의 에피소드가 바로 이 단계에 해당한다.
하강 및 입문(initiation, 입문)은 영웅이 시련을 거치고 승리하는 8단계를 말한다. 고래의 배는 모험의 세계에 진입한 영웅이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인데, 이 단계에서 영웅은 시련을 겪고 상징적으로 죽음을 경험했다가 다시 부활한다. 요나스는 고래의 배 속에 갇혔다가 빠져나오면서 선지자로 거듭났으며, 이것이 이 단계를 고래의 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시련의 길은 영웅이 갖가지 시련을 겪고 이겨내는 단계고, 도중에 영웅은 여신과의 만남 단계에서 강력한 여신과 만나게 된다. 이 여신은 영웅에게 사랑을 베푸는 동시에 영웅을 유혹하는데, 유혹 단계에서 여신이나 요정, 공주의 형태를 한 이 여신은 영웅을 유혹하여 방황하게 하거나 모험을 멈추게 만든다. 오디세우스를 붙잡아 7년동안 머물게 한 칼립소가 대표적인 유혹자로, 남성중심적인 문화로 인해 대부분의 유혹자는 여성이다.
유혹을 이겨낸 영웅은 아버지와의 화해 단계에서 아버지를 넘어선다. 영웅담에서 아버지는 영웅을 영웅의 길로 이끈 근본 원리이자 세상의 질서인데, 이 아버지를 꺾거나 넘어서면서 영웅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신격화) 이렇게 신적 존재가 된 영웅은 엘릭서를 손에 넣어 모험의 목적을 달성하고(궁극의 은혜, 홍익), 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자신에 도취하거나 너무 지치는 경우 일상세계로의 귀환을 거부하게 된다. 이 단계를 귀환의 거부라고 하는데, 무추쿤다와 크리슈나의 설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회귀(return, 귀환)에서 영웅은 엘릭서를 들고 일상세계로 돌아온다. 모험의 세계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영웅은 불가사의한 탈출을 감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영웅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이를 외부로부터의 구조라 부른다. 이렇게 외부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영웅은 모험의 세계를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 단계를 귀환 관문의 통과라고 하며 오르페우스의 저승 탈출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성경과 같은 종교적 서사나 비슷한 바리데기 설화에서는 벗어난 주인공이 삶의 죽음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을 얻는데, 이를 두 세계의 스승 단계라 하며 지옥에 내려갔다가 부활한 예수 에피소드가 여기에 속한다. 종교적인 서사든 아니든 돌아온 영웅은 엘릭서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영원성을 획득하여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삶의 자유)
영웅의 여정 12단계 이론(the hero's journey)
영웅의 여정 12단계 이론은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동료와 함께 만든 영웅담 이론으로, 켐벨의 원질신화 이론에서 현대서사에 잘 나타나지 않는 5개 단계를 제거하고 체계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도 원질신화 이론과 동일하게 3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다만 단계가 17단계에서 12단계로 줄어들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으며 1-5단계가 분리이고 6-9단계가 하강 및 입문, 10-11단계가 귀환이다.
분리 단계에서 영웅은 먼저 일상세계(ordinary world)에서 시작한다. 영웅은 평범한 세계에 머물러 있으며, 그러나 신이한 출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페르세우스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어머니 다나에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고, 아서왕도 멀린과 엑터와 함께 자라났다. 그러나 이 일상세계는 모험에의 소명(call to adventure)으로 끝나게 되는데, 영웅은 모험을 하여 영웅이 되라는 요구를 받는다.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몸이 아프게 되자 약을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으로 가야했고, 헤라클레스도 12가지 시련을 부여받았다. 이때 영웅은 소명의 거부(refusal of the call)를 일으켜 자신의 소명을 거부하려고 하는데, 실제 신화에서는 소명의 거부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모험을 시작한 영웅은 정신적 스승과의 만남(meeting with the mentor)을 통해 힘을 받게 되는데, 스승은 영감은 물론 모험에 필요한 물적 장비도 제공해준다. 페르세우스는 모험을 시작할때 아테나에게 거울방패를 받았고, 영화 쿵푸팬더에서도 주인공 포는 우그웨이의 발탁으로 제이드 궁전에 입성하게 된다. 이렇게 스승의 도움을 받은 영웅은 관문 통과(crossing the threshold)를 거쳐 첫번째 시련을 해결하면서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하강 및 입문 단계에서 영웅은 다양한 시련을 거치고 여러 적과 협력자를 만나게 된다. 이를 시험, 협력자, 적(tests, allies and enemies) 단계라 하는데, 이때 적은 단순한 장애물이나 지형지물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영웅담은 절정에 다다르고, 영웅은 최고의 시련에 직면하는 심연에의 접근(approach to the immost cave)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영웅은 거대한 시련(ordeal)을 겪으나, 마침내 시련을 이겨내고 엘릭서를 보상(reward)으로 획득하게 된다.
귀환 단계에서 영웅은 귀로(road back)에 오르면서 원래의 일상세계로 돌아간다. 이때 페르세우스 신화에서는 특이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안드로메다를 구하는데, 이때 얻은 안드로메다는 제 2의 보상 역할을 한다. 또한 신화학에서 괴물은 보통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괴물을 무찌르는 것은 일종의 부활로 여겨질 수 있다. 부활(resurrection)은 귀로 다음에 오는 단계로, 영웅이 죽음에서 부활하거나 상징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바리데기는 단순히 삼도천을 건너는 것으로 부활을 대신하는데, 강은 대체로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나누기 때문에 이것도 부활의 일종이다. 이렇게 돌아온 영웅은 묘약/영약/선약과의 귀환(return with the elixir)을 통해 세상에 복귀하여 신격화되며, 다만 그리스 비극에서는 엘릭서를 가져온 영웅이 비극적으로 파멸하고 신격화되는 과정도 포함된다.
한편 신화학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은 영웅신화의 해석에도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신화를 전체 인류가 꾸는 일종의 집단적 꿈이라고 여기고, 영웅 신화는 자아의 발달이 상징적으로 투영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미 제임스 프레이저부터 유사 법칙과 인접 법칙이 인간심리에 기반한다고 주장하여 심리학적 설명의 포문을 열었으며, 윌리엄 제임스도 신화학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표출한 적이 있다.
신화에 정신분석학을 적용하고자 한 시도의 선구자 중 하나는 베텔하임이다. 베텔하임은 민담과 동화 중 오랜 기간 내려오면서 아이들에게 구전되는 이야기를 '옛이야기'로 명명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아이들의 발달에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그러한 민담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동을 이야기에 빗대어 해석하고 해결하도록 돕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재 가장 영향력있는 접근은 융의 분석심리학으로, 융의 분석심리학은 신화학의 주요 패러다임중 하나로 남아있다. 2
융은 신화가 고대 인류의 무의식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조현병 환자들이 보고하는 환상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조현병 환자들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신화도 인간의 무의식적 역동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영웅담은 자아발달의 과정이었는데, 융은 영웅 신화가 위험한 환경에 처한 인류가 정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살해에 대해서도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대비되는 설명을 제안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화에서 어머니는 창조와 파괴의 힘을 가진 자연을 상징하는 반면 아버지는 문화의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영웅은 새로운 가치관을 대변하는데, 이러한 영웅이 아버지를 쓰러트리는 것은 낡은 체제를 교체하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면서 인간세상에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활동의 일환이라고 융은 주장했다.
그는 영웅담을 자신의 개성화 이론에 빗대서 설명했는데, 그는 신화 속에서 괴물과의 대면이 무의식을 마주하는 자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또한 모험 중에 영웅이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는 것은 자아가 아니마를 대면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했고, 아니마를 자아에 통합하는게 중요하듯이 매력적인 이성과의 결합이 영웅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고 영웅을 변화시킨다고 해석했다. 그에게 비범한 조력자는 자기를 의미하며, 영웅의 과업은 무의식의 에너지를 통합하는데 성공한 영웅이 그 에너지를 삶을 영유하는데 사용하는 것의 은유라고 해석했다. 한편 근친상간에 대한 그의 해석도 독특해서, 그는 근친상간이 다양한 자아의 통합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이창재는 분석심리학에 기반해 다른 정신분석학 이론들을 기반으로 신화를 해석하였다. 그는 메두사가 부정적인 모성성을 상징하고 메두사의 머리는 거세공포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관점 하에서 이창재는 페르세우스의 모험이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히드라가 강한 본능적 충동인 동시에 사회제도의 괴력을 표현한다고 주장하고, 히드라의 제거는 성공적인 본능 억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두사가 원래 다른 지역의 신이었다는 점, 그리고 거세공포가 심리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창재의 분석은 신빙성을 가지기 힘들다. 3
한편 오토 랑크는 융과는 별개로 독창적인 신화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영웅신화가 자기 마음속에서 부모를 지우려는 무의식적 노력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에 따르면 아동기에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는 아동의 소망이 후에 신화로 발현된 것이 영웅 신화이다. 대표적으로 신화에서 나타나는 고귀한 부모(친부모)와 비천한 부모(키워준 부모)의 존재를 현실에 대한 불만족으로 해석했는데, 그에 따르면 자신의 부모가 마음에 안드는 아이들이 좀 더 자신에게 걸맞다고 여겨지는, 더 고귀하고 이상적인 부모를 상상한 결과 그러한 신화구도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악당은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맞게 되며, 이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다른 대상으로 전이된 결과라고 랑크는 주장했다.
영웅신화는 당연히 현대에도 존재한다. 현대의 영웅들은 주로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며, 대중의 원초적 욕망을 충족하고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대의 영웅은 아주 다양해서, 과거의 영웅이 현대매체를 통해 재탄생한 경우는 물론이고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삶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평범한 배경과 능력을 가진 시민영웅도 대표적인 현대 영웅이고, 호러영화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주인공도 일종의 영웅으로 간주되는데 이들은 보통 '호러퀸'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현대의 영웅들도 과거의 영웅들처럼 여러 바람직한 자질을 선보이고 권장하며, 용기와 불굴의 의지, 희생 정신, 지혜, 성실함, 책임감이 현대 영웅들이 가지는 덕목이다.
그러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현대의 영웅들은 몇가지 점에서 과거의 영웅들과 다르다. 근대의 탈주술화로 인해 현대의 영웅들은 신이한 탄생이나 비범한 배경이 없어졌고, 영화에서 보여지는 시련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나는 부분만 남았다. 또한 강건한 육체와 지혜를 가진 과거의 영웅과 달리 현대의 영웅은 평범한 능력을 가지거나 심지어 일반적인 기준보다 더 왜소하고 허약한데, 이는 현대 영웅서사의 주 소비자인 대중들이 감정이입을 하기 쉽게 만든다. 이외에 역시 탈주술화로 인해 조력자의 마법적인 도움은 과학기술적 지원으로 대체되었고, 1-2시간의 틀에 갇혀 최대한의 오락성을 끌어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영웅의 죽음은 현대 영웅서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거나 매우 극적인 형태를 띤다.
슈퍼히어로(superhero)
슈퍼히어로는 주로 미국 대중매체에서 생산되는 영웅으로, 단순한 생산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을 만들어내고 시대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최초의 슈퍼히어로는 1938년 처음으로 출간된 슈퍼맨(superman)이 시초로 여겨지며, 이후에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반문화 운동, 911 테러와 대침체 등 미국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융성하여 미국인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하고자 시도해왔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슈퍼히어로는 영화계를 주름잡게 되었는데, 2008년 개봉되어 대흥행을 거둔 <아이언맨>을 필두로 수많은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 영화화되었고 이에 질세라 라이벌 회사인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도 속속들이 영화화 되었다.
리처드 레이놀즈 4는 슈퍼히어로들이 다음과 같은 7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 부모의 부재/상실(lost parents): 슈퍼히어로는 부모가 없거나 모종의 이유로 떨어져있다. 슈퍼맨의 부모는 크립톤 행성과 함께 파멸했고, 아이언맨의 부모는 버키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슈퍼히어로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면서 외부적 존재로 자신을 인지하게 만든다.
- 범상치 않은 존재(the man-god): 슈퍼히어로는 슈퍼-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대개 선천적으로 초능력을 가지거나, 특별한 코스튬을 통해 초능력을 구사한다. 판타스틱4는 본래 초능력자이며, <스파이더맨:홈커밍>의 스파이더맨은 특별한 의상을 통해서만 거미줄을 사용할 수 있다.
- 정의의 추구(justice): 슈퍼히어로는 도덕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들이 절대적인 도덕을 향유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초법적이다. Mcgowan이 말했듯이 그들은 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 출동하여 법이 할수 없는 것을 성취한다.
- 일반인과 초능력자(the normal & superpowered): 슈퍼히어로는 영웅인 동시에 일반인으로 살아간다. 슈퍼맨은 영웅 슈퍼맨과 일반인 클라크 켄트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고, 배트맨도 평소에는 괴짜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이중적인 생활은 아래의 문제를 야기한다.
- 이중신분(the secret identity): 일반인인 동시에 영웅인 슈퍼히어로들은 일반인으로서의 자신과 영웅으로서의 자신이라는 2가지 정체성을 형성하며, 이로 인해 정체성 문제를 겪는다. 아이언맨은 <아이언맨 3>에서 어벤져스의 일원인 자신과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정체성 혼란은 영웅서사의 형성에도 기여한다.
- 초인적 능력과 정치학(superpowers and politics): 슈퍼히어로는 미국 신화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전파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성조기를 입고 다니는 캡틴 아메리카를 보라.
- 과학으로 대치된 마법(science as magic): 슈퍼히어로의 힘은 마법이 아니라 과학에서 온다. 아이언맨의 힘은 상온핵융합로라는 과학적 상상에서 비롯되고, 배트맨의 슈트도 과학의 산물이다.
슈퍼히어로의 역사
슈퍼히어로 장르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golden age로, 이 시기에 많은 슈퍼히어로들이 탄생했다. 1938년 최초의 슈퍼히어로인 슈퍼맨이 출간되었고, 뒤이어 배트맨(1939)과 그린 랜턴(1940), 캡틴 아메리카(1941)가 출간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슈퍼히어로들은 대공황기의 미국인에게 정신적 위안이 되었고 세계대전기에는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정세가 안정되면서 슈퍼히어로의 인기는 떨어졌고, 정신과 의사 프레드릭 베르탐이 저서 <순수의 유혹>에서 슈퍼히어로들을 폄하하면서 golden age는 끝나게 되었다.
슈퍼히어로의 두번째 부흥기는 60년대에 시작되었다. silver age로 불리는 이 시기에 미국은 반문화 운동이 급속하게 일어났고, 새로운 문화적 표준을 확립하려는 사람들은 슈퍼히어로를 통해서도 그러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판타스틱4나 스파이더맨, 헐크 등 golden age 못지않게 유명한 슈퍼히어로들이 대거 탄생했으며, 이들은 golden age의 슈퍼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문화에 영향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70년대의 bronze age는 silver age와 큰 차이점은 없지만, 이 시기의 슈퍼히어로들은 좀더 현실에 깊게 개입하였다. 이 시기의 슈퍼히어로들은 사회 현안에 더 깊게 개입하였고, 좀 더 급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가 퍼니셔와 울버린인데, 퍼니셔는 기존의 미국 질서에 대한 부정으로, 울버린은 소외된 사회적 소수자 이슈를 부각하였다.
80년대 이후는 modern age라 불린다. 이 시기에도 왓치맨처럼 몇몇 슈퍼히어로가 새로 나타나긴 했지만, 이 시기의 슈퍼히어로는 대부분 이전 시대의 슈퍼히어로를 재생산한 결과이다. bronze age 이후 슈퍼히어로는 잠시 소강상태였으나 테러와의 전쟁과 대침체를 겪은 미국 사회는 21세기부터 다시 슈퍼히어로를 찾게 되었고, 이 흐름이 영화산업과 연관되면서 modern age에는 이전 시대의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보다 더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개봉되었다. 동시에 슈퍼히어로의 생산자들은 슈퍼히어로를 영화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활발한 재해석을 시도하게 되었다.
modern age의 슈퍼히어로들은 과거의 슈퍼히어로들과 몇가지 차이가 있다. 먼저 장르 생산자들은 슈퍼히어로들에게 더 현실적이고 개연적인 설명을 부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복잡하고 세세한 설정들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또한 정체성 혼란과 트라우마 속에서 고뇌하는 슈퍼히어로들이 대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테러와의 전쟁과 대침체로 기존 신자유주의 질서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 미국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modern age의 슈퍼히어로들은 과거와 달리 어벤져스와 같은 팀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현대의 장르 생산자들은 더 복잡하고 흥미있는 서사를 연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게 되었다.
슈퍼히어로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슈퍼히어로물은 오늘날 하나의 대표적인 영화장르가 되었다. 어벤져스의 흥행 이후로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쏟아져 나왔고, 이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먼저 슈퍼히어로 장르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슈퍼히어로이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주인공들은 이중신분과 초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코스튬을 통해 정체를 숨긴다. 또한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액션영화이기 때문에, 슈퍼히어로 장르의 내용은 대부분 폭력적이며 캐릭터들은 폭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슈퍼히어로 장르는 일정 부분 사회를 반영한다. 시대의 파도 속에서 태어난 슈퍼히어로답게 슈퍼히어로 장르는 사회의 위기 속에서 융성하면서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보이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보수주의인데, 여기서 보수주의란 구체제 질서(특히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경향을 말한다. 슈퍼히어로 장르는 악당으로 인해 무너진 구체제 질서를 다시 복구하는 것이 주 내용이고,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는 남성이면서 가녀린 히로인을 구출한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특성은 최근에 할리우드에서 약해지고 있다.
슈퍼히어로 장르는 다음과 같은 플롯을 가진다. 먼저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악당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기존 사회를 공격한다.(설정) 기존의 국가적 무력은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은 슈퍼히어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작동) 그러자 슈퍼히어로가 나서서 악당과 전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심화) 시련끝에 슈퍼히어로는 강한 폭력을 통해 악당을 쓰러트리고 구체제 질서는 보존된다.(해결)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기존의 사회는 좋은 것으로 간주되며, 도덕적 문제가 드러나더라도 슈퍼히어로는 결국 기존 사회를 최대한 보존하려고 한다.
슈퍼히어로의 특성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주된 관습이기도 하다. 슈퍼히어로는 대개 아버지가 없거나 결손가정에서 자라났으며, 이중 신분에서 비롯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또한 슈퍼빌런이라 일컬어지는 강한 악당이 등장하며, 텍스트의 주요 서사는 이러한 악당과 슈퍼히어로의 대결이 된다. 이 대결은 스펙타클한 액션씬을 연출하여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면서, 동시에 영웅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장르는 대개 선인 슈퍼히어로와 악인 슈퍼빌런의 대결구도를 통해 단순한 선악 이분법을 주장했지만,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보듯이 최근에는 악당이 현대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도상은 코스튬, 슈퍼파워, 캐릭터 페르소나, 소품, SF적 공간 등이 있다. 코스튬과 초능력은 슈퍼히어로의 상징이며, 실드 요원들은 심지어 가장 단순한 엑스트라일지라도 실드 특유의 이상한 제복을 입고 있다. 또한 슈퍼히어로 캐릭터는 캐릭터 그 자체가 도상으로 기능하기도 하는데, 어떤 텍스트에 헐크가 나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텍스트가 슈퍼히어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같은 소품들도 해당하며, 한편 슈퍼히어로에게 개연성을 부여하려는 추세에 맞추어 배경으로 등장하는 SF적 공간(실험실, 외계행성 등)도 슈퍼히어로 장르의 도상이다.
여성 슈퍼히어로
슈퍼히어로 장르에서는 남성 못지않게 많은 여성들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마블 코믹스에서 히어로의 10%는 여성이며, 2000년대 이후 그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남성 히어로와 거의 비슷한 수가 매년 출간되고 있다. 여성 슈퍼히어로의 35%가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남성의 44%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또한 여성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고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이 출간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15년으로, 남성의 18년보다 더 짧다. 이는 이미 너무 많은 히어로가 등장하여 레드 오션이 된 남성 슈퍼히어로 시장의 특성과,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이 상승한 여성들이 여성 슈퍼히어로에 대한 선호를 표현하기 시작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 슈퍼히어로가 양적으로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남성 슈퍼히어로에 비해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배트걸이나 스파이더걸과 같이 많은 여성 슈퍼히어로는 남성 슈퍼히어로의 보조적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들의 코스튬은 그들의 여성적인 신체와 매력을 강조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여성 슈퍼히어로는 페미니스트들이 말한 타자적 존재에 머물고 있으며, 이들의 코스튬이 가지는 선정성은 상업적 이유로 인해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젠더 스와프(gender swap)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여성 슈퍼히어로가 늘어나고 있다. 5
- Del Vecchio, M., Kharlamov, A., Parry, G., & Pogrebna, G. (2018). The Data science of Hollywood: Using emotional arcs of movies to drive business model innovation in entertainment industries. arXiv preprint arXiv:1807.022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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