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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과 변경지대의 과학 총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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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과 변경지대의 과학 총론

과학주의자 2022. 7. 15. 20:16

어떤 과학은 다른 과학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진다. 수량적 방법이 사용되지 않거나, 질적 연구방법론에 많이 의존하거나, 이론을 평가하는데 있어 근거에 대한 평가보다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있거나(혹은 더 많거나), 과학이론이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함의들을 많이 담고 있는 분야도 과학에 많이 존재한다. 이런 학문들은 일부분 인문학으로 간주되기도 하며, 실제로 인문학적 패러다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 학문들은 경험적 자료에 근거하여 연구를 생산하나 주관적 개입에 많이 취약하기 때문에, 인문학과 과학의 사이에 위치한다.

 

이 문서는 가장 객관성이 떨어지는 사회과학으로 간주되는 사회학과, 다른 다수 사회과학, 인문학인지 과학인지 논쟁이 있는 역사학, 그리고 다른 근거와 방법론이 취약하여 다른 과학분야와 같은 정도로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는 여러 과학분야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분야들은 주관적인 면이 매우 크고 결과가 비일관적이나,[각주:1] 동시에 경험적 근거에 기반하여 탄탄한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나 일반적인 철학 사상 이상의 객관성을 가진다. 변경지대의 과학에서 내놓은 결론은 개인적 주장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 주관성과 왜곡의 가능성을 항상 인식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제학

https://tsi18708.tistory.com/173

경제학은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 인간의 선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소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경제학의 연구대상은 경제에 한정되지 않으며, 인간의 선택이 중요한 모든 영역이 경제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실제로도 한다) 그러나 경제학이 주로 연구하고 전문성을 발휘하는 실제 영역은 주로 경제이며, 얼마나 과학적으로 엄밀한지도 의문의 대상이다.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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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sociology)은 인간 사회를 연구하고 비판하는 학문으로, 사회과학 분과에 속해 있다. 사회학의 출발은 과학이었지만, 현재 사회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한쪽에서는 복잡한 통계적 기법을 통해 매우 실증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철학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주관적이며 실제로 사회학의 많은 영역이 철학과 겹친다.

 

대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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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의학은 비과학적인 사상이나 관습에 기초를 둔 의학으로, 그러한 사이비의학 중 그나마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논의되고 있는 의학을 말한다. 대체의학은 탄생한 순간부터 그 정합성을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변경지대의 과학의 아주 적합한 예시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시대

https://tsi18708.tistory.com/234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등장하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제 2물결이 불어오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구시대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 잔재들은 영국이 완전한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다.

 

영웅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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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뛰어난 능력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는 존재로, 거의 모든 문화에서 영웅에 대해 다루고 묘사하였다. 현대 영웅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신화학과 문학에서 행해지는데, 전자는 사회과학적, 인류학적 분석에 집중하는 반면 후자는 보다 인문학적이고 정치적인 면에 치중한다.

 

한국 대중문화사

https://tsi18708.tistory.com/236

한국은 옛날부터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가꾸어 왔지만, 현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화는 광복과 함께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에 노출되었고, 6-70년대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군대와 조직문화[각주:2]

군대에서 조직문화의 중요성은 잘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기술이나 리더십, 개인, 훈련 등은 군대의 능력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지고 있지만, 조직문화는 그에 비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는 mansoor와 murray가 자신의 저서 'The culture of military organizations'를 통해 항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들은 조직문화도 군사적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가령 미국 독립전쟁기 미군은 평등을 추구하는 자원병들을 군의 규율과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서 승리할 수 있었다.[각주:3]

 

군대에서의 조직문화와 비슷한 개념으로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가 있다. strategic culture는 1977년 랜드 연구소에서 소련군의 핵전략을 분석하면서 나온 개념으로, 국가 또는 다른 형태의 정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대내외적으로 안보 환경의 성격을 규정하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며, 대외 정책의 방향과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상호 공유하거나 합의한 전략적 사고와 행위의 체계를 말한다. strategic culture는 각 공동체(와 거기 소속된 군대)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며, 현대국가들은 주로 지정학의 영향을 받는다.

 

군대 조직문화의 특징은 여러 군대의 문화가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규율과 의무, 자기희생은 전세계 어느 군대에서도 발견되는 군대의 문화적 특징이기도 하다.[각주:4] 필자는 이러한 공통점이 세계 각지의 군대가 처했던 환경이 비슷했던 결과라고 주장한다.

 

미 해병대 전사상의 변화[각주:5]

미 해병대에서 보는 이상적인 전사(warrior)의 모습(전사상)은 1989년에 큰 변화를 겪었다. 그 이전에 미 해병대의 이상적인 전사상은 전투원(fighter)으로, 공격적으로 적에게 근접해서 적을 죽이는 것이 이상적인 해병이라고 여겨져 왔다. Victor Krulak의 묘사[각주:6]에 따르면 해병대를 다른 군대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수송이나 지원이 아닌 전투가 그들의 주요 임무이며, 해병대는 전투원의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다른 해병대원의 지지[각주:7]를 받았으며, 이러한 관점 하에서 해병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의 기술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미 해병대의 이러한 주장은 여러 신화를 통해 이어져왔다. 한 사례는 Daniel Daly의 사례인데, 미 해병대의 신화에 따르면 Daly는 1차 대전에 참전하여 2개의 메달 오브 아너를 수여받은 해병 부사관으로, 18년 6월 벨로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당했다. 이때 Daly는 포화에 노출된 아군 해병들에게 "Come on, you sons of bitches, do you want to live forever?(좀 시발놈들아. 니들이 영원히 살거 같냐?)"라고 소리치며 적진에 돌격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례는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체스티 풀러('Chesty' Puller)의 사례로, 신뢰할 수 없는 이 야사에 따르면 고토리에서 해병대가 중국군에게 포위되자 풀러는 오히려 적을 찾아서 죽이기 쉬워졌다고 단언했다고 전해진다.[각주:8]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전략적 식견은 고려하지 않은채 돌격하고 공격하는 정신은 다른 전설들과 함께 해병대의 이상으로 계속해서 전해내려갔다.

 

이러한 미 해병대의 전사상은 그들이 처했던 전장환경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2차대전 말기 미 해병대는 요새화된 이오지마를 공략해야 했고, 한국전쟁때는 뛰어난 중국군의 전술로 인해 중국군에게 포위당하는 일이 잦았다. 사실 해병대의 임무 자체가 적의 화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해변을 가로질러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해병대의 임무환경 자체가 적의 화력 속에서 작전하는 것을 상정한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헤쳐나가려면 우세한 화력을 퍼부으며 적에게 소모적으로 돌진해야 했고, 이 중 소모적으로 돌진하는게 해병대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미 해병대는 돌격과 공격을 강조하는 모습을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사상은 70년대이후 기동전(manoeuvre warfare) 교리가 도입되면서 변화를 겪는다. 기존 해병대의 전사상과 달리 기동전에서 이상화하는 전사상은 '똑똑한(smart) 군인'으로, 능숙한 기동부대의 군인은 빠르고 경제적으로 적을 패퇴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을 기만하고, 끊임없이 정찰하고, 약점을 찾아 적을 공략하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하고 항전의지를 꺾어 후퇴시켜야 했다. 이는 고도의 전략적 식견을 요구하며, 전투기술보다는 유연하고 기민한 전략을 요구했다.

 

이러한 전사상은 기존 해병대의 전사상과 충돌했기 때문에, 많은 해병들이 이에 반발했다. 당시 많은 해병들은 기동전식 전투가 진정한 싸움(real fighting)과 죽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각주:9] 진정한 해병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동전이 그저 기동만을 위한 기동을 한다고 폄하하고, 전장에서 회피하는 현기증나는 방법이라고 조롱했다.[각주:10] 또한 그들은 기동전이 타군에서 유래한 전술이기 때문에 해병대의 방식(marine way)이 아니라고 거부했다.[각주:11] 

 

이리하여 부사관들을 중심으로 기동전 교리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기존의 해병대상을 지지하는 파(attritionist)와 기동전 지지자(maneouvrist)들은 79년부터 해병대 내에서 심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알프레드 그레이 사령관을 필두로 한 기동전 지지자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89년 FMFM-1(Fleet Marine Force Manual)에 기동전 교리가 추가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attritionist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고, 최소 93년까지 이들의 주장이 미 해병대에 남아있었다.[각주:12]

 

한국 해병대의 문화[각주:13]

한국 해병대는 국내의 공산주의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4월 15일 해군 예하부대로 창설되었다. 창설 이후 해병대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고, 또한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그러나 73년 예산상 이유로 인해 일시적으로 해병대 사령부를 해체하고 해군 예하부대로 다시 들어갔다가 87년에 재창설되었다. 그 사이 14년의 공백기 동안 해병대는 전역한 해병대 예비군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해병대전우회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나갔다. 이러한 해병대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으나,[각주:14] 2010년대 이후 해병대는 가혹행위를 일삼는 형편없는 군대로 이미지가 악화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기본적으로 미국 해병대의 후신을 자처하고, 다른 한국군 부대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차동길은 이러한 한국 해병대의 전략문화를 연구하였는데, 이를 통해 해병대의 문화가 절대복종과 획일화를 중시하는 일본 군의 문화와 개척정신을 강조하는 미 해병대의 semper fidelis,[각주:15]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쌓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결과 공격적이고, 위계적이며, 특별함을 추구하는 전략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차동길은 보고한다.

 

해병대의 조직문화에 대한 실증 연구[각주:16]에서 해병대는 관계지향 문화와 시장지향 문화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해병대가 내부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는 통제가 유연하지만, 조직의 측면에서는 통제중심적인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타군과 비교하는 경우 해병대는 해군보다 시장지향 문화가 약했고 위계지향 문화는 제일 약했다. 이는 해병대에 대한 상식과는 반대되는 결과이다.

 

박순제와 이승철[각주:17]은 해병대의 군가를 고찰한 후, 해병대의 군가가 정의 및 자유의 수호와 빨간 명찰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들은 해병대 군가에서 팔각모나 빨간 명찰과 같은 해병대의 외적 상징물을 이미지화하여 들려주고 있으며, 노래 가사를 통해 작지만 강하고 특별한 해병대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슷하게 김세훈[각주:18]은 해병대의 싸가(비공식 군가)를 연구한 후, 해병대원이 싸가를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매우 폭력적으로 분출한다고 보고하였다. 이강호[각주:19]는 한국군이 사용하는 부대 상징을 조사하고 각 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였는데, 이를 통해 해병대는 주로 용을 부대 상징으로 사용한다고 보고하였다. 용이 가지고 있는 강함과 수호의 이미지로 볼 때 이는 승리를 지향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해병대의 가치관을 보여준다고 해석되었다.

 

최재덕[각주:20]은 해병대 문화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필승의 신념과 단합된 의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해병대는 승리를 추구하고, 이를 위해 단합을 요구하며, 해병대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해 타군과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불리한 환경(상륙)에서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해병대의 작전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최재덕은 상징적 언어의 사용, 승전 사례의 전통화와 추앙, 자부심 또한 해병대 문화의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비슷하게 유용원[각주:21]은 해병대 지원자들에 대하여 연구했는데, 해병대 지원자들은 해병대를 강인하고 전우애와 단결이 굳건한 군대로 보았다. 유용원은 이것의 원인도 해병대의 험난한 작전환경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 해병대와 상당부분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한편 김주엽과 오성훈[각주:22]은 해병대 교육훈련과 자대배치를 일종의 통과의례로 보고 인류학적으로 연구하였다.

 

최정준[각주:23]은 해병대의 특징으로 엄한 군기와 강한 전우애를 들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이 상하관계와 엄격한 군기를 강조하는 병영 환경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동시에 저자는 인터뷰와 문헌 고찰을 통해 해병대 문화에 숨겨진 핵심가정을 조사하였는데, 해병대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동료와 선임, 간부는 동고동락하는 운명공동체이면서 절대복종의 대상이며, 해병대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서구 자본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각주:24]

어느 지역이나 시장은 있었고 자본주의적 요소 또한 있었지만, 시장의 힘이 근대화를 끌어낼 만큼 그토록 강력해진 지역은 유럽밖에 없다. 때문에 왜 하필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는지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해석이나 그 변종인 세계체제론이 주된 이론이었으나, 최근에는 유럽의 제도와 인구학적 측면에 주목하는 학설이 주류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지리적 특성도 유럽 자본주의의 발생에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탄생에는 자유도시가 크게 기여한 듯이 보인다. 특히 지리적 분절로 인해 자유도시가 산재해 있던 서유럽에서는 봉건제가 일찍 붕괴되고 근대화가 촉진된 반면, 그렇지 않았던 동유럽은 상당히 최근까지 봉건제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서유럽의 특징이기도 하였는데, 유럽은 14세기부터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시에 전체 인구의 5.3%가 살았고[각주:25] 서유럽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도시화율이 6.1%에서 31.3%로 상승하였다.[각주:26] 반면 중세까지 최대 부국이었던 중국은 중간의 급격한 경제변동에도 불구하고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의 안정적이고 작은 도시화율을 유지하였다.[각주:27]

 

혐성국 밈에 절여진 반서방주의자들은 아동노동이 영국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아동노동은 이들 자유도시에서부터 존재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직인들과 함께 일했고, 동시에 직인의 경쟁자가 되었다.[각주:28] 또한 여성도 이미 당시부터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했음이 당대 소설에서 드러난다.[각주:29] 이 시기에 노동자의 처우는 상당히 열악했고, 거기다가 노동자는 농민과도 경쟁해야 했다. 때문에 자유도시에서는 노동자에게 많은 억압을 가했고, 이는 때때로 노동자의 폭동으로 번지기도 했다.[각주:30]

 

이러한 자유도시는 시장교역을 통해 형성된 부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비록 카이펑이나 델리,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플에 비해 규모는 작았을지 모르나, 그들 도시와 달리 나름의 자치권과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행위자로 기능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힘을 키워가던 왕은 영주를 꺾기 위해 자유도시의 힘이 필요했다. 가령 카를 5세는 독일의 은행가들의 지원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 상인의 지원을 통해 백년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럽 왕의 세입의 많은 부분이 자유도시와 상인에게서 나왔고,[각주:31] 그만큼 왕과 상업의 연대와 상인의 발언권은 강해졌다. 이는 중상주의와 자본주의로 이어졌다. 

 

자유도시의 존재는 왜 서유럽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자본주의가 가능했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중국의 경우, 자유도시의 전성기였던 중세 후기에도 거의 모든 경제적 측면에서 서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국운을 걸고 해상무역을 지원하였으며 원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은 통일국가였고, 중국의 무역은 국가에서 파견한 관리(선리재자)에 의해 통제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도시와 상업은 인근 지역까지 확산되기 힘들었다. 이후 원이 맬서스 트랩에 의해 붕괴된 후 상산학 대신 성리학을 받아들인 명이 들어섰고, 명이 상업을 격하하자 중국 상업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예언의 역사

예언은 유사과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미래의 일을 짐작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 기반이 유사과학인데다가, 예언 자체도 상당히 두리뭉술하여 실제로 예언이 맞는지 검증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유사과학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예언의 역사는 깊지만, 정부와 분리되어 민간에서 활동한 예언가는 후삼국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예언가는 기본적으로 풍수지리를 사용해 예언을 했는데, 이 중 경보를 비롯한 도선의 제자들이 왕건과 결탁하여 고려를 옹호하면서 도선에 대한 신격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한국 예언의 시작은 선종 승려이자 지관이었던 도선으로 여겨진다. 도선은 견횐의 세력권에 거주하였지만, 도선의 제자가 고려 왕실과 결탁하면서 도선은 한국 예언의 시초로 여겨지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도선의 예언을 근거로 궁궐을 짓거나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논의가 지속되었고, 당시 술관들은 도선의 예언서를 위조하고 이를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도선과 제자들의 영향으로 풍수지리를 정치와 연결시키는 전통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풍수지리가 수도 이전과 같은 국가중대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 초에도 도선의 권위는 이어졌으나, 세조가 도선의 예언서를 모두 금지하면서 정부에서 도선의 권위는 사라진다.[각주:32] 그러나 도선에 대한 신뢰는 민중 사이에서는 사라지지 않았고,[각주:33] 후에 정감록에도 <도선비결>이라는 제목으로 도선이 지었다는 위서가 첨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도선의 예언서라고 내려오는 일부 예언이 있지만, 현존하는 예언서와 기록된 예언 모두 교차검증 결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알려진 도선의 예언 대다수는 조작이다. 한편 조선 민간에는 도선의 탄생 설화가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사람으로, 옛날에 전남 영암에 사는 최씨의 오이밭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최씨의 오이밭에서 매우 기다란 오이가 열렸는데, 최씨의 딸이 몰래 오이를 따먹었다. 그러자 최씨의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화난 최씨는 애비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질책하며 자신의 딸을 대나무숲에 버려두었다. 며칠 후 최씨가 딸을 찾아가자 비둘기가 날개로 아이를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데려와 기르게 되었다.

 

새가 날개로 아이를 감싸는 구도는 주몽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오이는 땅을 상징하는 작물이기 때문에 도선은 신화학적으로 지모신 계통의 신에 속한다.[각주:34]

 

도선 이후 한국에는 다양한 예언이 등장하다가, 19세기 즈음에 정감록이라는 하나의 예언서로 귀결되었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언서로, 익명의 여러 오컬티스트가 주장한 예언을 그러모은 것이다. 정감록에는 도선, 이지함, 이득윤 등 다양한 예언가의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그들의 이름을 빌려 쓴 것에 불과하며, 정감록에는 유효립이나 허균이 반란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예언 또한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각주:35]

 

격암유록

격암유록(유록)은 1975년에 한국의 신흥종교 천부교에서 만들어진 예언서이다. 유록을 처음 공개한 이들은 유록이 몇백년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국난을 맞아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시중에 공개한다는 명목으로 70년대에 처음 유록을 공개하고 국가에 기증하였다. 유록은 기독교와 도교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가령 유록은 궁궁(弓弓)의 이치를 깨달아야 난리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궁에 대한 신성시는 한국 민간신앙에서 내려왔으며 십승과 같이 정감록에서 가져온 어휘도 많다. 반면 유록은 궁궁을 합치면 십자가 된다는 등의 표현을 통해 궁극의 이치가 십자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찬양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각주:36]

 

전반적으로 격암유록은 정감록에 내용을 보다 추상화하고 기독교적 색채를 입힌 찌라시로 보인다. 이는 동양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장로를 역임한 바 있는 천부교 교주 박태선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록에는 '정감'과 같이 정감록에서 사용했던 대부분의 어휘가 같이 사용되며, 어떤 경우에는 뜻도 일치한다. 또한 '鄭堪先師'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정감록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직접적으로 유록이 정감록의 후계라고 주장하고 있다.[각주:37] 하지만 정감록과 달리 유록에서는 지시하는 바가 더 추상화되는데, 가령 정감록과 달리 유록에서는 십승이나 계룡, 삼풍이 특정 지명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신령한 무언가를 의미한다.[각주:38]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인 이치의 예시로 십자가 지속해서 등장한다.[각주:39] 이를 통해 본다면 유록은 기독교와 도교가 융합된 천부교가 정감록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예측 오류를 없애기 위해 작성한 찌라시라고 볼 수 있다.

 

 

이대남 현상

이대남은 한국에서 20대 남성을 이르는 말로, 정확히는 90년대에서 2000년대 가량에 출생한 1-30대 한국인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2018년부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정당을 지지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2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진보정당 대신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여 보수정당의 집권에 기여하였다. 이때부터 이 세대를 일컫는 'MZ세대'라는 단어가 유행함과 동시에 이대남이라는 단어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들은 공정을 중시한다고 여겨지고, 20대 여성과 함께 젠더갈등에 관심이 많다.[각주:40]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정립되기 이전에도 한국 20대 남성의 다소 반동적인 반응에 대한 관심은 있어왔다. 이들 이대남은 특히 페미니즘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대남에 대한 학술적 접근도 주로 페미니즘적 관점에 기초한 비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각주:4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일부 달라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인 내에서의 성평등 태도에 대한 연구에서 이대남의 성평등의식은 다른 집단보다 보통 높고, 심지어 20대 여성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대남에 대한 조사보고서[각주:42]의 결과도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일부 괴리된다. 보고서에서 안상수와 동료들은 비록 이대남이 간통녀나 김치녀 페미니스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들과 비슷한 정도로(혹은 더 심한 정도로) 간통남이나 성매수 남성, 성범죄자, 김치남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페미니스트에 대해서는 혐오와 동시에 감탄을 느끼는 경우도 았다고 보고하였다. 청소년의 경우 여성혐오의 발생 이유에 대해 과반수의 청소년들이 여성부를 원인으로 꼽았으며, 페미니스트나 특혜만을 요구하는 여성을 꼽는 경우도 20%가 넘었다. 한편 질적 연구의 경우에도 이대남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성평등을 추구한다는 보고가 일부 존재한다.[각주:43]

 

이우창[각주:44]은 이대남에 대한 페미니즘 친화적인 논의들이 이대남을 규정하려고만 했을뿐 실제 현상을 알아보려는 시도가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해외의 안티페미니즘과 달리 이대남은 전통적인 남성성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신 이대남이 가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페미니즘의 대중화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우창은 나무위키의 '성평등주의' 문서에서 나타난 서사구조를 분석하고, 이대남이 현재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유의미한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차별은 주로 과거 세대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믿는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성평등 가치관을 지지하고 있으나, 역차별 조치와 같이 특정 성별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정책이 성평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다르다고 보고하였다.

 

조대근과 김진원[각주:45]은  젠더와 상관없이 이대남이 보수화되었다고 주장하나, 이것이 실제 설문조사에서는 검증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문항과 대상을 사용하여 이대남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천관율과 정한울[각주:46]은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대남을 반페미니스트 집단으로 정의했다. 설문결과에서 이대남은 보수주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가치에서 다른 집단과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이지 않았는데, 다만 사회가 남성에게 불리하다고 응답하는 경향이 강했고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항에서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 다른 집단과 대비되었다.

 

정한울은 특히 이대남 내부에 형성된 반페미니스트 정체성 집단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은 학창시절과 연애경험에서 여성들에게 밀린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실제로 반페미니스트 정체성 집단으로 분류된 응답자는 여성차별보다 남성차별이 심각하다는 문항에 95.7%가 동의하였고,[각주:47] 여성할당제에는 100%가 반대하였다.[각주:48] 이처럼 페미니즘에 집중된 공격은 다른 연구에서도 보고되었던 바 있다.[각주:49]

 

한편으로 천관율과 정한울은 남성들의 피해자적 경험에 이들이 추구하는 equity적 공정이 결합하면서, '이미 능력있는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가 나타났다고 해석하였다. 이는 경쟁을 힘들어 하면서도 경쟁을 신성시하는 현대사회의 '전사 사회'적 특성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임동규는 공정성을 제외한 다른 가치가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대남이 공정성이라는 잣대만으로 페미니즘을 평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각주:50] 비슷하게 신자유주의적 가치관[각주:51]이나 개인주의[각주:52]와 같이 equity적 공정과 관련된 가치관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이대남이 equity에 반하는 여러 페미니즘 관련 정책을 반대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페미니즘의 해석

이대남의 반페미니즘적 성향으로 인해 페미니즘에서는 일찍부터 이대남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이대남을 성차별적인 세력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방향에 치중되었는데,[각주:53] 그 사상적 편향성과 학술적 불투명함으로 인해 이들의 주장을 볼 때 주의가 필요하다. 가령 페미니스트인 김수진[각주:54]은 자신의 쓰레기 논문에서 한겨레신문 기사를 통해 당시에 유행했던 젠더 이슈로 군가산점 논쟁, 일베, 남성커뮤니티 등장, 성재기 자살, 소라넷 폐지, 장동민 발언 논란, 메갈리아 등장을 선정하고 이를 통해 당대의 젠더 담론을 분석한다고 주장하였다. 연구의 근거는 중년의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기억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10년대가 백래시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그가 기억하기에 8-90년대는 여성학과 다른 페미니즘 학문이 활발히 발달하던 시기였고,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는 페미니즘이 각종 정책과 제도에 반영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김수진은 다소 이례적이게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상당부분 감소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김수진은 동시에 10년대부터 대학에서 페미니즘 관련 학과가 줄어들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것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인 백래시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한국 백래시의 특성으로 온라인 공간에서의 활동을 들었다. 그가 보기에 지난 20년간 온라인 공간에서는 한국여성을 비난하는 산발적인 공격이 있었고, 10년대부터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것이 결집되어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백래시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유행어였던 '된장녀'나 '김치녀'는 이러한 백래시의 증거로 해석되었으며, 김수진은 일부 '찌질한' 남성들만 그런다는 통념을 공격하며 많은 이대남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김수진은 메갈리아가 남성혐오가 아니라 정당한 반격이라고 해석하였다. 일베를 위시한 남성들의 여성혐오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가 메갈리아라는 것이다. 그는 메갈리아의 전략이 일베를 모방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남성의 여성혐오를 그대로 되돌려줬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일삼고, 메갈이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치켜세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이대남은 백래시의 주동자이고, 여성을 이기적인 약탈자로 몰아붙이는 선동가이자,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는 망상자이고, 여성혐오자에 불과하다.

 

김수아[각주:55]는 이우창과 마찬가지로 이대남이 성차별주의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대남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온정적 성차별주의를 거부하고, 남성이 감정을 참고 씩씩해야 한다는 남성성 규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어서 김수아는 인터넷 공간에서 나타난 이대남의 발언을 분석한 다음, 이대남이 성차별의 원인을 이전세대의 남성에 돌리고 자신들은 오히려 페미니즘의 피해자라고 여기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예시로는 여성할당제와 성평등 교육 강화가 거론되었다.

 

김수아는 이를 신자유주의로 인해 새롭게 나타난 하이브리드 남성성(hybrid masculinity)을 이대남이 받아들인 결과로 받아들였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오히려 가부장제를 강화한다고 보고하였으나[각주:56] 김엘리[각주:57]는 이러한 새로운 남성성이 성차별주의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희망적으로 믿었고, 김수아는 중립적이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한 것이 제시되었는데, 페미니즘 외부의 학자들이 내린 결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다소 놀랍다. 황슬하와 강진숙[각주:58]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연구한 후 연애에서 여성에 대한 박탈감을 경험한 이대남이 유희를 목적으로 여성혐오 담론을 생산했다고 보고하였다. 강준만[각주:59]은 여성과 달리 남성만 가야하는 군대에서의 경험이 여성에 대한 그러한 박탈감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하였다. 김수아와 이예슬[각주:60]은 인터넷의 남초 커뮤니티가 확증편향을 강화하여 여성에 대한 박탈감을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주장으로 정립하고 확대재생산했다고 주장하였다.

 

인셀과의 비교

인셀 담론은 20년대부터 등장하여 서구에서 젊은 남성에 대해 다루는 담론 중 하나로, 인셀이란 연애시장에서 탈락하여 연애경험이 없는 젊은 남성을 일컫는 단어이다.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인셀을 새로운 여성혐오의 동력으로 규정한 후 이에 대해 활발히 논평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이대남을 인셀과 동일시하여 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역차별에 대한 반대가 오히려 더 진보적인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보고도 있었지만,[각주:61] 일반적으로 신좌파의 주장에 대한 최근의 반대에는 인셀이 있다고 지목되고 있다.

 

인셀에 대한 연구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인셀이 여성을 지능이 낮은 존재로 비하하고[각주:62] 동시에 가부장제라는 자연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적대시하고 있다고 보고한다.[각주:63] 이러한 담론은 레드필과 같은 반페미니즘적인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각주:64] 인셀은 한국의 이대남과 마찬가지로 연애경험에서의 박탈이 원인이라고 여겨지며, 대안우파와 가부장제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다고 페미니스트들은 주장한다.[각주:65] bridges와 pascoes[각주:66]는 인셀을 포함하여 21세기에 등장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모두 여성을 억압하는 새로운 도구라고 보고하였으며, o'malley와 동료들[각주:67]은 이러한 인셀의 특징으로 연애시장 강조, 여성의 악마화, 남성성의 정당화, 남성억압에 대한 믿음, 폭력의 5가지를 보고하였다.

 

인셀은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고 연애경험의 미비로 인한 박탈감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대남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김수아[각주:68]는 한국의 경우 이대남이 성평등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중시한다. 또한 bridges와 pascoes[각주:69]와 달리 김수아와 김엘리[각주:70]는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오히려 가부장제를 극복할 수도 있다고 긍정하였다. 다른 학자들[각주:71]은 이대남이 여전히 연애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인셀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인셀 중에도 적극적인 연애를 주장하는 사람들(가령 레드필 추종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각주:72]

이슬람 교는 가장 빠른 시기에 가장 널리 확산된 종교 중 하나이다. 이슬람 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제국도 100년이라는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중동을 통일하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진출했다. 이슬람인은 세상을 이슬람 교와 이슬람의 기준에 따르는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 이슬람의 집)과 이슬람 세력 바깥에 있는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 전쟁의 집)로 나누고, 선교와 전쟁을 통해 다르 알-하르브를 계속해서 정복해 나갔다. 그 결과 거의 천년 남짓한 기간동안 중동은 다르 알-이슬람이 되었다.

 

이슬람의 확장은 가히 놀라운 일이다. 이슬람 교가 탄생하고 100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장악하였다. 711년에는 이베리아에 상륙하여 이슬람 왕국을 세웠고, 732년에는 9만의 군대를 끌고 프랑크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751년에는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 당과도 전쟁을 치렀다. 758년에는 아랍 해적이 중국 광둥에 도달했고,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말라카 해협까지 확산되었다. 라틴(lateen)이라 불리는 삼각돛을 달았던 이들의 배는 역풍에서도 수월한 항해가 가능했고, 광둥에서 마다가스카까지 인도양 전역을 누볐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니 시작된 이후에도 이슬람은 서구의 강자였다. 특히 지중해는 1492년 그라나다 함락 전까지 이슬람의 바다였다. 서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은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넘나들었고,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수많은 항해용어가 만들어졌다. 1529년에는 중부 유럽의 빈까지 쳐들어가 기독교 세력을 위협하기도 하였고, 1571년 레판토 해전까지 지중해에서 이들을 꺾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동시기에 인도와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면서 이뤄졌던 일이다.

 

이슬람의 세계탐험

이슬람의 확장은 단순히 영토에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인은 당시 그 누구보다도 넓은 세계를 알고 있었다. 여행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알 사파르, 알 자파르'라는 이슬람 격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이슬람이 낳은 수많은 탐험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중 정점에 선 인물이 이븐 바투타인데, 마그레브(북서 북아프리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이븐 바투타(Ibn Battutah)는 22세까지 동아프리카와 인도, 아랍, 페르시아, 킵차크를 여행하였다. 그리고 1352년 이슬람과 말리를 잇는 교역로를 개척하였고, 바다를 통해 수마트라와 자바, 광둥, 항저우, 베이징에도 도달했다(이는 그의 여행기 <Rihlah>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22세가 되던 1325년에 소금이 금보다 서너배는 비싸다는 말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페스에 있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사하라를 넘어 말리에 이르렀다. 왈라타에서 처음으로 말리의 관리를 만난 바투타는 말리인이 '예의가 없고 백인을 멸시해서 그곳에 간 것을 후회'했다고 썼다. 또한 말리의 음식을 역겨워했고, 성적으로 개방된 말리 여성에 놀랐다. 그리고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식인종에게 기겁을 하였다. 하지만 쿠란을 배울때까지 아이를 사슬에 묶어두는 모습에는 여느 이슬람처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븐 바투타가 주로 육로에 있었다면, '바다의 사자' 이븐 마지드(Ibn Majid)는 바다를 애용했다. 항해 가문의 후손인 마지드는 <항해지침서(kitabal-fawa'id)>를 저술하여 홍해와 인도양에서 항해하는 법에 대한 수많은 노하우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심지어 지금도 몇몇 해역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배운 이슬람인은 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슬람인은 가장 먼저 한국을 발견한 서구인이기도 하였다. 알 이드리시는 신라시대부터 한반도를 지도에 넣었는데,[각주:73] 반면 유럽은 1562년에야 한반도가 지도에 등장하고 1569년이 되서야 corea가(그것도 반도가 아닌 섬으로) 메르카토르 지도에 들어왔다. 신라에 대한 이슬람의 기록은 966년부터 등장하는데, 지리학자 마크디시(al-maqdishi)[각주:74]는 자신의 저서 <창세와 역사서>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당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고려와 거래했던 아랍 상인에 의해 korea가 한국의 영어 명칭으로 굳어졌다.

 

팽창의 배경

이슬람 사상가 이븐 할둔은 이슬람 문명의 팽창 동력은 아사비야(asabiyya)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사비야는 이슬람 세계에서의 집단의식을 뜻하는 말로, 각 부족 안에서 사회경제적 결속을 다지는 응집력, 사상과 행동의 일체감, 단일한 힘이나 의식 등을 의미한다. 아랍인에게 아사비야는 침략과 방어의 기본 단위였고 공동체의 단결과 집단의 안전을 도모하고 유지하는 주된 방법이었다.[각주:75] 할둔은 이슬람이 부족 단위에 한정되어 있던 아사비야를 문명 전체로 확산시킴으로서 그러한 팽창을 이뤄냈다고 해석하였다.

 

또는 무함마드가 상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이슬람의 팽창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무함마드는 상인이었고, 유목민적인 부족 문화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만든 이슬람 교도 상인의 지위를 높이고 상인의 이동을 증진하였다. 낙타와 말을 탄 상인은 세계 각지로 진출하였고, 때로는 기병이 되어 침략에 나서기도 하였다. 오직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기병단을 만들었던 마르텔만이 이러한 기병을 막을 수 있었다.

 

이슬람 팽창의 배경에는 그 다양성도 있다. 초기 이슬람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이슬람의 땅으로 만들었지만,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오히려 이슬람에 포섭하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바로 페르시아에서 이슬람으로 유입된 문화유산이다.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인을 여러 제도를 통해 복속하고 이슬람 문명에 융합시킴으로서 이슬람은 한때 중동은 물론 서구권 전체를 호령하는 문명의 표준이 될 수 있었다.

 

 

천손 강림 신화

하늘에서 신성한 존재가 내려와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했다는 신화는 곳곳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신성한 존재가 직접 강림하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지상에 태어나 공동체를 건립했다는 믿음은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신화에서 우리 공동체는 신적 존재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을 철저히 대비시켜서 인간의 복종을 강조하는 유대교와 달리 자기 공동체에도 신성을 부여한다.

 

동아시아의 천손 강림 신화는 신적 존재가 직접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 신화나,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에 의해 신적 존재가 잉태되어 태어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내려왔다는 감응 신화의 두 종류가 있다. 둘 다 하늘을 신성시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감응 신화는 코리약(koryak) 족이나 길리약(gilyak) 족, 그리고 웅녀 신앙을 포함하는 고아시아족(paleo-asiatics)에게서 나타나는 신화인 반면[각주:76] 천강 신화는 보다 후대에 나타난 유목민 문화에서 나타난다.

 

천강 신화

천강 신화란 신성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나 신적 존재가 자신의 부락이나 민족, 국가를 건립했다는 신화를 말한다. 단군 신화가 대표적인 천강 신화이며, 해모수 신화와 같은 다른 한국 신화는 물론이고 고차족 신화와 부랴트족 신화, 그리고 일본의 아마테라스 강림까지 아시아 전반에 퍼져 있다. 이러한 천강 신화는 일반적으로 북아시아의 유목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유목민 세력 일부가 한국과 일본으로 이주하여 지배층으로 자리하면서 이러한 신화 또한 해당 지역의 신화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각주:77]

 

 

1991년 흑인 폭동의 원인

1991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은 동년 3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이 원인이다. 과속으로 인해 검거된 흑인 로드니 킹이 4명의 백인경찰에게 무차별 구타당한 일은 인근 주민이 촬영해 TV로 방영되었다. 폭행 경찰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백인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 판결이 발단이 되어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이후 로스엔젤레스 경찰국장은 사임했고 폭행 경찰은 재기소되어 2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91년에 발생한 흑인 폭동은 92년에 또다시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3월 16일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의 상점에서 흑인 소냐 라타샤 할린스가 절도 시비로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두순자가 총을 발사해 라타샤를 사살했다. 이 사건이 다시 흑인사회를 자극해 4월 29일부터 7일간 폭동이 이어졌고 90%의 한인업소를 포함한 1만여개의 피해업소를 낳았다.

 

흑인 폭동은 기존에 존재하던 흑백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다. 그러나 2차 폭동은 1차 폭동과 달리 한인이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라타샤 사건을 보도할때 언론은 흑인 폭도에 대항해 자신들의 가게를 지키려는 한인들을 집중보도하여 흑인과 한인이 대립하는 듯한 구도를 보여주었다. 실제 한인이 보유했던 총기 대다수가 비비탄총임을 고려했을때 혹자는 2차 폭동이 흑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인이 제물로 바쳐진 경우로 본다.

 

 

견조 신화

견조 신화란 자신의 공동체가 개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신화이다. 한반도는 웅조 신화나 난생 신화가 대다수이지만 견조 신화도 존재하는데, 특이한 것은 견조 신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이 아니라 만주족이라는 점이다. 한국인 사이에서 전래되었던 신화에서 만주족은 개의 후손이며, 개가 낳은 자식이 사람으로 탈바꿈하려는 찰나에 발생한 사고로 인해 완전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 이에 따르면 만주족의 장발은 개의 털가족이 남은 흔적이다.[각주:78]

 

 

기독교 종말론

기독교는 인간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마침내 신(과 선함)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리라는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최후에는 질서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가 무질서의 신인 앙그라 마이뉴를 꺾는다고 주장하는 조로아스터 교[각주:79]와 그 후신인 유대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창설된 초기부터 곧 인간세상(로마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종말을 물리적 구원이 아니라 영적 구원으로 해석하자고 교리를 정립할 때까지 계속해서 성행하였다.[각주:80]

 

비록 종말 시점을 계산하거나 지금이 바로 종말의 시대라고 주장하는 움직임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추종자의 탄압으로 사그라들었지만,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지속해서 나타났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믿음은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이후 유럽사회가 급변하면서 다시 성행하였다. 당시 예언가들은 마침내 종말이 도래할 것이고 천사 교황이 내려와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교황청과 많은 정치인이 이를 이용하였다.[각주:81] 근세에는 종말론 신앙이 오컬트나 과학의 사상적 토양이 되기도 하였고,[각주:82] 지금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종말론 신앙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다.[각주:83]

 

 

인류학에서의 남자다움

남자다움이 나타나는 양상은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러한 공통점 중 하나는 남자다움이 적극적인 활동을 타인에게 공공연하게 보여줌으로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각주:84] 삼부루(samburu)[각주:85]와 마사이(masai) 사회[각주:86]에서 남자아이는 스스로 숫소를 죽인 다음에야 진정한 남자로 인정받으며, !쿵족에서는 영양을 죽여야 한다.[각주:87] 뉴기니의 심바리(simbari, sambia) 족에서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유혈이 낭자한 의식을 견뎌야 하고,[각주:88] 오순절 섬(pentecost)에서는 지상에서 몇십 센티미터 떨어진 곳까지 번지점프를 해야하며,[각주:89] 아마존의 마위(Mawe, Satere-Mawe) 족 소년들은 30분동안 총알개미의 공격을 참아내야 남자로 인정받는다.[각주:90] 이처럼 많은 소년의 성인식은 일종의 남자다움을 공공연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precarious manhood 이론[각주:91]으로 이어졌다.

 

 

네미 숲의 사제왕 의식[각주:92]

네미 숲은 로마 인근에 위치한 숲으로, 로마시대에 이 숲은 숲의 여신 디아나를 섬기는 종교적 의식의 무대였다. 이 의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디아나를 숭배했는데, 이들은 디아나가 사냥꾼이자, 불의 여신이면서, 여성의 다산과 임신한 사람의 순산을 도왔다고 믿었다. 디아나 숭배 의식은 8월 13일에 열렸는데, 이때 로마인들은 숲을 무수한 횃불로 비추고 자신들의 집에서도 화롯불 근처에서 비슷한 의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불에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황족의 평안을 기원했으며, 오른손에 횃불을 든 여신의 청동상이 이곳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프레이저는 당시 디아나가 로마의 베스타(vesta)와도 동일시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의식은 디아나를 섬긴 동시에 에게리아 신도 섬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의 정령인 에게리아는 마찬가지로 순산을 돕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으며, 누마 왕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누마 왕이 에게리아와 결혼하면서 로마의 법이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플루타르크는 이 전설이 엔디미온 설화처럼 인간과 여신이 서로 사랑하는 신화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로마의 베스타의 성처녀들은 매일 에게리아가 거주한다고 여겨지는 샘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로 운반하여 베스타의 신전을 씼었는데, 로마 말기에 가면 그 동굴은 대리석으로 감싸졌고 인근은 빈민가가 되었다고 한다. 프레이저는 둘의 기능적 유사성을 들어 에게리아가 디아나의 변종이라고 주장했다.

 

에게리아와 달리 비르비우스는 확연히 디아나와 대비된다. 비르비우스는 순결하고 잘생긴 청년인데, 켄타우로스 키론에게 사냥을 배우고 아르테미스(디아나)와 함께 산에서 사냥꾼으로 살았다고 전해지는 존재로 그리스의 히폴리투스의 변종으로 여겨진다. 신화에 따르면 아프로디테의 모략으로 비르비우스의 계모 파에드라가 그에게 구애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파에드라가 아버지 테세우스에게 비르비우스를 벌해달라고 빌었고, 마침내 포세이돈에 의해 마차에서 떨어져 그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의 부탁을 받은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로 그를 되살리면서 그는 부활하고, 주피터의 눈을 피해 도망치다가 네미 숲까지 와서 에게리아의 가호 아래 숨고 디아나의 신전을 지었다. 이후 비르비우스는 아이네이아스와 싸우는 라틴 군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비르비우스 신앙은 캄파니아에도 존재했으며, 아리키아에서는 말이 비르비우스를 죽였다는 이유로 말을 숲과 성소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비르비우스 조각상을 만지는 것은 불법이었고, 비르비우스를 태양과 동일시하는 신앙도 존재했다. 이러한 신앙은 로마 이후에도 이어져서, 카톨릭이 퍼진 후 비르비우스는 8월 13일에 말발굽에 밟혀 사망한 성 히폴리투스로 추앙받게 된다. 또한 비르비우스는 디아나와 결혼한 존재로도 여겨졌으며, 사제이자 왕으로 추앙된 특정 인물이 비르비우스의 화신으로 여겨져 숭배되었다.

 

이 의식이 특이한 점은, 사제왕은 숭배받으면서도 동시에 의식을 통해 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네미 숲에서 의식이 거행되면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맞이해야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칼을 들고 공격해왔을때, 그가 이기면 그는 계속해서 사제왕으로 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전자의 칼을 죽고 도전자가 새로운 사제왕이 된다. 이렇게 사제왕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네미 숲의 성소에 위치한 성스러운 나무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야 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으나 도망노예들에게는 허용되었다.

 

프레이저는 오레스테스 신화가 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오레스테스 신화에 따르면 오레스테스는 크림 반도의 왕 토아스를 살해한 후 누이와 함께 이탈리아로 도주했는데, 그 때 크림에서 숭배되던 디아나의 조각상을 장작 속에 숨겨서 가져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뼈는 아리키아(구 라티움 동맹의 일원)에서 로마로 옮겨졌고, 카피톨린 동산의 콩코드 신전 곁, 사투르누스 신전 앞에 묻혔다. 

 

 

다문화와 범죄

문화가 다르다는 말은 단순히 인종, 민족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젠더, 성적 취향에 대한 인식도 다를수 있음을 말한다. 국제적 인구이동이 늘어나면서 여러 국가에서 다문화 경향이 증가하고 있는데, 미국은 현재 187개의 언어가 국내에 통용되고 있으며 비록 백인이 72%지만 2050년에는 소수민족이 전체인구의 50%를 차지하리라고 보고 있다. 인구이동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민은 모국에서의 경제적 가난이나 탄압을 피해 온 불법이민이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에 의해 노동력 착취나 사기,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된다.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문화적 배경은 범죄에 큰 영향을 준다. 미국에서 조사된 통계에 따르면 인종집단 중 강도를 제외하고 인디언 집단이 피해자 비율이 제일 높았다. 또한 흑인에 비해 인디언 집단은 자살률도 매우 높았다. 인디언의 강력범죄 피해율은 타 인종을 합한 것과 필적했는데 1000명당 52명의 인디언이 강력범죄를 경험했다. 이는 흑인과 비교하더라도 유달리 경제사정이 열악한 인디언 집단의 특성으로 인한 결과로 보이며, 비슷하게 대부분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시아인이 제일 강력범죄 비율이 낮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각주:93]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는 언어와 민족, 종교, 문화가 비슷하며 실제로 2022년의 전쟁 이전까지 두 나라의 국민은 다양한 인간관계로 얽혀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두 나라가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시초는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러시아의 실질적인 전신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모스크바 대공국이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으며, 15세기에 들어서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반발한 카자크(코자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국가를 건국하고자 하였다.

 

 

마르두크

마르두크(Marduk,마르둑)는 바빌로니아 신화의 신으로 주신의 위치를 담당하고 있다. 본래 마르두크는 바빌론에 거주하던 아모리족의 주신이었는데, 함무라비 시기에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면서 바빌로니아 신화의 주신이 되었고, 수메르 신화의 주신인 벨 엔릴과 합쳐져 벨 마르두크라 불리며 ‘신들의 왕’으로 오랫동안 숭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르두크에게 인간과 세상의 창조주이자 혼돈과 대립하여 질서를 수립한 영웅의 속성이 부여되었다. 마르두크 신앙은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되어 헬레니즘 시대까지 이어졌다.

 

바빌로니아 왕국 시기에 수정된 신화에서 마르두크는 악신 티아마트(tiamat)를 쓰러트린 영웅으로 묘사된다. 수메르 신화에서 티아마트는 소금물을 담당하는 용신으로, 신선한 물의 신인 압수(apsu)와 결혼하여 많은 신들을 낳는데, 신들이 활기차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좋지 않게 본 압수가 신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자 잔잔한 파도와 지혜의 신 에아(ea)가 압수를 살해한다. 압수의 사망에 분노한 티아마트는 괴물을 만들어 신들을 공격하는데, 이때 신들의 대표자로 나타난 마르두크가 괴물들을 처치하고 종국에는 티아마트를 처치한다. 마르두크는 티아마트를 처치하면서 티아마트의 시체를 두쪽으로 나눠 하나로는 하늘의 궁창을, 다른 하나로는 땅의 궁창을 만든다. 이로써 세상이 창조되고, 이후 마르두크는 에아의 도움으로 티아마트의 2번째 남편인 킹수(kingsu)의 피와 흙을 섞어 신들에게 봉사할 인간을 만들어낸다.[각주:94] 수메르 신화에서 마르두크는 우주를 창조하고, 신들의 거처를 지어주고, 병을 치료하는 등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여 50개의 칭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아내는 사르파니투, 아들은 문장의 신 나부이다.

 

 

문화의 젠더화

교양과 에티켓이 성별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주장은 19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가령 식사예절(테이블 매너, table manner)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정립되어 유럽의 교양이 되어갔지만, 남성과 다른 여성만의 식사예절을 언급한 문헌은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 가령 1898년에 출간된 <Manners and Rules of Good Society>[각주:95]에서는 숙녀는 남성과 달리 자극적인 요리를 먹어서는 안되며, 디너파티에서 치즈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세기 이전에는 남녀 의상에 있어서 알맞는 색이 존재하지 않아 남녀 모두 파란색과 분홍색 옷을 혼용하여 입었지만, 19세기 중반부터 파란색과 빨강 계열의 색을 특정 성별의 색으로 지칭하는 출판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성장에서 일부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19세기 중반은 귀족사회의 식사예절이 시민사회에도 상당부분 도입되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기술의 발달로 일반인들도 원하는 색의 옷을 입을수 있게 된 시대이다.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

전간기 동안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지만,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의 고립주의의 꿈은 무너졌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세계 곳곳을 미국적 표준으로 만들고 공산 진영을 막아내기 위해 새로운 국제정책을 고안해야 했다.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목표는 2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각주:96]  하나는 특정 지역의 국가들이 어떤 강대국에도 종속되지 않은채로[각주:97]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하여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동은 미국의 힘이 아니라 지역내 국가간 협력을 통해 이뤄져야 했으며,  유럽공동체와 한일 공조가 미국의 이러한 이상의 실현이었다.

 

미국이 추구한 두번째 목표는 바로 이렇게 통합된 체계들이 미국적 표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이 자기 지역의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면서도, 그 질서가 미국적 표준을 받아들이기를 바랬다.[각주:98] 특히 미국은 미국적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이 전세계에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였다. 서로 정치적으로는 적대할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최근까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 맥도널드가 흥하는 한일이 바로 이러한 모습의 예라고 하겠다.

 
 

미국의 조세수입

미국인의 세금은 두곳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들의 세금은 먼저 연방정부로 흘러가고, 연방정부에서 세입의 일부를 다시 주정부에 분배한다. 연방정부의 세입은 소득세가 가장 비중이 크고(47%), 사회보험에 들어가는 급여세(34%)와 법인세(10%)가 뒤를 잇는다. 주정부의 세입은 연방정부에서 주정부에 분배하는 금액이 가장 비중이 크며(22%), 주정부에서 독자적으로 거두는 판매세(18%)와 재산세(17%)가 뒤를 잇는다. 주정부에서 소득에 추가세금을 부과하는 경우 발생하는 소득세도 주정부에 들어가고(13%), 통행료와 허가증 발급비 등 잡다한 수익이 나머지 30%를 차지한다.

 

 

사회복지학(social welfare)[각주:99]

사회복지학은 사회적 욕구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또는 민간이 제공하는 정책 및 서비스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현대 산업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사회복지는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는데, 과거에는 사회복지가 상호부조와 인보(낙후지역에서 의료나 교육을 지원하는 행위), 자선 등을 의미했지만 현재는 사회사업과 사회봉사, 사회보장이나 복지 관련 사회정책들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두 정의 모두 '사회'와 '복지'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각주:100] 

 

social welfare에서 welfare란 '평안히 잘 지내는 상태', 즉 '건강, 행복 및 번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하여 지역사회나 단체에서 들이는 조직적인 노력을 복지사업(welfare work)이라 부른다. 여기에 '사회'를 의미하는 social이 붙으면서 social welfare는 '사회적으로 행복한 이상적인 인간생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사회사업'이라는 용어는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증가한 빈곤과 고아, 과부, 상이군인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 외국의 민간 단체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었다. 이후 여러 대학에 사회사업학과가 설치되고 다양한 기관과 시설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지식을 요구하면서 한국에 사회복지학의 싹이 텄다. 한편 사회사업이 단순히 빈민구제나 고아원 운영과 동일시되어 전문적인 사회복지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76년 한국사회사업대학협의회에서 사회사업이라는 명칭을 '사회복지'로 변경하고 점차 이 호칭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회복지는 이념적 의미와 실천적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념적으로 사회복지는 빈곤이나 불행이 없는 사회, 국민 대다수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wickenden[각주:101]은 이처럼 사회복지가 지향하는 이념적 지향을 1)풍요의 이념, 2)상호관계의 이념, 3)개발계획의 이념으로 정리하였다. 한편 사회복지는 실천적 의미도 가지는데, 실천적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위에서 제시된 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실천하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처럼 사회복지학은 특정 이념을 추구하는 인문학이자 이를 위해 실천적이고 다소 과학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응용학문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장애인, 노인, 아동과 같이 사회생활에서 곤란이나 장애를 가진 자들을 보호, 육성, 지도, 치료, 재활하는 것을 돕는 서비스로, 사회사업(social work) 또는 사회복지사업의 동의어이다. 넓은 의미의 사회복지는 모든 국민들에게 국민 최저한(national minimum)이 보장되도록 개인, 가족 및 집단을 지원하는 사회정책, 사회보장, 보건, 의료, 주택, 고용, 교육 등의 서비스를 의미한다. 가장 넓은 의미의 사회복지는 국민의 사회생활 안정과 발전에 공헌하는 토목, 건축, 재정, 금융, 군사, 치안 등의 사회제도들을 모두 이르는 말인데, 이러한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다.

 

 

새의 상징적 의미

고대인은 높은 것을 신성한 것과 동일시 했다. 그래서 하늘은 가장 격이 높은 신으로 숭배되었고, 많은 신화에서 주신은 태양처럼 하늘에 있었다.[각주:102] 그리고 이 하늘에 접근할 수 있는 새는 천상계로 다가갈 수 있는, 즉 지상을 초월하는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새를 최고의 식재료로 대접하는 문화도 여기서 나왔고, 독수리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특권층의 상징이었으며 책 '사탄의 종말'에서는 새가 천사로 변하기도 한다.[각주:103] 심지어 새가 성적인 것을 나타낼 때도 새는 에로스보다는 필리아에 가까웠다.[각주:104]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는 故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故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이 있다. 이중 질베르 뒤랑은 저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통해 신화적 이미지의 정립을 시도했다. 필자는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상나라(은)

상(商)은 BC 1600년에서 BC 1046년에 중국에 존재했던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장사꾼을 의미하는 단어 '상인'은 상 멸망 후 상나라인들이 일정한 거처없이 장사로 먹고살게되자 장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상나라인->상인이라 부르면서 생겨났다.[각주:105]

 

 

서먼의 모병개혁[각주:106]

1973년 미군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베트남전으로 인해 일어난 징병제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모병제의 문제는, 강제로 입대했어야할 양질의 인재들이 군대에서 빠져나가면서 일어나는 질의 저하였다. 70년대 이후 미군의 질적 저하는 여러 정책 결정자들을 고민하게 하였으며, 닉슨은 징병제를 다시금 고려하려고 하였다. 그러다 79년 11월,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메이어(Edward C. Meyer)는 맥스웰 서먼(Maxwell Thurman) 소장을 TRADOC(미 육군 교육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서먼은 우수하지 않은 군인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했고,[각주:107] 군인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관적이고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다. 먼저 그는 모병관 평가기준에 입대군인의 수뿐만 아니라 학력이나 입대 후 성과와 같은 질적 정보도 포함하도록 지시했고, 이를 통해 입대군인의 고졸 비율을 80년의 91%에서 87년 91%까지 끌어올렸다. 또한 육군에서 사용하는 지능검사인 ASVAB의 품질에 논란이 생기자 즉각적으로 개량에 돌입했고, 개량된 검사에서 50% 이하에 해당하는 지원자들을 모두 잘라버렸다. 

 

서먼은 나름의 시장조사를 통해 기술(skill)을 배우려고 하거나 대학 학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이 잠재적인 입대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고받은 서먼은, 미시시피 상원의원 소니 몽고메리(Sonny Montgomery)와 적극 협력하여 국방부로부터 많은 자금을 끌어와 이들을 유인할만큼 큰 임금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모병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간부들이 60일간 개인적으로 모병을 하도록 하여 현장감각을 익히게 하였고, 타 직별의 우수한 부사관들을 일정 기간동안 모병업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서먼 개인의 직관이 아닌, 철저한 연구를 통한 심도깊은 검토에 근거하였다. 서먼은 경험적 분석이 정책을 만드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다양한 기관을 마련하였다. 그는 정책을 결정하면서 랜드 연구소와 심리학자/사회학자 중심의 ARI(Army Research Institute), 국방대학 산하의 OEMA(Office of Economic and Manpower Analysis)에 많이 의지했으며, 특히 랜드 연구소는 연구결과를 서먼에게 대면으로 보고하였다.

 

초기 개혁이 성과를 내자 서먼은 이를 유지하고 보강하는 정책들을 입안하였다. ASVAB의 개량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서먼은 훈련을 개량하는데도 많은 신경을 써서, 훈련 성과의 측정과 지속적인 평가 등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노력에는 포트 어윈의 nationa training center의 설립도 포함된다. 또한 간부들이 군에 남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군가족이 보고되자, 군가족에 대한 복지를 확대하였다. 한때 기업에서도 응용하여 사용했던 'be all you can be'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서먼 하에서 나왔으며, 그 유명세에 걸맞게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은 미군의 질을 끌어올려, 빅파이브(big five)로 대표되는 미군의 첨단장비 5종(M1 에이브람스 전차, 아파치 공격헬기, 패트리어트 대공미사일, M2 브래들리 보병전투차, 블랙호크 헬기)에 장병들이 숙달되는데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소련 여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에서는 100만명에 가까운 여성이 군에 입대하였고, 다양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많은 여군의 참여는 2차 대전기 다른 국가들에서도 두드러졌으나, 급박한 전쟁 상황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결합되어 소련 여군은 일반적인 여군보다 좀 더 많은 수가 참여하고, 더 다양한 직군에 참여하였다. 최근까지 소련 여군의 활약은 부차적으로만 다뤄지거나 사회에서 금기시되었으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소련 여군의 인터뷰를 모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출간한 이후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알렉시예비치는 그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200명 가령의 2차대전 당시 소련 여군을 인터뷰하여 인터뷰 기록을 수록하였다. 그가 수록한 인터뷰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련 여군은 이데올로기적 이유나 가족/지인의 복수를 목적으로 군에 입대하였다. 입대시 이들의 평균 연령은 15-19세였고, 군 정치위원회를 통해 입대를 신청하였다. 1942년 전에 이들의 입대 요청은 대부분 1차적으로 반려되었는데, 이는 여성이 끔찍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군인들의 판단이었다.

 

많은 소련 여군은 주로 간호병과 위생병으로 종사하였다. 이러한 보직은 비록 비전투병과로 분류되나 급박한 상황에 의해 이들도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고, 어떤 남성은 부상병을 지키기 위해 기관단총을 쏘며 독일군과 교전한 일군의 여군 위생병들의 사례를 보고하였다. 이외에 많은 여군들이 저격수와 정찰병, 고사포병, 세탁병으로 근무하였으며, 공병이나 취사병으로 근무한 경우도 존재했다. 또한 적지 않은 여군들이 게릴라 조직에 참여하면서 비정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여군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는 여러 측면을 가진다. 초기에 남군은 여군을 무시했으나, 짧은 시간 이내에 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위생병의 병과적 특성(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부상병을 구조해야 한다)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참전한 소련 여군들은 남성이 자신들에게 매우 친절하였으나, 동시에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도 존재했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남군은 여군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러시아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여군 역시 러시아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았으나, 영향의 정도는 비일관적이다.

 

비록 이들은 자의로 군에 참여하였으나, 여성적 특성이라고 간주되는 몇가지 행동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군에서도 옷과 구두 등 여성적인 용품들을 비밀리에 보관하거나, 머리를 꾸미거나, 수를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여군은 총부리에 꽃을 꽃았다가 제재를 당했다고 보고하였고, 야생동물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사냥한 고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보고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대개 군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전후 이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경력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오직 소수의 유명인사들만이 자신의 경력을 선전했으며, 많은 여군은 드센 여성이라는 부정적 인식과 군대에서 남자들과 불건전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의심 속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이들은 집에서 쫓겨나거나, 면박을 당하거나, 결혼 상대로 거절되었다. 또한 많은 여군이 PTSD 증세를 호소했으며, 증세는 장기적으로 남아있거나 심지어 인터뷰가 시행되는 시점에도 유지되었다.

 

이 분야의 주요 저서로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알렉시예비치,박은정 역,문학동네,2015)>가 있다. 이 책은 소련 여군에 대해 미시사적 접근을 취한 선구적인 업적 중 하나이다.

 

 

식문화 연구

식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 하나이며, 때문에 여러 사회과학자들도 인간의 식생활에 대해서 여러 연구를 진행하였다. 가령 박미성과 안병일[각주:108]은 경제성장과 여성의 사회 진출, 핵가족화, 1인가구의 증가가 식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으며, 노정미와 유영상[각주:109]은 서울 소재 대학생의 외식실태를 조사하여 40%의 대학생이 외식을 하는 대신 도시락으로 식사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식생활에 대한 연구는 보통 영양학적 측면에서 연구되었는데, 가령 노정미와 유영상[각주:110]의 연구는 학생들의 식생활이 가진 영양학적 측면을 분석해서, 이들이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잦은 소화기 질환과 영양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는 다른 연구[각주:111]에서도 지지되었는데, 이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은 수업시간과 귀찮음으로 인해 점심식사가 불규칙했다.

 

해외에서도 영양과 관련된 측면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가령 한 연구[각주:112]는 미국 대학생들이 얼마나 영양분을 섭취하는지에 대해 조사했는데, 연구에 따르면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보다 학교 밖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단백질을 더 많이 섭취했고 콜레스테롤 수치는 더 낮았다. 다른 연구[각주:113]에서는 대학 입학 후의 식생활 변화를 분석해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5가지 미만의 과일과 채소를 먹으며 50% 이상이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대학 재학기간 중의 체중 증가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전예숙과 최미경, 배윤정[각주:114]은 대학생들의 야식에 대해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자취생이나 자기 집에 사는 학생이 아니라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야식을 더 자주 섭취했다. 이들은 또한 야식을 더 적은 돈으로 더 늦게 먹었으며, 치킨과 분식도 더 선호했다. 연구자는 40대 이상부터 주요 사망원인이 만성질환이라는 2014년자 KOSIS의 한국인 사망 통계를 언급하며, 야식과 같은 불규칙한 식사가 이러한 만성질환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외에, 사회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은 식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질적으로(또는 비경험적으로) 탐구하였다. 학자들은 식사가 사회적 결속을 도모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는데,[각주:115] 그 중 어떤 학자들은 식사가 국가의 유지에도 기여한다고 주장하는데, 가령 영국인들은 다양한 음식을 먹지만 고기와 감자, 야채(그리고 최근에는 파스타)로 구성된 식단이 지속적이고 중요하게 나타난다.[각주:116] 드볼트(Devault)는 이러한 식사가 영국에서 일종의 문화적 기준이 된다고 해석했다.[각주:117]

 

또한 사회과학자들은 식사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도 주장한다. 이용숙과 이수현[각주:118]은 대학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학생들의 점심식사 방식과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를 탐구하여 우리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선진국 시민에게 대학생 시절은 본인이 점심식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시절이며,[각주:119] 그만큼 불안정한 식습관이 나타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각주:120] 이는 다시 말하면 식사에 대해 개개인이 가지는 의미나 역동이 식사행동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은 수도권의 30여개 대학에서 60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참여관찰, 면담을 실시하여 대학생들의 점심식사 방식과 이들이 점심식사에 부여하는 의미를 조사하였다. 참여관찰과 면담이 포함된 이유는 이들이 조사하는 문제(의미)가 질적 탐구에 적합하기 때문으로, 이미 인류학자들은 대학생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질적 연구를 이전부터 수행해 왔다.[각주:121]

 

그 결과 대학생의 31.5%는 점심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이유로는 '시간이 없다'와 '맛있는 메뉴가 없다'가 주로 응답되었다. 연구자들은 많은 학생들이 시간과 돈을 아끼기 위해 '때우는 점심'을 하고 있으며, 이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그러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그러하다고 보고하였다. 점심식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삶의 행복/즐거움/오아시스라는 응답(29.7%)이 가장 많았고 힘/에너지/삶의 원동력(28.1%), 쉬는 시간/여유(22.7%), 소통시간(15.2%), 배를 채우는 것/살기 위해 먹는 것(12.5%), 스트레스/번거로움(7%)이 뒤를 이었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부여도 더 많이 응답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점심식사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부여가 너무 많다고 주장했는데, IMF 이후 가중된 경쟁과 경제난으로 인해 학생들이 시간조차도 자원으로 보게 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식사비용을 지불하는 방법

식문화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지만, 밖에서 여럿이 밥을 먹은 후 어떻게 비용을 나누는지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적다. 왜냐하면 외식이 발달한게 산업화 이후의 일이고,[각주:122] 따라서 외식에 대한 연구도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식사 후 식사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는 사회학에서 실시된 연구 2개가 전부이다.[각주:123] 

 

한국인의 경우 과거에는 집단으로 밥을 먹었고 비용도 집단으로 치렀다. 조선인들은 천렵이라는 행사를 열어 또래끼리 모여 물고기나 돼지, 닭을 먹기도 하였는데, 이때 비용은 주최자가 부담하였다.[각주:124] 또는 다른 경우처럼 계를 통해 식비를 치르기도 하였다.[각주:125] 실증연구에 따르면 현대에 와서는 지위가 높다고 간주되는 사람이 비용을 내는 경우가 많으며,[각주:126] 일반적으로 연결적 사회자본이 많을수록 상대방의 식비를 기꺼이 부담하려고 한다.[각주:127]

 

더치페이는 자신이 먹은 몫만큼 각자 비용을 계산하는 지불 방법으로, 자신이 먹은 만큼만 내거나, 식비를 인원수대로 나누거나, 서로 돌아가면서 식비를 모두 부담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2000년대 초반만 해 더치페이는 잘 선호되지 않았지만[각주:128] 20년대 이후에는 더치페이가 젊은 세대에서 많이 선호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더치페이는 '합리'적이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지만 반면 '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호되지 않는다고 보고되었으며, 때문에 연인이나 가족 사이거나 고지위자가 무리에 끼어있는 경우 덜 선호된다.

 

 

약물 규제[각주:129]

현재 많은 국가에서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 물질을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널리 용인된 술과 담배도 일정부분 제약을 받으며, 이를 제외한 마약은 대다수의 국가에서 심한 탄압을 받는다. 미국에서 일부 마약의 복용은 구속될 수 있는 사유이며, 마약사용으로 인해 구속된 사람은 1990년에서 2007년까지 94% 증가하였다.[각주:130](이는 검거율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 이후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실제 군대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마약은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며, 개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넓게 보면 마약은 국가생산력도 저하시키고, 비싼 마약을 사기 위해 마약중독자들은 범죄까지 저지른다. 마약을 규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나 이상하다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해 감소 접근(harm reduction approach)을 통해 마약을 통제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마약사용을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거나, 오히려 깨끗한 마약주사기를 제공하여 다른 질병의 감염을 막는다.[각주:131]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커피숍에서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마약자체를 탄압하는 대신 마약중독자들이 범죄나 과복용, 질병 등 부작용으로 인해 생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는 마약중독에 대한 벌이 마약 그 자체보다 해로워서는 안된다는 지미 카터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얼핏 들으면 미친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어쩌면 이 미친 소리가 해답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법무부에 따르면 정책 시행 이후 네덜란드의 마리화나 사용률은 증가하지 않았고 타국에 비해 낮다고 한다. 실제로 네덜란드와 샌프란시스코(미국)의 마약중독률을 비교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중독자가 더 많았다.[각주:132] 또한 알코올과 마리화나같은 경한 약물을 헤로인, 코카인같은 중한 마약과 구분하는 것은 마약중독의 심각성을 낮추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효성때문에 영국은 네덜란드에 뒤이어 해 감소 접근을 도입했으며, 미국도 오바마 행정부때 이를 고려하였다.#

 

한편 약물규제에서 규제하는 약물이 어디까지 해당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사실 마약과 알코올, 카페인은 모두 같은 향정신성 약물이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천차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우리가 규제해야 하는 약물의 범위를 어디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마리화나 합법화를 요구하는 NORML(National Organization for the Reform of Marijuana Laws)은 마리화나가 실제로 위험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규제되고 있다며 마리화나에 대한 규제 해체를 요구한다. 반면 음주운전에 반대하는 어머니 모임(Mothers Against Drunk Driving, MADD)은 알코올을 사회에서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어떤 주에서는 대마초가 합법이며, 1920년대 미국에서는 금주법을 시행하였다. 

 

 

엔릴과 엔키[각주:133]

엔릴과 엔키는 수메르 신화의 신으로, 수메르 신화에서 최고신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신이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최고의 신은 하늘의 신인 안이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안의 자손인 엔릴과 엔키가 행사한다. 이 중 엔릴은 엔키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상의 왕이자 땅의 신이 되었으며, 투쟁에서 패배한 엔키는 지하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한 신은 엔키이고 가장 지혜로운 신도 엔키이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엔릴 못지않게 엔키에게도 기도했다.

 

후에 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면서, 바빌로니아 신들도 수메르 신화에 흡수되었다. 이로 인해 아모리족의 주신이었던 마르두크가 엔릴의 자손이 되었다. 한편 수메르 신화가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다른 지역의 신화에도 이들의 흔적이 반영되었는데, 엔키는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바빌론 유수 당시 수메르 신화를 접한 유대인들은 후에 야훼를 유일신으로 승격하면서 엔릴과 엔키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차용하였다.

 

필자는 선신 엔키가 엔릴에게 져서 저승의 통치자가 되는 서사가 한국의 창세설화와 대별왕/소별왕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 3가지 이야기 모두에서 인간을 창조한 선신은 다른 신과의 투쟁에서 패해 저승으로 물러났고, 이리하여 공정한 판단은 저승의 몫으로 미뤄졌다. 대별왕/소별왕 이야기와 한국의 창세설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설명해 준다고 여겨지는데, 필자는 엔릴과 엔키의 투쟁도 이를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의 영혼

유대교에서 주장한 영혼은 현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영혼과 비슷하거나 다른 부분이 있으며, 심지어 현대 유대교와도 일부 다른 부분이 있다. 기원전 2세기경 모세5경이 막 편찬되었던 시기에 유대교에서는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지 않았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영혼이 신의 일부분이라고 믿었는데, 때문에 인간의 영혼도 신에게서 온 것이며 인간이 죽으면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또한 모든 영혼이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원칙적으로 육식을 해서는 안되나, 노아의 홍수 이우 맺어진 약속으로 인해 육식이 허용되었다고 믿었다.[각주:134] 이처럼 유한한 영혼 관념은 이후 그리스의 영지주의가 들어오면서 불멸하는 영혼 관념으로 대체된다.

 

 

한국의 영혼

한국인의 영혼관이 지금과 비슷해진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카톨릭 전파 이전에 한국인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고, 영혼이라는 독립적인 존재도 믿지 않았다. 성리학자들은 인간 정신의 본질이 성이라고 믿었고, 인간의 영혼은 리와 기의 결합인 혼백으로 사람이 죽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 동양의 일부였던 한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고 믿었다.[각주:135] 이러한 믿음은 카톨릭이 전파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기독교 전반의 확산과 함께 불멸하는 독립된 영혼 개념이 한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령

현대 한국에서 유령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가졌다고 여겨지지만, 전근대 유럽에서 유령은 사람보다는 훨씬 모호한 형태를 가졌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서구권에서 유령은 모호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이한 색깔이나 빛(주로 푸른 빛) 등의 흐리멍텅한 형태를 가졌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유령은 대부분의 경우 1분 이내로 사라졌으며, 벽이나 문을 통과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졌고 간혹 강한 향기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각주:136] [각주:137]

 

이렇듯 유령의 형태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만, 유령이 하얀 보자기를 쓰고 있다는 믿음은 전근대에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이는 당시 영국의 빈민층은 관을 살 돈이 없어 하얀 천으로 시체를 감싼 채 묻어야 했고, 부유층도 하얀 셔츠를 입힌 채 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각주:138] 때문에 밤에 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전근대 영국에서 유령으로 자주 오해되었는데, 한 일화[각주:139]에서 벽돌공 토마스 밀워드(Thomas Milward)는 하얀 작업복을 입고 밤에 퇴근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령으로 오인받았다. 이로 인해 밤중에 유령이 돌아다니고 이걸 본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는 루머가 퍼졌고, 결국 술에 취한 특별세 징수관(excise officer) 프랜시스 스미스(Francis Smith)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한편 빛이나 점에 불과했던 유령 목격담은 점차 사람 모양의 유령을 보았다는 주장으로 대체되었고, 그 수도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정령 신앙이 약해지는 것에 동반되었는데, 실제로 shropshire에서 떠돌았던 하얀 여성(white lady) 전설에서 하얀 여성은 처음에는 정령으로 간주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유령으로 여겨졌다.[각주:140] 이러한 추세는 과거에 정령으로 인식되었던 현상이 정령 신앙의 격하를 거치면서 유령이라는 새로운 대상으로 지각된 결과로 보인다.[각주:141]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유령의 목격은 유령을 믿는 사람에게서 더 자주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유령을 보았다는 빈도는 해당 사회의 믿음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근세 잉글랜드에서 유령에 대한 보고가 줄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 카톨릭에서는 연옥을 믿었고 유령도 모종의 이유로 연옥에서 돌아온 영혼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에 의해서 세워진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였고, 이와 연결된 유령에 대한 믿음도 이단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교리의 변화로 인해 성공회 설립 이후 잉글랜드에서의 유령 보고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각주:14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보고와 관심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유포 족의 물체 구분 방식(yupno)[각주:143]

유포(yupno) 족은 뉴기니에 거주하는 부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물체 구분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만물을 뜨거움(hot)과 차가움(cold)으로 나누는데, 뜨거운 사물은 매우 활동적이며 차가운 사물은 매우 안정적이고 변화가 없다. 유포 족에서는 만물이 뜨겁거나 차가운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으며 마법사가 이러한 상태를 변경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또한 완전히 뜨겁거나 차가워서는 안된다고 믿는데, 왜냐하면 너무 뜨거우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해지고 반면에 너무 차가우면 죽은듯이 가만히 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포 족에서는 뜨거움과 차가움 중간에 위치한 시원한(cool)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여겨진다.

 

실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물체 구분 기준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포 족 내의 여러 인구집단에서 5명씩을 선발해서 물체를 구분하는 과제를 시킨 결과, 오직 유포 족의 마법사만이 자발적으로 뜨거움-차가움 기준으로 물체를 나누었다. 노인들도 비슷하게 물체를 나누긴 했지만 물체를 뜨거움-차가움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개인마다 달랐으며,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의 쓰임을 기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대개 색깔로 물체를 나누었다. 가장 유포 적인 물체 구분은 오직 유포 족 사회의 사회화 중심인 마법사들만이 하고 있었다.

 

필자는 뜨거움-차가움 분류가 동양의 음양 구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유포 족의 주된 물체 구분 기준이 마법사들의 것이라는 점은, 마법사들이 유포 족 사회에서 유기적인 지식인 역할을 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집트 신화[각주:144]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여러 고대 이집트 기록 사이에 서로 다른 설화가 존재하지만 가장 주류인 설화는 혼돈의 물 속에서 육지가 솟아올랐다는 설이다. 다른 버전에서는 이를 원시 물길위로 연이 떠오르고 동시에 해가 떠올랐다고 묘사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혼란의 물길인 눈(Nun)에서 육지가 솟아났고, 그 육지에서 아툼(Atum, 후에는 태양신 라에 동화된다)이 태어난 후 그에게서 대기의 신 슈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Tefnut)가 나와 둘이서 세상의 순환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이 물에서 생겨났다는 신화는 마야를 비롯한 다른 문화에서도 나타나며, 이는 물이 상징하는 창조 속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역시 널리 알려진 다른 설화에 따르면 세상은 멤피스의 창조신 프타(Ptah)가 생각을 말로 내뱉자 창조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신화에서의 nun이 다른 신화의 가이아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지 생각한다. 파괴와 창조를 주관하는 물과, 파괴와 창조를 반복하는 자연은 서로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필자는 본다. 그리고 말을 통해 세상을 창조한 프타가 이후 유대교 발달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예상한다.

 

누트 여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https://namu.wiki/w/%EB%88%84%ED%8A%B8 필자는 하늘의 신이 여성으로 비정된 것이 설문대할망과 같은 거녀신의 흔적이라고 추정하며, 아마 상이집트의 잊혀진 신이라고 추측한다.

 

태양신 라는 누트의 아들로, 밤이 되면 어머니에게 잡아먹히고 아침이 오면 다시 태어난다. 한편 이집트는 달도 밤의 태양이라 여겼으며 누트의 왼쪽 눈을 '호루스의 눈'이라 부르며 달과 동일시했다. 이집트 신화의 달은 달의 여신 콘스(Kons)의 머리에 올려진 초승달과 보름달 한쌍으로 묘사된다. 

 

아피스 황소(Apis bull)는 다산의 신으로 창조의 신, 원시의 물, 나일 강의 범람 등과 결합한다. 이집트에서 황소는 생명 탄생의 상징이었으며, 많은 이집트 신왕국의 왕은 스스로를 '전능한 황소'나 '호루스의 황소'로 묘사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종교서적 '사자의 서'에서는 아피스를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빛을 내려주시는 지평선에서 일어난 살아 있는 영혼이시여, 그대에게 경배를.(중략) 빵과 맥주와 영혼의 이로움을 가져다주신 일곱 황소의 이름을 아느니."[각주:145]

 

테프누트는 생명을 불어넣는 이슬의 여신이다. 태초에 세상이 창조된 후 아툼에게서 태어났는데 후에 아툼은 태양신과 동일시된다. 대기의 신 슈와 함께 세계의 이원성과 순환을 담당하고 있다. 대체로 양의 머리를 하고 있으나 사자의 머리로 기록된 경우도 있으며 이집트 제 19왕조 파피루스를 보면 앙크(Ankh)와 함께 나타나 저승의 심판자로 묘사되고 있다. 

 

 

인류 식성의 진화

인류는 잡식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초식동물로 진화했는지 육식동물로 진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특히 과거 인류가 어떤 식성을 가졌는지와 연관된다. 벤 도르는 인류세 이전에는 적어도 호모 속에서는 육식이 우세했다고 주장한다.[각주:146] 일단 고고학적 증거들[각주:147]은 과거 인류종들도 전분을 비롯한 식물을 자주 섭취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수렵채집 부족(hunter-gather) 가설과 연계되어, 많은 학자들은 인류가 육식과 채식을 병행하며 살아왔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육식이 주된 식습관이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들[각주:148]에 따르면 과거 인류는 주로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육식동물이었으며, 이는 다양한 영양학적 흔적들과 육식동물과의 행동적 유사성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빙하기 이후 대형 동물이 꾸준히 감소하면서 대형 육식동물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는 생계유지가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최근에 진화시킨게 잡식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에 기초하여 수렵채집(hunter-gatherer) 부족 가설을 공격하는데, 실제로 많은 연구들이 여성 사냥꾼이 가능할수 있다는 다양한 증거를 아래처럼 제시하고 있다.

더보기

Bird, D. W., Codding, B. F., Bird, R. B., Zeanah, D. W., & Taylor, C. J. (2013). Megafauna in a continent of small game: Archaeological implications of Martu Camel hunting in Australia's Western Desert. Quaternary International, 297, 155–166.

Bird, R. B., & Power, E. A. (2015). Prosocial signaling and cooperation among Martu hunters. Evolution and Human Behavior, 36(5), 389-397.

Haas, R., Watson, J., Buonasera, T., Southon, J., Chen, J. C., Noe, S., ... & Parker, G. (2020). Female hunters of the early Americas. Science advances, 6(45), eabd0310.

Noss, A. J., & Hewlett, B. S. (2001). The contexts of female hunting in Central Africa. American Anthropologist, 103(4), 1024-1040.

Waguespack, N. M. (2005). The organization of male and female labor in foraging societies: Implications for early Paleoindian archaeology. American Anthropologist, 107(4), 666-676.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미키 벤 도르(Miki Ben-dor)가 있다. 벤 도르는 인류가 육식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을 밀고 있다.

 

 

저항문화 운동(반문화)[각주:149]

저항문화(대항문화) 운동은 6-70년대에 서구권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 기성세대의 문화에 저항하여 새로운 문화체계를 정립하려고 했던 문화 운동이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소득의 증가에 미치지 못한 문화의 지체에 불만을 가진 당시의 청년들은 기존 사회의 체제와 가치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체제, 새로운 가치를 주장했고, 프랑스에서 68혁명이 터지자 이러한 움직임이 서구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저항문화 운동은 페미니즘과 민권운동의 성장에 기여했으며, 신좌파가 탄생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전쟁의 기원

원시시대에도 전쟁은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고대의 사망자 상당수는 남자이며 두개골에 외상에 의한 파손이 있다, 일부는 창끝이 박혀 있었고, 피해자는 대개 남자이며 두개골과 왼쪽 흉골(가슴뼈)에 주로 손상을 입었다.[각주:150] 네안데르탈인에게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각주:151] 이러한 발굴은 캘리포니아에서 유럽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전통 한식

홉스봄의 테제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서,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한식은 사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한식이 아니다. 가령 불고기는 해방기에 나타났고, 조리방법도 일본식 간장을 사용하고 양파나 설탕으로 단 맛을 내는 등 너비아니와 같은 전통 한식 고기와는 조리법이 다르다. 나물은 전통 한식이 맞지만 조선시대에 나물은 주로 삶아서 먹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주로 민물생선을 먹었고 바다생선은 잘 먹지 않았다. 계란찜은 일본에서 파생된 음식이고, 배추김치는 20세기 초에 탄생했으며, 게장은 <규합총서>나 <청장관전서> 등에도 나오는 유서깊은 음식이지만 당대에는 지금과 달리 게장밥을 먹지 않았다.[각주:152]

 

 

정신전력의 중요성

군에 있어서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일찍이 있어왔다. 나폴레옹도 전쟁의 승리에서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정신적 무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전력이 전투에서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여러 역사적 전쟁을 대상으로 군사 전문가와 일반 장병이 정신전력의 정도를 평정하게 한 후 이 값이 승전 사례와 패전 사례에서 차이가 있는지 비교한 연구[각주:153]가 있다. 비록 이 연구에서는 승리한 전쟁에서 패배한 전쟁에서보다 정신전력 수준이 높았지만, 이 연구는 정신전력이 중요했다고 여겨지는(특히 한국에서) 전투를 취사선택하였고, 통계적 비교를 하지 않았으며 표본도 너무 적었다.

 

 

청년문화[각주:154]

청년문화는 보통 60-70년대에 서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문화 기조를 말한다. 당시 서구는 물질적 풍요와 보수적인 문화에 질린 사람들에 의해 반문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이끈 주요 세대가 청년들이었다. 청년문화의 주창자들은 공동체의 회복과 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좌파가 탄생하였다. 록과 포크 음악은 청년문화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본격적인 주류 음악이 되었고, 히피도 이때 출현했다. 청년문화는 한국에서 영향을 미쳐서 70년대 한국에 통기타나 청바지, 장발, 생맥주 등이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칼리오스트로의 생애[각주:155]

주세페 발사모(일명 칼리오스트로)는 1743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냈으나 추방당했으며, 이후에는 은 세공업자 마라노 밑에 있다가 64년 사기를 치고 메시나로 도망쳤다. 이때 그는 자신이 알토타스라는 신비로운 늙은 마술사의 배움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기의 공범이었고 범죄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던 아탄시오 신부와의 관계를 각색한 거짓이었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거치다가, 몰타에 정착한다. 칼리오스트로는 몰타 내륙의 메디나 시에 정착하여 성 요한 구호소의 하인으로 취직했다. 거기서 자신이 가진 약제사 기술을 발휘한 칼리오스트로는 곧 몰타 기사단의 우두머리였던 돔 마노엘 핀토 데 폰세카의 눈에 들었고, 돈 마노엘의 연금 실험실 바로 옆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약제와 연금술에 몰두하다가, 1767년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몰타 유지들의 추천장을 든 채 나폴리로 떠난다.

 

나폴리에 도착한 칼리오스트로는 칼라브리아를 거쳐 1768년 초 로마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는 몰타 유지들의 신임장을 교황청 주재 몰타 대사 브레트비유 백작에게 전달했고, 그를 통해 요크 추기경과 오르시니 추기경 등 교황청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추천장을 전달했다. 때마침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있는 젊은이를 찾던 오르시니 추기경의 눈에 들어 그는 오르시니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신실한 종교인인 척하면서 동시에 가끔씩 수도복을 벗고 산타마리아 광장으로 가 이집트식 사랑의 묘약과 판화 등 수상한 물건들을 팔아 수입을 올렸다. 그러면서 여러 범죄자들과 어울리게 되고, 미래의 아내가 될 로렌자 펠리치아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로렌자 펠리치아니는 기술공의 자식으로 태어나,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빈민가에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25세의 돈많고 멋진 남자는 뿌리치기 힘들었고, 그가 청혼하자 결국 받아주었다. 아버지 주세페 펠리치아니는 딸이 결혼할 나이는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칼리오스트로가 가진 교단의 인맥과 푹 빠진 딸을 보고 결국 결혼을 승낙해 주었다. 칼리오스트로는 로렌자와 1768년 4월 20일 결혼식을 올렸고, 로렌자의 오빠 프란체스코와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경직된 생활이 지루해진 칼리오스트로에 의해 그들은 결국 펠리치아니 가족을 나왔는데, 이때 로렌자는 칼리오스트로의 설득으로 이름을 세라피나로 바꾸게 된다.

 

가출 이후 돈에 쪼들린 칼리오스트로는 같은 시칠리아 출신의 범죄자 옥타비오 니카스트로와 협업한다. 니카스트로는 칼리오스트로를 자신을 알리아타 후작이라 칭하는 한 귀족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자신이 성직을 가진 대령이자 프로이센 궁정에서 파견된 전권대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칼리오스트로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하고, 그에게 신용장, 환어음, 군의 명예 진급사령장 등을 위조하고 유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내와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했는데, 칼리오스트로는 잠시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얻었던 지식으로 세라피나를 납득시켰다.

 

68년 5월 칼리오스트로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사기를 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는 칼리오스트로의 커지는 영향력을 시기한 니카스트로에 의한 것이었다. 알리아타는 튀었고, 남겨진 칼리오스트로와 세라피나는 위조문서들을 재빨리 처리하여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다시 궁핍해진 칼리오스트로는 순례자로 위장하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 올랐다. 이때 칼리오스트로는 카사노바와 만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자처하며, 자신을 연금술사라고 포장하고 사기꾼으로 살아간다. 그는 본인이 그리스인 연금술사의 제자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유럽 전역을 돌며 사기를 쳤다. 한때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연루된 목걸이 사건으로 인해 잠시 바스티유에 수감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다가 사기행각이 까발려저 도피한 이후,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사실이 들통나 이단으로 선고되어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받은 후 감옥에 갇혀 1795년 옥사하였다.

 

 

크리스마스의 기원[각주:156]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루돌프와 마찬가지로 비기독교적이고 다소 이교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마스는 본래 로마의 동지로,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의 동짓날이자 태양의 탄생일로 정해졌다. 이 날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갓난아기 인형을 만들고 이것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신성시하며 태양을 숭배했는데, 마찬가지로 12월 25일에 아기를 낳은 여성 또한 셈족에게서 '하늘의 처녀' 내지는 '하늘의 여신'이라 불리며 아스타로트와 동일시되고 신성시되었다. 이후 로마에서 발흥한 신흥종교 미트라 교도 이를 받아들여,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의 탄생일로 여겨졌다.

 

반면 본래 예수의 탄생일은 1월 6일로 여겨졌다. 성경에 예수의 생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예수의 탄생일은 오리무중이었지만, 이집트에서 1월 6일을 예수의 생일로 정하고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4세기 경에는 소아시아 전역에 이러한 신앙이 퍼졌다. 그러나 당시 빠르게 교세를 확장하던 기독교는 현지인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그들의 풍습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레오와 같은 일부 기독교도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를 중심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옮겨 기념하게 되었다. 이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12월 25일로 하고 현현제만은 1월 6일로 지정했지만, 현대 주류 기독교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찾기 힘들다.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폴터가이스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가만히 있던 물체가 움직이거나 소음이 발생하는 현상으로, 일반인들에서는 심령 현상으로 믿어지나 그에 대한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폴터가이스트는 10대 여성에 의한 조작극이었으며, 특히 폴터가이스트가 발생하는 집안에 거주하는 딸이거나 하녀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회적 특성상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외부에 표출할 수 없었고, 이에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 폴터가이스트 조작이었다.[각주:157]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막스 베버는 저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각주:158]에서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베버는 개신교의 교리, 특히 청교도윤리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고 보았는데 청교도윤리의 특성인 검소,절약정신에 의해 막대한 자본이 쌓였고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에토스로 간주되는 이윤추구, 검소함, 절약은 많은 부분에서 청교도 교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소비 대신 자본을 축적하려고 하는 추구는 프로테스탄트가 생기기 이전에서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각주:159]

 

최근 경제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각주:160] 프로테스탄티즘은 청교도 윤리 이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공헌했을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개개인의 성경 탐독을 강조했던 루터교의 교리 아래에서 많은 개신교인이 성경을 읽기 위해 읽기를 공부했고, 읽기가 가능해진 대중이 금속 활자의 발명으로 폭증한 출판물들을 읽으면서 교양이 증가했다. 대중의 교양증가는 필연적으로 인적자본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근대유럽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막스 베버가 있다. 베버는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자본주의 윤리의 연계성을 지적했으며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세계적 고전이 되었다.

 

 

21세기 한국의 정치지형

민주주의가 수립된 이후 한국의 정치는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 좌파적 2-30대와 투표에 열성적인 우파적 5-60대로 구성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적어도 2010년대 후반부터는 그러한 주장이 실제와 맞지 않아 보인다. 20대 총선의 경우 보수라고 생각되었던 50대가 민자당계 정당을 지지하지 않았고, 영호남의 투표 구도도 일부 흐트러져서 전라도 지역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다.[각주:161] 이는 호남 유지가 대거 국민의당으로 이동한 결과로 국민의당이 망한 이후 호남은 다시 민주당 지지지역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연령에 따른 지지세력 구도의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WTO 체제[각주:162]

WTO 체제는 세계무역기구(WTO)와 이 기구 아래 형성된 국제무역 질서를 이르는 말로,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최종 타결되면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광범위한 국제무역 질서가 양차대전으로 붕괴한 후 국제무역 질서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GATT는 80년대 들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세계경제의 불균형, 심화되는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인해 국제무역의 확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더해 동구권 붕괴로 미국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었는데, GATT를 대체하려는 국가간 협상(우루과이 라운드)이 진행된 결과 GATT가 폐지되고 그 후신으로 WTO가 등장하게 되었다. WTO는 여러 면에서 GATT와 달랐다. WTO는 금융, 통신, 저작권, 농산물 등을 국제무역의 규정사항에 새롭게 포함시켰는데, 이는 한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모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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