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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3단계: 신화의 구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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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3단계: 신화의 구조

과학주의자 2024. 1. 21. 16:53

당신이 이미 어떤 신화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세상의 의미와 당신의 삶의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상, 개별 신화보다 모든 신화가 공유하는 요소를 안다면 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신화의 기본적 구조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신화가 얘기하는 것

신화는 우리에게 영적 세계의 길을 열어주지만, 그전에 신화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설명 양식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인에게 신화는 지금의 과학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신화를 사실로 믿고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복을 위해 조왕신께 빌거나 사주에 따라 행동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신화에서 여러 유용한 것을 제공해야 했다. 복을 얻는 법이나 불행을 피하는 법은 물론이고, 세상의 탄생이나 악의 존재, 길한 것과 부정한 것,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 등도 알려줘야 했다.

 

신화가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영성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앞서도 말했듯이 신화는 초보적인 영성이기 때문이다. 영적 앎은 우리에게 세상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고, 삶과 죽음을 이해하게 하며, 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되고, 부분적으로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삶의 의미를 얻어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리고 신화도 이러한 것은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

 

 

신화의 구조

신화를 형성하는 신화소는 정말 다양하고, 신화를 구분짓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신화학자들이 신화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과 신화의 구조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조지프 켐벨은 신화를 2개로 나누었고, 레비스트로스는 이분법을 통해 신화를 이해하였다. 질베르 뒤랑은 낮의 이야기와 밤의 이야기로 신화를 파악하였고, 보다 최근에 뤼시앵 보이아는 8가지 요소로 신화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주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드와 초자아의 관점에서 신화를 이해하고자 하였고, 융의 지지자들은 자기통합의 관점에서 신화를 바라보았다.

 

정말 많은 신화 이론이 있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질베르 뒤랑의 이론을 채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뒤랑의 이론이 가장 타당하고, 범위가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뒤랑은 정말 수많은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였다. 반면에 정신분석학자들은 거의 근거가 없는 가정에 끼워맞추는 식으로 신화를 해석하려고 한다. 융은 자기통합이라는 특정 측면으로만 신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뤼시앵 보이아는 너무 난해하다. 켐벨과 레비스트로스는 뒤랑 못지않은 이론을 구축하였지만, 뒤랑은 지리적 패턴을 통해 추가적인 설득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

 

비록 필자는 뒤랑의 이론을 중심으로 신화의 구조를 서술하겠지만, 이것이 다른 신화 이론을 모두 내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신화 이론은 서로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는 뒤랑과 레비스트로스의 공통점이고, 그 안에서 통합을 찾는 것은 뒤랑과 켐벨, 융의 공통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화 이론을 적용한다고 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 글에도 뒤랑 이외의 이론에 기반한 설명이 들어갈 수도 있다.

 

낮의 이미지와 밤의 이미지

뒤랑은 세계 각지의 신화에 대한 연구자료를 검토한 후, 모든 신화와 상징을 낮의 체제와 밤의 체제로 양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낮의 체제는 분리와 초월을 강조하며, 밤의 체제는 융합과 조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영웅은 낮과 밤의 조합으로, 영웅을 통해 세상은 순환하면서도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낮의 이야기

낮의 이야기에 속하는 신화는 세상을 대결의 장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쪽에는 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이 있다. 악은 더럽고, 부정하고, 불길하고, 사악하며, 괴롭다. 괴수나 아가리, 용, 이빨, 벌레 등이 이러한 악에 속한다. 악의 본질은 죽음이다. 낮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악이며, 최고로 더럽고 불길하며 부정하고 사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강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침몰하게 된다.

 

다른 한쪽에는 선이 있다. 선은 순결하고, 신성하며, 길하고, 선하며, 편하다. 날개나 칼, 천사, 산, 그리고 영웅이 선에 속한다. 악의 본질이 죽음이라면 선의 본질은 영원이다. 죽음의 대척점에 있는 낮의 이미지는 모두 영원성을 상징하며,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영생이 된다. 그래서 낮의 이미지에 선 사람은 영생을 누린다. 특히 선한 이미지로 치장된 영웅이 이러한 영생을 누리는 장본인이 된다.

 

낮의 이야기는 이 선과 악의 투쟁, 정확히는 죽음에 대한 영원의 투쟁의 이야기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모든 인간은 사악한 죽음에 잡혀 파멸하고 만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영생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힘에 의지하여 죽음과 투쟁한다. 그래서 영웅은 칼을 쥐고 금빛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 이빨이 많고 불결하며 사악한 용에 맞서 싸운다.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영락없이 죽지만, 싸움에서 승리하면 우리는 더이상 죽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무찌름으로서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영생)을 얻게 된다.

 

낮의 이야기는 직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죽음의 운명에 지배당하는 불쌍한 존재이다. 그러한 우리는 투쟁을 거듭하면서 점차 죽음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초월하면서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잠깐의 좌절이 있을지라도,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이 죽음을 물리치고 삶을 획득하는 진보의 역사이다.

 

많은 영웅서사는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헤라클레스, 길가메시, 예수 등 모험을 떠난 영웅은 시련을 겪고 악과 싸워 이기면서 보상을 쟁취한다. 이때 영웅이 겪는 시련과 적은 모두 죽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죽음을 무찌름으로서 영웅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 문명사회로 진입하면 영웅의 상징은 곧 국가의 상징이 된다. 국가는 자신을 날개나 독수리, 산, 금과 같이 영원함을 상징하는 낮의 이미지로 채워넣으면서 자신을 선으로 포장하고 적국이나 반역자를 악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멸망하지 않고 승리하여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강조한다.

 

낮의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투쟁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영웅은 죽음을 부정하고 죽음과 정면으로 대결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극복하고 세상을 초월하여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

 

밤의 이야기

낮의 이야기와 달리 밤의 이야기는 투쟁서사가 아니다. 애초에 밤의 이야기에서는 낮의 이야기와 같은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밤의 이야기에서 선은 악이기도 하고, 악은 선이기도 하다. 둘은 분리되기 보다는 같은 세상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때문에 밤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또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이며, 포근한 회귀이기도 하다.

 

뒤랑은 밤의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자궁을 예시로 들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편안한 자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 자궁 시기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시기이디. 하지만 동시에 의식이 없고 삶이 없다는 점에서 가장 죽음에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다. 밤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동시에 안식을 의미하며, 현실과 달리 공명정대한 처우가 이뤄지고 정의가 실현되는 저승으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밤의 이야기에는 정말 다양한 존재가 나타난다. 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곰과 이야기하고, 뱀과 협상하며, 오색동산에서 복숭아를 따기도 한다. 이들간에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순리를 따르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죽음이란 이사에 불과하다. 살아있을때 우리는 산 자의 세계에 살지만, 죽으면 죽은 자가 사는 저승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저승과 이승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다만 왕래가 힘들 뿐이다. 그것도 샤먼이나 신령한 존재의 도움이 있으면 마치 전화통화하듯이 소통할 수 있다.

 

밤의 이야기는 대개 순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낮의 이야기와 달리 밤의 이야기에서 시작과 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마치 봄이 지나면 마침내 겨울이 오고, 그러나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모두 이 세상의 모습이며, 전체 이야기는 질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여정이다. 게다가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된다.

 

원시부족일수록 밤의 이야기가 자주 나타난다. 죽은 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전형적인 밤의 이야기에 속한다. 이는 동물의 영과 소통하고 자연의 순환을 서술하며 부활과 풍요를 요청하는 샤먼의 행위와도 관련된다. 굳이 원시부족이 아니더라도 많은 전근대사회에서는 새해나 봄에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 행사에서 행사 주관자는 세상의 탄생과 순환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는데, 이는 그러한 과정이 다시 반복되어 올해에도 풍요로운 한 해가 되라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있다. 밤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동물은 후대에 이르러서는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존재로서 각종 민화나 가구에 그려졌다. 월스트리트의 황소 동상이나 국내의 금두꺼비 조형물도 그러한 예이다.

 

초월: 부활과 영웅

낮의 이야기와 밤의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원초적인 시각에서 차이가 난다. 낮의 이야기에서 세상은 부정한 죽음의 땅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반면 밤의 이야기에서 세상은 생명이 가득한 풍요로운 세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순응해야 한다. 비록 두 이야기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있지만, 두 요소 모두 어떤 신화에서든 발견된다. 둘 모두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가 이 둘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낮의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이 부정한 세상에서 단서를 찾아서 영생에 이르러야 한다. 밤의 이야기에서도 죽음은 여전히 무섭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나름의 방법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조화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초월하고 영원에 이르고 싶어했다. 이러한 마음은 부활과 영웅 서사로 이어졌다.

 

부활은 신화에서 제시되는 영원에 이르는 주된 방법이다. 이미 죽는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본래부터 영원을 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유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사는 동물이 있다. 뱀은 죽을때가 되면 죽는 대신, 몸의 껍데기를 벗어 다시 태어난다. 곰도 겨울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부활한다. 그리고 이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땅이야말로 이러한 부활의 대명사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 오더라도 봄이 되면 땅은 거짓말같이 부활하여 생명을 꽃피운다.

 

어떻게 뱀과 곰, 그리고 땅은 부활할 수 있는가? 이는 그들이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대개의 신화에서 저승은 땅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땅속에서 사는 뱀과 땅 그 자체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 양쪽을 자유롭게 오간다. 그래서 그들은 삶과 죽음 모두를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혜를 통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지혜가 이들로 하여금 영생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인간도 삶과 죽음의 세계를 오가며 지혜를 얻는다면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구조이다. 이를 켐벨은 3개의 막과 1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웅 이론으로 체계화했는데, 그가 정리한 영웅서사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영웅은 어떤 계기로 인해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시련을 겪고 죽음과 투쟁한다. 그리고 시련을 이겨내면서 죽음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 상징으로서 신성한 무언가를 어떠한 보상을 받는다. 이것을 가지고 현세로 돌아오면서, 일종의 상징적인 부활을 하게 된다.

 

신화마다 보상은 각기 다르지만, 켐벨은 그 보상이 본질적으로는 지혜라고 지적한다. 영웅은 여행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지혜를 갖추게 된다. 그럼으로서 영생하게 된다. 심지어 그리스 비극처럼 영웅이 파멸하는 경우도,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영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신화속 영웅이 아니더라도 신으로 추앙받거나 비슷한 지위를 누린다. 원시사회에서 샤먼이 존중받는 이유는 이들이 영계에서 죽은 자와도 이야기할수 있고, 그래서 삶과 죽음의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인이 종교적 의식을 통해 귀신을 몰아낸다는 흔한 관념도, 신의 지혜를 가진 종교인이면 삶과 죽음의 지혜도 가지고 있어 귀신을 몰아낼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부활과 영웅서사는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투쟁하여 삶과 죽음의 지혜를 알아야 한다. 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면서 영원에 이르게 된다.

 

 

신화가 주는 함의점

신화는 이미 세상을 해석하는 많은 의미를 제시한다. 친척이 사고를 당한 이유는 증조할아버지 무덤이 귀신의 목을 눌렀기 때문이고, 올해 겨울이 유난히 추운 것은 동장군이 가이아를 이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는 그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다. 신화는 초보적 영성이기 때문에 영적 이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세상의 의미, 삶과 죽음의 이해, 우리의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한다.

 

낮의 이야기에서 세상의 의미따위는 없다. 세상은 어차피 죽음으로 가득한 부정한 곳이다. 여기서 삶이란 죽음과 반대되는 좋은 것이고, 죽음은 우리를 기다리는 나쁜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투쟁을 통해 세상 너머의 어딘가로 들어가 영원한 삶을 누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의미는 죽음과 투쟁하여 세상을 초월하고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밤의 이야기에서 세상은 좋은 곳이다. 세상은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는 곳이며, 그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삶이란 그 세계에서 산 자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죽음은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세계로 이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존재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며, 때문에 자연의 흐름을 따르면서 단지 쾌락과 풍요를 바라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이다.

 

부활과 영웅의 이야기는 또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상은 부정한 곳이지만 동시에 생명이 가득한 땅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존재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지혜를 터득한 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에 이른다. 영웅의 삶의 의미는 죽음과 투쟁하여 삶과 죽음의 지혜를 터득하고 영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련에 기꺼이 맞서면서 지혜를 갈구해야 한다.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세상과 삶, 죽음, 자신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사실은 서로간에 큰 차이는 없다. 낮의 이야기와 밤의 이야기는 서로 대립하지만, 부활과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결합된다. 세상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고, 삶과 죽음은 하나이지만 죽음은 극복되어야 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초월해야 하지만, 그 방법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웅은 세상의 순환을 만드는 주축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한다.

 

부활과 영웅은 낮의 이야기와 밤의 이야기를 잘 종합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신화는 그 중심에 영웅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신화학자들도 영웅 이야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웅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화가 제시하는 것

낮과 밤의 종합인 영웅은 예전부터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신화가 퇴색하는 지금도 영웅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상하며, 이는 대중매체의 히어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모든 이가 영웅이 될 수는 없었다. 영웅은 대개 특별한 피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신화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라고 요구한다.

 

영웅에게 있어 세상은 모험의 장이다. 삶이 지루하다거나 허무한 이유는 당신이 모험을 잊어버렸거나,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삶과 죽음의 신비를 넘어 영원에 이르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수많은 존재가 서로 투쟁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웅에게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다. 우리 모두에게 닥쳐올 죽음에 맞서 영웅은 말 그대로 '영웅답게' 맞서 싸운다. 이를 위해서는 시련을 가치고 한번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자살을 시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굳이 자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할 뿐더러 유익할 것이다. 해병대에 자원하여 지옥주를 체험하거나, 입관 체험을 하거나, 하다못해 헬스를 해서 극한의 고통을 넘을 수도 있다. 이것들 또한 죽음이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이며, 실제로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영웅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영웅임을 알려준다. 태어날 때부터 여정은 시작되었으며, 당신이 시련을 이겨낸다면 당신은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세상을 다시 창조하고, 신만이 갈 수 있는 영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평생을 살면서 지혜를 갈구하고, 닥쳐오는 시련을 용감하게 극복해야 한다. 비록 이것이 실제 죽음을 막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삶과 죽음의 비밀을 이해한 사람은 육체적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의연할 것이다. 그는 죽음을 이해했고, 이미 영원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웅이며, 여정은 시작되었다. 시련에 맞서고 그것을 이겨내라. 그럴 때 당신은 삶과 죽음의 지혜를 터득하고, 이 세상을 초월하여 신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신화의 한계

영웅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함의는 사뭇 감동적이다. 실제로 신화를 믿지 않더라도 영웅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 이야기에도 단점은 있다. 영웅 이야기의 단점은 이것이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과거 사람들은 모든 이가 이러한 영웅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영웅의 여정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영웅이 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객관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신화의 영역은 이미 객관적 현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웅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웅의 자질을 가졌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을 얻으려면 영웅이 되어야 한다.

 

다른 문제는 영웅이 얻은 지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점이다. 영웅은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그 지혜를 그냥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안될까? 신화는 지혜를 얻는 과정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얘기하지만, 그 지혜란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이는 지혜의 속성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삶과 죽음의 지혜, 즉 영적 지혜는 언어로 표현하기 매우 힘들다. 또한 그것에 다다르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를 말로 전달하기도, 거기에 이르는 명확한 방안을 제시하기도 힘들다.

 

바로 이 지점이 종교가 신화보다 앞서나가는 점이다. 신화는 지혜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종교는 그 지혜를 직접 알려준다. 신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든 이야기의 근원이자, 우리가 가지는 모든 의미를 주관하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지혜를 종교는 직접 알려준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그것을 깨닫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영웅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훨씬 쉽다. 이 힘으로 종교는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었고 신화를 압도했다. 특히 세상을 지배하는 3가지 종교 전통, 기독교와 인도불교, 성리학은 이러한 점에서 그 어느 신화나 종교보다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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