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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2단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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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2단계

과학주의자 2024. 1. 21. 04:11

1단계 사고가 과학자들에게 유익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물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에 기초하여 행동한다. 거의 절대다수의 사람은 2단계 사고, 가치적 사고를 하며 살아간다.

 

 

2단계: 가치적 사고

2단계 사고는 가치적 사고이다. 가치적 사고란 세상의 사물이나 사건에 좋고 나쁨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가치적 사고의 예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고기를 먹는 이유는 고기가 좋기 때문이다. 당신이 민주당/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 당이 좋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슬람은 나쁘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을 싫어하고 이슬람 사원 반대집회에 참여할 수도 있다. 맛있다/맛없다, 고귀하다/저급하다 등 다양한 가치부여 방식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좋다/나쁘다의 구분에서 출발한다.

 

가치적 사고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의 동인이 된다. 우리는 좋은 것을 더 하고싶어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케이크는 기를 쓰고 먹으려고 하지만 피망은 한사코 거부한다.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좋아하는 것에 가까이 있기 위해 가까이 가고 싫어하는 것은 멀리한다. 종종 싫어하는 것을 가까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도 이를 통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도파민 회로에서 유래한다. 어떤 자극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고, 도파민이 뇌의 전반에 퍼지면 이와 관련된 행동을 할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 정확하게 말해 사람은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는 행동은 하고, 적게 분비되는 행동은 안하려고 한다. 가치판단은 개인의 자유지만, 여기서도 보이듯이 인간이 실제로 부여하는 가치는 상당히 많은 요소에 의해 제약된다.

 

가치부여는 기본적으로 욕구에 의존한다. 뇌가 욕망하는 것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여 좋은 것이 된다. 반대로 회피욕구를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 갈증, 수면욕, 성욕이 있고, 이들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에 방해되는 것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인간에게는 자율성과 유능성, 관계성의 욕구가 있는데, 인간은 자유롭고 싶어하고, 유능하고 싶어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이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이 되고 방해하는 것은 나쁜 것이 된다.

 

가치부여를 결정하는 것은 욕구만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에 소속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사회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갇가지 부차적 욕구를 주입하였다. 우리는 돈을 원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바라며, 학력을 높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명품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공산주의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에서는 왕족이 좋은 것이 되고 서구의 명품은 오히려 덜떨어진 것이 될수도 있다. 이러한 욕구는 사회에서 자신의 강대한 힘을 통해 각 개인에게 주입한 욕구이다.

 

가치적 사고의 장단점

가치적 사고의 장점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이다. 도파민은 우리의 행동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우리는 특정한 무언가를 향하도록 몸을 움직인다. 생물학적 욕구는 우리의 삶을 유지시킨다. 사회적 욕구는 우리가 사회에 참여하여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물론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만든다. 심리적 욕구(자율성, 유능성, 관계성)는 오랜 역사동안 인간의 생존을 도왔으며, 잘 충족되면 우리가 행복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가치적 사고에는 2가지 단점이 있다. 하나는 쾌락의 쳇바퀴이다. 일찍이 많은 현자들은 인간의 쾌락이 수확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소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쌀 한공기면 되지만, 극상의 진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쌀 수백섬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런 진미에 익숙해지면, 진미가 주는 쾌락은 감소한다. 인생 동안 계속해서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은 잊어버리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도록 진화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끊임없이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혹사하게 되었다.

 

이것과 연결되는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욕구가 영원히 충족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욕구는 일정 수준이 되면 사라지기 때문에 사정이 낫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주입된 욕구는 충족하는 것이 극히 힘들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고,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는 한 학력의 열등감을 완전히 지울수는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모든 욕구충족을 방해하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죽음은 모든 욕구의 좌절이자 가장 나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나쁜 것으로 여겨졌으며, 원시사회에서는 부정한 기운을 담았다고 여겨 시체처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죽음으로서 어떠한 생물학적 욕구도 충족하지 못하게 된다. 나의 자유는 사라지고, 유능함은 무의미해지며, 사회에서 쌓아올린것 태반이 무용지물이 된다. 내가 죽으면 모든 사회적 관계도 단절된다. 무엇보다도 죽음은 나의 생명유지 욕구에 반하여, 나의 존재조차 파괴해버린다.

 

죽음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고자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록 최근에는 폭발적인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노화를 치료하여 불로불사에 이르는 것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상용화되더라도 사고사를 막을 수는 없으며, 지구의 소멸이나 빅런과 같은 우주의 종말을 막을수는 없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거의 필연이다. 죽음도 필연이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은 어떠한 욕구의 충족이든 결국에는 좌절되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돈을 아무리 모아봤자 결국 당신은 재산 0원이라는 결말에 이른다. 당신의 주변인은 당신을 추모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이 잊어버리거나 그들마저 죽어버리면 당신이 가진 관계는 완전히 끊겨버린다. 이렇게 되면 좋고 나쁨은 의미가 없어진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결국은 죽음에 이르러 나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은 멀리있는 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인식이 생기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보유한 성격 유전자의 덕택으로, 나쁜 것에서도 쉽게 좋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혹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치(좋음)를 재확인하여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이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낮은 신경성과 높은 외향성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죽음의 운명을 생생하게 자각하게 된다면,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뿐이다.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를 보고한다. 이들은 대개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지도 못했고 자신을 도와줄 주변인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남은 것은 모든 욕구의 실패, 인생이 총체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극심한 허무감 뿐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도약

'죽음에 이르는 병'은 원래 실존주의자 키르케고르가 사용했던 단어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결국 죽을 운명이며 유한하다는 슬픔을 이러한 단어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결점을 수용하고 영생을 약속한 예수를 믿음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단 키르케고르를 따르지 않더라도 죽음의 공포를 다른 방식으로 극복한 사람들도 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 불안을 완화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많은 신화에서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이다. 죽음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하는 것이며, 어떤 문화에서는 사람이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웅은 스스로 저승으로 들어가 죽음을 간접체험하면서 지혜를 얻는다. 이들에게 죽음은 회피대상이 아니라 맞서싸워야 할 통과의례요 시련이다.

 

어떻게 이런 허황된 믿음이 죽음 공포를 없애주는지 궁금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주관적 현실을 기억하라. 인간의 행동은 객관적 현실보다 주관적 현실의 영향을 받는다.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죽음은 단순히 유기체의 기능 정지를 의미하며,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는 100억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죽은 채로 있어왔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거기에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현실에서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더 큰 변화의 일부라면 우리가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신화에서는 주로 전자의 방법을 사용한다. 신화에서는 인간 영혼의 영속이나 부활을 상정하여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죽어도 우리 몸의 원자는 다시 새로운 존재로 조합된다는 사실이, 주관적 현실에서는 저승으로의 이동과 윤회, 다른 형태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비록 지금의 육신은 죽더라도, 우리의 영혼은 저승으로 가거나 거기서 다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거대한 신화체계의 일부에 속해있다. 거의 모든 신화가 내세와 죽음 이후에 대해 다루며, 그 밖에 많은 것도 다룬다. 신화에서 좋고 나쁨의 구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신화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순환을 이해함으로서 삶의 더 큰 의미를 지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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