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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4단계 본문
현재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화에 의존하지 않는다. 신화를 통해 영적 탐구에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성 종교에서 마련한 길을 통해 영성을 추구한다. 심지어 기성 종교를 거부하는 뉴에이지도, 실제로는 힌두교 전통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현재 영성에서 기성 종교, 세계를 삼분하는 기독교와 불교 및 힌두교, 유불선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들 성공의 원인은 모두에게 삶과 죽음의 지혜를 알려주었다는 점에 있다. 영웅이 극한의 시련을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지혜를 이 종교의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직접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더 진정으로 깨닫게 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까지 제시한다. 현재 성공한 종교는 궁극의 지혜를 일반인에게 알려주는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그것을 통해 신화 안에서도 가장 강력한 의미체계를 제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탐구의 여정에 오른 사람들은 신화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학으로 본 궁극의 지혜
기성 종교가 세상을 지배한 후에도 삶과 죽음의 지혜, 궁극의 지혜에 대한 다른 방식의 탐구는 존재해왔다. 오컬트에서 그것은 아니마 문디의 탐구였고,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지혜를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과학자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영적 존재는 초기부터 과학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영성은 지금도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의 활발한 탐구대상이다.
과학자 중 일부는 영적 체험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다. 불교에서 깨달음, 기독교에서 회심으로 일컫어지는 이 체험은 여러 종교는 물론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체험이 중요한 것은, 궁극의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러한 지혜를 얻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샤먼은 환각제 등을 통해 이러한 체험을 유발하여 죽은 자의 세계에 접촉하며, 회심을 겪은 기독교인은 야훼의 존재를 누구보다 강하게 지각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종교의 가장 큰 목표이다.
영적 체험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심리학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있었지만, 관찰하기 힘들다는 점으로 인해 큰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부터 실로시빈을 통해 인공적인 영적 체험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이에 대한 과학지식이 크게 진보하기 시작하였다. 심리학자들은 피험자에게 실로시빈을 투여하여 영적 체험을 일으킨 후 그 심리를 조사하였고, 신경과학자들은 그와 관련된 신경활동을 조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유체이탈이나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이 분야에서 활발한 발전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영적 체험에서 오는 궁극의 지혜도 엿보기 시작하였다.
영적 체험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영적 체험을 겪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특성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 자신이 깨달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는 영적 체험이 일어날 때 언어영역이 비활성화되기 때문이다.
-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온 세상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자신도 세상과 하나라고 강하게 지각한다.
- 강렬한 긍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와 동반되어 황홀경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이 나타난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하고 이타적인 행동이 증가한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러한 특성 이면에는, 세상과 자신은 하나이고, 세상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좋은 곳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이는 심리적 웰빙의 강화와 함께 이타적인 행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러한 믿음과 행동은 3대 종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세 전통 모두 세상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주장하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긍정한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선한 행동을 권장한다.
4단계: 종교적 사고
4단계는 종교적 사고이다. 종교적 사고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직관으로 해석하되, 더 단순하면서도 깊이있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실제 종교는 나름의 신화와 교리, 규칙으로 가득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할하는 종교적 사고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미의 확신성은 잃지 않는다. 신화가 수많은 복잡한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을 종교는 단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며, 그러면서도 신화보다 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3단계에 머무는 사람이 4단계로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창시자는 영웅이고, 따라서 종교적 사고는 궁극의 지혜를 담고 있다. 거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서 대속을 이룬 예수나 마라의 시련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모두 죽음을 극복하여 지혜를 얻은 영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종교적 사고란 시련을 통해 삶과 죽음의 지혜, 궁극의 지혜를 얻은 영웅이 우리에게 내준 선물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3개의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는 이를 3대 종교전통으로 명명하고, 여기에서 종교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3대 종교전통은 지금까지 영적 탐구의 여정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3대 종교전통
4대 성인을 처음 정의한 사람은 20세기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영적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계사를 둘러보면서, 이 4명만이 인간 실존에 대해 가장 사실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중 탐구에 논증을 도입하여 우리에게 1단계 사고의 길을 열어준 소크라테스를 제외하면 예수와 싯다르타, 공자가 남는다. 이 셋이 각자 대표하는 기독교, 불교, 유가가 바로 3대 종교전통이다.
굳이 이 세 종교를 고른 이유는 나머지 종교들도 이 종교의 연장선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이슬람 교, 야지디 교는 기독교와 함께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힌두교와 불교는 일견 대립하는 부분이 있지만,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철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동양에는 동아시아 불교와 도가, 원불교, 증산도 등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현세긍정과 수행 강조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3대 종교는 서로 다른 점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설파하는 지혜는 과학적으로 발견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종교의 차이는 그러한 지혜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으며, 정서적 느낌과 행동적 측면에서는 상당히 비슷하다. 종교의 메시지는 서로 비슷하다는 말은 실제 과학적 사실과 합치된다.
3대 종교의 공통점 중 하나는 세상과 자신의 통합이다. 3대 종교 모두 개개인이 궁극적으로는 세상과 하나라고 주장한다. 인도불교에서 모든 사람은 인과의 사슬로 묶인 인드라망의 한 부분이다. 유불선에서는 인간이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의 이치가 우리 몸에서도 흐르고 있음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이 부분에서 예외로,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며 교리적으로 개인과 세상의 통합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수련한 기독교 성직자는 야훼의 은총이 세상 모든 곳에 내리쬐고 있으며, 개개인에게도 내려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예수를 영접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나라에 온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은 영원성이다. 세 종교는 각기 나름대로 영원한 것을 제시하고, 우리가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야훼는 영원불멸이고, 그러한 하나님 예수의 존재와 구원을 믿기만 하면 우리도 영생을 누리게 된다. 인도불교에서는 영원함 자체를 부정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죽음에서 해방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면 자신이 우주적 자아에 이르게 되어 영원불멸한다고 주장한다. 유불선에서 영원한 것은 세상의 이치이며, 이를 도나 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이 도와 합일하면 우리도 죽지 않는다. 도교에서는 이를 직접적으로 해석해서 육체적으로도 죽지 않고 신통력을 부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번째 공통점은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이다. 이 점이 가장 강한 종교는 유불선으로, 유불선 모두 세상의 이치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한다. 악은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우리의 본질대로 살면 사라진다. 기독교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결국 최후의 심판 때에 모두 단죄되고 오직 선만이 남는다고 예언한다. 유일한 예외는 인도불교로, 인도불교에서 세상은 부정한 것이며 탈피의 대상이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약해지고 세상에 대한 긍정(과 참여 요구)이 더 강화된다. 세상에 대한 긍정은 자기수용으로도 이어져서, 동아시아 불교와 기독교, 힌두교 모두 사람들이 지금 그대로 신성한 상태이거나 그러한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네번째 공통점은 수행이다. 세 종교 모두 신도에게 수행을 요구하거나, 적어도 어떤 절차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 인도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과 8정도를 해야한다고 요구하며, 힌두교에서는 고행을 요구하기도 한다. 유불선은 수행을 가장 중시하는 종교로, 이들은 자연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련으로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가장 수행을 등한시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대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절차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 궁극의 지혜의 특성상 말로 전하는 것이 힘들며, 행동으로 체득하는 것이 더 수월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인도불교, 유불선은 세상과 나를 통합된 존재로 바라보고, 영원함에 이르는 방법에 알려주며, 궁극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신도들에게 수행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를 말하는 방식과 세상에 대한 관점은 여러 차이가 있다.
기독교: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기독교는 예수를 신으로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오직 야훼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하는 자는 야훼 단 한명이다. 야훼는 인간도 만들었는데, 불행히도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 원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야훼의 인격이기도 한 예수가 지상에 내려와 인간 대신 죽음으로서 죄를 없애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원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특별한 지혜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에서 궁극의 지혜는 너무 불가해하고 심오한 것이라 인간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은 자력으로 영원에 이를 수 없고 자신의 한계로 인해 반드시 파멸한다. 오로지 지혜를 가진 예수가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줄 때 비로소 영원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예수가 지상에 내려온 이유 중 하나이다.
신이 인간을 몸소 구원한 이유는 그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비록 수많은 죄악과 한계로 물들어버린 인간이라도, 신은 그를 사랑한다. 아무리 죄가 많은 인간이라도 신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지상에 내려보내고 인간 대신 그를 희생시켰다. 예수가 대신 죽음을 경험하면서 신의 섭리가 온 세상에 퍼졌고, 인간은 이제 죽어도 하나님나라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살게 되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이러한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을때에만 예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종교에 비해 기독교는 신의 사랑을 강조한다. 세상은 원래 부정한 죽음의 장소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러 파멸한다.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통제함으로서 인간은 영원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의 중심주제는 세상의 의미나 악의 존재보다는 신의 사랑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우리를 영원에 이르게 해주셨다. 세상은 그러한 신이 인간을 구원해 나가는 구원의 역사이고, 삶은 신의 은총이다. 우리는 다만 예수를 구세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총에 보답하고자 신의 사랑을 자기 주위에도 전파하는 것이 삶의 사명이다.
인도불교: 궁극적인 초월
인도불교와 힌두교는 다른 점이 많지만 모두 세상으로부터의 정신적 탈피를 목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도불교에서는 죽음을 폄하하지도, 삶을 긍정하지 않는다. 삶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고통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을 제거해야 하며, 이를 위해 8정도를 수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럼으로서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인도불교에서 세상은 전혀 좋은 곳이 아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은 일시적인 존재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에 집착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항시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인간은 반드시 실패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이것은 이번 생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윤회하며 우리는 이미 억겁의 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즉 우리는 무한번의 고통을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 일견 삶은 지옥이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지혜는 무엇인가? 싯다르타가 가르치는 지혜는 지혜를 얻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가 전하는 지혜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삶과 죽음, 고통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영원한 삶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죽음을 피하고 자신과 자신의 것을 천년만년 유지하려고 한다. 싯다르타는 바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가르친다. 극복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삶에 대한 나의 집착이다.
집착을 버릴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가장 자유로워진다. 깨달은 자는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에 있는 부분일 뿐이며, 나와 내가 아닌 존재는 모두 이 인과의 사슬 속에서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끝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있고 나는 그 세상의 부분이다. 그 세상의 이치로 인해 나는 고통을 겪었으나, 모든 속박을 벗어던진 지금 나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설적으로 영원에 대한 집착을 놓음으로서 인간은 궁극의 자유를 얻고, 고통으로 가득찬 삶과 죽음의 세계를 벗어난다.
힌두교에서는 약간 다른 주장을 한다. 힌두교에서도 세상이 변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변화를 주재하는 이 세계의 의지 자체는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의지가 우리 자신이고, 그것을 깨달으면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둘이 말하는 바는 서로 비슷하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과 죽음은 없다. 이것을 알고 집착을 놓아버리면 나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인식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상태이며, 이를 위해 삶의 매순간 자비를 실천하고 8정도를 실천해야 한다.
유불선: 자연과 너는 하나다
유불선은 가장 종교적 색채가 덜한 종교이다. 그리고 사실 유불선은 유가(유)와 동아시아불교(불), 도가(선)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필자가 이를 함께 다루기는 했지만 이 세 종교 안에도 많은 차이가 있고, 자기 종교 안에도 수많은 이설이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를 묶어서 부른 것은, 이들은 공유하면서 다른 종교와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유불선은 모두 자연의 이치를 강조한다. 이를 유가에서는 천리, 불교에서는 선, 도가에서는 도라고 부른다(가장 대중적인 명칭은 도이다). 어떻게 부르든 유불선은 이 도를 강조한다. 도는 세상이 흘러가는 궁극적인 원리이고, 세상을 탄생시키고 흘러가게 하는 지고지순의 원리이다. 영웅이 추구하는 궁극의 지혜란 바로 도를 말한다.
유불선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을 지지한다. 이는 도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는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즐거움을 준다. 비록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유불선에서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도(道)로 다시 돌아가는 최고의 안식이자 새로운 모습으로의 부활을 말한다. 이처럼 도는 선하고 좋은 것이다. 다만 만약 도가 흐트러져서 우리가 도에 따라 살지 못하면 그때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불선에서 악은 도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의 도덕적 본성을 실천하지 않거나(유), 찰나의 존재인 자신에게 집착하거나(불), 도를 따르지 않고 인공적인 것을 만들어 즐기기 때문이다(선). 세상의 의미는 도이며, 우리와 하나이고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삶과 죽음도 도에 내어맞기면 저절로 평안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러한 도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온갖 불행과 고통, 질병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에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고,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도와 자신이 완전히 합치되는 합일의 경지를 노려야 한다.
유불선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분별을 지양하는 것이다. 이는 도에 대한 유불선의 믿음에 기인한다. 세 종교 모두 세상은 항상 변화하며, 도는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우리도 도와 합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명확한 경계선을 나누는 분별을 지양해야 한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분별 자체를 도에서 멀어지는 행위라고 지탄하고, 동아시아 불교는 심지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분별도 없다고 주장한다. 생활체계의 성격을 가진 유교는 분별을 하지만,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 규범을 변화시키는 유연성을 갖추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만약 당신이 궁극의 지혜를 구한다면 약간 당혹스러울 수 있다. 누구는 지혜가 아니라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누구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하고, 누구는 아예 세상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아 세 종교는 각자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영생을 보장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일신이라는 말도안되는 주장을 또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가치 자체를 벗어나는 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욕구를 끊어내는 일이고, 그만큼 힘든 일이다. 유불선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무한한 평온을 약속한다. 하지만 무엇이 도에 합치되고 무엇이 아닌지 종교마다 말이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정답은 없다. 이것이 주관적 현실의 문제임을 기억하라. 진정한 의미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장 확신하는 것이면 그것이 정답이다. 당신이 그것을 들었을때 그것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고, 나의 삶의 의미라는 강렬한 확신이 든다면 그것이 정답이다. 혹은 여러 종교의 창시자나 신학자가 그러하였듯이, 한 종교를 약간 변형하거나 종교의 부분부분을 결합하여 믿을수도 있다. 이슬람 교, 힌두교, 양명학 등 그 예는 많으며, 유니테리언처럼 세 종교 모두를 통합한 종교도 있다.
필자도 그들 중 하나이다. 필자는 세 종교 모두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 안에 내재된 약점을 견디지 못하였다. 세 종교는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나름의 단점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 종교 모두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현대인은 과학과 세속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매일의 일상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지혜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이것이 세상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부합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세 종교는 나름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4단계를 넘어서는 단계, 궁극의 지혜를 가져다 주면서도 현실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4.5단계의 사고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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