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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한국의 고분 총설 본문
한국의 무덤과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변해왔다. 가장 성스럽고 보수적인 문화인 묘제 문화를 통해 사람들은 죽은 자를 기리면서, 도굴을 방지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지혜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신화적 상상을 무덤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 분야의 주요 저서로 <한국문화유산 산책(개정판,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새문사,2019)이 있다.
초기 시대
청동기 시대 한국의 일반적인 고분은 고인돌(지석묘)이었다. 남한과 북한을 합쳐 넓은 지역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졌고, 동시에 돌널무덤도 많이 만들어졌다. 고인돌과 돌널무덤 외에 독널무덤(옹관묘), 널무덤(토광묘)도 만들어졌고, 남부에서는 돌무지무덤(적석묘)도 많이 발견된다.


돌널무덤(석관묘, 石棺墓)은 말 그대로 돌로 관을 짜 시신을 넣어둔 무덤이다. 지하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판돌이나 깬돌, 강돌 등으로 장방향의 매장 주체부를 만든 후, 그 위에 하나 이상의 뚜껑돌을 덮어 만든다. 비슷하게 널무덤(토광묘, 土棺墓)은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한 무덤인데, 관이 나무관이라는 차이가 있다. 널무덤과 비슷한 토광묘로는 관없이 바로 시신을 묻은 순수토광묘(움무덤), 시신을 목관에 넣고 그걸 또 목관에 넣은 토광목곽묘(덧널무덤)가 있다.


고구려
고구려의 고분은 원래 관을 넣어두고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적석총)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만주 지역의 예맥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랴오닝에서 발견되는 예맥족의 다석곽식 돌무지무덤이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하며 다른 비슷한 무덤들이 랴오닝 환인 지방과 압록강 남안의 독로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돌무지무덤 대신 흙으로 봉분을 쌓고 내부에 돌로 방(석실)을 만들어 관을 안치한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봉토 석실분)이 주류가 되었다.

보통 돌무지무덤은 한 변의 길이가 작은 것은 5-10m, 중형은 15-20m정도이고, 높이는 3-6m 정도 된다. 대형은 30-60m에 높이는 15m 가량이다. 대부분 무덤(분구) 하나에 매장부가 하나만 있으나, 가끔식 한 분구에 곽이 여러개 있기도 하다. 또한 무덤이 서로 접해있거나 여러 무덤이 분구의 한 변을 잇대어 접하기도 한다. 일부는 무덤에 부석시설이 달려있는데, 북한 사학계에서는 이를 보고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보통 외형에 따라 돌무지무덤을 무기단, 기단, 계단식으로 구분하고, 매장 방식에 따라 수혈식, 횡혈식으로 구분한다.
고구려 초기(BC 2세기-서기 1세기)의 돌무지무덤은 주로 강가 모래바닥에 냇돌을 깔고, 그 위에 관을 놓은 후, 다시 냇돌을 덮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2-3세기에는 돌을 높게 쌓기 위해 기단이 생기고(기단식 돌무지무덤),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무덤 옆에 받침돌을 세웠다. 이후에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등장하고 매장부도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 변해갔다. 4세기에는 여기에 석실이 추가된 계단석실적석총이 나타났다.

4,5세기 고위계급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계단석실적석총의 경우 적석부에서 기와와 와당이 출토되어 무덤 정상에 제사를 위한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무덤은 단독으로 위치하고, 주위에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장군총, 서대총, 임강총, 천추총, 태왕릉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국내성 시기 고구려의 왕릉으로 추측된다.
427년 평양 천도 후 고구려의 고분은 돌무지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한다. 굴식 돌방무덤은 말 그대로 석실(돌방)을 만들고 흙을 덮은 무덤으로, 돌로 시신을 안치한 널방과 거기에 이르기 위한 통로(널길)를 만든 후 흙으로 덮어 건축한다. 낙랑군을 정복하고 평양으로 진출한 4세기 전반에서부터 먼저 나타났고, 초기에는 겉부분은 돌무지무덤처럼 만들었으나 6세기에 이르러서는 흙으로 외부를 덮는 봉토석실분으로 변해 간다.

돌방무덤은 널방이 하나만 있는 경우(단칸 구조)와 전실, 현실의 두칸 구조, 세칸 구조, 현실이나 전실에 측감 및 측실이 달린 것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천장은 궁륭상, 절천정, 고임식이 있으며, 봉토석실분은 대개 방형 현실의 중앙 연도와, 평행고임식 천장을 한 단칸 무덤이 주류가 된다. 고구려는 모줄임 구조라는 특징적인 지붕 구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봉토석실분의 특징은 내부에 벽화가 그려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나라의 장례 예술과 랴오닝성 라오양 지역에서 나타난 후한, 위진대 무덤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장식 도안과 사신도가 나타나는 등 석실 구조와 벽화의 구성 및 화면 처리에서 랴오양 지역의 벽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요동성총은 라오양 지역의 무덤벽화와 유사하고, 안악 3호분은 다롄의 영성자 벽화분과 비슷하며, 안악 3호분 주인공과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 초상화는 랴오닝 차오양의 원태자 벽화분과 유사하고 덕흥리 고분의 천장그림은 간쑤성 지우취안의 정가갑 5호분과 비슷하다.
중국 지안(집안)과 평안남도, 황해도 일대에 90여 기가 분포해 있는데, 생활풍속도, 장식도, 사신도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생활풍속화가 많았고, 중기에는 불교의 저승관을 반영한 연꽃과 인동당초무늬를 중심으로 한 장식도안화가 많았으며, 후기에는 도교과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많이 나타났다. 이 중에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북극성, 28수 등 별자리를 그린 경우(덕화리 1,2호분, 장천 1호분)가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로 이어지고 일본에도 영향을 끼친다.

생활풍속도는 석실을 목조가옥처럼 기둥과 지붕을 그려낸 후 각 벽에 생활의 여러 모습을 그렸고, 장식도는 왕(王)자나 원, 연꽃, 거북등 등을 그렸는데 생활풍속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초기 고구려 벽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석회가 마르기 전 그림을 그려 안료와 석회가 함께 마르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벽면을 다듬고 직접 그림을 그렸다.



주요 고구려 고분 유적지
가장 유명한 고구려 고분은 위에서도 나온 장군총이다. 전형적인 돌무지무덤인 장군총은 화강암으로 된 방형 7단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으로, 한 변의 길이가 30m에 높이는 14m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돌무지무덤이나, 내부에 굴식 돌방(횡혈식 석실)을 가진 과도기적 특성도 있다. 맨 아래에는 면마다 3개씩 큰 받침돌이 기대어 있고, 묘실은 4층에 있고 2개의 관대가 있으며 앞가운데에 연도가 달려 있다. 꼭대기는 자갈과 석회를 섞은 얕은 돔형이 있는데, 갓돌에 난간과 같은 것을 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있어 과거에는 향당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묘의 주인은 광개토왕이라는 설과 장수왕이라는 설이 대립한다.
태왕릉은 중국 지안 지역의 광개토왕릉비에서 500m 떨어진 계단석실적석총으로 장군총의 4배 크기다. 명칭 태왕릉은 발굴조사 중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견고하고 봉우리처럼 굳건하기를 기원함)'이라고 적힌 벽돌이 발견되어 정해졌다. 한국 학계에서는 태왕릉의 주인을 광개토왕, 고국양왕, 고국원왕 등으로 추정하는데,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好大王(호대왕)'이라고 적힌 청동방울이 발견되어 광개토왕설이 우세해졌다.

안악 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에 위치한 봉토석실분으로, 북한에서는 고국원왕릉으로 보고 남한에서는 336년 전연에서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우세하며 소수설로 미천왕릉이라는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 호화로운 벽화를 가진 고분으로, 고구려 지배층의 행렬을 묘사한 대행렬도와 부엌, 정육점, 우물가 등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비슷하게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의 봉토석실분인 덕흥리 고분은 요동 및 연군의 태수 13명에게 보고를 받는 유주자사 진과, 밭을 가는 남성과 베를 짜는 여성을 묘사한 견우직녀도가 그려져 있다. 또 같은 지역의 수산리 고분에는 높은 나무다리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모습과 공던지기, 바퀴 굴리기가 그려져 있고, 신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다.
쌍영총도 대표적인 봉토석실분이다. 북한의 평안남도 용강에 위치했는데, 2개의 널방이 있다. 널방 입구로 들어가면 좌우에 2개의 8각 돌기둥이 있는데, 이는 간다라 영향을 받았다. 벽에는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널길의 동쪽 벽에는 수레 2대와 개마무사 2명, 기마무사 2명, 서있는 남녀 30명과 북을 치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수레와 말 탄 사람 및 남녀 30명과 북치는 사람, 창을 쥐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천장은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앞쪽 방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장사상이 있고, 동쪽과 서쪽 벽에 청룡과 백호를, 남쪽 벽에는 인물 입상이 있다. 모든 벽에 기둥과 두공이 있고, 천장의 뚜껑돌에는 연화문이 그려져 있다. 널방으로 들어가면 목조가옥처럼 보이도록 사면에 기둥과 두공, 도리가 있고 도리위에는 고구려 귀족의 가옥에서 자주 보이는 ㅅ형의 솟음무늬가 그려져 있다. 북쪽 벽에는 시종의 시중을 받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이 그려져 있고, 동쪽 벽에는 9명의 사람이 행진하는 그림이 있는데 공양도로 추정된다.
무용총은 중국 지안의 봉토석실분으로, 2개의 널방으로 구성됭 있고 널방 천장에는 생활풍속도와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각 벽의 모서리에는 기둥과 두공이 그려져 있고, 앞방(전실) 벽에 한 쌍의 안장과 인물 및 건물이 그려져 있다. 널방(주실)의 북벽에는 주인의 접객도, 동벽에는 12명의 남녀가 대열을 지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가무도가 그려져 있다. 서벽에는 ㅅ산에서 4명의 기마무사가 사냥을 하는 수렵도가 있고, 천장에는 해, 달, 별과 함께 기린, 청룡, 백호, 비천, 신선의 신성한 존재와 구름무늬, 연꽃무늬,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저총은 중국 지안의 봉토석실분으로 2개의 널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방과 통로에는 나무와 맹견이 그려져 있고, 주실의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가, 동벽에는 씨름하는 모습과 부엌이,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가, 남벽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해와 달, 별이 그려져 있고 불꽃무늬와 초롱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벽화는 무용총과 비슷하게 인물풍속도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고분은 평안남도 강서에 있는 봉토석실분으로, 대묘와 중묘, 소묘의 3개 무덤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널방이 하나이며(외방무덤), 고구려 후기 양식을 반영하여 벽화는 도교의 신성한 동물인 사신도를 벽에 직접 그려놓았다. 널방의 좌우 벽면에는 주작을 하나씩 그렸고,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그리고 모줄임천장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그려 도교 신화체계에 맞게 그려놓았다.
백제
고구려의 방계인 백제는 무덤 양식도 고구려와 비슷하다. 백제의 무덤은 널무덤, 돌무지무덤, 돌덧널무덤, 독널무덤, 굴식 돌방무덤, 벽돌무덤(전축분) 등 다양하게 있는데, 지배층의 무덤은 초기(한성 시대)에는 돌무지무덤이었다가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해간다. 한성 시대 고분의 경우 주로 한강 중상류와 임진강 유역의 강안 사구에 위치해 있는데, 모래밭 위에 돌을 쌓고 여러 기의 매장주체부로 석곽을 설치한 무기단식 적석묘(적석묘, 적석 분구묘, 즙석묘, 즙석식 적석묘)가 많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역은 2-3세기 백제의 영역이라고 보는 설이 있고, 고구려 유민이나 예족 집단의 영역으로 보는 설도 있다.
백제의 초기 고분은 무기단식 적석묘였다. 보통 강가의 모래밭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강돌을 얇게 쌓아 적석층을 만들고, 매장주체부에는 7,8겹 가량 두껍게 돌을 올리고 주변부는 1,2겹만 쌓는다. 지배층의 무덤은 연천 학곡리와 삼곶리, 남한강 유역인 양평 문호리, 춘천 중도, 평창 응암리 등지에 분포해 있다. 한편 연천 삼곶리와 학곡리에서는 매장주체부의 크기가 작은 수혈식의 다장 석곽이 무덤 내부에서 발견되었는데, 해당 지역의 유지 세력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4호분은 서울에서 발견된 백제의 왕릉으로, 현재 4개 무덤만 보존되었으며 원래는 290개 이상의 무덤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누가 이 무덤을 건설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한쪽에서는 3세기 중반 남하한 적석총 문화 세력이 몽촌토성과 흑색마연토기, 즙석식 봉토분을 건설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과 결합하여 풍납토성과 함께 축조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4세기 중반 부여에서 남하한 비류계 집단이 온조계열 왕조를 교대한 증거로 본다. 이외에 근초고왕기에 고구려와의 경쟁의식으로 돌무지무덤으로 건설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고분과는 별개로 백제 영토에서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 다양한 양식의 무덤이 발견된다. 이 중 주구묘와 분구묘(여러 개의 토관묘나 옹관묘를 합쳐 거대한 분구를 쌓은 무덤)는 마한 계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지방에서는 주구토광묘와 토광묘, 수혈식 석곽묘, 석실분 등 다양한 양식의 무덤이 발견된다. 공주 수촌리 유적에는 독립된 수장급 고분 구역 내에 토광묘와 석곽묘, 석실묘가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보인다.
굴식 돌방무덤은 한성시대 말기부터 나타나 웅진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화성 마하리, 공주 수촌리, 원주 법천리, 청원 주성리 등지에서 한성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되었고, 하남 광암동에서도 그러한 무덤이 발견되어 적어도 4세기 후반부터는 굴식 돌방무덤이 백제에서 계속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은 벽이 아치를 이루고 맨 위에 천장돌 하나가 있는 궁륭식 천장이며, 주로 평지가 아닌 구릉에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