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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빈민법 시대 총설 본문
빈민법은 근세 영국에서 출현한 최초의 근대적 사회복지 체계이다.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영국은 경제구조 자체가 변했고, 이는 도시빈민의 대규모 양산을 불러왔다.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지향한 정부는 도시빈민을 통제하기 위해 빈민법을 제정하였다. 빈민법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열악하고 비인도적인 빈민 대우가 빈민법 하에서 실행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른게 원인이니 삼청교육대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꼰대들이 외치는 이상사회가 바로 이 빈민법이 시행되는 사회다.
1.배경
빈민법은 영국에서 탄생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각지에 도시가 탄생했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토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시에 도시 빈민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고, 무역을 통한 귀금속 유입으로 발생한 물가상승도 여기에 기여하였다. 과거에는 도시 빈민의 수는 적었고 종교기관의 자선으로 생존을 책임질 수 있었지만, 급격히 늘어난 빈민에 더해 성공회의 확산과 절대왕정을 추구한 헨리 8세가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을 선포하여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더이상 빈민에 대한 복지가 불가능했다.
기존의 복지체계가 무너지고 빈민은 늘어나자, 복지는 새로이 국가의 주인이 된 절대왕정의 몫이 되었다.1 초기의 복지 관련 법안은 우선 구걸을 통제하고, 일할 수 있는 빈민을 일하게 만들면서, 일할 수 없는 빈민을 구호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먼저 백년전쟁기 에드워드 3세는 1349년 ordinance of labourers를 제정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빈민이 구걸 자체를 금지하고 60세 이하의 모든 남녀의 노동을 강제하였다. 다만 노인과 장애인, 과부, 부양아동은 구제가치가 있는 빈민으로 분류되어 이러한 조치에서 제외되었다.2
1531년에는 <The Act Concerning Punishent of Beggars and Vagabonds(걸인.부랑인 처벌법)>가 제정되어 구걸과 부랑이 나태함의 결과라고 규정하면서, 일할 수 있는 빈민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시장과 치안판사가 가난한 노인과 일할 수 없는 자를 조사하고, 이들에게 구걸 허용 증서와 구걸 구역을 배정하도록 하였다.3 1536년의 개정안(The Act for Punishment of Sturdy Vagabonds and Beggars)에서는 지역 교구에서 자선금품을 모금하여 구제가치가 있는 빈민을 구호하고, 5세 이상 14세 미만인 아동은 도제로 보내도록 하였다.4
1547년에는 걸인,부랑인 처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는데, 일할 능력이 있는 자가 3일 이상 노동을 거부하면 가슴에 V자 낙인을 새기고 2년간 노예로 삼도록 하였다. 도망치는 경우 이마에 S자 낙인을 새겨 평생 노예로 삼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5 이 법은 당대에도 너무 가혹하다는 얘기가 돌아 3년 후 폐지되었고 1536년 개정안의 형태로 다시 부활하였다. 1563년에는 빈민에 대한 기부를 거부하는 자를 처벌하는 법이 신설되어, 후에 poor rate(구빈세)의 시초가 되었다.6
2.구빈법
난잡하게 제정된 빈민법들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1563년에 처음 빈민법이 제정되었고, 72년에 구빈세와 구빈감독관(빈민감독관)이 도입되었다. 76년에는 빈민에게 직업교육과 강제노역을 부과하고, 사생아의 양육부담을 교구가 아닌 부모에게 부여하였다. 이 시기 빈민법의 핵심내용은 일할 수 있는 빈민을 작업장(workhouse)으로 보내 일을 시키고, 일할 수 없는 빈민을 자선원(charitable hospital)에 입소시켜 보호하며, 일할 수 있으나 일하지 않는 빈민을 '나태'한 자로 찍어 교정원(house of correction)에서 처벌하는 것이었다.7
1597년의 빈민법 개정안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상호부양의무를 부과하였다(가족책임의 원리). 그리고 일할 능력이 없는 노인, 시각장애인, 하지 지체장애인 등을 시설에 입소시켜 보호하고, 일할 능력이 있는 자는 스스로를 부양하도록 규정하였다. 구빈감독관 설립과 부랑자의 (원래 거주지로의)강제송환도 법에 명시되었다. 1598년에는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1601년 엘리자베스 여왕 휘하의 의회는 기존의 빈민법을 모아 <엘리자베스 빈민법(구빈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구빈법은 1597년에서 1598년까지의 빈민법 관련 법들을 모두 통합하였는데, 4가지 원칙을 확립하였다. 구빈법은 1)빈민구제의 책임을 국가에 부여했고, 2)재산세 명목으로 구빈세를 징수하였으며, 3)치안판사의 감독 하에 구빈 업무와 구빈세 징수를 관장하는 구빈감독관 직책을 설립하고, 4)가족 책임의 원리를 조부모까지 확대하였다. 이 법은 1834년 신빈민법이 제정될 때까지 영국 빈민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빈민이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가난해진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교회에 의지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억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스는 과거에 그랬듯이 빈민을 노동 능력의 유무에 따라 나누고 대우도 달리 하였다. 일할 수 있는 빈민은 house of correction이나 강제노역장에 끌려났고, house of correction에서 노역을 거부하는 자는 감옥에 가두었다.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금지되었고, 다른 교구에서 이주한 경우 1년 이상 거주했던 교구로 송환하였다.
반면 일할 수 없는 빈민, 병자나 노인, 맹인, 청각장애인, 신체장애인, 정신장애인, 아이가 있는 어머니는 구빈원에 들어가 원조를 받았다. 만일 이들이 집이 있거나, 그들이 집에서 원조를 받는게 더 저렴하다고 판단되면 원외구조도 허용하였다. 이때는 구빈감독관이 식량과 옷, 연료를 현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14세 미만의 고아나 빈곤아동 등은 요보호아동으로 분류되어, 보호를 원하는 시민(없으면 최저입찰자)에게 위탁되었다. 그러다 8세가 경과하면 도시에서 도제생활을 하게 하였는데, 소년은 24세까지 주인의 상거래 활동을 배웠고 소녀는 21세 혹은 결혼시까지 가정부나 도제로 일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구빈법을 통해 빈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노동현장에 배치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구빈법의 집행을 위해 추밀원(privy council)은 정기적으로 치안판사에게 편지를 보내 구빈 임무를 이행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실제 시행은 당시 영국이 그러했듯이 지방기금을 통해, 지방관(주로 시장)이 실시하여, 지방 빈민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고,8 세부 기준과 방법도 지방마다 달랐다. 때문에 재정이 열악한 지방은 실제 복지보다 빈민을 분류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에만 주력했고,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자 이를 감독하는 중앙권력의 힘도 약해졌다. 그 결과 빈민은 더 좋은 복지를 받기 위해 지역을 옮겨다녔고, 이를 막으려는 구빈감독관과 의회는 <정주법>을 제정하여 적극적으로 빈민의 이주를 막았다.
결과적으로 구빈법은 대규모로 체계적으로 실시된 최초의 사회복지 체계로서, 복지대상자의 조직과 관리, 원조기술의 발달에 기여하였고 처음으로 복지를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대상자를 기준에 따라 분류했고, 재원 확보 방법을 법제화했다는 의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시행에서 걸림돌이 많았고, 그 핵심원리는 철저히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빈민이 복지를 받을 권리인 수급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주법
구제의 수준이 지역마다 다르자 빈민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혜택을 얻기 위해 잘사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자 부유한 지역의 구빈감독관은 돈을 아끼기 위해 밖에서 들어오는 빈민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자기 지역을 찾아온 가난한 임산부들을 쫓아내고자 법정을 들락거리는 것이 구빈감독관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9 이에 영국 의회는 1662년 정주법(the law of settlement)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An Act for The Better Relief of The Poor of This Kingdom'으로, 법의 핵심은 빈민이 자신의 출생지나 가장 최근에 거주했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정주법은 이전의 ordinance of labourers와 비슷하며 사실 앞서 보았듯이 1547년부터 이러한 법이 있었다. 다만 1598년과 1601년 법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가, 1662년 정주법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되어 1795년까지 존속하였다.10
3부 25조로 구성된 이 법은 1부는 전문, 2부는 구빈조합설립, 3부는 빈민법 수정안으로 구성되었다.11 정주법은 빈민의 소속 지역(교구)을 명확히 하고, 법적 정주를 촐생, 혼인, 도제, 상속에 따라 결정하였다. 교구로 새로 이주한 자는 그 교구에 소유한 토지가 없는 경우 40일 이내에 떠나게 하였다. 단 10파운드의 집세를 낼 수 있거나 공탁하는 사람은 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었다.12
이 법은 당대에도 비판을 받았고, 자본주의화가 심화되면서 더 비판받았다. 경제사상가 애덤 스미스는 '영국에서 나이가 40세에 달한 빈민치고 이 악법에 의해 무고한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비판하며, 정주법이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다고 비판하였다.13 그의 말대로 정주법은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아 자본주의와 대립하였고, 노동력이 필요한 대도시는 이 법을 반쯤 무시하였다. 결국 농본사회의 잔재를 간직한 이 법은 사회변화와 계속 충돌하다가 18세기 말 폐기되었다.
빈민법 시대의 노동관과 작업장법
빈민법 시대의 사람들은 빈민이 나태하다고 믿었다. 가난은 그들이 나태한 결과였고, 나태의 죄를 저지른 빈민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로크는 빈민이 사람 사이의 신뢰와 상호성을 악용하는 자라고 공격하고, 빈민의 증가가 규율의 느슨함과 도덕적 타락의 결과라고 믿었다. 때문에 술집처럼 나태를 조장하는 장소를 없애고, 군함이나 교정원을 통해 빈민을 재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또한 그는 구빈책에 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빈민을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하고, 통상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로크의 주장만이 아니었다. 리슐리외는 '노새가 병드는 것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긴 휴식 때문'이라며, 사람들이 편해지면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에서 더 지지를 받았다. 맨더빌(mandeville)은 방직공과 양복수선공이 주5일 일하게 하려면 주4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영(young)은 하층계급은 가난하지 않으면 근면히 일하지 않는다고 혹평하였다.15 빈민법에서 일할 수 있는 빈민을 처벌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이 배경이 되었다.
반면 일부 사람들은 빈민의 발생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아서이며, 국가가 빈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동인도회사 사장이었던 차일드(child) 경은 저서 <신무역론>에서 1)영국의 빈민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고 이는 빈민과 국가 모두에게 도움이 안되며, 2)빈민의 자녀는 구걸과 나태 속에서 자라다보니 게으르게 되고, 3)빈민에게 성별과 연령에 적합한 직업을 주면 매년 수십만 파운드의 공공이익이 산출되니, 4)빈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신과 자연에 대한 의무라고 주장하였다.16
이에 이들은 사회적 조합장을 만들어 빈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고안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브리스틀로, 브리스틀 의회는 1696년에 사업단을 구성하여 2년 후 빈민을 위한 작업장을 건설했다.17 이 작업장은 빈민에게 일자리를 주어 그들을 교화하고, 구빈시설의 유지비를 작업장의 수익으로 충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동력의 저숙련과 상업적 경영의 부재로 인해 이 작업장은 충분한 이윤을 내지 못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작업장은 계속 실패하였다.
이와중에 1722년 edward knatchbull act(workhouse test act, 작업장법)가 통과되었다.18 이 법은 각 지역에서 빈민 구제를 위한 작업장을 지을 권한을 부여하면서, 작업장의 운영을 민간사업자에게 위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작업장에 입소하지 않은 빈민에게는 구제를 거부할 권한도 주었다. 이에 많은 사업가가 위탁계약을 맺었는데, 계약은 보통 1)민간업자가 일정한 수의 빈민을 고용하는 형식, 2)지역에서 일정액을 받아 작업장을 운영하는 형태, 3)지역에서 정액 보조금을 받고 구빈 업무를 대행하는 형태였다.
민간업자는 이 계약을 아주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활용하였다.19 민간업자는 빈민에게 열악한 식사를 제공하고 일을 심하게 시키는 방식으로 빈민을 착취하였다. 또는 작업장의 규칙을 매우 가혹하게 만들어 실질적으로 빈민을 모두 쫓아내기도 하였고, 정액 보조금을 받는 경우 작업장에 입소하지 않는 빈민에게 매우 부족한 구호만 해주어 돈을 아꼈다. 그 결과 민간업자는 이득을 보았고, 구빈비용을 지출하는 지방정부와 구빈을 받는 빈민 모두 손해를 보았다.
작업장법의 문제는 계속 지속되었다. 그리고 지방의 치안판사이자 하원의원이었던 토마스 길버트(Thomas Gillbert)가 1782년 개정법안(토마스 길버트법, 길버트법)을 통과시켰다. 개정법안에 따라 민간사업자에게 작업장 운영을 위탁하는 조항이 없어졌고, 지역이 서로 협업하여 구빈원을 설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일할 수 있는 빈민도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는 생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20
한편 1795년에는 스핀햄랜드법이 실시되었다. 1795년 5월 6일 버크셔의 주 장관과 치안판사들은 스핀햄랜드의 pelican 인(inn)에서의 최저임금을 정하는 논의를 실시했는데,21 최저임금이 생필품 가격에 맞춰 조정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기존 구빈원에서 사용했던 생필품 목록인 table of universal practice에 근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논의 끝에 치안판사들은 두 안을 모두 거부하고, 가장의 수입과 가족의 부양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소비용 간의 차이만큼의 비용을 빈민에게 수당으로 지급하자고 하였다.22 이것이 스핀햄랜드법(the speenhamland act)의 시작이었다.
스핀햄랜드법 하에서 빈민은 자신의 수입이 최저생계비용에 미달하는 만큼의 금액을 지방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것은 노동하는 빈민만이 아니라 일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빈민도 대상이었다. 스핀햄랜드법은 이후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원석조23는 이 법이 낙인을 만들지 않는 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를 악용한 기업가들이 인건비 절약을 위해 빈민에게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지급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부족분을 매우는 과정에서 복지지출이 늘어나면서 많은 지방정부가 곤란을 겪었다. 1801년 스핀햄랜드법에 의한 지출은 1760년의 6배였고, 1818년에 정점을 찍었으며 그나마 적어진 1832년에도 1760년의 5.5배에 달했다.
2.신빈민법
근세에 제정된 빈민법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상태와 문화적 관념을 반영하였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상태와 문화가 변하자, 빈민법도 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빈민법 시대와 빈민법 시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근대화와 사회계약론의 발달로 개인주의와 그 정치적 파생물인 자유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혁명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사후 계몽주의가 발달하자,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기존의 빈민법에 적대적인 시선을 보였다. 빈민법의 기반이 되었던 가부장적 온정주의는 계몽주의자의 도전을 받았고, 그러한 도전자 중 하나는 애덤 스미스였다. <국부론>에서 정주법을 비판한 애덤 스미스는, 스핀햄랜드법에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 스핀햄랜드법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자유롭게 임금을 결정하는 것을 방해하여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에 해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 또한 애덤 스미스에 동조하여, 경제활동을 온전히 시장에 맡길 때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이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벤담은 빈곤의 내적 요인에 주목하여, 어떤 빈민(lazy hand)은 그들의 나태와 게으름으로 가난해졌으며 빈민법은 그들의 타락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였다.24 이러한 타락을 막기 위해 벤담은 1)빈민 구호를 극빈자(poor & pauper)로 제한하고, 2)지원받는 빈민의 삶의 수준은 자립하여 일하는 사람보다 높아선 안되며(열등처우의 원칙), 3)원할한 제도의 실현을 위해 극빈자를 특정 수용시설에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토마스 맬서스(Thomas Malthus)는 다른 이유에서 빈민법에 비판적이었다. 멜서스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사회가 인구증가를 억제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그 결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필연적으로 부족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되면 기근과 빈곤, 악덕이 발생한다. 이러한 맬서스 트랩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적 방종을 규제하고 결혼을 연기해서 출산율 자체를 떨어트려야 하는데,25 이 맥락에서 맬서스는 빈민의 사망율을 강제로 떨어트리는 빈민법에 부정적이었다.
맬서스는 빈민의 가난과 불행이 그들 자신의 책임이고, 분별력과 근검절약의 부족과 같은 잘못된 생활방식이 가난을 유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빈민법이 빈민의 노동의욕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빈민의 조기결혼과 다산을 부추겨 인구증가를 일으켰다고 비판하였다. 비슷하게 당대의 경제학자 리카도도 국부의 일정 부분은 임금으로 지출되는데, 빈민구제를 위해 비용을 지출하면 그만큼 임금으로 나가는 부분이 줄어든다며 빈민법을 공격하였다. 그 대안으로 맬서스는 성직자들이 빈민을 교육하여 그들의 나태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신빈민법에 반영되었고, 특히 원외구호의 중지에 큰 기여를 하였다.
제정 배경
빅토리아 시대가 되자, 기존의 빈민법 체계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복지예산은 스핀햄랜드법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증가해서, 1832년의 구빈지출은 1760년의 5.5배에 달했다. 게다가 이렇게 늘어난 지출은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진 산업계가 아니라 곡물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주에게 부담되었다. 아울러 사람들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노동의 질이 현격히 저하되자, 그 원인을 빈민법에 돌렸다.26
그러자 19세기부터 빈민법을 폐지하여 복지지출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1817년 빈민법 특별위원회는 빈민법을 비판하는 보고서(the select committee on the poor law)를 발표했다.27 1832년 2월에는 정부에서 왕립빈민법위원회(royal commission for inquiring into the administration and practical operation)를 구성하였다. 왕립빈민법위원회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시니어(senior)와 공리주의자이자 벤담의 제자인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이 주축이 되었으며,28 2년간 활동한 끝에29 1833년 13000페이지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1834년 4월 17일 발간된 최종보고서는 빈민법에 대한 직업과 계급, 이해관계, 교육에서 서로 다른 각계각층의 의견을 담았다. 보고서는 2부로 구성되어 1부는 빈민법의 실시와 관련항여 수당, 정주법, 사생아 문제 등의 62개 항목을 다뤘고, 2부에서는 그 해결책을 다뤘다. 보고서에서 왕립빈민위원회는 빈곤이 노동자의 나태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정신병(the disease of pauperism)을 치료하기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자와 그 가족에 대한 구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특히 위원회는 스핀햄랜드법을 매우 적대하여, 근로장려금이 법 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였다.31 또한 채드윅은 극빈자(indigent)가 아닌 그냥 빈민(poor)은 복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2
왕립빈민위원회는 빈민 발생의 구조적인 원인은 외면하고, 지금 꼰대들의 정신적 조상 세대 아니랄까봐 가난을 철저히 빈민의 개인적 잘못으로 몰아갔다. 그리하여 당대 빈민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 작업장 내에서의 구제. 그 밖에서의 구제는 금지
- 열등처우의 원칙
- 작업장 입소 심사는 신청자가 스스로 한다. 빈민의 작업장은 그 무엇보다 열악하므로 이곳에서 수모를 감수하며 제 발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빈민의 가난을 증빙한다.
- 분리수용. 신체 무능력자(노인, 장애인)와 어린이는 분리되어 수용하고, 남녀도 분리 수용한다. 가족과 부부도 예외가 아니다.
- 작업장의 구제방식, 예산, 수용자 노동에 대한 결정을 일관되게 확립하고 집행할 중앙행정기구 설립
신빈민법의 제정
의회는 왕립빈민위원회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1834년 8월 13일 신빈민법을 제정하였다.33 정확한 법률 명칭은 <An Act for The Amendment and Better Addministration of The Laws to The Poor in England and Wales>로, 왕립빈민위원회의 주요 주장 3가지가 모두 반영되었다. 심지어 현재의 사회복지에도 이러한 원칙이 부분적으로 적용되는데, 신빈민법의 핵심 골자는 다음과 같다.
- 열등처우의 원칙(principle of eligibility): 빈민의 게으름을 처벌하고 스스로 자립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빈민은 일반 시민보다 더 열등하게 살아야 한다. 채드윅이 작성한 이 원칙 하에 작업장은 빈민에게 사생활이나 인도적인 대우를 하지 않았고, 바스티유라고 불릴 정도로 열악했다. 웹 부부는 구빈원을 죄없는 감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34
- 작업장 수용의 원칙(principle of workhouse system): 모든 빈민은 복지시설에 들어가야 하고, 일할 수 있는 빈민은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신빈민법은 1722년의 작업장법을 부활시켜 빈민을 시설에 수용하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구호를 중단하였다.35 작업장에서는 빈민을 신체무능력자, 아이, 여성, 남성으로 분류하였고, 가족도 찢어놓았다.36
- 전국적 통일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 uniformity): 런던의 중앙감독청(The Central Board of Control)이 복지행정을 총괄한다.37 채드윅은 15000개의 교구가 빈민법을 운영하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보고서는 행정개혁에 대한 교구의 무능력을 수차례 지적하였다.
신빈민법은 빈민법과 여러 부분에서 달랐다.38 구빈세의 징수는 동일했지만, 대상은 줄어들었고 방식도 원내구호로 제한되었다. 또한 교구가 아닌 빈민법조합(poor law union)을 단위로 하여 central board of control의 감독을 받는 빈민법 감독위원회(board of guardians)에서 운영했고, 3가지 원칙을 명문화하였다. 또한 빈민이 분리수용되어 아이들도 7세가 넘으면 분리되었고, 1847년까지는 노인부부도 분리되었으며,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39
비록 신빈민법이 시대정신의 산물이긴 했으나, 신빈민법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1834년 4월 30일 <타임즈>는 신빈민법이 '법전을 더럽힐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신빈민법에 따라 애빙던(abingdon)에 처음 작업장이 열리자, 시설장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40 찰스 디킨스는 1837년부터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재해서 구빈원의 열악한 상황과 신빈민법의 참혹성을 고발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빈민법이 빈민의 전통적인 권리를 박탈한다고 비판하였다.41
옹호자들은 신빈민법이 복지지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옹호하였다. 실제로 1837년 구빈비용은 1834년보다 1/3 이상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빈민법의 효과인지, 경제성장의 효과인지는 불확실하다.42 이것과 별개로 구빈원의 비인간적인 환경은 옹호자들조차 옹호하지 못했고, 정치권의 주요 인사들도 신빈민법을 비판하였다. 토리당의 엘든 경 존 스콧(John Scott, 1751-1838)은 신빈민법이 기독교 국가의 어떤 법보다 가장 저주스럽다고 혹평하였고, 보수당의 디즈레일리는 하원에서 신빈민법이 '영국에서는 가난이 범죄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린 입법'이라고 공격하였다.43
이러한 거센 비난으로 신빈민법의 적용은 점차 약해졌다.44 질병 및 사고나 심신장애를 앓는 빈민에게는 열악한 처우의 예외가 인정되었고, 남편이 사망한 과부에게도 6개월의 임시 원외구호가 허용되었다. 1842년에는 원외노동자 조사령(Outdoor Labour Test Order)에 따라 일할 수 있는 빈민도 원외구호의 대상이 되었고, 1845년이 되면 빈민의 84%가 원외구호를 받는다.45 1852년에는 원외구호령(Outdoor Relief Regulation Order)에 의해 노인과 병자에 대한 원외구호가 합법화되었다. 이러한 예외의 적용은 구빈원에 대한 여론이 안좋았던 지역에서 더 빈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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