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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총론

과학주의자 2026. 5. 15. 18:15

한국은 동아시아의 한 축을 이루는 국가로, 고대부터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다. 중화 문명의 변방에서 한국은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나름의 독자성을 꾀했고,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옵저버로 기능하였다. 지금도 한국은 중국과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동시에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은 한국은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역동에 서 있는 한국은, 이전부터 중화와 변방이 충돌하는 역동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두 힘의 작용은 한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분야의 주요 저서로 <한국문화유산 산책(개정판,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새문사,2019)이 있다.

 

한국의 고분

https://tsi18708.tistory.com/412

한국의 고분과 무덤은 중국의 영향과 독자적인 문화적 요소의 혼합으로서 시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했다. 한국은 가장 많은 고인돌을 보유한 국가이기도 하고, 중국의 무덤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나라기도 하였다.

 

한국 대중문화사

https://tsi18708.tistory.com/236

한국은 옛날부터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가꾸어 왔지만, 현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화는 광복과 함께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에 노출되었고, 6-70년대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한반도의 인류[각주:1]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였다. 이들은 북쪽으로부터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불과 초보적인 도구를 사용하면서 구석기 문화를 꽃피웠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은 주로 북한에 있는데, 평양 대현동 동굴의 역포인, 평안남도 덕천시 승리산 동굴의 덕천인 등이 그것이다. 해당 동굴은 석회암 지대로서 화석이 보존되기 유리한 지역이고 그래서 발견될 수 있었다.

 

한반도에 서식한 호모 사피엔스는 전형적인 구석기인이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해진 이후로 인간은 여러 척추질환을 앓게 된 대신 두뇌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고, 불과 초보적인 도구로 생활반경을 넓혀갔다. 이들은 깨트린 돌(뗀석기, 타제 석기)을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간단히 깨트린 돌을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트린 돌(몸돌)의 파편(격지)으로 날을 만들어 가죽을 벗기고 사물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구석기 시대 후기로 가면 뗀석기가 찍개,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등 다양한 석기로 분화되었고, 뗀석기의 아랫부분을 슴베로 가공하여 창이나 작살, 화살을 만들었다.

 

슴베찌르개. 아랫부분이 슴베로, 저렇게 가늘게 가공한 부분을 나무와 결합해 도구를 만들었다.

 

 

 

개화기의 국제적 배경[각주:2]

개화기는 조선이 확장하는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던 시대였다. 근대를 맞이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발달시킨 서구는 자국의 부와 자부심을 증대시키기 위해 해외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행보는 비서구사회를 열등한 사회로, 비서구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개화기는 동시에 서구식 국제질서가 비서구 세계로 확장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구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주권 존중, 상주 사절단 파견, 무역에 대한 여러 규정이 포함된 베스트팔렌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베스트팔렌 체제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로 진출하면서 서구를 너머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일부 국제법 학자는 비기독교 국가에는 국제법이 적용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베스트팔렌 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전체의 일반적인 국제레짐으로 정착해 갔다.

 

베스트팔렌 체제를 위시한 근대 국제법이 동양에 전래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었다. 1864년 청은 미국의 법학자 헨리 휘턴(Henry Wheaton, 1785-1848)이 저술한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도 전래되었고 68년 일본에서 <국제법 원리>로 번역되었다. 국제법에 대한 이해를 습득한 일본은 76년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 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서로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반면 청은 국제법 원리의 속국 개념에 주목하고, 조선이 자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및 조선의 개화당과 대립하였다.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기원

한국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반과학적 보수 대형교회 세력은 기본적으로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적으로 주류를 차지한 것은 해방 후 이승만 시대부터였다. 본인부터가 개신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자기 정부의 38%를 기독교인으로 채웠고, 장관은 47.7%가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직접 지배하지 못했던 국회도 권사인 국회의장을 포함하여 의원의 21%가 기독교인이었다.# 이처럼 기독교에 유리한 구도 속에서 이승만 정부는 신학생들에게 특별히 군복무를 면제해주는 등 비기독교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각주:3]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국 개신교는 정부를 비판하기보다는함께 반공을 내세우고 독재정권에 충성하면서 교회의 세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함석헌을 비롯한 오직 소수의 기독교인만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각주:4]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자유당 하부조직처럼 기능하며 정부를 선전하였다. 이승만이 3선 개헌을 시도할때도 개신교는 앞장서서 선거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을 도왔고, 동조하지 않는 개신교인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는 당대인들이 당대 개신교를 이승만이나 자유당과 동일시한 이유이기도 하였다.[각주:5]

 

오순절적인 특성도 이때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0년대부터 한국 개신교에는 부흥회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개중에는 안수기도를 해준답시고 돌팔이 치료를 해대는 기도원과 전도사도 매우 많았다. 천부교 교주 박태선은 55년부터 전도관 운동을 시작하였고, 70년대에 정부의 탄압을 당할 때까지 유사의학을 내세우며 승승장구하였다. 통일교 교주 문선명도 54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통일교를 확장하였으며, 비록 자신은 55년에 공금 횡령과 성추문으로 수감되었지만 교세는 그칠 줄 몰랐다.[각주:6]

 

 

21세기 한국의 정치지형

민주주의가 수립된 이후 한국의 정치는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 좌파적 2-30대와 투표에 열성적인 우파적 5-60대로 구성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적어도 2010년대 후반부터는 그러한 주장이 실제와 맞지 않아 보인다. 20대 총선의 경우 보수라고 생각되었던 50대가 민자당계 정당을 지지하지 않았고, 영호남의 투표 구도도 일부 흐트러져서 전라도 지역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다.[각주:7] 이는 호남 유지가 대거 국민의당으로 이동한 결과로 국민의당이 망한 이후 호남은 다시 민주당 지지지역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연령에 따른 지지세력 구도의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사

한국의 주된 생업은 옛날부터 농사였다. 그러나 유물이 적고 자료가 미비하여 조선 이전의 농업에 대한 현대의 이해는 일천하다. 신라시대 밭으로 추측되는 화성 석우리 먹실 유적과 진주 대평리 유적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에서는 벼와 기장, 보리, 수수, 조, 팥이 출토되었다.# 또한 신라 기록에는 세금을 조로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각주:8] 이를 통해 본다면 한국의 벼농사는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주류가 아니었으며, 다양한 곡식이 복합적으로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벼농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계속된 수리시설의 건설로 조선시대에 이르면 벼농사에 필요한 논을 채울만큼 물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임진왜란으로 경작지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지만 17세기에 이르자 경작지 면적이 복구되었고,[각주:9] 추가적으로 비료의 발달이나 이앙법 도입 등으로 벼의 생산력은 계속 증가하였다.[각주:10]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조선 전기에 비해 농업 생산량이 2배 이상 증가하게 되었다.[각주:11]

 

농업 생산량의 증가는 상공업의 부흥에도 기여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서민의 주문을 받고 수공업 제품을 제조하는 사영 수공업[각주:12]이 등장하였고,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곳곳에 장시(시장)가 형성되었다.[각주:13] 11-15km마다 세워진 5일장은 조선 후기의 상품유통과 숙박, 운송, 보관, 금융 등을 담당하였고,[각주:14] 일부 상인은 서로 담합하여 유통망을 장악하고 독과점을 행사하는 도고로 발전하였다.[각주:15] 이처럼 상업이 발달하자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조선 경제에 화폐를 도입하였다.[각주:16] 그러나 그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농업 생산량 증가는 유럽이나 중국, 인도, 일본에서와 같은 상업의 부흥에는 이르지 못했다.[각주:17]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는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시대에도 달성되지 못했다.[각주:18] 비록 일제시대에 한반도에 산업시설이 생기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본은 일본인에 의해 독점되어[각주:19] 한반도 전체로 파급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산업시설은 전선에 가까운 북한에 집중되었다.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는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각주: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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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2: 근현대편. 돌베개,20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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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성수. 함석헌 평전: 신의 도시와 세속의 도시 사이에서. 삼인,20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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