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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역사학 총론 본문
역사는 가장 오래된 3개의 인문학 중 하나고, 지금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분야기도 하다. 역사는 인간을 논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이고, 사회적 사실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이며, 최근에는 자연과학적 방법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의 요소도 어느정도 있다. 어느 경우든, 역사를 잊은 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가장 필요한 학문 중 하나이다.
역사학은 사회과학의 일부로서 주관적인 면이 크고 결과가 비일관적일수도 있다. 동시에 경험적 근거에 기반하여 탄탄한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나 일반적인 철학 사상 이상의 객관성을 가진다. 고로 역사학적 연구는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되, 그 주관성과 왜곡의 가능성을 항상 인식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과학의 역사
https://tsi18708.tistory.com/391
과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근세 유럽에서 탄생했다. 신플라톤주의가 휘청이던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자리를 위협하고 종교개혁이 들고 일어나면서 기존의 철학과 종교는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난립하는 철학들 속에 학자들은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의 토대를 쌓아갔다. 그 결과 그들은 과학을 발명했고, 새로 탄생한 과학은 다시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회복지의 역사
https://tsi18708.tistory.com/406
농업이 시작되어 약자도 부양하는게 가능하게 된 이후, 여러 문명에서는 약자를 지원해줘 생존을 보장하는 나름의 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근대에 들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더 체계적인 형태로 등장하였고, 근대를 지탱하는 새로운 한 축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https://tsi18708.tistory.com/234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등장하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제 2물결이 불어오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구시대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 잔재들은 영국이 완전한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다.
한국 대중문화사
https://tsi18708.tistory.com/236
한국은 옛날부터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가꾸어 왔지만, 현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화는 광복과 함께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에 노출되었고, 6-70년대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1.역사학이란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구성하는 흐름을 말한다. 역사학에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말하고, 이러한 사건을 탐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고 한다.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탐구하며,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틀을 제시하기도 한다. 때문에 역사학은 인문학으로도 자주 분류되지만, 여기서는 역사학을 일종의 사회과학으로 간주한다.
역사를 의미하는 史는 기록자를 의미한다. 역사를 뜻하는 영어 history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정보나 탐구의 복수형으로 그리스 이외 지역의 여러 사실을 탐구했던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서를 historia로 지으면서 historia가 역사라는 의미가 되었다. 독일어로 역사는 geschichte인데, 이 또한 과거의 사실을 의미한다.1
역사학은 역사를 통해 현재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 즉 과거의 역사를 배우고 이를 현재에 비추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면서, 현재에 대한 이해도 키우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 역사학의 하나의 효용이다.2 그러나 적지 않은 역사학자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이러한 효용을 부정하고는 한다. 이는 주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기인하는데, 역사적 패턴을 찾는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왜 우리가 너희의 말에 기울여야 하는지 심히 의문이다.
사회복지학자 하상락3은 역사학이 일종의 사회과학이며,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역사학은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현상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연구 대상이 동일하다. 또한 가변적인 인간 현상에 대한 한정된 일반화에 관심을 보이며, 방법론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역사학은 사회과학의 일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하상락은 주장하였다. 다만 보편적인 이론에 목표를 두는 일반 사회과학과 달리 역사학은 특정 사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4
말레우스 말레피카룸5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Maleficas, & earum hæresim, ut phramea potentissima conterens)은 1486년에 중세 유럽에서 출판된 신학 서적으로, 신학자인 야콥 슈프랭거(Jacop Sprenger)와 하인리히 크라머(Kramer)가 저술하였다. 이 책은 세상에 마녀가 존재하며, 마녀가 마법을 부려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들을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출판될때 이 책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카톨릭 신앙을 강화하고 싶었던 카톨릭에서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벌이면서 이 책이 마녀사냥의 교본이 되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의 저자는 두 종교재판관이었다. 야콥 슈프랭거(Jacop Sprenger, 1436/1438-1495)는 독일의 성직자로, 라인펠덴(rheinfelden)에서 태어나서 1452년부터 도미니크 수도회에 소속되었다. 그는 퀼른대 신학부 학장을 맡기도 했고, 81년부터 마인츠와 트리어, 쾰른을 관할하는 종교재판관으로 일했다. 공저자인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 1430-1505)는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나 도미니크 수도원 부원장을 지냈으며, 슈프랭거와 비슷하게 모라비아, 잘츠부르크, 티롤을 관할하는 종교재판관이 되었다. 크라머는 왕성한 활동과 달변을 임명받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심복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책 전체를 거쳐 이 세상에 마녀가 실존하고, 나쁜 놈이며, 그래서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 저자는 여러 기독교 고전을 뒤죽박죽으로 인용하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엉터리 어원에 기반해서 온갖 요상한 주장을 한다. 비록 책의 형식은 논증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현대 시점에서 보았을때 논증의 근거는 형편없고 논증의 방식도 비논리적이다. 특히 어원에 관한 주장은 그냥 모두 다 거짓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의 요지는 명확하다. 이 세상에는 마녀가 실존하며, 나쁜 놈이다. 특히 마녀는 그것이 죄임을 알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루시퍼보다 죄질이 나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녀를 찾아내서 죽여야 하고, 마녀의 은닉자와 방조자, 동조자까지 모두 처벌해야 한다. 그들은 파문당하고, 교회의 땅에서 쫓겨나야 하며, 회개하는 자는 종신형, 회개하지 않는 자는 화형에 처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마녀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
이렇게 마녀를 적대시하면 마녀의 반격으로 죽지 않았을까? 슈프랭거와 크라머는 종교재판관은 마녀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3가지 경우에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첫번째는 신의 뜻에 따라 의무를 수행하는 공직자는 야훼가 마법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외에 성호 긋기나 소금, 성수 등을 활용해 주술적인 방법으로 마법을 막거나,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처럼 야훼의 은총을 받는 경우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책의 다른 곳에서는 마녀가 마법으로 종교재판을 수행하는 공직자를 방해한다고 주장하였다.
악마의 권능과 마법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 저자는 마녀가 어떤 마법을 쓰고, 왜 나쁜지 규명하려고 애쓴다. 이들은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주의자들에게 반박하며, 성경과 신학 고전(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그리고 이슬람 문헌을 근거로 마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마녀들의 마법을 일반 마법과 구분한다. 당시에는 주술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눈에 독기를 품고 노려보면 상대방이 해를 입는다거나 살인자의 근처를 지나가면 악한 기운의 영향을 받아 병에 걸린다는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저자들은 그처럼 자연적인 마법도 존재하지만, 마녀의 마법은 특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자연적인 주술은 일반 사람들도 할 수 있고 자연 법칙 이내에 있는 행위이지만, 마녀의 마법은 명백히 악마의 힘을 빌려서 수행하는 행위다. 악마의 힘은 빌린다는 점에서 마녀의 마법은 강신술, 해몽, 공기점, 물점, 불점, 흙점과 동일하지만, 마녀의 마법은 훨씬 죄질이 나쁘다. 마법을 사용하면서 신을 모독하거나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신성모독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고,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마법도 처벌받아야 하지만, 특히 마녀의 마법은 악한 것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악마 또한 엄밀히 말하면 자연법칙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오로지 신만이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악마의 능력은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악마의 모든 능력은 신이 묵인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고,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을 직접 조종할 수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는 빙의도 사람이 자유의지로 빙의를 거부하면 막을 수 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서도 악마의 권능은 철저히 자연법칙 하에 있고, 신의 묵인 하에서만 이뤄진다는 교리에 동의한다.
한편 이들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에 대해 현대와 다른 독특한 해석을 한다. 슈프랭거와 크라머에 따르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가 동일한 악마로, 악마는 서큐버스의 모습을 해서 사람의 정자를 뺏고 인큐버스의 모습을 해서 뺏은 정자를 사람에게 주입한다. 이를 통해 인큐버스와 성교한 인간이 임신을 하게 되고, 사람이 간음죄를 저지르게 만든다. 이러한 해석은 인큐버스에 대한 통설과 기독교 교리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왔다. 인큐버스와의 성교로 임신했다는 여성의 주장은 과거부터 있어왔는데, 이는 오직 야훼와 그 피조물인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생명을 만들 수 있다는 기독교 교리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왜 마녀는 여성인가
마녀사냥은 여성억압과 관련되어 있다고 흔히들 여겨진다. 물론 남성 중에도 마법사로 고발당한 사람이 있었지만,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여성이 마녀가 되기 쉽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이다. 슈프랭거와 크라머는 당대의 통념에 따라 여성이 불완전하고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여성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 부족하고, 신앙이 결여된 존재이며, 육체적 쾌락에 쉽게 지배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마법에 빠지기 쉬우며, 마녀가 되기도 쉽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중세 유럽의 여성관과 일관되게, 그리고 현대의 여성관과 어긋나게, 여성이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 쉽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감정에 많이 휘둘리고, 자신의 탐욕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리고 탐욕의 정점인 육체적 쾌락은 여성이 가장 몰두하는 것이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서는 여성이 본질적으로 음험한 존재이고, 그 음탕함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남성을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성욕이 더 강하고 상대를 유혹하는 성별이 여성이라는 주장은 현대의 고정관념과 판이하게 다르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여성이 마법에 더 빠지기 쉽다고 단언한다. 이는 여성이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 위해 마법 사용에 더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1)남의 말을 더 잘 믿고, 2)자신이 아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려고 하며, 3)힘은 약한 반면 복수심은 강해서 대안적인 힘(마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법에 더 잘 빠진다. 여성이 신앙이 결여되어 있고 쉽게 의심하는 것도 여성이 마녀가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탐닉이기 때문에, 성산업 종사자나 '아름답고 음탕한 여자'가 가장 마녀가 되기 쉽다고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서는 주장한다.
발푸르기스의 밤
이 책의 2부는 마녀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책 전체가 그렇듯 모두 허무맹랑하지만, 지금까지 내려오는 마녀 전승과 관련된 부분도 있다. 특히 저자가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명칭을 직접 사용하진 않지만, 마녀가 거쳐야 하는 집단적인 집회 의식에 대한 서술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 포함되어 있다. 슈프랭거와 크라머는 마녀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고 아이를 죽이는 의식을 치러 악마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발푸르기스의 밤은 그러한 계약 중 하나였다.
저자는 악마와 마녀가 맺는 공식적 동맹의 순서로 다음을 주장하였다. 먼저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로 마녀들이 모인다. 그러면 사람 모습을 한 악마가 그들을 맞이하는데, 여기서 신입 마녀들이 1차적으로 악마에게 순종의 서약을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앙과 예배를 모두 부정하고, 마리아를 '뚱뚱한 여자'라고 경멸하며 마리아 신앙을 부정한다. 이후 악마가 손을 앞으로 내밀면 신입 마녀들도 손을 내밀어 2차 서약을 한다. 곧이어 악마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신입 마녀들은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때 악마는 '맹세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충성하고, 타인을 악마숭배로 끌어들이라고 요구한다. 신입 마녀가 이 맹세에 응하고, 아이들의 뼈와 사지로 연고를 만들면 발푸르기스의 밤은 끝난다.
악마론
저자는 악마의 신체가 공기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악마의 몸은 기본적으로는 공기로, 악마가 물리적 피해를 입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공기이기 때문이다(물로 칼을 밸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악마의 신체는 흙의 성질을 띠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공기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악마의 신체가 응축되어 흙의 성질을 띠는 공기이고, 그래서 물리적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악마가 공기로 된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에서 악마는 기본적으로 영적 실체이다. 때문에 악마는 사람보다 더 잘 알고, 더 강하다. 저자들은 플라톤주의와 일관되게 영적 존재가 물질적 존재보다 더 뛰어나고, 따라서 더 강하다고 주장한다. 영적 존재는 물질적 존재보다 더 명민하고,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내지 못하는 힘을 발휘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며, 사람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한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6
이슬람 교는 가장 빠른 시기에 가장 널리 확산된 종교 중 하나이다. 이슬람 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제국도 100년이라는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중동을 통일하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진출했다. 이슬람인은 세상을 이슬람 교와 이슬람의 기준에 따르는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 이슬람의 집)과 이슬람 세력 바깥에 있는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 전쟁의 집)로 나누고, 선교와 전쟁을 통해 다르 알-하르브를 계속해서 정복해 나갔다. 그 결과 거의 천년 남짓한 기간동안 중동은 다르 알-이슬람이 되었다.
이슬람의 확장은 가히 놀라운 일이다. 이슬람 교가 탄생하고 100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장악하였다. 711년에는 이베리아에 상륙하여 이슬람 왕국을 세웠고, 732년에는 9만의 군대를 끌고 프랑크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751년에는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 당과도 전쟁을 치렀다. 758년에는 아랍 해적이 중국 광둥에 도달했고,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말라카 해협까지 확산되었다. 라틴(lateen)이라 불리는 삼각돛을 달았던 이들의 배는 역풍에서도 수월한 항해가 가능했고, 광둥에서 마다가스카까지 인도양 전역을 누볐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니 시작된 이후에도 이슬람은 서구의 강자였다. 특히 지중해는 1492년 그라나다 함락 전까지 이슬람의 바다였다. 서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은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넘나들었고,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수많은 항해용어가 만들어졌다. 1529년에는 중부 유럽의 빈까지 쳐들어가 기독교 세력을 위협하기도 하였고, 1571년 레판토 해전까지 지중해에서 이들을 꺾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동시기에 인도와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면서 이뤄졌던 일이다.
이슬람의 세계탐험
이슬람의 확장은 단순히 영토에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인은 당시 그 누구보다도 넓은 세계를 알고 있었다. 여행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알 사파르, 알 자파르'라는 이슬람 격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이슬람이 낳은 수많은 탐험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중 정점에 선 인물이 이븐 바투타인데, 마그레브(북서 북아프리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이븐 바투타(Ibn Battutah)는 22세까지 동아프리카와 인도, 아랍, 페르시아, 킵차크를 여행하였다. 그리고 1352년 이슬람과 말리를 잇는 교역로를 개척하였고, 바다를 통해 수마트라와 자바, 광둥, 항저우, 베이징에도 도달했다(이는 그의 여행기 <Rihlah>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22세가 되던 1325년에 소금이 금보다 서너배는 비싸다는 말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페스에 있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사하라를 넘어 말리에 이르렀다. 왈라타에서 처음으로 말리의 관리를 만난 바투타는 말리인이 '예의가 없고 백인을 멸시해서 그곳에 간 것을 후회'했다고 썼다. 또한 말리의 음식을 역겨워했고, 성적으로 개방된 말리 여성에 놀랐다. 그리고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식인종에게 기겁을 하였다. 하지만 쿠란을 배울때까지 아이를 사슬에 묶어두는 모습에는 여느 이슬람처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븐 바투타가 주로 육로에 있었다면, '바다의 사자' 이븐 마지드(Ibn Majid)는 바다를 애용했다. 항해 가문의 후손인 마지드는 <항해지침서(kitabal-fawa'id)>를 저술하여 홍해와 인도양에서 항해하는 법에 대한 수많은 노하우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심지어 지금도 몇몇 해역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배운 이슬람인은 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슬람인은 가장 먼저 한국을 발견한 서구인이기도 하였다. 알 이드리시는 신라시대부터 한반도를 지도에 넣었는데,7 반면 유럽은 1562년에야 한반도가 지도에 등장하고 1569년이 되서야 corea가(그것도 반도가 아닌 섬으로) 메르카토르 지도에 들어왔다. 신라에 대한 이슬람의 기록은 966년부터 등장하는데, 지리학자 마크디시(al-maqdishi)8는 자신의 저서 <창세와 역사서>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고려와 거래했던 아랍 상인에 의해 korea가 한국의 영어 명칭으로 굳어졌다.
팽창의 배경
이슬람 사상가 이븐 할둔은 이슬람 문명의 팽창 동력은 아사비야(asabiyya)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사비야는 이슬람 세계에서의 집단의식을 뜻하는 말로, 각 부족 안에서 사회경제적 결속을 다지는 응집력, 사상과 행동의 일체감, 단일한 힘이나 의식 등을 의미한다. 아랍인에게 아사비야는 침략과 방어의 기본 단위였고 공동체의 단결과 집단의 안전을 도모하고 유지하는 주된 방법이었다.9 할둔은 이슬람이 부족 단위에 한정되어 있던 아사비야를 문명 전체로 확산시킴으로서 그러한 팽창을 이뤄냈다고 해석하였다.
또는 무함마드가 상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이슬람의 팽창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무함마드는 상인이었고, 유목민적인 부족 문화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만든 이슬람 교 역시 상인의 지위를 높이고 상인의 이동을 증진하였다. 낙타와 말을 탄 상인은 세계 각지로 진출하였고, 때로는 기병이 되어 침략에 나서기도 하였다. 오직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기병단을 만들었던 마르텔만이 이러한 기병을 막을 수 있었다.
이슬람 팽창의 배경에는 그 다양성도 있다. 초기 이슬람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이슬람의 땅으로 만들었지만,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오히려 이슬람에 포섭하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바로 페르시아에서 이슬람으로 유입된 문화유산이다.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인을 여러 제도를 통해 복속하고 이슬람 문명에 융합시킴으로서 이슬람은 한때 중동은 물론 서구권 전체를 호령하는 문명의 표준이 될 수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의 탄생10
어느 지역이나 시장은 있었고 자본주의적 요소 또한 있었지만, 시장의 힘이 근대화를 끌어낼 만큼 그토록 강력해진 지역은 유럽밖에 없다. 때문에 왜 하필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는지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해석이나 그 변종인 세계체제론이 주된 이론이었으나, 최근에는 유럽의 제도와 인구학적 측면에 주목하는 학설이 주류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지리적 특성도 유럽 자본주의의 발생에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탄생에는 자유도시가 크게 기여한 듯이 보인다. 특히 지리적 분절로 인해 자유도시가 산재해 있던 서유럽에서는 봉건제가 일찍 붕괴되고 근대화가 촉진된 반면, 그렇지 않았던 동유럽은 상당히 최근까지 봉건제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서유럽의 특징이기도 하였는데, 유럽은 14세기부터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시에 전체 인구의 5.3%가 살았고11 서유럽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도시화율이 6.1%에서 31.3%로 상승하였다.12 반면 중세까지 최대 부국이었던 중국은 중간의 급격한 경제변동에도 불구하고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의 안정적이고 작은 도시화율을 유지하였다.13
혐성국 밈에 절여진 반서방주의자들은 아동노동이 영국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아동노동은 이들 자유도시에서부터 존재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직인들과 함께 일했고, 동시에 직인의 경쟁자가 되었다.14 또한 여성도 이미 당시부터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했음이 당대 소설에서 드러난다.15 이 시기에 노동자의 처우는 상당히 열악했고, 거기다가 노동자는 농민과도 경쟁해야 했다. 때문에 자유도시에서는 노동자에게 많은 억압을 가했고, 이는 때때로 노동자의 폭동으로 번지기도 했다.16
이러한 자유도시는 시장교역을 통해 형성된 부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비록 카이펑이나 델리,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플에 비해 규모는 작았을지 모르나, 그들 도시와 달리 나름의 자치권과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행위자로 기능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힘을 키워가던 왕은 영주를 꺾기 위해 자유도시의 힘이 필요했다. 왕의 권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와 철저한 관료제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유지하려면 체계적인 조세와 함께 자유도시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제로도 도시와 결탁한 왕은 그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가령 카를 5세는 독일의 은행가들의 지원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 상인의 지원을 통해 백년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럽 왕의 세입의 많은 부분이 자유도시와 상인에게서 나왔고,17 그만큼 왕과 상업의 연대는 강해졌고 상인의 발언권도 강해졌다. 이는 중상주의와 자본주의로 이어졌다.
자유도시의 존재는 왜 서유럽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자본주의가 가능했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중국의 경우, 자유도시의 전성기였던 중세 후기에도 거의 모든 경제적 측면에서 서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국운을 걸고 해상무역을 지원하였으며 원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은 통일국가였고, 중국의 무역은 국가에서 파견한 관리(선리재자)에 의해 통제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도시와 상업은 인근 지역까지 확산되기 힘들었다. 이후 원이 맬서스 트랩에 의해 붕괴된 후 상산학 대신 성리학을 받아들인 명이 들어섰고, 명이 상업을 격하하자 중국 상업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막스 베버는 저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18에서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베버는 개신교의 교리, 특히 청교도윤리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고 보았는데 청교도윤리의 특성인 검소,절약정신에 의해 막대한 자본이 쌓였고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에토스로 간주되는 이윤추구, 검소함, 절약은 많은 부분에서 청교도 교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소비 대신 자본을 축적하려고 하는 추구는 프로테스탄트가 생기기 이전에서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19
최근 경제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20 프로테스탄티즘은 청교도 윤리 이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공헌했을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개개인의 성경 탐독을 강조했던 루터교의 교리 아래에서 많은 개신교인이 성경을 읽기 위해 읽기를 공부했고, 읽기가 가능해진 대중이 금속 활자의 발명으로 폭증한 출판물들을 읽으면서 교양이 증가했다. 대중의 교양증가는 필연적으로 인적자본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근대유럽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故막스 베버가 있다. 베버는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자본주의 윤리의 연계성을 지적했으며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세계적 고전이 되었다.
중상주의21
상인과 결합한 왕은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중상주의(mercantilism)는 무역을 통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최대한 많은 부(특히 귀금속)를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경제 사조로, 15-18세기 유럽의 절대왕정에서 주로 지지하였다. mercantilism이라는 용어는 1763년 프랑스의 중농주의 경제학자 미라보(Mirabeau)가 처음 창안했고, 이후 애덤스미스가 대중화하였다.22 중상주의를 채택한 절대왕정들은 자국 상인들을 배불리는 것이 국력 증대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고,23 이를 위해 경제 전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중상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는 국가마다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중상주의자는 다음의 4가지 신념을 공유하였다.24
- 돈을 버는 것은 국부의 증대다. 즉 상인이 이익을 얻으면 그만큼 국가의 부도 증가한다.
- 상업을 통해 부의 증대가 가능하다.
- 상업적 부의 증가를 위해서는 경쟁을 제한해야 한다. 때문에 각국은 자국의 거대기업에 독점권을 비롯한 각종 특혜를 주어 그들의 규모를 키워주었다.
- 국부는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의 형태로 표현된다. 당시에 주요 화폐는 금화와 은화였고, 따라서 많은 금화와 은화,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금과 은은 국부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부란 화폐, 즉 귀금속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각국은 자국의 부를 늘리기 위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는 당연히 보호무역으로 흐르게 되었고, 자국 기업이 해외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보조금이나 독점권 등을 부여하여 덩치를 키워줬다. 또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자국 기업의 무역거점으로 삼고 특정 지역에서의 무역을 무력으로 독점하였다. 이를 위해 세워진 식민지는 동시에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 그리고 금, 차, 후추와 같은 고가치상품을 수급하는 생산기지로도 기능하였다.
중상주의 초기에 각국은 금이 많을수록 좋다는 중금주의(bullionism)를 신봉하였다. 즉 외국에 물건을 팔아 금을 얻고, 수입을 줄여 금의 유출을 막으면 부가 증대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호무역은 당연시되었고, 반대로 금과 은의 수입은 적극 장려되었다. 그러다 경제학자 토마스 먼(Thomas Mun)이 수출이 수입보다 크면 금과 은이 나가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무역차액설을 주장하였고, 이에 각국은 금 자체보다 화폐의 유입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에 각국은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화폐를 발행하였다.
대표적인 중상주의자로 루이 14세 프랑스의 재무장관 콜베르가 있다. 그의 체계적인 중상주의는 따로 콜베르티즘(colbertisme)25으로도 불리는데, 그는 국가의 부를 늘리기 위해 프랑스의 무역대국화와 철저한 조세를 추구하였다. 그는 간접세를 늘리고, 국가 회계제를 확립했으며, 국왕 직영지를 재조직하고, 금융업계 전반을 감독하여 새로운 국가 재원을 창출하였다. 동시에 상공업을 진흥하였고, 양질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외국의 노동자에 대한 유인책을 쓰는 한편 내국인의 해외이주는 금지하였다.
그리고 1666년 칙령을 발효하여, 20세 전에 혼인한 사람에게는 25세까지 인두세를 면제하고 21세에 결혼한 사람은 24세까지 면제하였다. 출산 자녀수가 12명 이상이거나 생존 자녀가 10명 이상인 가장에게도 감세 혜택을 주었고, 귀족의 경우 생존 자녀가 10명 이상이면 연간 1000리브르, 출산 자녀수가 12명 이상이면 2000리브르를 연금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 칙령은 실제로 적용되진 못했다.26
각국이 중상주의를 채택한 결과 유럽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각국의 국력 또한 증강되었다. 그러나 화폐의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만흔 서민은 빈민이 되었고, 중상주의자들은 가난을 나태함의 결과로 여기며 이들에게 자선이나 자유시간, 교육을 제공하면 악덕과 나태가 더 심해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빈민의 증가는 국가에 위협이 되었고, 이에 영국은 빈민법을 제정하여 사회의 빈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중상주의의 노동관27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상인들은 이윤획득을 위해 적절한 노동력을 갖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생산이란 기본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결합이고, 따라서 생산성을 늘리려면 양질의 노동자를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서 나오니, 노동의 확보는 더욱 중요했다.
이러한 이념에 동조한 절대왕정은 인구를 늘리고자 하였다.28 영국의 성직자 터커(Tucker)는 미혼자에 대한 작위 수여와 수당 지급을 제한하고, 기혼자에게 도제의 의무를 해제함과 동시에 직업을 제공하고 일정 정도의 거주지 이전을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29 콜베르도 외국 노동력의 유인책을 실시하고 내국인이 해외 이주를 금지하였다. 그리고 1666년 칙령을 발효하여, 20세 전에 혼인한 사람에게는 25세까지 인두세를 면제하고 21세에 결혼한 사람은 24세까지 면제하였다. 출산 자녀수가 12명 이상이거나 생존 자녀가 10명 이상인 가장에게도 감세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실제로 적용되진 못했다.30
또한 절대왕정은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저임금을 추구했다. 임금이 낮으면 그만큼 상품 가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자들은 빈민이 기본적으로 나태하며, 그들을 근면하게 만들고 또 무역에서 경쟁우위에 서려면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1 리슐리외는 '노새가 병드는 것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긴 휴식 때문'이라며, 사람들이 편해지면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에서 더 지지를 받았다. 맨더빌(mandeville)은 방직공과 양복수선공이 주5일 일하게 하려면 주4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영(young)은 하층계급은 가난하지 않으면 근면히 일하지 않는다고 혹평하였다.32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강제로 낮추고 그들을 일하게 만드는 정책을 정당화해주었다. 중상주의 사회에서 나태는 죄악이었고, 나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게으른 빈민을 처벌해야 한다고 믿었다. 로크는 빈민이 사람 사이의 신뢰와 상호성을 악용하는 자라고 공격하고, 빈민의 증가가 규율의 느슨함과 도덕적 타락의 결과라고 믿었다. 때문에 술집처럼 나태를 조장하는 장소를 없애고, 군함이나 교정원을 통해 빈민을 재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3 또한 그는 구빈책에 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빈민을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하고, 통상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일부 사람들은 빈민의 발생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아서이며, 국가가 빈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동인도회사 사장이었던 차일드(child) 경은 저서 <신무역론>에서 1)영국의 빈민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고 이는 빈민과 국가 모두에게 도움이 안되며, 2)빈민의 자녀는 구걸과 나태 속에서 자라다보니 게으르게 되고, 3)빈민에게 성별과 연령에 적합한 직업을 주면 매년 수십만 파운드의 공공이익이 산출되니, 4)빈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신과 자연에 대한 의무라고 주장하였다.34
20세기 초 미국의 이데올로기
미국은 종교에 있어서 유별난 나라다. 미국은 서구권에서 가장 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고, 세속가치에 대한 지지도 선진국치고는 이례적으로 낮다.# 이는 미국에서 종교가 가지는 유별난 지위와 관련되어 있는데, 미국은 종교의 영향력이 크면서도 종교가 세속적 삶과 깊게 연계된 나라이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사회복음(social gospel)주의자를 중심으로 종교적 신앙과 세속적 삶과 사회에 대한 참여를 동일시해왔고, 20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자유방임주의와 결합하면서 현대적인 퓨리턴 정신이 나타났다.35
미국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서구권 국가에 비해 약한 노동권과 노동투쟁이다. 19세기 내내 강력한 노동투쟁이 전개되었던 유럽과 비교하면 19세기 미국은 조용했다. 미국에서 초기 노동운동은 산발적이고 영향력도 크지 않아 정부의 공격 대상이 아니었고, 노조가 성장하면서 전국 단위의 노조가 등장하자 정부가 법원 명령을 핑계로 노조를 탄압하는 '법원 명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36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미국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정부를 통한 사회 개선을 주문하는 progressivism(혁신주의)이 노동계에 받아들여지면서 노조의 활동이 정부에 로비하여 노동권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37
혁신주의나 종교의 세속화와 같은 미국 이데올로기의 등장에는 뉴욕이 많은 역할을 했다. 1910년대 뉴욕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산발적인 미국 비판을 넘어 미국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 담론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의식과 활동이 2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현대 미국 이데올로기의 탄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38
Progressivism과 언론 활동
progressivism은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거의 미국 전 지역을 휩쓸었다. 환경을 변화시켜 사회의 발전을 달성하려던 progressivism은 노동계가 먼저 받아들였고, 1900년에는 progressivist인 로버트 라폴레트(Robert La Follete, 1855-1925)가 4수(1894, 1896, 1898) 끝에 위스콘신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진보적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의 주장에 매료되었던 라폴레트는 위스콘신을 ' progressivism의 실습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조해서, 철도회사의 횡포에 대항하면서 예비선거, 주민발의, 주민투표. 산업재해 보상법, 누진상속세 등 갖가지 개혁을 도입하였다.39 40
progressivist들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을 활용하였다. 1893년 6월 새뮤얼 맥클루어(Samuel McClure, 1857-1949)는 progressivism을 홍보하는 잡지 <McClure's>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부당 가격이 15센트였고, 흥행에 성공하여 전성기에는 발행부수 50만부, 월 300만부에 이르렀다.41 이에 쟁쟁한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는 자신의 폭로 전문지 <Cosmopolitan(코스모폴리탄)>의 가격을 12.5센트까지 내렸고, 프랭크 먼지(Frank unsey, 1854-1925)도 자신의 <Munsey's>를 10센트까지 가격을 낮추었다.42
당시에 발흥기였던 언론은 여론의 형성에 큰 힘을 주었고, 이 여론은 '여론에 의한 정치통제'43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44 그 실례로 헨리 로이드(Henry Lloyd, 1847-1903)는 1894년 자신의 폭로기사를 종합해 <Wealth against commonwealth>를 출간하면서 스탠더드 오일을 공격하였다. 이 책에서 로이드는 '만일 사회가 가장 강한 사람에게 재산이 귀속되어야 한다는 이념에 기초한다면, 머지않아 강자가 사회의 모든 재산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5 McClure's도 1903년 이다 타벨(Ida Tarbell, 1857-1944)이 스탠더드 오일의 부정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재했고, 이는 스탠더드 오일의 분할에도 영향을 끼쳤다.46
당시의 언론은 정부의 부정도 공격하였다. 링컨 스티븐스(Lincoln Steffens, 1866-1936)는 도시의 부패를 다룬 기사를 계속 연재하고는 그것을 모아 1904년 <The shame of the cities>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링컨 스티븐스는 6개 도시의 부패를 고발했는데, 세인트루이스의 뇌물, 미네아폴리스의 횡령, 피츠버그에서 공업자본과 정치권의 유착, 필라델피아에서 문화제도의 부패를 공격하였다.
전쟁의 기원
원시시대에도 전쟁은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고대의 사망자 상당수는 남자이며 두개골에 외상에 의한 파손이 있다, 일부는 창끝이 박혀 있었고, 피해자는 대개 남자이며 두개골과 왼쪽 흉골(가슴뼈)에 주로 손상을 입었다.47 네안데르탈인에게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48 이러한 발굴은 캘리포니아에서 유럽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반도의 인류49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였다. 이들은 북쪽으로부터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불과 초보적인 도구를 사용하면서 구석기 문화를 꽃피웠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은 주로 북한에 있는데, 평양 대현동 동굴의 역포인, 평안남도 덕천시 승리산 동굴의 덕천인 등이 그것이다. 해당 동굴은 석회암 지대로서 화석이 보존되기 유리한 지역이고 그래서 발견될 수 있었다.
한반도에 서식한 호모 사피엔스는 전형적인 구석기인이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해진 이후로 인간은 여러 척추질환을 앓게 된 대신 두뇌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고, 불과 초보적인 도구로 생활반경을 넓혀갔다. 이들은 깨트린 돌(뗀석기, 타제 석기)을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간단히 깨트린 돌을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트린 돌(몸돌)의 파편(격지)으로 날을 만들어 가죽을 벗기고 사물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구석기 시대 후기로 가면 뗀석기가 찍개,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등 다양한 석기로 분화되었고, 뗀석기의 아랫부분을 슴베로 가공하여 창이나 작살, 화살을 만들었다.

상나라(은)
상(商)은 BC 1600년에서 BC 1046년에 중국에 존재했던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장사꾼을 의미하는 단어 '상인'은 상 멸망 후 상나라인들이 일정한 거처없이 장사로 먹고살게되자 장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상나라인->상인이라 부르면서 생겨났다.50
한국의 경제사
한국의 주된 생업은 옛날부터 농사였다. 그러나 유물이 적고 자료가 미비하여 조선 이전의 농업에 대한 현대의 이해는 일천하다. 신라시대 밭으로 추측되는 화성 석우리 먹실 유적과 진주 대평리 유적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에서는 벼와 기장, 보리, 수수, 조, 팥이 출토되었다.# 또한 신라 기록에는 세금을 조로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51 이를 통해 본다면 한국의 벼농사는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주류가 아니었으며, 다양한 곡식이 복합적으로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벼농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계속된 수리시설의 건설로 조선시대에 이르면 벼농사에 필요한 논을 채울만큼 물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임진왜란으로 경작지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지만 17세기에 이르자 경작지 면적이 복구되었고,52 추가적으로 비료의 발달이나 이앙법 도입 등으로 벼의 생산력은 계속 증가하였다.53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조선 전기에 비해 농업 생산량이 2배 이상 증가하게 되었다.54
농업 생산량의 증가는 상공업의 부흥에도 기여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서민의 주문을 받고 수공업 제품을 제조하는 사영 수공업55이 등장하였고,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곳곳에 장시(시장)가 형성되었다.56 11-15km마다 세워진 5일장은 조선 후기의 상품유통과 숙박, 운송, 보관, 금융 등을 담당하였고,57 일부 상인은 서로 담합하여 유통망을 장악하고 독과점을 행사하는 도고로 발전하였다.58 이처럼 상업이 발달하자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조선 경제에 화폐를 도입하였다.59 그러나 그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농업 생산량 증가는 유럽이나 중국, 인도, 일본에서와 같은 상업의 부흥에는 이르지 못했다.60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는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시대에도 달성되지 못했다.61 비록 일제시대에 한반도에 산업시설이 생기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본은 일본인에 의해 독점되어62 한반도 전체로 파급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산업시설은 전선에 가까운 북한에 집중되었다.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는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63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파
쿰란(qumran) 공동체는 기원전 3세기 유대교의 종파였던 에세네파(essenes)의 신앙 공동체다. 논쟁이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 공동체라는 점에 동의한다. 쿰란 공동체는 사해 인근의 동굴에 위치하여, 메시아를 염원하며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유지하였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4000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주로 농사를 짓고 모든 재산을 공유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덕과 의를 추구하는데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64
에세네파는 주류 유대교가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등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정치 이슈에 전념한 사두가이와 거리를 두었고, 바리사이도 자신의 극단적 노선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멀리하였다. 이들은 보통 레위인의 후손이었으나, 주류 유대교와 다소 다른 교리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신전에서 제사를 바치면 좌가 사해진다는 유대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신도 개개인이 곧 성전(신전)이며 토라를 지키고 기도하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물로 몸을 씻는 세례 의식을 처음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공식화한 이들도 에세네파였는데,65 이들은 세례가 상징적 행위이며 실제로는 신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신실하게 하지 않으면 죄를 지울 수 없다고 믿었다.66
에세네파는 곧 소멸했지만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에세네파의 세례는 기독교로 이어졌다. 또한 그들이 남긴 성경 필사본은 후대에 성경의 복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60년까지 구약성경과 외경, 위경, 주석서(페사림), 탈굼(targum), 율법서 등 다양한 경전을 필사하여 보존하였다. 이후 1947년 우연한 기회로 경전의 일부가 시장에서 발견되자 이스라엘 정부가 51년부터 56년까지 쿰란 유적을 발굴하여 11개 동굴에서 900개 가량의 두루마리와 문서 조각(사해 사본, 쿰란 사본)을 발견하여 구약에 대한 더 철저한 고증이 가능해졌다.67
과거
과거(科擧)는 지필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동양의 제도로, 한나라에서 처음 기원하여 수나라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이러한 과거는 세습 귀족이 아닌 사족(士族) 지식인의 등용을 위해 실시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에서 최초로 시행되었고, 베트남에서는 리 왕조와 응우옌 왕조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들 세 나라에서 과거는 단순히 공공 인재 선발 뿐만 아니라 다른 기준보다도 시험 자체를 좀 더 인간의 평가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어려운 시험의 합격자를 높게 평가하는 잔재를 남기는 식으로 그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다.
일본에서도 과거가 실시되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일시적,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그리고 서구권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19세기 초 영국의 외교관과 선교사에 의해 관찰된 후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과거를 모방한 관료 채용 시험이 실시되었다. 이후 이러한 제도가 미국 등 다른 서구 국가로 퍼지면서 현대의 공무원 시험의 기초가 되었다.68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69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는 언어와 민족, 종교, 문화가 비슷하며 실제로 2022년의 전쟁 이전까지 두 나라의 국민은 다양한 인간관계로 얽혀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두 나라가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시초는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러시아의 실질적인 전신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모스크바 대공국이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으며, 15세기에 들어서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반발한 카자크(코자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국가를 건국하고자 하였다.
봉건제(feudalism)70
봉건제는 중세유럽에서 만연했던 사회구조로, 왕과 교황 아래 영주/기사가 농민을 통치하는 사회구조이다. feudalism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때 처음 등장하였다.71 봉건제는 멸망한 로마의 잔해 위에서 생존을 위해 나타난 제도로, 영주는 농민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고, 농민은 영주의 생계를 책임지는 시스템이었다. 서양사학계에서는 봉건제를 특정 시기에 일부 지역에서 나타난 특수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과,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난 통치체계로 보는 시각이 서로 논쟁하고 있다.72
봉건제는 주종제와 은대지제도로 구성된다. 주종제는 주군(lord)과 봉신(vassal)으로 구성되는데, 주군은 봉신의 보호와 부양을 책임지고 봉신은 주군에게 충성하고 봉사한다. 이러한 제도는 게르만족의 종사제에서 유래하였으며,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 왕은 영주의 주군이었고, 영주는 기사의 주군이었으며, 기사는 농노(농민)의 주군이었다. 은대지제도는 주군이 땅을 하사하는 제도로, 주군은 봉신에게 자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확물을 거둘 권리(niessbrauch)를 하사한다. 이 권리 또한 영주가 기사에게 분배가능하다.
봉건제에는 3가지 계급이 존재했다. 귀족은 땅을 가지고 농노의 보살핌을 받는 전사로, 영주나 기사가 여기 속하며 왕이나 주교도 여기 넣기도 한다. 농노는 농사를 지어 보호의 대가로 귀족에게 바치는 농민으로, 땅에 예속되어 귀족의 반쯤 소유물인 존재였다. 그리고 봉건제를 벗어난 자유민이 있었는데, 자유민은 도시에 거주하며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상공업 및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상인과 직인, 도제 등이 여기 속했다.73 goff74는 봉건제의 구성원을 사제, 전사, 농민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봉건사회의 경제는 장원에 의지하였다. 장원(manor)은 영주가 소유한 농지로, 경작할 토지와 토지를 경작할 농노, 영주의 성과 농노의 집, 교회, 땔감이나 고기를 구하는 임야와 방앗간, 창고 등 각종 부대시설로 구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장원은 토지와 농노, 이 둘의 주인인 영주로 구성되었는데,75 영주는 소작료를 받고 농노에게 땅(mansus)을 빌려주고 덤으로 자신의 식량이 생산되는 직영지(mansus dominicatus)도 경작하게 하였다. 장원은 대개 자급자족 공동체로 여겨졌으나, 사실 12세기부터 시장을 통해 외부와 활발히 교류하였다.76
봉건사회는 강한 지방분권사회였다. 왕의 실질적인 힘은 왕의 장원으로 한정되었고, 영주들은 최대한 자신의 독립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77 그러나 왕 또한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기 왕국을 다 통치할 수 없었기에, 원할한 통치를 위해 봉건제를 스스로 도입하기도 하였다. 특히 노르만족은 영주없는 토지는 없다(nulle terre sans seigneur)는 원칙을 세워 봉건제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78 그래서 노르만족 중 하나인 영국의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5000군데의 봉토를 체계적으로 분할하여 영국에 봉건제를 도입했다.79
봉건제는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시장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시장에서 부를 얻는 왕80이 계속 강해졌고, 십자군과 흑사병이 왕과 상인에 대항하는 카톨릭과 영주의 힘을 약화시켰다.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13세기까지 이어진 십자군은 수많은 영주를 소진시켰고, 페스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면서 농노의 가치가 귀해졌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필요했던 도시는 농노에게 큰 임금과 자유를 약속하였고, 도시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영주들은 결국 상인과 왕에게 권력을 헌납해야 했다.
봉건제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년전쟁기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1312-1377)는 ordinance of labourers(1349, 노동자조례)를 제정하여, 지역의 치안판사가 노동자의 최고임금을 정하고 이를 어기는 노동자와 고용주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또한 농민이 장원을 함부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81 이는 노동자의 임금을 페스트 이전만큼 낮추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통해 영주로 구성된 의회에서 계속 전쟁비용을 조달할 수 있고자 하였다. 이어 1351년 의회에서도 노동자규제법을 제정하여 이를 뒷받침하였고,82 리처드 2세(1377-1399)도 1388년 노동자조례를 개선해서 소속지역 지도자의 허가장 없이 여행하는 노동자에게 형벌을 부과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법은 사회의 변화를 막지 못했다. 노동자조례 이후에도 임금은 상승해서 1400년대의 임금은 1300년대 임금의 2배였다.83 더구나 당시에 영국에서 농민봉기가 대규모로 일어났는데, 봉기의 기본적인 원인은 인두세였지만 이들은 지대를 함부로 올리지 않는 것과 함께 농노제 폐지도 함께 요구하였다.84 그 결과 노동자조례는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칼리오스트로의 생애85
주세페 발사모(일명 칼리오스트로)는 1743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냈으나 추방당했으며, 이후에는 은 세공업자 마라노 밑에 있다가 64년 사기를 치고 메시나로 도망쳤다. 이때 그는 자신이 알토타스라는 신비로운 늙은 마술사의 배움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기의 공범이었고 범죄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던 아탄시오 신부와의 관계를 각색한 거짓이었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거치다가, 몰타에 정착한다. 칼리오스트로는 몰타 내륙의 메디나 시에 정착하여 성 요한 구호소의 하인으로 취직했다. 거기서 자신이 가진 약제사 기술을 발휘한 칼리오스트로는 곧 몰타 기사단의 우두머리였던 돔 마노엘 핀토 데 폰세카의 눈에 들었고, 돈 마노엘의 연금 실험실 바로 옆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약제와 연금술에 몰두하다가, 1767년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몰타 유지들의 추천장을 든 채 나폴리로 떠난다.
나폴리에 도착한 칼리오스트로는 칼라브리아를 거쳐 1768년 초 로마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는 몰타 유지들의 신임장을 교황청 주재 몰타 대사 브레트비유 백작에게 전달했고, 그를 통해 요크 추기경과 오르시니 추기경 등 교황청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추천장을 전달했다. 때마침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있는 젊은이를 찾던 오르시니 추기경의 눈에 들어 그는 오르시니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신실한 종교인인 척하면서 동시에 가끔씩 수도복을 벗고 산타마리아 광장으로 가 이집트식 사랑의 묘약과 판화 등 수상한 물건들을 팔아 수입을 올렸다. 그러면서 여러 범죄자들과 어울리게 되고, 미래의 아내가 될 로렌자 펠리치아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로렌자 펠리치아니는 기술공의 자식으로 태어나,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빈민가에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25세의 돈많고 멋진 남자는 뿌리치기 힘들었고, 그가 청혼하자 결국 받아주었다. 아버지 주세페 펠리치아니는 딸이 결혼할 나이는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칼리오스트로가 가진 교단의 인맥과 푹 빠진 딸을 보고 결국 결혼을 승낙해 주었다. 칼리오스트로는 로렌자와 1768년 4월 20일 결혼식을 올렸고, 로렌자의 오빠 프란체스코와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경직된 생활이 지루해진 칼리오스트로에 의해 그들은 결국 펠리치아니 가족을 나왔는데, 이때 로렌자는 칼리오스트로의 설득으로 이름을 세라피나로 바꾸게 된다.
가출 이후 돈에 쪼들린 칼리오스트로는 같은 시칠리아 출신의 범죄자 옥타비오 니카스트로와 협업한다. 니카스트로는 칼리오스트로를 자신을 알리아타 후작이라 칭하는 한 귀족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자신이 성직을 가진 대령이자 프로이센 궁정에서 파견된 전권대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칼리오스트로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하고, 그에게 신용장, 환어음, 군의 명예 진급사령장 등을 위조하고 유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내와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했는데, 칼리오스트로는 잠시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얻었던 지식으로 세라피나를 납득시켰다.
68년 5월 칼리오스트로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사기를 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는 칼리오스트로의 커지는 영향력을 시기한 니카스트로에 의한 것이었다. 알리아타는 튀었고, 남겨진 칼리오스트로와 세라피나는 위조문서들을 재빨리 처리하여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다시 궁핍해진 칼리오스트로는 순례자로 위장하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 올랐다. 이때 칼리오스트로는 카사노바와 만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자처하며, 자신을 연금술사라고 포장하고 사기꾼으로 살아간다. 그는 본인이 그리스인 연금술사의 제자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유럽 전역을 돌며 사기를 쳤다. 한때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연루된 목걸이 사건으로 인해 잠시 바스티유에 수감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다가 사기행각이 까발려저 도피한 이후,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사실이 들통나 이단으로 선고되어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받은 후 감옥에 갇혀 1795년 옥사하였다.
개화기의 국제적 배경86
개화기는 조선이 확장하는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던 시대였다. 근대를 맞이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발달시킨 서구는 자국의 부와 자부심을 증대시키기 위해 해외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행보는 비서구사회를 열등한 사회로, 비서구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개화기는 동시에 서구식 국제질서가 비서구 세계로 확장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구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주권 존중, 상주 사절단 파견, 무역에 대한 여러 규정이 포함된 베스트팔렌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베스트팔렌 체제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로 진출하면서 서구를 너머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일부 국제법 학자는 비기독교 국가에는 국제법이 적용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베스트팔렌 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전체의 일반적인 국제레짐으로 정착해 갔다.
베스트팔렌 체제를 위시한 근대 국제법이 동양에 전래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었다. 1864년 청은 미국의 법학자 헨리 휘턴(Henry Wheaton, 1785-1848)이 저술한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도 전래되었고 68년 일본에서 <국제법 원리>로 번역되었다. 국제법에 대한 이해를 습득한 일본은 76년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 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서로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반면 청은 국제법 원리의 속국 개념에 주목하고, 조선이 자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및 조선의 개화당과 대립하였다.
프랑스 근대 정치사
프랑스의 근대 정치사는 프랑스사뿐만 아니라 현대민주주의의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룬 선구적인 국가이고, 현대민주주의의 형태나 이념에 프랑스혁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하늘에서 주어진 체제가 아니라 근대인들이 새롭게 만들어야 했던 정치질서이며, 근대 프랑스는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간 장이었다.87
현대민주주의는 3가지 측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민주주의는 1)실질적인 사회적 상태로, 동등한 인권과 무법한 압제의 부재 등 민주주의가 전제하면서 동시에 지향하는 사회의 상태를 말한다. 동시에 민주주의는 2)보편적 이념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를 통솔하는 최중요 이념이다. 우리가 법이나 정책을 판단하고 개선하려고 할 때 그것의 기준이 되는 자연법이 바로 민주주의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그러한 이념이 현실적인 형태로 구현되는 3)구체적인 정치질서로, 의회, 의원내각제, 대통령중심제, 법치주의 등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정치 제도를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상과 정치체제, 사회적 상태는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근대 프랑스는 그것을 규정하는 장이었다.88
프랑스 근대 정치사는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규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를 거친 여러 사람들은 혼란의 원인을 대중에 의한 중우정치로 보았고, 민주주의를 규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기조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 당연히 여기에 앞장섰고, 자유주의자들도 중우정치로부터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다소 비민주적인 여러 방안을 고안하였다.89 안병찬90은 더 나아가 나폴레옹의 집권을 프랑스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나, 논증이 형편없고 근거를 객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했다.
문화의 젠더화
교양과 에티켓이 성별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주장은 19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가령 식사예절(테이블 매너, table manner)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정립되어 유럽의 교양이 되어갔지만, 남성과 다른 여성만의 식사예절을 언급한 문헌은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 가령 1898년에 출간된 <Manners and Rules of Good Society>91에서는 숙녀는 남성과 달리 자극적인 요리를 먹어서는 안되며, 디너파티에서 치즈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세기 이전에는 남녀 의상에 있어서 알맞는 색이 존재하지 않아 남녀 모두 파란색과 분홍색 옷을 혼용하여 입었지만, 19세기 중반부터 파란색과 빨강 계열의 색을 특정 성별의 색으로 지칭하는 출판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성장에서 일부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19세기 중반은 귀족사회의 식사예절이 시민사회에도 상당부분 도입되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기술의 발달로 일반인들도 원하는 색의 옷을 입을수 있게 된 시대이다.
빌리언 달러 의회
빌리언 달러(billon dollar) 의회란 1889년에서 1891년 사이의 미국 의회를 말하는 단어로,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과 함께 미국 사회의 초석을 다진 의회였다고 평가되는 의회이다. 빌리언 달러 의회는 대부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제대군인 복지와 기간산업 지원, 셔먼 독점금지법(sherman anti-trust act) 및 셔먼 은구입법(sherman silver purchase act), 자연보호법 등 현대 미국의 발전을 가능케했던 수많은 법이 이때 제정되었다.92 그러나 빌리언 달러 의회는 해리슨의 리더십 결여와 90년대 미국 경제의 침체, 공화당의 분열로 인해 92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하면서 끝이 났다.93 특히 빌리언 달러 의회에서 추진한 맥킨리 관세법 등이 독과점 기업에만 혜택을 주면서 물가를 올리고, 강제법(lodge bill)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며, 셔먼 은구입법이 불경기를 악화시킨다고 생각한 중서부 농민이 공화당에서 눈을 돌리면서 공화당은 의회에서도 패했고 대통령도 클리블랜드에게 자리를 내주었다.94
바이마르 정부의 편향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역사상 가장 취약했던 정부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신기한 사실은, 그 혼란상 속에서 유독 좌파가 더 약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에서 나치가 공산당을 이긴 이유 중 하나는, 바이마르 정부가 유독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창립부터 공산당의 소비에트공화국 선언을 막기 위해서였으며,95 바이마르 정부는 좌익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부와 협력하였다.96 또한 18년에서 22년 사이 좌익 암살범 22명 중 17명은 중형(이중 10명은 사형이었다)을 받았지만, 우익 암살범 354명 중에는 단 한명만이 감옥에 갔다. 당시 좌익의 평균 형량은 15년으로, 우익의 평균 형량인 4개월의 45배에 달했다.97
소련 여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에서는 100만명에 가까운 여성이 군에 입대하였고, 다양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많은 여군의 참여는 2차 대전기 다른 국가들에서도 두드러졌으나, 급박한 전쟁 상황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결합되어 소련 여군은 일반적인 여군보다 좀 더 많은 수가 참여하고, 더 다양한 직군에 참여하였다. 최근까지 소련 여군의 활약은 부차적으로만 다뤄지거나 사회에서 금기시되었으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소련 여군의 인터뷰를 모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출간한 이후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알렉시예비치는 그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200명 가령의 2차대전 당시 소련 여군을 인터뷰하여 인터뷰 기록을 수록하였다. 그가 수록한 인터뷰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련 여군은 이데올로기적 이유나 가족/지인의 복수를 목적으로 군에 입대하였다. 입대시 이들의 평균 연령은 15-19세였고, 군 정치위원회를 통해 입대를 신청하였다. 1942년 전에 이들의 입대 요청은 대부분 1차적으로 반려되었는데, 이는 여성이 끔찍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군인들의 판단이었다.
많은 소련 여군은 주로 간호병과 위생병으로 종사하였다. 이러한 보직은 비록 비전투병과로 분류되나 급박한 상황에 의해 이들도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고, 어떤 남성은 부상병을 지키기 위해 기관단총을 쏘며 독일군과 교전한 일군의 여군 위생병들의 사례를 보고하였다. 이외에 많은 여군들이 저격수와 정찰병, 고사포병, 세탁병으로 근무하였으며, 공병이나 취사병으로 근무한 경우도 존재했다. 또한 적지 않은 여군들이 게릴라 조직에 참여하면서 비정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여군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는 여러 측면을 가진다. 초기에 남군은 여군을 무시했으나, 짧은 시간 이내에 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위생병의 병과적 특성(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부상병을 구조해야 한다)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참전한 소련 여군들은 남성이 자신들에게 매우 친절하였으나, 동시에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도 존재했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남군은 여군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러시아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여군 역시 러시아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았으나, 영향의 정도는 비일관적이다.
비록 이들은 자의로 군에 참여하였으나, 여성적 특성이라고 간주되는 몇가지 행동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군에서도 옷과 구두 등 여성적인 용품들을 비밀리에 보관하거나, 머리를 꾸미거나, 수를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여군은 총부리에 꽃을 꽃았다가 제재를 당했다고 보고하였고, 야생동물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사냥한 고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보고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대개 군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전후 이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경력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오직 소수의 유명인사들만이 자신의 경력을 선전했으며, 많은 여군은 드센 여성이라는 부정적 인식과 군대에서 남자들과 불건전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의심 속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이들은 집에서 쫓겨나거나, 면박을 당하거나, 결혼 상대로 거절되었다. 또한 많은 여군이 PTSD 증세를 호소했으며, 증세는 장기적으로 남아있거나 심지어 인터뷰가 시행되는 시점에도 유지되었다.
이 분야의 주요 저서로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알렉시예비치,박은정 역,문학동네,2015)>가 있다. 이 책은 소련 여군에 대해 미시사적 접근을 취한 선구적인 업적 중 하나이다.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
전간기 동안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지만,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의 고립주의의 꿈은 무너졌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세계 곳곳을 미국적 표준으로 만들고 공산 진영을 막아내기 위해 새로운 국제정책을 고안해야 했다.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목표는 2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98 하나는 특정 지역의 국가들이 어떤 강대국에도 종속되지 않은채로99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하여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동은 미국의 힘이 아니라 지역내 국가간 협력을 통해 이뤄져야 했으며, 유럽공동체와 한일 공조가 미국의 이러한 이상의 실현이었다.
미국이 추구한 두번째 목표는 바로 이렇게 통합된 체계들이 미국적 표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이 자기 지역의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면서도, 그 질서가 미국적 표준을 받아들이기를 바랬다.100 특히 미국은 미국적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이 전세계에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였다. 서로 정치적으로는 적대할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최근까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 맥도널드가 흥하는 한일이 바로 이러한 모습의 예라고 하겠다.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기원
한국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반과학적 보수 대형교회 세력은 기본적으로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적으로 주류를 차지한 것은 해방 후 이승만 시대부터였다. 본인부터가 개신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자기 정부의 38%를 기독교인으로 채웠고, 장관은 47.7%가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직접 지배하지 못했던 국회도 권사인 국회의장을 포함하여 의원의 21%가 기독교인이었다.# 이처럼 기독교에 유리한 구도 속에서 이승만 정부는 신학생들에게 특별히 군복무를 면제해주는 등 비기독교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101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국 개신교는 정부를 비판하기보다는함께 반공을 내세우고 독재정권에 충성하면서 교회의 세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함석헌을 비롯한 오직 소수의 기독교인만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102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자유당 하부조직처럼 기능하며 정부를 선전하였다. 이승만이 3선 개헌을 시도할때도 개신교는 앞장서서 선거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을 도왔고, 동조하지 않는 개신교인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는 당대인들이 당대 개신교를 이승만이나 자유당과 동일시한 이유이기도 하였다.103
오순절적인 특성도 이때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0년대부터 한국 개신교에는 부흥회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개중에는 안수기도를 해준답시고 돌팔이 치료를 해대는 기도원과 전도사도 매우 많았다. 천부교 교주 박태선은 55년부터 전도관 운동을 시작하였고, 70년대에 정부의 탄압을 당할 때까지 유사의학을 내세우며 승승장구하였다. 통일교 교주 문선명도 54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통일교를 확장하였으며, 비록 자신은 55년에 공금 횡령과 성추문으로 수감되었지만 교세는 그칠 줄 몰랐다.104
저항문화 운동(반문화)105
저항문화(대항문화) 운동은 6-70년대에 서구권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 기성세대의 문화에 저항하여 새로운 문화체계를 정립하려고 했던 문화 운동이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소득의 증가에 미치지 못한 문화의 지체에 불만을 가진 당시의 청년들은 기존 사회의 체제와 가치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체제, 새로운 가치를 주장했고, 프랑스에서 68혁명이 터지자 이러한 움직임이 서구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저항문화 운동은 페미니즘과 민권운동의 성장에 기여했으며, 신좌파가 탄생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서먼의 모병개혁106
1973년 미군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베트남전으로 인해 일어난 징병제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모병제의 문제는, 강제로 입대했어야할 양질의 인재들이 군대에서 빠져나가면서 일어나는 질의 저하였다. 70년대 이후 미군의 질적 저하는 여러 정책 결정자들을 고민하게 하였으며, 닉슨은 징병제를 다시금 고려하려고 하였다. 그러다 79년 11월,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메이어(Edward C. Meyer)는 맥스웰 서먼(Maxwell Thurman) 소장을 TRADOC(미 육군 교육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서먼은 우수하지 않은 군인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했고,107 군인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관적이고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다. 먼저 그는 모병관 평가기준에 입대군인의 수뿐만 아니라 학력이나 입대 후 성과와 같은 질적 정보도 포함하도록 지시했고, 이를 통해 입대군인의 고졸 비율을 80년의 91%에서 87년 91%까지 끌어올렸다. 또한 육군에서 사용하는 지능검사인 ASVAB의 품질에 논란이 생기자 즉각적으로 개량에 돌입했고, 개량된 검사에서 50% 이하에 해당하는 지원자들을 모두 잘라버렸다.
서먼은 나름의 시장조사를 통해 기술(skill)을 배우려고 하거나 대학 학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이 잠재적인 입대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고받은 서먼은, 미시시피 상원의원 소니 몽고메리(Sonny Montgomery)와 적극 협력하여 국방부로부터 많은 자금을 끌어와 이들을 유인할만큼 큰 임금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모병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간부들이 60일간 개인적으로 모병을 하도록 하여 현장감각을 익히게 하였고, 타 직별의 우수한 부사관들을 일정 기간동안 모병업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서먼 개인의 직관이 아닌, 철저한 연구를 통한 심도깊은 검토에 근거하였다. 서먼은 경험적 분석이 정책을 만드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다양한 기관을 마련하였다. 그는 정책을 결정하면서 랜드 연구소와 심리학자/사회학자 중심의 ARI(Army Research Institute), 국방대학 산하의 OEMA(Office of Economic and Manpower Analysis)에 많이 의지했으며, 특히 랜드 연구소는 연구결과를 서먼에게 대면으로 보고하였다.
초기 개혁이 성과를 내자 서먼은 이를 유지하고 보강하는 정책들을 입안하였다. ASVAB의 개량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서먼은 훈련을 개량하는데도 많은 신경을 써서, 훈련 성과의 측정과 지속적인 평가 등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노력에는 포트 어윈의 nationa training center의 설립도 포함된다. 또한 간부들이 군에 남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군가족이 보고되자, 군가족에 대한 복지를 확대하였다. 한때 기업에서도 응용하여 사용했던 'be all you can be'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서먼 하에서 나왔으며, 그 유명세에 걸맞게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1991년 흑인 폭동의 원인
1991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은 동년 3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이 원인이다. 과속으로 인해 검거된 흑인 로드니 킹이 4명의 백인경찰에게 무차별 구타당한 일은 인근 주민이 촬영해 TV로 방영되었다. 폭행 경찰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백인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 판결이 발단이 되어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이후 로스엔젤레스 경찰국장은 사임했고 폭행 경찰은 재기소되어 2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91년에 발생한 흑인 폭동은 92년에 또다시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3월 16일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의 상점에서 흑인 소냐 라타샤 할린스가 절도 시비로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두순자가 총을 발사해 라타샤를 사살했다. 이 사건이 다시 흑인사회를 자극해 4월 29일부터 7일간 폭동이 이어졌고 90%의 한인업소를 포함한 1만여개의 피해업소를 낳았다.
흑인 폭동은 기존에 존재하던 흑백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다. 그러나 2차 폭동은 1차 폭동과 달리 한인이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라타샤 사건을 보도할때 언론은 흑인 폭도에 대항해 자신들의 가게를 지키려는 한인들을 집중보도하여 흑인과 한인이 대립하는 듯한 구도를 보여주었다. 실제 한인이 보유했던 총기 대다수가 비비탄총임을 고려했을때 혹자는 2차 폭동이 흑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인이 제물로 바쳐진 경우로 본다.
21세기 한국의 정치지형
민주주의가 수립된 이후 한국의 정치는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 좌파적 2-30대와 투표에 열성적인 우파적 5-60대로 구성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적어도 2010년대 후반부터는 그러한 주장이 실제와 맞지 않아 보인다. 20대 총선의 경우 보수라고 생각되었던 50대가 민자당계 정당을 지지하지 않았고, 영호남의 투표 구도도 일부 흐트러져서 전라도 지역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다.108 이는 호남 유지가 대거 국민의당으로 이동한 결과로 국민의당이 망한 이후 호남은 다시 민주당 지지지역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연령에 따른 지지세력 구도의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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