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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험 시대 총설

과학주의자 2026. 6. 2. 19:50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최저의 복지만을 시행하던 빈민법 체계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변화하기 시작한다. 먼저 영국의 경우, 광범위하고 심각한 가난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이에 대한 경각심이 매우 커졌다. 동시에, 이때부터 유럽 전체에 사회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가난 문제가 담론에 떠오르고 사회주의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각국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복지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 시기부터 현대적인 사회복지실천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배경
영국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복지에 대한 요구가 정치권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1868년에는 직종별 노동조합이 모여 영국노동조합회의(british Trades Union Congress, TUC)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1900년 독립노동당과 사회민주연합과 연대하여 1906년 노동당을 창설한다. 온건 사회주의자와, 글래드스턴 내각의 자유주의자, 그리고 대중친화적으로 변한 보수당이 적극적인 정부의 활동과 국민교육, 그리고 적극적인 사회보장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각주:1]
 
부스의 빈곤조사
빈곤에 대한 관심이 사회주의를 넘어 대중으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의 여러 빈곤조사가 시작이었다. 통계조사가 사회에 확산되던 시절, 영국 최초의 마르크시즘 정당인 social democratic federation(사회민주연합)의 Henry Hyndman(헨리 하인드만)은 1883년 런던의 노동자 거주지에서 노동자의 빈곤율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노동자의 25%가 빈곤 상태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사회적으로 여러 파장을 불러왔는데, 찰스 부스는 마르크시스트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직접 조사해 보기로 한다.[각주:2]
 
찰스 부스(Charles Booth)는 1840년 3월 30일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박회사를 운영했는데, 회사 경영을 위해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통계 기법을 알고 있었다. 사회민주연합의 조사에 불만을 품은 그는, 1886년 33000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 그들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런던의 슬럼가를 대상으로 빈곤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에는 사촌여동생이자 페이비언주의자인 비어트리스 웹(webb)도 참여하였다.
 
조사본부는 토인비 홀에 설치하였고, 슬럼가 지도를 작성하여[각주:3] 1886년 4월부터 이스트엔드를 시작으로 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는 교육청 담당관을 통해 수행되었다. 총 100만세대를 대상으로 한 이 조사의 결과는 <Life and Labour of the People in london>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노동자의 직업과 노동조건, 생활, 노동시간, 임금, 실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각주:4]
 
조사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수도에 사는 시민이 30%가 빈민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각주:5] 부스는 런던 시민을 경제적 수준에 따라 A에서 H까지 분류하였는데, 이 중 A, B, C, D가 빈민으로 분류되었다. A는 부랑자, 알코올중독, 범죄자고, B는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 C는 계절적 또는 일시적 노동자, D는 저임금 정규 노동자였다. 이외에 일정 ㅅ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E, 임금을 많이 받는 사람은 F, 저소득 중산층은 G, 상류층과 중산층은 H로 분류되었다. 
 
구체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형은 E와 F로 전체의 51.5%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은 일하지만 가난에 처한 C와 D로 이들은 전체의 22.3%를 차지했다.[각주:6] 이들의 존재는 성실하고 열심하게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면 당장 보수 본인도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사회복지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후에 왕립빈민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노령연금법의 제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각주:7]
 
찰스 부스의 빈곤조사는 빈곤 실태를 관념이나 개인적 관찰이 아닌 실증적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복지학적 의의가 있다.[각주:8]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볼 때는 일부 한계가 있다. 먼저 부스의 조사는 조사지역이 한정되었고 무작위로 지역이 지정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주당 21실링을 빈곤선으로 설정했지만, 가족의 규모와 연령대는 고려하지 않았다.
 
라운트리 조사
부스와 비슷한 시기에 빈곤조사를 실시한 사람이 시봄 라운트리(rowntree)였다. 그는 1871년 7월 7일 요크에서, 초콜릿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퀘이커 교도 조셉 라운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찰스 부스의 조사에 감명을 받은 라운트리는 요크에서도 이 조사를 해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1897년 조사팀을 구성해서 1901년 <Poverty: a study of town life>라는 제목으로 조사결과를 출판하였다.[각주:9]
 
라운트리의 조사방식은 부스와 약간 달랐다. 그는 상류층과 중산층은 제외하고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그래서 당시 요크 총인구 75812명 중 46754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시행하였다. 교육청 담당관의 조사는 수집된 정보에 대한 해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여겨져 그는 유급조사원을 따로 고용하였다.[각주:10] 그리고 빈곤을 더 철저히 정의하였고, 그 시대에 늘 그랬듯이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욕구는 잘 고려하지 않았다.
 
라운트리는 빈곤을 1차 빈곤(primary poverty)과 2차 빈곤(secondary poverty)으로 구분하여 빈곤선의 정의를 더 엄밀하게 하였다. 1차 빈곤은 가족이 생물학적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음식, 연료, 주거, 의복을 구입할 수 있는 최저수입보다 부족한 수입을 얻는 경우이고, 2차 빈곤은 수입은 그보다 높으나 소득 중 일부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빈곤이 발생하는 경우였다. 빈곤선을 정의하기 위해 라운트리는 오언스대학의 화학자에게 영양학 지식을 자문받아 최소한의 식사 내용과 그 비용을 산출했고, 지방 정부에서 제공받은 식품 목록을 토대로 요크의 식품 가격과 빈민가 임대료, 값싼 피복 및 연료 가격도 조사하였다. 게다가 라운트리는 가족의 크기과 연령도 고려하였다. 
 
조사방법은 다소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라운트리는 조사에서, 요크의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1차 빈곤에 미달한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따르면 요크 시 노동자의 9.9%는 1차 빈곤, 17.9%가 2차 빈곤으로 부스의 비율과 비슷한 27.8%의 인구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었다.[각주:11] 라운트리는 3명의 자녀를 가진 부부가 1차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주당 21실링 8펜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는 1906년 자유당 내각의 입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각주:12]
 
라운트리는 이외에도 비슷한 조사를 두어 번 반복하면서 빈곤에 대한 시계열 조사를 최초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 가정의 수입은 어느정도 예측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가령 아이가 있는 가정은 그 아이로 인해 수입이 부족하다가, 그 자녀가 일을 하면 수입이 늘어난다. 그러다 그가 분가하면 다시 빈곤해진다. 이처럼 라운트리는 가족의 생애주기에 따라 소득이 달라진다고 주장하며 빈곤의 순환(poverty cycle)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
 
다수파 보고서와 소수파 보고서
빈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자 1905년 벨푸어 내각은 왕립빈민법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poorr law and relief of distress)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해밀턴 경을 위원장으로 하고[각주:13] 자선조직협회의 주요 회원인 찰스 로흐(Charles Loch), 헬렌 보즌켓(Bosanquet), 옥타비아 힐(Hill)과, 페이비언협회 회원인 비어트리스 웹(Webb), 그리고 빈곤조사로 유명한 찰스 부스와 빈민법 역사가인 윌리엄 스마트(William Smart)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위원이 참여하였다.
 
위원회는 총 5년간 운영되면서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위원회는 400개 기관을 방문하고, 160회의 회의를 열었으며, 200개 교구의 구빈감독관과 면담을 실시하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각종 보고서와 통계자료가 활용되었고, 여기에는 경기후퇴, 이민, 노조와 여성 노동력의 활용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였다.[각주:14] 또한 뉴질랜드나 캐나다 등 타국의 공공구호체계도 조사하였다. 조사 끝에 위원회는 1909년 다수 위원의 입장을 반영한 다수파 보고서(majority report)와, 소수의 입장을 반영한 소수파 보고서(minority report)를 발간하였다.[각주:15]
 
2개의 보고서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위원회 내부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선조직협회는 가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렸고, 반면 페이비언협회는 가난의 원인을 사회에 돌렸다. 자선조직협회를 비롯한 사회복지사들은 가난의 원인과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빈민법의 폐지 대신 개정을 권고하고 사회복지 단체와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였다. 반면 비어트리스 웹과 란스베리, 챈들러, 웨이크필드 등 페이비언주의자들은 가난을 사회의 문제로 보고, 빈민법을 폐지하고 공공지출을 통해 빈민에게 national minimum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16]
 
다수파 보고서는 14명의 위원이 서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각주:17] 먼저 1)빈민에 대한 처우는 빈민의 개별적 욕구에 부응해야 하며 분류의 원칙을 따라야 하고, 2)구빈행정은 해당 지역의 사회복지 활동과 조정되어야 하며, 3)공공구제 체계는 예방적, 치유적, 회복적 원조과정을 구비해야 하고, 4)사회복지의 목적은 빈민의 독립심과 능력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수파 보고서는 복지당국의 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여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지방의회의 감독을 받게 하고, 빈민법의 명칭을 public assistance로 바꾸며, 구빈원 수용자는 치료적이고 회복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고 원외구호(home assistance. 이는 기존의 outdoor relief를 변경한 것)는 민간 사회복지 단체에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소수파 보고서는 빈민법의 폐지와 사회보장 정책을 주장하였다.[각주:18] 소수파 보고서에서는 빈곤이 사회적 문제고, 따라서 그 책임은 지역사회에 있으며 빈민에게 낙인을 찍어선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빈곤의 원인은 다양하기 때문에 각 빈민이 겪는 빈곤의 원인을 개별적으로 규정해야 하고,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진 특별위원회가 빈곤의 구제와 예방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소수파 보고서는 노동가능 빈민과 노동불가 빈민(non-able-bodied poor. 기존의 impotent poor를 변경)의 처우를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노동불가 빈민은 지방정부에서 책임지되, 병자는 보건위원회, 노인은 연금위원회, 실업자는 노동부 산하 전문위원회에서 분업해서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자리에 있어 국가의 책임을 강조해서 노동행정을 확대 및 개편하고 정부가 실업방지 정책을 실시해야 하며, 직업소개소와 직업훈련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소수파 보고서에서도 고의적 실업자(the willfully idle)는 내무부의 reformatory colony(감화원)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보고서는 실제 정책에는 반영되지 못했다. 보고서가 나올 즈음에는 정권이 교체되었고, 새로 들어선 자유당 정권은 이전보다 강도높은 사회보장 정책을 이미 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수파 보고서는 사회복지실천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소수파 보고서는 빈민법 폐지 여론의 근거가 되었으며 후일 베버리지 보고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각주:19]
 
 
2.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
영국에서 복지 제도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동안, 독일은 후발주자임에도 훨씬 빨리 사회보험을 도입하였다. 독일의 제국 재상 오토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독일 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와 자본가가 재정을 공동부담하여 가난을 방지한다는 사회보험 정책을 세계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는 노동자 계급에게 당근을 쥐어줘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독일은 급변하고 있었다. 지주 귀족(junker, 융커)이 지배하던 농업국가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 급격히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62년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된 융커 출신인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철혈 정책을 선포하여, 의회를 무시하고 군비 확장과 이를 위한 산업 개발을 추친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프로이센은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866년 보오전쟁과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동시에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힘입어 독일은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었다. 1870년에 3400만톤이었던 석탄 생산량을 1914년에는 2억 7700만톤으로 늘렸고, 선철은 130만톤에서 1억 4700만톤, 철강은 30만톤에서 1400만톤으로 늘렸다. 루르의 크루프(krupp) 복합단지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지로 성장하였고, 2차 산업혁명의 수혜를 받은 독일은 마침내 20세기 초 영국 경제를 추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로 독일에는 노동자 계급이 대규모로 등장하였고, 이들은 독일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였다.[각주:20]
 
노동자 계급의 힘을 얻은 사회주의는 마침내 독일 정계까지 위협하였다. 사민주의 계열의 사회민주당(SPD)은 1877년 독일 제국의회 총선에서 50만표를 얻어 하원에 12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독일 내부 장악을 서두르던 비스마르크는 1878년 반사회주의법(sozialistengesetz)을 제정하여 그들을 탄압하였다. 이 법으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성향의 모든 출판과 집회, 결사를 금지하고, 실제로 12년간 1200종의 출판물이 폐간되고 1500명이 구금되었으며 900명이 추방되었다.[각주:21] 그러나 이러한 정책만으로는 사회주의 운동을 억누르기 부족하였다.
 
이에 가부장적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던 비스마르크는, 심화된 빈부격차를 억제하고 사회주의 운동도 잠재우기 위해[각주:22] 사회보험 정책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그는 노동자를 사회주의 대신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이자 군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조합주의적 사회보험 체제를 제시했는데, 그는 새로운 사회보험 조직이 국가의 통제 하에 여러 계급이 모두 참여하는 조합주의 조직(corporative organization)이 되어야 하며, 이 조직이 잘하면 그가 눈엣가시처럼 여긴 제국의회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각주:23] 이러한 의도 하에 그는 의료보험과 연금, 산재보험을 구상하여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안에는 노동자는 물론 자본가들도 반대하였다.[각주:24] 노동자 계급은 산재보험이 노동운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사회주의자들도 의도를 간파해 산재보험이 노동자를 국가복지의 노예로 만들려는 병영사회주의 기획이라고 공격하였다.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은 사회보험이 국가의 지나친 개입과 관료화를 유발하며, 자본가의 부담이 너무 늘어난다고 반대하였다. 여기다 기존 공제조합도 사회보험을 거부하였다.
 
의회에서 막히자 당황한 비스마르크는 전략을 변경하였다. 먼저 주요 쟁점이었던 산재보험 대신 의료보험법을 1883년 먼저 통과시켰다. 그는 의료보험은 단기보험이기 때문에 조합주의적으로 구성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와의 마찰도 적었다.[각주:25] 이후 산재보험을 공제조합이 참여하고 노사의 자주적 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정하여 1884년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후 남은 연금조직에서 조합주의 조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여기서도 실패하여 1889년 직접적인 국가보조에 기반한 노령폐질보험 법안만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마저도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주요 관리가 자신과 같은 배경의 융커였고, 독일 통일로 비스마르크가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의료보험에 따라 기존에 질병급여를 제공하던 공제조합을 중심으로 질병금고가 조직되었다. 직장 및 직종별 의료보험 조합인 질병금고는 해당 조합원들의 대표자가 통제하였으며, 비용은 노동자가 2/3, 사용자가 1/3을 부담하였다. 산재보험은 자본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대신 운영권도 독점하였다.[각주:26] 연금은 70세부터 수령하며, 국가가 인당 50마르크를 보조하고 나머지는 노사가 절반씩 재정을 부담하였다.[각주:27]
 
 
3.영국의 국민보험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1909년에는 영국에도 복지의 바람이 불었다. 1906년 노동당과 연정하여 집권에 성공한 자유당의 캠벨배너먼 내각은 정부가 실업과 빈곤에는 개입해야 한다는 새자유주의(new liberalism)에 입각해 본격적인 복지정책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후일 총리가 되는 허버트 애스퀴스(Hebert Asquith, 1852-1928), 로이드 조지, 그리고 처칠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특히 웨일스 출신의 급진파인 로이드 조지와 처칠이 주도적으로 복지입법을 추진하였다. 캠벨배너먼 내각은 급식, 의료진료, 장학금 등 청소년 복지를 대폭 늘리고, 노령연금과 국민보험을 도입하였다.
 
노령연금은 19세기 후반부터 계속 논의되었다. 1878년부터 수사신부 윌리엄 블랙클리(C. W. Blackley)가 강제갹출로 연금을 조성하여 질병과 노후에 대비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때 노령연금을 사회보험으로 할 지, 공공부조로 할 지 논쟁이 있었다. 빈곤조사의 선구자인 찰스 부스는 빈곤의 원인이 대부분 노령에 있다고 보고하며 무갹출제를 옹호했다. 반면 당시 정부의 재정 상황을 잘 알았던 조셉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은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며 무갹출제를 반대하였다. 이 시기에 갹출제 연금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던 공제조합의 반대로, 무갹출제는 비용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각주:28]
 
논의 단계에 머물던 노령연금은 1908년 다시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 안에서는 무갹출제 연금을 주장하되 대상자 수를 줄였다. 이 안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의회를 통과하였고, 연수입 31파운드 이하의 70세 이상의 남녀 고령자 중 도덕성 조사와 자산조사를 통과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주당 5실링이 지급되었다.[각주:29] 동년에 노동입법도 추진되서, 내무부는 광부의 8시간 노동을 규정하고 처칠이 주도한 1911년 상점법은 일주일에 한번 상점이 반나절 이상 문을 닫도록 규정하였다. 1909년에는 상무부법을 제정해 TUC의 최저임금 주장을 수용하였다.[각주:30]
 
캠벨배너먼의 사망으로 재구성된 애스퀴스 내각은 더 강도높은 정책으로 국민보험법을 1911년 제정하였다. 노조와 공제조합, 의사집단 간의 기나긴 협상 끝에 제정된 국민보험법은 영국 최초로 공적인 실업보험과 건강보험을 도입하였다. 이 법으로 1400만명의 영국 노동자는 실업과 질병, 장애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각주:31]
 
신설된 실업보험에는 225만명의 노동자가 가입하였고(이 중 90%는 남자였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주당 2.5펜스, 재무장관이 전체 재정의 1/3을 보조금으로 부담하였다. 보험 가입자는 실직 시에 주당 7실링을 지급받았고(여자와 청소년은 더 적엇다), 신설된 노동력 교환소에서 지급하였는데 지급 시에 수혜자가 적정한 일자리를 찾으려고 하는지 검증하였다.[각주:32] 그러나 그러한 검증 결과에 따라 실업급여를 회수하는 일은 없었다.[각주:33] 이외에 부양가족을 위한 급여는 없었고 과부나 고아도 따로 고려되지 않았다. 
 
건강보험은 연간 250파운드 이하의 소득을 얻는 육체노동자와 연수입 160파운드 이하의 화이트칼라에게 적용되었다. 이들은 본인 선호에 따라 공제조합에 등록하고, 공제조합에 가입이 거절된 사람은 우체국에서 조직한 잔여제도에 포함되었다. 재정은 노동자가 4펜스, 사용자가 3펜스, 재무장관이 2펜스를 부담하고, 여기서 '9펜스를 위한 4펜스'라는 선거구호가 비롯되었다. 질병급여는 주당 10실링, 장애급여는 주당 5실링, 그리고 30실링의 분만비가 지급되었고, 부모가 모두 가입했으면 배로 지급하며, 지역 보험위원회의 의사명부(panel system)에서 의사를 고를 수 있었다.[각주:34]
 
국민보험법에 대한 입장은 자본가 안에서도 나뉘었고, 노동계에서도 나뉘었다. 일부 자본가는 비용부담과 산업간의 불공평한 비용 부담, 관료조직의 개입에 불만을 품고 국민보험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자본가는 사회주의 방지를 위해 사회보험이 필요하다고 옹호하였다. 노동계의 경우, TUC는 노조가 해결할 수 없는 실업과 질병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찬성하였다. 여기에는 사회보험 도입 이후에도 독일의 노동운동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관찰결과도 한몫했다. 반면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연금이 상당기간이 지나야 기금이 마련되고, 노령연금이 필요한 여성은 갹출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각주:35]
 
1909년 애스퀴스 내각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는 사회보험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가가치세와 불로소득세를 포함한 people's budget(인민예산)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 예산안에서는 상속세가 증가하였고, 1907년 도입된 소득세의 누진율이 올랐으며, 연 2000파운드 이상의 수입에 대한 부가소득세와 토지세가 신설되었다. 자기들에게 복지비용이 전가된다고 느낀 지주들은 여기에 반대하였고, 지주 출신의 귀족이 모인 상원도 당연히 반대하였다. 4시간에 걸친 로이드 조지의 연설 끝에 인민예산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하원은 상원이 재정에 대한 하원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는 1671년 이래의 관습법을 어겼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애스퀴스 내각은 의회를 해산한 후 아일랜드 민족당의 도움으로 1910년 1월 재집권하여 국민의 신임을 얻었고,[각주:36] 상원이 재정에 대한 하원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음은 물론 일반 법안도 거부권이 아닌 지연권만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 1911년 의회법(parliment act 1911)을 상정하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자유당 의원들을 대거 귀족으로 만들어 상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이 동반되자, 결국 상원은 인민예산을 허용함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실권까지 헌납해야 했다. 
 
 
4.사회복지실천의 등장
사회보험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한편에서는 최초로 사회사업, 즉 현대의 사회복지실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사회 전반에 빈곤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빈곤을 해결하려는 자선단체도 속속 등장하였다. 1820년 존 그리스컴(John Griscom)은 빈민예방협회를 조직하여 빈민의 습관과 환경을 조사하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빈민에게 스스로를 돌볼 계획을 제시하고 절약과 저축을 실시하도록 동기부여하였다.[각주:37] 이후 신빈민법이 제정되고 유대계 난민의 대거 이주와 함께 장기불황이 발생하자 자선단체가 폭증하였다.
 
1861년 런던에는 640개의 자선단체가 있었고, 연수입은 250만 파운드로 런던에서 빈민구제를 위해 지출된 공공자금보다 많았다.[각주:38] 자선단체의 참여자는 주로 상류층과 빈민법 관리, 전문직 여성이었는데, 이들은 자선단체 참여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난립한 자선단체는 종교적 차이 등으로 인해 단일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통에 실질적으로 자선을 위한 자원이 낭비되고 있었다.
 
Charity organization society
이에 단일한 원칙 하에 자선 자원을 모아 체계적인 복지활동을 벌이려는 운동이 나타났고, 자선조직협회가 출범하였다. 1869년 자선에 진심이었던 일부 상류층은 The society for organizing charitable relief and repressing mendicity를 조직하였고, 이 긴 이름의 단체는 1870년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로 명칭을 바꾸었다. 자선조직협회는 기존 자선단체 간의 협력과 조직화를 목표로 했고, 자선 수혜자는 물론 정부와도 협력하고자 하였다.
 
자선조직협회는 자선의 과학화를 내세우며, 과학적 자선, 조직적 자선, 개인면담에 의한 자선을 지향했다.[각주:39] 이들은 자선활동을 조정하여 중복원조를 없애고, 빈민의 환경을 조사하여 적절한 원조를 제공하며, 구걸을 방지하여 빈민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였다.[각주:40] 또한 원조는 원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자격이란 '인격'이었다. 
 
자선조직협회가 특히 강조한 것은 과학성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기치 아래 요보호자에 대한 사례연구와 사회조건에 대한 나름의 연구를 실시했고 이를 이론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고 지역별 위원회가 각 요보호자를 상대로 자격심사와 함께 교부금, 대출, 직업 알선, 병원 추천 등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각주:41] 이러한 조사는 협회에 소속된 우애방문원들이 실시하였으며, 기초적인 자선은 자선단체에서 진행하되 자선단체의 원조가 힘든 경우 협회의 독자 기금으로 원조를 진행하였다.
 
자선조직협회는 요보호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히 나눴다. 이는 가난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당대의 인식에서 이들 또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격있는 요보호자는 장애인, 고아, 그리고 비자발적 실업자와 같이 자신이 노력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며, 반면 게으른 자나 타락한 자, 술주정 하는 사람은 구빈법의 감옥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자선조직협회의 원조를 받은 사람은 10년간 신청자의 반을 넘지 못했고, 자조의 의사가 없다고 간주된 신청자는 제외되었다.
 
자선조직협회는 실질적으로 빈민법의 정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회복지실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처음으로 사회복지가 과학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선포했고, 빈민 개개인을 조사하고 원조하였으며 지역 단위로 사회복지 활동을 조직하고 조정하였다. 이는 후에 개별사회복지실천과 지역사회복지의 뿌리가 되었으며, 자선조직협회는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으면서 근대 사회복지실천의 성립에 상당힌 영향을 끼쳤다.
 
인보관 운동
찰스 부스가 빈곤조사를 실시한 토인비 홀(toynbee hall)은 사실 1884년 건립된 최초의 인보관(settlement house)이었다. 인보관 운동은 슬럼가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인이 직접 현지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가난과 위생, 지역민의 의식을 개선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그 시작은 국민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확대하고 특히 빈곤에 개입해야 한다는 옧스퍼드 이상주의 학파[각주:42]였는데, 이들은 직접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대학생이 슬럼가로 가 생활 실태를 조사하고 원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음 인보관 운동을 시작하였다. 
 
인보관에 참여한 초기 사회복지사(settler, 이주자)는 대개 목사의 딸이었다. 이들은 슬럼가에 거주하며 그들의 환경을 개선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고 성경, 구직, 영어교육, 위생, 직업기술 등을 위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며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자선조직협회와 달리 사회문제가 사회적 모순에 의해 비롯된다는 나름의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난이 정신적 문제면서 사회적 문제이며, 특히 교육의 결핍이 빈민의 생활 주체성을 상실케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주자는 빈민과 친구과 되며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각종 통계자료를 수집했고, 아동위생 교육과 보건교육, 소년소녀를 대상으로 한 기술교육, 문자교육 및 성인교육을 실시했으며, 체육관을 건립해 여가와 건강을 도모했다. 그리고 인보관을 건립하여 주택이자 도서관, 시민회관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난의 원인을 실직으로 보고, 정주(Residence), 조사(Research), 개혁(Reform)으로 대표되는 3R 운동을 벌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슬럼가 주민이 직접 정부의 정책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지역사회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인보관 운동은 미국에서도 호응을 얻어 확산되었다. 1887년 뉴욕에 neighbourhood guild(근린조합)가 창설되었고, 1889년에는 시카고에 hull house(헐 하우스)가 건립되었으며, 1891년에는 보스턴에 andover house(안도버 하우스)가 건립되었다. 헐 하우스는 노동조합과 평화운동, 아동복지운동과 결부되어 활동하였는데,[각주:43] 헐 하우스의 애덤스(Addams)는 인보관이 거대 도시의 발달로 파생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인보관의 지도자는 이웃을 변화시켜, 그들이 지역사회를 개선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토인비 홀은 최초의 인보관이었다.[각주:44] 1884년 건립된 토인비 홀은 빈민의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을 높이고, 그들이 처한 환경과 사회적 욕구를 파악하며, 사람들이 빈민이 처한 사회문제 및 건강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빈민을 위한 사회입법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인보관에서는 빈민을 위한 각종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이것이 집단사회복지실천의 뿌리가 되었다. 또한 인보관은 지역사회의 거점으로 기능하여 주민의 조직화에 기여했으며 이는 지역사회복지의 뿌리가 되었다.
 
인보관 운동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인보관은 교육 및 레크리에이션과 집단사회복지실천을 중시하였고, 변화 대신 도시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각주:45] 그리고 인보관이라는 아이디어는 후에 종합사회복지관으로 이어진다.
 
전문적 사회복지실천의 탄생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 운동이 흥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사회복지실천의 기초가 닦이기 시작한다. 1897년 리치먼드는 사회복지실천을 위한 전문직이 필요하며 이를 양성하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17년 <Social Diagnosis>와 1922년 <개별사회복지실천이란 무엇인가>를 저술하며 자신의 사회진단 이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리치먼드의 사회진단이란 사회복지실천에 필요한 이론과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요보호자가 당면한 문제와 서비스 제공 범위를 결정하기 위한 자료수집, 문제를 식별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진단, 원조 방법을 구체화하고 원조 내용을 확정하는 예측과 치료계획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개념은 현대 사회복지학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리치먼드는 이러한 과정을 diagnosis(진단)라고 불러 의료적 모델로 불렸으며, 후에 의료적 모델에 비판적인 신좌파에 의해 진단 대신 사정(assesment)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1923년 밀포드 회의(밀퍼드 회의)는 개별사회복지실천을 정의하는 시초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개별사회복지실천을 정의하고 다양한 사회복지실천 장면에서 공통의 지식기반을 찾고자 하였다. 회의 결과 사회복지실천은 자원을 활용하여 클라이언트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발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각주:46] 이는 당시 미국에 전래되어 개인의 자아 이해를 중시하였던 정신분석학의 영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개별사회복지실천은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진단주의와 기능주의로 분화되었다. 이는 대공황의 발생으로, 빈곤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정부나 공공기관에 배치된 것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 정신분석학의 후계자인 진단주의 학파는 사회화 이론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상황 속의 인간' 개념을 주장한 해밀턴(Hamilton), 레이놀드(Reynold), 홀리스(Hollis)의 심리사회적 접근으로 발전한다.[각주:47] 
 
기능주의도 엄밀히 말하면 정신분석학의 후계지만, 프로이트가 아닌 오토 랑크를 따랐다는 점에서 달랐다. 랑크와 마찬가지로 기능주의 학파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할 때 자기자신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클라이언트 본인이 처한 문제는 클라이언트 본인만 해결할 수 있고 사회복지사를 이를 조력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기능주의 학파의 입장은 태프트(Taft)와 로빈슨(RObinson) 등에 의해 더 발달했다.[각주:48] 그리고 진단주의와 기능주의 모두 임상사회복지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개별사회복지실천 외에 지역사회복지도 이때부터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에서 흥하고 있던 인보관 운동은 처음에는 지역주민을 조직하여 사회적 행동을 촉발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지역사회복지의 발달은 아래와 같이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 자선조직화 운동 시기(1865-1914): 사회진화론과 급진적 자유주의,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각종 사회문제에 대해 개혁적인 방향으로 대처하려는 움직이 출현. 이때 지역사회복지란 대개 지역의 조직화와 정치행동이었다.
  • 지역공동모금 및 지역복지협의회 발전시기(1914-1929)
  • 공공복지사업의 발전시기(1929-1959): 노동운동과 뉴딜의 영향으로 공공복지사업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복지가 이뤄졌다
  • 후기: 지역사회복지에 대한 교육이 대학원에 개설되면서 지역사회복지의 전문화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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