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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한국 대중문화사 총론 본문
한국은 옛날부터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가꾸어 왔지만, 현대적인 대중문화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화는 광복과 함께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에 노출되었고, 6-70년대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 분야의 주요 서적은 <대중문화의 이해(김창남,2판,한울,2018)>가 있다.
일제시대와 대중문화의 시작
한국 대중문화의 시작은 일제시대이다. 이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탄생하고 매스미디어가 도입되면서 한국에도 대중문화가 시작되었다. 신문은 대한제국 시기에 출현했고, 2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다. 라디오와 음반 산업이 시작된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대중문화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일부 계층만이 향유했으며,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통문화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가 우리 문화의 근대화를 차단하고 일제를 합리화했다고 공격한다.
일제시대에 탄생한 가장 성공적인 대중문화 장르가 대중음악이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탄생시킨 일본축음기상회와 다른 외국계 음반회사들은 처음에 신민요와 일본 번안 창가를 주로 발매했다. 대표적인 곡이 <희망가#> 1인데, 이 노래는 원래 일본 창가인 <새하얀 후지산의 기슭>을 원곡 2으로 했으며 <탕자자탄가>나 <청년경계가>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중에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26년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대중음악 산업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녹음된 이 노래는 원래 이바노비치의 <푸른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원곡으로 했는데,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가사에 걸맞게 노래를 부른 가수 윤심덕이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살하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노래가 대중의 유행가로 등극하게 되자 조선에서 음반산업의 가능성을 본 외국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했고, 27년에는 콜롬비아, 28년에는 빅터가 서울에 지사를 세웠다. 33년에는 한국인에 의해 오케(okeh) 레코드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음반회사들의 진출과 함께 대중음악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대중가요는 보통 악극단을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통계 집계가 어렵지만, 몇가지 기록을 보면 32년에 사의 찬미가 13000장 가량 판매되었고,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유성기가 중산층의 생활 필수품으로 평가되었다. 이를 짐작하듯이 35년에 유성기 보급 대수는 30만대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도 중산층에 한정되었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현대와 같은 영향력은 가지지 못했다.
방송은 27년 2월 JODK라는 호출부호로 전파를 쏘아 올린 경성방송국이 한국 최초의 방송이다. 하루 방송 시간은 6시간 30분이었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율은 원래 1:3이었다가 나중에 2:3으로 바뀌었는데 33년 이후에는 한국어 방송과 일어 방송이 분리되었다. 경성방송국은 주로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는데, 경성방송국이 개국할 당시에는 조선의 라디오는 1440대였고 이중 80%는 일본인 소유였다. 그러나 34년에 가면 방송 청취자 수는 3만명을 돌파했고, 이중 40%는 조선인일 정도로 늘어났다.
영화는 1903년 무렵 영국의 담배회사가 담배 판촉용으로 활동사진 순회상영회를 열면서 처음 도입되었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는 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 각본 하에 개봉한 <의리적 구토>인데, 의리적 구토는 완전한 영화라기보다는 일부 장면만 활동사진으로 대체한 연극에 가까웠다. 완성된 한국인 영화는 23년 윤백남 각본의 <월하의 맹서>인데, 이 영화는 저축장려를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후원 하에 제작된 선전영화였다. 같은 해에 일본인이 제작한 <춘향전>이 개봉하였고, 24년에는 한국인이 <장화홍련전>을 개봉하면서 한국에도 본격적인 영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영화관 수도 15년의 15-16관에서 25년의 27관, 35년의 90여관으로 늘어났다.
당대 대중문화의 특징은 신파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신파극은 감정적으로 과장된 연출이 특징인 근대시기 일본 희곡 장르인데, 과장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의 감정 반응을 강하게 끌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소위 '억지눈물을 짜내는' 극으로도 불리고 있다. 일제시대에 신파는 영화와 장편소설, 희곡, 심지어는 대중음악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강영희 3는 이 시기의 신파 양식이 1)현실에 압도당한 자아의 분열과 2)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눈물을 주요 특징으로 가진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반도에서 대중문화가 점차 일어나자, 문화검열도 같이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33년 <레코드취체규칙>을 제정하여 대중가요를 검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빅터레코드에서 취입한 아리랑과 유행가 <한양의 사계>, <황성옛터> 등이 금지되었다. 처음 제정된 이후 금지된 곡은 일본어곡 2개와 러시아어 3개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어곡이었고, 4 후반부에 가면 황성옛터와 같이 비관적인 정서를 담은 노래들도 너무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당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검열이 행해져서, 26년 일제는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발표하여 총독부 경무부 경무국 고등경찰과에서 영화를 검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경찰은 공안/풍속/보건과 관련하여 검열을 실시할 수 있었으며, 27년에는 발매된 영화필름 약 19000km 중에서 24.982km 정도가 검열되어 사라졌다. 당시에 개봉한 영화 <혈마>는 8권의 필름 가운데 3권 분량밖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금지곡
금지곡은 시중에 유통되는 가요를 방송에서 금지하거나 판매를 금지하는 사후적인 검열 제도이다. 금지곡은 방송심의에서 탈락하거나, 음지의 압력으로 사실상 방송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으며, 과거에는 대대적인 재심사를 거쳐 대량으로 금지곡이 지정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금지곡 제도는 일제시기 레코드 취체규칙에서 시작되는데, 당시 일제는 치안방해라는 명목으로 <황성옛터#>와 <아리랑> 등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해방 후에도 금지곡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유당 정권은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금지했고, 60년대 최대 히트곡이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을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금지곡 지정은 75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에서 이루어졌는데, 예륜은 1)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2)왜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3)패배적/자학적/비판적 작품, 4)선정적/퇴폐적 작품 등을 기준으로 정하여 금지곡을 지정하였다. 이때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신중현의 <거짓말이야#> 등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80년대에 들어 금지곡은 명시적인 금지보다는 음성적인 압력을 통하는 방식으로 지정되었다. 가령 <독도는 우리땅#>은 명시적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이러한 금지곡 제도는 6.29 선언 이후 대대적으로 해제되었으며, 현재 명시적으로 남아있는 금지곡은 없다. 그러나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현재의 방송심의 제도가 사실상 금지곡 제도라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엔카와 일제시대 대중음악
엔카는 1883년 무렵 일본에서 발생한 대중음악으로, 민권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선전활동 사이사이에서 하던 노래나 연극에서 유래했다. 엔카를 부르던 사람은 엔카시라 불렸고, 이들은 샤미센으로 반주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가사를 노래했으며 도,레,미,솔,라의 요나누키 음계에 기반한 4분의 2박자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일본에 군국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가사가 평범한 사랑 노래로 바뀌었고, 동시에 라,시,도,미,파로 구성된 일본 전통 음계인 미야코부시 음계도 도입되었다.
한국은 20년대에 일본에서 신파극이 도입되면서 엔카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 영향을 <황성옛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한반도의 초기 대중음악인 황성옛터는 전형적인 요나누키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요나누키 음계는 나중에 역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춤곡 리듬인 폭스 트롯(fox trot)과 합쳐졌는데, 이는 일본 전통 박자인 2박자 계열의 엔카가 느린 4분의 2박자/4분의 4박자인 폭스트롯과 아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 둘이 합쳐진 결과물이 트로트로 대표되는 뽕짝 음악이며, '뽕짝'이라는 단어는 뽕짝 음악이 낮은 음으로 내는 기본 반주(뽕)에 높은 화음(짝)이 맞춰주는 형식을 띠고 있는 데에서 유래했다.
당대의 대중가요는 주로 2가지 테마를 담고 있었다. 첫번째는 비애미(탄식과 비탄)로 나타나는 남녀간 사랑과 이별이고, 두번째는 나그네의 서러움이었다. 비애미를 강조한 사랑노래는 당대의 신파극 유행을 반영했고, 나그네의 서러움은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와 식민 치하의 현실이라는 일제시대 특유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방랑의 서러움을 노래한 노래가 <방랑가#>인데, 아래는 가사의 일부이다.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닯은 이 내 가슴 뉘가 알거나
한편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30년대 이후에는 친일적인 노래도 다소 등장하였다. <감격시대#>나 <복지만리>는 대놓고 일제의 지배와 침략을 찬양했고, 이외에 <세월아 네월아>나 <왕서방 연서(비단장수 왕서방)#>과 같이 현실 긍정적인 노래도 다수 등장하였다. <복지만리#>는 일제의 만주침략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국책가요인데,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하는 노래이지만 일제시대 이후에도 한동안 유행가였다. 종합하면 일제시대의 대중가요는 엔카와 신파극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으며, 비관적인 노래들과 낙관적(그리고 친일적)인 노래들이 공존했다.
해방기
45년 8월 일제의 통치는 끝이 났지만, 이것이 한국의 독자적인 대중문화 탄생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제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해 10월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괴뢰단체 조선방송협회에서 운영하던 관제방송들을 모조리 미군정 직할로 편입하였다. 특히 라디오는 가장 많은 수의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미군은 서울중앙방송국(JODK)을 한국인에게 접근하는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5 그러나 이전의 대중문화가 그랬듯이, 당시에도 라디오를 통한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되었다.
방송을 장악한 미군은 라디오를 통해 미군의 정책을 홍보함과 동시에, 미국적인 상업방송 프로그램도 방영하였다. 한국 최초의 연속극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은 미국인 랜돌프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46년부터 3년간 방영되었다. 랜돌프의 동료들도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방송들을 현지화하여 방송했는데, 당시에 라디오에서 방영한 <스무고개>나 <천문만답>, <거리의 화제>, <방송토론회> 등은 당시 미국에서 방영하던 <Twenty Questions>, <Information Please>, <Man of the Street>, <Round Table Discussion>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는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에 많은 소비자들이 서구식 대중가요 대신 민요와 가요를 틀어달라고 주문하는 일이 많았다.
광복 당시 라디오는 남한에 15만 8000대, 북한에 7만 6100대 정도가 있어 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6 48년에는 소폭 늘어서, 48년 8월 대한방송협회에 등록된 라디오는 15만 6700대였다. 60년 4월에야 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서 전국에 78만 989대가 보급되었으나, 이때에도 가구 대비 보급률은 20.8%에 그쳤고 인구 대비 보급률은 3.6%였다. 그나마도 대부분 도시권에 몰려 있었으며,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위상은 7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한국전쟁
한편 해방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한국전쟁은 한국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그네의 감정을 노래하던 일제시대의 대중음악 풍조는 실향민과 이산가족을 발생시킨 한국전쟁에 의해 더욱 자극되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나 <굳세어라 금순아#>가 대표적인 이 시기 노래이며, 동시에 북한과 적대한 경험과 군대와의 잦은 접촉으로 인해 <삼팔선의 봄#>이나 <전선야곡#>, <판문점의 달밤#>와 같은 군 관련 가요도 유행하였다. <아내의 노래#>도 이런 유행에 속한 노래인데, 아내의 노래는 다른 노래보다 더 관제성이 짙었다.
한국전쟁은 한국 대중문화에 새로운 사조를 일으킨 동시에, 새로운 억압도 낳았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대중문화에 탄압을 가했다. 월북 작가의 작품은 무조건 금지되었고, 적성국가의 문화는 무조건 접촉 불가였는데 여기에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피카소도 포함되었다. 월북 작가들이 만든 대중가요는 금지되거나, 작사자/작곡가의 이름이 바뀌어야 했다. 판매 금지나 방송금지, 상영금지 등의 문화검열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권의 탄압은 90년대까지 지속된 정치권력의 우위에 의한 것이었으며, 검열도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밀리는 9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문화검열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나타났다. 1969년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자신의 저서 <한국영화전사(소도,2004)>에서 검열제도를 비판하면서도. 반공을 위해 문화를 검열하는 취지 자체에는 찬성하였다. 또한 <아내의 노래>같은 선전 가요도 등장했고, 전쟁 당시에는 많은 대중예술인들이 정훈단을 조직하여 반공 영화를 만들거나 위문 공연을 다녔다. 그러나 이런 자기검열이 무색하게, 당시 정권의 검열은 대중예술인들의 예상을 넘었다.
당시에 일어난 문화검열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은 반공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빨치산 대원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되었다. 비슷하게 이만희 감독의 65년작 <7인의 여포로>는 국군 포로를 구출해서 귀순한 북한군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 여자 장교가 북한군에 경례를 하는 장면, 북한군을 칭찬하는 대사, 반짝반짝 빛나는 북한군의 장화같은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기소되었다. 50년대 말 가요인 <물레방아 도는 내력>은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탄압당했다. 이에 68년 영화감독 김수용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영화검열의 한계'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자신들의 의욕이 위축된다고 토로하였다. 7
미국문화의 도래
일제시대에도 서구 문화는 일부분 들어왔다. 20년대부터 이미 서구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이들의 인기는 일본 영화보다 높았다. 8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서구 문화와의 접촉은 해방이 이뤄지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시작되었다. 해방기에 미군이 서구 음악과 연속극들을 들여오면서 비로소 한국인들은 미국 문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서양의 7음계도 이때부터 대중음악에 도입되었고, 서구 음악을 따라한 가요들이 이때부터 흥행하기 시작했다. 9 실제로 이때 유행한 <럭키 서울#>이나 <럭키 모닝#>, <청춘 아베크#>, <샌프란시스코#>, <아리조나 카우보이#>,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보면, 비록 형식적으로 일본 음악에 가까우나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에서도 외래어와 외국어가 매우 많이 쓰인다.
50년대에 들면서 미국식 음악이 들어오는 속도는 더 빨라지는데, 이들 노래의 특징은 이들이 대부분 춤곡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노래들이 유행한 배경에는 미국의 댄스파티 문화가 한국에 진주한 것이 있었으며, 음악 이외에도 맘보바지나 댄스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문화가 들어왔다. 이러한 문화가 전통문화와 충돌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나타났다. 박인수 사건이 바로 이때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 유명한 자유부인 사건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자유부인(정비석,지식을만드는지식,2013)>은 소설가 정비석이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한 소설인데, 소설의 내용은 대학교수가 불륜을 하고 어린 여대생과 댄스홀을 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전통문화의 시각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황산덕이 작가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촉발되었다. 정비석과 황산덕의 논쟁은 새로운 자유주의 문화와 기존 전통 문화의 충돌이었으며, 정비석 본인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고문까지 당했으나 소설은 4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한편 미국문화가 전래되던 50년대에, 주한미군에서는 한국인들 일부를 오디션을 통해 선정하여 위문공연을 맡겼다. 미8군 출신 연예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수요에 맞게 주로 팝을 연주했는데, 예컨대 최희준은 냇 킹 콜을, 유주용은 프랭크 시나트라를, 박형준은 페리 코모를, 패티김은 페티 페이지를 모방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한국에 라디오가 넓게 퍼지자 이들도 라디오를 통해 활동했고, 트로트와는 다른 미국식 음악이 한국 전체에서 유행을 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고학력자였던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서구 문화에 대한 식견이 깊었고, 이러한 면으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이들이 한국 팝의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박정희 집권기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무너지자 한국은 일시적으로 민주주의를 누렸고, 자유로워진 분위기는 문화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이 이때 발표되었고, 좌파가 창간한 <민족일보>가 3만 5000부나 발행되었다. 민족일보는 한미 경제협력 반대나 반공임시특별법/데모규제법에 대한 반대운동, 평화통일론 등을 주장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그러나 박정희 쿠데타로 오발탄은 상영금지되었고, 민족일보는 용공 신문으로 규정되어 폐간되었다. 사장 조용수는 61년 사형당했는데, 이는 과거사위에 의한 재판에서 무고한 죽음으로 판결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권력 강화의 일환으로 매스미디어를 확산시켰다. 61년 서울의 문화 라디오가 최초의 상업 라디오로 개국하였고, 63년에 동아 라디오와 64년에 동양 라디오가 개국했다. 또한 61년에는 KBS도 개국했고, 64년에 TBC, 70년에 MBC가 개국하였다. 68년에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최초의 대중적 주간지였다. 이와 동시에 군사정부는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제도도 만들어서, 63년 방송법 제정을 통해 방송국을 감독하고 방송윤리위원회로 프로그램들을 통제했다. 당시에 같이 만들어진 영화윤리위원회와 예술윤리위원회도 그러한 성격의 기구였다.
이후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소비여력이 늘어난 시민들에 의해 대중문화도 발달하였다. 70년에서 79년까지 라디오는 3.7배 증가했고, TV는 15.7배로 늘었다. 당시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자는 성인이었는데, 이는 성인들만이 문화컨텐츠를 소비할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당대의 문화컨텐츠들은 주로 직장인과 성인의 삶을 다뤘는데, <우리 애인은 골드미스#>나 <회전의자#>, <대머리 총각#> 등 당대의 유행가들 역시 남성 직장인의 취향을 많이 반영했다.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유신 정권은 73년 말 제 1차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문화검열 정책을 정리했는데, 유신정권은 민족주의와 예술의 대중화를 명분으로 문화를 통제하려고 했다. 당시에 제정된 영화법은 법조항이 포괄적이고 불명확하게 명시되어 검열의 자율권을 높였고, 정치적 반대파뿐만 아니라 선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컨텐츠에도 가해졌다. 당시 유신정권이 내걸었던 우수영화 선정 기준에서 유신정권의 목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 10월 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진작할 수 있는 내용
- 의욕과 신의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내용
-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을 소재로 한 내용
- 농어민에게 꿈과 신념을 주고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
- 성실/근면/검소한 생활 자세를 그린 내용
- 근대화를 위해 헌신/노력하는 산업전사를 다룬 내용
- 예지와 용단으로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사실 주제
- 국난 극복은 국민 단결이라는 내용
- 민족의 수난을 거울삼아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
- 수출 증대를 소재로 하거나 국민의 과학화를 촉진하는 내용
-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상
- 미풍양속과 국민정서 순화에 기여하는 내용
- 건전한 국민오락을 개발/보급하는 내용
- 문화재 애호정신을 함양하는 내용
- 전통문화의 전승/발전과 민족예술의 선양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
- 순수문예의 예술성을 높이는 내용
한편 60년대에 황금기를 누렸던 한국 영화들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때 정부는 한국 영화를 보호하기 위해 외화수입권 제도를 만들었는데, 외화수입권은 외국 영화를 수입할 권한으로 국내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주어졌다. 당시 국내 영화 제작자들은 돈 되는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내 영화를 만들었고, 비록 이 제도는 84년 폐지되었으나 한국 영화 시장을 연명시키는데 성공했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세대가 대표적인 문화 소비자로 등장했다. 근대 교육체계 하에서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의 골드 미스 애인보다 포크나 록을 좋아했고, 해외 청년문화의 영향을 받아 장발과 청바지, 생맥주가 유행했다. 그러자 대중음악도 통기타 가요가 주류로 등장하여 기성세대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영화도 하길종이나 이장호 등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여 <바보들의 행진(1975)>이나 <별들의 고향(1974)> 등을 감독했다. 코미디 개그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입도 이들의 등장에 영향을 받았다. 통기타 가요는 원래 서구의 민요에서 유래한 음악 장르로 청년문화의 일부였는데, 이러한 포크 음악은 70년대 초부터 한국에 수입되었고 일본적인 당대의 대중가요에 싫증을 느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청년문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탄압이었다. 유신 정권은 청년들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대마초 흡연을 빌미로 각광받던 당대의 연예인들을 대거 구속했으며, 연예인의 외국식 예명까지도 규제하였다. 패티김은 본명 김혜자로 활동해야 했고,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어니온스는 양파로, 블루벨스는 청종으로 바뀌었다. 75년 6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새로운 검열기준을 마련하면서 금지곡들을 대규모로 지정했는데, 당시 금지곡의 기준은 1)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 2)외래풍조의 도입과 모방, 3)패배적/자학적/비탄적 작품, 4)선정적/퇴폐적 내용 등이었다. 새로운 기준에 따라 신중현의 <거짓말이야#>와 이장희의 <그건 너#>,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이 새로 금지되었다. 당해 12월에는 팝송도 규제되었는데 여기에는 밥 딜런의 음악도 포함되었다.
유신 정권의 규제는 TV에도 적용되었다. 유신 정권은 73년 방송법을 개정하여 방송윤리위원회를 법정기관으로 격상하고, 방송국에 심의실을 두어 사전심의를 의무화했다. 교양방송은 20%에서 30%를 차지하도록 비중이 올라갔고, 광고의 시간과 회수를 대통령령 통제 하에 두면서 중간광고는 폐지했다. 75년 9월에는 문화공보부(문공부)에서 '추계방송순서 개편방향'을 작성하여 각 방송사에 하달하였는데 지침의 핵심은 1)새마을 정신 선전, 2)퇴폐성 프로그램 금지, 3)모방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국 방송의 금지였다. 76년부터는 문공부에서 방송 지침을 하달하여 당대의 3개 주류 채널이 같은 시간대에 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해야 했다. 저녁 8시부터 모든 방송사는 정부 시책과 관련된 안보/새마을/서정쇄신 등을 주제로 한 25분짜리 프로그램을 방송해야했다. 동시에 박정희가 전통문화와 호국의 얼을 강조하면서, 충효 사상을 선전하거나 새마을운동/반공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80년대
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의 노력에 힘입어 대중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외국의 보호무역 기조로 인해 컬러TV의 수출이 막히자 정부는 컬러 방송을 송출하여 내수 시장을 확보하려 들었는데, 그 결과 80년대부터 컬러TV가 한국에서 상용화되기 시작했으며 비디오 게임도 비슷한 시기 유행하였다. 한편 정부의 스포츠 육성 정책으로 인해 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야구가 흥행하자 프로씨름과 프로축구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조된 스포츠 열기는 운동화나 축구공 등의 스포츠시장과 레저산업의 육성을 가져왔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과 매스미디어의 보급, 그리고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증대는 대중문화의 발달을 불러왔다.
80년대 대중문화의 특징은 향락주의이다. 박정희때부터 이어진 고도성장은 갈 데 없는 자본을 시중에 유통시켰고, 경제활동에서 접대의 필요성 증대와 아노미 현상은 이 돈을 유흥산업에 불어넣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1차적인 대응은 탄압이었으나, 동시에 전두환 정권은 국민 우민화를 위해 스포츠(Sports), 섹스(Sex), 영화(Screen)로 대표되는 3S 정책을 밀면서 외설적이고 향락적인 문화컨텐츠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였다. 82년 <애마부인>의 개봉을 시작으로 에로영화 붐이 시작되었고, 불법 비디오와 외설 영화, 유흥업에 대한 시비가 80년대를 채웠다.
한편 80년대에서 21세기 초 까지는 10대 청소년들이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자로 등장했다. 경제성장은 부모들에게 충분한 돈을 쥐어줬고, 용돈을 가진 아이들은 이제 문화의 소비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는 점차 이들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80년대부터 청소년 취향의 댄스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등장했고, 청소년 드라마도 이때부터 등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에 더 심화되었다.
청소년 문화의 대두는 대중음악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트로트 중심의 가요시장은 트로트와 발라드, 댄스로 삼분되었고, 가창력보다 춤과 외모가 중시되는 비디오형 가수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노래의 형식은 서구의 팝과 거의 유사해졌고, 실제로 팝 음악도 유행을 탔다. 오빠부대는 인기스타(특히 남성)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소녀 팬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80년대부터 사회의 주된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였다. 비록 그 시초는 69년 클리프 리처드의 이화여대 공연이었고, 79년 레이프 가렛의 공연때도 오빠부대가 유명했으나, 본격적이고 국내적인 오빠부대는 조용필 팬덤을 그 시초로 본다.
대중문화와 청소년 문화가 부흥하는 동안, 80년대까지 지속되던 부조리극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부조리극은 5-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한 연극 사조인데, 대개 연겨로디지 않는 반복적 대화와 무의미한 행위, 논리적 전개의 부재 등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도 부조리극이다) 연극들을 일컫는다. 인생의 무의미함과 답답함,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 공허함 등을 주로 표현했던 부조리극은 베케트와 이오네스크에 이어 한국에서도 성행했으나, 80년대에 다른 대중문화 장르가 부흥하면서 점차 한국에서 사라져갔다.
전두환 정권의 문화정책
문화에 대한 탄압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의 원죄를 안고 출발한 전두환 정권은 문화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쾌락의 장려로 문화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들은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수단과 간접적인 수단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보다 유연한 방식으로 문화통제를 실시했고, 그러면서 문화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대중문화를 육성하여 문화산업을 증진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불만을 대중문화로 돌리려고 하였다. 이러한 방향에 따라 전두환 정부는 문화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는 한편, 문화산업에 대기업을 끌어들이고 각종 문화 행사를 개최하였다.
우선 전두환은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였는데, 후에 83년 국회 청문회에서 이철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이는 정부 비판적인 언론을 줄이고 언론들이 정부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자율을 표방했던 이 조치로 인해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강제로 흡수되었고, 한국일보는 서울경제신문을 흡수했으며, 내외경제가 코리아헤럴드에 흡수되었다. 지방신문의 경우도 1도 1지의 원칙에 따라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영남일보가 매일신문에, 경남일보가 경남매일에, 전남일보가 전남매일에 흡수되었으며, 이중 매일신문과 경남매일, 전남매일은 각각 대구매일신문, 경남신문, 광주일보로 개명되었다. 결과적으로 중앙일간지는 1개 줄었고, 경제지는 4개에서 2개로 줄었으며, 지방지는 14개에서 10개로 줄었다. 이 시기에 새로 창간된 신문은 스포츠서울이 유일했다.
방송의 경우 KBS가 TBC를 흡수하여 KBS 2TV를 열었고, 전일방송, DBS 라디오, 서해방송, 대구FM을 흡수했다. MBC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MBC 주식의 65%를 KBS가 소유하게 되었다. CBS는 선교 방송만 허용되었으며, 모든 통신사가 연합통신으로 일원회되면서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전방위적인 폐간조치로 인해 1900명에 달하는 언론인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검열의 칼날은 지식인들의 무대였던 잡지에서 더 매서웠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의 양대 계간지와 <뿌리깊은나무>, <씨알의 소리> 등의 월간지 등 정기간행물 172종이 등록 취소되었고, 이후에도 발간 억제정책은 이어졌다. 이에 대항하여 당대 지식인들은 부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무크(mook) 지의 형식으로 문예 활동을 이어갔다. 아무튼 국가보안법과 집시법까지 활용해서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 이후에도 통제정책을 지속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두환은 여러가지 문화정책은 실시하였다. 국풍81은 81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시작된 문화 정책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흥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전국 194개 대학에서 244개 동아리의 14000명이 동원되었으며, 군사정부는 이를 통해 국민들의 비판을 희석하고 정권을 홍보하고자 하였다. 행사 내용은 주로 민속놀이와 대중문화 공연이었다. 이외에도 80년 개최된 미스 유니버스 대회나 86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88년의 서울 올림픽도 이러한 문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정권의 치적으로 강조되면서, '질서'를 내세워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민중문화 운동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기존의 고급 문화가 쇠퇴하자, 민주화 운동가들은 이에 대항하여 민중문화를 새로이 만들고자 하였다. 소위 '운동권문화'는 70년대부터 존재해왔으나, 80년대에 들어 더 활발해진다. NL 계열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운동권에서 주류를 차지한 담론은 문화제국주의론이었는데, 70년대부터 등장한 이 담론에서는 서구문화는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략수단이며 서구 문화의 전파는 일종의 침략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서구 문화는 한민족을 분열시키고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와해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서구 열강에 우리가 문화적으로 존속되며 모든 문화적 행위가 서구 열강에게 이득이 되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북한과 북한의 자주적 움직임을 찬양했던 NL에게 민중문화란 한국 고유의 문화였고, 미제의 문화침략에 맞서서 미제와 전두환 정권에 맞설 수단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문화는 미제와 자본, 권력의 하수인으로 배척되고 탈춤과 마당극이 계승되어야 할 민중예술로 지목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시로 84년 창립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창립 발기문#의 일부를 한번 보자.
"오늘날 이 사회에 횡행하는 문화는 대중을 길들이고 잠재워 자본과 권력의 왜곡된 논리에 복속하는 충실하고 무기력한 신민으로 만들어가는 노예화의 문화이다. 그것은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신식민주의의 문화이며, 민중의 절절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내외의 지배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관제문화이다."
이들에게 탈춤은 사회비판의 성격을 가진 민중연극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60년대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관심을 받아왔다. 탈춤과 마당극은 70년대부터 저항의 수단으로 활발히 창작되었으며, 80년대에 들어서면 민중과 좌익을 지향하는 민족극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는 전통문화를 복원하려는 노력과 탈춤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문학에서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의 바람이 불어왔고 당시 문학인들은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민중문학론, 제3세계 문학론, 리얼리즘론 등 다양한 문학 담론을 만들어 갔다.
80년대 민중문화의 특징은 다양한 소집단의 창설에 있다. 70년대부터 활동해온 한두레, 연우무대 등은 중심으로 미술 동인 집단인 현실과 발언, 두렁, 그리고 연극모임인 신명,연희광대패,아리랑, 춤패인 신과 불림, 노래 모임 새벽과 민요연구회, 독립영화집단인 서울영화집단 등 매우 다양한 소규모 단체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84년 이들은 서울에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결성했고, 85년 민족미술협의회를 창립하였다. 민족미술협의회는 민주교육실천협의회,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다른 문화단체 및 사회운동 단체와 연대하였다.
당대 민중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노동자 계급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노동운동이 무너지자, 노동운동가들은 현장 소모임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을 복구해 나갔다. 이 과정에 문화활동가들이 참여하여 소모임 단위의 공동체 놀이나 생활속 문화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부여하고 결속을 다지게 하였다. 86년을 전후하여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이 노동자 중심의 민중문화를 표방하고, 각 지역에 노동자 문화교실과 소규모 문화행사 등 노동자를 위한 문화공간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경우로 대림동의 '살림마당'과 구로구 산돌교회의 '일꾼마당', 청계로의 '평화골 한마당', 부천의 '그루터기' 등이 있다.
종합적으로 민중문화는 독재정권(과 대중문화)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었고, 철저히 음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때문에 민중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억압적 지배와 저항적 실천이라는 문화담론을 철저히 따랐다.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은 경직되고 교조적인 이념을 유지했고, 지배/저항 이분법에 따라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도 철저히 구분되면서 전자는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담론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정치적 억압이 약화되면서 약해졌다.
민중가요
민중가요는 당대 민중문화에서 유행했던 음악이었다. 80년대 초부터 대학을 중심으로 노래패들이 조직되었고, 이들 노래패들은 과거의 민속문화를 계승하여 새로운 저항가요를 만들고 보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단체와 노동계로 확산되었고,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운동권을 벗어나 대중에게도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80년대 후반에 흥행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민중가요 노래패였는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모여 조직한 노래패로 80년대 노래운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안치환과 권진원, 그리고 김광석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이었다.
민중가요는 대개 불법 음반의 형태로 보급되었다. 불법 음반은 해적판 CD를 의미하는 '길보드 차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불법 음반은 정부의 검열을 피해 제작된 음반을 말한다. 민중가요는 정부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래패들은 자체적으로 스튜디어를 만들어 자신들의 음악을 녹음했다. 대표적으로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이런식으로 보급되었는데, 이 노래는 78년 한국교회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민주화로 검열 제도가 폐지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민주화 이후
민주화 이후 경제성장과 세계화에 힘입어 대중문화는 더욱 발달하였다. 연간 100편 정도에 불과했던 영화는 90년대에 들어 연간 수백편으로 늘었고, TV 채널은 4-5개에서 50개로 폭증하였다. 사회가 개방되면서 보다 수위가 높은 영상물도 유통이 가능해졌고, 가수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80년대에 문화담론은 소위 운동권의 민중문화 담론에 의해 독점되었으나, 운동권 특유의 경직된 사고체계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만 잠깐 유행한 후 대중의 생활과 정서에 가까운 다른 담론으로 대체되었다.
민중문화 담론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기업이었다. 문화규제가 풀리고 정치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대기업이 자유로이 활동하게 되면서 이들은 문화산업에도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정치권의 억압으로 인해 국내 대기업은 문화산업에 진출할 만한 기반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고, 더욱이 IMF 사태가 발생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투자 자체를 줄이면서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도 줄어들었다. 이때 외국자본이 투자를 시행하면서 좌파들이 한국 문화가 외국에 잠식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경제위기가 끝나고 2010년대부터 한국의 문화산업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이들의 걱정은 기우임이 입증되었다.
한편 이 시대는 동시에 신세대 문화의 시대이기도 했는데, 신세대 문화는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라 불렸던 신세대에 의해 주도되었던 문화로 영상매체에 가장 잘 적응했던 이들은 동시에 영상산업과 이를 육성하는 대기업의 주요 고객이 되었다. 록카페나 유리로 장식된 카페 등 이들의 문화적 취향은 기성세대의 것과 달랐고 이에 따라 신세대 문화가 단순한 소비주의나 쾌락주의라는 공격이 있었지만, 이들이 영상산업에서 가지는 주도적인 역할로 인해 신세대 문화는 빠르게 주류가 되어갔다.
신세대 문화는 서태지 현상를 통해 그 정점에 달했는데, 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그의 팀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중음악 시장을 휩쓸면서 한국 대중문화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찍었다. 서태지의 흥행은 한국 대중음악의 패권이 거의 완전히 10대로 넘어갔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줬고,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못했던 젊은이들의 감성과 행동이 서태지를 통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서태지를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자기표현 가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시작했고, 지식인들은 때맞춰 들어온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젊은이들의 이러한 행동을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저항으로서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10
그러나 동시에 신세대 문화가 단지 소비만 하는 문화이며,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성은 진정한 개성이 아니라는 공격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랩을 예시로 들며, 신세대 문화는 스스로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소비재이며 몰개성적이라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식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경향은 IMF 이후에도 가시지 않았으며, 이명박이 집권하자 경제논리의 득세로 인해 더욱 사라질 것이라는게 이들 지식인의 공격이었다. 마음의 소리는 경제논리에 지배당한 거짓된 예술이고 걸캅스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지금 한국의 문화도 충분히 만족스럽겠지만, 불행히도 주류 지식인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80년대까지 문화 담론은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지식인 집단이 꽉 쥐고 있었지만, 민주주의가 이룩된 이후에는 이들보다 시장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 왕좌를 찬탈당한 운동권과 그 후예 지식인들은 시장논리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다시금 이들의 입맛에 맞으면서 급변하는 한국사회를 자신들 입맛에 맞게 통제하기 위한 대안적인 담론을 모색하였다. 그러면서 90년대부터 문화시장에서 지식인의 영향은 약해져 갔지만, 문화평론에서는 계속해서 세를 과시해 나가게 된다.
대안담론 운동
80년대의 민중문화 담론이 문화시장에서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가자, 지식인들은 민중문화 담론을 대체할(그러면서도 자신들 입맛에 맞는) 새로운 담론을 구상하고자 하였다. 이는 먼저 기존의 민중문화 담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성욱은 민중문화 담론이 본질주의적이고 선험주의적이며 경험주의적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민중문화 담론에서 문화컨텐츠는 오로지 정치의 도구일 뿐이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정치적인 메시지는 잘 담았으나 사람들의 니즈는 충족하지 못해 자본주의에 밀렸다고 비판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시장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문화담론이 필요하고, 새로운 담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대중문화를 긍정해야 한다고 이성욱은 주장하였다. 11
때마침 해외에서의 연구가 소개되면서 국내 문화연구자들도 능동적인 대중이나 소비자의 기호학적 저항을 테마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해외에서 갓 들어온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무장한 채 텍스트에 대한 수용자의 해독을 중시하고, 특히 광고처럼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매체를 텍스트로 규정한 후 이에 대한 사람들의 해독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해독은 으레 수용자들의 정체성 형성 과정이자 저항의 과정이라고 곧잘 해석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친대중적인 담론은 90년대에 한국 문화연구를 널리 지배하였다. 12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판할 대상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언제나 비판할 꺼리를 찾는 문화연구자들의 반대에 부딫히게 되었다. 가령 송승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저항(심지어는 그게 저항인지도 불명확한 무언가)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비판하였다. 비슷하게 김창남 13도 90년대 문화담론이 '지배 속의 저항'이라는 테마에 너무 집착하였다고 평가했고, 이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였다. 유선영 14도 비슷하게 90년대 담론이 현실을 추구해야 할 이론이 책임 방기를 한 것이라고 공격했고, 자본주의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15
이에 문화연구자들은 기존의 민중문화 담론도 비판적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도 비판하는 새로운 담론을 찾으려고 하였다. 가령 김창남은 지배층의 텍스트에 대한 동일시 수준을 선택적 동일시-주체적 의미 부가-대항적 텍스트의 추구와 동일시-대안적 텍스트 창조(후자로 갈수록 긍정적)의 4단계로 구분하고, 현실에 대한 저항적인 정체성을 현실적응적 정체성-모순적 정체성-저항적 정체성-조직된 저항적 정체성의 4단계로 세분화하였다. 이를 통해 김창남은 대중문화가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새로운 문화운동은 여기서 저항의 정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심광현 16은 이 이론이 저항의 정도를 높이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고, 대안적인 정체성과 문화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공격하였다. 17
문화사회론
문화사회론은 학술지 <문화과학>을 중심으로 한 일부 문화연구자들이 이러한 대안 담론으로 내놓은 담론이다. 문화사회론은 지금 세상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규정하고, 자본주의 대신 문화가 사회를 통괄하는 기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화는 다수의 삶의 질 향상이 목표이며, 문화사회론은 개개인이 삶의 다양한 가치를 구현하는 사회체제를 목표한다. 18
문화사회론에서는 기존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인간의 삶이 노동에 종속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것이 다양한 문제를 낳았다고 주장하는데, IMF 사태가 그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문화사회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며, 노동을 통한 착취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는 사회이다. 자본주의 비판은 민중문화 담론에도 있었지만, 문화사회론은 문화를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차이라고 문화사회론은 주장한다. 19
문화사회론은 자신의 이상향을 이룩하기 위해 다음을 요구한다. 먼저 권력의 문화통제를 막기 위해 참여민주주의에 기반한 문화적 공공부문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운동과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문화를 참여민주주의적으로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 뿌리를 둔 문화활동의 창출과 문화에 대한 시민운동의 적극적인 개입, 모든 검열 제도의 폐지와 문화 영역에서의 정경유착 철폐 요구로 이어진다.
이동연은 위와 같은 실천을 위해 예술운동이 다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의 예술이 1)예술 생산방식과 표현의 실험성, 2)소수 예술가 집단의 새로운 예술운동, 3)국가의 예술정책 비판과 독자노선, 4)예술의 공공성과 민주성 증대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동연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민중문화도 아닌 대안 문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동시에 인디 문화나 언더그라운드 장르 등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적이지 않았던 하위문화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자원이라고 찬양하였다. 20
이는 청소년문화가 새로운 문화와 생산양식에 제일 가깝다며 청소년문화를 찬양한 이성욱과도 비슷하다. 또한 김창남도 마찬가지로 청소년문화가 문화사회를 만들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1 한편 고길섶 22은 현대를 문화과잉의 시대라고 규정한 후, 문화과잉의 시대에 혼란에 빠진 청소년을 좌파 이데올로기에 봉사시키기 위해서 청소년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3
문화사회론의 주장은 시민단체 '문화연대'의 창설로 이어진다. 1999년 9월 출범한 문화연대는 문화사회론의 이상향이 문화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다양한 좌파 활동을 시행한다. 그러한 활동의 예시로는 문화유산 관리와 미군기지 반대, 지역 문화축제, 청소년문화 활동, 대중음악 개혁운동, 방송계 비리척결 노력, 이외에 각종 문화예술 교육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이 민중문화 담론과 다소 차이를 보이긴 하나, 철저히 좌파적이고 좌파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민과 정부, 경제에 개입하려고 든다는 점에서 민중문화 담론과 공통점을 보인다.
문화사회론자들은 자신의 담론이 사회 전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중문화 담론을 뛰어넘었다고 자찬한다. 가령 주요 문화사회론자인 심광현은 문화사회론이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과 근대 자체의 혁신을 요구하는 거대기획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획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폭압에 맞서는 민주적 대안이자, 진보의 새로운 상이라고 심광현은 자찬한다. 그러나 민중문화 담론도 자신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해 왔으며, 실제로 한국좌파의 핵심적인 사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문화사회론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상은 민중문화 담론과 별 다를바 없으면서, 성과 측면에서 보면 민중문화 담론보다 못한 학자놀음이라고 할 수 있다. 24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는 심광현이 있다.
청년문화의 역사
한국의 청년문화는 70년대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청년은 여러 측면에서 기존 세대와 달랐는데, 해방 이후에 태어나 서구 문화(특히 미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당대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포크나 록을 추구했다. 또한 당시에 벌어지던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들도 장발과 청바지를 입고 다녔고, 생맥주 또한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은 통기타 가요였다. 70년대 초에 한국에 수입된 통기타 가요는 주로 기성세대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당대의 일본적인 대중가요에 싫증을 느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영화에서도 하길종이나 이장호 등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여 <바보들의 행진(1975)>이나 <별들의 고향(1974)> 등을 감독했고, 코미디 개그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입도 이들의 등장에 영향을 받았다. 김창남은 이러한 70년대 청면문화가 자유주의적이고 순수주의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순수한 측면이 일종의 저항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70년대의 청년문화는 불건전한 것으로 인식되어 정부의 탄압에 시달렸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들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수많은 연예인을 구속하였다. 또한 밥 딜런의 음악을 포함한 수많은 팝송도 규제하였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청년문화는 사그라들었고 음지로 숨어들어야 했고, 80년대부터는 제도권 바깥에서 청년문화를 구가해야 했다.
음지에서 살아남은 청년문화는 80년대에 다소 다른 방향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년문화를 이끄는 사람은 대학생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청년문화는 민중문화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당대 주류 청년은 문화를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였고, 그들의 청년문화(민중문화)는 저항문화로서 운동권 전체로 확산되었다. 70년대와 달리 80년대의 컨텐츠는 민주화라는 목적을 더 명확하게 담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문화는 또다시 변하기 시작하였다.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사상적 투쟁의 목표가 사라지고, 그러면서 청년문화를 이끌 동력 또한 사라졌다. 게다가 자신들이 그러했듯이, 새로이 나타난 청년은 기존의 민중문화와도 다른 문화를 추구하였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를 강조하고 소비와 쾌락을 추구하는 서구적 감성을 내세웠다. 이에 당시의 좌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문화마저 장악해 버렸다고 한탄하였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청년문화도 일부 변화하였다. 문학자들은 그러한 변화가 10대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청년문화의 소비자가 10대로 변하면서 청년문화도 감성적이고 탈정치적인 문화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문학자들은 2002년 월드컵을 아주 중시하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과거에는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여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이든 문학자들은 촛불시위와 2002 월드컵 응원이 새로운 세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찬양하면서도, 이들이 자기들 이념에는 동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보았다.
- 현대화된 버전이다 [본문으로]
- 이 곡 역시 찬송가 when we arrive at home에서 유래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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