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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저장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정치 본문
19세기 초 영국은 왕실과 의회, 내각, 그리고 수많은 지방자치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당시까지 영국을 통치하는 힘은 하나의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 곳곳에 있는 지방엘리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중앙정부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그러면서 정당과 선거유세, 선거권 확대, 민주주의 담론 등 근대적인 정치구조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
1.19세기 영국의 정치사
1870년대 후반, 보수당 집권기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동안 리버풀 자택에서 머무르던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은 총선을 앞두고 정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유당 인사들의 간곡한 요구를 뿌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879년 11월 24일 아침 일찍이 열차편으로 리버풀을 떠난 글래드스턴은 오후 5시경에 에든버러에 도착해 운집한 군중의 환호를 받았으며, 곧바로 유세를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미드로디언 유세(Midlothian campaign)다. 같은 해 12월 9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행한 연설에서 글래드스턴은 보수당 정부의 외교 실책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외교 정책을 피력했다. 이를 통해 글래드스턴은 현실 정치에 다시 복귀했으며, 다음해 3월 15일부터 4월 8일까지 계속된 2차 유세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불러 일으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 최초의 근대적 정치유세였다.
그즈음인 1876년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인 학살사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의 여론은 경악했고, 언론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당시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imin Disraeli )정부는 크림 전쟁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종래의 정책을 답습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러시아 팽창을 저지하는 보루로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글래드스턴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1878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국의 경제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설을 썼다. 이후 1880년 글래드스턴은 이 문제를 보수당 비판의 핵심 의제로 삼았고 1880년 총선에서 주로 이 주제를 가지고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종종 설교에 비교되곤 했다. 격렬하고 정서적이면서도 논리 정연한 연설은 아직 지지 정당을 정하지 않은 많은 유권자들이 자유당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글래드스턴 내각
1880년 총선에서 자유당의 압승에 뒤이어 출범한 글래드스턴 2차 내각은 처음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글래드스턴 1차 내각에서는 아일랜드 토지법(1870), 초등교육법(1870), 지방정부법(1871), 비밀투표법(1871), 사법개혁법(1873) 등 근대사회를 일군 수많은 개혁 법안들을 제정했다. 그 뒤를 이은 디즈레일리 2차 내각에서도 건축법(1875), 식품건강법(1875), 공중보건법(1875), 노사관계법(1875), 수질정화법(1876), 공장법(1878) 등 수많은 개혁 법안을 제정하면서 개혁입법은 물론 보수당의 이미지 개선까지 해냈다. 2차 내각에서 글래드스턴은 급진파인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ahmberlain)이나 윌리엄 포스터(William E. Forster) 등을 임명하여 토지세 및 직접소득세 인상, 지방 정부의 주택개량권 강화, 성공회의 기득권 축소, 선거권 확대 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아일랜드 민족당 의원 찰스 파넬(charles Parnell)의 의도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지지부진했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소요와 자치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 갈등을 겪었고 정책도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했다. 글래드스턴 집권 초기부터 아일랜드 토지 전쟁이 격화되었고 점차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치달았다. 사실 아일랜드 토지 전쟁은 자유당 정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이전 보수당 집권 당시 지대를 납부하지 못한 소작농민의 추방을 허용하는 입법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1880년만 하더라도 1만명 이상의 소작농이 토지에서 쫓겨나 각지에서 소요가 일었고, 급기야 같은 해 9월에는 악명 높은 영국인 지주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880년 9월 지주 찰스 보이콧(Charles Boycott)은 그가 소작농들의 지대 인하 요구를 거절하고 미납자들을 추방하자 소작농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는데, 11월 이를 보도한 <타임스>에서 보이콧을 명사화하면서 우리가 아는 '보이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글래드 스턴은 대외 정책 면에서도 총선에서 표명한 공약을 실천할 수 없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제국의 힘과 위신을 국제정치 맥락에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미드로디언 유세에서 보수당 정부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것도 이런 신념의 소산이었다. 그림에도 그의 외교 정책은 제국 팽창의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남아프리카 분할을 인정하고, 이집트와 수단에 군사적 진출을 시도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러시아와 충돌했다. 이러한 군사적 모험주의는 결국 글래드스턴의 지지 기반을 잠식했다. 거기다 수단에 파견된 찰스 고든(Charles Gordon) 장군이 하르툼에서 피살되자 그의 내각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문제로 인해 글래드스턴은 그가 계획하였던 개혁을 거의 진행하지 못하였다. 특히 아일랜드 문제는 아일랜드 토지법안을 반대하는 자유당 내 지주 출신으로 인해 당내분열까지 일으켰다. 이에 보수주의자인 제닝스(J. Jennings)는 <Quarterly Retriew>에서 그의 공약을 하나하나 열거하고는 그가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자유당을 결집하기 위해 글래드스턴은 선거법 개정을 실시하여 보통선거권을 대폭 확대하였다. 2
1885년 6월 글래드스턴은 그동안 자유당 노선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민족당 의원들이 보수당과 제휴해 예산안을 부결시키자 사임했으며, 솔즈베리 경(Lord Salisbury)이 이끄는 보수당 소수파 정부가 새로운 총선까지 단기간 존속했다. 이 무렵 선거법 개정을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는 글래드스턴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1885년 11월 실시된 총선에서 자유당이 가까스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 재차 집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찰스 파넬의 아일랜드 민족당이 86석을 차지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은 더 불안정해지고 아일랜드 문제 해결이 더욱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선거법 개정
군사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글래드스턴은 3차 선거법 개정을 시도했다. 이 법안의 주된 내용은 1867년 2차 선거법 개정에서 확대된 도시 유권자의 기준을 주까지 적용해 농촌 지역 세대주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처음 안은 연간 임대료 14파운드 이상 주택의 소유자와 도시자치구에서 임대료 7파운드 이상 주택의 소유자, 임대로 10파운드 이상의 주택 세입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로어를 비롯한 당내 의원의 반발로 1안은 부결되었다.
이후 이번에는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에 의해 2안이 제시되었다. 2안은 도시의 의석을 줄이고 카운티(county)의 의석을 늘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지방세를 납부하는 도시인(사실상 도시 노동자 대다수)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확하게 2안은 직접세를 납부하는 도시의 모든 세대주와 연간 임대료 12파운드 이상인 주택의 소유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이 통과되면서 유권자의 수는 이전의 유권자 수(약 100만명)의 2배로 증가하였다.
84년 제시된 3차 개정안은 2차 글래드스턴 내각에서 주도하였는데, 기존 선거법에서 깨진 도시와 농촌 간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다. 3안에서는 도시와 카운티를 가리지 않고 직접세를 내는 모든 세대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여, 사회 최하층의 남성을 제외한 모든 가부장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선거법 개정 이전에 261만 8,000명 수준이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유권자 수는 1886년 선거에서 438만 1,000명으로 증가한다. 개정 결과 영국 성인 남성의 70퍼센트가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빈민의 투표권은 제한되었으며, 이는 로마 공화정의 말로를 걱정했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켰다. 3
한편 선거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발생시켰다. 자유당의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 선거권 확대 또한 지지하였다. 이에 보수당의 지지자들은 선거권 확대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글래드스턴 내각이 퇴진하고 보수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면서 보수당 지지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보다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대신 민주주의의 맹점을 보수당이 해결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글래드스턴 내각의 퇴진
1886년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자치법안(Home Rule Bill)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1885년 12월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글래드스턴은 <Leeds Mercury> 지와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아일랜드 자치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다음해 4월 8일 제출된 자치법안은 외교, 국방, 관세, 통화, 우편 등은 영국의 관할 아래에 두고 이 틀 안에서 아일랜드 자치를 허용함과 동시에 영국 의회에서 아일랜드 대표권을 배제하는 상당히 현실성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 표결에서 글래드스턴은 패배했다. 자유당 내에서 하팅턴 경(Lord Hartington)이 주도하는 휘그파와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in)을 비롯한 급진파 의원들이 보수당과 함께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이후 법안 가결이 실패한 글래드스턴이 다시 총선을 실시했으나, 선거 결과 분열된 자유당을 뒤로 하고 보수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 솔즈베리 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자유당 합방파는 보수당에 흡수되었고, 20세기 초까지 보수당 장기집권으로 이어졌다.
과연 글래드스턴은 자치법안을 제출하면서 그 후에 전개될 혼란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는 아일랜드 민족당이나 자유당 내 다른 정파 의원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전통적인 해석은 글래드스턴이 집권을 위한 정략적 의도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이 절실하다는 판단 하에 법안을 제출했다고 본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한 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에 따라 위험과 비난을 무릅쓰고 법안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는 그가 원대한 이상과 목표보다는 정략적 판단과 임기응변식의 대응에 매달려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본다. 그는 처음부터 아일랜드 문제에 일관성있는 견해를 갖지 않았고, 상황에 맞춰 정치가로서의 감각과 식견을 가지고 대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자유당 분열은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는 주장이다. 4
보수당의 장기집권
1886년 총선 이후 정치 지형도는 달라졌다.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는 의원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 395명에 이르렀다. 자치 반대의 정치 분위기가 보수당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74년부터 농촌의 지지를 받은 보수당은 집권에 성공하였다. 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352석을 차지하여 자유당(242석)을 앞섰는데, 보수당은 도시(143 vs 144)와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에서의 부진을 카운티에서의 승리를 통해 만회하여(145 vs 27) 과반수를 달성할 수 있었다. 20년간 지속된 보수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5
그러나 보수당 정치를 뒷받침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1880년대 초 보수당 조직의 활성화와 전국정당화도 보수당 정치를 지원했다. 디즈레일리 이후 보수당은 솔즈베리 경과 스태퍼드 노스코트(Stafford Northcote)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의 보수당은 1880년대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외곽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이중 하나가 앵초연맹인데, 1883년 랜돌프 처칠(Randolf Churchill)을 중심으로 결성된 앵초연맹(Primrose League)은 디즈레일리의 정신을 계승하고 보수당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디즈레일리가 좋아했던 꽃 이름을 조직 명칭으로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앵초연맹은 성공회와 브리튼 영토 및 제국의 우위를 수호하고 이에 헌신하는 것이 조직의 사명이라는 점을 천명했다. 말하자면 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을 애국심이라는 국민 정서에 덧붙이려는 시도였다. 6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비록 디즈레일리 정권은 글래드스턴 2차 내각에 자리를 내줬지만, 글래드스턴의 급진적인 담론과 자치 정책이 자유당의 전통적 지지 세력인 중간계급의 이탈을 가져왔을 때, 솔즈베리를 비롯한 보수당 정치가들은 제국의 영광과 애국심에 호소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은 이러한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보수당의 지지율은 이전보다 한층 더 높아졌다. 20여 년에 걸친 보수당 주도의 의회 정치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880년대 중엽 이후 보수당의 장기집권은 보수당이 국민정당으로 성격을 전환함에 따라 자유당과 정책적인 차이가 크게 줄어든 점도 고려해야 한다. 보수당은 비록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자유당과 대립했다고 하더라도, 자유당 집권기에 이루어진 정책을 수용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디즈레일리 정권은 내무부 장관 크로스(R. A. Cross)의 주도 하에 슬럼을 정비하고 주택을 개축할 권한을 도시 지차제(borough)에 주는 노동자주택법(Artisan's dwelling act, 1875), 건강에 해로운 식품과 약품 판매를 규제하는 식품의약판매법(sale of food and drugs act, 1875),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 1875), 노조의 평화시위와 결사권 보장 및 법과 원칙을 담은 conspiracy and protection of property act와 노사법(employers and workmen act), 수질정화법(rivers pollution act, 1876), 5-10세 아동을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고 빈민츠 아동의 수업료를 지방정부가 보장하는 교육법(education act, 1876) 등이 이 시기에 제정된 법이었다.
이런 기반 위에서 제국과 애국의 슬로건이 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이전의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를 넘어 국가적인 간섭을 통해 사회 문제를 적극 해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길에서 집권 가능성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의 선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은 시민의 선거로 구성되는 하원과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 의회에서 선출한 내각, 그리고 왕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미 내각은 왕실을 대체하여 정부 훈령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내각과 여야당, 독립된 사법기관, 관료제 등 대의민주주의에 필요한 기본요소들이 이미 19세기에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당시 영국 정부는 자원주의(voluntarism) 정책에 기초하여 시민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였으며, 우체국과 경찰 이외에 어디에서도 국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었다. 8
영국의 자원주의는 지방분권 전통과 지방자치제도,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자유방임주의 경제는 정부의 간섭을 거절했으며, 산업혁명 이후 북서부와 미들랜드의 경제성장은 중앙의 경제권력을 약화시켰다. 당시 지방 상공인들에게 있어 런던은 귀족적 사치와 도덕적 타락, 정치적 후진성, 사회불안의 중심지로 매도당했다. 9
또한 18세기 이래 영국인들(특히 휘그당이나 자유당)은 중앙집권을 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불쾌한 유산으로 여겼으며, 그 대신 지방분권을 옹호하였다. 이는 지방자치로 이어졌는데, 당시 하원의원들은 중앙 정계의 일원인 동시에 자신의 선거구에 기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원의원이나 지주 출신 의원은 연중 대부분을 자신의 영지에서 지냈다. 지방은 공적 의무감에 찬 귀족과 지주, 부유한 시민이 빈민위원, 민병대 장교, 치안판사 등의 직책을 맡아 교구 단위로 통치하고 있었고, 이러한 자원봉사자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정부 대신 일하였다. 10
19세기는 영국 정치의 오랜 전통이었던 old corruption이 붕괴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old corruption은 기득권이 영입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부조금이나 명예 직책, 공짜수당 등을 지급하여 반란을 억압했던 제도로, 관료제와 정당의 발전 및 의회의 활성화로 인해 능력주의가 사회에 퍼지면서 사라졌다. 또한 60년대부터 자유당의 개혁이 심화되고 정쟁도 심화되면서 기존에 대부분 지역구에서 머물렀던 하원의원들의 업무량이 증가하고 의회의 회기 기간도 증가하였다.
이에 대한 통계로 87년 보수당 의원 헨리 하워드(howorth)는 <계간평론> 에서 의회의 회의 연장 시간이 62년에서 66년 사이에는 평균 80시간이었으나, 67-71년에는 119시간, 72-76년에는 116시간, 77-81년에는 175시간으로 지속해서 증가했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81년에는 239시간, 87년에는 267시간으로 더욱 늘어났다. 이러한 회의 시간의 증가는 지방에 분담되었던 정무가 점점 중앙에 집중되기 시작하였다는 지표이다.
정당 제도의 발전
19세기 초 영국 정계는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40년대에 일어난 곡물법 논란을 거치면서 붕괴하였고, 곡물법을 반대하는 자유당과 급진파, 그리고 휘그당 일부가 연합하여 보수당(구 토리당)에 맞서면서 74년 디즈레일리 집권기 이전까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현대적인 정당제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현대적인 정당제도는 67년 2차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차 선거법 개정안의 통과로 유권자가 2배로 늘어나자, 보수당은 전국 각지의 보수당을 통합하여 70년 중앙당 사무국을 신설하였다. 자유당도 이에 맞서 77년 전국자유당연맹을 결성하였는데, 그럼에도 중앙당은 선거비용의 4%만 지원하는 등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여론조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0년 총선에서 글래드스턴이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미드로디언 유세)하여 여론의 지지를 끌어모으면서 중앙당의 지도력과 정강 정책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11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정계를 양분한 두 정당은 자유당과 보수당이었다. 80년대 시점에서 자유당은 보수적인 지방주의자에서 급진파까지 다양한 사람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 중에는 귀족 및 지주들도 상당하였다.(의원의 45%) 비록 이는 보수당(66%)과 큰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자유당은 지주와 기업가, 전문직까지 다양한 의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반면 보수당은 주로 지주와 중산층, 그리고 잉글랜드 남부와 랭커셔, 스코틀랜드 서부, 북아일랜드, 그리고 그 외의 농촌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 선거권이 농촌까지 확대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대중민주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1886년 이후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둘러싼 자유당의 분열과 그 이후 보수당의 연이은 집권으로 양당제 정치환경이 성립되었다. 한 역사가의 지적 13에 따르면, 이 시기의 정치 변화는 단순히 자유당의 위기만이 아니라, 넓게 보면 "자유주의의 위기" 였다. 그것은 국민과 국가의 관계에 관한 사고방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정치적 태도, 즉 개인중심주의와 공동체중심주의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낸 위기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평론지 지면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평론지에서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해 그 기능과 역사적 변천,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의 위험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대체로 자유주의적인 편집 방향을 내세운 웨스트민스터 리뷰와 19세기 등은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긍정적 논설을 게재했다. 반면 계간평론과 같은 보수적인 평론지에는 민주주의의 위험과 파괴성을 경고하는 논설들이 자주 실렸다. 시기적으로 보면 1880년대 전반에는 민주주의의 성취와 앞으로의 과제를 찾으려는 논설들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그 이후에는 보수주의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폐단을 지적한 글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14 아래의 기사들은 민주주의를 호의적으로 본 평론들이다.
Wallace, R. (1881). THE PHILOSOPHY OF LIBERALISM. The Nineteenth century and after: a monthly review, 9(48), 302-323.
Brodrick, G. C. (1883). THE PROGRESS OF DEMOCRACY IN ENGLAND. The Nineteenth century and after: a monthly review, 14(81), 907-924.
Brodrick, G. C. (1884). DEMOCRACY AND SOCIALISM. The Nineteenth century and after: a monthly review, 15(86), 626-644.
Donisthorpe, W. (1886). The basis of individualism.
Grey, F. W. (1892). THE POSSIBILITIES OF DEMOCRACY. Westminster review, Jan. 1852-Jan. 1914, 137(1), 627-632.
Kennedy, J. W. (1895). DEMOCRATIC IDEALS. Westminster review, Jan. 1852-Jan. 1914, 144, 313-316.
Robinson, W. H. (1895). THE OPPORTUNITY OF DEMOCRACY. Westminster review, Jan. 1852-Jan. 1914, 144, 117-126.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적 논객은 다음이 있다. 조지 브로드릭(George Brodrick)은 옥스퍼드 베리올 칼리지에서 수학한 사람으로, 같은 대학의 머튼 칼리지 학감을 지냈다. 토마스 키벌(Thomas E. Kebbel, 1827-1917)은 저명한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다. 워즈워스 도니소프(Wordworth Donithorp, 1847-1918)는 유명한 무정부주의자인데, 체스 경기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들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리뷰나 19세기 등에 평론을 남겼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보수적 논객은 다음이 있다. 헨리 메인(Henry S. Maine,1822-1888)은 옥스퍼드 대학 법사학 교수로, 케임브리지의 펨부르크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캘커타대 부총장도 역임했다. 윌리엄 멀록(William H. Mallock,1849-1923)은 베리지 칼리지 출신의 소설가 겸 저널리스트로, 실증주의나 불가지론을 공격하고 신앙을 강조했다. 헨리 호워드(Henry Howorth,1843-1923)는 보수당 의원이었는데, 원래 자유당 합방파였으며 86년에서 1900년까지 하원의원으로 있었다. 윌리엄 릴리(William S. Lilly,1840-1919)는 정치 평론가였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의 요체를 대의민주주의로 보고, 대의제 정부야말로 공공업무를 처리하고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고의 체제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정부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false democracy라고 밀은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국가가 재산권 보호를 넘어 국민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논의에서 지적/도덕적으로 우월한 투표자의 견해에 더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정 계급이 다수의 지위를 악용해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밀은 지적 능력이 높은 직종의 종사자에게 복수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제도도 제안한 바 있다. 15 16
한편 보수적인 정치평론가 월터 배저트는 밀과 달리 의회의 조직 면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의 <The english constitution>에서 배저트는 정부가 dignified part와 efficient part로 나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전자에는 왕실과 상원을 배정하고 후자에는 하원과 내각을 배정하였다. 그는 실제 행정과 통치는 efficient part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현대민주주의와 더 가까운 주장을 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답게 그는 보통선거권에 기존보다 더 큰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민주주의를 하층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이러한 견해는 다른 보수주의자에게도 공유되었다. 그 중 하나는 자유당 의원이자 1대 셰부르크 자작(Lord Sherbrooke)이었던 로버트 로어(RObert Lowe, 1811-1892)였다. 그는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고전과 수학을 공부한 전통적인 엘리트였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다가 52년부터 자유당 의원을 지내면서 재무부(1868-1873) 및 내무부(1873)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나 근대 공화국의 사례를 들며 민주주의가 국내에서는 전제정치로 나타나고 해외에는 호전광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며, 선거권이 확대되면 무지한 다수가 소수 지식인을 공격하고 선동과 뇌물에 호도되어 정치의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헨리 메인은 보수주의자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널리 호응을 받았다. 메인은 84년에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자신의 논설에서 민주주의가 freedom, revolution, republic, popular government, reigh of the people 등의 표현과 연결되며, 기존의 법과 관습을 개선하는데 있어 다른 어떤 체제보다 능동적인 체제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보수주의자가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이유였다. 19
브로드릭은 다른 민주주의의 옹호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필연적인 역사적 추세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쇄술 발명을 통해 이뤄진 계급 장벽의 붕괴와 개혁의 가속화, 교통수단(특히 철도) 발전으로 쉬워진 피지배층 연대, 대중교육 확대가 문명을 민주주의로 이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대중교육의 경우 브로드릭은 여성과 어린이의 교육 확대와 권리운동이 이것의 증거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교육인 계급간 차이를 없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더해 선거권의 확대로 달성된 기회의 평등과 중앙정부의 강화를 통해 이뤄지는 민주적 중앙화(democratic centralisation), 그리고 정당과 의회의 발전이 민주주의가 시대적 추세에 부합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민주주의가 무조건적으로 사유재산 철폐나 코뮌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알았는데, 한 기고자는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금권정치가 만연하고 노동자는 힘들게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방법이지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나 중근세 이탈리아를 관찰한 후,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될 필요성은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한 민주주의는 이뤄진 적이 없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들의 전통을 빌려 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들이 사용한 정치원리가 당대에도 적용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로버트 월러스(Robert Wallace)는 자유주의자를 1)인간 내면의 악함보다는 선함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고, 2)중요한 원칙을 법률로 정하고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며, 3)국가적 이해를 개인적, 당파적, 지방적 이해보다 중시하고, 3)정당한 내용을 가진 제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자유당의 2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정치에 부합하며, 보통선거권의 확대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예수의 비유를 들어서 민주주의의 결점을 옹호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지만 예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악함도 존재하지만, 선함과 도덕, 정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통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희망적인 주장은 그러나 글래드스턴 내각이 퇴진하고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바뀌었다. 보수당 정권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자 로빈슨(W. H. Robinson)은 보통선거가 의회의 토론보다 거리의 유세를 중시하는 역효과를 낳았고, 자유와 평등의 슬로건이 너무 남발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선거권 확대와 여론이 의회 제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연이어 내놓았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그렇게 우호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선거권이 확대된 이후에는 이들도 보통선거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중은 신뢰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우매한 대중을 선도하는 역할을 자기들 보수당이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Wallace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신봉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80년대 이후 보수주의자들은 장기집권을 시작한 보수당 중심의 정치현실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가령 멀록은 부와 신분의 불평등과 소수의 지배가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며, 이는 다수 또는 상당수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옹호하였다. 특히 사회적 불만과 만족을 적절히 다루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의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익명의 기고자는 평론지에서 영국이 다른 어떤 국가보다 급진적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는데, 이는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인 변화에 의해 가능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고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엘리트주의는 19세기 이전 토리당의 사상과 일부분 차이는 있었다. 토리당에서 엘리트는 혈통을 통해 지위를 세습받은 귀족이었지만, 보수당에서 엘리트는 능력을 통해 지위를 성취한 자수성가였다. 이러한 차이는 보수당에서 귀족주의를 약화시켰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발판이 되었다.
- 이상의 내용은 이영석,'영국제국의 초상',푸른역사,2010,pp25-6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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