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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경제

과학주의자 2023. 11. 5. 17:20

빅토리아 시대(특히 후반부)는 영국에게 경제적 쇠퇴의 시기였다. 장기불황을 맞아 영국은 계속해서 저물가와 불경기에 시달렸으며, 미국과 독일은 자원개발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었다. 비록 영국은 주력 업종을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돌려 1차대전까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조업의 약화와 경제활력의 상실은 피할 수 없었다.

 

 

1.경제적 쇠퇴의 시대[각주:1]

1850년대에 전 세계 공업 생산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던 영국 공업의 비중은 같은 세기 말에는 미국과 독일에 밀려 급속하게 낮아졌다. 이 시기 영국의 경제성장률과 공업생산 증가율도 다른 경쟁국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일부 경제사가들은 이 시기의 영국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19세기 말에도 영국의 제조업이 다른 경쟁국들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대영제국이 최대의 자본수출국이자 해운국이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있었고 생활수준 또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았다고 강조한다.[각주:2] 그럼에도 빅토리아 시대 후기에 영국 경제의 활력이 약해지고 세계 경제에서 영국 경제가 갖는 위상이 저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국은 과학 지식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산업 분야는 물론 전통 산업인 제철과 제강에서도 미국과 독일에게 추월당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후기 영국 경제의 쇠퇴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이 시기에 선진자본주의 국기들에서는 제강, 화학, 전기 등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투자자본이 넘쳐나 1873년 이래 20여 년이나 불황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특히 독일과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경제사가들은 이 구조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자본의 측면에서 영국 기업가들의 보수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에 따르면 산업 조직과 기술의 변화가 급속하게 전개된 1870년대 이래 영국의 기업가들은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은 생산 조직의 과학적 관리와 신기술에 무관심했다. 기술 교육의 낙후 또한 산업의 활력을 없애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각주:3]

 

2차 산업혁명기 독일과 미국에서는 2차 산업혁명과 대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으로 자본 집중과 기업 합병을 통한 거대기업 만들기를 선택했다. 이들 거대기업은 생산 조직의 수직적 통합, 산업과두제, 작업 및 생산 기준에 대한 경영자 통제, 위계적 경영제도,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기의 자유방임주의가 낳은 제도들이 여러 분야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거대기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예를 들어 생산 및 시장의 경쟁적 속성, 기업의 수직적 전문화와 분산, 가족기업 형태, 소규모 생산단위, 노동자의 노동 과정 지배와 같은 제도들이 생산 조직의 혁신과 신기술 채택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이영석은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기업가들은 대량생산보다는 전통적인 숙련이 힘을 발휘하는 특화된 고급품 생산라인에 치중했고, 이는 시대의 추세에 벗어났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평론가로는 로버트 기펀(Robert Giffen), 로버트 그리피스(Robert J. Griffiths), 마이클 멀홀(Michael G. Mulhall), 로버트 패터슨(Robert H. Patterson), 데이비드 웰즈(David Wells), 와일드(J. P. Wilde), 피요트르 크로포트킨(P. Kropotkin) 등이 있었다. 기펀은 <Daily News>와 <더 타임즈>의 편집장을 거쳐 통상국(board of trade) 통계담당관으로 일하였다.

 

영국 제조업의 대응[각주:4]

영국 기업가는 미국과 독일의 부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조합을 억압하기 위해 새로운 관리 기법에 관심을 기울였다.[각주:5] 특히 대불황기에 장기간의 물가 하락으로 곤란을 겪자 기업가들은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 혁신과 생산 조직의 재편을 시도했다. 그들은 새로운 기계 설비를 도입하고 반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해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동자를 분할하여 지배하려 한(또는 온정적 마음으로 인해) 기업가들의 전략[각주:6]으로 인해 19세기 말에도 방적공이나 기계공과 같은 숙련 노동자들이 남아서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또한 이러한 노력들 역시 독일이나 미국의 경쟁자들보다는 약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과 생산 조직의 재편시도는 산업 부문마다 달랐으며, 그 결과도 자본이나 노동조합의 취약성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노동조합이 강력하고 기계화에 한계가 있는 분야에서 기업가의 노동 과정 지배는 크게 제약을 받았다. 19세기 말에도 신문사 식자공들은 새로 도입된 식자기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탄광의 경우 1851~1911년 사이에 광부들의 수가 21만 6,000명에서 87만 7,000명으로 증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일했다. 탄광에는 연령과 경력에 따라 통풍구지기(trapper), 운반부, 채탄부로 이어지는 위계적 관계와 채탄부 사이의 긴밀한 동료관계가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채탄부들은 다른 어느 직종보다 더 강력하게 노동 과정을 장악했다.

 

이와는 달리 기계, 조선, 제강, 철도와 같은 자본재 생산 부문의 경우 기업가들은 기계화와 과학적 관리에 더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기계 분야의 공장주들은 1880년대 이래 미국식 공작기계(선반, 금속절삭기, 연마기 등)들을 도입했다. 이러한 신형 기계는 생산성 제고와 반숙련 노동자들의 고용을 촉진했으며, 장기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동질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변화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의 자본재 생산과 시장은 다 같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어서 표준화된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하지 않았고,[각주:7] 산업혁명기 이래 형성된 제도적 장애들이 이러한 한계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 자본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비공식적으로 실용적인 타협이 맺어졌으나, 기계화와 반숙련 노동 등의 산업적 변화가 그러한 타협을 항상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금융업의 부흥

귀족과 젠트리들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 세력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으며 사회적 영향력도 증대되었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떨어졌으나 오히려 금융업은 강해지고 있었으며,[각주:8]  런던은 여전히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자 해운업의 중심지로서 지위를 유지했다. cain과 hopkins[각주:9]는 그 원인을 신사적 자본주의(gentlemanly capitalism)에서 찾았는데, 신사적 자본주의란 시장에 참여할 때 신사적인 품위를 중시해서 직접적인 생산 활동 참여는 멀리하고 간접적인 임대소득(지대, 투자소득, 이자 등)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제조업의 침체는 가져왔지만 동시에 금융업의 발달은 촉진하였다.

 

금용의 발달은 갈수록 강해져가는 미국과 독일의 제조업에 대항하여 영국 경제가 찾은 니치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국의 정치에 의해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영국 정부가 선호했던 금본위제와 자유무역 선호는 무역경쟁에는 악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파운드화의 가치를 안전하게 하고 국제통화로 기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영국 금융의 발달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동시에 다른 계층에서는 불만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특히 당시에 있었던 복본위제 논쟁이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었다.[각주:10]

 

런던은 1차 산물의 교역 창고이자 모든 제조업 상품의 매매 중심지였고, 이 때문에 시티 오브 런던은 단기 신용대부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상업은행, 투자은행, 합자은행이 성장했으며, 특히 은행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런던에 본사를 둔 국제적 규모의 은행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런던은 사실상 세계 투자자본의 유입구이자 그 자본이 투자처를 물색할 때까지 머무르는 저장고 역할을 수행했다.[각주:11]

 

그러나 금융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대조적으로 영국에서는 중소기업이 주류를 이루었고, 금융자본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투자처를 찾기에 바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해외투자는 제조업의 쇠퇴를 낳았다. 이 시기의 관세개혁운동이나 복본위제를 둘러싼 논쟁은 영국 제조업의 쇠퇴와 금융자본의 발전이라는 이 같은 이중적 경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2.장기불황[각주:12]

장기불황(the long depression, Great Depression, 대불황기)이란 영국이 1870년대 이래 30년간 겪어온 불황, 특히 저물가 현상을 말한다. 장기불황의 1차적인 원인은 농업 공황이었다. 70년대 초부터 심각하게 나타난 농업 공황은 일차적으로 농산물의 가격 하락에서 비롯했다. 이러한 하락은 전 세계에 걸친 불황 국면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값싼 농산물 수입 급증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새로운 원양상선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전 세계에 걸친 영국의 제국 경영이 본격화하면서, 값싼 해외농산물 수입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 결과 무수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1871~1901년 사이에 농업 인구는 96만여 명에서 62만 명으로 감소했다. 특히 목축을 위주로 하는 지역보다 곡물을 경작하는 지역이 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불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곡물 경작을 포기하는 대신 목축과 낙농품 그리고 원예, 과일, 야채 재배에 집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시기의 사회소설, 특히 토머스 하디의 <귀향(the Return of the Natives)>, <캐스터브리지의 시장(The Mayor of Casterbridge)>, <테스> 등은 농촌의 사라진 전통과 관습을 묘사하면서 이를 토대로 웨식스 지방 농민들의 삶의 고통을 말했다.

 

농업 공황은 귀족과 젠트리의 사회경제적 지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8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과 지주층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하며 위신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지위는 급속하게 하락했다. 농업 공황이 계속되면서 귀족 계급의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던 토지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19세기 중엽 가격의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각주:13] 이로 인해 지주계급은 토지를 시장에 내놓고 런던의 저택을 방매함과 동시에 자신의 소비지출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론가들은 지속되는 불황이 심각하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랐으며 심지어 정부 보고서도 그러했다. 장기불황에 대응하여 85년에 조직된 무역 및 산업 불황에 관한 왕립위원회(이즐리 위원회)에서 채택한 보고서는 위원의 다수가 서명한 <다수 보고서>와 그렇지 않은 <소수 보고서>가 나뉘었는데, 다수 보고서에서는 장기불황을 일시적인 불경기로 본 반면 소수 보고서에서는 영국 경제의 구조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정부 판단과는 별개로 당대 평론지에서는 보통 장기불황이 심각하고 지속되고 있으며 근본적인 경제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당시 영국 경제를 낙관하였던 소수는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번영하고 있으며,[각주:14] 현재의 불황은 기술 발달로 인한 생산비용 감소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고 곧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각주:15] 가령 멀홀은 75년에서 85년 사이에 영국의 인구는 12% 증가했고, 국부는 22% 증가했으며, 해운은 67%가 증가하였고, 교역량은 29% 늘어났음을 보였다. 또한 저물가의 영향으로 노동계급의 저축은 82% 증가하고 반면에 술 소비량(24%)과 범죄(33%)는 감소하였음을 지적한 후, 영국이 경제적으로 진보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6] 비슷하게 조지 메들리(George W. Medley)[각주:17]는 영국이 세계 선박량의 50% 이상을 보유한 해운국이며 해외에 15-20억 파운드를 빌려주고 연 6000-8000만 파운드 이상의 이자를 거두는 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자유무역에 기인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영국의 경제는 타국의 경제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패터슨[각주:18]은 지난 반세기 동안 영국의 철도가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고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증기선의 발명도 이뤄졌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러한 교통혁명과 더불어 증기기관에 의한 생산량 폭증도 강조하였다. 비슷하게 웰즈도 거대기업과 기계의 결합이 생산량을 폭증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혁신이 자본 손실과 직업 상실 등 여러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그것은 과도기적 현상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옹호하였다. 한편 기펀[각주:19]은 급진적으로 아예 장기불황을 부정하였는데, 그는 지난 시기에 영국 경제는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기불황이 화제가 되고 의회조사까지 이루어 진것은 과장된 언어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산층 지식인의 사회적 양심, 노조 지도자의 실업 항의, 타국 산업발전에 대한 우려, 재정위기 및 은행 파산에 대한 우려, 물가하락에 대한 불만 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한편 복본위제(bimetallism)는 본위화폐가 여럿인 화폐제도이다. 즉 화폐의 가치가 여러 금속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인데, 가령 영국이 금은복본위제를 택하는 경우 1파운드의 가치는 금과 은이 가지는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 복본위제는 80년대 장기불황 시기에 언론에서 대두되었고, 당시 저물가와 불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부(특히 이즐리 워원회)에서는 그것을 대안으로 고려하지 않았었다.

 

원인에 대한 담론[각주:20]

80년대 경제 논설에서는 기본적으로 장기불황의 원인이 저물가라고 보았다. 실제로 86-90년 사이 기간동안 도매물가지수는 71-75년 기준으로 70.6으로 떨어졌고,[각주:21] 설탕 가격은 80년에서 87년 사이 15% 감소하였으며, 밀은 7-80년에서 86년 사이 30% 하락하였다. 전반적으로 66-76년에 비해 76-86년의 물가는 약 30% 더 하락하였다. 이에 86년에 발행된 이코노미스트 지[각주:22]에서는 이러한 저물가와 불황의 원인을 1)기술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과 과잉생산, 2)해외와의 경쟁, 3)금본위제, 4)아프간 전쟁과 같은 단기적 문제로 진단하였다. 

 

각 진영의 논설가도 모두 이러한 주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요인을 강조하였다. 가령 웰즈는 불황의 원인을 생산비용 절감에 돌리면서 영국경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반면 크로포트킨은 해외와의 경쟁을 주된 요인으로 뽑았는데, 그는 산업화의 확산은 필연적인 과정이며 이로 인해 각국이 자국의 공산품을 스스로 충족하면서 영국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과 독일(특히 독일)을 경계하였는데, 이들은 독일 자본가의 정신과 진취성, 독일의 급속한 공업화와 과학 발전 및 교육의 확대로 인해 독일이 이제 영국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복본위제 지지자들은 불황의 원인이 금의 품귀 현상으로 인한 가치상승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금본위제를 채택한 영국에서 금은 화폐로 사용되었는데, 60년대부터 세계적인 금광 개발이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발전하는 경제규모에 비해 화폐(금)의 양이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고, 그 결과 불황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들어 은본위제 국가(독일)와 복본위제 국가(미국)이 일제히 금본위제로 전환하고 다른 나라가 이를 따라가면서 불황이 심화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물론 멕시코나 청, 식민지 인도처럼 은본위제를 시행하는 지역도 있었지만, 이런 나라는 금의 가치상승으로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은 줄고 수출은 늘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고 진단하였다. 

 

이즐리 보고서에서는 불황의 원인으로 과잉생산, 보불전쟁, 세계적인 보호무역 기조, 농업 종사자의 구매력 저하, 국내외에서 영국 상품에 대한 수요 감소, 대독일 경쟁, 외국기업의 영국 상표 도용, 타국에 비해 높은 운임, 일부 상품의 열화, 공장주에게 불리한 노동입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상업회의소(chambers of commerce) 관계자들에게 설문을 실시해서 이 중 가장 심각한 원인을 고르게 하였는데, 그 결과 대외 경쟁(54), 외국의 관세장벽(49), 과잉생산(38), 노동시간 단축(34), 가격하락(27)의 5개가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어디에서도 금본위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는데, 당대 언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계에서는 복본위제 논의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3.경제생활의 변화

한편 60년대 영국의 풍자화가 조지 크룩생크(George Cruikshank)는 당시 영국 사회를 벌집에 비유해 아래와 같이 그렸다. 그의 그림은 맨 밑에 영국은행, 해군, 육군, 상선대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서 직인과 고용주, 자유무역과 출판 및 종교의 자유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여왕과 영국 헌법이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계급의 명백한 구분이 없는, 달리 말하면 이음매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크룩생크의 만화

크룩생크는 혼자가 아니었다. 19세기 중엽의 지배적 이념은 산업경제를 토지귀족의 자본과 새롭게 흥기한 부르주아의 관리 활동과 전문성, 장인과 노동층의 숙련과 협업의 산물로 보는 것이었다.[각주:23] 크룩생크를 비롯해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지식인들이 내세웠던 "계급을 넘어선 연대(cross-class alliance)”는 지주, 자본가, 노동자 사이의 이해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개념과 달랐다. 그러나 19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에 접어들면서 국민통합과 사회적 상호의존의 사회구조는 점차 의문시되기 시작했다.[각주:24] 이전에 비해 더 급속하게 사회가 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급속한 인구증가였다. 19세기 말 인구는 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비해 두 배 증가했고, 그 인구의 80퍼센트가 도시에 살았다. 예컨대 1861년에 350만 명이던 런던 인구가 1911년에는 700만 명에 이르렀다. 귀족과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잉글랜드의 전원성을 강조했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원적 잉글랜드는 도시적인 분위기의 잉글랜드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 환경은 자본주의가 지배했고, 여왕을 정점으로 마치 벌집과 같은 형상으로 묘사된 국민가족이라는 이미지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사실 전산업 시대가 무계급 사회였다는 견해는 산업화 시대의 전원문학에 의해 널리 퍼졌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권리와 의무, 상호의존관계를 강조하는 전시대의 이상은 애당초 문학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장기불황에 따른 농업 공황은 귀족과 젠트리의 사회경제적 지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8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과 지주층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하며 위신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지위는 급속하게 하락했다. 농업 공황이 계속되면서 귀족 계급의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던 토지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19세기 중엽 가격의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이로 인해 지주계급은 토지를 시장에 내놓고 런던의 저택을 방매함과 동시에 자신의 소비지출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생활[각주:25]

대불황기에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이전보다 악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1880~90년대에 도매물가는 30퍼센트 이상 하락했으며 그만큼 노동자 가계의 실질소득은 높아진 셈이었다. 더욱이 실업률은 빅토리아 중기의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사실은 국민소득의 더 많은 몫이 노동계급에게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국민소득 가운데 이윤과 임금을 합산한 총계에서 임금의 비율은 1870~74년 평균 52.3%, 1890~94년 62.4%였다.[각주:26] 여기에는 물가 하락이 가장 크게 공헌하였으며, 특히 생필품 가격의 하락이 크게 공헌했다.

 

보일러 제조업, 기계, 조선, 철도 분야의 숙련 노동자들은 수입과 직업의 안정성 면에서 상위 계층에 해당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직종보다 소득이 높았지만, 수입을 소비에 쓸 여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불황기에 대비해 돈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도 역시 1878~79년, 1884~87년, 1892~93년의 경기변동에 고통을 겪었다. 건축 분야 종사자들은 반숙련 노동자보다 나았다. 일거리가 많을 때 그들은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고 보조수입 없이도 빈곤선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일반 제조업과는 다른 경기리듬의 영향을 받았다. 건축 분야는 자본재산업보다 더 긴 경기변동의 주기를 보여준다. 계절적 실업 또한 이 직종 종사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계절에 따라 일거리가 격감하는 직종으로는 이외에도 부두하역, 의류업 분야가 있었다.

 

노동계급의 최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불규칙적인 일감과 수입 때문에 경제적 곤경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19세기 말에 도시 빈곤층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조사를 시도한 찰스 부스(Charles Booth)는 당대 최고의 부국에서 전 인구의 25% 이상이 빈곤 상태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드러냈는데,[각주:27] 그에 따르면 노동계급의 빈곤을 잘 설명해주는 것은 저임금보다는 일거리 없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런던 재봉공의 경우 주당 평균 작업일은 25일에 지나지 않았다. 

 

불규칙적인 일감과 벌이는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도시빈민층 출신의 여성 인력은 가정이나 작은 작업장에서 상자 · 종이봉지 · 조화 만들기나 재봉 등에 종사했다. 젊은 처녀들은 다양한 가내 서비스 분야에서 일했는데, 이들의 증가는 당시 중산층의 번영을 반영한다. 그들은 귀부인의 몸종, 가정부, 잔심부름꾼, 요리사, 보모, 식모, 막일하는 파출부, 세탁부로 일했다. 1900년 가내 하인층에 해당하는 여성 인력은 200만 명에 이르렀고 전 노동력의 12.5퍼센트를 차지했다.[각주:28]

 

도시의 슬럼가에서 생활하는 빈곤층은 말하자면 빅토리아 시대 후기에 새롭게 발견된 대상이었고, 부스나 시봄 라운트리(Seebohm Rountree)의 사회조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인도주의 활동가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사들이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했고, 이전에 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회 안정에 기여했던 신형조합(New Model Union) 이외에 반숙련 또는 미숙련 노동자 중심의 새로운 조직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은 이전 숙련공 노조에 비해 좀 더 호전적이었다. 19세기 말의 노동 불안은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노동운동과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 우후죽순처럼 전개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은 결국 자유당의 분열 이후 노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1. 이영석,'영국제국의 초상',푸른역사,2010,pp30-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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