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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영성에 대한 고찰 - 재해석과 적용

과학주의자 2024. 3. 1. 18:12

3가지 종교는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현대사회에 부적합한 면도 있다. 이는 동양 사상이 한때 서구에서 흥행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동아시아불교는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동아시아불교에 기초한 4.5단계적 사고가 우리에게 강력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현대사회에 부합한다고 옹호하였다.

 

4.5단계적 사고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초월의 상태가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우리 자체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4.5단계뿐만 아니라 4단계, 3단계, 2단계, 1단계 사고도 불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나름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하위단계의 사고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며, 특히 1단계적 사고가 4.5단계적 사고와 매우 가깝다.

 

 

1단계와 유사성

1단계와 4.5단계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보인다. 1단계에서 세상은 어떠한 가치와 의미도 없으며, 그저 나름의 과학적 질서에 따라 운행하는 곳인 반면, 4.5단계에서 세상은 모든 곳에 신성이 자리한 아름다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이 묘사하는 세계의 모습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4.5단계 사고는 과학지식을 부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형태의 기적도 인정하지 않는다. 둘 간의 차이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특히 4.5단계는 가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1단계와 매우 유사하다. 2단계에서 세상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되며, 3단계에서는 세상만물이 수많은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4단계에서도 삿된 것과 삿되지 않은 것을 구분하거나, 신과 사탄을 구분한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이들간에 차이는 없다. 그러한 구분은 완전히 인위적인 구분이다. 깨달음의 경지를 더해가면서 4.5단계에서는 선악의 구분을 버렸지만, 이는 1단계에서 이미 성취되었던 것이다.

 

1단계와 4.5단계의 차이는 순전히 태도의 차이에서 온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면 1단계적 사고가 되고, 끝나지 않는 위대한 이야기로 보면 4.5단계적 사고가 된다. 이 차이는 사과를 '빨강색 열매'로 보는 것과 '이전 세계가 우리에게 남겨준 풍요의 결실'로 보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4.5단계를 영성의 단계로 올려준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을 제외하면 1단계와 4.5단계는 매우 비슷하다. 1단계와 4.5단계는 서로를 진리를 직관하는 사고로 본다.

 

다른 단계에의 적용

1단계만큼 4.5단계와 유사한 단계는 없다. 하지만 4.5단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분별의 지양과 일즉다 다즉일이다. 2,3,4단계도 4.5단계에서 주장하는 진리의 일부분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삿된 견해가 아니라 나름의 가치를 가진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단계에서 4.5단계에서 주창하는 바를 수용할 때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더 풍요로워 질 수도 있다.

 

4단계

4.5단계는 현실성과 일상성, 진보의 측면에서 3대 종교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4.5단계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동아시아불교가 인도불교에서 왔다는 점을 기억하라. 약간의 수정을 통해 불교에서 4.5단계 사고에 이를 수 있다면, 다른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불선은 도에 따르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전통이다. 이는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점에서 한계에 부딫힌다. 이 문제는 인위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의 일부라고 볼 때 해소된다. 특히 도가에서 그토록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욕망 또한 자연의 산물임을 긍정할 때 유불선은 한계를 해결하고 현실과 맞닿게 된다. 사실 4.5단계는 바로 이러한 단계를 거쳐 탄생하였다.

 

인도불교는 비록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힌두교가 인도불교보다 더욱 낫다고 할 수 있다. 인도불교는 삶을 부정하고 어떤 형태로든 자살을 종용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는 이 문제를 일상에의 충실로 이미 해결하였다. 바가바드기타는 자신이 처한 일상도 브라흐마임을 일깨우고, 일상을 충실히 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힌두교는 현실과 일상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진보를 향한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사실은 간디가 그러한 길을 간 예시라고도 볼 수 있다. 약간의 구습과 비과학성을 내던질 때 힌두교는 훌륭한 4.5단계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사실 하레 크리슈나가 그러한 예이다)

 

기독교는 4.5단계와 가장 맞지 않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4.5단계와 달리 기독교는 유일신이라는 심대하고 비과학적인 가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실제로 하나의 인격체이며, 나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희망을 품게 만들 수 있다. 선한 유일신이라는 믿음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희망을 심어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희망이 인간의 삶을 쾌적하게 만들고 사회를 발전시킨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약속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유일신 신앙에서 비롯되는 비과학적인 측면을 버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희망을 부각한다면 기독교도 충분히 4.5단계적 사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야훼라는 강력하고 비과학적인 존재를 믿는 대신, 그가 약속한 희망이 언젠가 이뤄지리라는 희망은 품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희망을 품고 헌신할 때 바로 그 이상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계몽주의의 세계관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희망을 조화한 계몽주의는 근대의 문을 열어젖혀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행복을 안겨주었다.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길(혹은 이미 나아간 길)을 계몽주의가 보여주고 있다.

 

3가지 종교전통은 나름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유불선은 사람들이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게 만들고, 인도불교는 세상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추구하게 만들며, 기독교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러한 장점은 현실성과 진보가 가미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세계의 맥락에서 인간의 실제 삶이 향상되도록 돕는다. 

 

3단계

3단계는 신화적 사고를 통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신화는 문화와 사람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2가지 체계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신화적 이미지는 세상을 넘어서는 낮의 이미지와, 세상에 융화되는 밤의 이미지, 그리고 세상의 순환을 거쳐 세상을 초월하는 순환과 영웅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영웅은 이러한 지혜를 깨우친 자를 의미한다.

 

4.5단계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영웅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신성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신성은 온 세상 모두에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낮의 이미지와 밤의 이미지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두 세상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넘어서는 신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머나먼 타지에서 이를 얻어오는 자가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신성이 깃들어 있고, 삶과 죽음이 같은 실재의 두 측면이라는 점을 깨달은 사람이다.

 

4.5단계는 2가지 측면에서 3단계 사고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먼저 4.5단계는 3단계에서 영웅이 추구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것은 신성이 바로 자신 안에 깃들어 있으며, 세상만물이 모두 하나의 위대한 실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만물 하나하나에 모든 만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문화권에서 땅은 밤의 이미지이지만 오히려 땅에 초월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신화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땅에도, 하늘에도, 땅과 하늘, 그 밖의 온 세상이 빠짐없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둘 모두 같은 도에서 나왔고 같은 과학법칙 하에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면 굳이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신성을 얻기 위해 굳이 뛰어난 선각자 밑에 들어가거나, 죽음을 넘나드는 모험을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 신성은 이미 나에게 있으며, 나는 이미 세상의 일부이자 세상을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주어진 한계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자아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세상은 충만한 의미를 받은 곳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웅이다. 그들은 자신이 영웅이고, 자신의 삶이(그리고 삶 이전과 이후 모두가) 모험의 여정임을 안다.

 

2단계

2단계에 머무는 사람에게 4.5단계 사고를 주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2단계와 그 상위단계 사이에는 영성이라는 뿌리깊은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2단계에 머무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영성은 소수의 사람만이 가진 자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살며, 그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낸다. 단지 유전적으로 행복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크나큰 역경을 맞아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만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이른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다고 여기고, 더 절대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영적 여정에 오르게 된다. 그것이 종국에 크나큰 만족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 4.5단계 사고의 핵심은 그러한 구분의 부재이다. 기도하고 수행하며 사는 삶은 신성하다. 마치 일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과 욕망을 영위하는 삶만큼 신성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삶을 살아내는 행위도 모두 도의 일부이며 자비의 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 신성하고 의미있는 삶이다.

 

4.5단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2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사고의 전환이다.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생의 영위가 아니라,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이자 세상의 아름다움임을 아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유를 누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느낀다. 이들은 행복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며, 영성이 없음에도 이미 4.5단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5단계는 1,2,3,4단계에서 중시하는 요소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역으로 1,2,3,4단계 모두 4.5단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4.5단계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삶은 세상의 신성에 대한 직관을 바탕으로(4단계), 세상의 충만한 의미와 자신에게 깃든 위대한 신성을 자각하며(3단계), 현실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2단계) 여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인식(1단계)에 바탕을 둘 때 더욱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성의 필요

우리는 지금까지 4편 이상의 글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였다. 의미와 영성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사고방식을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필자는 거기에 나름의 순번을 부여하였으나, 종국에는 모두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그 답을 4.5단계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나의 삶의 의미이기도 하며,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4.5단계에 다다를 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러한 작업이 왜 필요하냐고 질문할 수 있다. 사실 의미와 영성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삶이 비록 힘들더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쾌락과 행복을 찾아 누린다. 그리고 취미나 자신의 성장, 타인과의 관계와 행복, 사회 기여를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여긴다. 2단계에 머무는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자기 삶의 의미라고 여기며, 자녀를 키우고 자라나는 모습에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대체 왜 영성이 필요한가? 이미 삶의 의미를 찾은 이들에게 의미와 영성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예외가 있다. 먼저 어떤 사람들은 유전적인 이유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내성적이고 불안이 많은 사람들로, 이러한 성격 특성은 그들의 유전적 특성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며, 긍정적 자극과 행복을 자원삼아 삶의 의미를 구축한다. 반대로 대인관계가 협소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체질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그들은 일반인과 달리 삶의 곳곳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소위 '소확행'이 힘든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이 필요할 수 있다.

 

또는 일반인이라도 크나큰 역경에 봉착할 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천재지변에 부딫혔을때, 전쟁을 겪었을때, 무자비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거나, 혹은 아끼는 주변인이 죽었을 때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젖어들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경험은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자신이 생각하던 세계관이 무너지고 세상이 위험하고 무섭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삶이 허망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들이 다시금 삶의 의미를 되찾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종교나 다른 영적인 이해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현대사회에서 더 취약할 수 있다. 특정한 가치체계가 한 사회를 지배했던 과거에는 비록 성격이 부정적이거나 역경을 겪더라도 삶의 의미를 잃기는 쉽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하나의 삶의 의미를 고수하고 압력을 행사하면서 반강제적으로 삶의 의미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다원화된 지금 세상에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주장이 너무 다양하여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할 수 있다.

 

본성적으로 삶의 의미를 발굴하기 힘든 사람, 역경을 당하여 삶을 살아갈 동력을 일시적으로 잃어버린 사람에게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수일 수도 있다. 그들은 결국 실패하거나, 남들보다 훨씬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할 수 있다. 이럴 때 영성에 대해 이해하고, 의미와 영성에 대해 아는 것은 이들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필자가 주장하건대, 4.5단계 사고는 이들이 현실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치있으면서도,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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