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인류사회에 존재해 왔다. 그 발자취는 고대의 트라시마코스에서 현대의 호모 이코노미쿠스까지 발견되며, 동양에서도 나타났다. 이기주의는 성악설과 자주 결부되었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왔다. 이기주의를 긍정한 사회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사회에서는 공공선과 인습을 중요시했고 따라서 이기주의는 배척되었다. 그러다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의 이익추구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정착하면서 이기주의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이념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에는 68혁명에서 비롯된 반문화 운동과 신좌파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이기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철없는 중2병에서 재계 최고 회장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기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기적인 이타적인지에 대한 논쟁은 무수히 벌어졌지만, 이 주제에 대해 합리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역동이나 신념을 관철하는데 주력했고, 논쟁의 역사는 대화 대신 배척과 오류, 무의미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300년전부터 과학적 방법론이 부상하면서 어떤 주제에 대해 가치중립적인 판단을 추구하는 전통이 생겨났고 특히 지난 50년간 인간심리를 설명하는 심리과학에서 눈부신 지적 발전이 있었다. 또한 철학에서도 논리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발흥하면서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윤리학에서의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와 달리 분석철학에서 사용되는 논리적 도구와 사고방식을 통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논쟁에 생산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본 글은 분석철학에서 사용되는 논리적 사고방식을 통해 이기주의를 분석하고 철학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방법은 이미 다른 과학분야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분석철학의 고유한 방법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적어도 철학에서는 분석철학을 통해 체계적인 논리적 사고가 주요 방법론으로 도입되었다. 또한 지난 50년간 심리학에서 밝혀낸 인간본성에 대한 연구로 이기주의를 평가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본 글에서는 이기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논리적 분석에 만족하려 한다.
이기주의의 무의미함
이기주의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인간(또는 모든 유기체)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며, 이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자기이익의 추구라는 동기에서 발생한다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니체는 유기체의 본성을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으며, 19세기의 생물학자 헉슬리는 자연을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탐욕추구에 대해 일종의 자연주의적 변호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세상에 선함이란 없고 오로지 투쟁만 있을 뿐이라는 철없는 청소년들에게서도 자주 관찰된다.
중2병들이 하는 행동이 창피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어떤 주장은 이기주의가 가진 중요한 함의를 지적한다. 이기주의는 많은 중2병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선함이나 이타성을 부인한다. 이들은 인간의 선함이 어떠한 종류의 이기심의 발현이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기제를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가령 우물가에 빠지려는 아이는 누구나 구하려 한다는 측은지심의 고사에 대해, 이기주의자들은 구하는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건 이기심을 부여하거나(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 상부상조 등), 아예 그 사람을 일종의 세뇌를 당한 사람으로 멸시하여 어떻게든 이타성을 부정한다. 비슷하게 니체는 인간이 보이는 이타성이 스스로의 보존을 위해 노예가 만든 허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내용 이외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타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는데 반해, 이기주의는 인간의 이타성을 부정하고 모든 행동을 이기적인 행동으로 환원하려고 한다.
인간의 이타성을 완전히 부정하려고 할때 발생하는 문제는, 이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기주의가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기주의가 참이고, 인간의 이타성이 존재할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기주의를 왜 이기주의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의 이타성이 존재할수 없을때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만약 이타성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는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명제와 동의어로, 아무런 설명력도 가지지 않는 동어반복 명제에 불과하다. 결국 이기주의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동어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기주의는 제대로된 이론의 자격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가 심해지는 이유는 이기주의가 이타성의 존재를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이기주의와 달리 일종의 설명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명제가 유니콘의 존재를 부정하긴 하지만, 적어도 유니콘이 존재할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유니콘이 존재하는 가능세계 a가 있다.'와 'a는 현실세계가 아니다.'라는 두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능세계 a와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 -a 사이에는 관찰로 드러나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으리라고 상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을 통해서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의 진리값을 정할 수 있다.
반면에 이기주의는 귀납적인 부인이 불가능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타주의자가 아무리 인간의 선한 행동을 제시해도, 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이기적인 행동으로 해석된다. 막말로 우물가에 가는 아이를 구해도 이기적인 행동이고, 구하지 않아도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설명이 말싸움을 하는데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이러한 설명방식은 다르게 말하면 이기주의가 성립하지 않는 가능세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방식 하에서는 어떠한 가능한 행동도 모두 이기적인 행동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기주의는 어떤 행동에 대해 '이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이다.'라고 이름붙이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기주의는 인간행동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공하지 못하고 어떠한 예측도 제공하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기주의자들은 어떤 가난한 할머니가 기부를 할지 안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부를 하든 안하든 모두 이기주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가 무의미한 이름붙이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이기주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예측을 해야 한다. 즉 적어도 이기주의가 틀릴 가능성이 존재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을 근거로 이기주의가 틀렸다고 결론을 내리는게 가능해야 한다. 이는 모든 과학이론이 갖춰야 하는 조건이며 과학이론이 이기주의와 달리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기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에 관찰로 판별할 수 있는 어떠한 약점을 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기주의에 구조적 제약을 부여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과연 이기적인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기적인 행동이 특정 유형의 행동으로 정의되어야만 모든 행동에 '이기적' 꼬리표가 붙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으며, 이기주의에 '무의미' 대신 '이기'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기적인 행동이란 무엇인가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정의는 이기주의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행동이 정의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이기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에 대한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으로 정의했지만 경제학에서는 사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를 이기적인 행동으로 규정하였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이기주의가 가능하지만, 핵심은 자기이익의 추구로 요약될 수 있다. 니체의 유기체가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기 때문이며, 경제학은 아예 처음부터 이익추구를 상정한다. 사실 이기적인 행동의 예시로 자주 제시되는 생물학적 욕구 충족 행동은 모두 해당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에 관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이익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으로 정의하는 일은 훌륭한 출발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제기되는 문제는, 자기이익의 범위이다. 왜냐하면 유기체의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과거 진화론에서는 개체의 이익이 자기이익이었으며, 현대 대다수의 이기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개체 이익의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면, 이기주의는 빠르게 반박된다. 왜냐하면 존스타운 인민사원 사건이나 테르모필레 전투처럼 명백한 개체의 불이익이 예상되는 행동이 수차례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전 인류가 뇌에 칩을 박아넣지 않는 한 영원히 인류와 함께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주관적 인식 조건을 추구하여 이기적인 행동을 더 제한할 수 있다. 이 수정된 개체 이기주의에 따르면, 이기적인 행동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고 믿는 행동이다. 이를 인민사원 사건에 적용하면, 인민사원 신도들은 자신들이 자살하면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병사들은 적게나마 승산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 행동들은 자신들을 해쳤지만, 이러한 행동이 이기적인 행동이라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양한 반례가 가능하다. 가령 구조대의 구조가능 인원이 제한적일때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를 보라. 아니면 조국에 남겨진 가족과 국민을 위해 자살임무에 자원한 육탄 10용사를 생각해 보라. 사실 테르모필레 전투에 대한 더 일반적인 해석은, 병사들이 스파르타의 가족이나 국민, 혹은 동맹국 시민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익추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명백히 개체의 이익에는 반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유전자에 의지해서, 자식과 가족을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려 하는 행위임으로 매우 이기적인 행동라고 변호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기주의의 또다른 약점이 드러난다.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행동은 흔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지만, 이것을 반드시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행동은 몇년간 애벌레 생활을 하고 한달가량만 날아다니다가 사망하는 매미에서 잘 관찰되는데, 그 행동의 결과로 매미는 모두 사망하며, 매미 몸 속의 유전자도 모두 사망한다. 남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매미 유전자의 복제물이다. 자연계에서 유전자의 추가적인 복제를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일은 매우 일반적인 일로, 동물행동학에서 연구하는 동물의 이타적 행동이 모두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기주의를 포기하거나, 적어도 개체 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유전자 이기주의를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익을 도입할 경우, 여러가지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유전자에게 동기를 논할 수 있는가? <이기적인 유전자>를 저술한 리처드 도킨스는 책을 저술한 후 수십년째 유전자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으며, 오독자가 너무 많아서 지금도 그 말을 반복하고 있다.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진화론을 공부한 사람은 잘 알겠지만) 그저 자신을 더 잘 복제한 유전자가 더 널리 더 오래 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어떠한 '동기'도 없으며, 따라서 행동도 아니다. 이 경우 유전자를 행위자로 가정하면 이를 행동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유전자는 반드시 환경과 결부되어 작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유전자를 행위자로 가정한다면, RNA나 단백질, 세포구조, 주변환경을 행위자로 가정해선 안될 이유는 없다.
만약 자기자신을 복제하는 경향에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얼음도 이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영하에서 얼음 결정은 주변의 분자를 정렬시키는 방식으로 결정구조를 복제하면서 얼음을 형성하는데, 이는 DNA의 복제와 마찬가지로 화학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우리는 대다수의 광물 결정과 컴퓨터상 세포 자동자, 인간 사상의 전파까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얼음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달라 보이고, 특히 어떠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게다가 자연계에는 자기자신의 상태를 파괴하는 기제도 존재한다. 행성 대기층의 기체는 끊임없이 탈출하면서 '중력권 내 기체'라는 상태를 파괴하고, 항성과 블랙홀은 외부의 물질들을 흡수하면서 천체 내부와 비슷한 상태로 만들지만 그 과정이 지속되면 결국 대폭발을 일으키며 자기자신을 완벽하게 파괴한다. 물론 '별은 이타적이다'라는 말은 황당하고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마치 '얼음은 이기적이다'처럼 말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은 유전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개체의 이익을 추구할 지능이 있고, 무엇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타인과 어울리려는 동기를 가지는데, 여기에는 타인을 도우려는 동기도 포함된다. 이것은 이상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야기로, 고전적인 조작적 조건화 실험에서 직무수행평가에서의 평가자 동기까지 다양한 맥락과 실험에서 타인을 도우려는 동기가 관찰되었다. 사실 동기심리학을 배웠다면 친애 욕구(혹은 친밀 욕구)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고, 친한 타인을 기꺼이 도와주려는 욕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와 행동 상당수는 개체의 이익을 보존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유전자 전파를 위해 진화된 특수하고 본능적이며 무의식적인 기제들이다.
결국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이기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이타성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자연법칙에 인격을 부여하는 전근대 시절로 회귀해야 한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이기심도 이타심도 모두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형태의 이기주의도 가능하다.
실용적 이기주의
실용적 이기주의는 필자가 고안한 개념으로, 아직 이러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주장한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다. 이 주장은 다른 이기주의보다 인기가 적어 보이지만, 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실용적 이기주의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게 유용하다.'는 입장으로, 인간의 실제 본성이 어떻든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게 어떤 측면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인간의 이타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론을 전개할때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가정하는데, 이는 그들이 이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가정하는게 경제학 이론을 전개하는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도 비슷한 논리를 통해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의 유용함을 들어 이기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 이는 국제정치학에서 국가를 보는 견해와도 비슷하며, 심리철학의 정신인과론이나 전기역학의 에테르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을 통해 이기주의를 보전할 수는 있지만, 대신 어떤 측면에서는 이기주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많은 진화생물학자들과 동물행동학자들은 동물이 이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는 특히 동물의 이타적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러한데, 이러한 입장은 동물들이 보이는 친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데 편리하다. 쉽게 생각해보면 동물들의 이기심이 어떻게 이타적인 행동으로 발현되는지 길고 긴 논리적 연결고리를 짜는 것보다는 아예 동물에게 이타적인 본성이 있다고 간주하고 연구를 시작하는게 더 간편하다. 또한 인본주의 심리학파에서는 모든 인간이 선한 본성과 잠재력을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인본주의 심리학에 기반한 인간중심치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인간중심치료는 실제로 다양한 방면에서 효과를 보이고 있다. 비슷한 예가 사회심리학에도 적용될 수 있고, 다른 다양한 분야에도 적용가능하다. 우리가 실용적 이기주의를 수용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실용적 '이타주의'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럴 경우 우리는 적어도 어떤 분야에서는 '인간은 이타적이다.'라는 주장을 유용함을 들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론과 제안
필자가 인간 본성에 대해 따로 정의를 내리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저자가 별다른 대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주장을 분석할 수 있다는게 분석철학의 장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타주의나 다른 인간 본성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지 않으면서 이기주의를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이기주의가 무의미한 주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안전한 이기주의의 경우 반박되거나, 제한적으로만 성립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결론적으로 이기주의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며, 이기심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타주의와 비교해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기주의는 허황된 주장이라고 혹평할 수도 있으나, 철학에는 영원한 정답도, 영원한 오답도 없다는 격언이 예부터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기주의의 정당화에 대한 추가적인 작업이 요구되는 바이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논쟁은 오래되었지만, 생산적인 논의는 적었다고 평가된다. 대부분의 논의는 단순한 자기주장에 그치거나, 의미없는 비유싸움으로 흘러가거나, 배척과 이데올로기 다툼,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에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논쟁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자원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특히 지난 50년간 이뤄진 심리학의 발전은 인간행동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현재 과학자들은 인간이 이기적인 본성과 이타적인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며, 논쟁의 방향은 이것이 얼마나 선천적이고 얼마나 후천적인지로 옮겨갔다. 논쟁의 중심에는 진화심리학이 있는데,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진화에 유용한 여러 일관성없는 본성이 모인 일종의 연장통이라고 본다. 이러한 통찰이 작금의 이기주의-이타주의 논쟁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논쟁을 볼때 불편했던 점은, 이기주의자는 자주 이성적으로 묘사되는 반면 이타주의자는 자주 감성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차갑고 이성적인 이기주의자와 뜨겁고 감성적인 이타주의자(주인공)의 대립구도는 매체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기주의에 도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사실 신무신론자들 상당수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위 논증을 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에 도달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론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편협한 사고방식을 고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기주의에 대한 비생산적인 옹호(와 이타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옹호)를 종식시키고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진전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