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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사전/철학

철학 총론

과학주의자 2022. 12. 24. 13:43

철학은 인류의 모든 학문의 시초이고, 모든 유수한 학문이 철학에서 갈라져나왔다. 뿐만 아니라 철학은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형성하는 기반이었고, 사회적 상황과 물질적 배경에 따라 수많은 철학이 융성하였다. 비록 그 정확도에서 과학에 밀릴 수는 있으나, 철학의 풍부함과 깊은 사유는 여전히 다른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철학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석철학은 견고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로 그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에 미치는지는 불확실하며, 대륙철학이나 동양철학의 경우 주장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누군가의 생각, 혹은 특정 사회의 생각으로 보아야 하며, 신뢰할 만한 사실이 아니라 독창적인 의견으로 보아야 한다.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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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은 공자 이후로 중국과 인근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해온 철학으로, 주로 전체론적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와 친사회적 행위를 중시한다. 산업혁명 이후 동양철학은 도외시되어 왔고, 지금도 동양철학은 세계적으로 비주류 철학에 속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서양철학에서는 다가가지 못한 통찰이 동양철학에 숨겨져 있을수도 있다.

 

분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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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은 언어와 논리에 기반하여 철학적 주제를 탐구하는 철학 학파를 말한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했으며, 현재도 영미권에서 주류 철학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분석철학은 탐구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중시하며, 주로 대상의 언어적 의미를 분석하여 대상을 탐구한다. 다른 철학과 달리 상당수의 분석철학 이론들은 탄탄한 논리적 근거에 기초하기 때문에 더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하다.

 

심리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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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은 인간 마음의 본질과 특성을 분석철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철학이다. 분석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심리철학은 논증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며, 분석철학과 많은 공리를 공유한다. 심리철학은 인지과학을 만든 공헌자 중 하나이며, 분석철학 전통의 학문 답게 다른 철학보다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남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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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주의는 현대철학의 비주류 사상 중 하나로, 남성에 대한 편견과 폭력, 차별을 배제하고 남성 권리의 신장과 진정한 남성성 정립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페미니즘의 독주와 보수주의 및 대안우파의 외면으로 인해 남성주의는 비주류에 머물고 있으며, 주류 철학에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성주의는 페미니즘의 대항마로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구조주의[각주:1]

구조주의는 20세기 중반부터 유행한 철학 사상으로,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는 숨은 구조가 있다고 보고 그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들에 따르면 어떤 현상이든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구조주의자들은 이 원리나 체계를 구조로 지칭하며 이 구조가 모든 것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문화연구에 있어서도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들이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으며, 그 텍스트들이 외부와 맺고 있는 관계 즉 구조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각 텍스트들이 배열되는 방식에서 전체의 의미와 각 텍스트들의 의미가 생겨난다는게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구조주의는 스위스 제네바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redinand de Saussure,1857-1913)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강의중 한 말을 제자인 샤를 바이와 알베르 세시에가 편찬한 <일반언어학 강의>가 구조주의의 시작인데, 여기서 소쉬르는 기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 그는 머릿속에 있는 표상을 랑그(langue)로 정의하고 내뱉어진 말을 파롤(parole)로 정의한 후, 파롤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언어에서 사용되는 ㄱ,ㄴ 등의 기호들을 그 모양인 기표(signifier)와 뜻인 기의(signified)로 분리하고, 공시적과 통시적, 계얼체, 통합체 등의 단어를 만들어내며 기호학을 창시했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사상으로, 정신분석학과 같은 무의식적 영역을 중시하고 텍스트의 외적 의미에 주목하는 사상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기표/기의나 랑그/파롤의 형태로 세상을 이해하는 구조주의가 이분법적이라고 공격하고, 텍스트의 의미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의 영향도 받는다고 주장한다. 가령 구조주의자들이 한 텍스트의 의미를 인접한 텍스트들을 통해 분석한다면,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역사적 배경이나 저자/수용자의 계급, 성별, 인종 등을 통해 텍스트를 분석하는 식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고정된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장한 차연(differance)에 따르면, 모든 기표는 다른 기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효도'를 정의하는 경우 이 '효도'에 대한 정의도 모두 단어로 서술되기 때문에, 결국 다른 기표들로 이어진다는게 후기구조주의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고정된 의미는 없으며 모든 텍스트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항상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설명을 들으면 알겠지만 설명이 굉장히 난해한데, 이것 또한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으로 분석철학자들이 이런 점을 들어 비판하기도 했다.

 

알튀세르의 주체구성론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결합한 유명한 철학자로, 70년대 문화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조주의를 마르크시즘에 결합한 그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시즘의 기본 명제를 거부하고, 상부구조에도 나름의 자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가 경제적 층위, 정치적 층위, 이데올로기적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각 층위들이 상대적인 자율성으로 누린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런 그의 이론이 주체구성론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ISA)에 의해 생산되는데, 알튀세르는 가족과 종교, 교육, 미디어, 문화 산업 등이 ISA이며 이들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틀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렇게 훈련된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몸소 실천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완성하며, 알튀세르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형성한다고 표현했다.

 

알튀세르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가령 내가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당신!'이라고 나를 불렀다고 해보자. 이때 호명된 사람인 나는 객체이고 호명한 그 누군가가 주체이지만, 알튀세르는 나도 호명된 '당신'의 주체이기 때문에 나 또한 주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도 실제로 이렇게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이를 이데올로기에 대입해서,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게 된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객체로서 '호명'되기 때문에,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주체로 느낀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모더니즘[각주:2]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철학과 근대세계를 반대하는 프랑스철학 사조를 말한다. 이는 195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한때는 주류였고 지금도 문화연구에서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안에도 다양한 사상가가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힘들지만,모두 근대문명을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을 까내리는데 유독 열성적이며, 그 열성은 과학에 대한 이해와는 반비례한다. 사실 인문학에 톡톡히 망신을 준 소칼 사건에서 소칼의 논문을 심사한 사람들이 주로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 물론 이들은 앞에서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할 수 없다'는 일부 이단 논리를 가져와서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노력한다.

 

푸코의 사상[각주:3]

미셸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사상가 중 하나로, 보드리야르와 함께 현대사회를 제대로 진단했다고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다. 그는 근대사와 현대사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남겼는데, 그러한 주장은 그의 비현실적인 가정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푸코의 핵심 주장은 시선이 권력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를 지배하는 것이고, 바라봄을 당한 자는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 않으며 바라보는 자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가정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의식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생각한다. 이때 일반적으로 다뤄지는 대상은 외부의 사물인데, 푸코는 여기서 비약을 해서 인간의 의식이 지향하는 모든 것은 사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타인도 의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물건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눈맞춤하는 현장을 권력투쟁의 장으로 바꿔놓고, 타인을 바라보는 모든 행위를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자 지배행위로 바꿔놓는다.

 

이처럼 타인을 보는 것이 지배라고 주장한 후, 이러한 가정을 통해 푸코는 근대사회가 시선을 통한 지배의 현장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의학은 결국 환자를 지배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환자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이 급속히 증가했지만, 푸코는 이를 지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사가 환자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는 정신질환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려는 모든 행위를 지배행위라는 틀에 끼워맞추려고 발광한다.

 

이러한 무리수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푸코는 의학 전체가 지배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과학적 의학의 시초는 객관적 관찰에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그 관찰이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의학도 지배행위라고 주장하고 역사적 사실을 여기에 끼워맞춘다. 특히 푸코는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체해부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무시하고 시체해부가 이러한 의학의 권력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역사학자들의 반박에 해부교육은 이때부터 중요시했다는 근거없는 헛소리를 해댄다. 더 나아가 그는 시체가 권력(시선)의 원천을 제공하기 때문에 근대 이후부터 신성시되었으며, 죽음이 삶과 통합되어 다뤄졌다고 주장한다. 근대부터 죽음에 대한 터부시가 심해졌다는 것을 아는 역사학자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극형의 폐지도 시선을 이용하는 형벌이 극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푸코는 주장하였다. 감옥은 범죄자를 감시할 수 있고, 푸코가 시선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 규율이 작동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극형의 폐지가 휴머니즘의 확산으로 인한 결과라는 일반적인 해석과 배치되었는데, 푸코는 극형 폐지를 주도한 법조계 인사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휴머니즘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해석이 틀리고 자신이 옳다는 병신같은 논리를 펼쳤다. 또한 빛이 신성시되는 이유도 그것이 시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제식훈련도 규율 권력이 탄생한 이후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신화학자들과 군사사 연구자들이 들으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푸코의 이런 병신같은 짓의 핵심에는 개념의 불명확함과 함께 시선에 대한 오해가 있다. 시선을 주는 것이 대상을 물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TOM이 작동하며, 비인간화(dehumanization)가 일어나서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볼때만 사람을 사물처럼 취급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더구나 눈맞춤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는 과정이고, 적절하게 이뤄질 때 동질감을 얻고 교감을 강화하는 작용까지 한다. 시선은 권력이 아니라 교류의 수단이며, 푸코는 이것을 이해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 푸코뿐만 아니라 현대사회를 다룬다는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이 시선의 권력이라는 멍청한 환상에서 해매게 되었다.

 

규율과 담론, 파놉티콘

푸코의 장대한 개소리 중 그나마 가치있는 것을 꼽는다면 규율과 담론에 대한 주장일 것이다. 푸코는 근대에 와서 규율이 새로운 권력의 수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물리력을 통해 사람을 규제했지만 근대에는 세심한 여러가지 규율을 통한 국민지배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잘 짜여진 법과 제도는 단순한 강압이나 설교보다 사람을 움직이기 더 수월하다. 이러한 점만 지적했다면 좋았겠지만,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규율이 시선의 다른 버전이라는 개소리는 푸코의 설득력을 떨어트린다. 게다가 감옥의 규율을 사회의 다른 모든 곳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앤서니 기든스조차 비판하였다.

 

규율에 대한 푸코의 주장은 파놉티콘으로 요약된다. 18세기에 벤담에 의해 고안된 감옥인 파놉티콘은 간수는 재소자를 볼 수 있고, 재소자는 간수를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간수의 원활한 감시를 가능하게 하고, 재소자는 일상적인 감시에 시달리며 행동을 통제당하게 된다. 푸코는 이를 시선이 불균등하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생긴다는 개소리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원형이 파놉티콘이며, 파놉티콘처럼 감시가 규율의 형태로 개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근대사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인문학과 사회학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다.

 

파놉티콘 비유는 일견 타당하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규율의 내면화는 근대적 현상이 아니다.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규율을 만들어 왔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와중에 규율을 어기는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전근대사회에서도 규율은 권력의 통치수단이었고, 세심하고 정교한 형법과 민법은 로마와 중국에도 있었던 개념이다. 정교한 규율권력은 근대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전된 국가에서 늘 나타났으며, 감시의 내면화는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개인주의가 강해진 지금은 집단의 규범이 가장 약한 시대로, 달리 말하면 내면화된 감시의 힘이 제일 약한 시대다. 파놉티콘은 권력자가 직접적인 감시를 하려고 할때 비판하는 방법으로서나 좋지, 그것으로 근대사회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 사실과 맞지 않다.

 

한편 푸코의 주장 중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담론(discourse)의 개념이다. 담론은 어떤 대상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의 총체로, 패러다임이 이와 유사하다. 푸코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이며, 권력자가 계속해서 담론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진리를 생산해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타당하지만, 푸코는 그것을 역사학적으로 논증하는 대신 시선=앎=권력이라는 병신같은 논리로 뒷받침하였기 때문에 타당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이런 엉성한 논증은 자신의 담론 사상을 사회 전반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은 과학전쟁에서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담론 개념만 맹신한 채 사회적 논의를 거부하고 상대방 비난하기만 일삼다가 대안우파의 창궐에 맥을 못추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각주:4]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우며 일본에서는 4대 성인중 하나로 칭송받지만, 생전에 그의 정적들은 그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그러나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현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서구학문의 시작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파악하는데 걸림돌은 그가 직접 남긴 저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플라톤만이 소크라테스의 어록을 기록하여 책을 전하고 있는데, 플라톤 또한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책 중에서 주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표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의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한 말과 플라톤이 가칭한 말을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 학자들은 적어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 본인의 말이 맞다고 보고 있으며, 플라톤의 초기 저작들(에우티프론, 프로타고라스, 크리톤)은 확실히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과도기에 쓰인 메논도 가끔씩 여기 들어간다.)

 

 

데카르트의 사상(cartesian)

르네 데카르트는 인식론 연구자이자 심리철학자로, 불확실의 시대에 절대적인 앎을 추구했던 사상가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근세에 절대적인 앎을 추구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앎이 절대적으로 참인 기반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명한 방법론적 회의끝에 데카르트는 그 기반이 인간의 이성, 즉 영혼(정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성중심주의를 철학에 가져왔다. 동시에 그는 물질과 정신(이성)을 분리함으로써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이 정신을 건드리지는 못하게 하였고, 존 설에 따르면 오히려 이렇게 신학과 과학의 영역을 정신과 물질로 나눔으로써 종교적 반동의 광기에서 과학을 구하려고 하였다.

 

데카르트의 기본적인 사상은 영혼(정신)과 몸이 완전히 별개인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모든 것을 창조했으면서도 그것들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신만이 유일한 실체인데, 이 신이 영혼과 물질이라는 두 종류의 파생적 실체(즉 불완전한 실체)를 창조했다. 영혼의 본질은 사유함(res cogitans)으로, 여기에서 사유함은 의식, 생각, 감정같은 모든 정신적 활동을 포함한다. 반면 물질의 본질은 공간적 연장됨(res extensa)으로, 물질은 공간 좌표 속의 특정 지점에 위치하며 동시에 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영혼과 공간의 본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영혼과 물질이 별개의 실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가 철학사에서 의의를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구분이 이분법적 구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영혼과 물질을 분리한 후 여러가지 특성에서 둘을 대비시켰다. 이렇게 대상을 둘로 나누고 완전한 별개로 취급하는 관습은 데카르트 이후 계속되었으며, 관찰자/대상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과학의 암묵적인 함의도 여기서 탄생했다. 그러나 후기산업사회가 되면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이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비판했다. 한편 데카르트가 제시한 영혼과 물질의 이분법적 차이는 아래 제시되어 있다.

 

   영혼  물질
 앎의 접근성  직접 알 수 있다  직접적으론 알 수 없다
 나눌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
 파괴되는가  불가능  가능
 죽는가  불멸  필멸
 움직이는 원리  자유(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임)  결정론(법칙에 따라 움직임)

 

그러나 정신과 물질은 서로 상호작용할 수는 있는데, 데카르트는 영혼이 뇌속 송과선의 뇌척수액을 움직여서 물질인 신체를 조종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영혼과 물질이 결합된 존재로서 다른 동물과는 비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 특히 데카르트는 동물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동물에게는 정신, 즉 영혼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데카르트는 수면에 대해서도 입장을 내놓았는데, 그는 잠을 자면 이성, 즉 영혼이 소멸하는게 아니냐는 비판자의 주장에 대비하여 수면상태조차도 100% 정신이 없는 상태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데카르트는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논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심과 실제 논증이 바로 그것인데, 인식론적 호소에 기반한 이 논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밑의 논증은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를 잘못 적용한 오류이다.

 

  • (1) 나는 내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 (2) 나는 내 신체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다.
  • 고로 나는 내 신체와 동일하지 않다. (2)
  • 고로 사유하는 정신으로서의 나는 내 신체와 동일하지 않다. (1,3)

 

이 논증에서 보듯이 데카르트는 지식의 접근성을 물질과 영혼을 나누는 주요한 기준으로 보았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정신을 본질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신체를 비본질적인 요소로 파악하여 둘을 형이상학적으로도 구별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데카르트가 명석판명한 사고라고 이름붙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는데, 무언가가 명석판명하다는 말은 우리가 논리적 모순없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가능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을 말한다. 데카르트는 신체가 없는 자신은 명석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반면(즉 논리적 모순없이 상상가능한 반면), 자신을 의심하는 의심 그 자체, 즉 자신을 의심하는 사유 자체가 없는 자신은 명석판명하게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함으로써 존재하기(cogito ergo sum) 때문이다.

 

 

독일의 초기 자유주의 사상

독일 자유주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의 자유주의와는 다른 면모가 있었는데, 특히 영국과 달리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매우 중시했다. 이들은 공리주의가 인간의 권리를 억압하는 구체제의 논리라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프로이센 왕정에서 그런 논리로 군주제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실러, 칸트, 훔볼트 등(어쩌면 피히테까지도)은 이상적인 체제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입장(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경제관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으나, 국가가 기본적으로 인권을 수호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각주:5] 또한 실러와 훔볼트에서 보이듯이,[각주:6] 이들은 개개인에게 인정된 자유를 바탕으로 각자가 완성된 개인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위버맨쉬 개념은 여기서 보이듯 상당히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독일의 자유주의자로, 독일 자유주의와 프랑스 자유주의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실러는 자유주의자였지만 프랑스 혁명을 싫어했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은 왕권이 약화된 결과 등장한 재앙이었고, 앙리 4세 때와 마찬가지로 혼란을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러는 프랑스 혁명이 광기의 결과고, 프랑스 시민의 교양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그는 철학과 미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미덕을 가르쳐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각주:7]

 

칸트 또한 자유주의자 중 하나였다.[각주:8] 칸트는 낭만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으로 엄숙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대신 오히려 혐오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칸트는 이성을 중시했고, 그런 그가 보기에 이성에 반대되는 낭만주의는 정신적으로 나태한 혐오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칸트가 주창한 자유의 중시는 낭만주의가 자라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각주:9]

 

초기 보수주의

독일의 보수주의 또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 영양이 직접적이지는 않았는데, 독일 보수주의는 계몽주의(특히 계몽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초기 보수주의자들은 계몽주의의 이상을 긍정했지만,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는 법과 관습, 신분제를 함부로 바꿔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체제는 보수주의자들에 따르면 적응의 산물이었으며, 반면에 계몽의 이상은 공허한 관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왕과 귀족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계몽의 이상에 나아가거나, 아예 지금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대표적인 독일 초기 보수주의 사상가는 유스투스 뫼저이다. 오스나브뤼크의 공무원이었던 뫼저는 처음으로 계몽주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그 대안으로 작은 지방에 기반한 중세 국가를 내세웠다. 그는 계몽주의에서 주장하는 평등과 이성중심주의, 개인주의, 세계주의에 반대하여 신분제와 전통, 가부장적 온정주의, 그리고 애국심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모든 사회의 전통과 제도가 해당 사회의 환경 조건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의 이름으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성이 한계를 가졌다고 비판하고, 이성이 잘 설명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부분은 전통으로 채워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독일에 적용하면, 독일의 신분제는 해당 사회의 적응의 결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강요해서는 안되며, 이성이 아직 확고한 윤리와 적절한 정치구조를 제안하거나 실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전통인 신분제를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반민주주의적이고 시민을 억압하는 주장은, 놀랍게도 정치적 입장만 뻬면 문화상대주의와 동일하다.[각주:10]

 

낭만주의

독일에서 가장 융성했던 사상은 자유주의도 보수주의도 아닌 낭만주의(romanticism)였다. 낭만주의란 개개인의 감상을 표현하고 보다 높은 영적인 존재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사상적 사조로, 영국과 독일에서 특히 융성했다.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를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추구,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과 의지에 대한 찬양(그리고 탈현실)으로 말했는데,[각주:11] 이는 영성에 대한 묘사와 상당히 유사하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에 의해 탄생하였다. 실제로 많은 낭만주의자는 하류층이나 중산층 출신이며, 경건하고 개인적인 독실한 신앙을 중시하던 독일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났다.[각주:12] 칸트의 아버지는 마구 길드의 수공업자였고, 피히테는 리본 장인의 아들이었는데 그 천재성을 발견한 지방 남작에 의해 교육을 받고 학자로 성장했다. 레싱과 셸링, 슐레겔은 목사의 아들이었고, 헤르더는 교사 집안 출신이었으며, 헤겔은 세관원의 아들이었고, 실러는 군의관의 아들이었으며, 횔덜린은 수도원 소속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일하게 노발리스만이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이며, 특히 계몽주의가 가정하는 보편성과 과학에 반발해서 지역과 민족의 특수성과 예술을 강조했다. 이는 우리도 모르게 사람들을 이끄는 무의식적이고 영적인 의지에 대한 강조와 추구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실재와 의지를 추구하고 표현하는 것을 낭만주의에서 강조하였다. 반과학과 영성,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음모론적 사고는 낭만주의의 주요 특성이었다.[각주:13] 여기서 낭만주의가 보였던 반과학과 영성, 음모론은 현재 반과학의 핵심요소인 유사과학 신뢰와 초자연적 믿음, 음모론적 사고[각주:14]와 일견 유사해 보이는데, 이는 smallpage와 동료들이 반과학 요인을 '낭만주의(romanticism)'로 이름붙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반과학적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는 과학에는 적대적이었지만 박물학처럼 아직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과학에는 호의적이었으며, 또한 초기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옹호하였다. 특히 개인의 자유는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가치로 여겨졌다. 낭만주의는 주관과 영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구별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도야, 감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와도 구별되었다.[각주:15]

 

이를 종합하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개인주의와 과학에 반대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도야를 중시한 절충적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계몽군주 치하에서 '합리'의 이름으로 압제를 강요받았던[각주:16] 신흥 부르주아[각주:17]라는 낭만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에 기인한 결과일 수 있다. 반과학이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각주:18]을 생각한다면, 낭만주의의 반과학성도 커져갔던 계몽주의와의 정치적 대립이 발현된 결과일 수 있다.

 

마이몬의 칸트 비판

살로몬 마이몬(Salomon Maimon)은 18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다. 마이몬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자신의 관념론을 발표하자, 이에 대해 몇가지 비판을 제기하였다.[각주:19] 마이몬은 칸트가 주장한 이성과 감각이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이성은 초시간적인 원리이고, 감각은 매 시간마다 업데이트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초시간적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인데 둘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마이몬은 주장하였다. 또한 마이몬은 칸트가 이성과 감각의 결합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가령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현상을 인과관계로 해석하는 이유는 우리 머릿속에 그러한 해석의 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과관계 외에도 우연이나 상관관계와 같이 현상을 해석할 다른 관념도 있다. 왜 여러 관념 중에 굳이 하나만 선택이 되는지 칸트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마이몬은 비판하였다.

 

 

벤담의 공리주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란 주류 윤리학 이론 중 하나로, 윤리의 기준이 가장 큰 쾌락을 산출하는지 여부에 따른다는 주장이다. 이런 말은 흔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며,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벤담에게서 유래하였다. 벤담은 공리주의에 기초해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여러 주장을 제시하였는데, 가령 그는 동성애 탄압이 비윤리적이라고 보았으며 의회에 동성애 탄압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발언은 그가 동성애를 본 시각을 잘 보여준다.

 

"나는 오늘날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서 그러는 것처럼 (동성애자를)그렇게 가혹하게 대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를 차기 위해 수년 동안 고민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공리의 원칙을 토대로 나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밀의 종교관[각주:20]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시대에는 아직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열길이 가시지 않았던 때이다. 특히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등장하면서 자연신학의 지위가 크게 흔들렸던 시대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밀은 종교를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논리적 기준과 과학적 논증을 통해 신의 지위를 판별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신을 옹호하는 기존의 대부분의 논증을 논박하고, 그러면서도 당시에는 아직 죽지 않았던 시계 논증을 통해 신의 존재를 옹호하였다.

 

밀은 과학적 기준을 통해 신의 지위를 논증하였다. 지금이라면 과학적 기준을 적용했을때 유신론이 살아남을 확률이 매우 희박하지만, 당시의 밀은 신의 존재를 뒷받침할만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 하나는 설계 논증이었는데, 밀은 당시 자연신학자들처럼 눈과 같이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질서정연한 구조가 신의 존재를 증거한다고 믿었다. 

 

비록 그는 설계 논증을 논박하기도 하였고, 진화론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는 페일리의 시계 논증에 대해서 우리가 무인도의 시계를 설계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시계의 복잡성이 아니라 시계공이 시계를 만드는 것을 아는 우리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라고 논박하였으며, 또한 눈과 같이 질서정연한 생명기관의 탄생을 진화론도 설명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질서정연한 생명이 진화론보다 창조설에 더 가깝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그럼에도 사태에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논증하였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밀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밀은 종교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논증을 통렬히 논박하였다. 밀은 자연법 사상의 모순을 증명하여 신정론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제1원인 논증을 비판하면서, 제1원인 논증의 공리인 인과율 공리가 단지 경험적 관찰의 결과이며 그마저도 제1원인의 존재를 연역하지는 않는다고 논박하였다. 그리고 신이 전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왜 전능한 신이 오직 정교한 우주의 질서나 생명구조를 통해서만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논박하여 신이 전능하다는 주장을 논박하였다. 그에게 신의 존재는 오로지 자연계에 있는 설계의 증거를 통해서만 지지되었으며, 만약 그가 지금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실용주의(pragmatism)

실용주의(pragmatism, 프래그머티즘)는 모든 주장과 가치를 그 유용성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는 철학적 사조로 19세기 미국에서 발생했다. 대표적인 실용주의의 창시자로는 듀이, 논리학자 찰스 퍼스(Charles S. Peirce), 그리고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있는데 퍼스는 처음으로 실용주의 사상에 그리스어에서 따온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퍼스가 처음으로 실용주의를 명명한 문헌에 따르면[각주:21] 모든 사고는 행동을 일으키는 토대로 기능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믿음(믿는 사실)을 세우는 이유는 이것이 행동에 근거를 부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확신 속에서 행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는 없고 다만 행동을 보조하는 역할로서의 가치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는 사고의 가치는 사고와 관련된 행동의 유용성으로 평가해야 하며, 모든 주장과 사유는 그것이 얼마나 유용한 행위를 초래하는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행렬역학/파동역학이나 공산주의/독재처럼 내용이 다르더라도 초래하는 결과가 같으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더 나아가 주장이 진리와 맞지 않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유용하다면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게 퍼스의 주장이었다.

 

 

피히테의 관념론

피히테는 대표적인 관념론 연구자 중 하나이다. 피히테는 노력(streben)의 개념을 통해 주관과 객관의 분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관념론은 인간의 이성(정신)과 감각(경험)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논쟁하였다. 피히테는 노력의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피히테는 인간 이성이 자연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을 이성에 따라 지배하면서 외부 세상은 이성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그 결과 이성과 감각이 일치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피히테는 인간이 이성에 기반하여 자연을 지배하려고 노력할 때 주관과 객관이 같아지고 지식 또한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22]

 

 

야스퍼스의 사상[각주:23]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종교성을 상당히 중시한 철학자였다. 그는 사상적으로 과학주의를 거부하였으며, 과학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려준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과학은 세상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데, 반면 종교를 통해 내려온 인간의 상징체계는 세상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고 야스퍼스는 주장하였다. 그러한 장치의 예시로 그는 비극을 들었는데, 그는 비극이 세상과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한 투쟁의 끝에서 좌절하면서(한계상황) 동시에 자신의 본성적(현존재) 모습을 통찰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비극은 세상과의 투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격렬한 부정적 정서를 동반해야 한다. 이러한 비극을 통해 우리는 한계상황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야스퍼스는 비극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통해 죽음이나 병과 같은 현존재적 파멸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야스퍼스는 이러한 한계상황에 이르고 통찰을 얻기 위한 철학적 명상을 제안하였다. 그가 제시한 철학적 명상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그리고 초월로서의 명상으로서, 시 및 예술과 자기반성의 결과를 바탕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이후 자신이 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고 야스퍼스는 주장하였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담론

외모지상주의(lookism, 외모차별주의)는 외모에 근거하여 특정인물을 차별하는 차별 관행을 말한다. lookism이라는 용어는 2000년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외모를 인종, 성별, 종교, 이념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차별요소라고 지적하면서 처음 제시하였다. 학자들은 이 같은 경향이 잘난 외모를 선호하는 사회 풍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0년 이후 루키즘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는데, 조사 결과 한국 여성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형수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이어트 열풍에 휩쓸려 무리하게 살을 빼다가 죽음에 이른 경우도 보고되고 있다.

 

widdows는[각주:24] 현재의 외모지상주의 관행을 everyday lookism이라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현재의 외모지상주의는 어떤 개인을 평가할때 외모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관행이며 젊음(youthfulness), 피부결(skin texture), 날씬함(slimness), 체모의 부재(absense of body hair), 피부탄력(frimness of flesh)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된다. 이러한 기준은 주로 여성에게 가해지나, 점점 남성도 그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mason[각주:25]은 이러한 관행은 특정 계층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모지상주의는 이로 인한 의료적 문제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만인이 자신을 가꾸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이는 개인의 건강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많은 매체에서 광고하고 과장하는 것과 달리 실제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외모지상주의 풍조는 과도한 성형수술과 섭식장애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특히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가 규범화되면서 거식 폭식장애의 발병률이 폭증하고 있다.

 

 

케런 바라드의 사상(baradian)

케런 바라드(karen barad)는 페미니스트로, 게이지 이론으로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후에는 페미니즘 이론에만 전념하고 있다. 본래 미 육군 산하 브룩헤이븐 연구소에서 일하는 물리학도였던 바라드는 게이지 이론에 기반한 두 편의 물리학 논문을 발표하였으나,[각주:26] 군사와 관련된 연구주제를 보고는 물리학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이후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특히 그는 자신만의 양자철학 이론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이론이 페미니즘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agentic realism을 담은 여러 논문과 저작[각주:27]을 발표하였고, 주요한 페미니스트 과학학자로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바라드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과학학자이며, 특히 그가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었다는 사실이 그의 주장에 전문성을 돋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자크 벤베니스트나 곤도 마코토, 맹성렬, 오흥국, 김효진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분야를 전공했다고 그 분야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 생활을 건성으로 한 수많은 물박사들이 있으며, 그들을 제외해도 학위 수준을 볼 때 어떻게 자기 분야에 대해 저렇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학위과정은 전문성을 쌓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한 개인의 핵심 신념을 바꾸기에는 미약하며, 동료평가는 헛소리가 출판되는 것은 막아도 그들의 비뚤린 신념까지 막지는 못한다. 사실 자신의 논문과 말이 다른 학자의 사례는 학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일상적으로 경험할 것이며, 때문에 과학을 전공한 사이비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라드는 과학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하고 그 대안이 양자역학과 자신의 agentic realism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28] 그러나 실제로 agentic realism이 양자역학에 반드시 수반되지는 않으며, 심지어 바라드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바라드의 agentic realism은 물리학계와 물리철학계에서 거론조차 되고 있지 않으며, 바라드 본인도 그러한 논문을 작성하여 물리학 저널에 발표한 적이 없다.[각주:29] 결론적으로 agentic realism은 양자역학의 적용이 아니라 바라드 개인의 생각이며, 그것도 실제 과학적 사실과 상당히 거리가 먼 이론이다. 따라서 그걸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페미들도 모조리 병신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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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박정자 '시선은 권력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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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상 Beiser. 계몽, 혁명, 낭만주의: 근대 독일 정치사상의 기원, 1790-1800. 심철민 역.도서출판 b,20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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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상 Beiser. 계몽, 혁명, 낭만주의: 근대 독일 정치사상의 기원, 1790-1800. 심철민 역.도서출판 b,2020,pp178-18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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